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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30일 오늘의 역사
2023년 파키스탄 자폭테러 44명 사망 150여명 부상
2023년 영국 런던 킹스턴구 한국 김치의날(11월22일) 선정
2022년 흑인최초 '미스 USA' 체슬리 크리스트 초고층 빌딩서 투신
흑인 최초의 '2019 미스 USA' 우승자 체슬리 크리스트(30)가 자신이 살던 뉴욕 맨해튼의 한 아파트에서 투신 사망했다 사인은 극단적 선택으로 밝혀졌다 크리스트는 이 건물 9층에 살고 있었다. 고인의 어머니 에이프릴 심킨스(54)는 "크리스트가 고기능성 우울증을 앓았다"고 밝혔다.
고기능성 우울증이란 겉보기에는 사회적 활동과 개인관계 등이 원만해 보여 전혀 우울증의 징후를 보이지 않지만 내면에서 심각한 고립감과 고통을 겪는 우울증을 말한다. 완벽주의자인 당사자가 우울증 자체를 용인하지 않아 더 위험할 수 있다.
2019년 미스 노스캐롤라이나 USA에 오른 크리스트는 그해 미스 USA까지 올랐다.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에서 법학 학위를 받은 그는 변호사 겸 방송인으로도 활약했다. 크리스트는 유산을 어머니에게 맡기고 싶다는 메모를 남긴 것으로 알려졌다.
2022년 북한 지상 대 지상 중장거리탄도미사일 ‘화성-12형’ 검수사격발사
2019년 미국 오대호 주변 겨울폭풍 시카고 -30℃ 체감온도 -50℃ 5개 주 비상사태 항공편 2천편 이상 결항
2019년 네덜란드 헤이그의 베델교회 아르메니아 망명자 탐라잔 가족 5인의 체포 막기 위해 2018년 10월 26일 시작한 마라톤 예배가 네덜란드 정부의 망명 재심사 결정으로 96일 만에 끝남
2013년 전남 고흥 나로우주센터에서 우리나라 첫 우주발사체(KSLV-1) 나로호 발사 성공
나로호(羅老號, Naro,KSLV-I; Korea Space Launch Vehicle-I)는 100kg급의 인공위성을 지구 저궤도에 진입시킨 대한민국 최초의 우주발사체이다. 나로호(KSLV-I)는 1단 액체엔진과 2단 고체 킥모터로 구성되는 2단형 발사체이며, 발사체 조립과 발사 운용은한국항공우주연구원과 러시아 흐루니체프가 공동으로 수행하였다. 대전광역시 유성구 과학로에 위치한 한국항공우주연구원(KARI)은 우주개발중장기기본계획에 의거하여 2002년 이후 로켓 발사를 계획하였고, 2013년 1월30일 3차 시도만에 고흥군 나로우주센터에서 나로과학위성(STSAT-2C)을 나로호(KSLV-I)에 실어 지구 저궤도(근지점 고도 300km, 원지점 고도 1,500km)에 쏘아올리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세계 11번째로자국 기술로 우주발사체를 성공적으로 발사한 국가가 되었다.
나로과학위성(STSAT-2C)은 1년간 우주공간에서 지구 타원궤도(300×1500km)를 하루 14바퀴씩 우주방사선량과 이온층 등 우주환경관측을 임무를 수행한다. 관측 데이터는 태양활동 극대기에 맞춰 우주방사선량 모델링, 우주방사선이 우주부품에 미치는 영향, 이온층이 통신시스템에 미치는 영향 등을 연구하는데 이용한다.
2013년 이스라엘이 '헤즈볼라 지원의혹' 시리아군 연구시설 공습
2012년 MBC 노조가 총파업
2011년 2011년 동계 아시안 게임 개최
2011년 김재순 前 성심여대 총장 별세
서울에서 태어나 1944년 세례를 받았으며 1951년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위스콘신대에 유학 중이던 1958년 뉴욕에서 성심수녀회에 입회하며 수녀가 된 고인은 성심수녀회 한국관구 첫 회원으로 53년간 수도했다.
