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8일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제1독서 : 로마 13,8-10
복 음 : 루카 14,25-33
그때에
25 많은 군중이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서서 이르셨다.
26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7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28 너희 가운데 누가 탑을 세우려고 하면,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앉아서 계산해 보지 않느냐?
29 그러지 않으면 기초만 놓은 채 마치지 못하여, 보는 이마다 그를 비웃기 시작하며,
30 ‘저 사람은 세우는 일을 시작만 해 놓고 마치지는 못하였군.’ 할 것이다.
31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32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 협정을 청할 것이다.
33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미국 행동주의 심리학자 벌허스 프레더릭 스키너는
손잡이를 누르면 먹이가 나오는 ‘스키너 상자’ 안에 쥐를 가두고
네 가지 조건 중 어떤 조건에서 쥐가 손잡이를 더 많이 누르는지 실험했습니다.
1) 손잡이를 누르는 것과 관계없이 일정한 시간 간격으로 먹이가 나온다.
2) 손잡이를 누르는 것과 관계없이 불규칙한 시간 간격으로 먹이가 나온다.
3) 손잡이를 누르면 반드시 먹이가 나온다.
4) 손잡이를 누르면 불확실하게 먹이가 나온다.
실험 결과에 의하면, 손잡이 누르는 횟수는 4, 3, 2, 1의 순서였습니다.
즉, 손잡이를 누르는 것은 먹이가 나오는 것과 관계있을 때 더 많이 눌렀습니다.
그런데 손잡이를 누르면 반드시 먹이가 나올 때보다는
불확실하게 먹이가 나올 때 더 많이 눌러댔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도박처럼 불확실한 보상이 탐닉을 유발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보상에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착한 일 한 번에 한 번의 좋은 일을 주시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불공평하다며 또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의 악행에 대해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왜 보려고 하지 않을까요?
하느님의 보상은 불확실한 보상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뜻을 부족한 인간의 존재에서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늘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부분은 하느님의 보상이 아닙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집중하는 사람은 오늘 복음 말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라고 말씀하시지요.
사랑하라고 그토록 강조하셨던 예수님께서 왜 미워하라고 하실까요?
하느님 사랑을 첫째 자리에 두라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 사랑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미워한다는 말은 사랑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뒤로 돌리다’, ‘이차적으로 생각하다’라는 뜻의 표현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의 부조리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어떤 고통과 시련 안에서도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위로받고 힘을 받습니다.
이렇게 하느님 사랑에 집중해야 하늘나라에 들어갈 준비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하는 것이 인생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결합이 있는 곳에 기쁨이 있다(괴테).
“~하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조건을 세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그 세 가지 조건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3개의 동사입니다.
따라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3가지의 행동 실천이 따릅니다.
첫째 동사는
“~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미워하다’(μισει)는 동사입니다.
너무도 매정하게 들리는 ‘미워하다’는 이 동사의 뜻은 제대로 알아들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히브리어의 방언인 아람어에는 비교급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사랑한다.’는 표현이 나오는 경우에,
‘미워하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미워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고,
‘누구보다 뒤에 사랑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사랑하다’는 말은 ‘앞세워 사랑하다 혹은 선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결코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무시하라는 가르침이 아닌 것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신 분께서 부모 자식과 가족에 대한 사랑을 금지하거나
적대시하실 리 만무합니다.
결국 세상의 일보다 하느님 나라에 관한 일 중에
더 궁극적인 가치를 앞세우고 더 우위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모형제를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먼저 앞세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말씀한 대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는 말씀입니다.
둘째 동사는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지다’(βασταξω)라는 동사입니다.
여기서 ‘지다’라는 동사는 억지로 마지못해 어깨에 지는 짐처럼,
압박감에 눌려있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무거운 짐 진 자 다 나에게로 오라’고 하신 분께서
짐을 덜어주시기는커녕 더 무겁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다’라는 말의 원래의 뜻은
‘어머니가 아기를 가슴에 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끌어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어머니가 아기를 품듯, 소중하게 자의로 스스로 품는 것을 말합니다.
곧 십자가를 통하여 십자가와 함께 오라는 말씀이요,
십자가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셋째 동사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라 할 때의
‘버리다’(αποτασσεται)라는 동사입니다.
‘버리다’의 의미는 단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것,
자신을 버리고 욕심을 비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어의 뜻은 ‘거부하다’, ‘거절하다’, ‘부인하다’ 입니다.
