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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 2;1-13. 오순절 성령강림의 은혜. 2023. 5.28.
1. 오늘이 2023년도 오순절 성령 강림주일입니다. 오순절은 헬라어는 50이라는 뜻의 절기입니다. 이 날은 유월절 주간의 안식일로부터 50일째 되는 날이며 유대인의 3대 절기 중에 유월절 다음으로 중요한 절기입니다. 특히 오순절은 유월절의 축제기간 중 첫 열매와 이삭을 드린 다음날부터 계산하여 칠 주(49일) 후 50일째 되는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을 칠칠절이라고 하며 흩어져 사는 모든 유대인들이 처음 익은 밀과 보리로 떡을 만들어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예표 한 것이라면, 오순절은 신약시대교회의 시작의 새로운 의미입니다. 구약 3대의 절기는 유월절과 오순절과 장막절이 있습니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는 절기이고 장막절이라는 초막절은 광야 생활을 기념하는 절기이며 오순절은 가나안 땅에서 처음 추수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러니까? 오순절은 추수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면 왜 추수의 절기에 성령이 강림하셨을까? 여기에 신학적인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절기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그 부활하신 날로부터 오십일 째 되는 날에 성령이 오셨습니다. 고전15;20,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님은 부활의 시작을 알리는 첫 열매이었는데 주님이 부활하신지 50일째 되는 날 성령이 오심으로, 모든 성도들을 거두어들이는 영적인 추수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성령의 강림은 안식일 다음날인 주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일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이지만 또한 성령의 강림을 소망하고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강림이 어떠한 상황에서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몇 가지의 상황이 있습니다.
1-1. 먼저는 다 같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1절에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다 모였는데 한 곳입니다. 모인 이유는 주님의 명령 때문입니다. 행 1;4,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것이었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명령입니다. 명령과 함께 약속하시기를 1;5,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그래서 모든 제자와 120여명의 약속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모여서 주님의 명령에 따라 열심히 기도하고 성령강림을 기다렸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특히 다 같이 라는 표현은 한 마음과 같은 마음과 같은 열정과 사모함이었습니다. 그 곳은 마가 요한의 다락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것이 초대 교회의 원리가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모든 성도들은 주님의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골1;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고전12;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니라. 여러분, 그러면 지체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지체는 더불어 있을 때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합니다. 우리의 몸에는 여러 부분의 지체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눈, 코, 귀, 입은 그들의 위치에서, 손과 발 역시 제 위치에서 제 위치를 지키며 할 일들을 제대로 할 때에 문제가 없습니다. 지체의 위치와 기능은 서로 의존하며, 보완하는 밀접한 관계가 이루어지면 건강과 삶의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지체가 그 본래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유기적인 관계가 되지 않을 때에 아픔과 고통과 장애가 찾아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한 지체의 아픔이 온 몸에 고통을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는 지체가 없습니다. 여러분,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는 주님을 머리로 한 지체들의 모임과 연합이지만 각기 또한 고유한 역할이 있습니다. 그 역할은 원망과 불평이 아니고,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서로간의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하고 목적하는 바의 가치관이 일치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것을 아시고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내용입니다. 공감대와 가치관이 일치했고, 다 같이 같은 마음으로 한 곳에 모였습니다. 여러분, 한국과 다르게 일본은 그렇게 큰 회중들이 모이는 교회가 거의 없습니다. 100년 이전에 설립한 교회의 평균 구성원의 수가 18명입니다. 그런데 비전교회는 어떻습니까? 예배를 드리는 출석 성도가 30여명 정도입니다. 다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지체의 역할을 하시나요? 시끄럽지요? 생각이 다 다르지요? 공감대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지요? 그런데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지도자들은 어떻습니까?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렸습니다.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의 은혜를 받아야 하는 공감대와 가치관이 같았습니다. 다 같이 한 곳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약속대로 이 사람들 위에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다 같은 마음으로 비전 교회 한 곳에 모였고 성령 강림 주일로 예배를 드립니다. 같은 공감대와 같은 가치관입니다. 이 시간 은혜를 사모하는 모든 분들에게 불같은 오순절 성령의 역사와 같은 은혜가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2. 두 번째는 은혜를 사모하는 각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2-4,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성령 강림은 바람과 불과 방언으로 나타났는데 어떻게 표현을 합니까?
