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흥길
한 떼거리의 피난민들이 머물다 떠난 자리에 소녀는 마치 처치하기 곤란한 짐짝처럼 되똑하니 남겨져 있었다. 정갈한 청소부가 어쩌다가 실수로 흘린 쓰레기 같기도 했다. 하얀 수염에 붉은 털옷을 입고 주로 굴뚝으로 드나든다는 서양의 어느 뚱뚱보 할아버지가 간밤에 도둑처럼 살그머니 남기고 간 선물 같기도 했다.
아무튼 소녀는 우리 마을 우리 또래의 아이들에게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발견되었다. 선물치고는 무척이나 지저분하고 망측스러웠다. 미처 세수도 하지 못한 때꼽재기 우리들 눈에 비친 그 애의 모습은 거의 거지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우리들 역시 그다지 깨끗한 편이 못 되는데도 그랬다.
먼저 쫓기는 사람들의 무리가 드문드문 마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포성이 울렸다. 돌산을 뚫느라고 멀리서 터뜨리는 남포의 소리처럼 은은한 포성이 울릴 때마다 집안의 기둥이나 서까래가 울고 흙벽이 떨었다. 포성과 포성의 사이사이를 뚫고 피난민의 행렬이 줄지어 밀어닥쳤고, 마을에서 잠시 머물며 노독을 푸는 동안에 그들은 옷가지 금붙이 따위 물건을 식량하고 바꾸었다. 바꿀 만한 물건이 없는 사람들은 동냥을 하거나 훔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꽁무니에 포성을 매단 채 새롭게 밀어닥치면 먼저 왔던 사람들은 들어올 당시와 마찬가지로 몇 가지 살림살이를 이고 지고 다시 홀연히 길을 떠났다.
어느 마을이나 다 사정이 비슷했지만 특히 우리 마을로 유난히 피난민들이 많이 몰리는 것은 만경강 다리 때문이었다. 북쪽에서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자연 우리 마을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었다. 우리가 알기로는 세상에서 가장 긴 그 다리가 폭격에 의해 아깝게 끊어진 뒤에도 피난민들은 거룻배를 이용하여 계속 내려왔다. 인민군한테 당할 때까지 피난민들의 발길은 그치지 않고 있었다.
어른들은 피난민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별의별 이상한 사투리를 쓰는 그들이 사랑방이나 헛간이나 혹은 마을 정자에서 묵다 떠나고 나면 으레 집안에서 없어지는 물건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굶주린 어린애를 앞세워 식량을 애원하는 그들 때문에 뒤주 속에 쌀바가지를 넣었다 꺼내는 어머니의 인심이 날로 얄팍해져갔다.
그러나 우리 어린애들은 전혀 달랐다. 어른들 마음과는 아무 상관없이 누나와 나는 피난민들을 마냥 부러워하고 있었다. 세상의 저쪽 끝에서 와서 다른 저쪽 끝까지 가려는 사람들 같았다. 무거운 짐을 들고 불편한 몸을 이끌며 길을 떠나는 그들의 모습이 오히려 우리들 눈에는 새의 깃털만큼이나 가벼워 보였다. 그들처럼 마음 내키는 대로 세상을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지 않고 우리는 왜 마을에 붙박혀 살아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도 피난을 떠나자고 아버지한테 조르기로 작정했다.
"밥을 굶어야 된다.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고, 알았지야? 툇돌에서 오줌누고 뜰팡에다 똥싸고, 알았지야?"
삽짝 밖에서 누나가 내 귀에 대고 연신 끈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집안에서 내 청이라면 웬만한 것은 다 들어주는 아버지의 성미를 누나는 십분 이용할 셈이었다. 나는 누나가 시키는 대로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울고 떼를 써도 아버지 입에서는 좀처럼 허락이 내리지 않았다.
아버지한테 마침내 피난을 가도 좋다는 말이 떨어진 것은 만경강 다리가 무시무시한 폭격에 의해 허리를 잘리고 난 그 이튿날이었다. 아직은 제법 멀지막이서 노는 줄로 알았던 전쟁이란 놈이 어느새 어깨동무라도 하려는 기세로 바투 다가와 있었으므로 우리 마을도 이젠 안심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할머니 편에 우리 오뉘를 묶어 마을에서 삼십여 린 떨어진 고모네 집에 잠시 피난시킬 작정이었다. 아버지하고 어머니는 마을에 남아 집을 지키기로 되었다.