곧 자신의 뜻을 부인하는 것이요, 자신에게 신뢰를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하느님께 신뢰를 두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으로 ‘바치다.’, ‘가납하다.’를 뜻합니다.
쓸데없거나 무익해서 버리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을
본래의 주님께 ‘향하여’ 봉헌하는 것이요, 가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오니 주님,
제자인 저희가 당신보다 그 무엇도 앞세우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 무엇보다 앞서, 항상 당신을 앞세우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
주님!
당신의 제자가 되게 하소서!
제가 당신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 자신을 따르기보다 당신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제 자신이 바라는 것보다 당신이 바라는 것과 당신을 바라게 하시고,
제가 믿는 것보다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더 이상은 당신의 사랑을 배신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외국에서 지내던 사제들은 한국에 들르면 주교님께 인사를 드리는 것이 관례입니다.
저도 지난번 휴가 때, 주교님께 인사를 드리러 교구청엘 갔습니다.
교구청 마당엘 들어서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저는 교구청에 8년을 살았습니다.
마당의 나무, 성당의 감실, 복도에 있는 그림도 반가웠습니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는 사목국에서 근무했습니다. 20년 전이니 젊은 날이었습니다.
제가 맡은 업무는 ‘교육담당’이었습니다. 구역장, 반장을 위한 월례교육을 준비했습니다.
남성, 여성 총구역장을 위한 피정을 준비했습니다.
사목국에는 사제들이 10명 있었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열띤 토론을 했고,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2004년 의정부 교구가 분할되면서 몇몇 신부님들은 의정부 교구를 선택하였습니다.
2013년부터 2018년까지는 성소국에서 근무했습니다.
‘사제’라는 제목으로 3부작 다큐를 제작하였습니다.
본당 성소후원회 방문을 하였습니다.
교황방한 준비 위원회에서 ‘영성, 신심 분과’를 맡아서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8년을 지냈던 곳이라서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이어달리기’처럼 이젠 다른 신부님들이 교구청에서 근무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주교님과 면담을 한 후에 돌아왔습니다.
미국에 온 지도 어느덧 5년이 되어갑니다.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의 일을 맡았습니다. 신문홍보를 위해서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매주 화요일 아침이면 본사에서 오는 자료를 다운 받았습니다.
월요일에는 직원미사, 수요일에는 직원회의가 있습니다.
저의 부족함과 팬데믹의 여파로 운영에 어려움이 있지만 아직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평화신문 주최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이스라엘 요르단, 그리스 터키, 이탈리아, 한국’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들으신 주교님께서 ‘바쁘게 사네.’라고 하셨습니다.
동북부 엠이 대표신부를 3년 동안 하였습니다.
주말 체험도 있었고, 피정도 하였습니다. 가을이면 소풍도 다녀왔습니다.
지금은 동북부 꾸르실료 지도신부를 맡고 있습니다.
남성 제42차 꾸르실료 교육에 함께 하였습니다.
퀸즈 성당의 평일미사를 도와주고 있고, 부르클린 성당의 주일미사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달릴 길을 다 달린 것’은 아니지만,
나름 바쁘고 분주하게 지낸 것 같습니다.
뉴욕에서의 임기를 마치고, 언젠가 다시 뉴욕으로 온다면
그때도 ‘감회가 새롭다.’라고 느낄 것 같습니다.
신문사, 성당, 엠이, 꾸르실료는 저의 뉴욕 생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의 사제들은 저의 뉴욕 생활에 위로와 기쁨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교구청에서 지냈던 것도, 뉴욕의 신문사에서 지내는 것도
제게는 기쁨이고, 즐거움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어디에서 지내든지 필요한 것이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 삶의 완성이라고 합니다.
사랑이 있다면 교구청에서의 생활도, 뉴욕에서의 생활도 감사할 수 있고,
만족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우리는 그것을 고린토 전서 13장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온갖 심오한 말을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고,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교구청에서의 생활도, 뉴욕에서의 생활도 ‘가시방석’과 같을 것입니다.
잘못한 이를 기꺼이 용서해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품어 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수난과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배반했을지라도 끝까지 믿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꺼지지 않는 열정으로 모든 것을 불태우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런 사랑만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사랑의 또 다른 말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십자가는 허무할 뿐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간다면 그곳이 어디이든지 ‘꽃자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 하루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너희는 행복하리니
하느님의 성령이 너희 위에 머물러 계시리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조욱현 토마스 신부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절).