. 강한 바람 같은 소리입니다. 하늘에서 소리가 들렸는데 그 소리는 강하게 몰려오고 요동치는 공기의 흐름이었습니다, 시내 산에서 울려 퍼진 나팔소리와 같았습니다. 가득했는데 영적인 강한 바람 소리가 들렸고 그 은혜를 120명 모두가 느꼈습니다. 예외가 없었습니다.
.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보였는데 각 사람 위에 임했습니다. 불의 혀는 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왜 각 사람위에 각각 임했으면 불의 혀 같은 것입니까? 불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나타내고 그리고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이런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가 요엘2:28-32에 예언되어 있었는데 이 것이 구체적으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여러분, 성령의 강림은 회개와 능력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 각 사람 위에라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한꺼번에 똑 같은 내용이 아니고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간구하고 사모하는 것으로 응답하셨다는 내용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은 종들의 재능을 따라 각각 다른 분량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종들과 회계할 때에 숫자와 분량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성실함과 충성됨을 가치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성령의 은사도 이와 같습니다. 일률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각 사람 위에 임했다는 것은 주님의 약속과 명령에 대하여 얼마나 간절함이 있고, 얼마나 성실하고, 얼마나 충성되는가에 따라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명은 한 결 같이 하나이지만 각 사람들 위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1-3. 세 번째는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4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사도행전의 기록자 누가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다, 전부, 모두라는 말을 사용하여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음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충만은 무엇입니까? 성도들의 마음속에 거하시는 성령의 지배와 인도를 받는 신앙의 삶입니다. 충만은 빈 항아리에 물을 붓듯이 공간적으로 채워지거나 다시 들어오는 것의 이상입니다. 알지 못했던 세계의 경험이고 인지할 수 없었던 그 무엇입니다. 놀라운 기적과 사모하는 은혜입니다. 4절,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그들은 성령을 받고, 지금까지 배우고 경험한 적이 없었던 언어로 말하기를 시작했는데 그들 앞에 모여든 각 족속들의 방언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는 성령께서 새로운 언어를 제자들의 입에 넣어 주시므로 하나님의 위대한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고, 주님께서 원하셨던 것과 원하셨던 방법으로 역사 하신 내용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기적입니까? 얼마나 사모하던 은혜입니까? 요엘이 예언했던 사모함입니다. 생각지도 못했고, 경험되지 않았던 은혜입니다. 그래서 7-8, 다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다른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은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였고, 다 놀라 기이히 여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의 역사는 이렇게 놀라게도 하고 기대하게 하고 감동하게 합니다. 사람이 달라지고 보는 관점이 달라지고 생각하고 경험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전혀 생각 밖의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에 기이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1;8, 제자들은 성령이 임하셨을 때 또한 권능을 받았습니다, 무슨 권능입니까? 성령의 역사의 결과인데 행4;31, 산헤드린에서의 베드로의 용기와 설교의 권능이고 치료의 권능이고 회복과 사탄을 제압하는 권능입니다. 행13;8-12, 구브로에서 무당 엘루마를 소경이 되게 한 바울의 승리는 성령의 역사인데 어두움의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권능입니다. 위험한 사태에 대처하는 신앙인의 용기와 능력이 나타나는 권능입니다.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는 투지와 이해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담대함과 주위 환경과는 관계없이 신앙인이 갖는 기쁨과 소망의 권능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어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이 약속의 보증으로 성령께서 강림하셨고,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렇게 되시고 세상 가운데 우뚝 세워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그러면 오순절 성령 강림의 때를 무엇이라고 합니까? 19-20. 기사와 징조, 그리고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입니다. 베드로는 요엘서의 이적을 기사와 징조로 재해석하고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을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로 재해석했습니다. 기사와 징조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자연 현상의 변화입니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은 주님의 재림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성령 강림이 있는데 그 강림은 지금이고, 성령의 강림은 모든 육체에 임재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편만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때는 또한 고난의 기간입니다. 