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10일 금요일 성 대 레오 교황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로마 15,14-21
복 음 : 루카 16,1-8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집사를 두었는데, 이 집사가 자기의 재산을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2 그를 불러 말하였다. ‘자네 소문이 들리는데 무슨 소린가?
집사 일을 청산하게. 자네는 더 이상 집사 노릇을 할 수 없네.’
3 그러자 집사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집사 자리를 빼앗으려고 하니 어떻게 하지?
땅을 파자니 힘에 부치고 빌어먹자니 창피한 노릇이다.
4 옳지, 이렇게 하자.
내가 집사 자리에서 밀려나면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
5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첫 사람에게 물었다.
‘내 주인에게 얼마를 빚졌소?’
6 그가 ‘기름 백 항아리요.’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얼른 앉아 쉰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7 이어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얼마를 빚졌소?’ 하고 물었다. 그가 ‘밀 백 섬이오.’ 하자,
집사가 그에게 ‘당신의 빚 문서를 받아 여든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주인은 그 불의한 집사를 칭찬하였다. 그가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우리 성당에는 어린이들이 다른 성당에 비해 많이 나옵니다.
어린이 미사에는 100명 이상의 아이가 나와서 얼마나 예쁘게 미사를 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아이들 눈에는 제가 나이 든 아저씨로만 보일 텐데도 저를 거부하지 않고 먼저 다가옵니다.
멀리서 저를 보면 뛰어와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속사포처럼 내뱉습니다.
길을 걸을 때는 제 손을 꼭 잡고 있습니다. 여기에 어떤 어색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마치 제 손이 자기 손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주 편안하게 손을 잡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누군가의 손을 이렇게 편한 마음을 가지고 잡은 적이 있었을까?’
아이의 손을 잡을 때는 불편한 마음이 없습니다.
만약 다 큰 성인의 손을 잡고 걷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남자의 손이면 ‘신부님이 이상하다’라고 할 것이고,
여자의 손을 잡고 있으면 역시 ‘신부님이 이상하다’라고 할 것입니다.
보는 사람의 마음도 불편해지고, 저 역시 불편해집니다.
하지만 아이의 손을 잡고 있으면 너무나 편합니다.
아이의 솔직하고 진실하고 순수한 마음이 있기에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는 순간 순수한 마음은 퇴색해지고 서로가 편할 수가 없게 됩니다.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예수님 말씀이 확 와닿습니다.
유치원생인 아이 엄마가 제게 이런 말을 해 줍니다.
“우리 아이가 신부님 보고 싶다고 졸랐어요.”
이 말에 기분이 좋아지고, 또 그 아이가 너무나 예쁘게 보였습니다.
문득 하느님도 “하느님, 보고 싶었어요. 하느님, 제 손을 잡아 주세요.”라는
말들을 듣고 싶지 않으실지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무조건 좋아하십니다.
특히 솔직하고 진실 되고 또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서면
아빠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안아주실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도 당신에게 다가오면 기뻐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정직하지 못한 집사의 모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여 없앴을 뿐만 아니라,
들통나서 쫓겨난 뒤에도 생계를 보장받으려고 주인의 돈을 씁니다.
주인의 입장에서는 못된 집사입니다. 그런데도 이 불의한 집사를 칭찬합니다.
왜냐하면 영리하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지요.
바로 미래에 지향을 두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모습이든 우리를 받아주시지만, ‘이미’ 우리 가운데 와 있는 오늘을
‘아직 오지 않은’ 내일과 연결할 줄 아는 우리의 모습을 더 기쁘게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래의 하느님 나라를 바라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자신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끝까지 굳세게 밀고 나가라(로잘린 카터).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현대인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 중의 하나는 우선 ‘돈’이라는 재물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복권을 사들고 일확천금을 꿈꾸기도 하고, 돈을 쫓다가 살인을 하기도 합니다.
물론 돈이 주는 순기능도 있습니다.
그러나 돈의 역기능은 사회를 병들게 하고 인간을 파괴시키기도 합니다.
