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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18일 오늘의 역사
2023년 우크라이나 고위직 태운 헬기 추락 16명 사망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서 내무부 고위직 9명을 태운 헬리콥터가 외곽 브로바리 민간 거주지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헬리콥터는 키이우 동부 교외 브로바리 마을을 지나던 도중, 유치원과 아파트가 위치한 민간인 거주지 추락했고 500m 이내 주택가가 불길에 휩싸였다. 이로인해 내무부 고위직 9명과 지상에 있는 민간인을 포함한 최소 16명이 사망하고 25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헬리콥터에는 브로바리에 드니스 모나스티르스키 내무장관, 예브헨 예닌 부장관, 유리 루브코비치 내무부 총무 국장 등이 탑승해 있었다
2023년 인도네시아 술라웨시 섬에서 규모 6.1의 지진 발생
2022년 미국동부 대폭설로 20만가구 정전 항공기 4600편 결항
2020년 ‘동국진체’ 대가인 서예가 이돈홍 세상 떠남(74세)
2019년 군 최초, 육·해·공 세 개의 군번 가진 군인 탄생
육군이 육·해·공군에서 각각의 군번을 받아 총 세 개의 군번을 가진 군인이 군 최초로 탄생한다고 전했다. 화제의 주인공인 오지성 준위는 2007년에 해병대 부사관으로 입대해 2013년 중사로 전역했고, 그해 공군 부사관으로 재입대했다. 지난해 육군 항공운항 준사관 과정에 지원해 18일 육군 준위로 임관했다
2017년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박차순 할머니 세상 떠남
2012년 美의회의 SOPA·PIPA 법령 제정을 반대하는 의미로 영어 위키백과, 24시간 동안 서비스 중단.
2011년 미국 평화봉사단 설립, 빈곤퇴치 헌신 슈라이버 별세
평미 정치인 로버트 서전트 슈라이버(Shriver·95)는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인생의 2년을 개발도상국에서 봉사해 세계 평화에 기여하자"며 시작한 평화봉사단(Peace Corps)의 설립자로서, 초대 단장을 6년간 역임했다.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대사와 크리스토퍼 힐 전 주한 미대사도 1970년대 한국과 카메룬에서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다.
슈라이버는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후 린든 존슨 대통령이 내놓은 '빈곤과의 전쟁(War on Poverty)' 프로젝트의 설계자이기도 했다. 또한 빈민구제 사업의 일환인 취학 전 저소득층 자녀 교육 프로그램 '헤드 스타트(Head Start)', 저소득층 고등학생들의 대학 입학 준비 프로그램 '업워드 바운드(Upward Bound)', 무직 청소년들을 위한 직업훈련 기관인 '잡 코(Job Corps)', 지적발달 장애인들을 위한 '스페셜올림픽' 등도 그의 작품이라고 뉴욕타임스가 19일 보도했다.
2011년 해적에 피랍된 주얼리호 1차 구출작전
2011년 1월, 대한민국의 삼호해운 소속 선박 삼호 주얼리호가 해적들에게 피랍되었다. 대한민국 기업 소속의 선박이 납치되는 일이 계속해서 발생하자, 대한민국 국민들 사이에서는 해적에 대한 몸값 지불을 반대하는 여론이 생겨났다. 이에 따라 정부는, 청해부대 소속 최영함을 투입해 인질 구출 작전을 시행하기로 결정하고, 현장에 급파한다.
1차 구출 작전은 2011년 1월 18일 20시 9분(KST)에 해적들이 소말리아로 귀환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최영함이 해적들을 뒤쫓는 도중 해적들이 몽골 선박을 추가로 피랍하기 위해 자선(子船)을 내리는것을 포착하고, 이 때 해적들이 분열된 틈을 타 작전을 시행했다. 링크스 헬기로 자선에 위협사격을 가한 뒤 관심이 쏠린 사이 청해부대 소속 해군특수전여단 요원들이 고속정으로 삼호 주얼리호에 접근했고 해적과의 교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속임수 작전으로 적들은 흰기를 들고 항복 하는 척 하다가 바로 AK 소총을 발포하였고 이 과정에서 특수부대원 3명이 총상과 찰과상 등의 부상을 입고 작전을 중지, 최영함으로 복귀했으며 해적의 자선에서 AK-47 3정과 사다리, 해적 자선(子船)을 확보했다. 또한 경고 사격 과정에서 해적 수 명이 바다에 빠져 실종되었다.
2008년 삼성 특검:특검 수사팀은 성영목 신라호텔 사장을 소환하여 조사.
