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효근 시 모음 6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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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느티나무/복효근
어느 비밀한 세상의 소식을 누설하는 중인가
더듬더듬 이 세상 첫 소감을 발음하는
연초록 저 연초록 입술들
아마도 지상의 빛깔은 아니어서
저 빛깔을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면
초록의 그늘 아래
그 빛깔에 취해선 순한 짐승처럼 설레는 것을
어떻게 다 설명한다냐
바람은 살랑 일어서
햇살에 부신 푸른 발음기호들을
그리움으로 읽지 않는다면
내 아득히 스물로 돌아가
옆에 앉은 여자의 손을 은근히 쥐어보고 싶은
이 푸르른 두근거림을 무엇이라고 한다냐
정녕 이승의 빛깔은 아니게 피어나는
5월의 느티나무 초록에 젖어
어느 먼 시절의 가갸거겨를 다시 배우느니
어느새
중년의 아내도 새로 새로워져서
오늘은 첫날이겠네 첫날밤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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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씨 붓꽃을 위한 연가
복효근
각씨가 따라나설까봐
오늘 산행길은 험할 텐데...둘러대고는
서둘러 김밥 사들고 봄 산길 나섰습니다
허리 낭창한 젊은 여자와 이 산길 걸어도 좋겠다 생각하며
그리 가파르지도 않은 산길 오르는데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산비알에
저기 저기 각씨붓꽃 피어있습니다
키가 작아서 허리가 어디 붙었나 가늠도 되지 않고
화장술도 서툴러서 촌스러운 때깔이며
장벽수정을 한대나 어쩐대나 암술 수술이 꽁꽁 감추어져
요염한 자태라곤 씻고 봐야 어디에도 없어서
벌 나비 하나 찾아주지 않는 꽃
세상에나, 우리 각씨 여기까지 따라나섰습니다
세상에 내가 최고로 잘 난 줄 아는 모양입니다
이 산길까지 남정네 감시하러
앵도라진 입술 쭈볏거리며 마른 풀섶에 숨어있습니다
각씨붓꽃 앞에 서니 내 속생각 들킬까봐
아무도 없는 숲길에마저 괜스레 조신합니다
두렵게도 이쁜 꽃입니다
새삼 스무살처럼 내가 깨끗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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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복효근
새들이 겨울 응달에
제 심장만 한 난로를 지핀다
두 마리 서너 마리 때로는 떼로 몰리다 보니
새의 난로는 사뭇 따습다
저 새들이 하는 일이란
너무 깊이 잠들어서 꽃눈 잎눈 만드는 것을 잊거나
두레박질을 게을리 하는 나무를
흔들어 깨우는 일,
너무 추워서 웅크리다가
눈꽃 얼음꽃이 제 꽃인 줄 알고
제 꽃의 향기와 색깔을 잊는 일 없도록
나무들의 잠 속에 때맞춰 새소리를 섞어주는 일,
얼어붙은 것들의 이마를 한번씩
콕콕 부리로 건드려주는 일,
고드름 맺힌 나무들의 손목을 한번씩 잡아주는 일,
그래서 겨울새는 둥지를 틀지 않는다
천지의 나뭇가지가 대들보며 서까래다
그러니 어디에 상량문을 쓰고
어디에 문패를 걸겠는가
순례지에서 만난 수녀들이 부르는 서로의 세례명처럼
새들은 서로의 소리가 제 둥지다
저 소리의 둥지가 따뜻하다
이 아침 감나무에 물까치떼 왔다갔을 뿐인데
귀 언저리에 난로 지핀 듯 화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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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
복효근
오동은 고목이 되어갈수록
제 중심에 구멍을 기른다
오동뿐이랴 느티나무가 그렇고 대나무가 그렇다
잘 마른 텅 빈 육신의 나무는
바람을 제 구멍에 연주한다
어느 누구의 삶인들 아니랴
수많은 구멍으로 빚어진 삶의 빈 고목에
어느 날
지나는 바람 한줄기에서 거문고 소리 들리리니
거문고 소리가 아닌들 또 어떠랴
고뇌의 피리새라도 한 마리 세 들어 새끼칠 수 있다면
텅 빈 누구의 삶인들 향기롭지 않으랴
바람은 쉼없이 상처를 후비고 백금칼날처럼
햇볕 뜨거워 이승의 한낮은
육탈하기 좋은 때
잘 마른 구멍 하나 가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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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 뒤축에 대한 단상
복효근
겉보기엔 멀쩡한데
발이 빠져나간
구두의 뒤축이 한쪽으로 심하게 닳았다
보이지 않은 경사가 있다
보이는 몸이 그럴진대는
헤아릴 수도 없을 마음의 경사여
구두 뒤축도 없는 마음의 기울기는
무엇이 보정(補正)해주나 또
뒷모습만 들켜주는 그 경사를 누가 보아주나
마지막 구두를 벗었을 때
생애의 기울기를 볼 수는 있을 것인가
수평을 이룰 때 비로소 완성되어버릴 생이여, 비애여
닳은 구두 뒤축 덕분에 나는 지금 멀쩡하게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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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혹은 질
복효근
길은 전라도 사투리로 질이다
길은 질이다
질이어야 한다
신생의 자세로
다시 탯줄에 매달리기 위하여
자궁에 이르는
이 길은
질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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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등심
복효근
정육점 진열장 한 켠에
꽃처럼 예쁜 이름표가 붙어있어
소의 시체의 한 부분일 뿐인
한 덩어리 고기가
꽃으로 불리워질 수 있다니
채식으로 오직
채식으로 맑아진 피와 영혼이
제 갈비뼈 사이에 피운 꽃
기껏해야 짐승의 시체나 먹고사는
육식의 이 야만의
족속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등심초 꽃 이름으로
숯불 위에 몸을 누이는
살꽃의 소신공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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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아닌 것 없다
복효근
가만히 들여다보면
