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원보람이 일지(6), 도산안창호 80주기.hwp
현충원보람이 일지(6) 도산 안창호 선생 순국 80주기 추모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이자 민족 계몽 운동가였던 안창호 선생을 기리는 「도산 안창호 선생 순국 80주기 추모식」이 3월 10일(토) 오전 11시, 도산공원 선생 묘소(서울 강남구 신사동 소재)에서 열린다. (사)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이사장 김재실)와 흥사단(이사장 류종열) 주관으로 열리는 이날 추모식은 피우진 국가보훈처장, 독립운동 관련 단체 대표 및 회원, 학생, 시민 등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약전 봉독, 추모식사 및 추모사, 도산 선배님께 드리는 편지 낭독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추모식 후에는 도산안창호 선생 기념관에서 내부 전시실 리뉴얼 오픈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 순국 80주기 추모식 (11:00∼12:00)】 ■ 국민의례 ■ 약전봉독 도산학회장 윤경로 ■ 추모식사 기념사업회장 김재실 ■ 추모사 국가보훈처장 피우진 광복회장 박유철 흥사단이사장 류종열 ■ 후배의 편지 경신고 학생대표 ■ 추모가 압구정여성합창단 ■ 헌화 및 분향 【도산 안창호기념관(전시관) 리뉴얼오픈행사(12:00∼12:30)】 ■ 행사 소개, 테이프커팅, 전시관 관람 |
안창호 선생 공적 안창호 선생(1878. 11. 9.~1938. 3. 10.)은 평남 강서에서 출생하였으며,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자주 독립과 국민의 자각을 역설하였다.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친목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05년 동(同) 회를 ‘공립협회’로 재창립하여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고 <공립신보>를 발행하였다. 1907년 귀국 후, 비밀결사 조직인 ‘신민회’를 결성하였고, 1909년에는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12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를 조직하여 초대 회장에 취임하였으며, 1913년에는 ‘흥사단’을 조직하여 민족계몽운동과 국권회복 활동을 펼쳤다. 1919년 2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국민회 대표 파견 계획을 추진하던 중,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에 취임하여 연통제를 실시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등 독립운동의 방략을 지도하였다. 1923년에는 ‘대독립당’을 결성하고, 1924년에는 남경에서 ‘동명학원’을 설립하여 실력배양운동의 기초를 다졌다. 1930년에 ‘동인호조사(同人互助社)’를 조직하여 한인들의 합심 협력을 이끌어내었으며, 1931년 1월에는 흥사단 제17회 원동대회를 주재하여 대회장으로 선출되고 <흥사단보>를 발행하는 등 국민의 자질 혁신과 청년 인재 양성 등 흥사단의 이념 구현에 주력하였다. 조국의 자주독립에 헌신하던 선생은, 1937년 6월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병을 얻어 12월 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 채 1938년 3월 순국하였고, 이후 망우리에 안장되었다가 1973년 현 도산공원으로 이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도산을 본받아 어제 3월 11일이 도산 안창호의 서거 80주년이었습니다. 도산 서거 10주년을 맞이하던 1948년 3월 10일 명동에 있던 시공관(후에 국립극장)에서 10주기 추모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때 21살의 대학생이었던 내가 그 모임에 참석하였었는데 어느덧 70년의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제 추모식에 모인 사람들이 내 나이를 알면 나를 태고의 사람으로 여길 것이 분명합니다. 추모식 전날, 나는 도산 공원 안에 있는 도산 기념관에서 한 시간 동안 강연을 했는데 70년 전 그 추모식에 대학생으로 참석했던 내가 기념 강연을 하게 된 사실이 대단히 감개무량하였습니다. 70년이라는 세월이 이렇게 빠르게 흘러간 것을 모르고 이날까지 살아 온 듯합니다. 도산은 일제하에 대전 감옥에 투옥되어 일본인에게 시달리다가 위병을 얻어 병보석으로 출옥한 후 그 이듬해에 서울에서 별세 하였습니다. 그는 비록 60년의 인생밖에 살지는 못했지만 그의 인격과 교훈의 힘은 앞으로도 600년을 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도산이 미국에서 흥사단을 만든 까닭은 민족성을 개조하지 않고는 훌륭한 나라를 만들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개개인의 인격 도야를 최우선 과제로 삼고 때가 되면 그렇게 준비된 인물들을 이 나라의 정치 지도자로 내세울 생각이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러나 나는 도산 서거 후 80년이 지났어도 도산의 제자들 중에 나라를 바로 잡으려고 나서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본적이 없으니 그들은 단지 흥사단을 수양 단체라고만 생각한 듯합니다. 그것은 결코 도산의 참뜻은 아니었습니다. 해방이 되고 자유 대한이 되어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뽑는 위대한 시대가 도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흥사단은 단 한사람의 대통령도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심히 유감스럽습니다. 해방 뒤에 흥사단이 차지했던 을지로 입구에 대성빌딩은 군사정권에 대항하는 민중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흥사단은 그 건물을 처분하고 어디엔가 공원묘지를 마련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서울 대학로에 조그만 건물 하나를 남겼을 뿐입니다. 도산공원은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여 마련한 공원이지만, 그곳에 설립된 도산 기념관은 그 규모가 하도 초라하여 도산 안창호를 기념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교훈인 “무실역행”의 제창자로 민족의 등불이었던 도산의 정신이 이렇게 위축된 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김동길 Kimdonggill.com 2018.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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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철우 동생 대단해 짝짝짝
새해 福 많이 받으 시게나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