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자연과 시의 이웃들
 
 
 
 

회원 알림

다음
 
  • 방문
    1. 김교태
    2. 공산空山
    3. 坤滿 朴貴根
    4. 허드슨경
    5. 솔바람
    1. 안별
    2. 美村
    3. 소정 민문자
    4. 아침에향기
    5. 봄바다
  • 가입

회원 알림

다음
 
  • 방문
  • 가입
    1. 생명과문학 김윤환
    2. 해풍
    3. 김점홍
    4. 와룡산
    5. 자연과 사랑
    1. 여울향
    2. 향기로운 쟈스민
    3. 프로스페로
    4. 물항아리
    5. So-phie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牛♡│ 시 선 ‥| 스크랩 나의 문청시절 - 임보
동산 추천 0 조회 320 16.08.28 17:32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나의 문청시절

 

오만과 불손의 계절 / 임보

 

문청시절의 얘기를 들려달라는 편집자의 주문을 받았다.

흔히 문학 청년기를 줄여 '문청(文靑)'이라고 칭한다.

문학 청년기라 하면 기성 문인으로 등단하기 전, 문학 수련을

쌓던 젊은 시절을 이름이리라.

내가 <현대문학>지를 통해 마지막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등단한 것이 1962년 6월이니 만 23세가 되던 때다.

그렇다면 내가 문학 수련을 했던 시절은 문학 청년기라기보다는

문학 청소년기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사실 나는 문학의 병을 고등학교 시절부터 앓기 시작했다.

어쩌면 누구나 겪는 사춘기적 감수성을 나는 문학적 감성으로

잘못 판단하고 그렇게 앓았는지 모를 일이다.

 

주암중학교라는 열악한 시골 중학교 출신인 내가 명문인

광주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많은 충격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나를 가장 흥분시킨 것은 수만 권의 문학서적들을

소장하고 있는 학교 도서관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장 선생님을

위시해서 훌륭한 선생님들과의 만남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유공희(柳孔熙) 선생님과의 만남은 내 생애의

큰 행운이었다.

 

나는 매일 방과 후 도서관을 찾아 소설이며 시 가리지 않고

문학작품들을 탐독했다.

내게 물었다. 책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고…….

나는 서가의 한쪽에서부터 읽기 시작한다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그 형이 빙그레 웃으면서 '네가 아무리 열심히 읽어도

3년 동안 이 책들을 다 읽을 수는 없다.

내가 독서 목록을 만들어 줄 터이니 골라 읽으라'고 조언을 했다.

말하자면 그 형이 최초로 나의 멘토가 된 셈이었다.

매일 늦게까지 책을 읽다 돌아오면서 바라보던 천로길 너머의

노을빛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지금도 눈에 삼삼히 어른거린다.

 

우리의 입학과 함께 국어과에 유공희 선생님께서 부임해 오셨다.

갈색의 굵은 뿔테 안경에 올백 머리의 멋쟁이 선생님, 위트와

유머가 넘친 박학다식한 분이셨다. 일본 메이지대 문학부에 다니다

학병으로 끌려가 태평양 전쟁에 참가했던 선생님은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과 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보들레르를 위시해서 랭보, 말라르메, 발레리 등의 프랑스 상징파

시인들이며, 고흐, 고갱, 세잔느 등의 인상파 화가들, 그리고

까뮈, 사르트르 등의 실존주의 철학자들을 알려주셨다.

생의 철학자 린위탕(林語堂)의『생활의 발견』이며 구라다 하쿠조

(倉田百三)의『사랑과 인식의 출발』등을 만나게 된 것도

선생님 덕분이었다.

선생님의 수업은 교과서에 구애되지 않고 동서고금을 종횡무진

넘나들면서 흥미진진한 천재들의 이야기로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 주는 시간이었다.

선생님의 발음은 혀가 약간 짧은 듯한 느낌이었는데 오히려

그러한 말씨가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수업시간의 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늘 아쉽게 느껴졌고 항상 기대를 가지고

다음 수업시간을 기다리게 했다. 우리 학년은 운 좋게도 선생님의

명강의를 3년 내내 들을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내가 다닌 광주고등학교는 문학적 전통(?)을 지닌 학교였다.

많은 선배들이 이미 등단하여 활발히 문학 활동을 하고 있었다.

