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장님 수고 많습니다. 개인 수필 2편이지만 1편의 긴 기행문으로 대신 합니다. 칼라사진을 아래에 올려두었습니다. 흑백으로 본문 속에 넣어도 되고 칼라를 살리시려면 앞의 화보에 편집해도 됩니다.
리장고성(麗江古城)
김희준
리장의 오후
오후 1시에 기차가 멈추고 리장역(麗江驛) 광장으로 나오니 기차에서 보았던 옥룡설산(玉龍雪山)의 백설에 덮인 성스러운 모습이 멀리 보였다. 이마에 구름이 걸려 있는 웅혼한 설산은 백발의 성자를 닮아 있었다. 대리역(大理驛)에서 차를 가지고 따라온 가이드 청년이 역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리장고성으로 가는 길가에 화려한 단청을 입힌 5칸의 교문이 있는 나시족 자치현의 민족중학교가 보인다. 리장 신도심에 차가 들어서는데 교통량이 많다. 도로의 중앙에는 히말라야시타 나무가 서 있고 그 아래에는 상록수 관목이 도로 좌우를 나누는 울타리처럼 심어져 있다. 도로가에는 고색창연한 목조 이층 기와집들이 열 지어 있다. <사진1>
차가 선 곳은 상화로(祥和路) 옆의 고성 남문 앞이었다. 관광안내초소에는 한자와 나시족의 상형문자인 동파문자가 나란히 쓰여 있다. 대연(大硏) 고성 길거리 안으로 들어갔다. 길바닥에는 네모난 정사각형 돌을 깔아 놓았다. 길 좌우에는 이층 누각 형태의 목조 기와집들이 늘어서 있고 집집마다 물건을 팔고 음식을 파는 가게들이다. 가게 앞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수로가 있고 곁에는 잎이 지고 없는 버드나무가 곳곳에 서 있다. 골목 안으로 5분 정도 가방을 끌고 들어가니 우리가 묵을 호텔의 카운터와 식당으로 쓰는 로비 건물이 있었다. 호텔 이름이 화금주점(和金酒店)이다. 프런트에서 접수를 하고 열쇠를 받아 골목 안쪽에 있는 숙소로 갔다. 대문을 들어서니 작은 마당이 있고 이층의 목조 기와집이다. 방안에는 침대가 있고 여느 호텔처럼 개조되어 있었다.
일행은 늦은 점심을 먹으러 고성 골목을 돌아서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테이블이 서너 개가 놓여 있고 부엌이 안쪽에 있는 작은 식당이다. 식당 간판은 한자, 동파문자, 영문으로 쓰여 있는데 ‘雲南特色菜館(운남특색채관)’이다. 운남의 색다른 음식을 맛볼 수가 있는 레스토랑인가 보다. 메뉴판을 보아도 어떤 음식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밀가루 음식과 고기를 싫어하는 나는 어김없이 이번에도 운남의 쌀국수, 미센(米線)을 주문했다. 일행 중의 한 분은 쌀국수만 시킨다고 핀잔을 주기도 하였다. 쌀국수는 우동 가락보다 조금 얇은 가락에 식당마다 국물이 달라서 다양한 맛을 연출하였다. 여행 내내 나는 질리지 않고 모든 끼니를 거의 쌀국수로 해결했다. 다른 분들은 기름에 살짝 티긴 빈대떡, 순대, 볶음밥을 주문하였는데 빈대떡은 한 조각 얻어먹으니 먹을 만 하였다.
점심을 먼저 먹고서 식당 밖으로 나오니 골목에는 남루한 차림의 두 남자가 마주 앉아 장기를 두고 있었다. 내가 어릴 때 형님과 아버지와 두었던 장기와는 좀 달랐다. 우선 장기알이 장군과 졸, 마, 상, 포, 차의 크기가 같다. 초(楚)와 한(漢)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장군은 보이지 않고, 군사는 흑색과 적색의 두 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검은색 글자의 알은 수(帥)가 장수이고 병(兵)이 병졸이고, 차(車), 포(炮) 마(馬), 상(象)이 있다. 붉은색은 장(將)이 장군이고 졸(卒)이 병졸이며 장과 수 옆에 2명의 사졸이 있다. 코끼리군사를 나타내는 상은 글자를 상(相)으로 표기하여 검은색과 구분한다. 한참을 지켜보니 장기에 열중하던 흑백의 옷을 입은 두 중년은 낯선 사람을 경계하지 않으며 빙긋이 웃음을 보여주었다. 장기라는 놀이를 통하여 만 리 떨어져 살며 처음 보는 이방인들이 하나가 되는 소통이 이루어진 것이다. 가게 문턱의 윗자리에 앉은 나이가 좀 더 많아 보이는 검은 옷차림의 남자가 적군을 많이 잡았고 여유가 있는데, 길가에 앉은 백색 잠바 차림의 남자는 나이도 좀 젊어 보이고 왼손은 주먹을 쥐고 장기판에 두고 오른손은 턱을 괴고서 어떻게 작전을 할까 고민 중에 있다. 적군을 한 명도 잡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상, 마, 포가 가는 길은 우리나라와 다르다. 종이 장기판에는 붉은 색의 전서체 글자가 인쇄되어 있다. ‘漢畎(한나라 지역의 밭둑)’과 ‘楚河(초나라 지역의 강)’라는 글자는 대대로 장군을 배출한 초나라의 귀족 출신 항우(項羽)와 보잘 것 없는 농민인 한의 유방(劉邦)이 천하를 쟁패하는 전쟁터임을 보여준다.
