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자녀에게 부모가 가지는 의미
조금있으면 민족의 명절이라는 추석이 다가온다. 다른 사람들은 추석이나 설날 기타등등 명절이 다가오면 고향을 찾아 내려가지만, 나는 아직도 철이 덜들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아직도 부모님을 용서하지 못했는지 고향을 찾는다는지 그런 애착심은 특히나 없다. 부모를 용서하니 어쩌니, 아직도 유교성향이 강한 대한민국에서 이런 발언은 용서받지 못하겠지만 나는 아직도 3년만 더 지나면 30인 이 나이에도 우리 부모님을 용서하지 못하겠다. 솔직히 이야기 하면 애착도 없다. 오늘은 내가 세상을 살면서 봐왔던 부모와, 내가 겪어본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내 부모님은 폭력형 부모.
우리집은 형제가 많았다. 2남 4녀. 딸 넷이 연년생으로 줄줄히 있고, 거기다가 아버지가 장남이라 아들을 낳으라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압박에 끄트머리에 겨우 아들둘을 두었다. 우리 부모님은 솔직히 이야기하면 폭력형 부모였다.
내가 우리 부모에게 많이 느꼇던 분노심과 차마 뭐라고 말할수 없는 서운한 감정은 내 성장시절 많이 느꼇던거 같다. 우리 엄마아빠는 앞에도 이야기 했지만, 장남 장녀가 잘되야지 집안이 잘된다고 주장하는 장남, 장녀의 혜택을 모두 받고 자란 장남, 장녀가 모여 만든 가정이었다. 본인들 스스로도 많은 혜택들을 받고 자랐지만 본인들의 가정을 제대로 챙기지도 못한 실패한 장남 장녀였다. 본인들의 혜택들이 전혀 소용없고 혜택을 몰아줘도 실패할 놈은 실패한다는걸 알면서도 장남,장녀에게 모든 혜택을 몰아주었다.
하다못해, 내가 태어난 달은 10월달이고, 바로 내 밑에 동생이 태어난달은 8월달이다. 인간의 보통 임신기간이 10개월이라고 하지만, 날 낳고 바로 임신을 하신 우리 부모님. 엄마의 입덧과 함께 나는 100일도 채 못 되어서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에서 길러졌다. 어린아이의 유아기 시절에는 부모와의 교감이 중요하다지만, 나는 부모와의 교감은 커녕, 부모와 겪어야 하는 각종 감정교류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많이 통했던거 같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몇년째지만, 아직도 할머니 할아버지의 정을 그리워 하며 명절만 되면 방황하는걸 봐서도 말이다.
나는 20년이 넘도록 아직도 기억하는게 내가 3살때였나보다. 사실 엄마 아빠지만 왠 이상한 아줌마 아저씨가 와서 나에게 자꾸만 오라고 그러더라. 어리둥절하고 이상한 마음에 한없이 내가 엄마아빠라고 믿는, 사실은 할머니 할아버지 품에 안겨 엉엉 울었었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된다는 마음에, 엄마아빠가 강제로 날 데리고 집에 갔었나보다. 나는 그때 그 상황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연탄으로 난방을 하는 조그만 단칸방에 언니라고 불리우는 왠 이상한 사람하나와 이제 겨우 기어다니는 막내여동생, 신기한듯 와서 날 꼬집는 바로 내 밑에 여동생. 어리둥절 하고 황당하기도 했고 억울하기도 했다. 눈물이 펑펑 나오기 시작했고 주변에서 아무리 달래고 무슨이야기를 해도 귀에 들어오기는 커녕, 시끄러운 자동차 경적 같았다. 조용히 눈물만 찔끔거리며 나오던 눈물은 펑펑 터져 나오기 시작했고, 콧물만 훌쩍 거리며 시작한 울음은 끝내 자동차 경적처럼 시끄럽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순간 눈에서 불이 번쩍 번쩍 번쩍 세번이 났나보다. 아버지라 부르라고 시키던 사람이 내 멱살을 잡고 벽에 던지고 그대로 땅에 떨어진 내 양 뺨을 있는대로 힘을 다해 내리쳤나보다. 순간 살기위해 울음을 억지로 그쳤고, 세상을 알기에도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3살이란 나이에 생존본능을 느끼고 나는 그 집에서 살아남기 위해 죽은듯이 노력했다.
몇일 후, 나는 기른정이 낳은정 보다 더 하다고 내가 그리워 집에 온 할머니에게 발견되었다. 온몸에 멍이 시커멓게 들고 두 얼굴 가득히 멍자국과 맷자국이 남겨져 있는채로. 눈물이 울컥 하신 우리 할머니는 나를 그대로 빼앗듯 다시 데리고 가서 내가 유치원 가기 바로 전까지 거두셧다. 한달에 한두번 나를 보러 오겟다고 부모님은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방문하셧지만, 나는 그냥 살아남기 위해 기분을 거스르지 않기위해 울음을 그치고 겨우 그 무릎에 앉고 웃었다. 다시 또 매를 맞을까봐, 다시 또 벽에 내 던져 질까봐, 다시 또 그렇게 불이 번쩍 번쩍 할때까지 뺨을 맞을까봐.