슬픔이 아닌 꽃은 없다
그러니
꽃이 아닌 슬픔은 없다
눈물 닦고 보라
꽃 아닌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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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
복효근
국물이 뜨거워지자
입을 쩍 벌린 바지락 속살에
다시 옆걸음으로 기어서 나올 것 같은
새끼손톱만한 어린 게가 묻혀있다
제 집으로 알고 기어든 어린 게의 행방을 고자질하지 않으려
바지락은 마지막까지 입을 꼭 다물었겠지
뜨거운 국물이 제 입을 열어젖히려 하자
속살 더 깊이 어린 게를 품었을 거야
비릿한 양수의 냄새 속으로 유영해 들어가려는
어린 게를 다독이며
꼭 다문 복화술로 자장가라도 불렀을라나
이쯤이면 좋겠어 한 소꿈 꿈이라도 꿀래
어린 게의 잠투정이 잦아들자
지난 밤 바다의 사연을 다 읽어보라는 듯
바지락은 책표지를 활짝 펼쳐 보인다
책갈피에 끼워놓은 꽃잎 같이
앞발 하나 다치지 않은 어린 게의 홍조
바지락이 흘렸을 눈물 같은 것으로
한 대접 바다가 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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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
복효근
떨어지는 순간은
길어야 십여초
그 다음은 스스로의 일조차 아닌 것을
무엇이 두려워
매달린 채 밤낮 떨었을까
애착을 놓으면서부터 물드는 노을빛 아름다움
마침내 그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죽음에 눈을 맞추는
저
찬란한
투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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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장미를 사랑한다면
복효근
빨간 덩굴장미가 담을 타오르는
그 집에 사는 이는
참 아름다운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낙엽이 지고 덩굴 속에 쇠창살이 드러나자
그가 사랑한 것은 꽃이 아니라 가시였구나
그 집 주인은
감추어야 할 것이 많은
두려운 것이 많은 사람이었구나 생각하려다가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이구나 생각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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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이의 뿌리는 하얗다
복효근
깊게깊게 뿌리내려서 겨울난 냉이
그 푸릇한 새싹, 하얗고 긴 뿌리까지를
된장 받쳐 뜨물에 끓여놓으면
객지 나간 겨울 입맛이 돌아오곤 하였지
위로 일곱 먹고 난 빈 젖만 빨고 커서
쟈가 저리 부실하다고 그게 늘 걸린다고
먼 산에 눈도 덜 녹았는데
막내 좋아한다고 댓바람에 끓여온 냉잇국
그 푸른 이파리 사이
가늘고 기다란 흰머리 한 올 눈에 띄어
눈치채실라 얼른 건져 감춰놓는데
그러신다 냉이는 잔뿌리까지 먹는 거여
......
대충 먹는 냉잇국 하얀 김이 어룽대는데
세상 입맛 살맛 다 달아난 어느 겨울 끝
두고두고 나를 푸르고 아프게 깨울 것이다
차마 먹지 못한 당신의 그 실뿌리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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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속눈썹 밑 몇 천리
복효근
그 빛에 부딪쳐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내 마음이
대책 없이 설명할 수도 없이
그 속에 머물러
한 천년만 살고 싶은
혹은
빠져 죽을 수 있을 것 같은 기꺼이
죽어줄 수도 있을 것 같은
네 속눈썹 밑
그 깊은 빛 몇 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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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
복효근
건기가 닥쳐오자
풀밭을 찾아 수만 마리 누우떼가
강을 건너기 위해 강둑에 모여섰다
강에는 굶주린 악어떼가
누우들이 물에 뛰어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화면에서 보았다
발굽으로 강둑을 차던 몇 마리 누우가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를 향하여 강물에 몸을 잠그는 것을
악어가 강물을 피로 물들이며
누우를 찢어 포식하는 동안
누우떼는 강을 다 건넌다
누군가의 죽음에 빚진 목숨이여, 그래서
누우들은 초식의 수도승처럼 누워서 자지 않고
혀로는 거친 풀을 뜯는가
언젠가 다시 강을 건널 때
그중 몇 마리는 저쪽 강둑이 아닌
악어의 아가리쪽으로 발을 옮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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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친 새를 위하여
복효근
늦은 저녁 숲에
날개를 다쳐 돌아오는 새 있다
무리에서 저만치 처져서
어느 이역의 하늘을 떠돌다 오는지
꺼져가는 석양이 아쉬워
별 가까운 먼 하늘까지
갔다가 돌아오는지
절름거리는 날갯짓으로
별빛 한 가닥 물고 오는 새 있다
밤새 새는
부서진 깃을 다듬어
새로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지
숲은
쓰린 달빛으로 수런거리던 것을…
숲에 가보라 새벽
새는 그새
해뜨는 쪽으로 높이 날아오르고
높이 나는 새의 날개깃엔
언제나 핏빛이 돌아
아침해 저리 고운 것을
보라 새가 떠난 자리엔
상처받은 자만이 부를 줄 아는
곱디고운 노래가
숲을 흔들어 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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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복효근
가시기 며칠 전
풀어 헤쳐진 환자복 사이로 어머니 빈 젖 보았습니다
그 빈 젖 가만히 만져보았습니다
지그시 내려다보시던 그 눈빛
당신을 보았습니다
그처럼 처연하고
그처럼 아름다웁게
고개 숙인 꽃봉오리를 본 적이 없습니다
야훼와
부처가 그 안에 있었으니
이생에서도
다음 생에도 내가 다시 매달려 젖 물고 싶은 당신