귀국 후 성심여중·고 교사, 성심여고 교장, 성심여대 교수를 거쳐 성심여대 총장(학장)으로 10년간 재임했다. 1995년 가톨릭대와 성심여대의 통합으로 가톨릭대 성심교정 부총장으로 취임했다. 환경운동에도 관심을 가져 1996년 환경운동연합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2003년부터는 성심장학회 이사장을 맡았다.
2010년 길창덕 화백 별세
‘꺼벙이’ 와 ‘순악질 여사’ 의 원로만화가 길창덕(吉昌悳·81) 화백이 노환으로 숨졌다.
1930년 1월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난 그는 6·25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의 청소년들에게 꿈과 웃음을 선물한 한국 명랑만화의 개척자였다. ‘허서방’(1955) ‘홀쭉이와 뚱뚱이’(1959) ‘꼴뚜기 영감’(1960) ‘재동이’(1966) ‘꺼벙이’(1970) ‘순악질 여사’(1970) 등 고유의 캐릭터와 작품을 통해 전후(戰後) 다양한 세대를 가로지르며 웃음과 희망을 줬다. 그의 후배이자 제자인 ‘로봇찌빠’ 의 신문수(71) 화백은 ‘명랑만화’ 라는 장르를 개척해서 반석에 올려놓은 분이라고 고인을 추모했다. ‘맹꽁이 서당’ 의 윤승운(67), ‘별똥 탐험대’ 의 박수동(69), ‘철인 캉타우’ 의 이정문(69) 등의 작가들 모두 직·간접적으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
1980년대 잠시 신문 시사만화를 그린 적도 있었지만 곧 명랑만화로 ‘복귀’ 했다. 공식적인 데뷔는 1955년 잡지 ‘야담과 실화’ 에 ‘허서방’ 을 연재하면서부터였지만, 실제로 그가 만화가로 인정받은 것은 열네 살 때다. 평양과 묘향산으로 수학여행을 다녀온 평안북도 정주 조일보통학교 고등과 2학년생들은 기행문을 써내라는 지시를 받았고, ‘소년 길창덕’ 은 엉뚱하게도 그 숙제를 파노라마 만화 형식으로 제출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화를 냈던 선생님은 작품을 보고 나서 감탄사를 연발했고, 이후 그를 ‘만화가’ 로 공식 인정했다. 그의 캐릭터들은 얼핏 단순한 선(線)으로 대강 그린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보이지만, 정제된 소박함과 명쾌함으로 세대를 뛰어넘는 사랑을 받았다.
1970년대 땜통자국 머리에 콧물을 흘리던 ‘꺼벙이’ 는 요즘 표현으로 하면 ‘국민 남동생’ 이었고, 일자 눈썹의 순악질 여사는 억척스럽고 강인한 ‘대한민국 아줌마’ 였다.
폐암진단과 수술을 받은 뒤 1997년 12월 이후 모든 연재를 중단했다. 한국 만화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2002년 대한민국 출판만화대상을 받았고, 2003년 보관문화훈장, 2006년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 어워드대상을 받았다.
2010년 국악학 선구자 이혜구 선생 별세
이혜구 선생은 1931년 경성제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경성방송국에 취직한 뒤 국악 프로그램을 맡으면서 국악과 인연을 맺었다.
해방 후 공보부 방송국장으로 있다가 1946년 서울대 음악부 교수로 부임했다. 그는 훗날 “국악 분야가 정말 황무지 같았지만 그때그때 문제를 푸는 식으로 언제나 연구를 했다. 국악을 알아보려고 더욱 분발했다” 고 회고했다.
이혜구 선생은 1959년 정규 대학 과정 중에는 최초로 서울대 국악과를 창설하고 초대 과장 겸 교수로 재직했다. 1970년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에 위촉되면서 영문으로 한국 음악 총서를 만드는 등 세계에 국악을 알리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한국음악서설’(1967년) ‘한국음악논고’(1995년) 같은 저서를 통해 국악 이론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1998년에는 ‘이혜구학술상’ 을 제정해서 후학 양성에도 애썼다
2009년 북한 "남북 기본합의서 NLL조항 폐기"
2009년 1월 30일 북한이 한국 정부가 남북관계를 긴장관계로 몰아가고 있다며 한국 정부와의 군사, 정치적 합의를 모두 무효화 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30일 중앙통신(KCNA)통해 남북간 "정치군사적 대결 상태 해소와 관련한 모든 합의사항들"에 대한 무효화를 일방 선언하고, 남북기본합의서와 부속합의서에 있는 "서해 해상군사경계선에 관한 조항들"을 폐기한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 17일 북한국 총참모부 대변인이 대남전면대결을 선언한 뒤 2주만의 일이다.