점심을 먹고 고성의 서쪽에 있는 충의(忠義)시장으로 갔다. 길가에는 목조기와지붕의 건물에 네온사인간판이 붙은 고성세월역잔(古城歲月驛棧)이라는 여관이 있고 스타벅스(星巴克) 커피 가게와 켄터키프라이드치킨점(肯德基)도 보였다. 고금과 동서가 어우러져 기묘한 풍경을 나그네에게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두꺼운 겨울옷을 입었지만 가로수는 상록수와 활엽수가 공존하고 햇살은 따뜻하였다.
시장 입구부터 사람들이 북적대고 샛노란 감귤, 방울처럼 생긴 금귤, 그림에서만 보았던 주황색 비파, 옅은 갈색의 여주, 검붉고 굵은 백향과, 공처럼 생긴 노란색 메론, 타원형의 수박, 분홍빛 나는 사과, 금색의 길쭉한 배, 포도, 한자로 파초(芭蕉)라고 이름을 붙이고 파는 바나나 같은 신선한 향기가 피어나는 과일을 수레에 가득 싣고 팔고 있다. 대나무처럼 긴 사탕수수를 세워두고 손님을 기다리는 남자도 보인다. 겨울이라도 위도가 낮으니 그렇게 춥지 않고 해발고도가 높아서 여름에도 서늘한 윈난성은 땅이 넓고 기후가 다양하여 언제나 꽃이 피고 과일도 풍부하여 사람 살기에 알맞은 곳임을 단박에 알겠다.
설산에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물은 강과 호수를 만들고 물고기를 키운다. 거무스레한 비늘로 덮이고 입을 다시는 살찐 잉어들이 대야에 가득하다. 옆구리에 붉은 선이 있고 황금빛 나는 삼문어(三文魚)가 들어있는 수족관이 있는 목조전통건축의 음식집은 흑산양(黑山羊), 갈비, 야생버섯토종닭, 삼문어 냄비요리가 메뉴이다. 기둥에는 홍등을 달았고 처마에는 작은 종을 매달아 바람에 살랑이며 소리를 낸다. 입구의 기둥에는 붉은 바탕에 금빛 글씨로 재복(財福)을 축원하는 대련이 붙어 있고, 창가에는 풀꽃을 심은 나무 구유 화분이 놓여 있으며, 검은 바탕에 금빛 글씨로 기둥과 처마에 간판을 붙여 놓았다.
설탕과 땅콩과 볶은 쌀을 눌러서 파는 떡은 어릴 적 설날에 먹던 강정처럼 부드럽고 달콤하고 부서지는 식감을 줄 것이 분명해 보였다. 골목 입구의 어느 집 대문에는 개나리꽃을 닮은 꽃이 피어 있고 지붕 위로 보이는 언덕에는 다층 누각이 솟아 있다. 기념품 가게에는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가득하였다. 여강 고성의 풍취를 담은 그림엽서 몇 장을 골라 16위안을 지불했다.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벌집에서 꿀을 뜨는 노인이 있고, 야채를 파는 행상들의 손수레가 있고 작은 잡화점들이 이어졌다. 어느 가게 앞의 길거리에서 여인들이 둘러 앉아 내가 처음 보는 마작놀이를 하고 있다. 시골마을에서 등에 커다란 사각형 헝겊 바구니를 지고 장보러 온 중년의 부부는 담배를 문 가게 주인과 거래를 잘 했는지 얼굴 가득 웃음을 짓는다.