내게 신은
당신 하나로 넘쳐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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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복효근
내가 꽃피는 일이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면
꽃은 피어 무엇하리
당신이 기쁨에 넘쳐
온누리 햇살에 둘리어 있을 때
나는 꽃피어 또 무엇하리
또한
내 그대를 사랑한다 함은
당신의 가슴 한복판에
찬란히 꽃피는 일이 아니라
눈두덩 찍어내며 그대 주저앉는
가을 산자락 후미진 곳에서
그저 수줍은 듯 잠시
그대 눈망울에 머무는 일
그렇게 나는
그대 슬픔의 산높이에서 핀다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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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숲에서 뉘우치다
복효근
바람 부는 대숲에 가서
대나무에 귀를 대보라
둘째딸 인혜는 그 소리를 대나무 속으로 흐르는 물소리라 했다
언젠가 청진기를 대고 들었더니 정말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고 우긴다
나는 저 위 댓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나는 소리가
대나무 텅 빈 속을 울려 물소리처럼 들리는 거라고 설명했다
그 뒤로 아이는 대나무에 귀를 대지 않는다
내가 대숲에 흐르는 수천 개의 작은 강물들을
아이에게서 빼앗아버렸다
저 지하 깊은 곳에서 하늘 푸른 곳으로 다시
아이의 작은 실핏줄에까지 이어져 흐르는
세상에 다시없는 가장 길고 맑은 실개천을 빼앗아버린 것이다
바람 부는 대숲에 가서
대나무에 귀를 대고 들어 보라
그 푸른 물소리에 귀를 씻고 입을 헹구고
푸른 댓가지가 후려치는 회초리도 몇 대 아프게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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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매를 맞고
복효근
알고 지내는 사람으로부터 e-메일 한 통을 받았다
-당신은 목에 너무 힘을 준다는 것 알아요?
시인이라 이거지요? 시인이라 이거지요?
마음이 한 움큼 뜯겨나가고
뉘우치고 후회하고 후회하고 뉘우치며 하루가 지나고
또 e-메일이 왔다
- 어젯밤 술에 취해 방배동에서 모 시인과 다퉜는데
돌아와 그 시인에게 e-메일을 보낸다는 게
잘 못 배달된 것 같네요. 죄송해서 어쩌지요?
평소 내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면
죄송합니다
나도 답 메일을 이미 보낸 뒤였다
딸아이 피부약을 내 감기약인 줄 알고 먹고서
감기가 나은 적도 있다
대신 매맞고 뉘우친 마음의 자리 푸른 매 자국이 싱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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덮어준다는 것
복효근
달팽이 두 마리가 붙어 있다
빈집에서 길게 몸을 빼내어
한 놈이 한 놈을 덮으려 하고 있다
덮어주려 하고 있다
일생이 노숙이었으므로
온몸이 맨살 혹은 속살이었으므로
상처였으므로 부끄럼이었으므로
덮어준다는 것,
사람으로 말하면 무슨 체위로 말해질
저 흘레의 자세가 아름다운 것은
덮어준다는 그 동작 때문이겠다
맨살로 벽을 더듬는 움막 속의 나날
다시 돌아서면
벽뿐인 생애를 또 기어서 가야 하는 길이므로
내가 너를 네가 나를 덮어줄 수 있는
지금 여기가
지옥이더라도 신혼방이겠다
내 쪽의 이불을 끌어다가 자꾸
네 쪽의 드러난 어깨를 덮으려는 것 같은
저 몸짓
저 육두문자를
사람의 언어로 다 번역할 수는 없겠다
신혼서약을 하듯 유서를 쓰듯
최선을 다하여
아침 한나절을 몇백 년이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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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
복효근
한 점 얻어먹어 보겠다고
뒷집 새댁 부탁으로 닭 모가지를 비틀어본 적도 있는데
아내 잘못 만나
파리 한 마리 잡는데도
관세음보살한테 허락 받는 신세가 되었다
이러다 잘하면 나도 극락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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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촛불
복효근
삼겹살 함께 싸 먹으라고
얇게 저며 내 놓은 마늘쪽
초록색 심지 같은 것이 뾰족하니 박혀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마늘어미의 태 안에 앉아 있는 마늘아기와 같은 것인데
알을 잔뜩 품은 굴비를 구워 먹을 때처럼
속이 짜안하니 코끝을 울린다
무심코 된장에 찍어
씹어 삼키는데
들이킨 소주 때문인지
그 초록색 심지에 불이 붙었는지
그 무슨 비애 같은 것이 뉘우침 같은 것이
촛불처럼
내 안의 어둠을 살짝 걷어내면서
헛헛한 속을 밝히는 것 같아서
나도 누구에겐가
싹이 막 돋기 시작한 마늘처럼
조금은 매콤하게
조금은 아릿하면서
그리고 조금은 환하게 불 밝히는 사랑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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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막한 날엔
복효근
왜 모르랴
그대에게 가는 길
왜 없겠는가
그대의 높이에로 깊이에로 이르는 길
오늘 아침
나팔 덩굴이 감나무를 타고 오르는 그 길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속도로
꽃은 기어올라
기어이 울음인지 웃음인지
비밀한 소리들을
그러나 분명 꽃의 빛깔과 꽃의 고요로 쏟아놓았는데
너와 내가 이윽고 서로에게 이르고자 하는 곳이
꽃 핀 그 환한 자리 아니겠나 싶으면
왜 길이 없으랴
왜 모르랴
잘 못 디딘 덩굴손이 휘청 허공에서 한번 흔들리는 순간
한눈팔고 있던 감나무 우듬지도
움칫 나팔덩굴을 받아낸다
길이 없다고 해도
길을 모른다 해도 자 봐라
그대가 있으니 됐다
길은 무슨 소용
알고 모르고가 무슨 소용
꽃피고 꽃 피우고 싶은 마음 하나로
허공에 길을 내는
저기 저 나팔덩굴이나 오래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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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편
