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12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제1독서 : 지혜 6,12-16
제2독서 : 1테살 4,13-18
복 음 : 마태 25,1-1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저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2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
3 어리석은 처녀들은 등은 가지고 있었지만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4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등과 함께 기름도 그릇에 담아 가지고 있었다.
5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
6 그런데 한밤중에 외치는 소리가 났다.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7 그러자 처녀들이 모두 일어나 저마다 등을 챙기는데,
8 어리석은 처녀들이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 하고 청하였다.
9 그러나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 하고 대답하였다.
10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왔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
11 나중에 나머지 처녀들이 와서 ‘주인님, 주인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지만,
12 그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13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부모가 가장 큰 기쁨과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입니까?
많은 부모는 자녀에게 이런 말을 들었을 때라고 대답합니다.
“아빠, 엄마 덕분에 행복해.”
이 말을 들은 부모는 아이에게 아마 “아빠, 엄마도 너희 덕분에 행복해.”라고 말할 것입니다.
자기 행복을 고백하는 말은 듣는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고 합니다.
특히 부모 자녀 사이의 이 말은 안도감과 동시에 기쁨을 갖게 합니다.
부모 자녀는 일 촌 관계, 자신이 아닌 타인 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타인’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서로 행복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부모가 가장 큰 충격을 받을 때는 “부모 때문에 불행하다”라는 말을 들을 때라고 합니다.
사실 완벽한 부모는 없습니다. 각종 육아 관련 방송을 보면 문제 있는 부모투성입니다.
그렇다면 자신은 방송에 나오는 부모와 달리 완벽한 부모일까요?
마찬가지로 부족함이 가득합니다.
이제 자녀는 어떨까요? 완벽한 자녀도 없습니다.
누구나 다 부족함이 가득한 나약한 인간일 따름입니다.
부족한 부모와 부족한 자녀가 만나서 완벽한 사랑을 향해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긍정의 말, 사랑의 말, 행복의 말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만의 관계만이 아닙니다.
나의 이웃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는 말과 행동에 있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완벽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완벽한 사랑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삶이 우리에게 오실 주님을 마중할 준비가 됩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은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에 늘 깨어있으라고 하십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단순히 잠들어 있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 열 처녀의 비유는 이 점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슬기로운 처녀는 등과 함께 기름도 준비했지만, 어리석은 처녀는 등만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등’은 혼인 잔치에 들어가도록 부름을 받았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기름’은 부름을 받은 이로 맡은 바 사명에 충실하며
깨어있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뜻을 늘 깨어 실천하는 사람이 바로 기름까지 충실히 준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상대방 때문에 행복하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이를 위해 사랑의 말과 행동은 필수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의 삶을 통해 오시는 주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명확한 목적이 있는 사람은 가장 험난한 길에서조차도 앞으로 나아가고,
아무런 목적이 없는 사람은 가장 순탄한 길에서조차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토마스 칼라일).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11월의 늦가을입니다.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온 몸을 내놓아, 소멸하는 것의 아름다움입니다.
잘 익어, 사라져가는 것의 아름다움입니다.
“잘 익으면 이렇듯 아름다운 것이 어디 가을뿐이겠습니까” 라고 노래한
이채 님의 <가을처럼 아름답고 싶습니다.> 라는 시가 떠 오릅니다.
"가을에 오는 사람이 있다면
마음의 등불 하나 켜 두고 싶습니다
가을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진실한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가을엔
그리움이라 이름하는 것들을
깊은 가슴으로 섬기고 또 섬기며
거룩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싶습니다
오고 가는 인연의 옷깃이
쓸쓸한 바람으로 불어와
가을이 올 때마다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 세월
꽃으로 만나
낙엽으로 헤어지는
이 가을을 걷노라면
경건한 그 빛깔로 나도 물들고 싶습니다
그대여!
잘 익으면 이렇듯 아름다운 것이
어디 가을뿐이겠습니까
그대와 나의 사랑이 그러하고
그대와 나의 삶이 그러하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는 전례력으로는 마지막 시기에 와 있고, '위령성월'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죽음’과 ‘종말’, 그리고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이 전례의 중심을 이룹니다.
제1독서에서는 '참 지혜'이신 하느님을 인격화시켜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혜’라는 단어 대신에 ‘하느님’이란 말을 넣어서 읽어보면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지혜(하느님)를 깊이 생각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예지입니다.
지혜(하느님)을 얻으려고 깨어있는 이는 곧바로 근심이 없어집니다.”(지혜 6,15)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하신 ‘지혜’를 말해줍니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다시 오심’을 통하여
우리를 당신께로 데려가실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1테살 4,17)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하여,
‘지혜 있는 이들의 삶의 자세’를 말해줍니다.
