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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3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자메이카의 세계적 단거리 선수인 우사인 볼트 약 157억원 금융사기 당해
2021년 미국 하원 트럼프 대통령 내란선동 혐의로 두 번째 탄핵안 의결, 찬성 232 반대 197, 두 번이나 탄핵이 의결된 것은 미국 역사상 처음
2017년 시인 고은 로마재단 국제시인상 받음
2014년 이란과 P5+1(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과 독일) 제네바이행안 합의
2012년 '한국 사상 전도사' 세종대 필립 티에보 교수 별세
30년간 한국 사상을 연구해 프랑스에 전하며 현지에서 '한국 사상의 전도사'로 불렸던 필립 티에보(67) 세종대 국제대학원 아시아학과 초빙교수가 별세했다.
프랑스어권에 한국 사상을 소개하는 것을 평생 사명으로 여겼다
프랑스에서 대학 시절 역사·철학·신학을 공부한 그는 힌두교와 간디를 통해 동양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됐다. 친구로부터 한국이 아직도 강한 전통 유교 사상을 간직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한국 유학을 결심했다. 1982년 한국에 와 연세대 한국어학당을 다니며 한국어와 한문 공부에 몰두하는 한편 한국 철학을 연구했다. 1994년 성균관대에서 율곡 철학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다산 정약용의 일생을 다룬 한무숙의 소설 '만남'의 프랑스어 번역을 시작으로 한국 철학 프랑스 소개에 나섰다. 이어 다산의 주 저서인 목민심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했다. 번역 원고를 접한 프랑스 오트르탕 출판사는 "보석 같은 책"이라며 바로 출판을 결정했다고 한다. 2007년 출간되자 프랑스 일간지 라 크루아는 그를 '한국 사상의 전도사'로 소개했다. 2009년에는 율곡의 '성학집요'를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했고, 그해 율곡학회로부터 율곡대상을 받았다.
건국대·한양대 등을 거쳐 2007년부터 세종대 초빙교수로 재직했다. 캠퍼스 강의뿐 아니라 인터넷 강좌를 통해 전 세계 대학생을 상대로 사이버 강의도 했다.
하지만 지병인 파킨슨병에 폐렴까지 겹치면서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2012년 이탈리아 호화 유람선 코스타 콩코르디아호 좌초
2012년 1월13일(현지시각) 오후 8시 이탈리아 근해에서 승객과 승무원 4229명을 태운 유람선 코스타 콩코르디아호가 좌초돼 32명의 희생되고 4000여명이 목숨을 건졌다.
대다수 승객은 구명정을 이용하거나 헤엄쳐 사고 해역 인근에 있는 질리오 섬으로 대피했다. 이 선박에는 23명의 한국인 승객이 타고 있었지만 모두 안전하게 구조됐다.
지중해를 운항 중이던 코스타 콩크르디아호는 이탈리아 서해안 티레니아해 질리오 섬 인근 해상에서 암초와 충돌한 뒤 좌초됐다.
밑에서부터 물이 차기 시작하자 290m 길이의 크루즈선은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배를 포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구명조끼를 입은 승객들이 구명정을 타고 안전하게 대피했다. 몇몇 승객들은 바다로 바로 뛰어들기도 했다. 배에 갇혔던 50여명은 헬리콥터를 통해 구조됐다.
유람선 탑승자 가운데 승객은 3200여명이며, 선원은 1000여명이다. 승객 중 이탈리아인이 1000여명, 독일인 500여명, 프랑스인 160여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 유람선은 2006년에 건조된 선박으로 이탈리아 로마 인근 치비타베키아 항구를 출발해 사보나, 치비타베키아, 시칠리아, 사르데냐, 팔레르모, 칼리아리, 팔마, 바르셀로나를 거쳐 프랑스 마르세유로 가던 중이었다. 무게가 11만 4500t인 코스타 콩코르디아호는 스위트룸 58개, 레스토랑 5개, 각종 음료를 제공하는 바 13개, 온천탕 5개, 수영장 4개 등을 갖췄다.
'이탈리아판 세월호'로 불리는 코스타 콩코르디아호는 좌초한 뒤 2년 6개월 만인 2014년 7월 14일 인양되었다.