복효근
채석장 암벽 한구석에
종석진영 왔다 간다
비뚤비뚤 새겨져 있다
옳다 눈이 참 밝구나
만 권의 서책이라 할지라도 이 한 문장이면 족하다
사내가 맥가이버칼 끝으로 글자를 새기는 동안
그녀의 두 눈엔 바다가 가득 넘쳐났으리라
왔다 갔다는 것
자명한 것이 이밖에 더 있을까
한 생애 요약하면 이 한 문장이다
설령 그것이 마지막 묘비명이라 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이미 그 생애는 명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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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 후기
복효근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그대를 향한 사랑의 끝이
피는 꽃처럼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지는 동백처럼
일순간에 져버리는 순교를 바라는가
아무래도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하겠다
구름에 달처럼은 가지 말라 청춘이여
돌아보라 사람아
없었으면 더욱 좋았을 기억의 비늘들이
타다 남은 편지처럼 날린대서
미친 사랑의 증거가 저리 남았대서
두려운가
사랑했으므로
사랑해버렸으므로
그대를 향해 뿜었던 분수 같은 열정이
피딱지처럼 엉켜서
상처로 기억되는 그런 사랑일지라도
낫지 않고 싶어라
이대로 한 열흘만이라도 더 앓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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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꽃 브라자
복효근
목련꽃 목련꽃
예쁘단대도
시방
우리 선혜 앞가슴에 벙그는
목련송이만할까
고가시내
내 볼까봐 기겁을 해도
빨랫줄에 널린 니 브라자 보면
내 다 알지
목련꽃 두 송이처럼이나
눈부신
하냥 눈부신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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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에게 미안하다
복효근
황사먼지 뒤집어쓰고
목련이 핀다
안질이 두렵지 않은지
기관지염이 두렵지도 않은지
목련이 피어서 봄이 왔다
어디엔가 늘 대신 매 맞아 아픈 이가 있다
목련에게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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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꽃
복효근
물수제비 뜨는 돌이
물을 스치며 피우는 꽃
무색무취
순간의 꽃
이윽고 어느 지점에서
그대 중심에 깊숙히 가라앉을 수 있다면
다가가는 모든 발걸음에
그대를 꽃 피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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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표(?)에 대하여
복효근
오늘 아침 찌갯감
일본산 생명태 아가리 속에는
낚시바늘 하나 박혀있다
살기 위해 삼켰으나
결국은 거기에 매달려 죽었으리라
그래서 낚시바늘은 물음표를 닮았다
옷장 밖에선
먹이를 찾아
낚시바늘을 삼키고 있는 몸을 상징하듯
관을 닮은 옷장을 열면
몸이 빠져나간 옷들은
물음표 하나씩 달고 있다
살게 한 것도 물음표였으나
죽게 한 것도 물음표라는 듯
물음표는 낚시바늘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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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재비 사랑
복효근
교미가 끝나자
방금까지 사랑을 나누던
수컷을 아삭아삭 씹어 먹는
암버마재비를 본 적이 있다
개개비 둥지에 알을 낳고 사라져버리는
뻐꾸기의 나라에선 모르리라
섹스를 사랑이라 번역하는 나라에선 모르리라
한 해에도 몇 백 명의 아이를
해외에 입양시키는 나라에선 모르리라
자손만대 이어갈 뱃속의
수많은 새끼들을 위하여
남편의 송장까지를 씹어먹어야 하는
아내의 별난 입덧을 위하여
기꺼이 먹혀주는 버마재비의 사랑
그 유물론적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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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복효근
저 등 하나 켜고
그것을 지키기 위한 한 생애가
알탕갈탕 눈물겹다
무엇보다, 그리웁고 아름다운 그 무엇보다
사람의 집에 뜨는 그 별이 가장 고와서
어스름녘 산 아래 돋는 별 보아라
말하자면 하늘의 별은
사람들이 켜든 지상의 별에 대한
한 응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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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를 찾아서
복효근
남해금산의 보리암은
바다새의 둥지처럼
절벽에 매달려 있었네
그 바위 절벽이 아름답다고
바라다뵈는 바다가 그림 같다고 말하지 말라
바랑에 쌀을 짊어지고 아둥바둥 오르는
쭈그렁 보살님네들이 더 아름다운 곳
길 아닌 길만 더듬어
언제든지 뛰어내릴 수 있는 벼랑 끝
혹은, 뛰어들 수 있는 바다
언제나 끝만을 생각하며 걸어온 나그네에게
끝이 시작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듯
보리암은 절벽에 있었네
바닷새는 벼랑에 살고 있었네
남해금산은
가만히
세상으로 내려가는 길 하나를 풀어주고 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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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누에 대한 비유
복효근
온전히 사랑해본 적이 있는가
가령, 비누를
한사코 미끄러져 달아나는 비누를
붙잡아 처바르고 안고 애무해보지만
사랑한 것은 비누가 아니라 비누의 거품일 뿐
비누의 심장에 다가가 본 적 있는가
비누에게 무슨 심장이냐고?