간단한 옷보따리를 챙겨 누나와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피난길을 떠났다. 그토록 바라고 바라던 피난인지라 누나와 아는 원정이라도 떠나는 즐거운 기분이었다. 한길엔 한여름 햇볕만이 쨍쨍할 뿐 강아지 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았다. 소리개 한 마리가 멀리 보이는 길가 공동묘지 위에 높이 떠 마치 하늘에다 못으로 고정시켜 놓은 박제의 표본인 양 오랫동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 늦게 피난을 떠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여느 피난민의 물결을 거슬러 북쪽을 향해서 먼길을 가는 사람은 우리들뿐이었다. 고모네가 살고 있는 마을은 북쪽 산골이었다. 거기 말고는 달리 피난 갈 만한 데가 없었다.
적막에 쌓인 공동묘지 옆을 지나면서도 나는 조금도 무서운 줄을 몰랐다. 남들처럼 우리도 지금 피난을 가고 있다는 흥분에 사로잡혀 임자 없는 무덤에 뻥 뚫린 여우 구멍을 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누나는 오히려 한 수 더 떴다. 길가 아카시아 나무에서 잎을 따 손을 들고 한 개씩 똑똑 떼내면서 누나는 학교 운동장에서나 하는 노래를 입속으로 흥얼거리고 있었다. 여우야 여우야 뭐허어니. 밥먹느은다. 무슨 반찬. 개구리 반찬... 이불 밑에 이 잡어먹고 송장 밑에 피 빨어먹고.....
갑자기 누나가 노래를 뚝 그쳤다. 그때 한길 저쪽 멀리에서 뿌연 먼지 구름을 끌면서 달려오는 오토바이를 나는 보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뭇가지와 잡초로 뒤덮인 두 개의 작은 언덕이 우리들 바로 코앞으로 확 다가들었다. 속력을 줄이는 척하다가 오토바이들은 양쪽 겨드랑이를 스칠 듯이 무서운 기세로 우리를 그냥 지나쳐 갔다. 오토바이가 지나갈 때 나는 초록 덤불로 그럴싸하게 잘 위장된 눈초리와 쇠붙이에 반사되는 햇빛의 파편들을 볼 수 있었다, 난생 처음 인민군하고 맞닥뜨리는 순간이었다. 몸체 옆구리에 행랑채까지 딸린 괴상한 모양의 오토바이들이 지나간 다음에도 우리는 한동안 손과 손을 맞잡은 채 부들부들 떨면서 한길 복판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이불 밑에 이 잡어먹고....."
누나의 입에서 간신히 이런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이미 노래가 아니었다. 누나는 얼이 쏙 빠진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송장 밑에 피 빨어먹고......"
그러자 할머니의 손바닥이 냉큼 누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잔뜩 부르쥔 누나의 주먹이 스르르 풀리면서 형편없이 짓눌린 아카시아 잎이 땅으로 떨어졌다.
누나와 너는 할머니로부터 무섭게 지청구를 먹어 가며 그러잖아도 빠른 걸음으로 더욱 재우쳤다. 그러나 얼마 가지도 않아 우리는 다시 수많은 인민군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두 줄로 서서 양쪽 길가로 내려오고 우리는 그 사이를 뚫고 도무지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간신히 움직여 복판을 걸어갔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피난길이었다. 북쪽을 향해서 피난을 가는 우리를 인민군들은 아무도 시비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까맣게 그을린 얼굴을 들어 퀭한 눈으로 우리를 흘낏흘낏 곁눈질하면서 말없이 행군해 가고 있었다.
"죽어도 더는 못 가것다. 해 넘기 전에 어서어서 집으로 돌아가자. "
인민군의 굴속을 겨우 빠져나왔을 때 할머니는 말했다. 우리는 한길을 피해서 논두렁과 밭고랑을 멀리 돌아 깜깜해진 뒤에야 가까스로 마을에 닿을 수 있었다.