조평통은 "북남 당국 사이에 지난 시기 채택된 합의들에는 서로의 사상과 제도존중 문제, 비방중상 중지 문제, 무력충돌 방지 문제를 비롯한 정치군사적 대결을 해소할 데 대한 문제들이 반영돼 있다"며 "그러나 현실은 북남 합의사항의 그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조평통은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미국 방문과정에서 말했던 `자유민주주의 체제하의 통일' 발언과 대북전단지 살포, 급변사태론, 선제공격론 등을 거론하며 "북남합의사항들을 무참히 파괴, 유린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 측은 “오늘 성명은 지난 17일 북한 인민군 총참모부 대변인 성명 등 최근 일련의 대남 강경 언동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면서 “상황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대응책을 논의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마이크로소프트의 운영체제 윈도 비스타 발매
2006년 흑인민권운동가 코레타 스콧 킹(마틴 루터 킹 목사 부인) 세상 떠남
2005년 이라크의 첫 자유 총선거
2004년 부천 초등학생 피살 사건이 발생했다.
2000년 에밀레 박물관장인 조자용 별세
하버드대학 건축과를 졸업한 그는 전국을 돌며 호랑이 민화와 도깨비 기와(귀면와) 수집에 힘써 1970년대 민화 붐을 일으키기도 했다.
1968년 서울 화곡동에 문을 연 `에밀레 박물관`은 국내 최초의 개인 박물관이었다. 호랑이해, 호랑이시에 태어난 그는“호랑이는 힘과 사랑, 용맹과 부드러움, 장엄함과 웃음을 동시에 간직한 한민족의 상징”이라고 주장, `한국호랑이의 해학` `한국 호랑이의 정신` 등의 영문 저서를 내기도 했다. 민속문화와 기층문화를 탐구하는 민학회의 결성을 주도했으며, 1983년에는 서울을 떠나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대목리로 에밀레 박물관을 옮겼다.
미대사관저를 한옥으로 설계했던 그는 5천년 건축사를 보여줄 건축관 마련이 꿈이었을 정도로 전통한옥에 애착이 많았다. 7년에 걸친 해외전시 때에는 미국식 칵테일 파티 대신 산신령 그림을 내걸고 돼지머리에 시루떡을 차려놓고 고사를 지냈다. 대전엑스포 전시장에서 `왕도깨비와 용전시회`를 준비 중 과로로 쓰러졌을 정도로 `우리 것 찾기`에 바친 일생이었다.
1999년 강원 동계아시안게임 개막
제4회 강원 동계아시안게임이 30일 오후 3시 용평 실내링크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개회선언으로 화려한 막을 올렸다.
‘영원한 우정, 빛나는 아시아’를 다짐하는 강원동계아시안게임은 아시아올림픽평의회(OCA) 41개회원국 중 23개국에서 807명의 선수 임원이 참가해 2월6일까지 용평과 춘천, 강릉 등 강원도 3개 지역에서 8일동안 계속된다. 7개 종목 43개 세부종목의 경기가 열릴 이번대회의 개막식은 간단한 환영 마스게임에 이어 네팔을 선두로 참가국 선수단이 한글 가나다순에 의해 입장함으로써 시작됐다.
개최국 한국은 노랑, 빨강, 은색의 원색 유니폼을 입고 심의식 기수의 선도 아래 관례에 따라 마지막으로 들어왔다.