사실 재물은 우리에게 선물임과 동시에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약은 집사의 비유'는 재물과 맺는 관계가
하느님과 이웃들과의 관계 맺음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주인의 재물을 맡아 관리하던 집사는 관리인으로서의 자신의 신원을 망각하고
관리를 맡긴 분의 뜻을 거역하고, 맡겨진 재물을 자신의 뜻에 따라 쓰고 낭비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이 그를 '집사 일을 그만두게' 하자,
그는 그때서야 비로소 자신이 ‘원래 있던 자리’와 ‘지금 있는 자리’,
그리고 ‘앞으로 가야 할 자리’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질문하고 답합니다.
“어떻게 하지? ~ 옳지, 이렇게 하자.
~ 사람들이 나를 저희 집으로 맞아들이게 해야지.”(루카 16,3-4)
그는 비록 불의한 관리인이었지만, 지혜로운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잔머리를 굴려 마지막 한몫을 더 챙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재물을 나누었습니다.
쌓아놓은 재물을 나누고, 움켜쥐었던 것을 내주었습니다.
횡령하고 착복했던 것을 아낌없이 퍼주었습니다.
주인처럼, 아버지처럼 아낌없이 베풀고 나누어줍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떤 사람이겠느냐?”(루카 12,42)라는
질문을 떠올려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이어지는 부분에서, 이 비유를 해설하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남의 것을 다루는 데에 성실하지 못하면,
누가 너희에게 너희의 몫을 내어주겠느냐?” (루카 16,12)
그러니 이 비유는 결코 약삭빠른 청지기의 처신이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칭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의 자녀들도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건만,
그렇지 못하고 있는 곧 닥쳐올 일에 대해 민첩하게 대처하지 않는
빛의 자녀들의 삶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실 자신에게 맡겨진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고,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는 신앙의 진실성을 드러내 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자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재물이 지금 우리에게 용서와 화해와 우정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아니면, 우리 사이에 압박과 침해와 불목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루카 16,13)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어떻게 하지? ~ 옳지, 이렇게 하자.”(루카 16,3-4)
주님!
제가 당신께 죄를 지었습니다.
당신 재물과 소유를 횡령했습니다.
제 자신을 마치 저의 것인 양 횡령했습니다.
입으로는 당신을 주님이라 고백하면서도 제 자신을 주인인 양 섬겼습니다.
하오나, 주님!
당신이 맡기신 이 몸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이 저의 주님입니다.
저를 옭아매는 자애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각자가 스스로 살 길을 도모함’이라는 뜻입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부상 당하였습니다.
전쟁의 과정에서 많은 난민들이 발생하였습니다.
국가가 보호해 주지 못하는 팔레스타인의 난민들은 말 그대로 ‘각자도생’해야 합니다.
교구청에서 주교님을 만났을 때입니다. 주교님께서는 제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떻게 지낼 만 합니까?”
그 말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습니다.
‘밥은 먹고 지내는지? 신문사 운영은 잘 되는지? 건강하게 잘 지내는지?
사제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고 있는지?’라고 묻는 것 같았습니다.
교구청에 있는 동창 신부님이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조 신부는 사막에서도 잘 살 겁니다.”
주교님께서도 “조 신부는 잘 지낼 거야.”라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돌아보니 지난 4년 동안 그럭저럭 잘 지낸 것 같습니다.
팬데믹 중에도 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부르클린 교구의 한인성당 사제들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들과 자전거도 타고, 캠핑도 다녔습니다. 교우들의 도움이 컸습니다.
언제나 든든하게 자리를 지켜주는 직원들의 도움도 컸습니다.
제가 신문사에만 있었다면 이렇게 많은 분들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퀸즈성당의 미사를 도와주었고, 부르클린 한인성당의 미사도 도와주었습니다.
ME 대표신부와 꾸르실료 지도신부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분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매일 새벽이면 ‘복음묵상’을 하였습니다. 묵상 내용을 이웃들과 나누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니 감사했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꼭 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복음묵상은 제게 힘이 되었습니다.
성지순례 중에도, 휴가 중에도 복음묵상은 계속하였습니다.
매일 3시간은 걸었습니다.
걸으면서 묵주기도를 하였고, 걸으면서 강의를 들었고,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였습니다.
