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은 미친듯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고, 그 밑에서 있는 나도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간간히 보이는 사람들 사이로 살익는 냄새가 뜨겁게 진동하고 있었다.
내 눈은 누구보다도 더 작아졌고, 어느새 실눈이 됐는지 아지랭이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살인적인 무더위를 뒤로하고 나는 그렇게 찾아헤매던 카페로 들어갔다.
바깥날씨와 상반되는 에어콘의 위엄에 다시 밖으로 나가는것이 두려울만큼 에어콘바람은 서늘했다.
그와 약속한날이 언제더라..
벌써 3개월이나 되었었다.
-8월 2일날 그곳에서 만나.-
라는 짧은 문자메시지를 보내고는 핸드폰을 24시간 내내 꺼버린 그의 행동에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 여기가 그곳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항상 이 카페를 즐겨 왔었다. 아니, 이 카페의 단골손님일지도 몰랐다.
'딸랑-'
또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더운바람이 치밀었고,
터벅터벅 거리며 들어오는 낯선 발자국에 내 심장은 미친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의 발자국 소리였다.
몇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으며, 가까이 다가올때마다 심장이 잭깍 반응하는 소리에
나는 또 얼굴에 홍조를 뛰우며 뒤를 쳐다봤다.
그러나 그는 나를 보고서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는듯 두리번 두리번 거리고는 직원에게
무언가를 속삭이고는 의자에 앉아 버렸다.
덕분에 나는 순간 당황할수밖에 없었고, 직원은 내쪽을 바라보다 터벅터벅- 걸어왔다.
".....신혜성씨?"
"아. 네... 맞는데요."
"아. 잘됐네요. 이민우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제가 그쪽으로 안내하죠."
".........네."
이내 마음을 정리했다. 나를 보지 못했던 것이였을수도 있는일이었으니 말이다.
어찌됐건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고, 내 얼굴이 많이 변해서 못알아 볼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엄습해 오는 두려움은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신혜성씨.......?"
신혜성씨?
…불안감은 극도로 달해져 있었다.
".....당신이 신혜성씨 군요...
제 친구라길래 궁금해서 - 게다가 오늘날짜로 약속도 잡혀 있길래 부랴부랴 달려왔어요."
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2-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가 나를 잊었으리라고는… 아니 나에대한 기억이 전부 없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약간 변해서ㅡ, 잠시 못알아 봤으리라고 생각 했었다.
그의 말은 전부 미친듯이 내 가슴속에 새겨졌다.
그것도 아주 똑똑히ㅡ 천천히ㅡ 말이다.
"그 분이 내가 당신을 기억하지 못할거라고 하면서 신혜성씨 이름을 알려줬어요."
"…"
"그 분이 꼭 알아야 하는 사람이라며 혜성씨에 대해서 얘기해 주었어요."
"…"
"그런데 그 분이 말씀해주신 혜성씨보다- 제가 보고 있는 혜성씨가
더 멋있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조용히 듣고 있던 나는 무슨 오기가 생겼는지 민우 앞의 의자에 퍽- 앉았다.
그리고 인상을 뭐같이 쓰고는 민우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눈에 민우는 잠시 당황해 하다가도 다시 그 자식에 대한 얘기를 꺼낸다.
"좋은… 분이죠?"
"기억해."
"네? 무슨 소리시죠…?…"
"나. 나 기억 안나? 정말로? 정말로?! 이민우- 왜. 왜?"
차라리 절규에 가까우리라.
나는 끊임없이 그에게 얘기했다. 기억해, 기억해, 신혜성을 기억해 놔!!
"혜성씨?"
"왜- 왜 기억을 못해.. 내가 - 내가 .. 널....."
"신혜성.....씨?"
그리고는 다시 목석처럼 굳어버렸다. 그렇지, 너는 그 민우가 아니지.
그 차갑지만 정겨운 이민우가 아니지.
그런데도 나는 - 소리쳐 버리고 싶어.......
너는 ㅡ 왜 날 기억하지 못하니.
너는 ㅡ 왜 날 그렇고 그런 애로밖에 안보니.
너는 ㅡ 왜 예전의 이민우를 지워버렸어.
너는 ㅡ 왜 자꾸 날 애타게 만드니.
너는 ㅡ 왜? 왜?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분께서 혜성씨의 집이 바로 제 집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이렇게 오게 되었는데, 마음에 안드시면....."
"아니… 아니예요. 원래 당신 집이니까 들어와요. 나도 혼자 있으면 심심해요."
"감사합니다."
그래ㅡ, 나도 예전의 이민우를 지워버리고 지금의 이민우를 잠시 받아들일거야.
그래야 내가 편할것 같아. 예전의 이민우만 생각하다가는 내 골이 터져 나가버릴지도 몰라.
모든기억을 잊어버려서 어쩔수 없는 그를 - 내가 더 아프게 할순 없잖아.
이래뵈도ㅡ 난 그를 좋아했으니까. 그 자식도- 무엇보다도 그걸 잘 아니까.
*
이제 그가 나를 좋아하게 될거라는 생각은 눈곱만치도 하지 않았다.
씁쓸한 박카향이 내 입안을 적셔왔고 너무도 억울한 심정을 차마 어떤말로도 표현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하소현 할 길은 없었다. 내 팔자라고.
그렇게 수천번 수만번을 외어도 지금의 이민우는 웃기만 했다.
뭐가 그렇게 즐거워ㅡ? 난 이렇게 괴로운데.
"왜 웃으세요? 뭐가 묻었나요?"
"처음에는 반말 쓰시더니 이제 존댓말 쓰시네요? 불편해 보여요."
"…괜찮아요."
‘반말을 쓰면 다시 이민우가 돌아오지 않을것 같다.’고 하면 진심을 내뱉은 거겠지.
그는 지금을 더없는 행복으로 여겼다. 무엇보다도 즐겁고 활기찬 생활이라며 웃어대는 그에게
대놓고 '민우야ㅡ,' 라고 부를수는 없었다.
이것은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힘들었다.
이민우에게 민우야. 라고 부르는것. 3글자일 뿐이지만 엄청난 회오리가 지나갈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의 이민우는 지금의 생활을 좋아하고, 나도 지금의 생활을 좋아한다.
애써 그가 날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신경쓰지 않으련다ㅡ,
어짜피 나만의 짝사랑이었다.
먼저 고백한건 그였지만--------
그가 - 날 좋아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전혀- 생각도 해보지 않았던 것 이다.
그렇게 쌀쌀한 그가 나를 좋아할리 없었다.
"많이 덥죠? 혜성씨는- 땀이 많으시네요."
게다가 이렇게 사근사근하지는 않다. 그는- 절대로 그러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빌붙는듯 달라붙는건 나였고, 그는 귀찮다는듯 항상 띠거운 눈빛으로 쳐다봤었다.
키스? 뽀뽀?
피식- 어쩌다 한번이다.
포옹?
절대. 그는 마치 결벽증인듯 사람과 맞닥들이는 것을 싫어했다.
안았다 해도. 그는 금방 싫은 티를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난 지독한 짝사랑 중이었구나. 모든순간이 지금의 그로 인해서 알게 되었다.
지금의 그는 아무 한일도 없지만, 예전의 이민우와 지금의 이민우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무엇이 그리 좋다고 어린애마냥 실실- 웃어대는 지금의 이민우.
세상 살기 싫다며 회색머리칼의 쌀쌀한 눈매를 가졌던 예전의 이민우.
둘은 엄청난 대조를 이루고 있었고, 예전의 이민우도- 지금의 이민우도- 싫지는 않았다.
단지, 예전의 이민우는 나를 조금더 알고 있으리라-
나에게 조금 더 정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돌아와줘."