2011년 뉴욕 '실험극 대모' 엘렌 스튜어트 별세
스튜어트는 한국을 비롯해 제3세계 예술가들을 발굴해 뉴욕 무대에 올린 연극인이다. 한국과의 인연은 1962년 강월도가 쓴 '머리 사냥'을 시작으로 1960~80년대 유덕형의 '초분', 안민수의 '하멸태자', 오태석의 '춘풍의 처', 홍신자의 무용극 등 40편 가까이 이어졌다.
스튜어트는 1995년 오프브로드웨이 제작자로는 처음으로 브로드웨이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고, 한국의 동랑연극상을 비롯해 세계 각국의 문화상을 받았다.
라마마극장은 스튜어트가 인수한 지하 카페에서 시작됐다. 그는 가난한 연극인들을 위해 카페 한쪽을 헐어 작은 무대를 만들어줬고 '마마(Mama)'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9년 LG화학, GM에 전기차 배터리 독점공급
LG화학은 오는 2010년에 선보일 GM의 전기자동차 '시보레 볼트'에 장착되는 리튬이온 폴리머배터리의 공급업체로 단독 선정됐다.
2010년 하반기부터 2015년까지 6년간 GM에 전기자동차용 배터리를 독점 공급하기로 했다. GM이 이 기간 약 30만대의 전기자동차를 양산할 경우, LG화학은 2조원가량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전기자동차 개발은 GM·포드·도요타 등 세계적인 자동차회사들이 사활을 걸고 추진하고 있는 사업으로, 어느 배터리업체와 손을 잡느냐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LG화학은 이번에 일본·독일 등 12개 글로벌 배터리 경쟁업체와의 경합에서 독점 공급권을 따냈다는 점에서, 전기자동차용 배터리의 기술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평가된다.
LG화학이 GM에 공급하는 배터리는 크기 180㎝, 무게 180㎏, 전력량 16kWh의 중대형 리튬이온 폴리머 배터리이다. 배터리 형태가 둥근 '캔(can)'모형이 아닌 사각형 봉지 모양의 '파우치(pouch)' 타입이어서 폭발 위험이 적으며, 표면적이 넓어 열 발산이 쉽기 때문에 배터리 수명도 길다.
2006년 대원군 별장 63억, 유형문화재 26호 '석파정' 경매 통해 새 주인 맞아
2006년 1월 13일 구한말 대원군의 별장으로 사용됐던 종로구 부암동 석파정(石坡亭)이 법원 경매를 통해 새 주인을 맞았다. 이날 서울중앙지법에서 진행된 경매에서 서울의 원모씨가 감정가(75억4600만원)의 83.6%인 63억1000만원에 석파정을 낙찰 받았다. 경매에는 9명의 응찰자가 몰리면서 최저 매각가(48억2900만원)보다 14억원 가량 높은 가격에 낙찰됐다.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의 별장으로 쓰였던 석파정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6호로, 우거진 장송(長松)을 포함해 경관이 수려하다. 석파정은 소유자가 부채를 갚지 못해 2004년 12월 감정가 75억4600만원에 경매에 넘어갔지만, 2005년 11·12월 두 차례 유찰된 뒤 가격이 감정가의 64%인 48억2900만원까지 떨어졌다.
