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옥 빌헴 프리드리히 히걸 - 철학적 학문들의 엔치클로페디 강요 : 제1부 논리의 학 2 (Enzyklopädie der philosophischen Wissenschaften im Grundrisse : Wissenschaft der Logik)
사상들은 이러한 규정들에 따르면 객관적 사상이라고 불릴 수 있는데, 그것들에서는 또한 우선은 통상적 논리학에서 고찰되고 오직 의식적 사유의 형식들로만 받아들여지곤 하는 형식들도 고려되어야 한다.
따라서 논리학은 형이상학, 즉 사물들의 본질성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여겨진 사상들에서 파악된 사물들의 학문과 합치한다.
개념과 판단 및 추론과 같은 형식들이 인과성 등등과 같은 다른 형식들에 대해 지니는 관계는 오직 논리학 자신 내부에서만 밝혀질 수 있다.
그러나 잠정적으로나마 대강 통찰할 수 있는 것은, 사상이 사물들에 대해 개념을 만들려고 한다는 점에서, 이 개념(과 더불어 또한 그것의 가장 직접적인 형식들인 판단과 추론)이 사물들에 낯설고 외면적인 규정들과 관계들로 이루어질 수는 없다는 점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추사유는 사물들의 보편적인 것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이 보편적인 것은 그 자신이 개념 계기를 가운데 하나이다.
지성, 이성이 세계 안에 존재한다는 것은 ‘객관적 사상'이라는 표현이 포함하는 바로 그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 표현은 불편한데, 그 까닭은 바로 사상이 너무나 일상적으로 단지 정신과 의식에게 속하는 것으로서만 사용되고, 객관적인 것도 그와 마찬가지로 우선은 오직 비정신적인 것에 대해서만 사용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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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통상적으로 논리학이 단지 형식들만을 다루며 자기의 내용을 다른 곳에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논리적 사상들이 다른 모든 내용에 대립한 단지인 것이 아니라 다른 모든 내용이 이 논리적 사상들에 대립한 단지일 뿐이다.
그것들은 모든 것의 자체적이고도 대자적으로 존재하는 근거이다.
그러한 순수 규정들에 자기의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 이미 교양의 좀 더 고차적인 입장이 속한다. 그것들 자신을 자체적이고도-대자적으로-고찰하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 즉 우리가 사유 자신으로부터 이 규정들을 도출하고 그것들 자신으로부터 그것들이 과연 참다운 것인지를 살펴본다는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그 규정들을 외면적으로 받아들이고 나서 그것들을 그것들이 의식에서 출현하는 모습과 비교함으로써 그것들을 정의하거나 그것들의 가치와 타당성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 경우 우리는 관찰과 경험에서 출발하게 될 것이며, 예를 들어 우리는 힘을 그러저러한 것에 대해 사용하곤 한다고 말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정의가 우리의 일상적 의식에서 그것의 대상에 대해 발견되는 것과 일치할 때 그 정의가 올바르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러한 방식으로는 개념이 자체적이고도 대자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제에 따라 규정되며, 그 경우에는 그 전제가 올바름의 기준이자 척도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러한 척도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안에서 살아 있는 규정들을 그 자체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
사상 규정들의 진리에 대한 물음은 일상적 의식에게는 기이하게 여겨지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사상 규정들은 오직 주어진 대상들에 대한 그 적용에서만 진리를 획득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라 이러한 적용 없이 그것들의 진리에 대해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물음은 바로 관건이 되는 바의 것이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진리라는 것에서 무엇이 이해되어야 하는지 알아야만 한다.
통상적으로 우리는 진리를 대상과 우리의 표상의 일치라고 말한다.
우리는 거기서 그에 대한 우리의 표상이 그에 따라야 하는 대상을 전제로서 지닌다.
그에 반해 철학적 의미에서 진리는, 일반적으로 추상적으로 표현하자면, 내용의 자기 자신과의 일치를 뜻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리의 앞에서 언급된 의미와는 전혀 다른 의미이다.
그 밖에 진리의 좀 더 심오한 (철학적) 의미는 부분적으로는 이미 일상적 언어 사용에서도 발견된다.
그래서 우리는 예를 들어 참된 친구에 대해 말하는데, 그것에서 이해되는 것은 그 행동 방식이 우정의 개념에 걸맞은 그러한 친구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참된 예술작품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 경우 참되지 않다는 것은 나쁘다, 자기 자신 안에서 부적합하다는 정도를 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나쁜 국가는 참되지 않은 국가이며, 나쁘고 참되지 않은 것은 일반적으로 규정 또는 개념과 대상의 실존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순에 존립한다.
그러한 나쁜 대상에 대해 우리는 올바른 표상을 형성할 수 있지만, 이러한 표상의 내용은 자기 안에서 참되지 않은 것이다.
올바른 것인 동시에 비진리이기도 한 그러한 것들을 우리는 많이 머릿속에 지닐 수 있다.
오로지 신만이 개념과 실재성의 참다운 일치이다.
그러나 모든 유한한 사물은 그 자체에서 비진리를 지닌다.
그것들은 개념과 실존을 지니지만, 그 실존은 그 개념에 부적합하다.
그런 까닭에 그것들은 몰락해야만 하며, 그에 의해 그것들의 개념과 그것들의 실존이 부적합하다는 것이 현시된다.
개별자로서의 동물은 자기의 개념을 자기의 유에서 지니며, 유는 죽음에 의해 개별성으로부터 해방된다.
여기서 해명된 의미에서의 진리, 자기 자신과의 일치에 대한 고찰은 논리적인 것의 본래적인 관심을 이룬다.
일상적 의식에서는 사유 규정들의 진리에 대한 물음이 전혀 출현하지 않는다.
논리학의 과업은 또한 논리학에서는 사유 규정들이 고찰되도, 요컨대 그것들이 어느 정도까지 참된 것을 파악할 수 있는지가 고찰된다고도 표현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물음은 어떤 것이 무한한 것의 형식들이고 어떤 것이 유한한 것의 형식들인가 하는 것으로 귀착한다.
일상적 의식에서 사람들은 유한한 사유 규정들에 대해 아무런 의혹도 지니지 않으며, 그것들을 즉각적으로 타당화한다.
그러나 모든 기만은 유한한 규정들에 따라 사유하고 행동하는 데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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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본성적으로 악하다는 것은 교회의 잘 알려진 교설이며, 이러한 본성적인 악함은 원죄라고 불린다.
그렇지만 거기서 원죄가 단지 최초 인간들의 우연한 행위에만 그 근거를 지닌다는 외면적인 표상은 포기되어야 한다.
실제로 정신의 개념에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악하다는 것이 놓여 있으며, 우리는 이 점이 다를 수도 있을 것이라고 표상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자연본질로서 존재하고 그러한 본질로서 행동하는 한, 이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 행태이다.
정신은 자유로워야 하며, 자기 자신에 의해 바로 그 자신인 바의 것이어야 한다.
자연은 인간에 대해 그가 개조해야 할 출발점일 뿐이다.
교회의 심오한 원죄 교설에 대해서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선하며 그러므로 자연에 충실하게 머물러야만 한다는 근대적 계몽의 교설이 대립한다.
인간이 자기의 자연적 존재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기의식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외면적 세계로부터 구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정신의 개념에 속하는 이러한 분리의 입장은 또한 인간이 그에 머물러야 할 것도 아니다.
이러한 분열의 입장에는 사유와 의욕의 유한성 전체가 속한다.
인간은 여기서 목적들을 자기로부터 형성하며, 자기로부터 자기 행동의 소재를 취한다.
이 목적들을 정점으로까지 몰고 가 오직 자기만을 알고 보편적인 것을 배제한 채 자기의 특수성 속에 있고자 한다는 점에서 인간은 악하며, 이러한 악이 그의 주관성이다.
우리는 여기서 첫눈에 보기에 이중적인 악을 지닌다.
하지만 그 둘은 실제로는 똑같다.
인간은 정신인 한에서 자연본질이 아니다.
인간이 그러한 본질로서 행동하고 욕망의 목적들에 따르는 한에서, 그는 이 자연본질을 의욕한다.
그러므로 인간들의 자연적 악은 동물들의 자연적 존재와 같지 않다.