그렇다면 비누가 그런 것처럼
제 살 한 점 선선히 내어준 일 있었는가
누구의 더러운 냄새 속으로 녹아 들어가
한번이라도 뜨거운 심장을 증명해 본 일 있었던가
고작해야
때 얼룩 허물을 벗어 안겨주면서도
눈앞에 있을 때
참으로 간절히 참으로 간절히
비누에게 있는 비누의 이름을 불러준 적 있는가
닳아 없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불러보는 없는 이름
여보, 비누
없어 비누
☆★☆★☆★☆★☆★☆★☆★☆★☆★☆★☆★☆★
산길
복효근
산정에서 보면
더 너른 세상이 보일 거라는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산이 보여주는 것은 산
산너머엔 또 산이 있다는 것이다
절정을 넘어서면
다시 넘어야 할 저 연봉들......
함부로 희망을 들먹이지 마라
허덕이며 넘어야 할
산이 있어
살아야 할 까닭이 우리에겐 있다
☆★☆★☆★☆★☆★☆★☆★☆★☆★☆★☆★☆★
산삼
복효근
야생화 모임에서 산엘 갔다네
오늘 주제는 앵초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가
갑자기 내가 질문을 했네
만약 이러다가 산삼이라도 큰 놈 하나 캐게 되면
자네들은 누구 입에 넣어 줄 건가
잠시 고민들 하더니
친구 한 놈은 아내를 준단다
또 한 친구는 큰자식에게 준단다
그럼 너는 누구 줄 건데 하길래
나도 비실비실 큰딸에게 줄 거야 했지
그러고 보니
에끼 이 후레아들놈들아
너도 나도 어느 놈 하나
늙으신 부모님께 드린다는 놈 없네
우리 어머니 들으시면 우실까 웃으실까
다행히 제 입에 넣겠다는 놈은 없네
더 다행인 것은 산삼이 없네
눈앞에 앵초 무더기 환하게 웃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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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에 대하여
복효근
오래 전 입은 누이의
화상은 아무래도 꽃을 닮아간다
젊은 날 내내 속썩어쌓더니
누이의 눈매에선
꽃향기가 난다
요즈음 보니
모든 상처는 꽃을
꽃의 빛깔을 닮았다
하다못해 상처라면
아이들의 여드름마저도
초여름 고마리꽃을 닮았다
오래 피가 멎지 않던
상처일수록 꽃향기가 괸다
오래 된 누이의 화상을 보니 알겠다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는 것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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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의 울음소리에는
복효근
내 새벽잠을 가만 흔들어 깨우는
저 새의 울음소리는
새 울음만이 아니다
그 어떤 것의 비유로 말해야 옳다
비를 머금은 구름의 노래이거나
지하를 떠돌다 돌 틈을 빠져나와
계곡을 뛰어내리는 물줄기의 소리이거나
보채는 아이를 달래는 엄마의 자장노래 소리이거나
그렇다 저 소리를
새의 울음소리 하나로 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눈감은 채 들어보면
그 옛날 그 여자가 부르던 노래
하마 은하의 강물 곁에 살림을 차리고
쌀 씻으며 부르는 노래
새 울음소리에는 지나온 천 개의 하늘이 있고
살아보지 않은 천 개의 강물 소리가 있다
그리운 노래가 있다
꿈꾸는 별들의 뒤척임 소리가 있다
새는 인드라의 그물코에 앉아
그 가운데 몇 개의 소리를 가져와
지금 내 귓가에 내려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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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生)
복효근
건전지는 극과 극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물려있다 애(愛)와 증(憎), 삶과 죽
음의 자웅동체이다 어느 것 하나로는 심장은 뛰지 않는다 내 사랑도 죽이
고 싶을 만큼의 똑같은 전압이 아니었다면 너와 나와의 온몸에 저릿저릿 피
를 흐르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 몸에 꼭 맞는 관 속에 누워 죽어가면서 건전지가 극과 극에서 피워내는
저 아름다운 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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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복효근
파도가 섬의 옆구리를 자꾸 때려친 흔적이
절벽으로 남았는데
그것을 절경이라 말한다
거기에 풍란이 꽃을 피우고
괭이갈매기가 새끼를 기른다
사람마다의 옆구리께엔 절벽이 있다
파도가 할퀴고 간 상처의 흔적이 가파를수록
풍란 매운 향기가 난다
너와 내가 섬이다
아득한 거리에서 상처의 향기로 서로를 부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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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동사형
복효근
동사 '서다'의 명사형은 '섬'이다
그러니까 섬은 서 있는 것이다
큰 나무가 그러하듯이
옳게 서 있는 것의 뿌리,
그 끝 모를 깊이
하물며 해저에 뿌리를 둔 섬이라니
그 아득함이여
그대를 향한 발기도 섰다 이르거늘
곡진하면 그것을 사랑이라 하지
그 깊이가 섬과 같지 않으면
어찌 사랑이라 하겠는가
태공이 훑고 가도
해일이 넘쳐나도 섬은 꿈쩍도 않으니
섬을 생각하자면
내 모든 꼴림의 뿌리를 가늠해보지 않을 수 없어
그래, 명사 '섬'의 동사형은
'사랑하다'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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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돌
복효근
숫돌을 생각한다
돌에게도 수컷이 있을까
그래, 수컷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알자면
숫돌에 무딘 칼을 문질러보라
무딘 쇠붙이를 벼리는 데는 숫돌만한 것이 없으리
닳아서 누워버린 날을 세우려면
숫돌은 먼저 쇠에 제 몸을 맡기고
제 몸도 함께 닳아야 하는 것인데
명필이
먹에 닳아서 뚫린 벼루의 숫자로 제 생애를 헤아리듯이
숫돌은
제가 벼린 칼날이 몇인가, 혹은 그 날이 무엇을 베었는가
근심하며 고뇌하며
닳아서 야윈 뼈에 제 생애를 새기느니
통장의 잔고를 헤아리다가
허접한 가계에 주눅 든 내 남성이 한없이 짜부러지는 때
생각한다
수컷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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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대하여
복효근
해가 산에서 마악 솟을 무렵
구름 한 자락 살짝 가리는 것 보았니?