이 비유에서 ‘신랑’은 그리스도이시며,
‘혼인잔치’는 하늘나라에서 펼쳐지는 하느님의 다스림을,
‘기름’은 신앙의 삶을, ‘등’은 그리스도의 빛과 생명을,
‘열 처녀’는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신앙인을 표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가르침을 이렇게 요약하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 25,13)
이는 깨어 있되, ‘신랑’을 향하여 깨어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깨어있어야 할’ 우선적인 이유는 다름, 아닌 ‘신랑’을 맞이하게 위해서 입니다.
그러니 ‘깨어있음’은 ‘신랑’을 기다리는 것이요, 희망하는 것입니다.
곧 사람이 되어 오신 주님의 ‘첫 번째 오심’을 기억하고,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은 ‘언제나 계시며, 또한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깨어있음’은 곧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리움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임을 자신 안에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리움이 있기에 인생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 그리움은 하느님의 개입이 야기시킨 놀라움이요 경이로움입니다.
그러기에 그 기다림은 순간순간이 그분께 대한 신뢰와 사랑을 드리는
만남의 시간이 됩니다. 그것이 곧 '깨어있음'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역사를 그저 스쳐 지나서 통과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를 새롭게 하고 변형시키기 위해 역사 안에 임하십니다.
곧 당신의 구원계획에 우리를 참여시키기 위해서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은 아름답고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임’, ‘주님이신 신랑’을 기다리며 그리워하기에 오늘도 행복합니다.
그분께서는 진정 오실 분이시기에, 우리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래서 그리움으로 하여 걸어가고, 그리움을 품고 가기에 그리움은 길이 됩니다.
<그리움이 길이 된다>는 박노해 님의 시를 떠올려 봅니다.
"나는 기다리는 사람
그리움을 좋아한다.
나는 그리움에 지치지 않는 사람
기다림이 지켜간다.
그리움이 걸어간다.
이 소란하고 쓸쓸한 지구에
그대가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눈물 나는 내 사랑은
그리움이 가득하여
나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기다림이 걸어간다.
그리움이 길이 된다."
그렇습니다.
기다림이 걸어갑니다.
그리움이 길이 됩니다.
미래는 현재 안에서, 그리고 현재를 통해서 얻어집니다.
현재 안에서 미래를 살아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종말론적인 깨어있는 삶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구원받은 존재이며,
하늘나라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왔고,
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이미 깨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 비유의 결론은 예기치 않을 때에 예수님께서 재림할 것이니
‘깨어 있어라’는 단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자세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기뻐 여기시는 행동을 해야 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그러니 이 가을,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살지 않고,
생명의 불꽃을 태우는 성령의 ‘등불’을 켜고 살아야 할 일입니다.
혼인잔치의 기쁨과 사랑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깨어있어라.”(마태 25,13)
주님!
눈을 부릅뜨고 깨어 있되, 신랑인 당신을 향해 깨어있게 하소서.
당신을 희망하고 기다리며, 더더욱 갈망하게 하소서.
빛 속에서 은총을 볼 줄 알게 하시고,
그 은총이 얼마나 큰지, 경이로워하고 놀라워할 줄 알게 하소서.
사랑의 등불을 켜 들고, 임을 보게 하소서.
임의 사랑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놀라운 자비와 사랑에 깨어있게 하시고, 당신 사랑에 기름칠 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하였습니다.
짧은 말이지만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분수를 알라.’는 뜻입니다.
성서를 보면 분수를 모르고 하느님과 멀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시작은 ‘아담과 하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낙원’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만했던 아담과 하와는 뱀의 유혹을 받은 후 하느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그리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많은 능력으로 업적을 쌓은 사람도 인생에서 실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부분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모세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모세는 그 또한 하느님의 뜻임을 알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일은 ‘여호수아’의 몫임을 알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회개의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보면서 자신의 역할을 이해하였습니다.
자신의 역할은 광야에서 길을 내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기꺼이 예수님께 자리를 양보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고린토 교회를 개척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씨를 뿌리고, 아폴로는 거름을 주지만 키우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나 자신을 아는 첫 번째 길은 ‘겸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교만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겸손한 세리의 기도와 겸손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으면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시작은 ‘겸손’입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입니다.
물은 만물에 생기를 주는 자양분입니다.
순리대로 위에서 아래로 흐르고, 막히면 돌아가고, 기꺼이 낮은 곳에 머물기 마련입니다.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고, 네모난 그릇에 담으면 네모납니다.