그 경우 자연성은 좀 더 자세하게는 자연적 인간이 개별자 그 자체라고 하는 규정을 지닌다.
왜냐하면 자연은 일반적으로 개별화의 유대 속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자기의 자연성을 의욕하는 한에서 그는 개별성을 의욕한다.
그렇지만 그 경우 자연적 개별성에 속하는 충동과 경향들로부터의 이러한 행동에 맞서 또한 법칙이나 보편적 규정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법칙은 외적 권력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신적 권위의 형식을 지닐 수도 있다.
인간은 자기의 자연적 태도에 머무르는 한에서 법칙에 예속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은 분명 자기의 경향들과 감정들에서도 또한 자기중심적인 개별성을 넘어서는 선의의 사회적 경향들, 동정심, 사랑 등등을 지닌다.
그러나 이 경향들이 직접적인 한에서 그것들의 그 자체에서 보편적인 내용은 주관성의 형식을 지닌다.
여기서는 언제나 이기심과 우연성이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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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 사상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철학의 목표가 아니라 그 절대적 대상이어야 할 진리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 표현은 일반적으로 곧바로 대립을, 게다가 현시대의 철학적 입장의 관심이, 그리고 진리와 그 진리의 인식을 둘러싼 물음이 그 규정과 타당성 주위를 돌고 있는 그러한 대립을 보여준다.
사유 규정들이 고정된 대립에 붙들려 있다면, 다시 말하면 사유 규정들이 단지 유한한 본성의 것들일 뿐이라면, 그것들은 자체적이고도 대자적으로 절대적인 진리에 적합하지 않으며, 그래서 진리가 사유 속으로 들어설 수 없다.
오직 유한한 규정들만을 산출하고 그러한 것들에서 움직이는 사유는 (말의 좀 더 정확한 의미에서) 지성이라고 불린다.
좀 더 자세히 하자면 사유 규정들의 유한성은 이중적 방식으로 파악될 수 있다.
하나의 방식에서 사유 규정들은 단지 주관적일 뿐이어서 객관적인 것에서 지속적인 대립을 지니며, 다른 방식에서 그것들은 제한된 내용 일반으로서 서로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절대적인 것에 대해서도 대립하는 데 머문다.
여기서 논리학에 주어져 있는 의미와 입장을 해명하고 이끌어오기 위해서는 이제 좀 더 자세한 서론으로서 객관성에 대한 사유에 주어진 태도들이 고찰되어야 한다.
그런 까닭에 그 출판 때에 학문의 체계 제1부라고 표시되었던 나의 정신현상학에서는 정신의 가장 단순한 최초의 현상, 즉 직접적 의식에서 시작하여 정신의 변증법을 철학적 학문의 입장에 이르기까지 전개하되, 그 입장의 필연성이 이러한 전진을 통해 제시되는 발걸음이 취해졌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단순한 의식의 형식 적인 것에 머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철학적 앎의 입장은 동시에 자기 안에서 가장 내실이 풍부하고 가장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과로서 출현하는 그 입장은 예를 들어 도덕, 인륜, 예술, 종교와 같은 의식의 구체적인 형태들도 전제했다.
따라서 내실, 즉 철학적 학문의 특유한 부분들의 대상들이 보이는 전개는 동시에 우선은 단지 형식적인 것에만 제한된 것으로 보이는 의식의 저 전개에 속하는바, 저 전개는 자체적인 것으로서의 내용이 의식에 대해 관계하는 한에서 이를테면 의식의 배후에서 진행되지 않을 수 없다.
그에 의해 서술은 더 복잡해지며, 구체적 부분들에 속하는 것이 부분적으로는 이미 저 서론에 함께 속한다.
여기서 시도되어야 할 고찰은 더 나아가 단지 역사학적이고 이치 추론하는 태도만을 취할 수 있다는 불편함을 지닌다.
그러나 이 고찰은 주로 사람들이 인식의 본성이나 신앙 등등에 대한 표상에서 자기 앞에 지니고 전적으로 구체적이라고 여기는 물음들이 실제로는 단순한 사상 규정들로 환원되지만, 그 사상 규정들은 논리학에서 비로소 참다운 해결을 얻게 된다고 하는 통찰에 이바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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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
첫 번째 태도는 자기 안에서나 자기에 맞서서나 여전히 사유의 대립에 대한 의식을 지니지 않은
채 추사유에 의해 진리가 인식되고 참으로 객관들인 바의 것이 의식 앞으로 데려와진다고 하는
믿음을 포함하는 순진무구한 방도이다.
이러한 믿음에서 사유는 곧바로 대상들에 다가가 감각과 직관의 내용을 자기로부터 사상의 내용
으로 재생산하고 진리로서의 그러한 내용에서 충족되어 있다.
모든 시원적인 철학, 모든 학문, 아니 의식의 일상적인 행위와 활동까지도 이러한 믿음 속에서 살아간다.
이 사유는 자기의 대립에 대한 무의식성 때문에 그 내실에 따라 진정한 사변적 철학함일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유한한 사유 규정들에, 다시 말하면 아직 해소되지 않은 대립에 머물 수도 있다.
여기 서론에서의 관심은 다만 사유의 이러한 태도를 그 한계에 따라 고찰하는 것이자 따라서 후자의 [유한한] 철학함을 우선 확인하는 것일 수 있을 뿐이다.
이 후자의 철학함이 가장 명확하게 형성되어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놓여 있는 것이 칸트 철학 이전에 우리에게서 조성되어 있던 바의 이전의 형이상학이었다.
그렇지만 이 형이상학은 철학사에 대한 관계에서만 이전의 어떤 것이다.
그 자체로 그것은 일반적으로 언제나 현존하며, 이성 대상들에 대한 단순한 지성 견해이다.
따라서 그것의 수법과 그 주요 내용에 대한 좀 더 자세한 고찰은 동시에 이러한 좀 더 자세한 현전하는 관심을 지닌다.
이 학문은 사유 규정들을 사물들의 근본 규정들로서 간주했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 사유됨으로써 그 자체에서 인식된다고 하는 전제로 인해 이후의 비판적 철학함보다 더 고차적인 위치에 서 있었다.
그러나 저 규정들은 그 추상 속에서 그 자체로 타당한 것으로서 그리고 참된 것의 술어들일 수 있는 것으로서 받아들여졌다.
저 형이상학은 일반적으로 절대자에게 술어들이 덧붙여지는 방식으로 절대자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전제했으며, 지성 규정들을 그것들의 특유한 내용과 가치에 따라 탐구하지도 않았고 또한 절대자를 술어들을 덧붙임으로써 규정하는 이 형식을 탐구하지도 않았다.
그러한 술어들은 예를 들어 '신은 현존재를 갖는다’라는 명제에서와 같은 현존재, 세계는 유한한가 아니면 무한한가 하는 물음에서의 유한이나 무한, ‘영혼은 단순하다’라는 명제에서의 단순과 합성, 더 나아가 '사물은 하나이다, 전체이다' 등등의 명제들에서의 그것들이다.
그러한 술어들이 과연 자체적이고도 대자적으로 참된 어떤 것인지, 또한 판단의 형식이 과연 진리의 형식일 수 있는지는 탐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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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형이상학의 전제는 순진무구한 믿음 일반의 전제, 즉 사유가 사물들의 자체적인 것을 파악한다는 것, 사물들이, 즉 그것들이 참으로 그것인 바의 것이 오직 사유된 것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인간의 마음과 자연은 항상 변신하는 프로테우스이며, 자기를 직접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대로의 사물들이 그 자체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아주 가까이 놓여 있는 반성이다.
여기서 언급되는 오랜 형이상학의 입장은 비판철학이 결론으로 지녔던 것의 반대이다.
우리는 분명 이러한 결론에 따르면 인간이 한갓 허섭스레기와 찌꺼기에만 지정되어 있을 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저 오랜 형이상학의 방도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 그 형이상학이 한갓 지성적일 뿐인 사유를 넘어서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오랜 형이상학은 추상적 사유 규정들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여 그것들을 참된 것의 술어들이라고 타당화했다.
사유에 관해 이야기 할 때, 우리는 유한하고 한갓 지성적일 뿐인 사유를 무한하고 이성적인 사유와 구별해야만 한다.