"무슨 소리세요?"
"민우야…."
제발..
제발......
이렇게 끝없이 널 소망할테니…
................... 너의 내면에 자리잡아 있는 나를 조금이라도 꺼내봐.
-3-
나는 그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차라리 내 간을 베어먹어. 그게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다왔어요- 제가 너무 끌고 다녔나요? 그냥 여기에 오고 싶어서 그랬어요."
"…"
아무말도 할수가 없었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 하는 짤막한 생각이 교차했다.
예전처럼 대할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사근사근하게 굴기에도 너무 뻔뻔했다.
어떻게 할까ㅡ, 그냥 내 생각가는대로 그저 짧막하게 '그러네요.' 라고 말할까?
-이민우. 어떤걸 원하니?
"불- 편 하세요?"
"아, 네? 아니요!"
"안색이.... 안좋아 보여요. 내가 그렇게 불편해요?"
"아니요ㅡ, 그런게 아니........"
"됐어요. 아무튼 내가 막 데리고 온거니까요."
"…"
아무데나 오해를 막 하게 내버려 두다니, 신혜성...
너 그러면 못써.....
그래도, 변명같지 않은 변명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ㅡ, 그런 변명따위 하는것 귀찮았다.
"지독히도- 냉정해요."
"무슨 뜻이예요?"
"예전의 이민우는-"
무슨 말같지도 않은 말을 하냐는 눈빛에 얼어버릴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얼음이 ..... 젠장, 얼음이 생각나.
지금이나 예전이나 냉철한 이민우는 항상 얼음이 생각났다.
얼음과 함께 회색머리칼의 그의 머리와 함께 얼음을 만지면 똑같겠다는 엄청난 생각을..
그것도 겨울에 했었다.
이민우는, 속도 얼음으로 가득찬게 아닐까 생각했다.
섭씨 0˚c 이하라서, 몸이 굳어져 있는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그렇게 보지 마세요. 신혜성씨-"
[그렇게 보지마. 신혜성.]
"-어쩔때는 아플때가 있어요."
[젠장. 진하게 아프다. 빌어먹을.]
--차라리 욕질을 들어먹는게 더 안 아플지도 몰라.
--욕질을 들어먹는게 더 - 괜찮을지도 모르지.......?
너는 나를 잊고, 나는 너를 기억하고.
나는 너를 잊으려 하고, 너는 나를 벌써 잊었고.
너는 나를 다시 만나 처음부터 시작하고, 나는 그 끝에서 놀아나고.
이민우.
네가 바라는건 뭐야?
내가 이런 모습을, 바래? 내가 이런 모습을 바랬어…?
"먼저 냉정 했던건-"
"."
"아니예요."
먼저 냉정했던건 이민우야.
우리 이러지 말자. 이렇게 냉철하게 굴지 말자-..
기억이 없어져서도 날 찾는 너는 뭔데, 나를 자꾸 괴롭히니?
"그 분- 만나 보실래요?"
"- 네?"
"그 분이....... 필요할지도 모르죠."
"…"
그 자식.
그 자식.
이민우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그 자식..
이제 와서 ,, 뭘 어쩌겠다는 거야.........
*
-한번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네가 나를 잊는 - 그런 일이 한 번쯤은--
나는 지은 죄게 많으니까. 어쩌면 조그마한 기억만 지운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
처음 이민우가 고백한 그 날부터ㅡ,
나의 생일이 된 그 날까지 그 안의 모든 기억을 지운다면 어떨까ㅡ, 하는 생각.
그렇다면 그렇게 냉철하지는 않으리라는 철없는 생각을.
미치도록 한 적이 있었다.
그 날의 약속은 그 날의 일로.
잠시 접어두었다면 차라리 나았을 지도 모른다.
이민우, 너는 내가 싫어, 좋아?
라고 묻던 철없던 때가 훨 좋을지도 모른다.
유치하긴 해도, 행복(幸福)은 했었으니까.
[널 좋아할리가 없잖아.]
[에이ㅡ, 이민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네가 먼저-]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는 데?]
이라는 말을 한다면 내 심장은 산산조각이 날지도 모른다.
- 그런 생각에 부분기억상실도 생각하려 해도 그만 두었다..
[평생 기억하고 살까봐. 신혜성을.]
[응?]
[-어떤 모습을 기억해 줄까. 신혜성?]
[무슨 소리야?]
[어떤 부분을 가지고 죽게될때, 어떤 부분을 가졌으면- 하냔 말이야.]
[글쎄…….]
그 때, 내가 뭐라고 했더라.? 지금 생각해 보니 가물가물 하다.
무언가를 말하며 서로 웃으며 기억했던 걸로 알고 있는데, 감이 오질 않는다.
메모리 종료라는 걸까ㅡ, 나도 너와의 기억을 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까.?
평생 기억할것으로만 생각하던 이민우도 ㅡ, 그 부분까지 기억을 할수는 없었겠지.
그래. 이젠 기대도 하지 않는다.
-기억이 돌아오는 일 따위.
-다시 냉철하지만 날 장난스럽게 좋아해주던 이민우 따위.
-욕질을 하면서도 꽤 귀엽던 이민우 따위.
-동경의 상대 따위.
"아, 그 분이 오세요."
"예-..."
-이민우를 잘 알던 그 사람 따위.
-4-
'톡톡톡ㅡ,'
빗방울 사이로 누군가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많이 보았던 그 눈매도, 그 머리카락의 색깔도 차가움이 드러나 보이는
하얀 목덜미도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에 나는 애써 추위를 감추려 몸을 웅크렸고,
어느새 내 입술은 파랗게 변한듯 싶었다.
그는 피식ㅡ, 웃더니 우산을 씌워주고는 단 한마디의 말을 걸었다.
"우산 씌워줄게."
"…"
그는 그렇게 우산을 내쪽으로 건네고는 자신의 오른쪽팔이 젖어감을
느끼는건지 못느끼는건지 무감각 한건지 전혀 신경쓰지 않는 눈으로
앞을 주시하며 걸어갔다.
정말 무신경 한걸까- 날 생각해서 우산을 씌워주긴 한걸까.
라는 궁금증이 들 정도로 그는 정말 내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 검고도 깊은 - 하지만 싸늘한 그 눈은 뭐라도 홀린듯 앞만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눈빛에 받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뭘 뚫어져라 쳐다봐ㅡ,"
"응? 아니- 춥지 않아?"
"춥긴 뭐가 추워. 너같은 놈도 아닌데."
"내가 뭐 어떤 놈이길래?!"
"관두자."
그렇게 내 성질을 건드는 이민우는 정말 싸가지의 근원이라고 바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싸가지는 곧 따뜻하게 변해서 가슴을 후려쳤다.
싸가지가 좋다니, 나도 어지간히 미쳤다.
"집이 어디야?"
"아. 집? 응- 저 골목으로 들어가면 나와."
"혹시 집 좀 못사냐?"
"아.......... 응-.."
"…"
가난은 나의 잘못이 아닌것을 알긴 하다만, 왠지 챙피하다는 생각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물론 이민우도 그렇게 좋은곳에서 사는것은 아니었지만 평범한 집안이
라는 것, 그것은 너무도 부러운 일이었다.
그런 집에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것.
그런 집에서 사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 라는 것.
나도 그런 집에서 살아봤으면- 하는 것.
"그럼 같이살까?"
"뭐- 뭐?"
"-어짜피 상관없잖아."
"무슨 뜻이야. 그게-"
"마음대로."
도대체 종잡을수 없는 놈. 이민우.
난 그런 이민우도 싫지는 않았다. 그래- 싸가지도 좋아하는데
마다할껀 또 뭔가.
그래도 뜸이 들여지는건 들여지는거였다.