깜깜한 방에 갑자기 불을 켤 때
엄마가 잠시 아이의 눈을 가렸다가 천천히 떼어주듯
잠에서 덜 깬 것들, 눈이 여린 것들
눈이 상할까봐
조금씩 조금씩 눈을 열어주는 구름 어머니의 따뜻한 손
그렇게는 또
내 눈을 살짝 가리는 구름처럼
이 슬픔은
어느 따스운 어머니의 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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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돌탑
복효근
산길을 가다보면 굽이굽이
작고 못생긴 돌 조각으로 쌓은 탑 있네
누가 쌓았을까
산처럼 커야 한다고
백장암 삼층탑처럼 높아야 한다고 믿었던 나에게
들패랭이 같은
용담꽃 같은
온 천지 들꽃 같은
애기 돌탑
돌
위에
돌
아래
돌
그것은
돌이
아니라네 탑이라네
산길 가다보니 돌멩이 하나 하나가
두고 온 그대
떠나간 내 모든 그대 얼굴이네
어느덧 지리산도
소슬한 한 채 탑으로 서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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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번뇌
복효근
오늘도 그 시간
선원사 지나다 보니
갓 핀 붓꽃처럼 예쁜 여스님 한 분
큰스님한테서 혼났는지
무엇에 몹시 화가 났는지
살풋 찌뿌린 얼굴로
한 손 삐딱하게 옆구리에 올리고
건성으로 종을 울립니다
세상사에 초연한 듯 눈을 내리감고
지극정성 종을 치는 모습만큼이나
그 모습 아름다워 발걸음 멈춥니다
이 세상 아픔에서 초연하지 말기를
가지가지 애증에 눈감지 말기를
그런 성불일랑은 하지 말기를
들고 있는 그 번뇌로
그 번뇌의 지극함으로
저 종소리 닿는 그 어딘가에 꽃이 피기를......
지리산도 미소 하나 그리며
그 종소리에 잠기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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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복효근
새벽비가 늙은 감나무 잎사귀 하나하나를
다 씻어놓으니
감나무는 잎사귀, 잎사귀 제 귀마다에
햇살에 말갛게 헹군 첫 꾀꼬리소리를
가득 -
한가득 쟁여 넣는지
잎사귀 그 둥근 귓바퀴에
무슨 보석 귀걸이인 듯 이슬방울이 찰랑찰랑하다
이제 늙은 감나무는 열예닐곱 청춘처럼
어디 뵈지도 않는 꾀꼬리소리와 머언 먼 태양에게도
푸른 손을 흔들어 뵈는데
저들의 수작에 어쩌자고 나는 끌어들여서
늙은 감나무 잎사귀를 다 채우고도 그대로 남은
저 햇빛 범벅 푸른 우주의 음률을 내 두 귀 가득 채우는가
내 뇌혈관 맑은 실핏줄까지가 아릿하고 또 말갛게 틔어오는데
그 바람에
여보, 뭐해 찌개가 졸아서 다 타잖아
어쩌고저쩌고
이른 아침 듣는 아내의 지청구도 꾀꼬리 소리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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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에 대한 고백
복효근
때 절은 몸뻬 바지가 부끄러워
아줌마라고 부를 뻔했던 그 어머니가
뼈 속 절절히 아름다웠다고 느낀 것은
내가 내 딸에게
아저씨라고 불리워지지는 않을까 두려워질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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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겅퀴의 노래
복효근
들꽃이거든 엉겅퀴이리라
꽃 핀 내 가슴 들여다보라
수없이 밟히고 베인 자리마다
돋은 가시를 보리라
하나의 꽃이 사랑이기까지
하나의 사랑이 꽃이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잃고 또
떠나야 하는지
이제는
들꽃이거든 가시 돋힌 엉겅퀴이리라
사랑이거든 가시 돋힌 들꽃이리라
척박한 땅 깊이 뿌리 뻗으며
함부로 꺾으려드는 손길에
선연한 핏멍울을 보여주리라
그렇지 않고 어찌 사랑한다 할 수 있으리
그리고
보랏빛 꽃을 보여주리라
사랑을 보여주리라 마침내는
꽃도 잎도 져버린 겨울날
누군가 또 잃고 떠나
앓는 가슴 있거든
그의 끓는 약탕관에 스몄다가
그 가슴 속 보랏빛 꽃으로 맺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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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잎의 마음
복효근
비가 쏟아지자 덕진연못의 수문엔 콸콸 붉덩물이 들고 있었다
모든 연잎들이 일제히 일어나
제 몸을 큰 잔으로 만들어 빗물을 받았다
투명한 빗물을 정한수처럼 받들고 빗줄기의 매를 맞는 연잎에선
지장보살지장보살 곡진한 비나리가 들려왔다
그랬다 지금까지 나는
연꽃의 아름다움과 연향의 꽃다움만을 노래해왔다
내 이념의 사치와 과소비를 뉘우치며 오래 서있는 동안에
연잎들은 받아든 맑은 빗물을 붉덩물 연못에 합장배례하듯 연신 부어주었다
연못이 흙탕물로 넘치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흙탕물은 어두운 세상 쪽으로 연꽃 대궁 몇 개를 빚어 올리고 있었다
오늘 처음 연꽃이기보다는 연잎이기를 꿈꾸었다
이 역시 사치가 아니기를 나도 마주 합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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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줄 위에서