직접적이고 개별적으로 흩어져 발견되는 바의 사유 규정들은 유한한 규정들이다.
그러나 참된 것은 유한한 것에 의해 표현되거나 의식화될 수 없는 자기 안에서 무한한 것이다.
사유란 언제나 제한된 것처럼 생각하는 근래의 표상을 견지한다면, 무한한 사유라는 표현은 기이한 것으로서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사유는 그 본질에 따라 자기 안에서 무한하다.
유한하다는 것은 형식적으로 표현하자면 끝을 가지는 것, 즉 존재하지만 자기의 타자와 연관되고 그리하여 이 타자에 의해 제한되는 곳에서 존재하기를 그치는 그러한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유한한 것은 그것의 부정이자 그것의 한계로서 나타나는 그것의 타자에 대한 관계 속에 존립한다.
그러나 사유는 자기 자신 곁에 존재하며 자기 자신에 대해 관계하고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지닌다.
내가 사상을 대상으로 지닌다는 점에서, 나는 나 자신 곁에 존재한다.
그러니까 나, 사유는 사유 속에서 사유 자신인 대상과 관계하는 까닭에 무한하다.
대상은 일반적으로 타자, 나에 대해 부정적인 것이다.
사유가 자기 자신을 사유한다면, 사유는 동시에 대상이 아닌 대상, 다시 말하면 지양되고 관념적인 대상을 지닌다.
그러므로 자기의 순수성 속에 있는 사유 그 자체는 자기 안에 아무런 제한도 지니지 않는다.
사유는 다만 그것이 제한된 규정들에 머무르고, 그 제한된 규정들이 사유에 있어 최종적인 것으로서 여겨지는 한에서만 유한하다.
그에 반해 무한하거나 사변적인 사유는 마찬가지로 규정하지만, 규정하고 한정하면서 이 결함을 다시 지양한다.
무한은 일상적 표상에서처럼 추상적인 넘어섬과 언제나 - 계속되는 - 넘어섬으로서가 아니라, 앞에서 제시되었듯이 단순한 방식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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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형이상학의 사유는 유한한 사유였다.
왜냐하면 오랜 형이상학은 그것에게는 그 제한이 다시 부정되지 않는 확고한 어떤 것으로서 여겨진 그러한 사유 규정들 속에서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신은 현존재를 지니는지의 물음이 물어졌고, 여기서 현존재는 순수하게 긍정적 인 것으로서, 최종적이고 탁월한 것으로서 여겨졌다.
그러나 우리는 나중에 현존재가 결코 순전히 긍정적인 것이 아니라 너무 저급해서 이념과 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규정임을 보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세계의 유한성 또는 무한성에 대해서도 물었다.
여기서 무한성은 유한성에 확고히 맞세워지지만, 쉽게 통찰될 수 있는 것은 양자가 서로 맞세워
질 때는 전체이어야 할 무한성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하나의 측면으로서만 나타나고 유한한
것에 의해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정된 무한성은 그 자신이 유한한 것일 뿐이다.
같은 의미에서 사람들은 과연 영혼이 단순한지 아니면 합성되어 있는지 물었다.
그러므로 또한 단순성이 참된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최종적 규정으로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단순하다는 것은 현존재만큼이나 빈곤하고 추상적이며 일면적인 규정인바, 우리는 그 규정에 관해 나중에 그것 자신이 참되지 않은 것으로서 참된 것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영혼이 단순한 것으로서만 고찰되면, 그것은 그러한 추상에 의해 일면적이고 유한한 것으로서 규정된다.
그러므로 오랜 형이상학은 앞에서 언급된 종류의 술어들이 과연 자기의 대상들에 덧붙여질 수 있는지 인식하고자 하는 관심을 지녔다.
그러나 이 술어들은 단지 제한을 표현할 뿐 참된 것을 표현하지 못하는 제한된 지성 규정들이다.
여기서 다음으로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그 방도의 본질이 인식되어야 할 대상, 예를 들어 신에게 술어들이 덧붙여진다는 데에 존립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 경우 이러한 것은 대상에 대한 외면적 반성이다.
왜냐하면 규정들(술어들)은 나의 표상에서 완결되어 있고 대상에 외면적으로만 덧붙여지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대상의 참다운 인식은 대상이 자기를 자기 스스로 규정하지 자기의 술어들을 외면적으로 얻지 않는 바로 그 양식의 것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가 술어화의 방식으로 처리해 나가게 되면, 정신은 거기서 그러한 술어들에 의해서는 다함이 없겠다는 느낌을 지닌다.
그에 따라 오리엔트 사람들은 이러한 입장에서 전적으로 올바르게도 신을 많은 이름을 지닌 자, 무한한 이름을 지닌 자라고 부른다.
마음은 저 유한한 규정들 가운데 어느 것에서도 만족하지 못하며, 그에 따라 오리엔트적인 인식은 그러한 술어들을 쉼 없이 찾아내는 데 존립한다.
그런데 유한한 사물들에서는 물론 그것들이 유한한 술어들에 의해 규정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사실이며, 여기서는 지성이 자기의 활동을 가지고서 올바른 자리에 있다.
그 자신이 유한한 것인 지성은 또한 오직 유한한 것의 본성만을 인식한다.
예를 들어 내가 하나의 행위를 절도라고 부른다면, 그에 의해 그 행위는 그 본질적 내용에 따라 규정되어 있으며, 재판관에게는 이를 인식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유한한 사물들이 원인과 결과로서, 힘과 발현으로서 서로 관계한다면, 그것들은 이러한 규정들에 따라 파악됨으로써 그것들의 유한성에 따라 인식되어 있다.
그러나 이성 대상들은 그러한 유한한 술어들에 의해 규정될 수 없으며,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 것이야말로 오랜 형이상학의 결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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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형이상학은 교조주의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한한 규정들의 본성에 따라서 저 명제들이 그와 같은 것이었던 두 개의 대립된 주장들 가운데 하나는 참이지만 다른 하나는 거짓일 수밖에 없다고 가정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교조주의는 우선은 자기의 대립을 회의주의에서 지닌다.
오랜 회의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각각의 모든 철학이 일정한 정리들을 내세우는 한에서 그 철학
을 교조적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좀 더 넓은 의미에서는 본래적으로 사변적인 철학도 회의주의에 대해 교조적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경우 좀 더 좁은 의미에서의 교조적인 것은 대립된 규정들을 배제한 채 일면적인 지성 규정들을 견지하는 데 존립한다.
이러한 것은 일반적으로 엄밀한 이것 -아니면- 저것이며, 그에 따르면 예를 들어 세계는 유한하거나 아니면 무한하지만, 둘 중의 오직 하나일 뿐이다.
그에 반해 참다운 것, 사변적인 것은 바로 다음과 같은 것, 즉 그러한 일면적 규정이 그 자체에서 지니지 못하고 또 그러한 규정을 통해 남김없이 다 드러나지 않는 그러한 것인바, 오히려 총체성으로서 교조주의에 있어 그 분리에서 확고하고 참된 것으로서 여겨지는 그러한 규정들을 자기 안에서 통합하여 포함하는 그러한 것이다.
철학에서는 일면성이 총체성에 반하는 특수한 것이자 확고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총체성 옆에 서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그러나 실제로 일면적인 것은 확고한 것이거나 그 자체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전체 속에 지양된 것으로서 포함되어 있다.
지성 형이상학의 교조주의는 일면적 사상 규정들을 그 고립 속에서 견지하는 데 존립한다.
그에 반해 사변철학의 관념론은 총체성의 원리를 지니며, 자기를 추상적 지성 규정들의 일면성을 포월하는 것으로서 입증한다.
그래서 관념론은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다.
즉, 영혼은 단지 유한할 뿐이지도 단지 무한할 뿐이지도 않다.
오히려 그것은 본질적으로 한쪽인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다른 쪽이기도 하며, 그리하여 한쪽도 아니고 다른 쪽도 아니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규정들은 그 고립에서는 부당하며, 그것들은 오직 지양된 것으로서만 타당하다.
우리의 일상적 의식에서도 이미 관념론이 출현한다.
우리는 그에 따라 감성적 사물들에 대해 그것들이 변할 수 있다고, 다시 말하면 그것들에 존재 및 비존재가 속한다고 말한다.