2004년 역사/ 조법종 우석대 교수, 태왕릉이 광개토대왕릉임을 확증하는 유물 발견
2004년 노무현대통령, '국가균형발전 3대특별법(지방분권 특별법, 국가균형발전특별법,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공포 서명식
2004년 산악인 박영석씨, 남극대륙 허큘리스해안을 출발해 도보 또는 스키를 신고 남극점 도달
2004년 한국정신대연구소, '일본군 위안부' 2명(곽영남78. 박차순80) 추가 확인
2004년 서울시, 3월부터 셋째 아이부터 보육비 전액 지원
2004년 북한에 거주해 온 일본 항공기 요도호 납치범 그룹의 자녀 6명이 일본 영구
2004년 화성 탐사 로봇 '스피릿', 물 존재 시사하는 광물 탄산염 발견
2004년 중앙선관위, 17대 총선에서 금품과 향응 받는 유권자에 대해 제공 금액의 50배에 해당하는 과태료 부과하고 명단 언론 공개 결정
2004년 우즈베케스탄 소속 Yak-40여객기 추락. 사망 37명
2004년 50년 전 사라진 국산 1호 비행기 '부활' 대구 대명동 경상공고 제도실 건물지하에서 발견
2002년 군번1번 예비역 대장 이형근씨 별세
초대 합동참모회의(현 합동참모본부) 의장을 지낸 이형근 예비역 육군대장이 2002년 1월 13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이 전 합동참모회의 의장은 군내 요직과 영국 등 10개국 대사를 지낸 대표적인 창군(創軍) 원로다. 부모의 허락 없이 19세의 나이로 일본 육사에 지원, 일본군 장교가 됐던 이 전 의장은 1946년 미 군정의 요청으로 국군의 모체인 국방경비대 창설에 참여했다. 26세의 나이로 군번 1번을 부여하겠다는 미 군정 요청에 대해 “선배들의 앞자리에 설 수 없다”며 완강하게 거절하다 맥아더 사령관의 전형 결과에 따른 것이라는 설득에 마지못해 수용한 일화는 유명하다.
6·25 전쟁 중 아내와 둘째 동생을 잃는 불행을 겪었으나 1·3군단장을 역임하며 ‘351고지 전투’ 등 격전지 전투를 지휘, 최고 훈장인 태극무공훈장과 미국 은성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전쟁 뒤엔 초대 합동참모회의 의장으로 합참 창설과 미군 손에 넘어가 있던 지휘권 환수에 기여했다.
1956년 9대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뒤엔 고질적인 인사 및 군납 비리 척결에 애쓰다 중상 모략에 시달렸다. 이로 인해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총장을 그만두고 주영 대사로 부임하라는 압력과 독촉에 시달리다 1958년 8월 육군 대장으로 예편했다. 5·16후 1961년부터 1967년까지 재향군인회장, 주필리핀·영국·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 등 10개국 대사를 지냈다.
2002년 중국, 반체제인사 왕처 석방, 국외 추방
2001년 엘살바도르 규모 7.6 강진으로 1700여명 사망·실종
중미 엘살바도르의 태평양 근해에서 2001년1월13일 낮 리히터 규모 7.6의 강진이 발생, 259명이 숨지고 1100여명이 실종됐다
이날 오전 11시 33분쯤 발생한 지진은 인근 온두라스·니카라과·코스타리카·멕시코 남부에서도 감지됐다. 엘살바도르 수도 산살바도르 서쪽 12㎞ 지점의 라스콜리나스에서는 산사태로 가옥 330여채가 매몰돼 1100여명이 실종됐다.
진앙지는 엘살바도르 산미겔시 남서쪽 110㎞ 지점의 태평양 해안. 지진은 약 30초간 중미 일대를 엄습했다. 중미 지역과 인접한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지역에서도 이날 리히터 규모 4.1~4.3의 지진이 발생했다.
프란시스코 플로렌스(Francisco Flores) 엘살바도르 대통령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제사회에 긴급지원을 요청했다. 엘살바도르는 지난 1986년 리히터 규모 7.5의 강진이 발생, 14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2000년 박태준 제32대 국무총리 취임
2000년 원로 연극인 강계식씨 별세
강계식는 무대를 집 삼아 60년 가까운 세월을 배우로 살았다. 만년엔 조역만을 맡다시피 했지만, 동네 노인역으로 무대를 잠깐 서성이는 것에 불과한 연기를 할 때도, 자신의 움직임이 어떤 모양새로 연극을 받쳐주는가를 고민했던 배우였다.
1980년대 초반 건강이 나빠지자 우황청심환을 입에 털어 넣으며 연극을 계속했다. 현대인들은 조연배우로 그를 기억하지만 1940~50년대 강계식은 숱한 작품의 주연으로 이름을 날렸다. 1940년대 유치진 작 ‘춘향전’ 에서 그의 이도령 연기는 유치진으로부터 “내 살아생전 본 춘향전 중 최고” 라는 칭찬을 얻었다.