김대중 대통령의 개회 선언에 이어 태백산 천제단에서 태양열로 채화, 강원도내 943㎞를 달려온 성화가 최종주자인 유선희(전 빙상국가대표)에 의해 점화돼 성화대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1996년 아프리카 잠비아주재 북한대사관 현성일 3등서기관 서울 도착
1994년 국산주전산기 III 개발 완료
1992년 KT(구 한국통신), 국제영상회의 시스템 서비스 발표
1992년 북한,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안전협정 서명 및 핵사찰 실시
1992년 한국 축구대표팀 1964년 이후 처음으로 올림픽 본선 진출권 획득
1992년 이재형 전 국회의장 별세
이재형 전 국회의장이 1992년 1월 30일 서울 종로구 사직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8세였다. 운경 이재형 전 국회의장은 소신과 해학 속에 한 시대의 정치를 이끈 정계의 `어른`이었다.
경기 시흥 출신인 고인은 제1고보(경기고)와 일본 중앙대 법학부를 나왔으며, 해방뒤 시흥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제헌의원에 당선된 이래 7선을 기록했다. 이 전 의장의 일생은 파란과 일화로 점철돼 있었다. 그는 조선왕조 14대 선조 임금의 제7왕자인 인성군의 10대 종손으로, 동네에서는 신동으로 소문났었다. 제1고보 2학년 때 광주학생 사건에 동조, 동맹휴학에 참여한데다 4학년 때는 독서회 스트라이크에 다시 관련돼 퇴학처분을 받았다. 배재고보로 옮겨 일본중앙대 법과를 졸업한 뒤 귀국해서는 금융조합 이사로 일제치하를 지내다, 해방후 시흥지역 족청 동지들의 권유로 제헌의원에 무소속으로 출마, 34세때 의정생활을 시작했다.
1952년 상공부장관, 1960년 국회부의장, 1968년 신민당 부총재 등을 지냈던 고인은 1970년 정계를 떠났다가 1981년 신군부의 영입으로 칩거 10년 만에 민정당 대표위원으로 정계에 복귀해 제12대 국회에서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1991년 김부남 사건이 발생했다.
9살 때 성폭행 당한 김부남 씨(30세) 21년 전 자신을 성폭행한 남성(55세)을 칼로 찔러 죽임
1988년 소설가 소영(素影) 박화성 별세
박화성은 1904년 4월 16일 목포에서 부친 박운단과 어머니 김운선 사이의 4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나 1988년 1월 30일 아침 6시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85세였다.
박화성은 1915년 목포에 있는 정명여학교(貞明女學校)를 거쳐 1918년 서울의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그 뒤 충청남도 천안과 아산에 있는 보통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1922년 전라남도 영광중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영광에 머무르는 동안 시조작가 조운(曺雲) 등과 사귀면서 본격적인 문학수업을 하였다. 1925년 ‘추석전야(秋夕前夜)’가 이광수(李光洙)에 의해 ‘조선문단(朝鮮文壇)’에 추천되었다. 그러나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상경, 1926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신학년제 4년)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여자대학(日本女子大學) 영문과에 입학했다. 개인사정으로 1929년 3학년을 수료하고 귀국했다.
1932년 ‘하수도공사(下水道工事)’가 이광수에 의해 ‘동광(東光)’에 다시 추천되어 작가 생활을 재개했다. 그 해 첫 장편소설 ‘백화(白花)’를 동아일보에 연재하기도 했다. 그 뒤 1938년까지 작품 활동를 계속하는 동안 20여 편에 이르는 소설을 발표했다. 거의가 일제의 침탈로 고통받는 도시 노동자나 서민 그리고 농민을 다룬 것이어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광복 후 주요 작품으로는 단편소설에 ‘광풍(狂風) 속에서’(서울신문, 1948)·‘샌님 마님’(現代文學, 1965) 등이 있고, 장편소설에 ‘고개를 넘으면’(한국일보, 1955∼1956)·‘사랑’(한국일보, 1956∼1957)·‘벼랑에 피는 꽃’(聯合新聞, 1957∼1958)·‘바람뉘’(女苑, 1958∼1959) 등이 있다. 1958년 목포시문화상, 1966년 한국문학상, 1970년 대한민국예술원상, 1984년 3·1문화상 등을 받았다.