2004년 제주교구장겸 제주지구장에 한도봉 교무(제주국제훈련원장 겸직) 부임.
2002년 시에라리온 내전 공식 종결, 가수 유승준 미국시민권 취득
2001년 사진작가 임응식 별세
`구직`. 고픈 배에 구직쪽지를 동여매고 고개를 떨어뜨린 낙담의 초상. 1953년, 전쟁의 상처가 아직도 일상에 생생하게 남아있던 이 땅에서 찍은 이 사진 한장으로 사진작가 임응식은 역사 기록자이자 영상 시인이 되었다. 사진가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지난 70년간 카메라를 놓지 않았던 `청년` 임응식의 믿음이었다.
임씨는 1912년 부산서 태어나 스무살 되던 해 부산의 사진클럽 여광구락부에 가입했고 일본 `사진 살롱` 잡지에 `초자정물`을 발표하며 사진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정물과 풍경, 인물을 인상파적 표현 기법으로 드러내는 데 집중했던 그는 한국 전쟁 종군 기자로 참전하면서 리얼리즘 사진으로 눈을 돌렸다. 인천 상륙 작전을 기록했고, 전후 폐허가 된 서울 거리, 특히 명동에서 절망 속에서 한줄기 빛을 찾는 인간 군상을 포착해냈다.
유달리 명동을 사랑했던 그는 60을 넘긴 후에도 전봇대에 올라가 명동 거리 찍는 모습을 들키곤 했다. 평생 사진에 몰두했던 그는 원리원칙을 지키는 비타협주의로도 이름났다. 한국사진가 협회 설립이나 국전(현 대한민국 미술대전) 사진부문 독립, 대학 사진학과 설치는 사진을 고유한 예술로 자리잡도록 줄곧 애써온 그의 노력의 산물이었다. 1998년 `사진 영상의 해` 조직위원장을 맡아 마지막까지 노익장을 과시했다.
1997년 노르웨이 탐험가 뵈르게 오우슬란, 남극대륙 첫 단독횡단
노르웨이 탐험가 뵈르게 오우슬란. 인간이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 홀로 영하 40도를 넘나드는남극대륙을 정복했다.
노르웨이 탐험가 뵈르게 오우슬란(34)은 2천8백㎞에 이르 남극대륙을 가로 질러 지난 18일 호주령 스코트기지에 도착했다. 혹한과 강풍, 그리고 격심한 고립감에 시달리며 스키에 의지해 빙원을 헤쳐온지 65일만이다. 그는 지난해 11월14일 한국-영국-팀과 함께 버크너 아일랜드를 동시 출발, 한달여만인 12월19일 남극점을 통과했다.
오우슬란이 중간 물자보급은 물론 동료도 없이 강행한 행군은 첫 단독 무(無)지원 남극 종주로 기록됐다. 그는 95년에도 단독으로 남극정복에 도전했지만 동상에 걸려 중도에 포기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남극점까진 도착, 남극점과 북극점을 모두 홀로 도달한 첫 인간이 됐다.그는 94년에도 홀로 북극점에 섰던 철인이다.
오우슬란은 1백75㎏이 넘는 장비를 실은 썰매를 끌며 크레바스(얼음절벽)와 험한 설산을 지나는 강행군을 계속했다. 스키에 낙하산 모양 돛을 달아 운좋은 날은 하루 2백㎞ 이상을 질주하기도 했지만,폭풍에 갇혀 텐트안에서 며칠을 지새기도 했다. 도착 직후 그는 “너무힘들었다. 하지만 기쁘다”며 “설원이 압도하는 남극의 매력은 지구 최고”라고 했다. 그는 집으로 전화 한통을 건 뒤 차를 곁들여 간단히 식사를 하고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1996년 무궁화 1호 위성 상용서비스 시작
1994년 재야운동가 문익환 목사 별세
재야 운동가 문익환 목사(76)가 1994년 1월 18일 오후8시30분쯤 급환으로 서울 도봉구 쌍문동 한일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별세했다. 문목사는 일관되게 이 땅의 독재 반민주세력과 맞서 싸운 재야운동의 거목이었다.
1918년 6월 1일 만주 북간도 용정의 명동촌에서 문재린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나 명동소학교와 용정 광명중학교를 거치면서 윤동주 시인과 함께 학창생활을 보냈다. 1947년 조선신학교를 졸업하고 미 프린스턴신학교와 유니언신학교에서 수학한 뒤 귀국, 1955∼70년 한신대 구약학교수를 지냈다.