내가 소녀를 맨 처음 발견한 것은 한나절로 끝나 버린 그 우스꽝스런 피난길에서 돌아온 바로 그 이튿날이었다.
아침이었다. 마을엔 벌써 낯선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재 너머 학교를 향해 몰려가고 있었다. 나는 삽짝을 젖히고 골목길을 나섰다.
"얘."
생판 모르는 녀석이 간드러진 소리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주제 꼴은 꾀죄죄해도 곱살스런 얼굴에 꼭 계집애처럼 생긴 녀석이었다. 우선 생김새에서 풍기는 어딘지 모르게 도시 아이다운 냄새가 나를 당황하도록 만들었다. 더구나 사람을 부르는 방식부터가 우리하고는 딴판이었다. 그처럼 교과서에서나 보던 서울 말씨로 나를 부르는 아이는 아직껏 마을에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왜 놀래니? 내가 무서워 보이니?"
조금도 무섭지가 않았다. 다만 약간 얼떨떨한 기분일 뿐이었다. 피난민이 줄을 잇는 동안 갖가지 귀에 선 말씨들을 들어왔으나 녀석처럼 그렇게 착 감기는 목소리에 겁없는 눈짓을 던지는 아이는 처음이었다. 녀석은 토박이 아이들이 피난민 아이들한테 부리는 텃세가 조금도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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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이자 아모 염려 없다. 어서 내려오니라, 어서."
한걸음 뒤늦어 득달같이 달려온 어머니가 소나무 위를 까마득히 올려다보며 한 것 보드라운 말씨로 달랬다. 소나무 등지에 딱정벌레처럼 달라붙어 꼼짝도 않는 하얀 궁둥이가 보였다. 놀랍게도 명선이는 시원스런 알몸뚱이로 있었다. 어느 겨를에 어떻게 거기까지 기어올라갔는지 명선이는 가마득한 높이에 매달려 홀랑 벌거벗은 채 흐느끼고 있었다. 아무리 내려오라고 타일러도 반응이 없자 아버지가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올라가 위험을 무릅쓰고 곡예라도 하듯이 그 애를 등에 업고 내려왔다.
"오매 오매, 자갸 지집애 아녀!"
땅에 내려서기 무섭게 얼른 돌아서며 사타귀를 가리는 명선이를 보고 누군가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나 또한 초저녁 어스름 속에 얼핏 스쳐 지나가는 눈길만으로도 그 애한테는 고추가 없다는 사실을 넉넉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러매 말이네. 머스맨 줄만 알았더니 인제 보니 지집애구먼."
"참말로 재변이네, 재변이여!"
모여 서 있던 마을 사람들이 저마다 탄성을 지르며 혀를 찼다. 어머니가 잽싸게 치마폭으로 명선이의 알몸을 감쌌다. 모닥불이라도 뒤집어쓴 것같이 공연히 얼굴이 화끈거려서 나는 차마 명선이를 바로 볼 수가 없었다.
"요, 요것이, 개패같이 달린 요것이 뭣이디야!"
명선이의 하얀 가슴께를 들여다보며 어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곁에 있던 아버지가 얼른 그것을 가리려는 명선이의 손을 뿌리치고 뚝 잡아챘다. 줄에 매달린 이름표 같은 것이었다. 아직도 한줌이 빛살이 옹색하게 남아 있는 서쪽 하늘에 대고 거기에 적혀진 글씨를 읽은 다음 아버지는 마치 무슨 보물섬의 지도나 되듯 소중스레 바지춤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향해 돌아서면서 눈을 딱 부릅떠 엄포를 놓는 것이었다.
"나허고 원수 척질 생각 아니면 앞으로 야한 티 터럭손 하나 건딜지 마시오!"
언젠가 가뭄 흉년 때 이웃 논의 임자하고 물꼬싸움을 벌이면서 시퍼렇게 삽날을 들이대던 그 때의 그 표정보다 훨씬 더 포악해 보였다. 우리 논에서 떨어지는 빗물이나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우리 집안에 우연히 굴러 들어온 명선이의 소유권을 마을 사람들 앞에서 우격다짐으로 가리고 있었다.