한쪽 발을 쓰지 못하는 남자가 시장 바닥에 퍼져 앉아서 여러 가지 색깔의 분필로 시멘트길 바닥에 구걸하는 글을 쓰고 있었다. 고딕체 글씨가 얼마나 정교한지 마치 인쇄한 것 같다. 내용을 읽어보니 길 가는 사람에게 축원을 하고 자선을 구하는 자못 비장한 내용이다. 나도 바구니에 푼돈을 넣으며 적선을 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도입한 오늘 중국의 공산당도 걸인을 구제하지는 못하였다. 보통 사람들의 연민의 정만이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일용할 양식을 제공하는가 싶었다.
"에구 내 팔자야!
날 위로해주오!
세월을 어렵게 건너는 저는 양운호이오.
입에 풀칠하려 밥을 빌며 생존을 도모하오.
길가는 사람들이여
날 비웃지 마소
명운이 비참하니 난들 어쩌겠소.
관대한 사장님 한 푼을 주소
사업이 흥성하여 운세가 천하에 뻗칠 것이오.
일생 재앙이 없고 좋은 운만 있을 것이오.
뜻대로 재물이 날마다
생길 것이오.
어제는 비 내려도
오늘은 맑소.
형제자매들이여 그대는 좋은 사람이오.
적선을 하면 그 곱을 얻을 것이오.
이 원숭이해엔 줄곧 큰 재물이 생길 것이오.
길가는 사람들이여
걸음을 멈추고 내말을 들어보소.
아버지는 하늘이고
어머니는 땅이오라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고......"
시장에서 돌아와 우리가 간 곳은 대형 악극 공연장과 나시족 테마 민속촌과 놀이공원이 함께 있는 여강송성여유구(麗江宋城旅游區)이었다. 고성 남쪽 입구에서 택시를 타고 가다가 아내가 외투 호주머니에 있어야 할 휴대폰이 없는 것을 알게 되어 승차한 곳으로 차를 돌렸다. 길거리에서 호객하는 중국인 청년에게 묻자 천만다행하게도 부근의 경찰차를 가리켰다. 택시를 타며 길바닥에 떨어뜨린 휴대폰을 주워 부근의 경찰에게 맡긴 청년에게 감사의 표시로 백 위안을 건넸다. 리장 사람들의 심성이 때 묻지 않고 순박함을 간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황교령(黃巧靈) 감독이 연출하는 여강천고정(驪江千古情)이라는 가무극(歌舞劇)이 펼쳐지는 공연장은 관람객으로 가득 찼다. 한 차례 무려 6,500명의 관객에게 공연된 악극의 내용은 나시족 남녀가 옥룡설산(玉龍雪山)의 빙하계곡 속으로 동반 자살하는 슬픈 사랑 이야기이다. 히말라야의 설산과 험준한 고개와 깊은 골을 목숨 걸고 오가며 티베트의 말과 윈난의 차를 무역하는 차마고도(茶馬古道)의 마방(馬幇)이 된 나시족의 남자들과 가사를 도맡아 하고 농사를 지으며 먼 길 나선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들의 애절한 마음을 표현한 악극이다. 악극의 막판에는 등 뒤의 안개구름 피어나는 천장에서 출발하여 관객의 머리 위를 지나 무대로 배우들이 꽃바구니를 타고 내려가 마치 천녀들이 지상으로 하강하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태고의 신비함을 갈무리한 설산과 호수와 폭포, 나시족 창세기 신화의 생명예찬, 노고호여인국(瀘沽湖女人國)의 낭만적인 정감, 목씨(木氏) 왕조의 눈부신 흥성, 마방 이야기, 옥룡설산의 생명력 넘치는 노래 같은 역사와 문화를 영화 화면과 현실 무대와 무대 밖의 무대가 어우러져 입체적이고 화려하게 표현하여 관광객들에게 큰 볼거리를 제공하였다.
리장의 밤
공연을 관람하고 고성으로 돌아오니 오후 8시가 넘은 시각이지만 아직 저녁 어스름이고 가게들마다 전등이 켜져 있었다. 호텔에서 잠시 쉬고서 고성의 밤거리 구경에 나섰다. 수천 개의 이층목조건축의 가게들이 골목길 좌우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하루저녁에 10만 명의 관광객이 발 디딜 틈 없이 골목길을 메우며 강물처럼 흘러간다고 한다. 가게마다 간판들이 상호를 나무판에 새긴 서각작품이었다. 글자와 내용과 디자인이 저마다 다르다. 수백 년 세월의 풍상에 빛이 바랜 회색 기와지붕 목조전통건물들이 주황색 따뜻한 조명을 받아서 사람을 안온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낯선 시공간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편안한 풍경 속에서 걷자니 삶의 상처들이 잠시나마 남김없이 치유되었다. 신선한 장미꽃잎을 넣고 구워내는 빵(鮮花餠)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였다. 빵을 한 통 사고 옆의 기념품 상점에 들러 진열된 물건들을 구경하였다.