충청도 양반의 기품이 몸에 밴 그는 장년 이후 ‘성웅 이순신’ 등 사극에서 양반 대감역을 주로 맡았다. 노년의 강계식은 연극, TV에서 인생을 관조하는 노련미의 인물, 인자하나 꼿꼿한 할아버지, 방황하는 지성인 등 다양한 얼굴을 보여줬다. ‘햄릿’ ‘맹진사댁 경사’ 등 그의 출연작은 일일이 꼽기조차 어렵다.
70세 이전까지 강계식에게는 단 한 개의 연극상도 주어지지 않았다. 70세 때 받은 동아연극상 특별공로상을 시발로, 1987년 백상연극상 특별상, 그리고 1992년 문화훈장 옥관장이 뒤늦게 그를 격려했다.
1994년 중동평화협정을 중재한 홀스트 노르웨이 외무장관 사망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간의 비밀협상을 중재, 1993년 9월 역사적인 평화협정 체결을 이루어낸 최대 공로자 중 한사람인 요한 외르겐 홀스트 노르웨이 외무장관(56)이 1994년 1월 13일 별세했다. 홀스트 장관은 1993년 12월 16일 스페인 방문을 마치고 귀국 도중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그동안 오슬로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다.
홀스트 장관은 미국 컬럼비아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으며 국방장관을 두차례 역임한 뒤 1993년 4월 토르발트 스톨텐베르크의 뒤를 이어 외무장관에 취임했다. 그는 외무장관 취임 후 자택을 이스라엘과 PLO간의 비공식 회담장으로 제공하기도 하는 등 양측의 초기협상 단계에서 최종 평화협정안 체결에 이르기까지 협상과정을 중재,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 받기도 했다
1993년 미국, 러시아 등 120여국, 파리서 화학무기금지협약(CWC) 조인
1993년 동독 국가원수 에리히 호네커 칠레 망명
1993년 미국 등 다국적 폭격기 이라크 남부 폭격
1992년 이스라엘이 요르단과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한 평화회담을 재개
1992년 전국 공항에서 국내선 항공기 탑승수속 시 주민등록증 제시 폐지
1991년 南阿共 오크니 축구장 집단싸움으로 최소한 40명 사망
1991년 일본의 가또 관방장관, 위안부 문제에 일본군 관여 처음으로 공식 인정
1991년 舊 소련군, 발트해 연안국에 진입, 155명 사상
1990년 윌더, 미국 역사상 첫번째 흑인 주지사로 취임
1990년 고르바초프, 소련에 다당제 도입 선언
1988년 장경국 타이완총통 사망
1987년 뉴욕 마피아 대부 7명에게 각각 징역 100년씩 선고
1986년 대입논술고사 첫 실시
1986년 남예멘, 쿠데타 음모 혐의로 이스마일 전 대통령 처형 발표
1985년 에티오피아 아와 시 부근에서 열차 탈선 추락으로 449명 사망
1984년 문교부, 로마자 표기를 25년 만에 정자법에서 표음주의표기법으로 통일
1983년 동아건설, 원효대교 서울시에 헌납
1982년 미국 여객기 워싱턴포토맥강에 추락, 대참사
1981년 소설가 월탄 박종화 별세
1978년 미국의 제38대 부통령(1965-69) 험프리 사망
1971년 대구고등법원 판사들 자체정화운동
1971년 이집트 나일강의 아스완 하이댐 완공 (로크필드식 댐으로 높이 110m, 둑길이 3,600m, 저수량 1,570억㎥, 출력 210만KW)
1969년 서독특별사절단 내한. 동백림 사건을 둘러싼 양국관계 협의
1969년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 설립
이병철(1910~1987)은 해방 후 40여 년 동안 한국 최고의 부를 쌓아 거대한 삼성그룹을 형성한 ‘재벌’의 대명사였다. 이병철은 경남 의령에서 태어나 경남 진주의 보통학교와 서울의 중동고, 일본의 와세다대를 모두 중퇴해 졸업장이 없다. 1938년 3월 1일 대구에서 과일과 건어물을 취급하는 삼성상회를 설립해 사업에 투신한 것이 오늘날 삼성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이병철은 1948년 서울에 삼성물산공사를 세워 기반을 닦고, 6·25전쟁이 막 끝난 1953년 8월 피란지 부산에 설립한 제일제당을 성공시켜 2년 만에 ‘거부’ 소리를 들었다. 1954년 9월에는 제일모직을 설립해 상업자본을 산업자본화하는 데 성공했으며 1969년 1월에는 삼성그룹의 오늘을 있게 한 삼성전자를 설립했다. 삼성전자는 당시 가전업계 최강자 금성사와 경쟁하면서 한국 전자산업의 발전을 견인했다. 1983년에는 반도체 VLSI(초대규모 집적회로) 진출을 결정, 삼성전자가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했다.