일단은 부모님께서 뭐라고 하실테고, 나를 무진장 좋아하는 동생은
또 어떻게 때 놓을까ㅡ,
그리고 이민우 부모님은 허락이나 해 주실까- 하는 생각이
온통 내 머리를 뒤잡고 흔들었다.
그런데도 저 녀석은 뻔뻔스럽게 '같이살까?' 라니-
무책임해.
무책임하다고.
"그럼 천천히 생각해-.. welcome abord."
welcome abord.....같은배에 타게된것을 환영한다- 라.
글쎄. 너와 내가 같은배에 타게 된다는 것은- 어쩌면
불행한 일일지도 모른다.
너와 난 다른 점도 많고ㅡ, 친구가 될 이유도 없는거 아닌가.
"싫어-?"
"아.. 아니-"
"그럼 좋은거지."
.. 무책임해. 이민우. 정말 무책임해.
그런데도- 나는......... 끌렸다. 그에게-.. 확실히 끌려가고 있었다.
"좋았어. 대신 날 하녀처럼 부려먹는건 사절이야!"
"쿡."
마지막의 웃음은- 지금도 궁금하다.
도대체 왜 웃은걸까 하는 - 아직도 그런것으로 궁금해 하고 있다.
네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어.
이리저리 왔다리 갔다리 하는 것도 이제는 귀찮아.
처음부터 무뚝뚝하게 다가온 네가 이상했어.
너의 진심이라는 것은, 심장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디에 붙어먹었길래
사람들이랑 진심으로 얘기를 안하니.
너의 따뜻함이라는 것은, 어디에 붙어먹었길래 그렇게 무뚝뚝하면서도
따뜻함이 드러나 보이니.
너의 솔직함이라는 것은, 대체 어디에 붙어 먹었길래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수 없는 얘기만 늘어 놓니-
도대체 너란 녀석은 언제까지 알아야 하는 걸까-
*
짧은 회상끝에 나는 이미 그 녀석이 와 있음을 알았다.
이민우는 그에게 꾸벅- 인사를 했고, 덩달아 나도 인사를 했다.
반말로 얘기해도 받아주는 녀석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빌어먹을.
"왠일-?"
"문정혁씨. 혜성씨를 좀- 잘 부탁해요."
"무슨-"
"혜성씨가 좀 혼돈스러워 하는거 같아서 전- 기억이 없으니까.."
"아ㅡ, 그럼 따라와요. "
"갈까요, 혜성씨?"
- 넌..... 의사표현 따위는 묻지 않았었어.
알아? 지금의 넌 알아? 예전의 널 알아? 넌 얼마나 예전을 잘 알아?
도대체 왜ㅡ, 그런 눈으로 쳐다봐.
전혀 모른다는 눈이 너무 싸늘하게 식어서 예전의 이민우가 그리워지려
하잖아.
넌 아무것도 몰라. 이민우.
넌 알지못해 이민우.
예전의 이민우가- 어떤 놈이였는지 넌 알지못해 이민우.
"또 무슨 생각 하세요?"
"------아... 미안해요."
하지만. 입밖에 꺼내서는 안되지. 그럼 이민우는 분명 슬퍼할 테니까.
자신도 그런 사실이 괴로울 테니까, 함부로 말해서는 안되지.
그래도- 나는 이기적으로 네가 나를 기억하길 원하고 있어.
네가 나를 기억하게 될거라는 꿈같은 상상을 아직도 하고 있어.
아니- 그렇게 바라고 있어.
그렇게 - 와준다면, 나는 또 얼마나 눈물을 흘리며 기뻐할지 몰라-
이민우. 너는 몰라. 예전의 이민우를 몰라.
네 뒤에 숨겨져 있는 예전의 이민우를 - 생각하게 만들고 말거야.
그래. 난 이기주의자야. 원래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거고.
[-어떤 모습을 기억해 줄까. 신혜성?]
[어떤 부분을 가지고 죽게될때, 어떤 부분을 가졌으면- 하냔 말이야.]
[좋아. 그 말을 평생 기억해 주지.]
............................내가 이제 그 문제를 풀면 되는거야.
-5-
쌀쌀한 공기와의 마찰을 뒤로한채 나는 오히려 당당하게 걸었다.
집안은 오히려 밖보다 더 차가운듯 했다.
거울들은 하나같이 다 사라져 있었고, 많이 달라진 사진들을 보며
정혁도 꽤나 힘든일이 있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완 상관없는일. 나는 왜 이렇게 되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만 도움받고 싶었다.
"뭘 그렇게 꾸물꾸물 대요---? 처음 와봤어요?"
"......"
"도대체 뭘 보길...... 어?"
민우도 덩달아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뚫어질듯이. 아니 언제 이런 사진이 찍혔냐는듯한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아니ㅡ, 궁금하다기 보다는 얼음이지.
아이스커피위에 동동- 띄워지는 차디찬 얼음.
뭘까ㅡ, 너는- 도대체 왜 모든것을 잊고 싶어 했을까.
간절히 잊고 싶어야 잊을수 있는것 같던데-
혹시- 날 잊고 싶어서 다 잊어버려 버린건 아니겠지…….
혹시 내가 눈치챌까봐, 아예 모두의 기억을 없애 버린건 아니겠지.
"이거 언제 찍었는지, 혹시 알아요. 혜성씨?"
나는 그의 말을 무시하며 정혁의 방으로 향했다.
*
내 마음을 알아차린건지, 아니면 자신도 그런것을 느꼈던 것인지
정혁은 얼음이 동동 띄워진 아이스커피를 권했고 나는 극구 사양했다.
하지만, 민우는 좋아하기라도 한다는듯 옅은 웃음을 보이며 벌컥벌컥-
잘도 들이마신다.
뭐가 좋다고 배실대냐. 이민우.
"뭘 듣길 바래요. 신혜성씨?"
"- 이민우는 .. 왜 나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걸까.."
"하는 궁금증 말이군요."
깊은 명상에 빠져버린 정혁의 눈은 때로는 아무생각도 없는 눈동자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물론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한번 정신을 차리면 누구보다도
더 좋은 해결책을 내 놓는 정혁은 신뢰감이 생기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ㅡ, 잘 모르겠다.
"민우는-------.....교통사고를 당했어요."
".............. 어떤......"
"어떤 골목길에 접어서려 한순간 차가 앞에 다가왔다고 - 경찰들이
얘기해 주더군요. 물론- 차가 다행히도 막 출발하려던 참이여서
간신히 사람을 치지는 않았지만, 이민우는 넘어 졌다고 하더군요.
너무 세게 넘어지는 바람에 그는 머리를 다쳤었고,
……이렇게 된거래요."
"........"
"........그리고---"
"됐어요. 다 들었으니. 하지만, 더 궁금한게 하나 더 있는데요."
무슨 말을 하려던 정혁이 다시 혜성의 말에 웃으며 받아줬고,
혜성은 꽤 비장한 말을 하려는듯 긴장을 하고 있었다.
"저 사진은-.. 왜 걸어 놓은거예요?"
"아------....."
한동안 말이 없던 정혁은 조용히 웃음을 머금고는 하얀 치아를
들이냈다.
문득 답답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그게ㅡ,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의 다른 점이랄까- 후훗..
나도 달라진게 있네......... 예전의 이민우와 있던것과 다르게.
"어울려요."
"예?"
갑자기 뱉어낸 정혁의 대사에 당황스러워 하며 혜성이 반문했고,
정혁은 다시 치아가 보이는 웃음으로 대답해 주었다.
"둘이- 어울리잖아요."
- 문정혁.
................... 홍당무 만드려고 작정했어?
