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초에 느닷없이 코리안 심포니 연주회에 초대를 받았다.
"언니 예술의 전당에서 음악회가 있는데 클래식이더라."
작년 내내 명희와 S선생님 초대로 맛있는걸 먹기만 해서 신년에는 B선생님까지 함께 모시고 식사라도 하자고 생각하던 차였다.
브런치 까지 포함된 음악회라 10시쯤 만나자고 하기에 서둘러 아침 차를 타고 나갔다. 겨울날 아침 클래식 연주를 듣겠다고 나선 발걸음을 세면서 새삼스럽게 내 나이를 돌아 본다.
꿈 많던 처녀시절 밤마다 이브닝 드레스를 입고 음악회를 데리고 가 줄 것 같았던 남편을 믿고 시집을 왔지만 그는 언제나 남자들끼리의 문화에만 시간을 쏟아 부었다.
어쩌다 공연장 운영 책임을 맡은 친구로 부터 일 년치 공연권 선물을 받아도 그는 언제나 자신의 취미에만 열중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어린 남매를 파트너로 삼아 무용 공연은 딸과 함께 음악회는 아들을 데리고 1회도 놓치지 않고 다 보았던 기억이 있다.
훗날 고등학생이 된 아들에게서
" 어머니 저 초등학교 때 리틀 엔젤스 공연장 말이예요. 사실은 무용을 하는 날에도 저하고 가자고 할까봐 걱정했어요."
어린 초등학생에게 나비 넥타이 정장을 시키고 억지로 신사가 되라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차이코프스키나 쇼팽까지 듣자고 했으니 당시에 아이의 고역이 짐작이 간다.
낯익은 예술의 전당 본관 건물과 주차장이 보이고 만 차가 되면 건물 뒤 숲 쪽으로 난 뒷 길에 몰래 자동차를 숨겨 놓았던 곳도 그대로이다.
10시 30분부터 따뜻하게 준비 된 브런치가 나오고 많은 사람들 틈에서 명희를 찾기가 어려웠다. 어찌어찌 연주장으로 들어가 만난 명희는 첫 곡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첫 번째 곡은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F 단조. 피아노에 심 희정씨와 지휘자 김 봉 선생의 호홉이 물 흐르듯 아름답게 펼친다. 독일 유학에서 최고 연주자 과정 이수한 사람답게 완벽에 가까운 연주였다.
두번째 곡은 베버의 크라리넷을 위한 콘체르티노 E장조. 말하자면 협주곡인데
1. 콘체르트- 협주곡( 오케스트라와 협주)
2. 콘체르티노- 작은 협주곡( 악장이 짧다.)
3. 콘체르탄테- 협주곡과 교향곡이 섞임 (주제를 심포니와 주고 받으며 연주)
유정아씨와 함께 해설을 맡은 첼리스트 송 연훈씨의 줄리아드 입학시험 문제였다고 해서 모두 웃었다.
세 번째 곡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 는 너무나 유명한 곡이다. 1888년 당시 러시아에서는 전문적인 음악가 이 외에 민속적 가락을 잃지 않으려는 아마추어 작곡자들이 많았는데, 대부분 의사나 군인 장교들로서 개인적 취향대로 자유로운 곡을 만들었다고 한다. 부드럽고 유연한 비단 천을 연상케 하는 느낌과 천일 야화를 주제로 술탄 왕에게 밤을 새워 이야기를 하며 목숨을 연장하던 세헤라자드가 마침내 왕비가 된 사연을 아름답게 표현 한 곡이다.
45세 때인 림스키가 "스페인 카프리치오"로 성공을 하고 이듬해 다시 "러시아 부활제" 의 서곡과 함께 작곡한 모음곡이다.
문학이 음악에게 준 동기 부여 " 아라비안나이트" 라는 이야기가 없었다면 이 "세헤라자드"모음곡도 태어나지 못했으리라. 다시 한 번 러시아 민족의 예술성과 아마추어 음악가들의 자유로운 작곡 형식이 부러웠다.
갑자기 화면 가득이 김연아의 모습과 링 위에 흐르는 세헤라자드의 멜로디는 잊지 못할 영상이었고 이 곡을 주제로 선정하고 안무를 준비한 김연아의 코치에게 박수를 보낸다.
네번째 곡 생상스의 교향시 "죽음의 무도" 는 1874년 프랑스의 시인 앙리 카잘리스의 기괴한 시를 인용하여 작곡. 할로우인 그리스도교의 성령 제 전날 밤 자정에 교회의 종소리가 끝나자 어두운 무덤에서 죽음의 신이 나타나 바이올린을 연주 하면서 무덤을 두들긴다. 그러자 많은 해골들이 나와 춤을 추기 시작 하는데 고요한 밤 공기가 해골들의 춤 때문에 이상한 분위기로 조성 된다. 특히 춤을 추는 해골과 뼈들의 부딪힘을 표현한 실로폰의 맑고 높은 음이 환상적으로 아름답다. 춤이 크라이막스에 이르자 " 진노의 날" 이라는 중세기의 아리아 선율을 타고 왈츠가 나타난다. 이윽고 새벽을 알리는 닭의 울음 소리에 해골들은 춤을 멈추고 무덤으로 돌아간다.