다투지 않고, 상처를 주거나 받지 않습니다. 그 유연성이 만물에 덕이된다고 합니다.
성서를 보면 분수를 모르고 하느님과 멀어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그 시작은 ‘카인’입니다. 카인이 하느님과 멀어진 이유는 ‘분노’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생 아벨의 제물을 받아 주셨지만, 카인의 제물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분노한 카인인 동생 아벨을 들판에서 죽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서 자기 제물을 받아 주실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카인이 자신의 분수를 알고, 하느님께 더 합당한 제물을 준비했다면
하느님께서는 카인의 제물을 받아 주셨을 것입니다.
동방박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주지 않고 다른 길로 갔을 때입니다.
분노한 헤로데는 예루살렘 인근에서 태어난 2살 이하의 어린이를 모두 죽여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동생을 죽인 카인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였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있는 병중에 ‘화병(火病)’이 있습니다. 분노를 삭이지 못해서 생기는 병입니다.
화풀이를 잘못해서 패가망신하는 예도 많습니다.
화를 참지 못해서 애꿎은 그릇을 깨는 일도 있습니다.
공든 탑이 무너지는 것도 대부분 ‘화’를 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웃이 잘못하면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여라.”
십자가 위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나 자신을 아는 두 번째 길은 ‘용서’입니다.
묶인 것을 풀고 참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용서’가 필요하므로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를 통해서 용서를 말씀하셨습니다.
돌에 맞아 죽어야 했을 여인의 죄를 용서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서는 아들을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의 자비를 말씀하셨습니다.
용서에는 두 가지의 모습이 있습니다.
용서를 청하는 것은 ‘회개’입니다. 용서하는 것은 ‘자비’입니다.
회개와 자비가 만날 때 참된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등잔에 채워야 할 기름은 ‘겸손과 용서’입니다.
겸손한 사람과 용서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참된 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지혜는 바라지 않고 늘 빛이 나서
그를 사랑하는 이들은 쉽게 알아보고 그를 찾는 이들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열 처녀의 비유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으러 가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하라고 한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등불을 밝혀 들고 혼인 예복을 입어야 한다(마태 22,11-14).
이 때문에 전례 주년 마지막 세 주간의 전례는 신자들에게 항구하게 깨어 기다리라고 한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44).
오늘 복음의 열 처녀의 비유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자체에 있어야 하는 깨어 기다림의 의미를 강조한다.
이 비유의 내용은 신랑의 집에서 신부의 집으로
신랑을 기다리던 열 명의 처녀들에 관한 이야기이다(1-4절).
이야기는 신랑을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던 슬기로운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의 비교이다(6-12절).
슬기로움은 신랑이 늦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견하고
등불을 계속 켤 수 있는 기름을 따로 준비하고,
그것이 열 처녀 모두에게는 부족한 양이라는 이유로 기름을 나누어주기를 거부하는 것이다(9절).
실제로 이익을 가져다주는 대신에,
우리에게나 남에게나 해를 끼치는 행위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녀들 모두가 신랑이 늦게 오는 바람에 모든 처녀는 “졸다가 잠이 들었다”(5절).
슬기로운 처녀들까지도 깨어있지 못하였다.
처음에 등불을 켜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모습은
초기 교회가 가진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열망을 나타내고 있고,
나중의 자는 모습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방심하고 있는 순간을 말한다.
즉, 초대 교회 시대에 열화와 같던 기다림의 열망이 누그러져
이천여 년간 교회가 처해오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는 깨어 기다리는 슬기로운 자세를 잊어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 사랑과 믿음을 실천하면서 평온하게 주님을 기다려야 한다.
이때 우리는 그분이 언제 오시든지 더 기다릴 수 있는 기름이 잘 준비된
등불을 밝혀 들고 그분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 비유는 우리에게 매일 매일의 현실에 열심히 참여하며,
현재를 충실히 삶으로써 미래를 준비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적 삶의 의무에 대해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의 내용에서도 나타난다.
거기서도 슬기로움과 미련함을 가늠하는 척도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자세만이 아니라 행하려고 하는 자세이다.
이 비유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한 의도에 따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슬기에 따라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슬기는 하느님께서 원하신 목적이 달성되도록 구체적인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
등불만으로는 부족하다. 오랜 여정을 위해 충분히 마련된 기름이라는 사랑의 행위가 필요하다.
행동으로 실천되고 깨어 기다림의 자세로 표현되는 사랑에 관한 주제가
이 비유 전체에 혼인의 개념으로 흐르고 있다.
여기에는 신부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지만,
주님을 맞으러 나가는 처녀들이라는 개념 자체에 포함되고 있다.