지성 규정들과 관련해서는 우리는 더 완고하다.
이 지성 규정들은 사유 규정들로서는 좀 더 확고한 것, 아니 절대적으로 확고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그것들을 무한한 심연에 의해 서로로부터 분리된 것으로서 고찰하며, 그리하여 서로 대립하는 규정들은 결코 서로에게 도달할 수 없다.
이성의 투쟁은 지성이 고정한 바로 그것을 극복하는 데 존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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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형이상학의 정돈된 형태에서 그 첫 번째 부분을 이루는 것은 존재론 곧 본질의 추상적 규정들에 관한 학설이다.
다양성과 유한한 타당성을 지니는 이 규정들에 대해서는 원리가 빠져 있다.
그런 까닭에 그것들은 경험적으로나 우연적인 방식으로 열거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들의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다만 표상에, 즉 이 말에서는 바로 이러한 것이 생각된다고 하는 단언에, 또한 가령 어원학에 근거 지어질 수 있을 뿐이다.
거기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다만 언어 사용과 일치하는 분석의 올바름과 경험적 완전성일 뿐, 그러한 규정들의 자체적이고도 대자적인 진리와 필연성이 아니다.
존재, 현존재 또는 유한성, 단순성, 합성 등등이 과연 자체적이고도 대자적으로 참된 개념들인가 하는 물음은 단지 하나의 명제의 진리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고 다만 하나의 개념이 과연 하나의 주어에 참되게 (그렇게 말해졌듯이) 덧붙여질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만이 물어질 수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기이하게 보이지 않을 수 없다.
비진리란 표상의 주어와 이 주어에 대해 술어로 진술되는 개념 사이에서 발견되는 모순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것으로서의 개념과 심지어 각각의 모든 규정성 일반은 본질적으로 자기 자신 안에서 구별된 규정들의 통일이다.
그러므로 진리가 만약 모순의 결여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면, 각각의 모든 개념에서는 먼저 그것이 과연 그 자체로 그러한 내적 모순을 포함하는지가 고찰되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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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론은 자연은 물론이고 정신도 그 외면적 뒤얽힘에서, 그 현상에서,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현존재, 즉 유한한 것의 총체를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우주론은 이러한 자기의 대상을 구체적 전체로서가 아니라 단지 추상적 규정들에 따라서만 고찰했다.
그래서 여기서는 예를 들어 우연이 세계를 지배하는지 아니면 필연이 지배하는지, 세계가 영원 한지 아니면 창조되었는지의 물음들이 다루어졌다.
그에 이어 이 분과의 주요 관심사를 형성한 것은 예를 들어 자연에는 비약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이른바 보편적인 우주론적 법칙들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비약은 대체로 질적 구별과 질적 변화 정도를 뜻하는데, 그것들은 비매개적인 것으로서 현상하는 데 반해, (양적인) 점진적인 것은 매개된 것으로서 나타난다.
그러고 나서 세계에서 현상하는 바의 정신과 관련하여 우주론에서 다루어진 것은 주로 인간의 자유와 악의 근원에 대한 물음들이었다.
물론 이것들은 최고의 관심거리인 물음들이다.
그렇지만 이 물음들에 충분한 방식으로 대답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요구되는 것은, 마치 서로 대립하는 두 규정 각각이 그 자체로 존립하고 그 고립 속에서 실체적이고 참다운 것으로서 고찰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 바로 그 의미에서 그 추상적 지성 규정들을 최종적인 것으로서 견지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이 오랜 형이상학의 입장이었고, 일반적으로 우주론적 논의들에서도 그러했던바, 그런 까닭에 그 논의들은 세계의 현상들을 파악한다는 자기의 목적에 부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자유와 필연성의 구별이 고찰되었으며, 이 규정들은 자연이 그 작용들에서 필연성에 종속된 것으로 고찰되지만 정신은 자유로운 것으로서 고찰되는 바로 그 양식에서 자연과 정신에 적용되었다.
물론 이 구별은 본질적이며 정신 자신의 가장 내적인 것에 근거 지어져 있다.
그렇지만 서로 추상적으로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자유와 필연성은 다만 유한성에 속할 뿐이며 오직 그 지반 위에서만 타당하다.
자기 안에 아무런 필연성도 지니지 않는 자유와 자유 없는 단순한 필연성, 이것들은 추상적이고
따라서 참되지 않은 규정들이다.
자유는 본질적으로 구체적이며, 영원한 방식으로 자기 안에서 규정되어 있고 따라서 동시에 필연적이다.
필연성에 대해 말할 때 그것에서 이해되곤 하는 것은 우선은 다만 외부로부터의 결정, 예를 들어 유한한 역학에서 하나의 물체가 다른 물체에 의해 충돌될 때만 운동하되, 게다가 이 충돌로 인해 그것에게 주어지는 방향으로 운동하는 것과 같은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은 한갓 외면적인 필연성이지 참으로 내적인 필연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후자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선과 악의 대립, 즉 자기 안으로 심화한 근대 세계의 이러한 대립의 경우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악을 선이 아닌 그 자체로 확고한 것으로서 고찰한다면 이러한 것은, 최근에 분명 그렇게 말해졌듯이 마치 악과 선이 절대자에서 하나이며 어떤 것은 우리의 견해에 의해 비로소 악해지기나 한다는 것처럼 선과 악의 대립의 가상성과 상대성이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는 한에서, 전적으로 올바르며 그 대립은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잘못된 것은 사람들이 악을 확고한 긍정적인[적극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면에 악이란 그 자체로 존립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자체로 있고자 한 뿐이고 실제로는 다만 부정성의 자기 안에서의 절대적 가상일 뿐인 부정적인 것[소극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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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부분, 즉 자연신학 또는 합리적 신학은 신의 개념 또는 그것의 가능성, 신의 현존재에 대한 증명들과 신의 특성들을 고찰했다.
신에 대한 이러한 지성적 고찰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주로 우리가 신에서 표상하는 것에 어떤 술어들이 적합하거나 적합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실재성과 부정의 대립이 절대적인 것으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지성이 취하는 바의 개념에 대해서는 결국 무규정적 본질이라는, 순수한 실재성 또는 긍정성이라는 공허한 추상만이, 즉 근대적 계몽의 죽은 산물만이 남는다.
유한한 인식의 증명은 일반적으로 신의 존재의 객관적 근거가 제시되어야 하되, 그리하여 신의 존재가 다른 것에 의해 매개된 것으로서 나타난다고 하는 전도된 태도를 보여준다.
지성 동일성을 규칙으로 지니는 이러한 증명은 유한한 것에서 무한한 것으로 이행해야 한다는 난점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그 증명은 신을 현존재하는 세계의 긍정적으로 머무르는 유한성으로부터 해방할 수 없었고, 그리하여 신이 세계의 직접적인 실체로서 규정되어야만 했거나(범신론), 아니면 신이 객체로서 주체에 계속해서 대립함으로써 이러한 방식으로 유한한 것으로서 규정되어야만 했다(이원론).
특성들은 그것들이 규정되고 서로 다른 것들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본래적으로 순수한 실재성, 즉 무규정적 본질이라는 추상적 개념 속에서 몰락해 있다.
그러나 여전히 유한한 세계가 참된 존재로서 머물고 신이 표상 속에서 계속해서 그것에 맞서 있는 한에서, 또한 유한한 세계에 대한 신의 서로 다른 관계들의 표상도 나타나는데, 특성들로서 규정된 이 관계들은 한편으로는 유한한 상태들에 대한 관계들로서 그 자신이 유한한 양식(예를 들어 의롭다, 선하다, 강하다, 지혜롭다 등등)이어야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시에 무한해야 한다.
이러한 모순은 이 입장에서는 다만 그 특성들을 몰규정적인 것으로, 즉 더 탁월한 의미로 몰아가
는 양적 증대에 의한 한갓 모호한 해결책만을 허락한다.
그러나 이에 의해 특성은 실제로는 무화되고 특성에는 단지 이름만이 남겨진다.
오랜 형이상학의 이 부분에서 문제가 된 것은 이성이 그 자체로 신에 대한 인식에서 얼마나 멀리 나아갈 수 있는지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성에 의해 신을 인식하는 것은 학문의 최고 과제이다.
종교는 우선은 신에 관한 표상들을 포함한다.