이병철의 경영이념은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로 요약된다. 특히 “기업의 존립기반은 국가이며 기업은 국가 발전에 공헌해야 한다”는 사업보국을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기업이 적자를 낸다는 것은 사회악이고 부실기업인은 죄인이었다. 그가 손을 댄 것은 최고가 되어야 하고 그의 손을 거친 물건은 반드시 믿음을 주어야 한다는 제일주의 추구도 사업보국의 연장선에 있었다.
1967년 토고 군부 무혈쿠데타, 육군참모총장 정권 장악
1967년 내무부 새 국토면적 발표 (총 22만 837.451㎢로 종전비 46.45㎢ 증가)
1967년 인류기원을 250만년으로 소급하는 고고학 발견이 하버드대학에 의해 공개
1964년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씨 별세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역임한 가인 김병로 선생이 1964년 1월 13일 숙환인 간장염으로 사망했다. 향년 78세였다. 1887년 전북 순창에서 출생해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최익현이 이끄는 의병에 가담, 70여명의 의병과 함께 순창읍 일인보좌청을 습격하는 등 항일투쟁에 몸을 던졌다.
민족이 살 길은 신학문을 통한 `민족자강`뿐이라는 신념으로 1910년 3월에 도일, 일본 메이지(明治)대를 거쳐 14년 일본 중앙대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귀국했다. 경성법전과 보성전문에서 형법 소송법 등을 강의하던 그는 1919년 부산지법 판사로 취임하지만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재판을 거부, 1년도 못돼 사임했다. `민족변호사`로서의 그의 활동은 이듬해 경성지법 소속 변호사로 개업하면서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후 광복때까지 무료변론만 무려 1백여건이었다.
가인은 미 군정청과 남조선과도정부의 사법부장을 거쳐 1948년 초대 대법원장에 피임됐다. 이후 그는 반독재와 민권보호,사법권 독립 등 소신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1957년 12월 `법조인의 사표`라는 찬사속에 대법원장을 정년퇴임했다.
1964년 제3공화국 대법원장에 조진만씨 선출
1963년 토고 군사쿠데타, 올림피오대통령 피살
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발표
1962년 미국, 쿠바가 소련과 단교하지 않으면 국교와 통상을 단절하도록 중남미 제국에 제안 각서
1962년 문맹퇴치운동 실시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있은 문맹 교육 봉사단 결단식 있었다. 결단식에는 대한기독청소년 문맹퇴치반원 5백명등 천여명이 참가했다. 문맹퇴치반원들은 10만명 정도로 예상되는 서울시내 문맹자들을 4월까지 개화시킬 것을 결의했다. 이후 이들은 서울 시내 전지역에 파견돼 문맹자를 대상으로 강습회를 연다. 61년 12월부터 국민의 문화생활 향상을 목표로 전국적으로 일기 시작한 문맹퇴치운동! 62년 당시 전국의 문맹자 수는 3백만명으로 추산됐다.
1960년 내무부 주최로 비무장지대 대성동에 건립한 자유의 집 준공식 및 이양식 거행
1958년 세계저명과학자들 핵실험 정지 청원서를 유엔에 제출
1958년 진보당 사건
조봉암을 비롯한 진보당의 전 간부가 북한 간첩과 내통하고 북한의 통일방안을 주장했다는 혐의로 1958년 1월 13일 구속 기소됐다. 1956년 5.15 선거에서 대통령후보로 출마한 조봉암이 비록 2위로 낙선은 했지만,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이승만과 자유당이 그를 제거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검찰은 진보당 간부들이 박정호 등 14명의 간첩단과 접선한 혐의가 있을 뿐 아니라, 진보당의 평화통일 주장이 북한의 주장과 같아 그들과 내통한 혐의가 짙다는 이유로 전간부를 검거, 송치했다. 조봉암은 1심은 간첩혐의 무죄로 징역 5년을 선고 받았으나, 2심과 1959년 2월 27일 대법원 확정판결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대법원은 7월 30일 조봉암이 낸 재심을 기각하고, 다음 날인 7월 31일 사형을 집행하였다.