제가 각자도생할 수 있었던 것은 교우들의 도움, 복음묵상, 규칙적인 운동에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약은 청지기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각자도생이라는 면에서 세상 사람들이 빛의 자녀보다 더 지혜롭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정직하지 못하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순수하지 못하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인내하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누지 못한다면
우리는 주님이 전해 주신 기쁜소식을 전할 수 없습니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선한 일은 아주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하고, 악한 일은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하지 마라!’
마음을 정리할 수 있도록 해준 짧지만 좋은 글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약은 집사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집사는 교활한 사람이다.
집사는 자기가 맡은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횡령을 하였다.
주인은 자기의 부정을 알아차리고 이제 자기를 해고하겠다고 통고한다.
그런데 집사는 기발한 생각을 해낸다.
그는 장부를 조작하여 빚진 자들에게 실제로 빚진 액수보다 훨씬 적은 액수로 고쳐 쓰게 했다.
그렇게 해두면 자신에게 해고라는 최악의 불운이 닥치더라도
빚진 자들에게서 자기가 또 받아낼 수 있는 좀 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는다.
이러한 처사에 주인은 충격을 받았지만,
약은 집사의 교활한 처사에 감탄하며 집사를 칭찬하고 있다.
그들이 세속적인 삶을 위해서 교묘한 수단 방법을 짜내고 있다.
약은 집사의 비유는 중요한 가르침이 있다.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는 이 집사와 같이, 다가올 하느님의 나라를 준비하면서
오늘을 잘 살아야 한다는 종말론적 가르침이 담긴 말씀이다.
세상의 이익을 위해서 이처럼 갖은 재주, 갖은 꾀를 다 동원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위해서
무엇을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사람들이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 돈이나 부귀영화를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만큼
하느님과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노력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겠는가!
집사가 횡령하고 사기를 쳐가면서 준비한
그래서 그토록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삶도 언젠가 끝나고 말 삶이다.
그러니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겠는가?
우리의 육체적인 삶을 위해서 노력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도 모든 노력을 다할 수 있는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우리도 언젠가는 하느님 앞에 우리가 책임을 갖고 관리하던
우리 자신의 집사 일에 대한 셈을 하는 날이 올 것이다.
그 셈을 바치는 날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날에 대비하여 언제나 준비되어 있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고,
항상 깨어있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면 우리는 주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항상 지금 여기에서부터 구원을 체험하고
그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우리도 그만한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하여야 우리가 맡은 집사 일을 잘하는 것이다.
언제나 깨어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내일을 준비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신앙인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삶에 있어서 미래를 소중하게 봅니다.
지상 삶의 마지막을 영원한 새 삶의 시작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지상을 넘어 천상을 희망한다면 무방비로 살 수는 없는 법입니다.
미래는 오늘을 통해 오기 때문에 지금 최선에 최선을 다하며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은 현명합니다.
그런데 미래의 충만한 삶을 위해서는
재물에 투자하는 것보다 삶 자체를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상교회의 삶을 마치고 천상교회 안에서
하늘의 영광을 차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일을 준비하되 약속된 미래, 천상의 영원한 생명을 생각하면서
지혜롭게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어떤 부잣집 집사가 정직하지 못한 삶을 살아서
결국은 주인으로부터‘해고 통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고민하다가 자신의 장래를 보장받기 위한 부정을 또 저질렀습니다.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다 빚을 탕감해 주고
훗날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려고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것을 보고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비록 잔꾀를 부렸지만, 재산에 집착하지 않고
재산을 사람에게 배려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세속적인 사람이 이렇게 세상을 살아가려 애쓰는 모습은 칭찬할 만합니다.
그러나 방법이 잘못되었으니 결국 세속적입니다.
어쩌면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현세적인 이득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오히려 잘나가는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자녀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서 해서는 안 될 일도 서슴없이 합니다.
그래 놓고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에 위로를 삼기도 합니다.
세상일에는 정말 많은 수고와 땀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세상일에도 이렇게 정성을 쏟거늘 하물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노력은 얼마나 더 해야 하겠습니까?
세속의 자녀도 막다른 골목에서 돈을 팔아 사람을 사거늘
마지막 날 주님의 대전에서 서게 됨을 알고 있다면
그 준비를 미리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빛의 자녀들은 영혼의 이익을 위해서 그만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행복합니다(루카12,43).