1984년 일본, 세계최초의 256KS램 개발 성공
일본 도시바사가 1984년 1월 30일 세계최초의 256킬로비트 스태틱램 기억장치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도시바사는 반도체산업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될 다음세대의 고밀도 집적회로인 이번 256KS램의 개발로 휴대용 퍼스널 컴퓨터를 손가방만한 크기로 압축시키는 것이 가능하게 됐다고 말했다.
1마이크로미터의 정밀 석판인쇄기술을 사용함으로써 256KS램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고 밝히고, 이 초대형집적회로는 1메가비트 다이내믹 램과 같은 기억용량을 갖는 것이라고 말했다. 램은 기억보유동작의 필요여부에 따라 구조상 스태틱 램(S RAM)과 다이내믹 램(D RAM)으로 대별되는데, 256KD램은 이미 생산체제가 갖추어져 있었다. 손톱만한 6.68mm 8.88mm크기인 256KS램은 오이타 및 가와사키 공장에서 생산했다.
1980년 북한, 총리회담 예비접촉 수락
1980년 부산대교가 완공되었다.
1974년 한일대륙붕협정 체결
한일대륙붕협정이 1974년 1월 30일 체결됐다. 체결목적은 제주도 동남방 약 8만4천 평방km의 대륙붕을 공동개발하기 위해서였다. 1970년 11월부터 대륙붕문제를 둘러싼 일본과의 교섭이 시작된 이래 1차의 외무장관회담, 4차의 실무자회의와 5차의 실무소위원회를 거쳐 1973년 7월 4일 협정문안에 양측이 합의함으로써 이날 체결됐다.
협상과정에서 양국은 조광료(租鑛料)및 세금 납부방식과 공동개발회사의 법규적용문제 등으로 심각한 대립을 보였으나 1973년 4월16일 김용식 외무장관과 오히라 일본 외무장관이 이를 정치적으로 해결함으로써 협상이 타결되었다. 한일대륙붕협정 비준서는 1978년 6월 22일 교환됐다. 협정체결로부터 4년5개월이나 늦어진 것은 일본의회가 협정발효에 필요한 비준을 지연시켰기 때문이었다.
1972년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 발생.
1972년 1월 30일 영국의 공수부대가 시민권 쟁취를 위한 가두행진을 벌이던 아일랜드 구교도 시민 13명을 사살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 테러와 보복이 난무하는 북아일랜드 사태를 한층 격화시켰다.
북아일랜드 사태는 1921년 아일랜드 공화국이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하면서 북아일랜드와 분리되자 북아일랜드 구교도들이 독립을 요구하며 IRA라는 단체를 조직한 것이 시초가 된다. 이들은 영국 본토에서 이주해 정착한 신교도가 정부를 장악하고 소수민으로 전락하게 된 구교도에 대한 차별정책에 항거, 196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폭력으로 치달았다.
IRA는 영국과 영국계 신교도에 대한 무차별 폭탄테러에 들어갔다. 오랫동안의 협상 끝에 이들은 1998년 4월 신·구교계 모든 정파가 모인 가운데 북아일랜드 평화협상을 타결, 3천5백여 명의 목숨을 빼앗은 30년간의 피의 대결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평화협상 타결에도 불구하고 1998년 8월 북아일랜드 오마시에서 또 IRA의 강경분파인 `리얼(Real) IRA`가 다시 폭탄테러를 저질러 28명이 죽는 등 2백여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
1971년 한국-피지 국교 수립
1969년 이희승 등 140명, 한글전용반대 성명
1967년 조달기금법안 통과, 한국외환은행 발족
1966년 서독 파견 간호원 1진 출발
1964년 베트남 군부쿠데타(2차)로 웬칸 장군 집권
1964년 미국 달 위성 레인저 6호 발사 성공
1959년 일본 외상, 국무회의에서 재일교포 북송을 발표
1958년 김포공항 국제공항으로 정식 지정
1956년 육군특무부대장 김창용 피살
1956년 1월 30일 오전 7시 30분 경, 육군 특무대장 김창룡 소장이 출근 도중 서울 용산구 원효로 1가 자혜병원 앞 노상에서 괴한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육군 특무대는 사건 발생 20여 일만에 김창룡 암살사건 관련자로 과거 특무대에서 김창룡의 부하로 근무했던 허태영(許泰榮) 대령과 그의 운전병 이유회(李留會) 일등중사, 육군본부 정병감 이진용(李珍瑢) 대령,제12범죄수사대 대장 안정수(安楨洙) 소령, 허태영의 동생이며 헌병 중위인 허병익(許炳益), 그리고 직접 저격에 가담한 신초식(申初湜)과 송용고(宋龍高) 등을 검거했다.