"우리가 친자식 이상으로 애끼고 길르는 아요. 만에 일이라도 야한 티 해꼬지 헐라거든 앙화가 무섭다는 걸 멩심허시오!"
덩달아 어머니도 위협을 잊지 않았다. 명선이가 입은 손해는 바로 우리 집안의 손해나 마찬가지라는 주장이었다. 물론 어머니는 명선이 때문에 생기는 이익이 곧바로 우리 이익이란 말을 입밖에 비치지도 않았다.
사람들을 따돌리고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어머니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아버지한테 다그쳤다.
"개패에 무슨 사연이 적혔던가요?"
"갸네 부모가 쓴 편지여."
"누구한티요?"
"누구긴 누구여, 나지."
"오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당신헌티 편지를......"
"이런 딱한 사람 봤나. 아, 갸를 맡아서 기를 사람한티 쓴 편지니께 받는 사람이 나지 누구겄어."
"뭐라고 썼습디여?"
"자기네가 혹 난리 바람에 무슨 일이라도 당허게 되면 무남독녀 혈육을 잘 부탁 헌다고, 저승에 가서도 그 은혜는 잊지 않겄다고 서울 어디 사는 누네 딸이고 본관이 어디고 생일이 언제라고....."
"가락지 말은 안 썼어라우?"
"안 썼어."
아버지는 딱 잘라 대답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버지는 득의연한 미소와 함께 어머니한테 나직이 속삭이고 있었다.
"금가락지 말은 없어도 저 먹을 건 다소 딸려놨다고서 있어. 사연이 복잡헌 부잣집인 것만은 틀림없다고."
명선이를 달아나지 못하게 감시하는 새로운 임무가 나한테 주어졌다. 우리 식구 모두는 상전을 모시듯이 명선이에게 한결같이 친절했다. 동네 사람 어느 누구도 감히 넘볼 마음을 못 먹도록 뚝심 좋은 아버지는 그 애의 주위에 이중 삼중으로 보호의 울타리를 쳐 놓고도 언제나 안심하지 못했다. 나는 그 애의 그림자 노릇을 착실히 했다. 그러나 금반지를 어디가 감춰 뒀는지 그것만은 차마 묻지를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애는 내 사투리를 닮아 가고 나는 반대로 그 애의 서울말을 어색하게 흉내내기 시작했다.
타고난 본래의 여자 모양을 되찾은 후에도 명선이는 갈 데 없는 머스매였다. 하는 짓거리마다 시골 아이들 뺨치는 개구쟁이였고 토박이의 텃세를 계집애라는 이유로 쉽사리 물리칠 수 있게 되면서부터 온갖 망나니짓에 오히려 우리의 앞장을 서곤 했다. 다람쥐처럼 나무도 뽀르르 잘 타고 둠벙에서는 물오리나 다름없이 헤엄도 잘 쳤다. 수놈 날개에 노랗게 호박 가루를 칠해서 암놈으로 위장하여 말잠자리를 우리보다 솜씨 있게 낚는가 하면 남의 집 울타리에 달린 호박에 말뚝도 박고 여름밤에 개똥벌레를 여러 마리 종이 봉지 안에 가두어 어른이 담뱃불 흔드는 시늉을 하면서 다가와 술래를 따돌리는 재간도 부릴 줄 알았다. 인공 치하에서 학교가 쉬는 동안을 우리는 마냥 키드득거리며 떼뭉쳐 어울려 다녔다.
심심할 때마다 명선이는 나를 끌고 끊어진 만경강 다리로 놀러 가곤 했다. 계집애답지 않게 배짱도 여간이 아니어서 그 애는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위험천만한 곡예를 부서진 다리 위에서 예사로 벌여 우리의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누가 제일 멀리 가는지 시합하는 거다."