복효근
허공이다
밤에서 밤으로 이어진 외줄 위에 내가 있다
두 겹 세 겹 탈바가지를 둘러쓰고
새처럼 두 팔을 벌려보지만
함부로 비상을 꿈꾸지 않는다
이 외줄 위에선
비상은 추락과 다르지 않다
휘청이며 짚어가는 세상
늘 균형이 문제였다
사랑하기보다 돌아서기가 더 어려웠다
돌아선다는 것,
내가 네게서, 내가 내게서 돌아설 때
아니다, 돌아선 다음이 더 어려웠다
돌아선 다음은 뒤돌아보지 말기 그리움이 늘 나를 실족케 했거늘
그렇다고 너무 멀리 보아서도 안되리라
줄 밖은 허공이니 의지할 것도 줄밖엔 없다
외줄 위에선 희망도 때론 독이 된다
오늘도 나는
아슬한 대목마다 노랫가락을 뽑으며
부채를 펼쳐들지만 그것은 위장을 위한 소품이다
추락할 듯한 몸짓도 보이기에는 춤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외길에서는
무엇보다 해찰이 가장 무서워서
나는 나의 객관 혹은 관객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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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一生)은
복효근
상형문자다
장대비가 일궈놓고 간 땡볕
한 마지기의 고요
속에 달팽이 한 마리가
그어놓은 필생의 일 획
달팽이가 사라진 그 자리에
그것의 발음기호, 짧은 새소리
내일도 해는 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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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
복효근
큰 등 같은 연못가
배롱나무가
명부전 쪽으로도 한 가지 뻗어
저승 쪽 하늘까지 다 밝히고 나서
연못 속
잉어의 뱃속까지 염려하여
한 잎 한 잎
물위에 뛰어드는데
그 아래 수련이 그 비밀을 다 알고는
떨어지는 배롱꽃 몇 낱을
가만 떠받쳐 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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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반 탑
복효근
탑이 춤추듯 걸어가네
5층탑이네
좁은 시장골목을
배달 나가는 김씨 아줌마 머리에 얹혀
쟁반이 탑을 이루었네
아슬아슬 무너질 듯
양은 쟁반 옥개석 아래
사리합 같은 스텐 그릇엔 하얀 밥알이 사리로 담겨서
저 아니 석가탑이겠는가
다보탑이겠는가
한 층씩 헐어서 밥을 먹으면
밥 먹은 시장 사람들 부처만 같아서
싸는 똥도 향그런
탑만 같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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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강에서
복효근
사는 일 부질없어
살고 싶지 않을 때 하릴없이
저무는 강가에 와 웅크리고 앉으면
내 떠나온 곳도
내 가야 할 그 곳도 아슴히 보일 것만 같으다
강은 어머니 탯줄인 듯
어느 시원(始原)에서 흘러와 그 실핏줄마다에
하 많은 꽃
하 많은 불빛들
안간힘으로 매달려 핀다
이 강에 애면글면 매달린 저 유정무정들이
탯줄에 달린 태아들만 같아서
강심(江心)에서 울리는 소리
어머니 태반에서 듣던 그 모음만 같아서
지금은 살아있음 하나로 눈물겹다
저문 강둑에 질경이는 더욱 질겨
보일둥말둥 그 끝에 좁쌀 같은 꽃도 부질없이 핀다
그렇듯
세상엔 부질없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
오늘 밤 질경이 꽃 한 톨로
또한 부질없는 것이 하나도 없다
아직 하류는 멀다
언젠가 이 탯줄의 하류로 하류로 가서
더 큰 자궁에 들어 다시 태어날 때까지는
내일도 나는 한 가닥 질경이로
살아야겠는 것이다
저 하류 어디쯤에 매달려
새로이 돋는 것이 어디 개밥바라기별뿐이겠느냐
나는 다시 살고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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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목接木
복효근
늘그막의 두 내외가
손을 잡고 걷는다
손이 맞닿은 자리, 실은
어느 한쪽은 뿌리를 잘라낸
다른 한쪽은 뿌리 윗부분을 잘라낸
두 상처가 맞닿은 곳일지도 몰라
혹은 예리한 칼날이 내고 간 자상에
또 어느 칼날에도 도리워진 살점이 옮겨와
서로의 눈이 되었을지도 몰라
더듬더듬 그 불구의 생을 부축하다보니 예까지 왔을 게다
이제는 이녁의 가지 끝에 꽃이 피면
제 뿌리 환해지는,
제 발가락이 아플 뿐인데
이녁이 몸살을 앓는,
어디까지가 고욤나무고
어디까지가 수수감나무인지 구별할 수 없는
저 접목
대신 살아주는 생이어서
비로소 온전히 일생이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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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복권의 추억
복효근
아는 사람은 안다
돼지꿈을 꾸고
복권 몇 장을 사가지고 있는 동안의
턱없는 설레임을 ……
군 입대할 적 어머니가
병역수첩 맨 뒷장에
꼭꼭 접어 넣어주던 부적처럼
한 주 동안이 든든했다
더러는 남의 돼지꿈까지 사다가
복권을 샀다 당첨되지 않아도
좋았다 퇴근길
찬송가를 부르며 바구니를 내밀던
맹인에겐 한 푼도 주지 못했지만
복권을 갖고 있는 동안