이 말씀은 모순처럼 들릴 것이다.
이것은 가족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당신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라 하셨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우리 이웃도, 가족도 참으로 사랑할 수 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이렇게 하느님을 우리 삶의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는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7절)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마지막 단계는 십자가이다.
박해 때에는 그분을 따르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십자가였고,
평화를 누리는 시대에는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자기 뜻을 철저하게 죽이는 것이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를 잘 질 수 있도록 주님께서는 탑과 전쟁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첫째로 탑을 세우려는 사람은 먼저 그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계산하는 것과 같다.
완성하지 못하면 비웃음을 당한다.
예수님의 제자로 살기로 한 사람도 우선 충분한 열성을 쌓아두어야 한다.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31절)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의 전투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권세와 권력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령들입니다.”(에페 6,12)
여기에 육정, 정욕, 재물욕 등도 우리가 싸워야 할 적이다.
이제 하느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큰 뜻을 품었으면
결실을 보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려 노력해야 한다.
돌 하나로는 탑을 완성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계명 하나 지킨다고 온전한 성숙을 이룰 수는 없다.
기초를 놓고, “그 기초 위에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1코린 3,12)을 지어야 한다.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것은, 금이나 은보다 소중하다.
“저는 당신 계명을 금보다 순금보다 더 사랑합니다.”(시편 119,127)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하늘의 시민으로서 살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다 버리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서로의 의견은 다를 수 있고 그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그 ‘다르다’는 것이 서로 ‘틀리다’는 것으로 인식되어 서로 등을 돌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그래서 부모와 ‘의견이 틀리다’는 이유로 집을 뛰쳐나가기도 합니다.
이때 우리는 그가 ‘가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똑같이 집을 나간 행위이지만,
어떤 뜻을 품고 구도의 길을 걷겠다고 나가면 ‘출가’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그야말로 ‘출가’의 길입니다.
집착을 버리지 않고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단순히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모두를 내려놓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다른 여러 유대관계를 뒤로하고
모든 것에 앞서 주님을 첫째 자리에 모셔야 합니다.
하느님은 가족보다 중요하며 온갖 인간적인 권리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맥에 매이게 되면 자유를 잃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있어서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주님께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랑이신 예수님께서 다음 일을 안배하십니다.
제자들의 삶은 인간적인 욕망, 삶에 대한 자연적 갈망,
더 많이 소유하고 지배하고 싶은 마음들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비가 되려면 번데기의 껍질을 벗어야 하듯
사람도 새로운 존재, 새 생명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탯줄을 잘라야 합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어머니의 품을 떠나야 합니다.
우왕좌왕, 양다리 걸치기, 어중간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가출한 사람은 온갖 것에 마음을 쓰며 궁리합니다. 그야말로 잔머리 굴립니다.
그러나 출가한 사람은 지금 당장은 집을 버린 것 같지만 결코 집안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따르는데 어찌 사랑을 외면하고 자기 실속만 챙기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출가한 사람을 존경하고 우러러봅니다.
어떻게 그 어려운 길을 가시게 되었느냐고 묻습니다. 참 훌륭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기 자신의 출가의 삶은 관심이 부족합니다.
훌륭하다고 한 그 길에 자기 자신이나 자녀는 예외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미사 후 복사들에게 축복기도를 해 주면서 '미래의 신부님'이라고 불러 줍니다.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복사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저는 아닙니다. 제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합니다.'
육적인 대를 잇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적인 사도, 제자의 삶을 이어가는 것이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언젠가 생각하겠지요?
기도해 주십시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다 드리는 데는 어떠한 합리적 타협도 있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만을 갈망하기까지 쉽지 않은 길입니다. 그래서 기도가 더 필요합니다.
제자의 길에 신중함이 있어야 하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단호한 결단과 응답이 요구됩니다.
내 삶이 끊임없는 ‘출가’이기를 희망하며 자녀들에게도 큰 뜻을 품고
하느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는 출가의 삶에 눈뜨기를 기도합니다.
출가하는 자녀가 많아지길 기도하며 그 길에 은총이 충만하길 빕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세상과 천상의 희망 안에서 끊임없는 결단을 요구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同行의 의미와 追從의 의미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께서 식사 초대를 받으셨던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루카 14,1-24)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금 여정에 오르셨다.