이렇게 예수께서 당신의 돌아오심을 혼인을 배경으로 하는 것은,
당신과의 결정적인 만남이 기쁨과 사랑의 표징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혼인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그리스도이신 신랑을 더욱 정성스럽게 마음을 다하여 기다려야 한다.
당황하게 된다면 그것은 사랑 때문이어야지 두려움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 앞에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분이 두려움을 영원히 몰아내셨기 때문이다(1요한 4,18).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있어라.”(13절).
이 말씀은 위협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 속에 삶으로써 언제라도 당신이 원하실 때,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뵐 때, 그분께 합당한 자들이 되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산다면 그분이 한밤중에 오시더라도 대낮같이 그분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등불이 환히 켜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를 이러한 평온한 기다림의 자세로 이끌어준다.
사도는 몇 가지 근본적인 진리를 상기시킨다.
가) 그리스도인은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1테살 4,13).
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담보이다(1테살 4,14).
다) 그러므로 이미 죽은 사람들과 살아있게 될 사람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오히려 죽은 사람들이 더 먼저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한다(1테살4,15-17).
여기서 살아있는 자들과 살아남은 자들(1테살 4,17절)의 의미는
그들 모두가 주님께서 영광중에 다시 오실 때 살아있게 되는 자들을 의미한다.
이 대목의 메시지는 위로(1테살 4,18)부터의 메시지요, 희망(4,13)의 메시지이다. 그 이유는
첫째, 그리스도 신자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정적인 영광의 만남이기 때문이고,
둘째, 신자들의 공동체는 죽음 뒤에 다시 모여 부활의 기쁨을 영원히 함께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과 항상 함께 있기 위하여”(1테살 4,17)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로 위로하십시오.”(1테살 4,18).
그러나 그리스도의 재림을 두고 쓸데없는 생각과 지나친 두려움을 가질 필요는 없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깨어있지는 못하더라도
다섯 처녀처럼 평온한 마음을 잃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슬기로움이다.
이러한 슬기를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
그분은 그것을 지혜서가 말하듯이(지혜 6,12-16 참조),
그것을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아주 기꺼이 나누어주실 것이다.
항상 깨어 기다림으로 주님께서 언제 우리에게 오시더라도
기쁨 중에 혼인의 만남과 같이 맞아들일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마라나, 타! 우리 주님, 오소서!”(묵시 22,17)
평신도의 사명
반영억 라파엘 신부
평신도는
“성품의 구성원과 교회에서 인정한 수도 신분의 구성원이 아닌
모든 그리스도인이 평신도라는 이름으로 이해된다.
곧 세례로써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하느님의 백성으로 구성되고,
그리스도의 사제직과 예언자직, 왕직에 자기 나름대로 참석하는 자들이 되어,
그리스도교 백성의 전체 사명 가운데에서
자기 몫을 교회와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을”(교회31)말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사명은
현세적 일을 하느님의 뜻에 맞게 관리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는 일상생활의 현세적 임무를 자기 생활에서 분리시키지 말고
오히려 맡은 일을 하느님의 뜻대로 계속하면서
그리스도님과 일치를 더욱 깊게 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평신도 교령).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하늘나라는 먼 훗날 오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을 충실히 살아야 합니다.
등잔에 기름이 없으면 등잔은 있으나 마나입니다.
따라서 등잔불을 밝히려면 언제나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을 희망하는 만큼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깨어있어라. 너희가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태25,13)
기름을 채운다는 것은 준비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실천에 옮긴다는 말씀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천상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그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행동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랑의 실천이 요구됩니다.
주님께서 예기치 않은 시간에 갑자기 오시더라도 더 큰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누가 보나 보지 않나 언제나 준비된 삶을 살 수 있는 은총을 청합니다.
“할 일 없이 보낸 오늘 나의 하루가 어제 죽은 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한 바로 그 내일”입니다.
한순간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다짐합니다.
우리는“각자의 능력과 시대의 요구에 따라” 각자의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가르침이 살아있는 삶의 터입니다.
내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가운데
하느님 나라의 완성으로 한 발 더 내딛기를 소망합니다.
“각자가 받은 은총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가지고 서로 남을 위해서 봉사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주신 갖가지 은총을 잘 관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1베드4,10).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항상 깨어 주님 나라 준비하라.
염철호 요한 신부
성경은 종종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을 신부가 맺는 혼인계약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도래하여 새로운 계약을 맺는 것을 혼인 잔치에 비유하곤 합니다.
이런 배경에서 오늘 비유 말씀을 살펴보면 다소 이상한 대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신부는 등장하지 않고, 신부 쪽 들러리인 열 처녀만 언급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어떤 이들은 열 처녀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신부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돌보는 주님의 일꾼들을 의미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해석은 오늘 복음에서 봉독한 마태오 복음서 앞뒤 문맥과 잘 연결됩니다.