리장은 동양의 베니스라는 별칭이 있다. 설산의 빙하가 녹은 물길이 도시 전체에 핏줄처럼 퍼져있고, 수로를 따라 사람들은 집을 짓고 골목길을 내었다. 사람들은 두레박으로 냇물을 길어 올려 화분에 물을 주고 식수로도 쓰고 있다.
사방팔방으로 난 골목길은 모두 사방가(四方街)라고 하는 중앙의 직사각형 작은 광장으로 통하였다. 광장 주변에도 이층 건물의 가게들이 빼곡하다. 라이브 공연이 이루어지는 주점들과 식당들이 관광객들로 넘쳐났다.
우리는 음식백화점으로 들어갔다. 아내와 돼지고기 육수 국물의 쌀국수, 게딱지밥, 찹쌀떡을 사서 먹었다. 쌀국수의 국물이 시원하여 역시나 맛있었다.
인파 속에 묻혀 우리는 다시 북쪽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 걸었다. 옷, 장신구, 은제품, 미얀마의 원석을 가공하여 파는 옥, 잡화점, 관광업체 등의 가게들이 좁은 골목길 양쪽에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경쾌하고 신명 나는 북소리가 들리는 가게에서는 아프리카의 손으로 두드리는 북을 두드리며 팔고 있다. 고풍스러운 골목길의 이층 가게들을 은은하게 밝히는 주황색 조명이 나그네의 마음을 한없이 아늑하게 하였다. 등을 파는 가게에 들어가 천정에 달린 초롱을 하나 사서 우리집에 달고 싶었지만 아내의 반대로 생각을 접었다. 나시족 문자들이 초롱에 쓰여 있어서 이곳 리장 고성의 풍취를 여행 후에도 오래 전해 줄 물건이었다. 조명이 얼마나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인지 실감하는 밤이었다.
인도, 티베트와 중국 대륙의 중간 지점에 자리 잡은 리장이니 불교문화도 발달한 곳이다. 고성에는 절도 있고 염주와 침향(沈香)과 전단향(栴檀香)과 백옥 불상을 파는 범어선심(梵語禪心)이라는 이름의 가게도 보인다. 범어는 인도에서 들어온 산스크리트어 불경을 뜻하고 선심은 중국 문화 풍토가 낳은 선종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국과 티베트, 인도의 중간에 위치한 리장의 불교문화를 표현한 것이다.
나시족의 문자를 붓으로 써서 파는 가게에 들어가 기념품을 한 점 샀다. 조종림(趙鍾林)이라는 나시족 서화가의 작품을 그의 아들이 팔고 있었다. 발우를 들고 육환장을 짚고 있는 아난존자상, 연꽃 자리에 결가부좌하고 앉아 법륜을 손에 들고 있는 관세음보살상, 구름에 앉아 하늘을 날고 있는 보살상은 색이 매우 깊이가 있고 풍요롭고 신비감마저 돌아서 고풍스러움이 우러났다. 나는 나시족 고유의 동파종이에 나시족의 상형문자인 동파문자와 한자로 쓴 서예 한 점을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60위안 주고 에누리도 하지 못하고 기념품으로 샀다. 동파문자가 나시족의 본거지인 리장고성 여행의 풍물을 잘 전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동파문자로 쓴 시의 내용은 시경(詩經)을 인용하여 여강의 옥룡설산과 금사강을 표현한 아름다운 대련이었다. <사진2>
金沙江畔看魚躍(금사강 언덕에서 물고기가 뛰는 것을 보고,)
玉龍山下聽鹿鳴(옥룡설산 아래에서 사슴 울음소리 듣네.)
골목길을 빠져 나가니 넓고 곧게 뻗은 도로가 나왔다. 버드나무 가로수 밑으로 설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풍부한 도랑이 있었다. 버드나무 아래에는 새붉은 튤립, 노랑, 보라 빛깔의 벤지꽃이 심어진 화분이 놓여 있다. 서쪽 언덕 위에도 아늑한 불빛 조명이 밝혀진 건물들이 빽빽하다.
리장 고성을 걷노라니 90년 전 조부가 어린 선친을 위해 이틀 만에 썼다는 천자문을 들고 외우던 어릴 적 일이 생각난다.