이 사건을 전기로 혁신정당의 활동이 크게 위축됐다. 조봉암은 일제시대 조선공산당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었으나, 전향해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역임했고 대통령선거에도 출마한 거물 정치인이었다.
2010년 10월 29일 조봉암 전 진보당 당수 유족들의 신청으로 대법원은 전원합의채를 통해 "피고인(조봉암)의 혐의는 군부대에 간첩으로 잠복하거나 군에서 간첩으로 행동한 것이 아니므로 국방경비법의 적용 대상이 되지 않고, 군인이나 군속이 아닌 일반인은 육군 특무부대가 수사할 권한이 없다"고 밝히며 재심개시 결정을 내렸다. 11월 18일 대법원 대법정에서 재심이 열렸다.
1957년 유도회(儒道會) 분규 격화
5백년 전통을 지켜온 전국 70만 유림의 중심체인 유도회(儒道會)가 1956년 대통령선거를 전후해 분규에 휩싸였다. 1956년 5·15 대통령선거 때 자유당 선거운동을 공공연히 벌였던 유도회 비주류파는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1957년 1월 13일 농업은행 3층에서 유도회 전국대회를 개최, 김창숙 위원장을 비롯한 정통파를 축출했다.
김창숙 위원장도 이에 맞서 전국대회를 동시에 소집하려 했으나 집회허가를 얻지 못했다. 급기야는 유도회 사무실 점거를 둘러싼 정통파와 비정통파간의 몸싸움으로 김창숙 위원장이 부상당해 병원에 입원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정통파는 5월 17일 서울지법에 가처분 소송을 제기, 최찬익과 이범승을 유도회 집행부 대리인으로 지명, 7월 10일 유도회 전국대회를 소집했으나 이들 법정대리인들조차 오히려 자파세력을 규합하여 김창숙 위원장에게 도의적 책임을 물어 다시 축출키로 결의했다. 그리고 새 위원장에 구자혁, 부위원회장에 이범승, 성균관장에 최찬익을 선출했다.
김창숙파는 그 후에도 두차례나 법적으로는 승소했으나 관권의 비호를 받는 유도회 집행부에 대항하지 못하다가 4·19혁명 이후 다시 집행부를 장악할 수 있었다.
1957년 유엔총회에서 통일한국 미국 결의안 가결
1957년 영국 맥밀런 내각 성립
1950년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자유중국 제명의 소련안 부결
1949년 이승만 대통령, 고철 해외 반출금지령 하달
1949년 영국 대한민국을 한반도내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
1941년 ‘율리시즈’의 작가, 아일랜드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 사망
1882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조이스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예비학교에서 수학했으나 타고난 언어 감각으로 문학을 평생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문학적 경력은 1900년 4월 그가 나름의 미학이론으로 입센을 해석한 ‘입센의 새로운 드라마’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본격화됐다. 조이스의 첫 소설인 ‘더블린 사람들’은 1904년 더블린의 한 신문에 연재됐으나, 작품의 외설성과 더블린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 영국 왕을 모욕하는 듯한 내용 등으로 책을 출판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출판사가 없어 그는 8년 안이나 책 출간을 위해 안간힘을 써야했다. 결국 1912년 책 출간을 포기하고 아일랜드를 등진 그는 죽을 때까지 평생 조국을 찾지 않았다.
1916년 뉴욕에서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출판되고 1918년부터 미국의 한 잡지에 ‘율리시즈’가 연재되기 시작했다. ‘율리시즈’는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미국에서 한 동안 연재와 출판을 금지당하는 바람에 1922년 파리에서 초판을 출판했다. 그가 당시 세계문학의 수도였던 파리로 이주한 것은 1920년이었다. 그의 천재성을 높이 평가한 미국 시인 에즈라 파운드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세계 문학의 큰 별로 군림하던 그가 파리를 떠난 것은 파리가 2차대전으로 독일에 함락된 1940년이었다. 가족과 함께 스위스로 이주했으나 결국 이날 사망했다.