목회활동에만 전념하던 문 목사가 민주통일운동에 뛰어들게 된 것은 지난 1975년 8월 장준하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도하면서부터였다. 문 목사는 지난 1976년 3월 1일 유신통치에 정면으로 맞서 명동성당에서 김대중, 함석헌, 윤보선씨 등과 ‘민주구국선언’을 주도한 속칭 ‘명동사건’으로 22개월 동안 첫 옥고를 치렀다. 이때부터 5차례의 옥고를 치르며 재야운동을 주도해왔다. 문 목사는 1989년 ‘평양 밀행’ 사건과 관련, 국가보안법위반혐의 등으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1993년 3월 6일 가석방됐었다.
1994년 정일권 전 국무총리 별세
1990년 제7차 남북체육회담 개최
1985년 신한민주당 창당
1982년 20세기 최대 북극한파 미국 강타 체감온도 -74℃ 폭풍설 동반 사망 280명
1980년 영국의 사진가 세실 비턴 사망
1979년 박정희 대통령 남북최고당국자 회담 제의
1978년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서 모로 민족해방전선이 한국인(박화춘) 납치
1974년 박정희 대통령, 남북한 불가침협정 제의
1974년 이스라엘과 이집트 양군격리협정 조인
1973년 북한 3대혁명소조운동 시작
1969년 일본 동경대 전공투(全共鬪), 야스다강당에서 경찰과 공방전
동경대학 당국의 요청에 의해 동경대로 진입한 경찰과 야스다 강당에 있던 동경대 전공투 학생들과의 공방전이 1969년 1월 18일 시작됐다.
오전 8시 경찰이 바리케이드 철거를 시작하자 학생들은 투석과 화염병으로 이에 맞섰다. 오후부터 저녁까지 구내 21개 건물 봉쇄가 해제됐다.
한편 전공투 학생들의 주력이 있던 야스다 강당일대에는 최루가스가 난무했다. 밤이 되자 경찰은 야스다 강당 일대를 조명으로 환하게 밝힌 후 가스탄과 물을 뿌렸다. 강당봉쇄가 해제된 것은 다음날인 19일 오전 6시부터 였으며 오후 5시45분경에는 최후의 한사람이 투항했다. 체포자는 631명에 달했다.
1965년 제7차 한일회담 개막
1964년 제주도일원에 첫 통금해제
1963년 민주공화당 발기선언, 위원장에 김종필씨 선출
1963년 여객선 연호 침몰(사망 138명)
1963년 1월 18일 오전11시쯤 전라남도 영암군 삼호면 가지도와 허사도 사이 목포에서 서남쪽으로 2.5마일되는 해상에서 해남군 황산면 연호리를 떠나 목포로 가던 해남-목포간 정기여객선 연호가 심한 파도에 휩쓸려 침몰됐다. 이 사고로 승객132명과 승무원 7명등 139명중 승객 서종수씨를 제외한 1백38명이 사망 또는 실종됐다.
원래 이 여객선의 정원은 78명, 승무원은 8명이었으나 이날은 정원을 훨씬 초과한데다 벼를 5백10가마나 실었다. 사고는 선체가 21년이나 돼 낡았고 사고 당시 썰물을 거슬러 올라갔으며, 서북풍이 강하게 분다는 폭풍주의보를 외면하고 무리하게 항해하다가 일어났다.
해경은 경비정 한산호와 민간선박 15척을 동원, 선체인양작업에 나섰으나 심한 폭풍우로 구조작업이 부진, 겨우 시체 10구를 인양했으며 선체는 해군의 도움으로 사고가 난지 7일 만인 25일 인양됐다.
1961년 반정부반미공작 간첩사건 발생
1957년 저작권법 국회 통과
1955년 서양화가 이중섭, 미도파화랑에서 제1회 개인전(-27일)
1954년 휴전협정에 따른 정치회담 예비회담(연락관 회의) 결렬
1954년 독도에 한국영토표지 설치
독도 영토 분쟁은 1952년 1월 28일 일본이 울릉도의 부속 도서인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부터 본격화됐다. 일본은 6·25전쟁으로 한창 혼란스런 한국의 사회분위기를 틈타 1953년 6월 25일부터 28일까지 3차례에 걸쳐 미군기를 도용하면서 독도에 상륙, 1948년 6월 30일 미군 폭격 연습 과정에서 희생된 우리 어부 위령비를 파괴하고, 일본 영토 표지를 하는 등 불법 행위를 자행했다.