또한 국회의원 도진희(都晋熙)도 범행에 사용된 지프차의 은닉을 도운 혐의로 함께 체포되었다.
이들에 대한 취조 결과 송용고와 신초식은 허태영의 심복으로 허태영의 지시에 따라 허태영으로부터 권총을 받아 김창룡 특무대장 지프차의 진로를 막고 송용고는 2발, 신초식은 3발을 발사해 김창룡을 암살하고, 운전사에게 중상을 입혔음이 밝혀졌다.
허태영에 따르면,그가 김창룡 암살을 지시한 이유는 김창룡이 자신의 영달을 위해 군대를 정치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허태영은 김창룡이 고급장교들의 비리를 월권을 행사해 조사함으로써 군 내부를 불안하게 한 점에 대해서도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허태영은 1955년 10월 말부터 김창룡을 제거할 결심을 했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적당한 인물을 물색하던 중 과거 특무대 재임 때부터 자신의 심복으로 있던 신초식을 끌어들였다.
재판에서 허태영, 이유회, 신초식, 송용고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고, 다른 관련자들에게도 징역 3년에서 20년 사이의 실형이 선고되었다.
그런데 허태영과 이유회의 형 집행을 앞두고 있던 1956년 11월, 김창룡 암살사건의 배후가 있다는 허태영의 처 황운하(黃雲夏)의 탄원서가 제출되었다.
이에 따라 배후에 대한 새로운 수사가 진행되어 강문봉(姜文奉) 중장과 공국진(孔國鎭) 준장, 강홍모(姜弘模) 대령, 성정모(成正模) 대령, 백학규(白鶴圭) 중령 등이 체포되었다.
이후 재판에서 강문봉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결국 1957년 9월 허태영과 이유회의 사형이, 1958년 5월에는 신초식과 송용고에 대한 사형이 각각 집행되었다.
그러나 강문봉은 사형 선고 후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 의해 곧바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강문봉을 사형시킬 경우 그 윗선으로 알려진 정일권(丁一權) 대장으로까지 의혹이 확산될 수 있었고, 이는 군에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일권이 정말로 김창룡 암살사건의 최종 배후인지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일반적으로 김창룡이 정일권, 강문봉 등이 관련된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들 사이의 갈등이 깊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4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발족
1953년 부산 국제시장 대화재
1953년 1월 30일 오후 7시40분, 해방 후 가장 큰 화재가 부산 국제시장에서 발생했다. 화재 원인은 신창동의 요리집 춘양원에서 손님과 종업원이 석유등잔을 발로 쳐 넘어뜨리면서 불이 순식간에 옮겨 붙어 이 지역 일대인 신창동, 부평동 등 상가 1천여호를 하룻밤 사이에 잿더미로 만들었다. 부족한 물과 장비부족도 대형화재의 한 원인이었다.
부산 국제시장의 화재는 해방 후 발생한 화재사건 중 가장 손실이 컸을 뿐만 아니라, 부산시민의 경제생활면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날 화재로 이재민 2만 2천명에 가옥 4천2백60동이 전소해 무려 5백억원이란 거액의 피해를 냈다. 화재는 부산시민의 경제생활을 더욱 피폐하게 했다.
1952년 국제전기통신연합(ITU) 가입
1949년 중국군 북경 입성
1948년 마하트마 간디 피살
인도의 사상가 마하트마 간디가 1948년 1월 30일 인도 뉴델리에서 반 이슬람 극우파 청년이 쏜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79세였다. 1947년 7월 인도의 분할독립으로 힌두.이슬람의 대립소동이 벌어져 이 소요를 진정시키기 위해 벵갈에 이어 뉴델리를 방문중이었다.