1938년 장편만화영화 `백설공주` 첫방영
1935년 프랑스 자르 지방 주민투표로 독일 귀속 결정
1933년 혹한으로 평북 중강진 -44℃를 기록하다.
1930년 영국의 전기공학자 페란티 사망
1929년 원산 부두노동자 총파업
1926년 영국과 이라크 우호조약 성립
1916년 멕시코 대통령을 지낸 독재자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사망
1915년 이탈리아 아베자노 대지진으로 3만명 사망
1910년 대한협회 등에서 국민대회연설회 개최, 합방반대 재천명
1908년 청나라,영국,독일,프랑스로부터 진포철도 차관 도입
1906년 에콰도르와 콜럼비아 해안에서 진도 8.8 지진 발생
1903년 최초의 한인 이민선 `갤릭호` 하와이 호놀룰루 도착, 한인 미주이민 시작
최초의 한인 이민선 `갤릭(Gaelic)호`가 102명의 한인 이민들을 태우고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이로써 미주를 향한 한인 이민이 시작됐다.
일본의 제지로 이민이 중단된 1905년까지 총 7,226명의 한인들이 하와이로 갔고, 그 사이 이민선 132편이 태평양을 오갔다. 하와이 이민의 배경은 조선 왕조 말기의 혼란과, 1901년 함경도 지역을 휩쓴 가뭄과 홍수였다. 많은 사람들이 식량과 일거리를 찾아 멀리 시베리아나 만주로, 또는 서울 인천 원산 등 대도시로 이주했다. 마침 1830년대부터 노동집약적 사탕수수 농업을 시작한 하와이에서도 이 무렵 값싼 노동력이 필요해졌다.
이미 받아들인 중국인·일본인 노동자들의 규모가 커지고 노동쟁의가 발생하자, 그 해결책으로 한국·필리핀·포르투갈에서 노동자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 전에도 일본인을 통해 하와이로 팔려간 한인들이 일부 있었지만 갤릭호의 하와이 이민을 첫 이민으로 간주하는 것은, 대한제국이 ‘수민원(綬民院)’이란 담당기관을 설립해 처음 추진한 공식 인력송출이기 때문이다.
121명의 이민자가 제물포항을 출항한 것은 3주 전인 1902년 12월 22일이었다. 출항할 때 탄 배는 일본 오사카 상선 '겐카이호'였으며, 일본 고베에 도착하여 신체검사를 받아 이민자들 가운데 20명이 탈락하고 배도 캘릭호로 갈아탔다. 호놀룰루에 도착해서도 신체검사를 받아 부적격 판정을 받은 15명이 제물포항으로 되돌아가 남자 48명, 여자 16명, 어린이 28명 등 86명만이 하와이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당시 3년간 일하는 조건으로 하루 품삯은 50~80센트(쌀 10kg이 1달러)였지만 노동 강도가 심해서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초기 이민자 중 84%가 20대 남자였고, 이들의 결혼 문제가 큰 현안이었다. 결국 사진 교환을 통해 결혼하는 ‘사진 신부’들이 1910년부터 하와이로 이민가게 된다. 1924년 미국 이민법에 의해 모든 형태의 한인 이민이 금지되기까지 총 1000명의 신부들이 하와이로 떠났다.
이들 첫 이민자들 가운데 생존자들을 대상으로 1978년에 실시된 조사에서 파악된 이민 동기(動機)들은 참으로 다양했다. 하와이에 가면 빗자루로 땅을 쓸기만 해도 돈이 생긴다기에 그 돈으로 친정 식구들을 살리려고, 서자라고 설움받아서, 예수쟁이라고 놀림받는 것이 싫어서, 남자들 횡포 때문에, 시부모를 안 모실 것 같아서, 일본인의 압박을 참을 수 없어서, 자손들을 좋은 나라에서 훌륭하게 교육시키고 싶어서 등으로 다양했다. 이렇게 시작된 한인의 미주이민이 2003년을 기해 100주년을 맞았다.