신앙 고백에 총괄된 바의 이 표상들은 우리에게 어려서부터 종교의 교설들로서 전달되며, 개인이 이 교설들을 믿고 그것들이 그에게 진리인 한에서 그는 그리스도교도로서 필요로 하는 것을 지닌다.
그러나 신학은 이러한 신앙의 학문이다.
신학이 그저 종교 교설들의 외면적 열거와 총괄만을 준다면, 그것은 아직 학문이 아니다.
그 대상에 대한 오늘날 그토록 사랑받는 (예를 들어 이런저런 교부가 말한 것을 이야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과 같은) 한갓 역사학적 일 뿐인 취급에 의해서도 신학은 여전히 학문성의 성격을 얻지 못한다.
이것은 철학의 과업인 개념 파악하는 사유로 나아감으로써 비로소 이루어 진다.
그래서 참다운 신학은 본질적으로 동시에 종교철학이며, 중세에도 신학은 종교철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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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경우 오랜 형이상학의 합리적 신학에 관해 좀 더 상세히 이야기하자면, 그것은 신에 관한 이성 학문이 아니라 지성 학문이었으며, 그 사유는 오직 추상적 사상 규정들에서만 움직였다.
여기서는 신의 개념이 다루어지는 가운데 인식을 위한 도를 형성한 것은 신에 관한 표상이었다.
그러나 사유는 자유롭게 자기 안에서 움직여야 하는바, 그렇지만 그렇게 함에 있어 곧바로 주의해야 할 것은 자유로운 사유의 결과가 그리스도교의 내용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는 이성의 계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저 합리적 신학에서는 그러한 일치에 도달하지 못했다.
합리적 신학이 신에 관한 표상을 사유에 의해 규정하는 데 착수함으로써, 부정을 배제한 채 오직 긍정성 또는 실재성 일반의 추상물만이 신의 개념으로서 밝혀졌으며, 그에 따라 신은 가장 실재적인 본질로서 정의되었다.
그러나 쉽게 통찰될 수 있는 것은 이 가장 실재적인 본질이 그로부터 부정이 배제됨으로써 바로 그것이 마땅히 그것이어야 하고 지성이 그것에서 가진다고 생각하는 것의 정반대라고 하는 점이다.
그것은 가장 풍부하고 단적으로 충만한 것인 대신에 그에 대한 추상적 파악으로 인해 오히려 가장 빈곤하고 단적으로 공허한 것이다.
마음은 정당하게도 구체적인 내용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은 오직 그것이 규정성, 다시 말하면 부정을 자기 안에 포함함으로써만 현존한다.
신의 개념이 단순히 추상적이거나 가장 실재적인 본질의 개념으로서 파악된다면, 그에 의해 신은 우리에 대해 단순한 저편이 되며, 그 경우 그에 대한 인식에 관해서는 더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런 규정성도 없는 곳에서는 또한 어떠한 인식도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순수한 빛은 순수한 어둠이다.
이 합리적 신학의 두 번째 관심은 신의 현존재에 대한 증명에 관계되었다.
거기서 주요 문제는 지성에 의해 취해지는 바의 증명이란 하나의 규정의 다른 규정에 대한 의존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러한 증명에서 다른 것이 그로부터 따라 나오는 전제된 것, 확고한 것을 갖는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하나의 규정의 전제에 대한 의존이 제시된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으로 신의 현존재가 증명되어야 한다면, 이것은 신의 존재가 다른 규정들에 의존해야 하며, 그러므로 이 규정들이 신의 존재의 근거를 이룬다는 의미를 얻는다.
그렇다면 여기서 곧바로 알게 되는 것은 무언가 비뚤어진 것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신은 바로 단적으로 모든 것의 근거여야 하고, 따라서 다른 것에 의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람들은 근래에 신의 현존재란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인식되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성은 증명에서 지성과 또한 상식이 행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을 이해한다.
이성의 증명도 실로 그 출발점으로 신과는 다른 것을 지닌다.
하지만 그 증명은 그 전진에서 이러한 다른 것을 직접적이고 존재하는 것으로서 놔두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매개되고 정립된 것으로서 제시한다 는 점에서, 그에 의해 동시에 신이란 매개를 자기 안에 지양된 것으로 포함하는 것, 참으로 직접적인 것, 근원적인 것 그리고 자기에 기반하는 것으로서 고찰될 수 있다는 점이 밝혀진다.
사람들이 ‘자연을 고찰하라, 자연은 너희를 신에게로 이끌 것이고, 너희는 절대적인 궁극 목적을 발견할 것이다’라고 말할 때, 그것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은 신이 매개된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다른 것으로부터 신에게로 나아간다는 것일 뿐인바, 바로 그 양식에서는 귀결로서의 신이 동시에 저 최초의 것의 절대적 근거이며, 그러므로 위치가 전도되어 귀결로서 나타나는 바로 그것이 또한 근거로서 드러나고, 처음에 근거로서 제시되었던 것이 귀결로 격하된다.
그 경우 이러한 것은 이성적 증명의 발걸음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금까지 제시된 논의에 따라 다시 한번 이 형이상학의 방도 일반을 살펴보게 되면, 그 방도의 본질은 형이상학이 이성 대상들을 추상적이고 유한한 지성 규정들에서 파악했고 추상적 동일성을 원리로 삼았다는 데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러나 이러한 지성 무한성, 이러한 순수한 본질은 그 자신이 다만 유한한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특수성이 그로부터 배제되어 그 무한성을 제한하고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 형이상학은 구체적 동일성에 도달하는 대신에 추상적 동일성을 고집했다.
그러나 이 형이상학의 좋은 점은 오로지 사상만이 존재자의 본질성이라는 의식이었다.
이 형이상학에 소재를 제공한 것은 이전의 철학자들과 특히 스콜라 철학자들이었다.
사변철학에서 지성은 실로 하나의 계기이지만,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 계기이다.
플라톤은 그러한 형이상학자가 아니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더욱더 그렇지 않다.
비록 통상적으로는 그 반대로 믿어지고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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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주의는 이러한 원천을 한편으로는 형이상학 자신과 공유한다.
형이상학도 자기의 정의들- 전제들 및 좀 더 규정된 내용 -의 확인을 위해 마찬가지로 표상들, 다시 말하면 우선은 경험에서 기인하는 내용을 보증으로 지닌다.
다른 한편으로 개별적 지각은 경험과는 구별되며, 경험주의는 지각과 감정 및 직관에 속하는 내용을 보편적 표상과 명제 및 법칙 등등의 형식으로 고양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은 다만 이 보편적 규정들(예를 들어 힘)이 그 자체로 지각으로부터 취해진 것 이상의 의미와 타당성을 지녀서는 안 되며, 현상에서 지시될 수 있는 것 이외의 어떠한 연관도 권리를 지녀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만 이루어진다.
경험적 인식은 주관적 측면에 따른 확고한 발판을 의식이 지각에서 자기의 고유한 직접적인 현재와 확신을 지닌다는 점에서 가진다.
경험주의에는 참된 것은 현실 속에 있어야만 하고 지각을 위해 거기 있어야만 한다는 위대한 원리가 놓여 있다.
이 원리는 당위에 대립해 있는데, 반성은 이 당위를 가지고서 스스로 우쭐하며, 오직 주관적 지성에서만 자기의 자리와 현존재를 지녀야 할 저편을 가지고서 현실과 현재에 대해 경멸적으로 행위한다.
경험주의와 마찬가지로 철학도 오직 존재하는 것만을 인식한다.
철학은 단지 있어야 할 뿐이고 그리하여 거기 있지 않은 그러한 것을 알지 못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관적 측면에 따라서도 경험주의에 놓여 있는 자유라는 중요한 원리, 요컨대 인간은 자기의 앎에서 타당화해야 할 것을 스스로 보아야 한다는, 즉 자기 자신이 그 속에 현전하면서 알아야 한다는 원리가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경험주의가 그 내용에 따라 유한한 것에 제한되는 한에서, 경험주의의 일관된 관철은 초감성적인 것 일반이나 최소한 그에 대한 인식과 규정성을 부인하고 사유에 대해 추상과 형식적 보편성 및 동일성만을 허락한다.