곡의 주제야 기괴한 시인의 환상에 의지 하지만 생상스의 음악적인 기교와 가락은 너무도 황홀하여 실로폰 연주자에게 마음껏 박수를 보낸다.
다섯 번 째 곡 챠이코프스키의 "1812 " 승리의 서곡.
1812년 나폴레옹의 60만 군대가 모스크바로 침공. 당시 나폴레옹은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려고 서둘렀지만 러시아 사람들은 모스크바 시를 불태워 버렸다. 나폴레옹 군대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쫒겨 3만 대군만 살아서 파리로 패주 하였다. 러시아는 이 같은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모스크바 중심에 큰 교회를 세우는데 차이코프스키는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1812 서곡을 작곡하였다. 이 작품이 초연 되었을 때 교회 광장에서 대편성의 오케스트라가 동원 되었고 도중에 큰 북이 나오는 곳에서는 실제로 포병대의 축포를 쏘았다고 한다. 이 곡은 표제 음악과 같은 장엄한 서곡인데 여기에는 프랑스의 군대와 크레믈린을 암시하는 징소리 등이 교묘하게 사용되고 있다. 나폴레옹 군대를 상징하는 프랑스 국가 " 마르세이유 노래 " 가 단편적으로 나타 나며 러시아 국민의 환희를 암시하는 민요풍의 무곡 멜로디 등이 펼쳐진다. 마지막에 러시아 국가에 뒤섞여 축하의 종소리가 나오는 비할 데 없는 승리의 기쁨이 넘치는 음악이다.
전체 연주곡이 모두 끝나고 지휘자와 코리안 심포니 단원들의 인사가 있었지만 객석의 박수 소리는 끝나지 않았다. 앵콜 을 외치는 관중들의 요구로 퇴장 했던 지휘자가 다시 무대로 나온다.
멋진 바이올린 수석 주자와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드디어 앵콜로 트로츠키 행진곡이 울려 퍼진다.
짠짜라 짠짜라 짠자라 짠자라 ~ 짠 짠 짠~
언제 들어도 유쾌한 행진곡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두 번째 앵콜 곡으로는 "헝가리 무곡" 이 나왔으면 했지만 산뜻한 지휘자의 인사로 음악회는 모두 끝났다. 크림톤의 밝은 대리석 계단을 내려오며
" 가끔씩 세상살이에 더럽혀진 귀를 씻으러 와야 한다."
던 후배 생각이 나고 주변에 누구라도 음악회가 생기면 이렇게 초대를 해주는 마음들이 고맙고 호두파이와 계란 카스테라가 나왔던 런치도 감사하였다.
소설을 써 보려고 애를 쓰다가 쓰다가 포기. 국문과 교수가 되어 버린 K 의 올드 팻션을 바라보며 그녀의 무신경한 옷차림에 반감이 생긴다. 적어도 음악회라면 자기가 가진 옷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라는 것이 긴 연습을 통해 곡을 올리는 연주자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 해 본다. 대체로 글을 쓰는 사람들은 무슨 뱃짱으로 세상의 모든 형식을 무시 하고 바라 보는 사람의 시선에 대한 배려가 없을까? 그러나 이변이 없는 한 남은 시간을 풋풋한 대학생들과 마주 할 그녀의 직업이 부러웠다.
주차장에서 각자의 자동차에 분승한 우리는 다시 성곡 미술관으로 달린다. 외국 유명 사진 작가들의 그룹 전시회가 있다고.
시내 관통을 피하려고 일부러 외곽 도로를 돌아 마포와 신촌 근처를 한참이나 헤메다가 "경희궁의 아침" 이라는 오피스텔 까지 왔다. 간신히 미술관을 찾으니 뜰에 서 있는 어린 소나무의 푸른 빛이 우리를 맞는다.
본관 계단을 시작으로 사진 작품을 보는데 가히 국제적인 주제와 피사체들이었다. 서로들 말없이 작품에 몰입 하면서 어느새 뜨겁고 뭉클한 것이 올라온다.
빈민가로 전락한 낡은 아파트와 군데군데 구멍 뚫린 행주를 작품화 시켜서 대각선으로 달아 놓은 전시관. 역시 그 낡은 아파트에 거주민 인 듯 흑인과 동양인의 인물 사진들. 그들의 눈빛은 모두 불안에 가득 차 있었다. 알 수 없는 미래와 거대한 우주에 버려진 인간군상의 표정들이라고나 할까 그들에게 미래란 사전에만 있는 활자체일 뿐이다.
마지막 하얀 백발의 흑인 노인의 표정에서 달관의 경지를 맛보게 된다. 굶주림과 목마름을 모두 건너 온 승리자의 만족한 미소가.
천 길 낭떠러지에 정장을 하고 걸터앉은 남자의 합성 사진 "위험한 산책" 은 그런 산에 도로를 낸 인간의 오만을 패러디 한 것 같았다. 하기야 피사의 탑과 스페인의 가우디 성당 앞에서 야훼를 떠올리게 됨이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의 영광이 누구를 위한 것일까 싶기도 하다.