일본의 독도 침범이 빈번해지자 국회는 1953년 7월 독도를 보전할 것을 결의하고 경비대를 상주하기로 결정했다. 1953년 4월 울릉도 주민으로 구성된 독도 의용 수비대가 창설된 데 이어, 1954년 1월 18일 영토표지를 독도에 설치했다. 이어 8월 15일 독도 등대를 점등해 만국에 독도가 우리땅임을 알렸다.
9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우정국에서 독도가 우리땅임을 강조하기 위해 3종의 독도우표를 발행하기도 했다. 이에 일본은 `국제 사법재판소에 독도문제를 제소할 것`을 제의했으나 한국은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실효적으로 한국의 영토이므로 재판소에 제소할 필요가 없다"고 이를 거부했다.
1952년 국회, 제2차개헌안 (대통령직선제) 부결
1952년 이승만 대통령, ‘이승만 라인(평화선)’ 선포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연안수역 보호를 위한 목적으로 이른바 `이승만 라인`을 선포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월 18일 이승만대통령이 `인접해양의 주권에 관한 대통령 선언` 이른바 ‘이승만 라인’을 관보(국무원 고시 제14호)에 실어 대내외에 공포하였다. 그 당시 자국의 바다를 확정해 영해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나라는 미국과 중남미 몇개국이 전부였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는 어느 나라도 그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선언이 선포되자 일본이 가장 강력하게 반대 반응을 보였으며 미국, 영국, 자유중국 등 우방국들도 부당한 조치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정부가 `한일 양국의 평화유지에 목적이 있다`고 명분을 밝힘으로써 이때부터 평화선이라 불려졌다. 평화선 선포의 배경을 보면, 한일간의 어업상의 격차가 심하고, 어업자원 및 대륙붕 자원의 보호가 시급하며, 세계 각국 영해의 확장 및 주권적 전관화 추세가 일고 있음에 대처, 특히 ‘맥아더라인’의 철폐에 따라 보완책의 하나로 설정한 것이었다. 평화선은 한반도 주변수역 50-100해리 범위로 그곳에 포함된 광물과 수산자원을 보존하겠다는 선언이다. 독도를 라인 안쪽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승만 정부는 평화선을 국내법적으로 뒷받침 하기 위해 1953년 어업자원보호법을 제정, 이 수역내에서 외국선박의 불법어로 행위를 엄격히 단속해왔다. 이 법에 의해 일본선박 3백13척이 나포됐고 이중 1백26척만 송환되었으며 나머지 1백85척은 한국이 압류했다. 평화선은 이후 전개된 한일협상에서 우리측의 중요한 전략적 자원으로 활용됐으나, 1965년 6월 한일국교가 정상화되자 사실상 철폐됐다.
1949년 한국-영국 국교 수립
1931년 한국 제11.12대 대통령 전두환 출생
1922년 박인호, 천도교주가 됨
1920년 정안립, 조선고사연구회 조직
1919년 파리강화회의 개최
제1차 세계대전의 결말을 짓기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1919년 1월 18일부터 5개월간 파리의 베르사유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처음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 5개국에 의해서 진행됐으나 일본의 무성의와 이탈리아의 철수로 결국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영국 수상 로이드 조지, 프랑스 수상 클레망소 등 3거두에 의해 주도됐다.
회의에는 패전국의 출석이 허가되지 않았으며 소규모 국가의 의견도 반영되지 않았다. 회의를 통해 국제연맹 규약과 베르사유 조약, 생제르맹 조약, 뇌이 조약 등이 결정됐다. 이날부터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된 6월까지 모두 6차례의 본회의가 열렸다.
특히 6월 28일 체결된 베르사유 조약은 전범조항과 엄청난 배상금을 규정해 독일인들에게 심한 모멸감을 심어 주었다. 조약에 따라 독일 주민과 영토는 13%정도 축소됐고 600만명의 인구를 빼앗겼다. 군병력도 대폭 감축돼 공군은 해체됐고, 육군은 10만 명으로 제한됐으며 해군의 군함 보유량도 10만 톤 이내로 묶였다. 배상금액은 독일인들이 꼬박 3년간 빵 한조각 먹지 않고 일해야 겨우 모을수 있는 1,320억 마르크로 결정됐다.
이 회의에 따라 독일,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헝가리 및 오스만투르크에 대한 강화조약이 체결됐다.
1915년 일본, 중국에 21개조 대중(對中)특권 요구
1915년 1월 18일 저녁, 주중국 일본 공사가 위안스카이(袁世凱) 대총통을 찾아왔다. 그는 외교 관례도 무시한 채 전함과 기관총 문양을 넣은 서류 몇 장을 위안스카이에게 건넸다. 바로 악명높은 '21개조 요구'가 적혀있는 서류였다.