박성룡 박봉우를 위시해서 윤삼하 주명령 정현웅 강태열 등의

시인들이 <영도(零度)>라는 동인지를 만들어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이러한 선배들의 영향 때문이었든지 재학생들도 <태광(胎光)>

이라는 동인지를 만들며 열심히 문예활동을 했다.

이성부, 문순태 등은 바로 내 2년 뒤의 태광 동인 출신들이다.

 

고등학교 2학년 봄이었던가.

H신문사 문예작품 공모에 나의「題無」란 시가 당선이 되었다.

당시 유행하던 '무제(無題)'라는 제목을 의도적으로 뒤집어

놓은 것이었다.

좌측통행으로 구두의 뒤축이 한편으로만 닳는다는 내용의 글로

기억되는데, 내 딴에는 관습과 제도가 인간의 본성을 잘못 무너뜨린다는

비판의식을 담아 보려 했던 것 같다.

이 당선으로 말미암아 나는 내 인생의 진로를 문학 쪽으로 확정짓게

되었던 것 같다. 또한 이를 계기로 심사위원이셨던 김현승 시인과도

알게 되었다. 당시 조선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었는데 나는 가끔

양림동에 자리한 선생님 댁을 찾아가곤 했다.

허름한 집이었지만 마당이 넓어 시원했다.

글공부에 대한 어떤 조언이라도 얻을까 싶어 들렸지만 선생님은

거의 말씀이 없으셨다. 손수 끓여 주신 커피를 마시면서 무료하게

한참 앉아 있다 돌아오곤 했다. 이러한 인연으로 김현승 선생께서는

내가 대학 2학년 되던 해「자화상」을 <현대문학>지에 처음

추천하게 된다.

 

동급생으로 문학을 좋아했던 다섯 명의 친구들이 있었다.

반에서 10번 이내의 키가 작은 단구파(短軀派)들이었다.

우리들은 의기투합해서 도서관이 끝난 뒤 모여 각자 읽은 책을

가지고 감상을 나누기도 하고, 미래에 펼쳐질 각자의 꿈의 설계도를

늘어놓기도 했다. 교정에서 혹은 빵집에서, 주말이면 무등산 골짜기를

찾아 막걸리를 마시면서 호연지기를 토하기도 했다.

모임의 명칭은 달지 않았지만 우리 '五友'는 '五'자로 시작한 다섯 개의

호를 만들어 나누어 가졌다.

五豆(오두), 五集(오집), 五岩(오암), 五空(오공) 그리고 五臺(오대)다.

모두 문학을 필생의 사업으로 하자는 결의의 표시였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의 일이다.

 

돌이켜 보면 문학에 대한 그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오래 가지 않았다.

졸업과 동시에 문학과는 상관없는 자신의 길들을 찾아갔다.

콩처럼 작고 야무졌던 五豆 오병선은 법과대학에 진학해서 사법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한 다음, 명 판사를 거쳐 지금은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찝차처럼 작지만 생각이 깊었던 五集 이이화는 한학을 공부한 다음

유명한 재야 사학자가 되어 역사문제 연구소를 이끌면서, 20권이 넘은

방대한『한국사 이야기』를 저술하기도 했다.

바위처럼 묵직했던 五岩 정영식은 출판이며, 목회일이며, 번역 일이며

여러 가지 사업을 해 보았으나 세상과는 궁합이 잘 맞지 않았든지

과음으로 일찍 세상을 떴다. 약간의 허세가 없지 않았던 五空 박봉간은

언론계로 진출하여 지방방송국의 이사를 지내다 연전 세계 여행 중

예멘에서의 불의의 사고로 먼저 갔다.

이 다섯 사람 가운데 마지막까지 문학을 못 버리고 글과 씨름하면서

한평생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오직 나 五臺뿐이다.

어떻게 보면 초지일관 문학의 길을 가고 있는 내가 대견하게 생각될는지

모르지만 사실 나는 별다른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글에만 매달릴 수

있었을 것도 같다.

 

내가 입었던 교복은 맞춤이나 기성품이 아니라 어머님이 손수 지어주신

것이었다. 어머님께서는 목화를 심고 가꾸어 고운 무명베를

생산하셨다. 그 천에 검정물감을 들여 손재봉틀로 잘 박아 만든

교복이었다. 나는 그 교복을 입고 검정 고무신을 신고 선배가 물려 준

헌 모자를 눌러 쓰고 학교에 다녔다.