이 여정은 예루살렘을 향한 길이고, 죽음을 향한 길이다.
많은 군중이 예수를 동행하였다고 한다.
인생의 여정에 ᅟᅩᆼ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기쁨과 보람, 고통과 슬픔, 수고와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 서로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대체 어디까지 동행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수를 따르는 군중은 과연 예수를 어디까지 동행할 수 있을까?
오늘은 예수께서 ‘당신과의 동행’의 의미를 밝혀 주신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의 골고타에서 자기 생애의 최후를
십자가 죽음으로 맞이하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어떤 동행자도 예수와 똑같은 방법으로
십자가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동행자들 중에서 당신을 끝까지 따를 수 있는
추종자들을 얻으려 하시는 것이다.
同行의 사전적 의미는 ‘길을 함께 가는 것이다.’
길을 함께 간다고 해서 같은 목적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追從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뒤나 그 뜻을 쫓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추종은 길을 함께 가는 동행의 뜻을 가지면서
先行者의 뜻을 끝까지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를 추종한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끝까지 가는 것이며,
예수 제자 됨의 길을 걷는 것이다. 그러므로 추종은 동행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다.
얼마나 어려운지는 복음의 말씀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오늘 복음이 제시하는 예수 추종의 조건은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는 자기부정이다.(26절)
자기 부정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인데,
이는 부모, 처자, 형제자매, 친구까지 미워하는 것으로 비약된다.
둘째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27절)
여기서 강조되는 점은 ‘자기 십자가’이다.
다른 누군가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다.
우리가 대학교육 수학능력을 평가하는 시험, 즉 수능시험을 치른다고 할 때
쳐야 할 과목을 크게 일반 고통과목과 특수 선택과목으로 나누듯이,
예수 추종(제자 됨)의 조건에도 共通과 選擇이 있다.
공통에 해당하는 것이, 첫 번째 추종 조건인 자기 부정이다.
선택에 해당하는 것이, 두 번째 조건인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물론 십자가라는 말은 같지만, 그 십자가의 내용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추종하려는 누구에게나 같은 방법을 요구하거나 강요하지 않으신다.
망대를 지으려는 사람이 그만한 비용이 있는가를 곰곰이 따지거나,
일만의 군사로 이만의 군사와 전쟁을 치르려는 임금이 승산이 없다고 판단되면
즉각 상대방 임금에게 和平을 청하듯이,(28-32절)
예수 추종의 기본 정신은 자기 부정이지만, 추종의 방법은 다양하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하시지만,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이 강조하듯이
추종의 기본 정신인 자기 부정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는 것’(33절)으로 요약된다.
가진 것을 모두 버리라고 해서 버릴 것을, 그저 물질적인 재물이나 재산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가 주님을 따르는데 무엇을 버려야 할 지를 앉아서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명예와 권력, 고집과 아집, 이기심과 욕심, 위선과 착취, 취미와 재미 등,
때로는 정말 재물과 재산, 내가 가장 아끼는 소유물, 부모나 형제자매, 친구가 될 수도 있다.
무엇이든 그것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달고 예수 추종에 걸림돌이 된다면,
사탄과 악습의 굴레에 사로잡힐 것이 된다면, 과감하게 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럴 때만이 자유롭게, 그리고 각자 나름의 십자가를 지고 진정 예수를 추종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승화 시몬 신부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모든 계명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정리가 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희망인 하느님을 바라보기에
하느님과 더 깊은 사랑으로 나아가고
우리가 살아가는 곳이 세상이기에
이웃에게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기는 참 어렵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많을수록
사랑은 내 안에 머물게 됩니다.
하느님과 이웃에게 전해지지 않기에
우리가 가진 것이 많을수록 사랑은 어려워집니다.
더 사랑하는 이가 감당해야 할 몫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와 확신입니다.
이것이 또한 우리가 가져야 할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우리와 똑같은 고통을 감수하고
죽음을 통해 생명을 내어 주셨듯,
우리 역시 받은 사랑을 나눠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와
이를 통해 더 큰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용기와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께 더 나아갈 수 있고
더 나아간 만큼
이웃에게 사랑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내 안에 먼저 사랑을 담고
그 사랑을 전해줄 수 있는
용기와 확신을 키우는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