“金生麗水(금은 여강에서 나고) 玉出崑崗(옥은 곤륜산에서 나온다.)”
사금이 나는 금사강이 흐르는 여기 여강은 천자문을 외던 어린 나의 마음속에서 아련하게 자리 잡은 알지 못할 곳에 있는 이상향이었다. 어른이 되어 지금 내가 걷고 있는 현실의 이 리장은 여전히 아늑하고 정겹고 고풍스러워서 꿈속에서 거닐고 있는 것만 같았다.
도로의 끝머리에 광장이 있고 그곳에 커다란 물레방아 바퀴 두 개가 물살에 천천히 돌고 있었다. 그 곁에는 고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을 기념하여 고성의 내력을 새긴 비가 절벽에 새겨져 있었다.
고성은 송말원초에 형성되었는데 티베트, 쓰촨, 쿤밍을 연결하는 차마고도의 중요한 마을로 면적은 3.8평방 킬로미터이고, 오늘날 6,000여 집에 3만 명의 인구가 산다. 리장은 나시족이 바이족, 티베트 민족, 한족의 문화를 흡수하여 다채로운 문화를 꽃 피운 곳이다. 상형문자인 동파문자와 나시족의 전통음악은 세계문화사의 진기한 꽃이다. 1997년 12월 4일에 고성의 800년 유구한 역사, 독특한 풍경, 찬란한 문화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언덕을 따라 난 골목길 좌우에도 이층의 기와지붕 목조 건물의 작은 가게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고 관광객이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다. 흑설탕으로 만든 떡을 파는 가게에서 떡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이국의 맛을 보고, ‘그해에 우리는 리장에 있었다(那一年我們在麗江)’라는 간판이 걸린 선술집 대문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직물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나시족 여인이 베틀에 굵은 양모 실을 걸어놓고 북을 왕복하며 천을 짜고 있었다. 거리가 넓지 않고 직선이 아니며 조명을 받아서 아늑하고 고풍스러운 골목길을 말이 통하지 않는 이방인과 섞여서 걷자니 마음은 더 없이 행복해진다.
언덕에서 내려와 아래쪽 길로 접어들자 좁은 개울의 좌우에 주점들이 줄을 이어 자리 잡고 있었다. 술집들마다 손님이 북적였다. 큰 가게 안에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중앙의 무대에는 사이키 조명 아래서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젊은 여자가 춤을 추며 지나가는 손님을 유혹하였다. 어느 주점의 문에는 ‘일본놈과 개는 들어오지 말라(日本人與狗禁止入內)’고 하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한국과 중국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만행으로 얼마나 참담한 고통을 겪었는지 새삼 느끼게 하였다. 리장의 밤은 음주가무가 쾌락과 환락의 욕망을 먹으며 깊어가고 있었다.
술집과 카페와 음식집이 물길 좌우에 즐비하였다. 고성의 야경과 풍취를 만끽하고 나니 다리가 아파왔다. 우리는 이십대 청춘 남녀가 운영하는 작은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쉬었다. 가게의 구석에 놓인 작은 집 안에는 고양이가 졸음에 겨워 잠들어 있었다. 커피 원두를 담은 통에 윈난의 풍물을 그려 놓았다. 예로부터 차가 많이 생산되는 윈난에서 오늘날엔 커피도 많이 재배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3>
사방가를 지나서 대석교(大石橋)라는 이름의 무지개다리가 있었다. 나시족 여인이 큼지막한 종이 연꽃에 촛불을 켜서 팔고 있었다. 부모 따라 온 예닐곱 살 먹은 여자 아이가 그 등불을 사려는 듯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온다. ‘지금 극락세계의 하룻밤을 보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스쳐간다. 개울에 놓인 반달 모양 작은 돌다리의 그림자가 물에 투영되어 수면에 보름달이 떠있다. 사람들이 띄워 놓은 연등이 물길 따라 아늑한 불빛을 내며 흘러간다. 버드나무 가지 밑에서 물 위에 놓인 연등을 바라보자니 이방의 몽환적인 밤거리를 거니는 시간이 짧게만 느껴졌다. 고성의 밤거리를 발바닥이 아프도록 걷고서 열두 시가 넘은 시각에야 우리가 투숙한 호텔로 돌아왔다.
리장의 아침
아침을 먹으러 별채에서 식당이 있는 본관으로 갔다. 마당의 키 큰 매화나무 가지마다 여린 꽃이 피어나 있고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가 맺혀 있다. 홍매와 백매가 한 나무에 같이 피어나 있어서 볼수록 신비하였다. 겨울이라 하지만 리장 고성에는 봄날이 찾아온 것이다.