어머님이 지어 주신 교복은 무명천이어서 잘 구겨지고 염색이 나중엔

바래서 볼품이 별로 없었지만 당시 유행하던 밀양사지들 틈에

나는 조금도 기죽지 않고 자랑스럽게 입고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친구들이 보기에 얼마나 꼴불견이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래서 그랬든지 주먹깨나 쓰는 놈들은 나를 거만타고 한쪽으로

불러 으름장을 놓기도 했지만 나는 상대하지 않았다.

봉황의 뜻을 너희 같은 뱁새들이 어찌 알리!

아마도 이런 거만한 생각을 품고 건방지게 지냈던 것 같다.

 

3학년으로 올라간 뒤 한 5월쯤 되었을까.

유공희 선생님이 나를 부르셨다.

교무실로 찾아갔더니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근황을 물으셨다.

3학년 학생들은 매월 대학입학 모의고사를 치러 100등까지의 명단을

크게 써서 현관 위 벽에 내걸었다. 유 선생님께서는 내 이름이

방(榜)에 계속 나붙지 않자 궁금하셨던 것 같다.

사실 나는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생각을 일찌감치 접고 있었다.

당시의 집안 형편이 넉넉지도 못했지만 문학의 길을 가는 데는

굳이 학력이 필요할 것 같지 않았다.

대학에 가기보다는 비싼 등록금으로 차라리 양서를 구입해 충실히

읽고 글만 열심히 쓰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입시에 필요한 학과 공부는 멀리하고 문학서적만 읽고

있었던 것이다. 한번은 어떤 과목의 모의고사 답안지에 답 대신

상당히 긴 분량의 즉흥시를 썼던 적이 있는데, 과목 담당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그 즉흥시를 읽히는 바람에 친구들의 폭소를

자아내게도 했다.

진학에 뜻을 두지 않는다는 내 생각을 유 선생님께 말씀 드렸더니

선생님께서는 빙긋이 웃으시면서 "그래, 네 말이 맞다.

대학 안 가고도 교수들의 학문이야 그들의 저서를 읽어 보면

알 수 있지."하고 맞장구를 치셨다.

그리고 한참 있다 말씀하시기를 "그런데 말이야, 대학은 지식만

얻는 곳이 아니라 생활을 체험하는 곳이기도 하다.

대학엔 낭만적인 대학생활이란 것이 있지.

스승과 제자, 친구와 친구들 사이의 아름다운 교류가 있거든.

그것은 직접 대학에 가보지 않고는 맛볼 수 없단 말이야.

그것에 대한 미련까지도 없다면 네 마음대로 하려무나."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돌아온 뒤 나는 며칠 밤을 전전반측하면서

생각해 보았다.

정말 그 '대학생활'을 포기해도 후회가 없을까?

그렇게 고민하다가 드디어 결론을 내렸다.

그래, 대학에 들어가 보자. 들어가서 재미없으면 그때 그만 둬도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서 다시 대학 입학 시헙 준비에 매달리게

되었다. 만약 유 선생님께서 보통의 교사들처럼 "이놈아 대학은

가야만 해, 네가 무엇을 안다고 건방지게 그래? 문학은 대학을

다니면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야." 라고 충고하셨더라면

나는 어쩌면 반발심에서 내 뜻을 굽히지 안 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께서는 이미 내 성격과 고집을 읽고 마음을 움직이는 방법을

아셨던 것 같다. 유 선생님의 충고가 아니었더라면, 아마도 나는

반거들충이가 되어 한평생 떠돌이 삶을 살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1958년 1월, 내가 열아홉이던 때 처음으로 서울 길에 올랐다.

대학입학 시험을 치르기 위해 광주에서 호남선 야간열차를 타고

12시간 동안 시달린 뒤 이른 아침 서울역에 내렸다.

볼을 후비는 매서운 삭풍과 함께 전차 바퀴가 구르면서 내는 금속성의

마찰음이 날카롭게 나를 맞아 주었다.

서울역에서 전차를 타고 가다 혜화동에서 내려야 하는데 안내양의

말소리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돈암동 종점까지 가고 말았다.

지금의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주변은 서울대학교 본부와 문리과대학이

자리하고 있었다. 나는 학교 가까운 여인숙에 들어 언 몸을 녹였다.