폭격으로 망가진 그대로 기나긴 다리는 방치되어 있었다. 난간이 떨어져 달아나고 바닥에 커다란 구멍들이 뻥뻥 뚫린 채 쌀뜨물보다도 흐린 싯누런 물결이 일렁이는 강심 쪽을 향해 곧장 뻗어 나가다 갑자기 앙상한 철근을 엿가락 모양으로 어지럽게 늘어뜨리면서 다리는 끊겨져 있었다. 얽히고 설킨 철근의 거미줄이 간댕간댕 허공을 가로지르고 있는 마지막 그곳까지 기어가는 시합이었다. 그리고 시합에서 승리자는 언제나 명선이었다. 웬만한 배짱이라면 구멍이 숭숭 뚫린 시멘트 바닥을 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었다. 하지만 시멘트가 끝나면서 강바닥이 까마득한 간격을 두고 저 아래에서 빙글빙글 맴을 도는 철골 근처에 다다르면 누구나 오금이 굳고 팔이 떨려 한 발자국도 더는 나갈 수가 없었다. 오로지 명선이 혼자만이 얼키설키 허공을 건너지른 엿가락 같은 철근에 위태롭게 매달려 세차게 불어 대는 강바람에 누나한테 얻어 입은 치맛자락을 펄렁거리며 끝까지 다 건너가서 지옥의 저쪽 가장자리에 날름 올라앉아 귀신인 양 이쪽을 보고 낄낄거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낄낄거리며 우리들 머스매의 용기 없음을 놀릴 때 그 애의 몸뚱이는 마치 널을 뛰듯이 위아래로 훌쩍훌쩍 까불리면서 구부러진 철근의 탄력에 한바탕씩 놀아나고 있었다.
어느 날 나는 명선이하고 단둘이서만 다리에 간 일이 있었다. 그때도 그 애는 나한테 시합을 걸어왔다. 나는 남자로서의 위신을 걸고 명선이의 비아냥거림 앞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 봤으나 결국 강바닥에 깔린 뽕나무밭이 갑자기 거대한 팽이가 되어 어찔어찔 맴도는 걸보고 뒤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명선이한테서 겁쟁이라고 꼼짝없이 수모를 당할 차례였다.
"야아, 저게 무슨 꽃이지?"
그런데 그 애는 놀림 대신 갑자기 뚱딴지같은 소리를 질렀다. 말 타듯이 철근 뭉치에 올라앉아서 그 애가 손바닥으로 가리키는 곳을 내려다보았다. 거대한 교각 바로 위 무너져내리다만 콘크리트 더미에 이전에 보이지 않던 꽃송이 하나가 피어 있었다. 바람을 타고 온 꽃씨 한 알이 교각 위에 두껍게 쌓인 먼지 속에 어느새 뿌리를 내린 모양이었다.
"꽃이름이 뭔지 아니?"
난생 처음 보는 듯한, 해바라기를 축소해 놓은 모양의 동전 만한 들꽃이었다.
"쥐바라숭꽃......"
나는 간신히 대답했다. 시골에서 볼 수 있는 거라면 명선이는 내가 뭐든지 다 알고 있다고 믿는 눈치였다. 쥐바라숭이란 이 세상엔 없는 꽃이름이었다. 엉겁결에 어떻게 그런 그림을 지어낼 수 있었는지 나 자신 어리벙벙할 지경이었다.
"쥐바라숭꽃..... 이름처럼 정말 이쁜 꽃이구나. 참 앙증맞게두 생겼다."
또 한바탕 위험한 곡예 끝에 기어코 그 쥐바라숭이꽃을 꺾어 올려 손에 들고는 냄새를 맡아보다가 손바닥 사이에 넣어 대궁을 비벼서 양산처럼 팽글팽글 돌리다가 끝내는 머리에 꽂는 것이었다. 다시 이쪽으로 건너오려는데 이때 바람이 휙 불어 명선의 치맛자락이 훌렁 들리면서 머리에서 꽃이 떨어졌다. 나는 해바라기 모양의 그 작고 노란 쥐바라숭이꽃 한 송이가 바람에 날려 싯누런 흙탕물이 도도히 흐르는 강심을 향해 바람개비처럼 맴돌며 떨어져 내리는 모양을 아찔한 현기증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가 명선이한테서 순순히 얻어낸 금반지는 두 번째 것으로 마지막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온갖 지혜를 짜내어 백방으로 숨겨 둔 장소를 알아내려 안간힘을 달래 보았으나 금반지 근처에만 얘기가 닿아도 명선이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침뭇 속의 도리질로 완강히 버티곤 했다.