1869년 포르반다르에서 출생한 간디는 1887년 영국으로 유학가 법률을 배운 후 1891년 귀국해 변호사로 개업했다. 1893년 소송사건을 의뢰받아 남아프리카로 건너갔다. 이 남아프리카 여행에서 간디는 인도사람의 지위와 인간적인 권리를 보호하고자 결심하고 차별받는 인도인을 위한 투쟁을 시작했다. 1915년 귀국한 간디는 인도국민회의파를 지도하며 납세거부, 취업거부, 상품불매 등을 통한 비폭력저항운동을 실시했다. 1924년부터는 국민회의파의 의장으로 있으면서 인도인이 자력에 의한 농촌구제에 나설 것을 역설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기도 했으며 1930년에는 소금세 신설반대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인도의 사상가이자 민족 운동 지도자인 간디는 인종 차별 압박에 대한 투쟁, 자기 실현을 위한 인격 수양, 무상해 이 세가지를 가르치며 진리 구현을 평생 실천했다. 1922년 12월 인도의 문호 타고르로부터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는 칭송을 받은 이래로 마하트마 간디로 불린 간디는 그의 평화사상뿐만 아니라 모범적인 실천을 통해서도 인도인들만이 아니라 20세기 인류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945년 독일 초호화 여객선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소련 해군 잠수함에 격침
1945년 1월 30일 아침 동프러시안 가드니아. 그날 밤 발트해 한복판에 있었던 유람선이 갑자기 바다 밑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1937년 5월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진수식이 열렸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안락하고 쾌적한 해외여행을 위한 각종 운동시설, 대형수영장 등 다양한 위락시설들이 마련되어 있어 배 안에는 연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러나 1929년 9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더이상 출항 할 수 없게 되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가 발트해에 다시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배 안에서는 신음소리와 절규만이 가득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가 부상병을 나르는 병원선으로 그 목적이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도 피난민 구출작전에 투입되었다. 전쟁의 공포에 떨었던 피난민들에게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자신들의 목숨을 지켜줄 마지막 희망이자 구원의 배였다. 당시 승무원이었던 하인츠 쉰의 증언에 따르면 총 승객은 10,582명이었고, 그 중 8,956명이 피난민이었으며, 대부분이 여성과 아이들이었다.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에는 총 4명의 함장이 타고 있었는데, 당시 최고 연장자였던 프리드리히 패터슨의 의견에 따라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발트해의 깊은 바다를 항로로 삼았고, 항해등을 켠 채 운항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항해등을 켠 채로 달린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어두운 밤에도 너무 쉽게 눈에 띄였고 결국 출항한지 하루도 못되어 소련 잠수함 S-13호에 의해 발견되었다. S-13호는 4발의 어뢰를 발사시켰고 그 중 3발이 명중했다. 어뢰를 맞은 빌헬름 구스틀로프호는 아비규환이 되었고 어뢰 공격을 당한 후 1시간 10여분 만에 침몰했다. 배에 타고있던 피난민들은 어뢰에 직접적인 충격으로 사망하거나 발트의 차가운 바닷물에 빠져 저체온증으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100,000여명이 넘는 피난민 중 9,343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는 최대 해상사고로 알려진 타이타닉호 침몰 사건의 사망자보다 무려 6배나 많았다. 전쟁이 끝난 후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비극은 침묵 속에 묻히고 말았다.
그리고 사고 발생 57년 후인 2002년 독일의 대표작가 귄터 그라스의 ‘게걸음으로 가다’가 발표되면서 그동안 금기시 되어오던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사건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 소실이 아니었다면 빌헬름 구스틀로프호 침몰 사건은 영원히 수장되었을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
1939년 조선일보, 조선 여성백과사전 `청규박물지`의 첫 발견을 보도
1933년 히틀러, 독일 수상에 취임.
힌덴부르크 독일 대통령이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를 수상에 임명했다. 히틀러가 수상이 되기까지에는 복잡한 정쟁이 있었다. 나치당은 1932년 11월의 독일 총선에서도 7월 총선처럼 여전히 제1당이었지만 61개 의석과 200만표를 잃는 나치당은 사상 처음으로 후퇴를 경험했다.