학문적 경험주의에서 근본적 기만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것, 즉 그것이 물질, 힘, 게다가 하나, 여럿, 보편성, 그리고 또한 무한한 것 등등의 형이상학적 범주들을 사용하고, 더 나아가 그러한 범주들을 실마리로 하여 계속해서 추론해나가며, 그러함에 있어 추론의 형식들을 전제하고 적용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 그렇듯 형이상학을 포함하고 추동하며 저 범주들과 그것들의 결합들을 전적으로 무비판적이고 무의식적인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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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주의로부터 다음과 같은 외침이 선포되었다.
공허한 추상들에서의 방황을 그만두고, 너희 스스로 보며, 인간과 자연의 여기를 파악하고, 현재를 향유하라!
여기에 본질적으로 정당한 계기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
여기, 현재, 이편이 공허한 저편임, 즉 추상적 지성의 거미줄 및 모호한 형태들과 교환되어야 했다.
그 경우 이로써 오랜 형이상학에 없는 확고한 발판, 다시 말하면 무한한 규정도 획득된다.
지성은 유한한 규정들만을 주워 모은다.
이 규정들은 그 자체에서 불안정하고 흔들리고 있으며, 그것들 위에 세워진 건물은 자기 안에서 붕괴한다.
무한한 규정을 발견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이성의 충동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그 규정을 사유 안에서 발견할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 충동은 무한한 형식의 참다운 실존에서는 아닐지라도 그 자체에서 무한한 형식을 지니는 현재, 여기, 이것을 집어 들었다.
외면적인 것은 그 자체에서 참된 것이다.
왜냐하면 참된 것은 현실적이고 실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성이 찾는 무한한 규정성은 비록 그 진리에서가 아니라 감성적으로 개별적인 형태에서긴 할지라도 세계 속에 존재한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하자면 지각은 거기서 그 개념이 파악되어야 할 형식인바, 이 점이 경험주의의 결함이다.
지각 그 자체는 언제나 개별적이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인식은 거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지각된 개별자에서 보편적이고 존속하는 것을 찾아내며, 이러한 것은 단순한 지각으로부터 경험에로의 전진이다.
경험하기 위해 경험주의는 주로 분석의 형식을 사용한다.
지각에서 우리는 다면적으로 구체적인 것을 지니는데, 그 구체적인 것의 규정들은 그 껍질들이 벗겨지는 양파처럼 분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해부는 함께 유착된 규정들을 풀어내고 쪼개며, 쪼개는 주관적 활동 이외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는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렇지만 분석이란 분석되는 대상이 자기 안에 통합된 채로 포함하는 규정들이 분리됨으로써 보편성의 형식을 얻는 한에서 지각의 직접성으로부터 사상에로의 전진이다.
대상들을 분석한다는 점에서 경험주의는 만약 그것이 대상들을 그것들이 존재하는 그대로 놔둔다고 생각한다면 오류에 처해 있다.
경험주의는 실제로는 구체적인 것을 추상적인 것으로 전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환을 통해 동시에 살아 있는 것이 죽임을 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왜냐하면 오직 구체적인 것, 하나만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념 파악하기 위해서는 저 갈라놓음이 행해져야만 하며, 정신 자신은 자기 안에서 갈라놓음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단지 하나의 측면일 뿐이며, 주요한 문제는 갈라진 것의 통합에 존립한다.
분석이 갈라놓음의 입장에 머무른다는 점에서, 그에 대해서는 시인의 저 말이 타당하다.
‘화학은 자연 조작이라 부르지만, 자기 자신을 조롱하면서도 그 이치를 모른다네.
부분들을 자기 손에 넣고 있지만, 딱하게도 정신적 유대만은 빠져 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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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석은 구체적인 것에서 출발하며, 이 재료에서 오랜 형이상학의 추상적 사유보다 훨씬 앞선다.
그것은 구별들을 확정하며, 이 점은 대단한 중요성을 지닌다.
그러나 그 경우 이 구별들은 그 자신이 또다시 추상적 규정들, 다시 말하면 사상들일 뿐이다.
그런데 이 사상들이 대상들 자체인 바로 그것으로서 여겨진다는 점에서, 이것은 또다시 오랜 형이상학의 전제, 요컨대 사유 속에 사물들의 참다운 것이 놓여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계속해서 내용과 관련하여 경험주의의 입장을 오랜 형이상학의 그것과 비교한다면, 앞에서 보았듯이 후자는 자기의 내용으로 저 보편적인 이성 대상들, 즉 신과 영혼 및 세계 일반을 가졌다.
이 내용은 표상으로부터 받아들여졌고, 철학의 과업은 그 내용을 사상의 형식으로 환원하는 데 존립했다.
스콜라 철학에 놓여 있는 사정도 비슷한 방식이었다.
이 철학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교회의 교의들이 전제된 내용을 형성했고, 문제가 된 것은 그것을 사유에 의해 좀 더 자세히 규정하고 체계화하는 것이었다.
경험주의의 전제된 내용은 그 종류가 전혀 다르다.
이것은 자연의 감성적 내용과 유한한 정신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유한한 소재가 주어져 있으며, 오랜 형이상학에서는 무한한 소재가 주어져 있다.
그 경우 이 무한한 내용은 지성의 유한한 형식에 의해 유한하게 되었다.
경험주의에서 우리는 똑같은 형식의 유한성을 지니며, 그 밖에 또한 내용도 유한하다.
게다가 철학함의 두 방식 모두에서는 그 둘 다 무언가 확고한 것으로서의 전제들로부터 출발하는 한에서 방법도 똑같다.
경험주의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외면적인 것이 참된 것이고, 그 경우 비록 초감성적인 것이 승인된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인식은 성립 할 수 없어야 하고 오로지 지각에 속하는 것만이 견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원칙은 일관되게 관철되는 가운데 나중에 유물론이라고 불리게 된 바로 그것을 제공했다.
이 유물론은 물질 그 자체를 참으로 객관적인 것으로서 간주한다.
그러나 물질은 그 자신이 이미 그 자체로서는 지각될 수 없는 추상물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물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실존하는 바의 그것은 언제나 규정된 것,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이라는 추상물은 모든 감성적인 것, 요컨대 감성적인 것 일반, 자기 안에서의 절대적 개별화, 따라서 상호외재하는 것을 위한 기초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감성적인 것이 경험주의에 대해 주어진 것이자 계속해서 그러한 것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부자유의 학설이다.
왜냐하면 자유란 바로 내가 나에 대해 절대적으로 다른 것을 지니지 않고 나 자신인 바의 내용에 의존한다는 점에 존립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입장에서는 이성과 비이성이 단지 주관적일 뿐인바, 다시 말하면 우리는 주어진 것을 그것이 존재하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것이 과연 그리고 얼마만큼이나 자기 안에서 이성적인지에 관해 물을 수 있는 권리를 지니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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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철학은 경험주의와 공통되게 경험을 인식의 유일한 지반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비판철학은 경험을 진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현상에 대한 인식으로만 간주한다.
우선 출발점을 이루는 것은 경험의 분석에서 발견되는 요소들, 즉 감성적 소재와 그 소재의 보편적 관계들의 구별이다.
이것과 앞 절에서 제시된 반성, 즉 지각에는 그 자체로 오직 개별적인 것만이 그리고 오직 생기하는 그러한 것만이 포함되어 있다는 반성이 결합하는 가운데, 동시에 다음과 같은 사실, 즉 보편성과 필연성이 경험이라 불리는 것에서 마찬가지로 본질적인 규정들로서 발견된다는 점이 견지된다.
그런데 이 요소는 경험적인 것 그 자체로부터 유래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사유의 자발성에 속하거나 선험적이다.
사유 규정들 또는 지성 개념들은 경험 인식의 객관성을 이룬다.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관계를 포함하며, 따라서 그것들에 의해 선험적 종합 판단(다시 말하면 대립된 것들의 근원적 관계)이 형성된다.
인식에서 보편성과 필연성의 규정들이 발견된다고 하는 이 사실을 흄의 회의주의는 부인하지 않는다.
칸트 철학에서도 그것은 하나의 전제된 사실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학문들에서의 통상적 언어에 따라 칸트 철학이 다만 저 사실에 대한 다른 설명을 내세웠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비판철학은 형이상학에서 - 그 밖에 또한 다른 학문들과 일상적 표상 작용에서도 - 사용되는 지성 개념들의 가치를 우선은 탐구한다.