부엌에서 새나오는 구수한 콩나물국 냄새와 함께 여인들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제 본 영화 <OK목장의 결투>를 딸이 어머니에게

신나게 들려주고 있었다.

나는 문틈에 귀를 대고 그 영롱한 서울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다짐했다.

저토록 아름다운 서울말과 함께 서울에서 살고 싶다고…….

대학입학 시험도 치르기 전에 내 마음은 이미 그렇게 변해 있었다.

 

'대학생활'을 맛보러 간 나에겐 과가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다.

당시 어찌된 일이었든지 독문과가 제일 인기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물정도 모르고 독문과를 지원했는데 제2지망이었던 국문과로

미끄러지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국문과로 밀린 것이

천만다행이다 싶다. 만약 독문학을 전공했더라면 얼마나 파란만장

했겠는가?

 

대학에 입학해 놓고 보았더니 독불장군들의 집합소만 같았다.

대학의 대학 어쩌고 하면서 서울대학 내에서도 문리과대학 학생들은

자존심이 대단했다. 문리과대학은 지금의 인문대학과 이과대학의

여러 학과들을 포괄하고 있었다. 1학년 교양과정에서는 제2외국어

선택별로 반이 편성되었다.

내가 속한 독일어 반은 50여 명쯤 되었는데 주로 독문과 정치과

사학과 사회학과 학생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심리학과와 중문과의 여학생이 두 명 끼어 있었다.

지금은 인문대학에 여학생들이 많지만 그땐 한 과에 한두 명의

여학생이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여학생들의 인기가 대단했다.

암컷을 놓고 겨루는 열대림의 야수들처럼 사내놈들은 쉬는 시간에

으르렁거리며 힘자랑을 하곤 했다. 특히 중문과의 여학생은

아름다운 용모에 도도한 새침데기로 뭇 남성들이 군침을 삼키고

있었다.

 

<태광> 동인이었던 고등학교 1년 위 K형이 독문과에 들어왔는데

나와 교양학과의 같은 반이었다.

나는 그 형을 설득하여 당시 어려운 학생들을 상대로 만든 학사(學舍)라는

저렴한 숙소에 함께 들어갔다. 우리가 들었던 곳은 홍릉 임업시험장

입구에 자리한 '홍릉학사'라는 집이었다.

미군들이 쓰다 버린 콘센트 막사를 개조하여 2인용 방들을 만들어

수용했다. 끼니가 되면 수십 명의 학생들이 밥과 콩나물국에 치즈와

깍두기를 타기 위해 배식판을 들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마치 수용소의 포로들과도 흡사한 모습이었으리라.

여름이면 뜨겁게 닳아 오른 양철지붕을 식히느라 물을 끼얹어야 했고,

겨울이면 스며드는 찬바람과 싸우느라 잠을 자기가 괴로웠다.

여름엔 주로 임업시험장에 몰래 들어가 나무그늘 밑에서 노닥거리며

지냈지만 겨울엔 속수무책이었다.

K형은 은행 지점장을 아버지로 두었기 때문에 그런 고생을 안 해도

되었으련만 나를 떨치기가 민망했든지 내게 담배까지 가르치면서

한 일 년쯤 즐겁게 잘 버텨 주었다.

 

K형과 나는 홍릉학사에서 공모를 했다.

중문과의 그 도도하고 아름다운 C양을 우리가 정복해 보자고…….

K형이 C양의 주소를 알아내고 나는 익명으로 1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엔 소위 펜팔이라는 것이 유행해서

청춘 남녀가 편지로 사귀는 일이 많았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몇 사람의 펜팔과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은 처지라 편지 쓰는 일엔 이력이 나 있었다.

수십 통의 편지를 보낸 뒤 나는 드디어 만나자는 일방적인 통고를

한 뒤 안국동 로터리 부근의 2층 다방으로 찾아갔다.

나는 검은 작업복(군복에 검은 물을 들여 교복처럼 즐겨 입었음)

대신 K형의 양복 윗도리를 빌려 입고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다방 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녀는 이미 나와 있었다.

나는 그녀와 안국동에서 삼청공원까지 걸어가며 최초의 데이트를

즐겼다. K형이 멀찌감치 떨어져 지켜보며 응원을 보냈다.

 

2학년이 되어 전공과목 강의가 시작되었는데 실망이 적지 않았다.