호텔 식당에서 쌀국수 미센(米線)으로 아침을 먹었다. 오늘은 10시경에 출발하여 옥룡설산을 관광하기로 일정이 잡혀 있었다.
미옥 씨가 사전에 알아온 관광정보대로 만고루(萬古樓)를 찾아 나섰다. 어제 밤에 걸었던 기다란 골목길을 따라갔다. 간밤의 조명도 없고 길을 가득 메우던 관광객도 자취를 감추었다. 길바닥은 벽돌모양으로 다듬은 돌을 박아 놓았고 가게들은 여러 개의 나무 문짝으로 닫아 놓았다. 길바닥의 박석은 수도 없는 발걸음에 닳아 윤기마저 난다. 오랜 세월 동안 이 길에서는 티베트 샹그릴라로, 라사로 떠나던 말발굽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문짝에는 복자가 거꾸로 붙어 있다. 복자를 거꾸로 붙인 것, ‘도복(倒福)’은 복이 들어오도록 하려는 것, 도복(到福)을 위해서이다. 가게로 일터로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이고 한 무리의 중국인 관광객은 아침밥으로 길거리에서 김이 나는 만두를 사 먹고 있었다.
설산어객잔(雪山語客棧) 벽에는 차마고도의 가파른 협곡을 오가는 마방의 행렬을 그려놓았다. 긴 문장의 화제(畫題)에는 논어의 허두에 나오는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벗이 있어서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고성에는 지하수로가 뻗어 있고 곳곳에 수로의 덮개를 들어내어 사람들이 우물로 이용하도록 해 놓았다. 삼안정(三眼井)이라고 하는 우물은 상중하로 나누어 위쪽은 식수로 이용하고, 가운데는 채소를 씻으며, 아래쪽은 빨래를 한다. 골목길을 걸어가다 보니 석류정(石榴井)이라는 이름의 우물이 있었다. 우물을 사이에 두고 석류정객잔과 청천거(淸泉居)라는 간판이 걸린 여관의 대문이 마주하고 있다. 석류정객잔의 마당에는 대나무를 심어놓아 운치가 있다. 마치 동화 속에서나 나올법한 아담한 이층 객잔에서 하룻밤 묵으며 고성의 정취를 만끽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겼다.
1997년에 만들어진 밍총(茗虫)이라는 브랜드의 차를 도매하는 집도 보인다. 밍총은 명나라 초기에 리장의 목씨(木氏) 토착 정부(土司)가 황실에 조공(朝貢)했던 최상급의 진기한 설차(雪茶)인데 옥룡감로(玉龍甘露)라고도 부른다. 옥룡감로는 해발 4,000미터 이상의 고산에서 자라는 이끼류를 말려 만드는데 차를 대신하여 진상된 것이라 한다.
입구의 흰 벽에는 동파문자가 가득 쓰여 있다. 리장의 해와 달과 별과 새와 벌레와 가축과 사람이 차나무를 키워내는 것을 표시하는 상형 문자들이다. 보이차(潽洱茶), 백설차(白雪茶), 고수차(古樹茶), 후과차(猴㧓茶), 화차(花茶) 같은 말이 적혀 있다. 티베트 고원의 말과 무역했던 전통 차가 오늘날 상품으로 제조되어 팔리고 있는 것이다. 문자의 맨 끝에는 오도(悟道)라는 문자가 적혀 있다. 중국의 차가 인도의 불교와 결합되어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키는 경지로 승화된 차 문화를 보여주었다.
좁은 골목을 한참 걸어가자 우체국이 나오고, 그 옆에 사자 석상이 지키는 벽돌로 쌓은 큰 문이 있었다. 문에는 관문구(官門口)라는 금색 글자가 새겨진 돌이 박혀 있었다. 리장 고성의 관부(官府)로 들어가는 문이었다. 문 안으로 걸어 들어가니 골목 끝에 목조 패방이 서 있었다. 붉은 기둥과 단청을 입힌 문미(門楣) 위로 기와지붕을 올린 3칸의 목조 패방이 서 있었다. 패방에는 천우유방(天雨流芳)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천우유방’은 리장 말로 ‘독서하러 가자’라는 뜻의 말을 한자 소리로 표기한 것이라 한다.