날이 가고 달이 갔다. 어느덧 초가을로 접어드는 날씨였다. 남쪽에서 쳐 올라오는 국방 군에 밀려 인민군이 북쪽으로 쫓겨가지 시작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생각보다 전쟁이 일찍 끝나 남쪽으로 피난 갔던 숙부가 어느 날 불쑥 마을에 다시 나타날 경우를 생각하면서 어머니는 딱할 정도로 조바심을 치기 시작했다. 내가 벌써 귀띔을 해 주어서 어른들은 명선이가 숙부로부터 버림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도망쳤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 어떻게든 명선이의 입을 열게 하려고 아버지는 수단 방법을 안 가릴 자세였다.
그 날도 나는 명선이와 함께 부서진 다리에 가서 놀고 있었다. 예의 그 위험천만한 곡예 장난을 명선이는 한창 즐기는 중이었다. 콘크리트 부위를 벗어나 그 애가 앙상한 철근을 타고 거미처럼 지옥의 가장귀를 향해 조마조마하게 건너갈 때였다. 이때 우리들 머리 위의 하늘을 두 쪽으로 가르는 굉장한 폭음이 귀뺨을 갈기는 기세로 갑자기 울렸다. 푸른 하늘 바탕을 질러 하얗게 호주기 편대가 떠가고 있었다. 비행기의 폭음에 가려 나는 철근 사이에서 울리는 비명을 거의 듣지 못하였다. 다른 것은 도무지 무서워할 줄 모르면서도 유독 비행기만은 병적으로 겁을 내는 서울 아이한테 얼핏 생각이 미쳐 눈길을 하늘에서 허리가 동강이 난 다리로 끌어냈을 때 내가 본 것은 강심을 겨냥하고 빠른 속도로 멀어져가는 한 송이 쥐바라숭꽃이었다.
명선이가 들꽃이 되어 사라진 후 어느 날 한적한 오후에 나는 그때까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모험을 혼자서 시도해 보았다. 겁쟁이라고 비웃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의외로 용기가 나고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은 것이었다. 나는 눈에 띄는 그 즉시 거대한 팽이로 둔갑해 버리는 까마득한 강바닥을 보지 않으려고 생땀을 흘렸다. 엿가락으로 흘러내리다가 가로지르는 선에 얹혀 다시 오르막을 타는 녹슨 철근의 우툴두툴한 표면만을 무섭게 응시하면서 한 뼘 한 뼘 신중히 건너갔다. 철근의 끝에 가까이 갈수록 강바람을 맞는 몸뚱이가 사정없이 까불렸다. 그러나 나는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그 일을 해내고 말았다. 이젠 어느 누구도, 제 아무리 쥐바라숭이꽃일지라도 나를 비웃을 수는 없게 되었다.
지옥의 가장귀를 타고 앉아 잠시 숨을 고른 다음 바로 되돌아 나오려는데 이때 이상한 물건이 얼핏 시야에 들어왔다. 낚시바늘 모양으로 꼬부라진 철근의 끝자락에다 끝으로 칭칭 동여맨 자그만 헝겊 주머니였다. 명선이가 들꽃을 꺾던 때보다 더 위태로운 동작으로 나는 주머니를 어렵게 손에 넣었다. 가슴을 잡죄는 긴장 때문에 주머니를 열어 보는 내 손이 무섭게 경풍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머니 속에서 말갛게 빛을 발하는 동그라미 몇 개를 보는 순간 나는 손에 든 물건을 송두리째 강물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윤흥길(尹興吉, 1942 - )
전북 정읍 태생 전주사범학교와 원광대 국문과 졸업. 1968년 《한국일보》신춘 문예에 단편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되어 등단. 윤흥길은 7,8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의 한 사람이다. 그는 철저한 리얼리즘적 기율에 의해 시대의 모순과 근대사에 대한 심원한 통찰력을 보여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일상에 대한 작고 따뜻한 시선을 아울러 갖추고 있다. 그의 문학적 출발점이라 할 <장마>는 6.25를 다루고 있으나, 단순한 비극에 그치지 않고 감동적인 화해의 모습을 형상화해 내고 잇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직선과 곡선> <창백한 중년> 등의 연작에서는 왜곡된 산업화가 초래한 모순을 비판적 시각으로 포착하고 있으며, <완장>과 같은 장편에서는 권력이 속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의식을 풍자와 해학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장편 <에미> 또한 격동의 현대사를 살아온 여인의 고단한 수난사를 애정 어린 시선으로 형상화하고 있어 그의 대표적이라 할 만하다.