1932년 12월 파펜 수상을 실각시키고 자신이 수상이 된 국방장관 슈라이체는 선거 결과를 이용, 히틀러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공작했지만 파펜 전수상과 히틀러가 비밀회동을 해 히틀러를 수상에, 파펜을 부수상에 임명한다는 연립내각 수립에 합의했다. 파펜과 히틀러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설득, 슈라이체를 수상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히틀러를 연립 내각 수상에 임명하도록 했다.
수상직에 오른 히틀러는 국회의사당 방화사건을 조작해 공산당과 사민당을 불법화시키고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며 1당 독재체제를 만들어 갔다.
1924년 제1차국공합작(中국민당 제1회전국대표자대회에서 집행부에 공산당원선출)
1913년 발칸동맹, 대 터키 강화 담판 결렬
1909년 미국-카나다, 나이아가라 폭포 공동보호협정 체결
1906년 강력한 지진 해일이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강타. 콜롬비아 투마코시의 절반 침수 인근 섬의 절반 없어짐 1,500여명 사망
1902년 제1차 영일동맹, 런던에서 체결조인
영일동맹이 1902년 1월 30일 조인됐다. 영일동맹협약은 근대 일본이 세계의 대국과 체결한 최초의 군사동맹이었다. 이 군사동맹의 배경에는 양국 모두 19세기말 동아시아지역을 둘러싼 제정 러시아와의 대립에 있었다. 특히 일본으로서는 의화단사건 이후 만주에 계속 잔류하고 있는 러시아에 항의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조약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영일양국이 청국과 한국에 각각 갖고 있는 권익이 제3국에 의해 침략받거나 청국과 한국에서 소요가 일어나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경우 이를 서로 승인한다. 2. 영일양국 중 어느 한 쪽이 제3국과 전쟁을 할 경우 다른 한쪽은 엄정중립을 지킨다. 3. 전쟁이 2개국 이상을 상대로 치러질 경우 다른 한쪽은 바로 전쟁에 참가한다
1902년 시베리아철도 (블라디보스톡 - 하바로스크 구간) 개통
1899년 대한천일은행(현 상업은행) 창립
1895년 러시아 황제 전제정치 선언
1878년 러시아,터키 휴전조약 체결
1648년 네덜란드 80년 전쟁 끝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
1637년 인조, 병자호란때 남한산성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던 인조와 왕세자가 1637년 1월 30일 성문을 열고 나와 삼전도에 마련된 수항단에서 청태종 홍타시에게 항복했다. 근세 역사상 일찍이 없었던 조선의 치욕이었다.
조선은 명나라와의 우호관계를 중단하고 청에 대해 신하의 예를 지킨다는 항복조건에 따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두왕자를 인질로 보내고, 척화파인 홍익한, 오달제, 윤집 등 3학사를 청나라로 보내야 했다. 항복 2년뒤인 1639년 청에서는 삼전도에 청태종의 송덕비를 강제로 세웠으며 조선은 사실상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병자호란은 9년 전 벌어진 정묘호란때 조선과 후금(청)이 형제지국이 된다는 화친을 체결했음에도 청나라가 이를 무시하고 군신의 예로 자신들을 섬겨야 한다는 무리한 요구를 조선에 강요하자, 조선은 도리상 두 임금을 모실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한데서 비롯됐다. 군신의 예를 조선이 거부하자 청태종 홍타시는 즉위년인 1636년 12월 자신이 직접 12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 친정에 나섰다. 인조는 강화도로 몽진하려 했으나 청군이 이미 도성에 나타났다는 정보에 따라 강화도를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1만 3000여 명의 군사와 50여 일치의 식량으로 근 40여 일을 버텼지만 강화도의 함락 소식이 전해지자 전의를 상실하고 항복한 것이다.
1621년 조선, 무과에서 대리시험이 공공연히 자행
1595년 극단 ‘챔벌린 경의 사람들’ 커튼 극장에서 ‘로미오와 줄리엣’ 초연
1392(고려 공양왕 4) 서적원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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