*
정혁의 집에 나오면서 우리는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가 '조금 더 내려가면 나오죠?' 라고 했을때 나는 '네' 라고 하는.
평소에 얘기하던 그대로의 말투로ㅡ, 이민우를 사랑하지 않을때의
그 말투 그 대로.
그렇게 조금씩 그안의 나를 보이게 하고 싶었다.
"이민우씨. 알아요?"
"예?"
"문정혁이.. 이민우씨랑 저 어울린데요...."
"에? 우리 둘이요?! 우와, 그분 참 재미있으시네요."
"....... 그렇죠... 재미.........있죠......."
나는 .. 그 말을 듣고 재미있다기 보다는 가슴이 더 두근거렸는데.
역시 이민우는 ........... 그런 느낌은 없는 모양이였다.
엷은 비누향이 내 코 끝에 스며들었고, 그 비누향의 끝에는 이민우가 있었다.
비누향이라니......
어울리지 않아.
이민우는 비누향이 어울리지 않아.
[.. 신혜성, 너 한테는.. 비누향이 난다.]
[.......응?]
[그래서, 좋은건지도.]
이민우-.. 네가 날 좋아한다고 했을때의 고백도 같지도 않은 고백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말을 듣고 심장이 두근 거리는 소리를 들었었다.
옆을 지나는 바람과 함께 이민우의 말은 계속 은은하게 울려퍼지고 있었다.
그 순간은 너무 기쁜 순간이였다.
그래. 나는 이민우에게 그런 느낌을 받았었다.
나긋함의 자체. ... 마치 어렸을때 아저씨를 보는듯한..
'꼬마야, 넌 누구니? 어디에 살어..? 길 잃어 버렸니?'
그런 차가운 눈동자로 바라보는데도 따뜻한 ... 그런 사람을 보는 느낌.
그러니 ..... 우리가 어울린다는 말은.......
정말 웃기는 대사였다.
[그래서, 좋은건지도.]
[그래서, 좋은건지도.]
그런데, 왜 .. 지금의 이민우는 좋아하지 않을까. 나는 .. 한번도 비누를 바꿔쓴적이 없다.
이민우가 그런 말을 한 뒤로, 한번도 바꿔 쓰지를 못했다. 오히려 바꿔쓰는것이 두려울
정도로 말이다.
그래. 난 ..... 그때부터 이민우를 알아가며 나를 이민우의 취향에 바꿔가려 노력
했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
나를 철저히 배제했다.
-6-
똑똑ㅡ,
아침을 깨우는 미운 자명종 소리를 피해 이불속으로 숨어 들었지만, 곧 누군가가 문을 똑똑 두들기는
소리에 다시 눈을 비비며 깨어날수 밖에 없었다.
개운하기 보다는 머리가 멍- 해짐을 느끼며 손으로 볼을 톡톡- 치며 그렇게 문을 지나가다가 말고,
나는 그를 쳐다봤다.
정말 나를 기억하지 못할까.
왜, 왜?
아무리 생각해봐도 전혀 이해를 할수 없었다.
그렇게 사이가 안좋았던것도 아니였고, 내가 그다지 실수한것도 없는데 왜 날 기억하지 못할까.
"…신혜성씨. 뭐하세요?"
"…"
그의 표정을 다시 한번 보고, 말투를 다시 한번 봐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 오히려 저렇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에 더 짜증이 났다.
난 왜 이렇게 머리를 싸매야 하고, 이민우는 저렇게 아무런 구애도 받지 않을까..
"전화 왔어요."
"…"
전화왔다며 수화기를 직접 건네주는 그에게 참으로 고맙긴 했지만, 내 얼굴은 많이 굳어있는듯 보였다.
나의 이 겉다르고 속다른 모습은 정말 참으로 싫다는 생각을 하며 억지로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신혜성....]
"누구....."
[........나야--...........]
............................전진이었다.
평소에 연락을 통- 끊었던 내 친구 ........
*
달아오른 아스팔트, 살익은 냄새. 그리고 익숙한 땀냄새.
후덥지근한 날씨와 함께 가슴도 후덥지근한 느낌..
그리고 전진은 작년의 이맘때 만났었다.
어찌됐건 그는 다시 나를 불렀고, 기대가 되는것은 사실이었다.
얼마나 변했을까- 하는 궁금함.....같은거 말이다.
"여기야-"
그는 나를 보자마자 일어나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때로는 고맙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짜증도 나는 것이었다.
알아서 찾아서 앉을텐데ㅡ, 왜 저렇게까지 즐겁게 나를 맞이하는지…
나 그렇게 즐겁게 해주는 애 아니잖아, 전진..
"왠일이야?"
"저저ㅡ, 또 차가운 저 소리. 날 좀 친근하게 맞아봐라."
"쿡..... 그런거 원하지 말랬지...?"
"원하면 안된다는 법도 있냐..? 아아ㅡ, 배고프다. 야. 진짜 배고파..
아침도 점심도 못먹었어.. 과자로 다 때웠지 뭐야...... 후우."
"아서라. 전진-"
"이씨. 돈대달라는 얘기 안해!! 등신아! 같이 먹어달라는 얘기지!!
혼자 있으니까 먹기가 싫잖아~ 난 역시 외로움은 못 견딘단 말이야..."
"그래그래. 뭐- 시켰어?"
"응- 우음... 냉면시켰어.."
"면... 먹어도 돼?"
"응! 면 먹어도 돼. 내 위는 튼튼- 하잖아. 누구 위 처럼 허실한건 아니라서."
"그래. 내 위 안튼튼하다."
작년에 위염걸렸던 적이 있었는데, 아직도 기억하는 모양이였다.
나만 보면 위 괜찮냐며---... 나보다 위가 더 걱정되나.. 라는 생각도 들었었다.
어찌됐건, 또 그런 사실을 잊고 있었는데 전진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또 기억해 주었다.....
"이민우 하고는 어때?"
"…"
속이 울렁 거리는것은 무엇일까--.. 순간 그 녀석을 보며 울렁거림을 느꼈다.
분명히 울렁거릴 이유는 없는데........ 여름이라서 그런건가.....
차를 타고 와서 그런건가.......
그래. 차를 타고 와서 그런거다......
"힘내...... 혜성아."
"..............뭐가?"
"기억상실증이라며."
"네가 어떻게--......."
'알어?' 라는 말을 생략하며 그를 쳐다봐 주었다.
그는 다 안다는 듯한 눈으로 나를 위로해 주고 있었다.
위로해 주지 않아도 되는데........ 괜찮아.......나는......
이런 말이라도 할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목이 메여 아무말도 할수 없었다. 게다가 눈도 아파오기 시작했다.
이 곳이 - 아는 친구집이였다면 잠이라도 자 버리고 싶었는데, 그러지도 못하고...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게다가 속도 울렁- 거려서 답답했다.
"들었어."
"…"
"문정혁한테."
개자식........... 말 안해도 되는걸 말했어...
"내가 ,, 뭐라도 도와줄까?"
"아니. 괜찮아."
"눈이..... 슬퍼 보이잖아."
전진... ............. 넌 왜그렇게 잘 아니.....
어떻게 그렇게 나에 대해서 잘 알아서- 자꾸 그래......?
그에게 헤어지자 한 날은, 미칠듯이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우산도 없는 우리는 ... 구슬픈 빗물 속에서 -.. 이별을 고했다.
눈으로, 코로, 입으로 . .. 쉴세없이 떨어지는 빗방울들은 내 시야를 흐렸고,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으나.. 그의 목소리는 내 귀에 울려퍼졌었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지었었는지. 나는 모른다.
그가, 어떤 슬픈모습을 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건-... 그의 목소리는 쉴세없이 떨렸다는 거다.
"가 있어."