패방을 지나자 작은 광장이 나타났다. 리장의 목씨 토착 정부인 목부(木府)이다. 입구에는 네 마리 석조 사자상이 기둥 아래에 놓여 있고 이층 지붕의 3칸의 석패방이 서 있다. 금빛의 반듯한 해서체 글씨로 위에는 성지(聖旨), 아래에는 충의(忠義)가 새겨져 있었다. 성지는 명, 청 황제의 정치를 표시하고 충의는 리장 사람들의 황제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광장에는 2015년 9월 19일 오전에 강음시(江陰市) 오승(梧塍)의 서씨 종친 대표와 목씨 종친 대표가 세운 서하객목증소상(徐霞客木增塑像)이 있었다. 상투를 드러내고 오른손에 두루말이 원고를 들고 있는 사람이 평생 천하를 주유하고 엄청난 분량의 여행기를 남긴 명나라의 여행가인 서하객(1587-1641)이고, 관모(冠帽)를 쓰고 인자한 얼굴로 손님을 맞이하는 사람이 리장 나시족의 토착 정권인 목부(木府)의 토사(土司)인 목증(1587-1646)으로 보였다. 두 사람은 동갑이었고, 후손들에게도 선조의 우정이 이어지고 있었다. 목부 앞의 백색 벽에는 “宮室之麗 擬於王者(궁실의 화려함은 제왕과 겨룰만하다.)”라는 서하객유기(徐霞客遊記)의 한 구절을 붙여 놓았다.
목부 안내판을 읽어보았다. 1382년에 처음 세워졌는데, 터를 잡을 때 서쪽의 사자산 아래에 목부가 자리 잡고 북, 동, 남 세 방향에는 성을 에워싸는 물길이 있는데 풍수 이론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청 나라 함풍, 동치 연간에 전쟁으로 대부분 불타고 뒤에 중건했다. 3만 평방미터의 터에 동서 369미터의 중심축에 패방, 의문(儀門), 의사청(議事廳), 만권루(萬卷樓), 호법전(護法殿), 광벽루(光碧樓), 옥음루(玉音樓), 삼청전(三淸殿) 등의 건축이 왕의 궁궐처럼 베풀어져 있다. 목부의 북쪽 옆에는 역원(驛院)으로 쓰인 건물이 붙어 있고, 부근에는 목씨 가족이 거주하는 3개 정원을 가진 목가원(木家園)이 있다.
목증은 자가 장경(長卿)이고 호는 화악(華岳) 또는 생백(生白)이며 나시족 이름이 아택아사(阿宅阿寺)이다. 11세에 부친에게 세습 받아 리장의 19대 토사(土司)가 되었다. 운남의 토사 중에서 중원문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인물로 평가되며 그의 초상이 남아 있다. 운과담묵집(雲簻淡墨集), 소월함(嘯月函), 산중일취집(山中逸趣集), 지산집(芝山集), 광벽루선초(光碧樓選草) 등의 저서를 남겼다.
서하객유기에 의하면 서하객은 1639년 정월 29일에 흑룡담(黑龍潭)에 있는 해탈림(解脫林)이라는 절의 별장에서 쉬고 있던 목증을 문관, 무관 두 명의 대파사(大把事-관리)의 안내를 받아서 만났다. 서하객은 목증의 정성스러운 환대를 받으며 그의 문집을 정리하고 그의 아들에게 문장을 지도하였다.
우리는 목부 옆의 옥을 파는 가게를 지나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목부 뒤의 사자산 정상에 세워져 있는 누각으로 다가갔다. 큰 저택의 검은 벽돌로 쌓은 대문의 좌우 기둥에는 새해를 맞이하는 붉은색 바탕에 금색 무늬가 있는 종이에 쓴 춘련(春聯)이 붙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대련이었다. ‘春風大雅能容物, 秋水文章不染塵(봄바람 닮은 아량은 만물을 품고, 가을물 같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네.)’. 주인의 서예 솜씨가 달필이다. 청의 등석여(鄧石如)가 서재에 붙였던 대련인데, 추사가 만년에 쓴 걸작이 전하고 있다. 아치형의 대문 머리에는 ‘春和景明(봄이 화창하고 경치가 밝다.)’이라 써 붙였다. 열린 대문 사이로 세워놓은 자전거가 보였다. 제법 넓은 골목으로 더 들어가니 ‘麗江古城圖書館(여강고성도서관)’이라는 간판이 붙은 기와집이 있었다. 단청을 입힌 솟을 대문에는 ‘天雨流古’라고 쓴 현판이 붙어 있었다. 더 안쪽에는 금박을 입힌 붉은 종이에 해와 달의 신을 좌우 대문에 붙여 놓았고 문미에 ‘余家花園(여가화원), YUS GARDERN INN’이라는 현판을 붙인 저택이 있었다. 열린 대문 사이로 대숲이 보였다. 운치 있는 이런 여관에서 하룻밤 묵으며 고성의 정취를 만끽할 여유가 없어서 아쉬웠다.