왜냐하면 마태 2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충실한 종으로서 동료들을 잘 보살피라고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열 처녀란 신랑이 오실 때를 기다리며
신부인 교회를 위해 잘 봉사해야 할 봉사자들이 됩니다.
하지만 오늘 비유가 깨어서 잘 기다려야 한다는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공동체의 봉사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이들이라고 한다면,
오늘 복음의 비유 말씀은 혼인잔치에 초대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비유 말씀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이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열 처녀의 역할은
신랑이 올 때 그분을 잘 맞아들이도록 등을 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름을 잘 챙겨서 신랑이 오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신랑이 늦어지자 모두 잠이 듭니다.
신랑은 한밤중에 오면서 늦어지기까지 하는데,
이는 오늘 복음 이전 대목에서도 계속 언급되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마태 24,43은 도둑이 밤에 오는데 깨어서 준비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고,
마태 24,48도 “주인이 늦어지는구나.”라고 말하며
동료들을 때리고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불충실한 종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보니 오늘 비유 말씀은, 종말 때 다시 오실 주님께서 늦어지고 계시다고 생각하며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잠들어 있다가는 혼인잔치,
곧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경고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비유에 나오는 불충실하고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가,
아니 준비하였지만 충실히 준빟지 않고 있다가 결국 혼인잔치에 못 들어가는 이들을 뜻합니다.
마지막 날, 그들이 아무리 주인에게 문을 열어달라고 청하더라도
주인은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선을 그을 것입니다.
불충실하고 어리석은 처녀들과 마찬가지로
슬기로운 처녀들도 주인이 늦어지자 졸다가 잠이 듭니다.
그러던 중 그들이 생각지도 못하던 시간, 곧 한밤중에 신랑이 온다는 소식을 전해 듣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신랑이 언제 오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등과 함께 기름도 잘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신랑이 언제 오더라도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있는 이들입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 등과 슬기로운 처녀들이 준비한 기름이란 무엇일까요?
燈이란, 예수님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도록 불림을 받은 이로써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실히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오 복음서의 가르침에 따르면 주님을 깨어 기다리며,
주님의 뜻에 따라 충실히 살아가는 것 자체가
바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준비해야 할 기름입니다.
이렇게 보니, 오늘 복음은 불림을 받았다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깨어서 그 말씀을 실천하는 이들만이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임을 알려주는 이야기입니다.(마태 7,21-23)
오늘 비유 말씀을 묵상하면서 각자 자신들에게 주어진 등과 그 등을 채울 기름을 잘 준비하면서,
알지도 못하는 날과 시간에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도록 합시다.
그러지 않으면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보시고도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이승화 시몬 신부
하느님음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천국만 만드시고
그곳에서 살지 못하는 이들을 쫓아내는 감옥이 아니라
세상 자체를 보시기 좋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손길과 가까이 있습니다.
내가 숨 쉬고 있는 이 장소
내가 만나는 모든 관계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주어진 것에 따라 살아가기보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바라보려는 한 걸음
바로 그 한 걸음이 있을 때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혜서의 말씀처럼
지혜를 찾아 나서는 이는
자기 집 문간에 앉아 있는 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구름이 태양을 가릴 수 있어도
태양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의심과 유혹을 거둘 때
나를 향한 하느님 사랑을 만날 수 있고
내 안에 작은 불빛을 찾으려 할 때
마음 안에 자리 잡은 어두움은 점점 사라지게 됩니다.
하느님을 체험한 이는
자신의 체험을 깨닫고자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성경을 찾고
그분의 가르침이 어떻게 전해지고 적용되는지 교리를 찾고
일상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성인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갑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
늘 함께하시는 주님을 깨닫게 되고
지금, 이 순간 하느님을 선택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신랑을 맞이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을 때
알고 배우고 찾으려는 노력을 하는 이들과
그저 마음만 가득한 이들의 차이를 보여 줍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는 누구나 기름 그릇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릇에 기름을 담는 것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하느님을 찾으려는 마음이 그릇이라면
그 마음을 실천하는 자세가 기름입니다.
그릇과 기름이 만날 때
신랑을 알아보고 그와 함께 문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음을 희망하길 바랍니다.
마음 안에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을 품고
그분을 알기 위해 사제의 도움을 받으며
그분과 살기 위해 수도자의 기도에 동참할 때
누군가 사랑 안에 머물 수 있음을 기억하며
오늘도 주님을 기다리는 슬기로운 이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