그러니까?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인 재림이 있기 전에 환난이 있습니다. 그 환란은 계시록의 천년과 같습니다. 말세의 기간은 고난과 핍박을 당하는 기간입니다.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결정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기간입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는 기간입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이 사람들은 말세의 기간에 깨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이해합니까?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된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은 우연이 아니고 예언이 성취로 보았습니다. 여러분! 요14:26절과 29절을 기억하시지요?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이제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이룰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신 이 일이 임하자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합니까? 과연 그렇다고 합니다. 구약에 예언되어진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담대함으로 설교를 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에 대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언의 성취이고, 이 예언의 성취인 성령은 이제 모든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재 하신다는 뜻입니다. 언제 그렇게 됩니까? 지금 이 말세의 때입니다. 어디에 기초합니까? 말씀에 기초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담대함의 원천이요. 권능인데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첫 번째 메시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성령시대가 도래했고, 모든 육체가 성령의 충만을 받게 되지만 환난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령의 강림은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만이 아니고, 환경을 바꾸어서 모든 것이 안락하게 만들어 주는 것만이 아니고, 편안하지만, 안락하지만 또한 고난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고난 가운데서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성령이십니다. 우리 속에 내주 하시는 성령께서 말씀이 생각나도록 도우시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베드로의 생각에 변화가 있고 삶의 변화가 있고, 말씀에 대한 시각의 변화가 있습니다. 과거에는 깨닫지 못하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는 권능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 강림의 참된 의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에게도 이와 같은 성령의 충만함으로 여러 상황에서 여러 가지의 권능과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그렇다면 성령의 충만한 역사로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믿음의 태도와 자세입니다. 계3:7-8,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볼찌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여간한 능력을 가지고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말을 지키며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 태도와 자세입니다. 여러분, 이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이런 믿음의 태도와 자세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충만으로 유지가 되는데, 성령의 충만함으로 이루어지는 믿음의 태도와 자세는 무엇입니까? 주님 안에서의 긍정 gain 입니다, 주님 안에서의 낙관 joy 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종말 end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최대의 사건은 오순절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강림은 구원의 역사에 최대의 전환점이며, 교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계3: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성령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하고, 들려져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충만한 믿음의 태도와 자세가 무엇입니까?
3-1. 주님 안에서의 긍정입니다, gain oriented person입니다. 빌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언제나 얻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궁핍과 핍박과 어떤 환경에서도 얻은 것만 생각했습니다. 핍박이 올 때 얻은 참 믿음을 생각했습니다. 환난을 당할 때 얻은 참 소망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충만한 사람은 언제나 더 큰 것과 더 위대한 것을 생각합니다. 허상을 잃고 진실을 얻으며, 명예를 잃고 겸손을 얻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충만하지 않은 삶은 어떻습니까?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 피해를 찾아냅니다. 태어난 것과 죽는 것이 피해라고 합니다, 가난과 실패와 병드는 것과 헤어지는 모든 사건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합니다. 늘 원망과 불평이 있습니다. 부당한 대우와 대접을 받으면 불의의 판정이라느니, 다음에 보자고 합니다. 