꽃과 길과 사람이 있는 풍경을 연작으로 만든 대형 작품 에서는 인간도 하나의 자연물임을 느끼게 한다. 영상실 에서는 계속 해서 고생대의 공룡들이 크악 거리다가 갑자기 마리린몬로가 웃고 있다. 이 그룹의 사진가들은 아주 작정하고 관객들을 웃기기로 정한 모양이다.
다시 뜰을 지나서 별관으로 가니 대형 사진이 걸려 있는데 1층 전시관을 다 돌아도 아무런 감동이 없었다. 2층 계단을 올라 설 때도 몰랐는데 완전한 2층 베란다 나가 보니 비로소 1층 작품들이 살아서 움직인다. 역시 인물화들이지만 본관의 느낌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설치 미술의 마력이라고 할 수 밖에는. 어째서 같은 사진의 느낌이 정면과 측면과 상 하 면이 모두 다른지, 어쩌면 이들은 관객인 우리들 스스로의 렌즈를 시험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까지 당신들의 렌즈에 비친 사물과 판단들이 모두 옳았다고 생각하시나요? 결국 이 애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참으로 웃기는 작가들이 아닐 수 없다. 몇 장의 사진을 걸어 놓고 관객들의 동선을 바꾸어 가면서 철학적인 명상을 일으키게 하다니.
말없이 성곡 미술관을 떠나며 돌아 보고 또 돌아 보았다. 재작년이던가 배 병우씨의 안개 사진이 소더비에서 몇천만 불에 팔린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일생 동안 멸시와 천대를 이기고 물랑루즈의 포스타만 그리다 죽어 간 뚤루즈 로드렉의 생애와 천재들의 예술성이 범인들의 인식에 다다르기 까지의 긴 시간이 별빛처럼 아른 거린다.
삼청동 근처에서 이른 저녁을 먹으며 하루에 두 번씩이나 문화적 충격을 준비한 명희에게 인사를 하고 A선생이 손수 만들어 온 액체 비누를 선물로 받았다.
인체에 무해한 밀 찌꺼기와 효소로 만들었다며 연신 스프레이로 머리 밑에 칙칙 뿌려 준다. 뱃속에 꼬불꼬불한 내장이 포만감으로 늘어질 때 쯤 맛있는 수다와 디저트까지 풀코스를 끝낸 우리들은 다음에는 인사동 꼬막 집 밥을 먹자고 약속하며 일어섰다.
신년에 하루가 오늘처럼 행복했으니 올해는 일 년 내내 행복한 일만 줄을 이을 것이다.
첫댓글 멋진 가을을 보내십니다.
음악과 미술이 함께 하는 가을~~
지난 여름에 들렸던 성곡미술관은 분위기가 좋죠. 야외에서 미술품을 감상하며 마시는 한잔의 커피도 일품이더군요.
^^*
@러시아황녀 년초에 있었던 일들이었군요. 글이 길어 읽다보니 앞부분은 까먹었다는....-_-;
@낭만퍼그 정서적인 기억은 시간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녀님, 반갑습니다*^^*
년초에 우아하고 멋진 하루를 보내셨군요.
요즘 분위기에도 딱 맞는 음악회와 전시회에요.
예술의전당에서 요즘은 뭘할까 찾아 봤어요.
'차이코프스키 협주곡과 함께하는 로맨틱 콘서트'랑 한참전부터 망설이는
'페도세예프와 모스크바방송교향악단'의 연주가 11월에 있네요..
함 다녀오면 올 가을을 뿌듯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음만일지..
저두 올 여름 어느분 전시에 초대 받아 성곡미술관을 갔었어요.
미술관 뒷편 정원의 분위기도 얼마나 좋던지, 나라는 사람도 다른세계에
속한것 같은 좋은 느낌의 시간을 보냈었습니다.
님의 자세한 설명으로 도슨트와 함께하는 음악회와 전시를 함께한것 같습니다.^^
국립박물관에서 청자전시회가 있다는데{삼성의 리움. 오사카 박물관 소장품들 까지 나들이를 함) 시간을 못내고 묵은 글을 들치다가 한 편 올렸습니다.
바람꽃님도 좋은 시간 보내고 계시지요.^^*
넉넉하고 우아한 여유가 부럽습니다.
감사합니다^^*
제 딸이 음악을 합니다.
우아하게 즐기시는 모습을 읽으면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네요. 행복한 첫날이었군요. 무엇을 하든 그 때 그 순간은 참 소중하고 귀한 것 같습니다. 좋은 추억 나누어 주셔서 제 마음까지 여유로워 집니다.
따님이 음악을 전공 했다면 어머니는 부전공자의 실력을 갖추셨겠군요. 아니 어쩌면 어머니가 전공자라서 따님도... 아묻튼 집안에 흐르는 음악적인 분위가 느껴집니다. 좋았던 시간은 언제나 가슴속에 남아 있지요 ^^*
매력적인글잘읽었습니다 글만읽어도 현장의느낌이 느께지네요^^~♡
감사합니다.여행을 다녀오느라 이제사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