1898년 드레퓌스의 무죄를 주장하는 에밀 졸라의 기고문 `나는 고발한다...`가 신문 `여명`에 게재
파리의 `여명`이라는 조간신문 1면에 1898년 1월 13일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는 6단짜리 기고문이 실려, 잊혀져 가던 `드레퓌스 사건`이 다시 세인의 관심속으로 등장했다. 드레퓌스 사건은 1894년 10월 드레퓌스 대위가 프랑스의 군 기밀문서를 독일대사관에 제공했다며 대독 간첩혐의로 체포되 프랑스 전역을 들끓게 했던 진실을 향한 투쟁의 기록이다. 드레퓌스 대위는 이후 종신형을 선고받은 뒤 무죄를 주장하는 상황에서 남미 기아나 군도의 `암사`섬에 종신수로 추방됐다.
당시 작품활동에 몰두하던 졸라는 상징주의 시인 베르나르 라자르의 방문을 받고 여러사람을 접촉한 결과,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신하게 됐다. 드레퓌스 대위가 수감 중일 때 진짜 범인이 밝혀졌으나 군부가 은폐하려 한 것이다. 졸라는 1898년 1월 12일 재판에서 범인인 에스테라지에게 각본대로 무죄판결이 내려지자 분격, 조르쥬 클레망소(후에 총리가 됨)가 편집국장으로 있던 `여명` 13일자에 육필원고 39장에 이르는 `펠릭스 포르 공화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게재한 것이다.
결국 필화를 자초한 셈인 졸라는 그해 2월 추방령을 선고받고 1년 동안 런던에서 유배생활을 한 끝에 1902년 프랑스에서 의문사했다. 드레퓌스는 이후 석방돼 1906년 프랑스 최고재판소로부터 무죄를 인정받았다.
1888년 미국지리학회 창립
1879년 독립운동가 신규식 출생
1874년 러시아 군제개혁 후 징병제 실시
1864년 미국 작곡가 포스터 사망
`오, 수잔나` `켄터키 옛집` `스와니강` 등 우리에게 친숙한 많은 노래를 작곡한 `미국 민요의 아버지` 스티븐 콜린스 포스터가 1864년 1월 13일, 38세로 뉴욕에서 사망했다. 흑인들의 애환이 짙게 배어있는 그의 노래들이 남부 백인들로부터 기피당하고, 결혼생활의 파탄까지 겹쳐 그는 생전에 가난과 고독에 시달려야 했다.
소년 시절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여 14살 때 처녀작 `티오가 왈츠`를 작곡했다. 음악교사 쿠퍼의 영향을 받아 1841년부터 가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1848년 `오 수재너`가 100달러에 팔린 것에 자신을 얻어 그때부터 본격적인 가곡 작곡가의 길을 택했다. 풍부한 시정을 짙은 애수에 담아 단순하고 명료한 아름다움으로 승화됐다는 평을 받고 있는 그의 노래들은 전세계에서 가장 널리 불려지고 있다.
사후 2개월 만에 펴낸 유작 `꿈꾸는 가인(佳人)`에는 모두 188곡의 작품이 실려있다. 1939년에 포스터의 삶을 소재로 한 전기영화 `그리운 스와니`가 제작되기도 했다
1858년 루스벨트 미대통령 태어남
1836년 한국 최초의 서양 선교사 모방 신부 입국
1627년 후금, 3만명의 병력으로 조선 침입 (정묘호란)
1599년 영국의 시인왕 에드먼드 스펜서 사망 (1552/3 출생)
1572년 이퇴계 사망
1559년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1세 즉위
1011년 거란군 내습으로 나주로 파천 (고려 현종 2)
785년 신라, 선덕왕 사망, 원성왕 즉위
771년(신라 혜공왕 7) 경주 성덕대왕 봉덕사 신종(에밀레종 국보 제29호 높이 3.78m 입지름 2.27m 두께 0.24m) 완성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 명복 빌고자 만들려던 것을 아들인 혜공왕이 구리 12만근(72t) 들여 30년 만에 완성.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종. 독일학자는 이 종 하나만으로도 박물관이 될 만하다고 평가. 에밀레종이라 부르는 건 종을 만들 때 어린아이를 넣어서 종소리가 ‘에밀레’하고 엄마를 부르는 것 같다는 전설 때문
759년 중국 당나라 시인*화가 왕유[(王維)(병)Wang Wei (웨)Wang Wei.]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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