좁다란 골목을 지나서 계단이 있는 가파른 길을 올랐다. 좁은 길 좌우에는 관광 상품을 파는 가게들이 즐비하였다. 문 위에 獅子山(사자산)이라는 큰 간판을 붙인 입구에서 1인당 30위안을 주고 입장권을 사서 셋이서 솔숲이 있는 공원 안의 누각으로 향하였다. 그곳은 만고루경구(萬古樓景區)였다. 단청이 곱게 입혀진 작은 문을 들어가자 좌우에 키가 큰 소나무와 히말라야시타 나무가 도열해 있는 계단길이다. 정면에는 하늘 높이 웅장하게 솟은 오층 누각인데 입구에는 동파문자로, 오층에는 한자로 萬古樓(만고루)라는 편액을 걸어 놓았다. 누각의 내부를 돌아 위층으로 올라갔다. 한참 만에 오층에 올라 기둥 난간에 서서 바깥 풍경을 굽어보았다. <사진4>
고성의 사방에는 산이 에워싸고 아침 안개가 희부옇게 깔린 동남쪽 멀리 강물이 아득히 보였다. 빈틈없이 들어선 목조 전통 집들의 기와지붕이 마치 바다의 만경창파에 자맥질을 하는 고래떼 같다. 고개를 돌려 북쪽으로 바라보니 이마에 흰 눈이 덮인 웅위장려한 옥룡설산의 봉우리가 옅은 구름 아래에 우뚝 서 있어서 성스럽기 그지없었다. 일생에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만고에 희유한 풍광이었다.
서하객은 여행기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설산이 겹겹의 움푹한 평지 너머에 바라보였다. 흰 눈이 설산의 꼭대기에 장막을 두르고,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맑고 투명한 빙설은 보이지 않았다. 통사의 작은 누각에서 북쪽의 설산을 바라보니 희미해졌다 나타났다 한다. 남쪽의 하천과 들판을 살펴보니, 복숭아꽃과 버드나무가 어지럽다. 이 때문에 한 잔 가득 술을 들이켰다.”고 하였다.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는 중국인 청춘 남녀에게 부탁하여 기념사진을 남겼다. 일정에 쫓겨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사자산 만고루를 돌아 내려왔다.
벌써 골목마다 관광객들이 강물처럼 흘러넘쳤다. 돌다리가 놓인 큰 수로가 있는 제법 큰 광장에 오니 대리에서 보았던 앵화옥김(櫻花屋金)이라는 한국인이 경영하는 주점 간판이 보였다. 서둘러 호텔로 돌아오니 일행은 벌써 옥룡설산으로 출발하려고 로비에 나와 있었다.
고성으로 설산의 물을 공급하는 호수인 흑룡담(黑龍潭)공원이 고성의 북쪽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청나라 건륭2년(1737)에 조성된 흑룡담은 건륭 60년, 광서 8년에 중수하였고 옛 이름이 옥천흑왕묘(玉泉黑王廟)이다. 청 가경, 광서 두 황제가 용신(龍神)으로 책봉하여 뒤에 흑룡담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다. <사진5>
가이드가 입장권을 사는 동안 아침의 차고 시원한 공기 속에서 기다리다 화장실에 들어갔다. 소변기 위에 액자가 있어서 보니 “上善若水(상선약수), 厚德載物(후덕재물)”이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구절이다. 동파문자로 크게 쓰고 그 밑에 한자도 나란히 써 놓았다. 흑룡담은 설산에서 마르지 않는 맑은 물을 저장하였다가 고성으로 물을 공급하니, 노자에 나오는 ‘上善若水(제일 좋은 것은 물과 같다.)’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흑룡담은 땅에서 물이 용솟음친다. 주역의 “天行健, 君子以自强不息(하늘의 운행이 꿋꿋하니 군자가 이 괘의 이치를 살펴서 스스로 꿋꿋하게 실천하여 쉬지 않는다.(건괘); 地势坤, 君子以厚德载物(땅의 형세가 곤이니 군자가 이 괘의 이치를 살펴 두터운 덕으로 만물을 싣는다.(곤괘)”에서 취한 ‘厚德載物’이라는 말이 흑룡담의 경관을 표현한 인문(人文) 이었다. 흑룡담에서 돌아 나와 백사향(白沙鄕) 벽화 마을을 지나서 옥룡설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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