여러분, 화를 내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불평가운데 있으면 더 나을 것이 무엇입니까? 공정한 룰과 공정한 판정이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이런 자세가 바로 얻는 자세, gain입니다. 성령의 충만은 긍정의 사람이 됩니다. 지금 베드로가 그렇습니다. 반면교사가 무엇입니까? 최악의 모습을 보고도 배울 수 있습니다. 무엇을 배웁니까? 나는 저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는 교훈을 얻습니다. 비난하면서 같은 길을 걷는 것은 어리석은 삶입니다. 비난은 교만이고, 배움은 겸손입니다. 결국 겸손이 교만을 이깁니다. 이런 삶의 영적인 혜안이 어디서 나올까요? 성령의 충만에서 나옵니다. 성령이 충만해야 영적인 혜안이 있어서 보게 하고 보여 지고 생각하고 생각나게 합니다. 긍정입니다. 여러분, 다윗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적적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이 됩니다. 기름 부음을 받은 이후에는 이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이 된 이 은혜를 그의 삶의 자리마다 이어갑니다. 다윗은 14살 정도 된 어린 아이로 아버지의 심부름을 갔습니다. 아버지 이새의 부탁을 받을 때에도 그렇고, 전쟁에 참여할 때에도 그렇고 겁에 질린 사울 왕에게도 그렇습니다. 삼상 17;32, 사울 왕에게 블레셋 사람으로 인하여 낙담하지 말 것이라. 보는 관점이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 표현을 합니다. 사람으로 인하여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삼상17;37,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 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저내시리라. 위기의 순간에도 그렇습니다. 삼상17;47,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여호와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위대한 신앙의 말을 남깁니다. 그러면 다윗이 말만합니까?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이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 사람입니다. 생각과 마음 속 전체에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요?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된 그 은혜를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애매하게 누명을 쓰고 10년이 넘도록 사울 왕을 피하여 도망을 다닌 사람입니다. 일부러 다른 사람들의 손을 빌어서 죽게 하려고 블레셋 용사의 양피 100명을 요구 했지만 다윗은 200 명의 양피를 가져왔습니다. 사울이 던진 단창에 맞을 뻔 했습니다. 악신이 걸린 사울 왕을 치료해줍니다. 라마 나욧으로 도망을 가고, 사울 왕이 쏜 활에 죽을 뻔 하고 놉 땅으로 도망을 가고, 자기가 물리친 블레셋 땅으로 망명하기 위하여 들어갔습니다. 삼상21;13, 다윗이 미친체하고 대문짝을 그적거리고 침을 일부러 수염에 흘리기도 했습니다. 삼상22;1 이하에서는 아둘람 동굴로 피신을 했는데 아무 것도 없는 환난을 당하고 빚을 지고 마음에 원통한 불쌍한 사람들 400명이 다윗에게 옵니다. 혼자서 도망을 다니기도 힘이 드는데 이들은 바로 600명이 되면서 유다 땅 헤렛 수풀로 도망을 합니다. 도액이라는 에돔 사람에게 배반을 당합니다. 그일라로 피신을 합니다. 십 황무지로 도망을 하고 다시 마온 황무지로 도망을 합니다. 안 다닌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엔게디 요새로 들어갑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수많은 어려운 일을 당하는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자신을 절제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여호와의 신에 크게 감동된 그 은혜 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충만 입니다.
3-2. 주님 안에서 낙관적인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joy oriented person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소망을 내려놓지 않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감옥 안에서도 항상 기뻐했습니다. 옥중서신인 빌립보서에 10번 넘게 기뻐한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빌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무슨 의미입니까? 죽어도 좋다는 말입니다. 절대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절대 기쁨과 즐거움은 바닥 체험에서부터 나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핍박자이며 포행 자이었던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네가 핍박했던 예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이 때에 바울의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밑바닥 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 바닥체험에서 주신 은혜의 결과이었습니다. 여러분, 성령 충만한 사람은 억울함과 분노와 원망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기쁨이고 모든 것이 감사입니다. 베드로도 모든 것이 감사이고 모든 것이 기쁨이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사람들의 평가보다 자신을 더 낮게 여깁니다. 죄인 중의 괴수라고 합니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라고 합니다. 왜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을까요? 이런 인식이 있는 사람에게 비난과 공격은 의미가 없습니다. 죄인보고 죄인이라고 하는 표현에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 나쁜 사람에게 나쁜 사람이라는 것은 자존심이 상하지 않습니다. 나는 죄인이고 바닥까지 떨어진 존재이지만 바닥에서 일으켜 세우신 주님이 있다는 고백은 모든 상황에서 절대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뿌리가 됩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성령 충만하면 됩니다.