"......이러느니 우리 차라리 헤어지는게 어때?"
"...........무슨 소리야?"
"헤어지는게 어때? 그게 차라리 낮지 않겠니?! 언제까지 우리 이래야 되는데?!
..... 넌 날 어떻게 생각하는건데?!!!"
".......신혜성.."
그냥.. 잠시의 심술로 인해 나온 말이었다.
아무런 감정도 들어있지 않은 말이였는데, 나는 가슴이 아팠다.
정말 이대로 영영 끝이면 어떻하나- 하는 ..... 그런 거 말이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 더 많이 좋아하고 있구나....생각했었다.
머리에서 생각하는 것 이상....... 나는......
............그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하는.. 그런것..
".......그럼 잠시..... 헤어져 있을까?"
"..........."
"............신혜성...... 그럼 그러자......"
"......... 이...민우...?"
"......그래....... 잠시 헤어져 있자........
................잠시 헤어져 있으면.. 서로에 대해서 알게 되는게 많겠지."
"............저.."
"그럼, 당분간은 연락하지 않도록 하지."
".........이민.....ㅇ........"
그는 ... 내 시야에서 빛과 함께 사라졌다.............
..................
......................빛과함께.......
..............................영혼에 이끌려.....
그렇게 사라졌었다--...
*
곧 몇일이 지나지 않아, 그날과 같이 비가 오는 날 나는 그의 연락을 받을수 있었다.
".... 이민우?"
"........"
평소와 다르게 그의 눈빛은 이미 풀려져 있는것 처럼 보였다.
잔잔한 술 내음이 곧 방안으로 퍼져 나갔고, 그를 다시 본 순간 그는 언듯한
눈으로 날 쳐다봤다.
얼어 버릴것 같아…….
나는 다시 그에게서 풍기는 낯선 향에 고개를 떨궜고, 그는 나에게로 손을 뻗어
두 볼을 감싸안더니, 내 고개를 들게 했다.
덕분에 나는 그에게서 나는 술 내음을 더 잘 맡을수 있었다.
... 뭘까, 어떤 ... 술을 마신 걸까.
"..... 신혜성. .. 가지 마라....."
"무슨 소리야 그게......."
"씨발...... 내가 제일 ....... 아끼는 사람이니까......"
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의문스러웠다.
술에 취해서 그렇느니ㅡ, 하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 이민우의 눈빛은 날카롭기만 했다.
사실이라고 말하는 눈이 가끔씩 떨렸다.
입술이 떨리는 파동이 내 입술까지 전해져 오는것 같았다.
"내가 제일 ......... 그리워 하는 사람이니까."
"…"
나도 그리워 해..
나도 봐 줘. 그렇게 내 안의 진실을 보려 하지 말고.
제발 나를 똑바로 봐 줘.
"..... 내가 제일........... 사랑하니까......"
"……응."
헤어진지 몇일이 되었더라. 기억이 없다.
아니, 오히려 기억하려 하고 싶지도 않다. 우리의 이별따위는.
그저 말장난에 비하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지금의 순간이 좋았다.
드디어, 이민우의 다른 마음을 알기라도 한듯이 나는 기뻤다.
마치 철혈재상한테 고백이라도 받은듯이 그냥.. 그렇게 기뻤다.
"........ 알았다!"
".....?"
"........... 언블렌디드 스카치 위스키..."
"훗. 맞아."
낯설면서도 익숙한 술 내음이 .. 내 입술쪽으로 다가왔고.
닿는 순간 나도 그 향에 동화되고 있었다.
-9-
노을빛이 짙다.
진이 나에게 말했던것 처럼, 세상은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것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깟 세상따위 상관 없다 생각했다. 적어도 난. 그가 있어 행복했었기에.
노을빛이 유난히도 붉은날, 그가 그랬던것 처럼. 나는 .. 어쩌면 그랬을
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지도 모른다는 상상.
그런것에 쌓여 나는 집으로 들어갈수가 없었다. 이미 어두컴컴해진 하늘
과 골목 그리고 나의 아픔.
이미 어둠의 끝을 달려가고 있는 .. 나.
세상은- 왜 나에게 이런 걸까. 하는 ... 그런 생각을 수도없이 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아무리 잊으려 해도 .. 잊혀지지 않는 추억과 그의 말들.
점점 죄여오는 족쇄의 느낌이 미칠듯이 차가웠다.
그에게서도 나는 족쇄의 느낌.
이젠 익숙해져 버린 얼음의 느낌.
..................................그래. 그는 이미 나의 삶이였다.
"이제와요? 늦게 다니시네. 그러면 안되죠."
"........."
........ 나는 그를 기억하고, 그는 나를 잊고.
........ 나는 그를 미워하고, 그는 아무 관심 없고.
........ 나는 아프고. 그는 아무감정없고.
...........................세상은 왜 이리 잔인할까.
"... 왜 그러세요?"
".................."
왜 날 기억하지 못할까.
그의 모습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게 없는데.
나의 모습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한게 없는데.
그의 머리칼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은회색으로 빛나는데..
그의 눈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그의 키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한데.
그의 입술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선분홍빛이 도는데..
왜 나를 기억하지 못할까...........
"... 저.. 혜성씨?!"
나는 .. 그를 쎄게 끌어안아 버렸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상관없어.
나에겐 지금의 이민우 뿐이야..........
..................그리고.. 그의 품의 따뜻함 역시 .. 변한게 없었다.
*
그에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오직 하나.
기억의 한줌에 내가 사라졌을 뿐이었다.
결국 내가 사랑한 그는 변하지 않았다. 결코- 변하지 않았다. 처음과 같게
행동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에겐 이제 최선의 방책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만 그렇게 느끼는듯 다른 사람들은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간간히 보이는
사람들만이 그렇게 느끼는듯 했다.
저 사람은 차인사람, 저 사람은 술에 취한 사람, 또 저 사람은…….
나뭇잎의 애절함을 느끼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그게 무슨 이유에서든 말이다.
실직에 관련된 사람 역시 애절함이 전해와 가을은 시린 계절이라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애절함을 느낄 필요가 없는데도 가을을 타고 있었다.
내가 가을을 좋아하는 이유따윈 없었다.
단지 이유가 있다면, '나뭇잎 밟는 소리가 좋아서…, 고동색이 좋아서….' 였다.
가을의 고독. 조금씩 스며드는 가을의 향기는 때로는 진하며 때로는 연했다. 그런데도 가을
자신은 슬퍼하지 않았다. 오히려 화려하게 나뭇잎들을 꾸미고, 산을 꾸미고-..
자신을 철저히 방어하며 고독을 느끼고 있었다. 화려함 뒤의 유난히도 아름다운 고독.
그것이 가을의 이름이라면 이름이었다.
가을의 이름이라면 얼마든지 댈수 있다. 가을에 대해서 말해보라고 하면 얼마든지 얘기해
줄수 있었다. 그것이 천년이 될지, 만년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가을을 떠나보내고, 가을을 맞이하는 해마다 거듭하는 것은 역시 쓸쓸해 지는
마음과 우울증의 나날이였을 것이다.
여름에는 비가 와서 우중충했다면, 가을에는 나뭇잎 밟는 그 소리가 너무 서글퍼서 우중층
했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여름에 만나서, 벌써 가을이였다.
*
100일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단지 숫자만을 뜻하는 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100일은 3개월에서 몇일이 약간 지나는데, 도대체 그게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100일은, 사람을 잡아 놓는 버릇이 있다. 100일을 챙기는 사람들을 보면 알수 있듯이 말이다.
"이민우-."
나도 그를 잡기 위해 불렀다. 이렇게 잡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막상 손을 뻗으려 하니
바람이 일어- 얼굴에 붙어버린 나뭇잎을 떼어야만 했다.