서류는 중국이 정상적인 국가였다면 감히 꺼낼 수 없는 강압적인 요구가 주된 내용이었다. 남만주와 동부 내몽고의 독점지배를 둘러싼 조항이 포함돼 있었으며 러일전쟁으로 일본이 획득한 여순과 대련의 조차 기한과 남만주철도에 대한 기한을 다시 99년간 연장하는 조항도 포함돼 있었다.
이미 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중국 산동성 내 독일 조차지 칭다오(靑島)와 자오저우만(膠州灣)을 점령한 일본이 대륙침략 야욕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유럽 열강들은 자신들의 전쟁만으로도 경황이 없는 상태였다.
위안스카이는 "중국을 개, 돼지처럼 취급하느냐"고 분노를 터뜨리는 한편 열강의 지원과 중국 민중이 들고일어날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중국인들의 분노는 조직적이지도, 끈질기지도 못했다. 결국 일본은 5월 7일 위안스카이에게 이틀간의 말미를 주겠다며 최후통첩을 보냈다.
뒤늦게서야 유럽 열강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위안스카이는 결국 5월 9일 모든 조건을 수락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고 5월 25일 조약을 체결했다.
1912년 영국 탐험가 스코트 남극 도달
영국 스코트 남극 탐험대 5명이 1912년 1월 18일 남극에 도달했다. 스코트 대장과 바우어즈, 오우츠, 윌슨, 에반스가 주인공이었다. 썰매가 고장나고 조랑말이 얼어 죽는 등 육로를 통한 탐험은 전례없는 난관의 연속이었지만 이들은 마침내 남극에 도달했다.
1911년 10월 케이프 에반스를 출발한지 81일 만에 도착했지만, 이들은 함께 경쟁했던 노르웨이 아문젠이 이미 34일 전에 남극에 도달(1911년 12월14일)한 사실을 알고서는 멍하니 주변만을 바라보았다. 노르웨이 국기가 달린 아문젠의 천막이 승리에 찬 오만한 모습으로 정복당한 남극의 얼음 위에서 휘날리고 있었고, 천막 속에는 아문젠의 편지 한 통이 그의 뒤를 이어 언젠가 이 장소를 밟을 예정인 알수 없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르웨이의 하콘 왕에게 이 편지를 전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실망스러웠지만 스코트는 아문젠의 이 가혹한 부탁을 이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모른 체 할 수도 있었지만 아문젠이 달성한 이 위업에 대해서 전세계 앞에서 증인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 모든 노력, 이 모든 고생, 이 모든 고통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이었던가?” 스코트는 일기에 그때의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하지만 이들은 돌아갈 일이 더 중요했다. 예상치 못한 강풍으로 1,360㎞거리의 베이스 캠프까지 그들의 하루 행군량은 0.8-0.9K㎞로 줄어들었다. 이들은 결국 베이스 캠프를 불과 17㎞ 남겨둔 지점에서 3월 29일 사망했다. 그들의 시체는 봄이 되어서야 스코트의 노트와 현상 가능한 필름과 함께 발견됐다. 영국은 스코트의 용기와 애국심을 기려 그의 부인에게 기사작위를 수여했다.
1910년 서울 인구 한국인 161,656명 일본인 26,316명 외국인 1,914명
1905년 화폐조례 공포(일본화폐의 유통을 공인)
1898(대한제국 광무 2) 미국인에게 전기 철로부설권 허가. 1909년에 일본이 양도받음
1894년 소설가 전영택 출생
1890년 스페인의 왕(1870.11.6 -1873.2.11) 아마데우스 사망
1888년 영국 항공기 설계가 소프위스 출생
1881년 프랑스 갈리마르출판사의 창업자 가스통 갈리마르 출생
1871년 독일제국 성립
1862년 미국의 제10대 대통령(1841-45) 존 타일러 사망
1861년 독일의 화학자 한스 골트슈미트 출생
1858년 미국의 의사 다니엘 윌리엄스 출생
1854년 미국의 전화 창시자 웟슨 출생
1841년 프랑스 작곡가 엠마누엘 샤브리에 출생
1898(대한제국 광무 2) 미국인에게 전기 철로부설권 허가, 1909년에 일본이 양도받음
1535년 스페인의 정복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페루를 발견
1825년 영국의 조지 스티븐슨, 세계 최초의 증기 기관차 로코모션號 운전
1733년 발생학의 아버지 카스파 프리드리히 볼프 출생
1689년 프랑스 정치사상가 몽테스키외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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