유치원 때문에 부모님댁에 가서 남은 내 학창시절을 보냈지만, 나는 솔직히 우리 부모에게 정이 거의 없다. 아니 솔직히 이야기 하면 아예 없다고 이야기 하는게 맞을것이다. 그동안 내가 커오면서 느꼇던 각종 차별과 폭행은 저거 한번뿐이 아니었다. 하다못해 내가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집에 들어와 훌쩍거리면 어김없이 돌아오면 항상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그러니까 니가 왕따를 당하지." 라는 소리와 동생 혹은 언니와 싸움을 해도 못이 박힌 각목으로 두들겨 맞는것도 나였고, 가위로 손을 자르겠다며 항상 가위를 휘두르다 얼굴에 흉이지고, 손이 찢어져 피가 철철나고 손에 흉터가 남는것도 나였다.
나 초등학교 5학년때 언니와 싸웠다며 집을 나가라며 잘못했다고 싹싹 비는 내 옷을 질질 끌고 바깥으로 나가다가 옷이 찢겨 막 가슴이 봉긋 나오고 2차 성징이 일어나는 몸을 술먹은 취객이 보고 접근하려는걸 보고 겁을 먹고 살려 달라고 대문을 두들겨가며 제발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애원했던 것도 나였고, 그때도 우리 부모님은 나에게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언니의 대학 재수를 위해, 가난했던 우리집 생활비를 보태기 위해 내 모든꿈을 접고 3교대 공장으로 내몰렸던것도 나이다.
평소엔 연락도 없다가 월급날만 되면 돈을 부치라는 부모의 성화에 100만원이면 100만원, 50만원이면 50만원 내 모든 꿈과 희망을 포기한채 돈을 부쳤던것도 나였고, 그 돈이 내 언니에게 전부다 돌아간다는걸 알면서도 멍청하게 그 일을 수행했던것도 나였다. 그것도 모자라 언니 역시도 나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해 몇십만원씩 돈을 부쳐가며 언니의 실패한 재수를 뒷바라지 한것도 나였다.
세상엔 부모같지 않은 부모가 너무 많다.
솔직히 이야기 하면, 세상엔 부모같지 않은 부모가 너무 많다고 느껴진다. 낳아만 놨다고 부모가 아니라 부모의 행실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부모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부모 같지도 않은 부모가 너무 많다. 하다 못해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술을 마시고 엄마를 두들겨 패는 아버지라던지, 자신의 분노에 못이겨 자식들을 학대하는 부모, 그리고 계획없이 아무렇게나 낳아놓고 방임하다가 아이가 끝내 죽거나 혹은 사망직전까지 가는 아이들을 봐서도 말이다.
그런 뉴스들을 접하다 보면, 아무렇게나 싸질러 놓고 책임도 못진다며 하루종일 불쾌한 기분이 가시질 않는다. 하루종일 입에서 쌍욕이 터져 나오고, 그 아이들이 그런 부모 밑에서 살아나와 이 사회를 살아나온다고 해도, 이런 험악한 세상을 살며 얼마나 부모님을 원망할지 내가 직접 겪었기 때문에 겪고 있기 때문에 그아이들의 인생이 너무나도 애잔하고 서러워 하루종일 눈물이난다.
예전에 부모가 게임중독에 걸려 갓난아기를 방임하다 그 갓난아기가 아사했다는 뉴스를 본적이 있었다. 이제 겨우 엄마 뱃속에서 나와 밥을 먹는것도, 화장실을 가리는것도 다 다른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겨우 할수 있는 그 어린아기의 고통들이 내가 겪는것처럼 고통스러워 한참을 할말을 잃고 우울했었다.
부모란 세상에 내 보내놨다고 부모님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최소한 그 아이가 세상을 살아가며 느낄 그런 분노와 상처들을 미리 케어해주고 그런것들은 인생을 살면서 별거 아니라는, 그리고 그것들에 절대 상처받지 않고 무너져서는 안된다는, 인생의 선배이기도 하지만 그 아이를 낳아놓은 최소한의 책임으로 그아이가 혼자 독립하고 홀로 서기를 할수 있을때까지 끊임없이 케어하고 매만져 주고 마치 질그릇을 다듬듯 인격과 마음을 다듬어줘야 하는게 최소한의 책임인거 같다.
나는 외롭다고 느끼긴 하지만 결혼하기 너무 무섭다. 내가 겪었던 부모처럼 내가 어릴때 보았던 괴물의 모습으로 변하게 될까봐 사람을 사귀는것도, 사귀면서 조금더 발전적인 이야기를 하는것도 그리고 미래 설계를 하는것도 두렵다. 나는 최소한 내 부모처럼 그런 괴물의 모습으로 변하기도 싫거니와 내가 생각하는 막중한 책임을 가진 부모의 역활을 제대로 해낼수 있을지 의심스럽기도 해서 말이다.