갑자기 왜 바람이 불었지-..
갑자기 인- 바람에 나도 모르게 불안해 지는것은 사실이었다. 하필이면…
그래도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 않고, 그에게 웃음을 주었다. 그러자 그는 꽤나 귀찮다는
눈빛을 하고도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다.
나는 그 눈빛이 좋았다. 귀찮은듯 하면서도 친절한 느낌 말이다. 물론 그게 나중에는 엄청
재수없는 행동이 되어 버렸지만-..
"왠일이야?"
"엉? 아ㅡ, 그냥 "
"시시해-.. 참 그나저나 같이 사는건 .."
"결정-.. 아직..안했는데.."
"마음 바뀔지도 몰라."
알아-.. 충분히 마음을 바꿔먹을수 있는 그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나도 시간이 충분히 필요했다. 빠른것은 질색이였다. 그래서 천천히 서둘렀고,
그도 별로 빠르게 독촉하는 편은 아니였는듯 싶다.
그저 의견을 묻고, 아직 안되었다고 하면 그저 '어.' 라는 말이 전부이니 말이다.
"참. 우리 어디 나갈까? 이렇게 좋은 날에는-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싶어."
"오케이."
짧은 대답을 하고, 그는 코트를 들고 나오더니 얼른 입는다.
*
노을의 끝에 보이는 산들이 서서히 밝아보이며, 곧 어둠이 깔렸다.
어둠의 끝에서 잘 보이지 않는데도, 나는 그를 아주 잘 볼수 있었다. 나는 그를 아주
열심히 봤던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의 옆모습은 절대로 잊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약간은 날카로운 턱선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상은, 흔히들 사진빨이 죽이는 형이라 했다.
물론-. 사진빨이 죽인다는 건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다시 얼굴을 확인하니 금새 주눅이 들었다.
나도, 사진 앞에서 멋있어 보였으면 좋겠어. 어떻게든…….
내 얼굴은 영- 사진빨을 못 받는 형이였으니 말이다. 그의 얼굴이 부러운것은 사실이었다.
그래도, 내가 가질수 없는 것을 가졌다는 대리만족이 더 컸는지라 그다지 부러워 하지는
않았지만, 간간히 보이는 옆모습에서 보이는 냉철함은-.. 무서웠다.
도대체 냉철함은 어디서 흘러 나오는 것일까.
냉철함의 끝에 갔을때, 그의 정신세계를 이해할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운 눈에 은회색 머리. 그보다 차가운 것은 어디에 있으랴.
아니, 내가 남들보다 더 차갑다고 느끼는 건지도 몰랐다. 바로 가까이 있으니까 말이다.
바로 가까이……, 바로 가까이 말이다.
"알아?"
"뭘?"
"우리-.. 100일이야."
"아. 그래?"
아, 그래 라니. 너무 무심한게 아닌가 싶다.
물론 - 그렇게 반응하는 사람들도 tv에서 보았는데, 그 사람들 역시 차가움의 결정체로
보아도 과언이 아니였다.
냉철해. 냉철해. 냉철해.
차가워. 차가워. 차가워.
"그러는게 어디있어. 반응을 좀 해봐."
반응이라는것을 좀 해봐. 그렇게 차갑게만 굴지 말고. 그 차가운 눈동자에 도대체 내가
새겨져 있는게 맞긴 맞는거니.
도대체 내가 - 새겨져 있는게 맞긴 맞는거냐고.
".. 그럼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 연애 .. 해봤을꺼 아냐?"
"물론. 못해봤어."
그렇다. 그랬다. 조금씩 줄어드는 빗방울 사이로 간간히 보이는 사람들을 비추는 은회색의 빛.
어디서 많이 보던 빛이라 했다. 차가움의 이유는 바로 사람을 대할줄 모르는 거였구나.
무슨 - 대인공포증이라도 있는거냐. 이민우.
"그냥-..."
나는 그에게 더 잘 말하기 위해 한걸음 더 걸어가 가까이 했고, 그는 바로 내 가까이 있었다.
갑자기 숨이 막히는 느낌에 아찔- 하다가도 이내 감정을 추스렸다.
"이렇게 포옹 하는거야."
나는 그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런 냉철함의 안에서 보이는 친절함과 나긋함,
따뜻함, 그리고 감정표현이 적절히 들어가 있는 모습.
그런 모습이 너무나 보고 싶었다.
"……"
하지만, 그건 아니였다.
-11-
마음이 쓸쓸할때에는, 오히려 잘 다니기 마련이다. 산책로를 지나가며 마음을
다잡으려 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가을의 전형적인 특성이였다.
가을의 전형적인 특성 …….
'탁-------.......'
"이민..?"
"............. 뭐하는거야."
"뭐하는 거라니? --....."
옆에 지나다니던 사람들이 놀람과 함께 멸시의 눈빛을 보내오고 있었다.
물론 나와는 상관없는 일, 전혀 신경쓰지 않고 그렇게 안았는데 --..
그는 한마디로 미쳤냐는 듯한 눈길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저 사람들과 같은 경멸의 눈빛으로--...
"... 왜...? 안돼?"
"시내 한가운데서 -----..."
나는, 이민우가 그렇게 고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을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나 역시 고정적 측면이 있었지 싶다.
동성애자들은 다 개방적인줄 알았지. 남의 시선을 느낄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봐... 이민우. 포옹하는건 누구나 할수 있는거야. 그건 동성끼리도 가능한 일이라구.
니 친구가 군대라도 간다고 생각해봐. 안아주고 싶지 않겠어?
포옹은 격식에 불과해. 지금은 100일의 격식에 불과할 뿐이라고."
"누군가가 보고 있어."
"...... 누가 보고 있다는 거야?"
"..... 나와 가까이 있는 ... 사람이 날 보고 있어."
.....도대체 누가 보고 있었을까.
하지만, 그 일이 있은후 나는 그에게 함부로 손을 잡거나 할수 없었다.
그 일은 바로 경고의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민우는 스킨쉽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였다.
덕분에 우리는 그렇게 한층 멀어졌었다.
*
쌔근쌔근-----...
혜성은 민우를 껴안은채로 그대로 골아떨어졌고, 덕분에 당황스러워 하는것은
민우였다.
모든것은 결국 민우의 일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처음 끓여본 찌개는 아직 보글보글- 끓고 있었고,
안겨온 혜성은 그 자세에서도 잘만 잤다.
그는 한참 생각을 하는듯 하더니, 혜성을 소파위에 깨지않게 조십스럽게 내려 놓았고,
갑자기 몸을 돌리는 혜성에 깜짝놀라며 뒤척이는것이라는 것을 알자 얼른 땀을 닦는다.
왜 자신이 땀을 닦는지 의문스러워 하며 까스레인지의 불을 껐고, 저녁을 먹지 못한
배는 이내 꼬르륵- 만 거리고 있었다.
혜성과 먹을 생각이였으나, 골아떨어진 상태였고 혼자 먹자니 재미도 없을것만 같았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던것 같기도 하지만, 머리만 아파오고 생각은 나지 않는듯 했다.
뭐, 그다지 중요한 문제도 아니였고…
아직도 두근거리는 심장을 억제하며 반찬들을 랩에싸서 다시 냉장고에 넣어 두고는,
물을 받기 시작한다.
그러다, 다시 혜성이 생각났고 2층까지 올려야 된다는 생각에 순간 아찔해 졌다.
날씬해 보이긴 해도, 키가 큰 사람이였고--.. 자는 사람을 옮기는것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술취한 사람을 옮겨본 사람은 알것이다.
다행히도 오바이트는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였다.
정말 천만 다행이였다.