참고
윤흥길의 작품세계-불행한 현대사 극복-소시민의 삶 그려
소설가 윤흥길씨는 한국인의 불행한 현대사를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그 비극을 극복해온 한국인의 생명력을 그렸다. 국군과 인민군으로 나 뉜 한 가족의 기막힌 사연을 그린 걸작 '장마'를 비롯, '에미' '완장' 등의 장편이 그의 대표작이다.
그가 일급 작가로 문단에서 자리를 굳힌 것은 77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에 중편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를 발표하면서다. 당시 도시 주변부 하층민을 소시민적 지식인의 눈으로 그린 이 소설의 밑바닥에는 70년대 초 경기도 광주대단지에서 벌어졌던 주민과 경찰의 충돌 사건이 깔려있다.
소설 주인공 '권기용'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에 다니면서 가족을 먹여살리는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그러나 그는 광주 대단지에 어렵사리 땅을 구해 내집 마련의 꿈을 키우면서 서울시와 경기도에 정책 개선을 요구하는 주민대책위원회 간부가 됐다가 시위 현장에 휩쓸린 뒤 '폭동사건'의 주모자로 낙인찍힌다.
이 소설은 그 '권'씨가 작중 화자인 교사 '나'의 집에 세들어 살면 서 시작한다. '나'는 바로 경기도 성남에서 교사를 지냈던 작가 윤씨 의 분신이다.
'권'씨는 폭동주모자란 어마어마한 죄목으로 인해 직장에서도 쫓겨 나 하층민으로 전락한 뒤에도 자존심을 잃지 않아 열 켤레나 되는 구두를 버리지 않는다. 소설 끝에서 '권'씨가 집을 나가기 때문에 남는 구 두는 아홉 켤레가 된다.
작가는 "나중에 서울로 이사해서 어렵게 마련한 우리 집 문간방에 세들어산 사내가 구두를 많이 갖고 있었다"면서 "자신의 구두를 열심 히 닦던 그 사내의 인상적인 모습이 이 소설을 낳게 했다"고 말했다.
작가는 77년 한해 동안 역시 '권'씨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직선과 곡선' '날개 또는 수갑' '창백한 중년' 등을 연작형태로 발표했고, 그 해말 소설집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를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간했다. 이 책은 70년대 한국사회가 앓고 있던 계층간 단절을 소시민 적 지식인의 기막힌 인생유전으로 그려 현실비판적 지식인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작가 이문구씨는 "그 해 크리스마스 때 사람들이 구두표 보다 더 싼 소설집 '아홉켤레의...'를 선물했던 탓에 금방 3판을 찍었다"면서 "1977년은 윤흥길의 해였다"고 말한 바 있다. <박해현기자>
첫댓글 어떻게 "쥐바라숭꽃"이라는 이름을 생각해 냈을까...이런 이름은 생각을 할래도 할수가 없는데..그냥 하늘꽃이나..노란색이니까...노랑망초...우물각시..노랑냉채....뭐 이런 이름들도 있는데..."쥐바라숭???" 아무리 생각해도 저런 이름 생각하기는 쉽지 않아..
맞아요.^^이거 반읽고 이따 저녁에 조용히 반읽어야징.넘길당.ㅎㅎㅎㅎ이해해주삼~~~
쥐바라 숭꽃.... 제 친구에요~ ㅎㅎㅎㅎㅎ 그 친구 보고 읽어 보라구 전화 해야 긋당....ㅋㅋ
아무래도 그친구는 윤흥길님의 소설을 읽고 맘에 들어 따 왔을거야...."아르테미스"니 뭐 이런거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