3-3. 종말의 승리입니다. end oriented person입니다.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자녀는 최종 승리입니다. 중간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실망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선을 생각합니다. 순리와 역경도, 핍박과 환난도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콘트롤 하시기 때문에 결국의 마지막은 해피엔딩입니다. 맡긴 인생은 end 의 승리입니다. 여러분, 맡긴 인생의 반댓말이 무엇입니까? 맡긴 인생의 반대말은 자기 수고에 연연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신의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여곡절 속에 절망을 합니다. 뜻대로 안되면 억울해 하고 몰라준다고 합니다. 무엇인가를 이루면 나는 이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너는 무엇을 했느냐는 식으로 공격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기 수고에 연연해하는 사람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up and down이 심하기 때문에 꾸준히 못합니다. 성실성이 없고 신실하지 않습니다. 오래 가고 싶습니까? 성실하고 싶습니까? 자기 수고를 잊으십시오. 나의 수고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맡기고 충성하고 맡겨진 삶의 걸음을 계속 걸으면 최종적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계3;10-11,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시험의 때를 면하게 되고 나의 예비 된 면류관을 빼앗기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상황이 어렵습니까? 다윗만큼 10년이 넘도록 도망을 다니고 위험했던 순간들이 있습니까? 다윗보다 더 합니까? 오늘 신앙의 삶을 어떻게 살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가를 가르쳐줍니다. 어려움을 통과하는 가운데서도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모습인지 가르쳐 줍니다. 그러면 어려움이 끝이 났습니까? 아니요.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다고 고발을 당합니다. 무엇을 말씀하시나요? 하나님만 나를 보는 것이 아니고 세상도 나를 보고 세상이 주목을 하고 세상이 나를 비방합니다. 항상 빛과 어두움이 가까이 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에 혈안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다윗을 추적하는데 지나치게 폭력적입니다.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 중에도 별 어려움이 없이 엔게디에 있다는 다윗을 잡으려고 3000명의 용사를 동원합니다. 적과의 전쟁을 위해서 동원한 것이 아닙니다. 엔게디는 예루살렘 남동쪽 60km 떨어진 사해서쪽 해변인데 황무지로 동굴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삼상24;4절 끝 부분에 도리어 다윗이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잡으러 갔던 다윗이 잡히지 않고 도리어 사울 왕의 옷을 다윗이 베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을까요? 삼상 24;3절 사울이 그 발을 가리우러 들어 가니라. 이 표현은 죄송합니다. 생리작용인 대변을 보기 위하여 들어갔는데 동굴은 나그네에게 종종 화장실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갑자기 화장실을 가게 된 사울이 볼 일을 보러 들어간 동굴에 다윗이 숨어 있었습니다. 사울의 신속한 추격에 급박해진 다윗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동굴에 숨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이 다윗에게 지금까지의 위기를 단 한 번에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도 사울을 제거할 기회라고 다윗을 충동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이고, 오늘이 그 결정의 날이고 기회의 날 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단순한 논리로 주변의 의견을 물리칩니다. 이유는 삼상 24;6절에 사울은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 몰래 자릅니다, 다윗은 자기 스스로 무엇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철저하게 맡겼습니다. 기회의 순간에도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된 그 은혜 속에 있습니다. 절호의 찬스에도 성령에 사로 잡혔습니다. 주어진 기회를 영적인 시각과 관점과 섭리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24;7절에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을 베었지만 이것조차 다윗의 마음이 찔렸습니다. 왜냐하면 사울 왕과 자신도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성령 충만한 사람의 믿음이고 인생입니다. 오늘 모든 분들이 이렇게 사시고 이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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