그는 그냥 혜성을 옮기는 것을 포기하고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사람은 물에서 태어난 모양이였다. (양수를 뜻하는 것이다.)
그렇게 물이 좋을수가 없었다. 몸을 물에 맡겨놓고 있노라면 마치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혜성은 제정신으로 돌아왔으나, 아까전 한 일을 모두 기억하는듯 했다.
민우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길… 그 안에 들어있는것은 무엇일까.
민우는 이내 머리를 긁적이며 부엌으로 향했다.
심심함이던 뭐던 일단 굶고 싶지는 않았는지라 다시 반찬 몇개를 꺼내고는
밥먹는데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맛없네. 찌개."
역시 첫작품이라는 것은 실패를 거듭하기 마련이였다.
*
민우는 역시 계속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꿈속에서 누군가가 나오는것 같은데 그게 혜성인것 같기도 했다.
무언가를 쫑알쫑알- 거리며 귀에서 웅웅- 거리기는 하는데,
그게 도대체 우리나라 말이기나 한건지 제대로 들을수가 없었다.
머리의 두통은 심해지기만 했고, 그럴수록 오히려 잘 들려오는건
헤성의 말이었다.
혜성의 웃는 모습이 보였다.
그 얼굴이 본 순간 심장이 덜컥- 하고 내려앉는 느낌에 잠시 머리의 두통을
잊고 멍----- 하니 있었다.
그리고, 꿈은 깨어져 있었고 아침은 밝아 있었다.
내 꿈과는 달리 세상은 너무도 밝게 바껴져 있었고 자명종소리 역시 경쾌하게
아침부터 날 반기고 있었다.
"뭐해요. 일 안할꺼예요? 언제까지- 일도 없이 머물러 있을 꺼예요.
사람이 일이라도 해야죠. 그래야 식량 축내지 않겠어요, 이민우씨?"
"아, 네…"
곧 민우의 얼굴은 불에 데인듯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꿈에서 본 혜성의 얼굴이 다시 생각나며 마치 죄를 지은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꿈에서 본다는것은 꽤 신기한 일이긴 하였으나
그런 꿈에서 본 사람을 보면서 심장이 덜컥 내려앉거나 하면 누구나 죄를 지은듯한 기분에
휩싸일 것이다.
"...신혜성.."
"............이민우씨? 지금 뭐라고..."
"아-..... 내가 무슨......... "
갑자기 흘러나온 말에 어서 입을 막으며 당황해 하고 있었다.
원래는 호칭을 쓰며 꽤 사교성 있게 그를 불렀는데, 오늘은 갑자기 중저음에
호칭하나 없이 자연스럽게 무뚝뚝한 말투가 흘러 나오는 것이었다.
방황하는 눈동자 사이로, 가을의 느낌이 물씬 풍겨져 오고 있었다.
물론- 아직 계절은 여름이였지만 옷들이 먼저 그렇게 가을을 예감하고 있었다.
이곳-저곳 채워져 있는 가을의 물결.
이럴때 사면 그나마 돈이 적게 든다지……
무더위도 서서히 가라앉으려 하니, 난 또 여름이 그리워 졌다.
장마때 오는 지겨운 비 처럼 또 지겨운 가을의 시작이였다.
무지 덥지도, 무지 차갑지도 않은 어정쩡한 날씨.....
사람들은 그런 날씨를 더 좋아한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겨울에 태어난 사람은 겨울의 특성에 맞게 태어나는게 당연한 이치인데,
실제로 나와 이민우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밥은 많이 먹는데, 살은 찌지 않는 체질이였다.
하지만, 여름에 태어난 이민우는 달랐다. 밥도 적게 먹는데, 살은 많이 찌는 체질이였다.
세상은--... 거꾸로야. 모두 거꾸로야. 망할놈의 세상.
그렇게 - 생각만 하며 걷고 있는데,
방황하는 눈동자 사이로 누군가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경직-.
내 몸은 그를 본 순간부터 당황하여 경직되어 있었다.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내 앞에 우뚝- 선 그는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신혜성.."
"......"
"반갑다....."
"......."
"나, 김동완이야- .. 왜 반응이 없어..."
"... 어.. 그래. 반가워.."
그는 이민우의 절친한 친구였다.
*
"안 늦어? 어디를 열심히 찾는것 같던데."
"..... 그냥 오늘 나와보고 싶어서 나온거야. 나 백수잖아."
"하-. 웃겨. 니가 어떻게 백수야? 프로그래머지."
"그럼 니가 백수야?"
"그래. 나 백수야."
김동완은 백수라는 티를 다 내고 다녔다. 뭐- 물론 백수란건 알고 있었지만, 그는 츄리닝바지에
런닝하나를 걸쳐 입은채 거리를 활보하고 다닌 모양이였다.
아무리 개성시대라지만, 이제 곧 가을인데..
"........신혜성?"
"응?"
끊임없이 내 이름을 불렀던 모양이였다. 난 또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겠지.
빌어먹을. 내가 원래 이렇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해? 내가 니 앞에 손을 휘젓기도 했었다."
"아.. 어. 그래?"
"..... 놀러가도 돼? 민우 있지?"
"아. 안돼!!!"
갑자기 소리치는 바람에 김동완이 놀랐다는듯 쳐다보기 시작했다.
내가 집에 가겠다는데 곤란하다며 소리친적은 처음이겠지-..
하지만, 분명 이민우는 김동완을 기억하지 못할테고, 그럼 김동완도 나와 비슷한 절차를
밟게 될것이 뻔했었다.
이것은- 당연한 법칙이였다.
"......왜, 안돼?"
"그건.."
".....이민우 기억상실증 걸린거 알아. 바보야."
".......어? 누구한테 들었어?"
"전진."
문정혁.
전진.
쌍방으로 노는구나.
"가도 되지? 간다?"
"으응-.. 그래..... "
내 방황하는 눈동자 사이로 김동완의 웃음짓는 모습이 보였다.
한번 빠져봤던 웃음이-.. 다시 오버랩 되고 있었다.
그것은 김동완의 웃음이 아니라 이민우의 웃음 이였다.
"뭐하냐?"
"응?"
"안데려다 주냐?"
"데려다 주다니…?"
"나, 지금 가려고 그러는 거야.."
"아……그래. 뭐라고??? 지금???"
"왜 그렇게 깜짝 놀라냐? 빨랑 안내해라."
역시 넌 성질 급하구나. 절대로- 다음으로 미루지 않는 니 녀석.
그러니까 니가 이민우 친구지.
*
터벅터벅- 걸어오는 걸음거리는 달팽이마냥 늦기만 했다.
김동완 녀석도 어쩔수 없는 모양이였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태평하게 그 사람을 다시 볼수 있겠는가.
사람은 필시- 그러하니. 김동완도 예외는 아닌듯 싶었다.
달팽이 걸음으로 와도 집과 가까워 져 가는것은 어쩔수 없는 것이였다.
그리고 서서히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극도로 떨려가는 김동완의 어깨가 보였다.
'움찔-'
"뭐해? 빨랑 가라- 너 보는데, 더워 죽겠다."
"아- 하하. 간다 가. 내가 두려워 할거 같애?! 전혀 안두려워!!"
"애초롭단다. 얘야."
호주머니속의 열쇠가 서로 흔들리며, 애초로운 소리를 내는데 더 애초로워 보이는것은
김동완이였다.
김동완은 뭐가 그리 떨린다는건지 손을 덜덜- 떨며 초인종을 향해 바짝 다가가서는 이내
긴장해 버리는 안타까운 형상을 하고 있었다.
"정말 애초롭구만."
"...넌 안떨리겠냐? 처음에 이민우볼때 안그랬어?!"