나는 아직도 우리 부모에게 내 속마음을 드러내는게 두렵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뻔히 알고 있기에. 몇년전 그것들이 하도 한이 되어서 흉터처럼 남은 몇십년전에 일들을 하나하나 꺼내가며 사과를 해달라고 요청을 했을때 "우리는 그런적이 단 한번도 없다." 라며 없던일로 묻어 놓자는 이야기에 더 화가나 그 뒤로 한 2년정도 연을 끊고 혼자 세상을 살때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전화해서 "너무 그땐 살기가 팍팍해서 그런일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런일들이 있었다면 용서해 달라."며 입에 발린 사과를 한 이후로 한달에 한번이면 한번, 두번이면 두번 겨우 통화를 하는 사이로 겨우 발전을 하긴 했지만 아직도 내 마음속에 흉터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우리 부모는 솔직히 이야기 하면 실패한 부모이다. 자식에게 사랑을 공평하게 나눠주지도 못했지만, 항상 통화를 할때마다 나에게 하는 소리 "여섯손가락중에 제일 아픈손가락." 이라는 소리를 들어서도 말이다. 먹는것부터 가지고 다니는것 까지. 학교다니던 시절, 솔직히 장학금을 받고 학교를 다녔지만, 내가 받아온 만큼 돌아오지 않았던걸 봐서도 말이다. 하다못해 학교갈 차비도, 갈때는 버스를 타고 학교를 가도 돌아올때는 버스 10정거장이 넘는거리를 걸어왓어야 했다. 내 동생, 내 밑에동생, 내 막내여동생, 남동생 둘은 군것질 비용이라던지 뭐라던지 차곡차곡 받아가는데도 나는 하다못해 샤프심 사는 200원도 가난하기도 했지만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알기에 내 스스로에게 미안해 이야기 못꺼냈던 나였다.
내가 겪엇던 부모보다 더 악독하고 패악스러운 부모가 존재한다. 비록 그것이 계모일지라도 폐륜적인 부모가 존재하고 있고, 배아파 혹은 직접 씨뿌려 낳아놓은 부모라고 할지라도 역활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 그 부모가 불쌍하다 혹은 안타깝다기 보다는 그아이의 인생이 너무나도 안타깝고 불쌍하다.
부모의 책임, 결코 어렵지 않지만 어려운
한 사람을 사회의 인격체로 키워 내는것, 어렵지 않지만 그렇다고 결코 쉬운일도 아니다. 다른사람을 배려 할줄 알고 그리고 당당해야 할때는 당당해야 하는 방법. 나는 부모에게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난 항상 어딜 가더라도 항상 눈치를 먼저 본다. 덕분에 어떤 상황이든 잘 맞출수 있고, 그러다 보니 항상 듣는 소리는 XX씨는 눈치가 빨라서 좋다 라는 라는 소리이다.
어린아이에게 부모가 가지는 의미는 롤모델이자 백과사전자 전과이다. 부모가 얼만큼 모범적이고 올바른 모습을 보이느냐에 따라 아이의 인생이 바뀐다. 친구의 말을 빌어보자면, 학교에서 문제를 저지른 학생의 부모를 학교로 소환해보면 '아이가 그럴만 했으니 그럴테지요.' 라며 적반하장식의 부모가 10명중에 7명, 8명이라고 했다. 더불어 그 부모의 모습을 보고 배웠는지 그 학생 역시도 부모를 따라 기세등등, 선생 니까짓게 뭔데 나에게 상관하느냐 라며 한껏 콧대를 세운다고 했다.
얼마전 나주에서 성폭행 사건을 일으킨 고종석의 부모 역시도 부모의 역활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뉴스를 보고 한참 가슴이 먹먹했다. 먹고살기 너무나도 퍽퍽해서 아이의 도둑질에, 아이의 범죄에 관대해 방임하듯 그 아이를 풀어 키우고, 아이를 책임지지 못한 부모는 끝내 이세상의 다른 착한 천사를 짓밟는 괴물을 만들어 놓았다.
얼마전에 국기를 불태워 훼손하고 그걸 자랑스레 카페에 올린 범인이 붙잡혔다고 했다. 알고보니 그 범인은 10대, 얼마나 부모의 방임과 무관심속에서 그렇게 이상한 짓을 할수가 있는지 세삼 궁금해졌다.
나는 우리 부모에게 정말 원망스러운게 딱 한가지 있다. 물질적인 면이 아니라 아무리 먹고 사는게 힘들다 하더라도, 조금만 더 나에게 관대할순 없었는지, 형제들에게 나눠주는 사랑의 반의 반만이라도 나에게 나눠줄수 없었는지. 정말 조금의 사랑이라도 나에게 나눠주고 관대했었더라면 지금 명절때만 되면 내가 할머니 할아버지를 부모님 처럼 여기며 돌아가신 분들을 그리워 하고 애닳아하며 괴로워 하는게 조금이라도 줄어들수 있었을텐데.
다시금 이야기 하지만, 자식을 낳아놓았다고 해서 그게 부모의 역활을 한게 다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면이 아무리 채워진다 한들, 그 아이가 이 사회를 인격체로 살아나가는데 도움이 되는 롤모델이 될수 있을만큼의 인격적인, 감정적인 자격이 되지 않는한 말이다. 참 어렵지만 쉽기도 하다. 부모의 자격이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