그렇지만 이 비판은 이 사유 규정들의 내용과 서로에 대해 규정된 관계 자신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주관성과 객관성의 대립 일반에 따라 고찰한다.
여기서 받아들여지는 바의 이 대립은 경험 내부에서의 요소들의 구별에 관계된다(앞 절 참조).
여기서 객관성은 보편성과 필연성의 요소, 다시 말하면 사유 규정들 자신 - 이른바 선험적인 것의 요소를 뜻한다.
그러나 비판철학은 그 대립을 주관성 안으로 경험의 전체, 다시 말하면 저 두 요소 모두가 함께 속하고, 그 주관성에는 사물-자체 이외의 아무것도 맞서 있지 않다는 식으로 확대한다.
선험적인 것의, 다시 말하면 사유의, 게다가 자기의 객관성에도 불구하고 단지 주관적일 뿐인 활동으로서의 사유의 좀 더 자세한 형식들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 어쨌든 심리학적 역사학적 기초들에만 의거하는 체계화의 방식으로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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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형이상학의 규정들이 탐구됨으로써 의심할 바 없이 아주 중요한 발걸음이 내딛어졌다.
순진무구한 사유는 어떠한 의혹도 지니지 않은 채 곧바로 그리고 저절로 만들어진 저 규정들에 몰입했다.
그러함에 있어 이 규정들이 그 자체로 얼마만큼이나 가치와 타당성을 지니는지는 사유되지 않았다.
앞에서 이미 자유로운 사유는 어떠한 전제도 지니지 않는 그러한 것이라는 점에 대해 주의해둔 바 있다.
그런 까닭에 오랜 형이상학의 사유는 자유로운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사유는 자기의 규정들을 즉각적으로 앞서 존재하는 것으로서, 선험적인 것으로서 타당화했고, 반성은 그것을 스스로 검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비판철학은 사유의 형식들이 일반적으로 얼마만큼이나 진리의 인식을 달성케 할 수 있는지 탐구하는 것을 자기의 과제로 삼았다.
좀 더 정확히 하자면 이제 인식 능력이 인식에 앞서 탐구되어야 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물론 사유의 형식들 자신이 인식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는 올바른 것이 놓여 있다.
하지만 또한 곧바로 인식에 앞서 이미 인식하고자 하거나 수영하기를 배우기 전에는 물에 들어가고자 하지 않는 오해가 슬그머니 기어들어 온다.
물론 사유의 형식들이 탐구되지 않은 채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탐구는 그 자신이 이미 인식이다.
그러므로 자유 형식들의 활동과 그것들에 대한 비판은 인식에서 통합되어 있지 않을 수 없다.
사유 형식들은 자체적이고도 대자적으로 고찰되어야만 한다.
그것들은 대상이자 대상 자신의 활동이다.
그것들은 스스로 자기를 탐구하여 그것들 자신에서 스스로 자기의 한계를 규정하고 자기의 결함을 드러내야만 한다.
그 경우 이러한 것은 바로 다음에 변증법으로서 특별히 고찰되게 될 것과 같은 사유의 활동인데, 그 활동에 대해 여기서 잠정적으로 주의해 둘 수 있는 것은 다만 그것이 밖으로부터 사유 규정들에 가져와지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규정들 자신에 내재하는 것으로서 고찰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칸트 철학에서 가장 가까이 놓여 있는 것은 다음의 것, 즉 사유 자신이 자기가 얼마만큼이나 인식할 능력이 있는지 자기를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칸트 철학을 넘어섰으며, 누구나 다 그보다 더 나아가고자 한다.
그렇지만 더 나아감은 이중의 것, 즉 앞으로-더-나아감과 뒤로-더-나아감이다.
우리의 철학적 노력들 가운데 많은 것은 엄밀히 음미해보면 다름 아닌 오랜 형이상학의 방도, 즉 바로 모두에게 주어져 있는 바의 무비판적인 되는 대로 생각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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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규정들에 관한 칸트의 탐구는 본질적으로 그 규정들이 자체적이고도 대자적으로 고찰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주관적인가 아니면 객관적인가 하는 관점하에서만 고찰된다는 결함을 지닌다.
일상생활의 언어 사용에서 객관적인 것은 우리 바깥에 현존하고 지각을 통해 밖으로부터 우리에게 다다르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칸트는 (예를 들어 원인과 결과와 같은) 사유 규정들에 대해 그것들에 여기서 언급된 의미에서의 객관성이 속한다는 것을, 다시 말하면 그것들이 지각에서 주어져 있다는 것을 부인했으며, 그에 반해 그것들을 우리의 사유 자신이 나 사유의 자발성에 속하는 것으로서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 주관적인 것으로서 고찰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사유된 것과 좀 더 자세하게는 보편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을 객관적인 것이라고 부르고, 단지 감각되었을 뿐인 것을 주관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이리하여 앞에서 언급된 언어 사용은 거꾸로 된 것으로서 나타나며, 그런 까닭에 칸트에게는 언어 혼란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렇지만 그 비난은 대단히 부당하다.
이와 관련한 사정은 좀 더 자세하게는 다음과 같다.
보통의 의식에게는 그에 맞서 있는 것, 감성적으로 지각 가능한 것(예를 들면 이 동물, 이 별 등등)이 그 자체로 존립하는 것, 자립적인 것으로서 나타나며, 그에 반해 사상들은 그 의식에게 비자립적인 것이자 다른 것에 의존하는 것으로서 여겨진다.
그러나 실제로는 감성적으로 지각 가능한 것은 본래적으로 비자립적이고 이차적인 것이며, 그에 반해 사상들은 참으로 자립적이고 일차적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칸트는 사상적인 것(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을 객관적인 것이라고 불렀으며, 게다가 전적으로 정당하게 그렇게 했다.
다른 한편으로 감성적으로 지각 가능한 것은, 그것이 자기의 발판을 자기 자신 안에 지니지 못하
고, 사상에 지속과 내적 존립의 성격이 속하는 만큼이나 덧없고 지나쳐 가버리는 한에서, 물론 주
관적인 것이다.
여기서 언급되고 칸트에 의해 관철된,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사이의 구별이라는 규정을 우리는 오늘날 좀 더 고차적으로 도야된 의식의 언어 사용에서도 발견한다.
그래서 예를 들어 예술작품의 판정에 대해서는 그것이 객관적이어야지 주관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요구가 제기되는데, 그 경우 거기서 이해되는 것은 그 판정이 순간의 우연적이고 특수한 감각과 기분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예술의 본질에 근거 지어진 관점들을 안목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의미에서 학문적인 용무에서도 객관적 관심과 주관적 관심이 구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 칸트적인 사유의 객관성도, 칸트에 따르면 사상들이 비록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규정들이라 할지라도 다만 우리의 사상들일 뿐이고 사물 자체인 것과는 건널 수 없는 심연에 의해 구별된 한에서, 그 자신이 다만 또다시 주관적일 뿐이다.
그에 반해 사유의 참된 객관성은 다음과 같은 것, 즉 사상들이 단지 우리의 사상들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사물들과 대상적인 것 일반의 자체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객관적과 주관적은 우리가 친숙하게 사용하는 편안한 표현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용에서는 아주 쉽게 혼란이 발생한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르면 객관성은 삼중의 의미를 지닌다.
우선은 단지 주관적인 것, 사념된 것, 꿈꿔진 것 등등과 구별되어 외면적으로 현존하는 것이라는 의미,
둘째로 칸트에 의해 확립된 의미, 즉 우리의 감각에 속하는 우연적인 것, 특수한 것, 주관적인 것과 구별되는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것이라는 의미,
그리고 셋째로 앞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된 의미, 즉 단지 우리에 의해서만 사유되고 따라서 사태 자신이나 그 자체에서의 사태와는 여전히 구별되는 것과는 구별되는, 거기 있는 것의 사유된 그 자체에서의 것이라는 의미가 그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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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 능력, 인식 그 자체.
이 철학은 지성 개념들의 규정된 근거로서 사유에서의 자아내의 근원적 동일성(자기의식의 초월론적 통일)을 제시한다.
