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의 파수꾼
신 정 화
지난 2월 청량산의 백색 감동.
아직도 우리들 기억의 강을 유유히 꿈꾸듯 흐르고 있는데…
이번에는 이름 모를 어느 풀 섶에 섬진강 푸른 감동 풀어 낼 명당을 찾아 나섰습니다.
30년 전 섬섬옥수였던 시절.
목포를 다녀오며 달리던 버스 속에서 얼핏 스쳐 지나간 겨울 섬진강의 유려한 모래톱에 제 순수를 앗겼습니다. 그 이후 섬진강의 ‘섬’자는 섬섬옥수의 ‘섬’자로 새겨졌습니다. 내 그리움의 1번지로 모셔두고 지금껏 잊은 적 없는 그 겨울의 섬진강…
드디어 마지막 잎새처럼 30여년 달랑이며 매달린 한 잎 그리움을 찾아 나섰습니다. 저무는 강가에 드리운 산 그림자의 애틋함으로, 30년 만에 만나는 첫사랑이라도 재회하는 듯한 아련한 설렘으로 시동을 걸었습니다.
이미 세월의 주검이 되어버린 첫사랑의 주름살처럼 섬진강이 나를 실망시키면 어쩌나.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굽이굽이 섬진강 물빛에 홀리듯 전주 남원 구례 지나 하동까지 남으로 남으로 내 달렸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만산이 마지막 한 잎의 열정으로 울긋불긋 꽃 대궐을 이루었습니다. 오가는 내내 애원하는 듯한 우수수 낙엽의 몸부림을 차마 밟고 지나야 했습니다.
높은 산 낮은 산, 큰 강 작은 강, 쭈욱 뻗은 신작로와 비포장 꼬불탕 길…
그 어떤 길도 긴긴 그리움에의 길벗이 되어 주었습니다. 나도 섬진강 물이
된 듯 도란도란 함께 흘러갔습니다. 거기엔 금모래도 놀러 오고 물풀도 억새
도 물새도 놀러 와 정겹게 소곤소곤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단풍잎도 수줍은
새악시 처럼 동동거리며 물길 함께 건너 진뫼마을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아, 손잡고 산 넘고 물 건너 주던 눈썹달도 빼 놓을 수 없는 친구였습니다.
나도 섬진강에서 나고 자랐으면 시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혼자
웃습니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초행길이어도 이렇듯 훈훈하고 정겨울 수 있는 섬진강은 어디서 시작 된 걸까. 바로 진뫼 마을 사람들의 훈기와 인정 넘치는 삶의 물결이 그 시작이 아닐까.’
진뫼마을에서 섬진강의 진수를 보았습니다. 진뫼에는 그가 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진뫼의 얼이자 섬진강의 파수꾼이요 한국의 혼이었습니다. 그가 진뫼를 지키는 일이야 말로 실향민의 스러져 가는 고향을 지켜 주는 일이었습니다.
우린 언젠가 금의환향 하리라 다짐하며 30년 전 쯤 고향을 떠나 왔습니다. 하지만 오늘 남은 건 잿빛 하늘아래서 쳐진 어깨로 푸른 고향하늘만 그리는 실향민이라는 외로운 이름입니다. 그는 우리 실향민을 대신해 잊어가고 있는 고향의 강 언덕을, 사라져 가는 저녁연기를, 살맛나는 사람 냄새를 찾아 주기 위해 섬진강 푸른 물의 징검다리가 되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보는 사람 없어도 땀 흘리며 고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날은 김장 날이었습니다. 그는 아내, 누나, 형수의 왁자지껄한 미소까지도 젓갈과 함께 척척 버무려버립니다. 죽어 가는 불씨를 되살려 피운 마당가의 모닥불엔 초승달도 내려와 손을 쬡니다. 진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부러웠던 게지요.
진뫼를 감돌아 흐르던 섬진강의 웃음소리는 별을 툭 치며 밤하늘을 흔들어 놓습니다. 무채색의 아름다움을 무시하고 유채색 포장을 삶의 표상인양 살았던 착각이 진뫼의 뒷동산에 별똥별로 쏟아져 내려 기꺼이 묻혔습니다.
개발이다 발전이다 해서 시멘트로 포장해 놓은 한강, 낙동강가를 아름답다고 뽐내며 거닐던 거. 모두가 허사였군요. 선악과 미추의 경계를 긋지 않는 섬진강. 30여년 변하지 않고 어우러져 흘러 준 섬진강의 푸른 절개를 보고서야 길을 잃고 헤매는 내 삶의 길이 보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성춘향의 절개도 섬진강에서 자랐군요.
섬진강은 두 마을을 가르기도 하지만 어우르기도 하며 깨고 싶지 않은 꿈으로 유유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다리 하나 놓으니 이렇게 스며들고 통하는 걸… 통할 수 없는 내 마음의 오지에도 이런 다리 하나 놓아야겠습니다.
‘섬진강은 이대로 흐르고 싶다’며 수절하듯 제 모습 고스란히 지켜 준 희망의 강. 오늘 내 마음에 행복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신정화 선생님은 현재 서울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며 전직 기자 출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