복지국가 건설에 한몫했다는 자부심 ……
아는 사람은 안다
거, 왜 표어도 있잖은가
"내가 산 복권 한 장
국민주택 벽돌 한 장"
버스표 파는 가판대
주택복권 진열칸 앞에서
두근대며 번호 맞춰보던 추억을,
술취한 퇴근길 가끔은
내가 쌓는 남의 집들에 막혀
내 전셋집 돌아가는 길이 막막해도
돼지꿈 속에서 한 주 동안
턱없이 행복했던 추억을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
토란잎에 궁그는 물방울 같이는
복효근
그걸 내 마음이라 부르면 안 되나
토란잎이 간지럽다고 흔들어대면
궁글궁글 투명한 리듬을 빚어내는 물방울의 그 둥근 표정
토란잎이 잠자면 그 배꼽 위에
하늘 빛깔로 함께 자고선
토란잎이 물방울을 털어 내기도 전에
먼저 알고 흔적 없어지는 그 자취를
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면 안되나
☆★☆★☆★☆★☆★☆★☆★☆★☆★☆★☆★☆★
폐차와 나팔꽃
복효근
폐차는
부활 같은 건 꿈꾸지 않나 보다
쓸 만한 부품은 성한 놈들에게 내어주고
폐차장엔 끝끝내
끌고 온 길들을 놓아주어 버린
분해되는 낡은 차가
그래서 평화스럽다
영생을 믿지 않아 윤회가
시작된 것일까 벌써
나팔꽃 한 가닥이 기어올라
안테나에 꽃을 피웠다
비켜라 경적을 울려대며
회생할 시간은 얼마든지 있다고
달릴 줄만 알았던
한참 광 나던 시절엔 어찌 알았으리
필요로 하는 것들에게
하나하나 내어주고
마지막 끝자리마저 나팔꽃에게 내어주고
제 몸이 비어갈수록 채워지는 햇살의 따스함
페차는 성자처럼
나팔꽃이 시들 때까지만
지상에 남아 있기를 기도할지도 모른다
폐차가 아름다운 어느 아침
☆★☆★☆★☆★☆★☆★☆★☆★☆★☆★☆★☆★
한 수 위
복효근
어이, 할매 살라먼 사고 안 살라먼 자꼬 만지지 마씨요
- 때깔은 존디 기지가 영 허술해 보잉만
먼 소리다요 요 웃도리가 작년에 유행하던 기진디 우리 여편네도
요거 입고 서울 딸네도 가고 마을 회관에도 가고
벵원에도 가고 올여름 한려수도 관광도 댕겨왔소
물도 안 빠지고 늘어나도 않고
요거 보씨요 백화점에 납품하던 상푠디
요즘 겡기가 안 좋아 이월상품이라고 여그 나왔다요
헹편이 안 되먼 깎아달란 말이나 허제
안즉 해장 마수걸이도 못했는디
넘 장사판에 기지가 좋네 안 좋네 어쩌네
구신 씨나락 까묵는 소리허들 말고
어서 가씨요
- 뭐 내가 돈이 없어 그러간디 나도 돈 있어라
요까이껏이 허면 얼마나 헌다고 괄시는 괄시요
팔처넌인디 산다먼 내 육처넌에 주지라 할매 차비는 빼드리께
뿌시럭거리며 괴춤에서 돈을 꺼내 할매 펴보이는 돈이
천원짜리 구지폐 넉 장이다
- 애개개 어쩐다요
됐소 고거라도 주고 가씨오 마수걸이라 밑지고 준 줄이나 아이씨요잉
못 이긴 척 배시시 웃는 할배와
또 수줍게 웃고 돌아서는 할매
둘 다 어금니가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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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꽃 그늘 아래서
복효근
어느 아득한 눈나라 북녘에서 왔을까
백두대간 지리산 능선에는
하 눈부셔서
눈감아야 오롯하게 보이는 꽃 있어
함박꽃, 산목련이라고도 부르는 그 꽃
지그시 눈감고 들여다보면
불타는 꽃 심장 속
한 번도 내어준 적 없는 마음의 빛깔이랑
그 꽃 가슴 둘러싼 시원(始原)의 하늘빛도 비쳐와
여염집 키 큰 목련만 보아도 가슴 뛰는데
가시덩굴 바위틈
함박꽃, 그 꽃덩이 보면
나는 그만 숫총각이 되고 만다네
열아홉 숫총각이 되어
봉화산 영취산 속리산 태백산 금강산 넘어 넘어서 가면
이제껏 지도책에도 나와 있지 않은 어느 눈부신 나라
이 세상 맨 처음의 처녀 같은 함박꽃
그 꽃 그늘 아래
한 천 년쯤 쉬어가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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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
복효근
나무 둥치를 붙잡고 있는 매미의 허물 속
없는 매미가 나무 위에 우는 매미를 증명하듯
저 매미는 또 매미 다음에 올 그 무엇의 거푸집인 것이냐
매미의 저 울울(鬱鬱)한 노래가 또 무엇의 어머니라면
세상의 모든 죽음을 어머니라 불러야 옳다
허공에 젖을 물리는 저 푸른 무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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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
복효근
내 마음이 그대 발에 꼭 맞는 신발 같은 거였으면 좋겠다
거친 길 험한 길 딛고 가는 그대 발을 고이 받쳐
길 끝에 안착할 수 있다면
나를 신고 찍은 그대의 족적이 그대 삶이고 내 삶이니
네가 누구냐 물으면
그대 발치수와 발가락모양을 말해주리
끝이 없는 사랑이 어디 있으리
다만 그 끝의 자세가 사랑을 규정해주리니
그대 다시 나를 돌아보거나 말거나
먼 길 함께했다는 흔적이라면
이 발냄새마저도 따스히 보듬고 내가 먼저 낡아서
헌신, 부디 헌신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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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시
복효근
누구의 시냐
그 문장 붉다
봄 햇살이 씌워준 왕관
다 팽개치고
천둥과 칠흑 어둠에 맞서
들이대던 종주먹
그 떫은 피
제가 삼킨 눈물로 발효시켜
속살까지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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