이희승(국어학), 이숭녕(언어학), 정병욱(국문학), 전광용(현대문학) 등

네 분의 교수가 계셨는데 어학 파트의 두 원로 교수가 주도를 하고

있어서 문학 쪽은 힘을 못 쓰고 있었다.

더욱이 이숭녕 교수는 창작에 뜻을 두고 있는 학생들을 불량배 취급을

했다. 그분의 말씀은 문리과대학은 학문하는 학자를 양성하는

곳이지 작가를 기르는 곳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학과의 분위기가 그렇다 보니 글 쓰는 데 관심을 가지고 들어왔던

놈들이 생각을 바꾸어 어학이나 국문학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20명의 입학 동기 가운데 창작의 뜻을 굽히지 않고 버틴 사람은

오직 나 혼자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의붓자식처럼 외톨이로 굴러다녔다.

소설을 쓰신 전광용 교수가 그나마 나를 다독여 주셨다.

그래서 그랬든지 대학에 들어온 후로는 시보다 소설 쪽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학년이 되면서 내 형편도 좀 풀리기 시작했다.

수십 년 동안 소식이 끊겼던 일본의 아버지와 연락이 닿아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K형과 나는 홍릉학사를 떠나 청량리역 인근의

한 하숙집에 들게 되었다. 옆방에는 K대학 농대에 다닌 학생이

있었는데 휴대용 전축을 종일 틀어놓고 북적거렸다.

동네 아줌마들을 모아 놓고 춤을 가르친다고 했다.

내가 늘씬한 체격을 가졌더라면 아마 그때 어떤 유혹에 빠져

어떻게 변했을 지도 모른다.

바로 그 하숙방에서 공초 오상순 시인과 하룻밤 지내게 된 추억도

있다. 나는 수필「공초」에서 그분에 대한 추억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공초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가 머문다는 명동의 청동다방에

들른 적이 있었다. 컴컴한 다방 한 귀퉁이에서 줄담배를 태우며

앉아 있던 삭발한 공초는 마치 마하트마 간디처럼 선량해 보였다.

 

위수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때를 기다렸다는 강태공이 아마

저런 모습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위엔 찾아온 문학소녀들로 부산했고, 방문객들이 남기고 간

방명록 「청동산맥」2)이 수십 권 그의 곁에 쌓여 있었다.

공초를 처음 만났던 날 나는 뜻하지 않게 그분과 하룻밤

지내는 인연을 갖게 되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가 기거하던 조계사의 거처를

잠시 잃고 떠돌던 때였던 것 같다. 그분 곁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사람과 더불어 숙식을 해결하며 지냈던 모양인데

그날 내가 당번이 된 셈이었다.

아무튼 나는 친구와 둘이 지내는 청량리의 한 하숙방에서

그와 하룻밤 동침을 하게 된 것이다.

당시 60대 중반의 공초는 건강해 보였다.

기력을 묻는 나에게 “자네 나와 팔씨름을 한번 해 보겠나?”

하며 팔을 걷어붙이기에, 설마하며 겨루어 보았는데 20대의

내가 대적하기 어려웠다.

취침과 식사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그의 입술엔 궐련이

떠나질 않았다. 그로부터 4년 뒤, 공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나는 병영(兵營) 안에서 듣고 스산한 기분을

억제할 수 없었다.   

 

이 무렵 광주 조선대학에 계신 김현승 시인께서 서울 숭실대학

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그리고 1959년 10월 <현대문학>지에

「자화상」을 첫 번째 추천작으로 올려 주셨다.

 

하지만 나는 그때 시보다는 소설 쪽에 관심이 기울어져 신춘문예

 

준비를 은밀히 하고 있었다. 청량리 하숙집에서 몇 개월 지낸 뒤

K형과 나는 삼청동에 자리한 국회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그 국회아파트는 삼청동에서 청와대로 넘어가기 전 언덕 위에

일자로 길게 늘어선 몇 동의 이층 목조 건물이었다.

일제 때 무슨 관사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해방 후 국회의원들

에게 분양해 주었던 것 같다.

자유당 시절 원내 총무를 지낸 우리 고장(곡성군) 출신 C의원은

자신에게 배당된 이 아파트를 헐고 방 8개의 조그만 기숙사를 지었다.

그리하여 곡성군 출신의 어려운 유학생들에게 숙소로 제공했는데

K형도 마침 동향이어서 함께 들어갈 수 있었다.