감정과 직관을 통해 주어지는 표상들은 그 내용에 따라서 다양한 것이고, 그와 마찬가지로 그 형식에 의해서도, 즉 직관 자신의 형식들(보편적인 것)로서 선험적인 공간과 시간이라는 감성의 두 가지 형식에서의 감성의 상호외재에 의해서도 다양한 것이다.
감각과 직관의 이러한 다양한 것은 자아가 그것을 자기에게 관계시키고 하나의 의식으로서의 자기 안에서 통합함으로써(순수통각) 동일성에로, 하나의 근원적 결합으로 가져와진다.
이러한 관계 작용의 규정된 방식들이 순수지성 개념들, 범주들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칸트 철학은 범주들의 발견을 아주 편하게 수행했다.
자아, 즉 자기의식의 통일은 전적으로 추상적이고 완전히 무규정적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아의 규정들, 즉 범주들에 도달할 수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통상적인 논리학에서는 판단의 서로 다른 종류들이 이미 경험적으로 주어져 발견된다.
그러나 판단하는 것은 규정된 대상에 대한 사유이다.
그러므로 이미 완결되어 열거된 서로 다른 판단 방식들은 사유의 서로 다른 규정들을 제공한다.
피히테 철학에는 사유 규정들이 그 필연성에서 제시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들이 본질적으로 도출되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켰다는 심오한 공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철학은 논리학을 논구하는 방법에 대해 최소한 사유 규정들 일반이나 보통의 논리학적 재료, 즉 개념과 판단과 추론의 종류들이 더는 관찰로부터만 취해짐으로써 단순히 경험적으로만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사유 자신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도록 작용했어야 했을 것이다.
만약 사유가 무언가 어떤 것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면, 만약 논리학이 증명들이 주어지기를 요구해야만 한다면, 그리고 만약 논리학이 증명하기를 가르치고자 한다면, 논리학은 무엇보다도 우선 자기의 가장 특유한 내용을 증명하고 그 내용의 필연성을 통찰할 수 있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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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칸트의 주장은 사유 규정들이 그 원천을 나[자아]에게서 지니며, 그에 따라 내가 보편성과 필연성의 규정들을 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선 우리 앞에 지니는 것을 고찰한다면, 그것은 일반적으로 다양한 것이다.
그 경우 범주들은 이 다양한 것이 그에 관계하는 단순성들이다.
그에 반해 감성적인 것은 상호외재, 자기 밖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감성적인 것의 본래적인 근본 규정이다.
그래서 예를 들어 지금은 오직 이전과 이후에 대한 관계에서만 존재를 지닌다.
그와 마찬가지로 빨강은 다만 그것에 노랑과 파랑이 대립하는 한에서만 현존한다.
그러나 이 다른 것은 그 감성적인 것의 밖에 있으며, 이 감성적인 것은 오직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닌 한에서만, 그리고 오직 다른 것이 있는 한에서만 존재한다.
사유나 나의 경우의 사정은 서로 밖에서와 자기 밖에서 존재하는 감성적인 것의 경우와는 정반대이다.
사유나 나는 근원적으로 동일적인 것, 자기와 하나인 것이자 단적으로 자기 곁에 존재하는 것이다.
내가 ‘나'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추상적 관계이며, 이러한 통일 속으로 정립되는 것은 통일에 감염되어 통일로 전환된다.
그리하여 나는 이를테면 무관심한 다양성을 먹어 치우고 통일로 환원하는 도가니와 불이다.
그 경우 이것은 칸트가 일상적 통각과 구별하여 순수통각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일상적 통각이 다양한 것 그 자체를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데 반해, 순수통각은 자기 것으로 만드는 활동으로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이로써 이제 모든 의식의 본성이 올바르게 언명되었다.
인간의 노력은 일반적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것, 즉 세계를 전유하여 자기에게 복속시키는 것으로 귀착하며, 결국 세계의 실재가 이를테면 으깨어져야만 하고, 다시 말하면 관념화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 경우 동시에 주의해야 하는 것은 다양성 속으로 절대적 통일을 집어넣는 것이 자기의식의 주관적 활동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동일성은 오히려 절대적인 것, 참다운 것 자신이다.
그 경우 개별성들이 그 자신을 향유하도록 방출하는 것은 이를테면 절대자의 자비이며, 이 절대자 자신은 개별성들을 절대적 통일로 다시 몰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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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식의 초월론적 통일과 같은 표현들은 거기에 무언가 엄청난 것이 숨어 있기나 한 것처럼 매우 어려워 보이지만, 사태는 좀 더 단순하다.
칸트가 초월론적이라는 것에서 무엇을 이해하고 있는지는 그것과 초월적의 구별로부터 드러난다.
요컨대 초월적인 것은 일반적으로 지성의 규정성을 넘어서는 것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우선은 수학에서 나타난다.
그래서 예를 들어 기하학에서는 원주를 무한히 많고 무한히 작은 직선들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표상해야만 한다고 말해진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지성에게 단적으로 서로 다른 것으로서 여겨지는 규정들(곧음과 굽음)이 명백히 동일한 것으로서 정립된다.
그런데 또한 유한한 소재에 의해 규정되는 보통의 의식과는 구별되어 자기와 동일하고 자기 안에서 무한한 자기의식도 그러한 초월적인 것이다.
그럼에도 칸트는 저 자기의식의 통일을 다만 초월론적이라고만 불렀으며, 그것에서는 그 통일이 단지 주관적일 뿐이고 또한 그 자체에서 존재하는 대로의 대상들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다고 이해했다.
범주들이 단지 우리에게 속하는 것으로서(주관적인 것으로서)만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은 자연적 의식에게는 아주 기이한 것으로서 나타나지 않을 수 없으며, 거기에는 물론 무언가 비뚤어진 것이 놓여 있다.
그렇지만 범주들이 직접적인 감각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만큼은 올바르다.
예를 들어 한 조각의 설탕을 살펴보자.
이것은 딱딱하고 하얗고 달콤하고 등등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모든 특성이 하나의 대상 안에 통합되어 있으며, 이 통일은 감각 안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가 두 사건을 서로에 대해 원인과 결과의 관계 속에 있는 것으로 고찰할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지각되는 것은 시간 속에서 계기적으로 뒤따르는 개별화된 두 사건이다.
그러나 하나는 원인이고 다른 하나는 결과라는 것(둘 사이의 인과 연관)은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우리의 사유에 대해서만 현존한다.
그런데 (예를 들어 통일, 원인과 결과 등등과 같은) 범주들이 사유 그 자체에 속한다고 할지라도, 그로부터 바로 그런 까닭에 그것들이 단지 우리의 것일 뿐, 대상들 자신의 규정들이기도 하지는 않다는 것은 결코 따라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칸트의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것이 사실이어야 하며, 그의 철학은 내(인식하는 주관)가 인식의 형식뿐만 아니라 또한 소재도 - 전자는 사유하는 자로서 그리고 후자는 감각하는 자로서 - 제공하는 한에서 주관적 관념론이다.
이러한 주관적 관념론의 내용에 따르자면 사실상 조금도 수고할 필요가 없다.
가령 우선 생각될 수 있는 것은 대상들의 통일이 주관 속으로 옮겨짐으로써 대상들에게서 실재성이 박탈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단순히 대상들에게 존재가 속한다고 하는 것에 의해서는 대상들도 우리도 무언가를 획득하지 못할 것이다.
관건이 되는 것은 내용, 즉 과연 이 내용이 참된 것이냐 하는 것이다.
사물들이 단순히 있을 뿐이라는 것으로는 그것들에 아직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 위로 시간이 다가오며, 그것은 곧이어 또한 존재하지 않게 된다.
또한 인간은 주관적 관념론에 따르면 자기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지닐 수 있다고 말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의 세계가 감성적 직관들의 무더기라면, 그는 그러한 세계를 자랑스러워할 원인을 지니지 못한다.
그러므로 주관성과 객관성의 저 구별은 일반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오히려 관건이 되는 것은 내용이며, 이 내용은 주관적인 만큼이나 또한 객관적이기도 하다.
범죄도 단순한 실존이라는 의미에서는 객관적이지만 자기 안에서 허무한 실존인 바, 이러한 자기 안에서 허무한 실존은 또한 형벌에서 그러한 것으로서 현존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