"당연히 그랬어. 그래도 너보단 안그랬다. 야- 손 거둬. 나 열쇠있어."
".. 그. 그래..."
정말 혼자보기 아깝다. 저렇게 무기력해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 한심스러워 졌다.
김동완도 이민우도…….
하지만, 이내 마음을 정리하고는 열쇠를 꺼냈다.
누군가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열쇠였다.
누군가의 추억…이 담겨있는 열쇠.
그렇게 추억을 회상하려 하는 찰나, 동완이 빨리 열라는 헛기침을 했다.
뭐- 다른 이유가 있든 없든 나한테는 재촉하는 듯이 들렸었다.
익숙한데도 시끄러운 문의 마찰소리와 함께 먼저 내 눈에 들어온건 텅 비어있는 현관이였다.
이민우 구두가 없네?
"걔 어디갔어?"
"그러게...."
"아씨. 괜히 쫄았잖아!"
기억도 없을텐데 어디 마땅히 갈 곳도 없는 놈이였다.
그런데도 이렇게 사라져 버리다니. 왠지 불안감같은 느낌이 온 몸을 휩쓸었다.
제발- 내가 생각하는것이 아니기를......
-13-
그는 이상한 기운을 내고 있었다. 물론- 그런 기운에 이끌린 나란것을 안다.
하지만, 가끔씩 보고 있자면 도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빠지곤 한다.
어쩌면 지극히도 당연한 것 같은데도, 아닌것도 같았다.
이민우와 신혜성은 아니라는 이상한 생각 말이다…….
'파르르-'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것을 느꼈다.
하긴, 겨울이니 당연한 것만 같았다. 추우면 몸을 떠는게 당연하니까, 물론
갑자기 추워지는 이유는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그렇게 한참을 그를 쳐다보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눈을 뜬다.
덕분에 더 놀란건 나 였던것 같다.
"...... 여기서 뭐해?"
"응? 아 - 아니."
"왔으면 말을 하지 그랬어."
"응- .. 다음부터는 그러지 뭐."
그는 다시 평온한 잠에 들었고, 나는 그런 그를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뭐- 처음에는 이상한 감정에 꾀여졌다 한들, 지금와서 '그런 이상한 감정땜에 사귄것 뿐야!'
라고 하면 누가 믿을텐가.
그럼 좋아할수밖에…
이런 생각을 하는 내내 나는 가끔씩 웃음이 밖으로 새어나와 참을수가 없었다.
뭐가 그리 우스운건지 알지도 못한채 나는 바보같이 웃기만 했다. 정말 바보같이 말이다.
그러다가도 가끔씩 엄습해 오는 두려움이 나를 미치도록 떨게 만들었다.
아마, 갑자기 소름이 돋은것은 그것 덕분이지 싶었다. 이상한 두려움. 그 끝에 있는 이민우.
어쩌면 나중에는 꽤 어려운 일이 닥치리라는것을 지레 짐작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자라. 한 10시 안됐냐?"
"응? 으응- 그래야지."
자는것만 같던 이민우는 다시 또 선명하게 눈을 뜨며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뭐 귀찮다는 뜻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민우는 이상한 놈들중의 하나니까.
네가 존재하는 이유는 아마도 불가사의라는 단어가 존재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 그는 호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낸다. 그리고는 받으라는 시늉을 한다.
뭐-.. 갖다 놓으라는 뜻인가?
"잡을래?"
"엥?"
"던진다."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일까- 라고 생각하는 도중 그는 주사위를 던지듯 그렇게 열쇠를 던졌고,
나는 뭐냐며- 얼른 땅에 떨어진 열쇠를 줍는다.
그리고는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하녀냐? 내가 왜 이걸 주워야돼?"
"못주웠네....."
"이민우? 너 또 무슨 말이야, 그게?"
"........ 그냥. 못주웠다고."
그 말속에 뜻이 담겨있을줄 누가 알았겠는가.
*
나는 그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물론 김동완도 함께였다.
그렇게 그가 있을만한 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난 후에 만났던 카페-.
문정혁의 집-.
걷던 거리-.
이민우가 가고 싶어하던 공원-.
모두 그렇게 샅샅히도 뒤졌는데, 그는 나오지 않았다.
아니, 아예 몸을 숨겨버리기라도 하고 싶은건지 아무도 이민우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숨을 헉헉- 대며 몰아셨고, 김동완은 경찰에 신고는 해 놨다며 나를 안정시키려는
듯 말했다.
물론 그 말에 안정이 되긴 했으나, 이 끊임없이 타오르는 심장은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헉헉--."
"혜성아. 괜찮아? 너무 무리한거 아냐?"
"괜찮아-. 나 이래뵈도 지구력하나는 강한 놈이야. 헉헉-."
"근데, 집에 가봐야 되는거 아니야? 괜히 헛다리 짚다가 이민우가 돌아오면 어쩌려고."
"그럼- 동완이 너는 집에 가 있어. 나는 더 찾아볼테니까."
"....... 신.. 혜성?! 야. 어디가?!!"
"비밀-----! 어쨌든, 집에 빨리 돌아가 줘. 이민우 오면 알려주고."
나는 .. 어쩌면 그가 무의식중에 그 곳을 찾아갔을수도 있다는 생각을 넌지시 뱉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무의식중에 그 곳을 찾아갈지도 몰랐다.
이것은- tv에서 많이 보아오던 것들중 하나였으므로.
정말 tv가 바보매체가 아니라면 맞겠지. 라고 생각하며 그 곳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무의식중에 찾아야만 한다고 생각은 할 뿐이었다.
*
이민우와 난 텔레파시가 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서로가 어디에 있는지 대충 짐작은 가고 있었다.
이것은, 성격을 통해서 알아낸 것이라고 해야 할까. 어찌됐건 여자의육감이라는 것 처럼
어쩌면 그 보다도 더 정확한 것일수도 있었다.
[노란우산 쓰지 마.]
[응?]
[바보.]
[뭐?]
[노란색이 뭘 상징하는줄 알어?]
물론 모른다-.
나는 이민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이해할수도 없었다.
뭐 이성관계상 노란색에는 뭐가 있는 모양이였다. 난 남들에게 노란색이 조명빨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건 아닌듯 싶었다.
그때 이민우의 표정은 마치- 먹이를 앞둔 짐승의 눈빛처럼 반짝반짝- 했으니 말이다.
[S]
[S??]
[OK. 더 이상 말을 바란다면 곤란해.]
도대체 그게 무슨 뜻일까- 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해 봤는데, 여전히 찾아내지를 못하고 있었다.
김동완한테 묻기는 했는데, 그 녀석은 순진하다면서 씨익- 웃을 뿐이었다.
역시 재수없는 녀석.
그런 녀석한테 믿은 내 입한테 주위를 주며 나는 마지막골목을 돌고 있었다.
하나만 더 돌면- 그 곳이 보인다.
한강인듯- 출렁이는 가슴이, 한강인듯- 크고 넓은 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잔잔한 물결위에 조그만 파동이 하나둘씩 생겼다. 이는 필시 누군가가 돌멩이를 집어던지고 있다는 뜻이였다.
누구일까- 라는 생각은 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찾아다니던 그 사람이 앉아있을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다리위로 경찰차들이 보였고, 나는 그 것을 빤히- 보기만 했다. 찾을테면 찾아보라지.
경찰도 무기력해. 나보다 빨리 못찾았잖아.
난 이렇게 먼저 알고 찾았는데.
그렇게 서서히 가는데, 왜 가슴이 두근거리는지 모르겠다. 한발짝- 한발짝 그렇게 걷는데
평소에 뛰는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뛰는것은 심장이였다.
그렇게 그를 보았을때, 그 역시 나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