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을 맞아, <한국갤럽>은 전국 성인남녀 2003명을 대상으로 '해방 이후 우리나라를 가장 잘 이끈 대통령'이
누구인지 조사했다. 그 결과 응답자의 44%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가장 잘 이끌었다고 답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24%, 김대중 전 대통령이 14%로 그 뒤를 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이 더 많다고 응답한 사람은 67%, 과가 더 많다고 답한 사람은 16%였다. 또 박 전 대통령이 가장 잘못한
일로는 독재·유신·민주화 후퇴(72%)가 꼽혔고, 잘 한 일로는 경제발전(52%)이라는 답이 많았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후 이 땅에는 서슬 퍼런 독재 시대가 열렸다. 그는 집권기 내내 민주화를 후퇴시켰다. 이는 우리가
흔히 아는 그의 가장 큰 잘못이고, 위의 설문 결과는 그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이에 못지
않은 큰 잘못을 저질러왔다. 그럼에도 그가 대통령에 취임하기 전의 과오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대한민국의 경제성장을 견인하고, 국가와 민족을 진심으로 사랑한 지도자라는 신화적 존재로 자리잡고 있다. 그의 경제 성장 정책과 성과에 관해서도 상반된 주장이 있지만, 우선 이 글에서는 국가를 사랑한 대통령으로 추앙받고 있는 박정희의 실제 삶에 관해서만 짚어보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17년 경북 구미에서 태어났다. 5남 2녀 중 막내로, 그의 아버지는 빈농이었다. 어린시절의 박정희는 들판에 나가 전쟁놀이 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1926년, 그는 10세가 되던 해에 구미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성적은 매우 우수한 편이었고, 이후 당시 명문이던 대구
사범학교에 진학해 1937년 졸업했다. 사범학교 내에서의 성적은 다소 저조한 편이었지만 당시의 수재들이 모인 학교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는 상당한 엘리트에 속했다.
졸업 후 박 전 대통령은 3년간 교사 생활을 했다. 그러나 교사 생활이 적성에 맞지는 않았는지,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만주
군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만주국은 일본 관동군에 의해 세워진 괴뢰국가였다. 만주 군관 학교에 입학한 박 전 대통령은 사범학교
시절과 달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더 큰 꿈을 꾸며 일본 사관학교로 편입했다. 여기서도 그는 눈에 띄는 생도가 되었다.
졸업 후 그는 만주군 예하 보병 8단에 소위로 임관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위해 만주와 연해주, 상해와 충칭 등지를 오가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던 그 시절, 박 전 대통령은 조국을 침탈한 일본에 충성을 맹세했던 셈이다. 이 시기 이미 '다카기
마사오'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고 있던 그는 자신의 이름에 아직 조선인의 흔적이 남았다며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이름으로 다시
개명을 하기도 했다. 이 때 만주군에 근무하며 그가 어떠한 일을 했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각에선 그가 독립군을 진압하는 간도특설대 임무를 맡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던 중 1945년 갑작스럽게 광복이 찾아왔다. 당시 일본군 장교였던 박정희는 급히 일본 군복을 벗고 베이징으로 건너갔다. 세를 불리고 있던 광복군에 가담하기 위해서다. 광복군에 가담한 것은 확실한 신분 세탁을 가능하게 했다.
이후 국내로 돌아온 그는 1946년 조선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했다. 그가 입교한지 열흘도 지나지 않아
대구에서 10월 인민항쟁이 발생했다. 이 때 사회주의자였던 그의 형 박상희가 죽임을 당했고, 형의 죽음은 박정희를 남로당으로
이끌었다. 당시에도 우파와 좌파가 극렬하게 대립하고 있었지만, 그 때는 좌파가 집권하게 될 것이란 예측이 더 많았다.
남로당 입당후 박 전 대통령은 남로당이 군부에 심어놓은 프락치(간첩)으로 활동했고,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터지면서
토벌사령부에 작전장교로 차출되었다. 그러나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반공을 내세우며 군내 남로당원을 색출
중이었는데, 박정희가 남로당원이라는 사실이 탄로난 것이다.
그는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지만, 군부 내 남로당원의 명단을 전부 자백하며 살아남았다. 자기 조직의 명단을 다 공개한 사람은 다시
조직원이 될 수가 없다. 이 때문인지 그에 대한 처벌은 미약했다. 그는 처음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던 것이 이후 징역 10년으로
줄었고, 결국은 형 집행 면제를 받았다. 이후 그
는 좌익혐의에도 불구하고, 당시 인재가 부족했던 상황과 확실한 전향 의사를 밝힌 덕분에 육군본부 정보국에 비공식 문관으로 복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뒤 한국전쟁이 터지자 현역으로 복귀했다. 이처럼 그는 늘 기회주의적인 처신을 해가며 역동의 시기를
견뎌냈다.