숙식을 실비로 해결할 수 있는 괜찮은 곳이어서 나는 졸업할 때까지

여기에 머물러 있었다.

 

국문과 교수들의 강의는 별로 재미가 없었다.

이희승 교수는 체구가 왜소했지만 강직한 분이셨다.

수업도 철두철미 시간을 잘 지켰다.

데모 때문에 학생들이 다 빠져나가고 없는 빈 교실에서 한 명의

여학생을 놓고도 강의를 진행했다.

이숭녕 교수는 강의보다는 적대관계에 있는 타 대학 교수들을

자주 비판했는데 주로 동국대의 양주동 교수가 표적이 되었다.

정병욱 교수는 교재를 읽히는 것으로 강의를 대신했고,

전광용 교수는 노트를 읽어 주며 받아쓰기를 시켰다.

나는 독문과의 단편소설 강독, 천문기상학교의 천문학 그리고

철학과의 강의들을 기웃거리고 다녔다.

1960년 4월 19일 화요일 제1교시, 박종홍 교수의 인식논리학

강의 시간이었다.

 '나'란 무엇인가의 화두를 가지고 강의가 한창 진행 중인데

뒤에서 누군가 '나가자!'라고 소리를 질렀다.

강의실 밖 교정 마로니에 나무 밑에는 이미 수십 명의 학생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강의실을 뛰쳐나간 우리들은 스크럼을 짜고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거리로 나갔다.

국회의사당 앞으로, 광화문 광장으로 집결한 그날의 데모가

4.19 학생의거의 주축이 되었다.

60년도 제1학기는 데모와 휴강으로 대학이 마비가 되었다.

나는 고향 집으로 내려갔고 중문과의 C양이 나의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내왔다.

 

<현대문학>은 1960년 11월에 나의 두 번째 추천작「거만한

상속자」를 실었다.

'세계는/ 내 조부가 지은/ 낮은 원두막/ 여기 나는/ 거만한

상속자'로 끝을 맺는 이 작품은 교만과 아집에 사로잡힌

역설적인 자화상이다. 

 

1961년 봄이던가 대학신문 현상모집에 단편소설「비(碑)」가

당선되었다. 그 동안 산문에 관심을 기울였던 성과인 셈이다.

이를 계기로 나는 소설에 더 열심히 매달려 보았지만

신춘문예의 관문을 뚫진 못했다. 오히려 시인으로의 데뷔를 2년

뒤인 1962년 6월로 늦추는 결과만 가져오게 하고 말았다.

 마지막 세 번째 추천작「나의 독재」역시 오만과 불손이 가득한

자화상이었다.

 

(우리시 2011. 7월호)

 

 

 

 

 

 
다음검색
댓글
  • 16.08.28 21:44

    첫댓글 제3문단에 누락된 부분이 있어 바로잡습니다.
    -------------------------------------------------
    나는 매일 방과 후 도서관을 찾아 소설이며 시 가리지 않고 문학작품들을 탐독했다.
    열심히 도서관에 드나드는 나를 관심 있게 지켜보던 3학년 도서반장 J형이 내게 물었다.
    책을 어떻게 읽고 있느냐고……. 나는 서가의 한쪽에서부터 읽기 시작한다고 대답했다.

  • 16.08.29 04:00

    뜬금없는 형의 조언이라는 대목에서 어리둥절했었는데, 이 단락이 빠져 있었군요. ^^*

  • 16.08.29 09:33

    들을수록 읽을수록 흥미로운 교수님의 문청시절이십니다.
    특히 유공희 선생님의 가르침을 3년씩이나 받으셨으니 얼마나 큰 복이신지요.
    저의 어릴적 무대가 홍릉산과 임업시험장(친구 집 사택이 그곳에)이라 더욱 반갑습니다.

  • 16.08.29 10:08

    잘 읽었습니다.
    오늘도 활기차고 행복한 시간 이어 가시길 바랍니다.

  • 16.08.29 17:51

    다시 읽어도 흥미진진입니다.
    저도 읽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역시 빠졌었네요.
    오늘의 교수님이 계시기까지......
    긴 여정이지만 한결같이 문학을 붙잡고 계셔서
    아직까지 강의도 하시는 정정한 현역이십니다.

  • 16.08.29 21:42

    훌륭하신 스승님과 친구들도 있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과 노력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늘 감동과 지혜의 글 올려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