그리고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입니다’(루카12,4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혜로워야 합니다.
“지혜로운 덕은 사람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바가 무엇이며,
마땅히 피할 바가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과거는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현재는 하느님의 사랑에,
그리고 미래는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노).
헛된 것에 마음을 두지 말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시간을 잘 이용하여
천상의 미래를 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천상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는 만큼 큰 수고와 정성으로 복된 날 만드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하지 않고 주님 눈에 들기를 갈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삶의 청산과 퇴출의 命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부정직한 청지기의 약삭빠른 일 처리에 관한 비유를 들려준다.
그런데 복음의 비유는 주인이 청지기의 약삭빠름과 부정직함을 탓하고 있기보다는
오히려 칭찬하는 내용으로 끝맺는다.
예수께서도 아마 주인과 같은 입장에서 부정직한 청지기를 칭찬하려 하신 것같다.
다만,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8b절)는 말씀은
빛의 자녀들이 이를 흉내 내지 말 것을 바라시는 뜻으로 들린다.
그렇다면 청지기의 어떤 면이 칭찬 받을만한지를 살펴보자.
비유는 어떤 부자가 고용한 청지기가 부자의 재산을 관리하면서 낭비(횡령)한 것이 드러나,
淸算 후 退出을 강요받는다. 그동안 재무관리로 의자생활에 습관이 되었을 청지기는 앞이 막막했다.
하지만 그는 짧은 시간에 묘안을 생각해 내고 일사천리로 일을 해치운다.
묘안은 퇴출 후 자기를 후하게 대접해 줄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 빚을 삭감해 주는 방법을 택했다.(5-7절)
마지막에 가서 주인은 청지기의 이러한 일 처리를 보고
약삭빠른 줄은 알지만, 그 슬기로움은 칭찬한다.
청지기는 자신의 절망적인 처지를 깨닫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
가능한 모든 수법을 동원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청지기의 부정직하고 비양심적인 면은 덮어두고라도
그의 슬기로움은 이렇게 자신의 미래를 걱정할 줄 알고, 이를 위해 대책을 마련하는 데 있다.
예수께서도 이 점을 칭찬하신 것이다. 빛의 자녀들인 우리들도 가능하면 본받으라는 것이다.
임박한 심판 앞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절박한 처지를 걱정해야 한다.
그것도 永生을 판가름 짓는 심판이라면 그 절박함이 더욱 고조된다.
청지기가 당한 청산 후 퇴출이라는 失職의 위기처럼
최후의 심판을 눈앞에 두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悔改(Metanoia) 말고 무엇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 와 있다.
이젠 머지않아 우리도 자신의 삶을 청산하고 이 세상에서의 퇴출을 命 받을 것이다.
너무 늦기 전에 회개의 삶으로 영원한 생명을 위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이 세상의 자녀들이 저희끼리 거래하는 데에는 빛의 자녀들보다 영리하다.
이승화 시몬 신부
착하게 사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어떤 기준을 따라 사느냐는
더 중요합니다.
만약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 생각이 없는 마음이거나
아무런 노력이 없는 마음이라면
오히려 악에 이용당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뛰어난 능력을 가졌고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했지만
예수님을 만나 회심 체험을 하기 전까지는
어둠 속에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참된 진리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는 자신의 능력을 하느님께 봉헌했습니다.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제직을 충실히 수행했고
더 많은 이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시켰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을 통해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달리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자신의 삶에 의미를 찾기 위해 부지런합니다.
반면 빛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알기에
쉽게 나태해질 수 있습니다.
충만한 사랑에 의지하기에 오히려 연약해집니다.
유혹 앞에서 쉽게 흔들리는 나약함을 보입니다.
부자의 집사는 자신의 노력이 방향성을 만났을 때
그는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노력이 방향을 만나 결실을 맺었고
이 결실은 하느님이 바라시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노력해야 합니다.
주어진 선물에 감사하면서
더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성실히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의 선함을 넘어 하느님의 의로움을 나아갑니다.
주님께 의탁하면서도
주님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