한국전쟁 후 박정희는 장성이 되었다. 그리고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장갑차를 이끌고 한강을 건넜다. 이것이 그 유명한
5.16 군사정변이다. 쿠데타에 성공한 그는 얼마 후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 후 1979년 10월 26일까지의 행적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대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삶 전체를 돌아보면, 민족과 나라를 사랑해왔다는 흔적은 찾기 힘들다. 오히려 늘 권력을 향해 달려온
기회주의자라는 평가가 더 합당하다. 일제 치하에서는 황국 신민을 길러내는 교사에서 황국군의 장교가 되어 살다가 해방 이후에는
광복군이 되고, 국내에 들어온 뒤 공산당 당원으로 변신했다가 분단 후에는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는 극우 독재 정치가가 된 그의 삶의
궤적은 마치 카멜레온과 같다.
광복70주년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지금도 우리 국민은 이러한 사람을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꼽고 있다니 부끄러운 일이다. 친일행적자를 처단하지는 못 할 망정 존경하고 있는 나라라니. 광복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 광
복 70주년을 맞이하는 날, 적어도 친일 민족 배반자들에 대한 찬양의 목소리보다 비판의 목소리가 더 높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과도한
기대일까? 광복절은 지금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다카기 마사오, 오카모토 미노루라는 두 개의 일본식 이름을 가진 일본군 장교
출신 대통령을 가장 존경한다는 우리 국민들 때문에.
첫댓글 사랑했겠지요~ 다카키 마사오의 일본을 향한 애국심은 뭇 매국노들의 귀감이 되고 있지않습니까~
5.16 반란일으켰을때.. 북한 일성이가 얼마나 좋았으면.. 남쪽에 우리식구가 정권잡았다고해서..
6.25전 대구폭동당시 죽었던 빨갱이 박정희의 형 박상희 친구 황태성을 보냈을까?
박정희라는 인물을 보면 절대.. 네버~ 아이들에게 가르칠만한 인물이 아님..
1, 일본군 장교 OK
2, 북한공산당과 쌍동이당 "남로당 군책" OK
3, 5.16 쿠테타.. 정권 잡아도 OK
애들에게 뭘배우게 할까? 경제발전? 소득증대? 이게 과연 "공"인가? 당시 누릴것 다누렸으면서..
면 단위에 대학생 하나
보기도 힘든 당시 빈농은 성적이 우수해도
사범대학 못다님 .
채현국 선생님 어록
"사범학교.." 대학이 아님..당시 사범학교 들어가기는 쉽지않은것은 사실..
초딩선생으로 잘먹구살만한데 왜? 만주군관학교를가서 항일단체를 땨려잡는데 앞장서는지
이해불가.. 자신의 출세욕이 엄청난 인간이었던것같음.. 민족이고 도리는 처음부터 없었음..
그리고 시대 항상 시류에 맞춰살았던 인물..
(그의 충성의 대상을 보면날수있음..)
그래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가르칠만 인물이 절대 아님..
여대생을 많이 사랑했겠지요
업적도 많았지만
독재로 부작용도 많았지 ~
그 유신 독재의 잔재가 남아
지금 새누리당이 답습을 하는거고
국가를 사랑하는 멍청한 김영삼같은 인간보다
(국제정세도 모르고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미국업적 파토내고.
.그카더니 imf 맞았죠..중국도 당시 같이 어려웠는데 후진타오는 미국가서 비행기 이백대사주고...등등 돈풀고 왔는데..)
영악하던 국가를 사랑하지 않던 발전시킨 박정희가 낫네요
300만을 전쟁으로 죽인 나라를 사랑했던 김일성보다낫고
300만을 굶겨죽인 나라를 사랑했던? 김정일보다 낫네요
노무현이나 김대중보다는 훨 못합니당,..
저 면상보소 원숭이 같이 생겼네..쌕정희시대때 경제는 명백히 동아시아의 4개의 용 중에서 가장 경제발전이 더딘나라였습니다..그리고 그는 명백한 기회주의자입니다..그런인물이 경제발전시킨 인물로 칭송받는건 저도 동의 못합니다
박정희 경제 일으켰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민족문제 연구소의 백년전쟁.. 프레이저 보고서 편을 보세요.. 얼마나 경제 문외한에다 경제정책 실패를 했는지 여실히 나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동시대의 유럽 서구권이나 일본 대만보다도 경제성장이 훨씬 더딥니다. 장면 정권 이후의 민주주의 체제였다면 자유진영의 지원으로 더 발전할수 있었던 걸 박정희 독재로 인해 그 기회를 날리고.. 그런 조건하에서도 국민들이 힘들게 힘들게 그나마 이뤄낸 것이죠... 그 당시의 경제발전은 박정희가 아닌 우리 선조들의 저력인 거죠.. 박정희에겐 국가와 민족관이 없습니다. 그의 행적을 보면 드러나죠.. 그냥 일그러진 시대의 패륜아입니다.
챵중이도 애국 가면을 쓰고 성추행도 정당화 하려 했는데
친일파들의 애국 코스프레는
그저 한번 듣고 흘러 버리면 됩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질문을 왜 하시는지... 눈꼽만큼만 역사 공부해도 자기 이익을 위해 민족, 국가는 물론 친척까지 팔아 먹은 놈인데...
팟캐스트 이이제이 박정희편을 들어보세요 기가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