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7 성공과 회복원칙(27) 생명의 부활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에게만 있다 [고전15:12-24]24.7.7.주일1부-3부설교
지난 한 주간 같은 지방회 교회 목사님의 사모님이 소천하셔서 장례를 치루게 되었습니다.
64세로 소천하시기전 10여 년을 뇌출혈로 쓰러져서 의식불명의 상태로 계시다가 소천하신 것입니다.
가족들과 성도들의 슬픔 속에서 장례를 마쳤는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가족들과 성도들이 그렇게 침울해하거나 오열하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들의 신앙의 뿌리 깊은 곳에 ‘부활 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특별한 은혜인 ‘부활 신앙’ 즉 ‘다시 살아난다’는 신앙이 있다 보니까 지금은 잠들어 있는 것이요, 예수님 재림하실 때 다시 깨어나서 다시 만날 소망으로 가득하니 그렇게 슬퍼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에게 주신 부활 신앙의 소중함을 다시금 소중한 선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이시간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부활 신앙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왜 우리는 이렇게 죽음과 슬픔이 많습니까? 우리는 왜 죽어야 합니까?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삶의 소망을 잃은 사람 이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죽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는 죽음은 원래 우리가 감당할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께서 처음 지으셨을 때는 죽지 않도록 만들어진 존재였습니다.
우리는 죽지 않을 몸을 가지고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와서 우리에게 죽음과 사망을 가져온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타락한 죄의 대가로 사망이 인류를 지배하게 된 것입니다. 원래 죽음은 우리와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죽음이란 자연법칙이 아닌 죄 때문에 우리에게 들어온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처음사람은 원래 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죄 때문에 죽습니다.
로마서 5장12절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기록하였으며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죄를 짓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시고 지구에 사람이 꽉 들어차면 또 다른 지구를 만드시고 또 다른 지구를 만들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값으로 사람들은 이 땅에서 사람들은 일반이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일지라도 그 짧은 인생 동안에도 슬픔과 고통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 버리고 이 땅에 육신을 입으시고 오신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죽음에서 건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죽음에서 쉽게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죽음을 가져온 원인인 죄를 청산해야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류의 죄를 청산하시고 죽음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은 죄 없이 잉태되셨고 태어났기 때문에 예수님은 죽을 수가 없는 몸을 가지고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 죽으셨을 까요?
그것은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짊어지고 죽으신 것입니다.
2.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님
예수님의 죽음은 억울한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지은 적이 없으므로 죽으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고난은 인류를 대신하여 죄와 사망을 지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을 보면 예수님과 사랑하는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의 가정에서 죽음과 부활에 대한 논쟁이 나사로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멀리 갈릴리에 가 계실 때 예루살렘에서 한 5리쯤 되는 동구 밖에 살고 있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의 집에 불행이 다가왔습니다. 나사로가 병에 들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신속히 소식을 보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는 것은 그 당시 하도 허다한 사건이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3년 동안 사역한 온 이스라엘 땅의 의사요 병원과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병자를 고쳤습니다.
그러므로 마르다와 마리아와 그 아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틀림없이 뛰어 오셔서 고쳐주실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그 소문을 듣고도 그대로 갈릴리 땅에서 이틀 동안 더 머물렀습니다. 그냥 기다린 것이 아니라 나사로가 완전히 죽기를 기다렸습니다. 온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이 다 나사로가 죽었다는 것을 알도록 기다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려고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곧 부활이요 생명인 것을 모든 사람이 깨달아 알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이미 무덤에 장사 지내 썩은 냄새가 나는 곳으로 제자들을 데리고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셨다는 말을 듣고 마르다는 마음에 아주 한이 서렸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어떻게 그렇게 무정할 수가 있습니까?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리가 병들었다는 소리만 들어도 뛰어오실 줄 주님이 기다리는 우리를 더 내버려 놓고 죽어서 냄새가 나도록 무덤에 파묻고 난 이후에 오셨습니까?’하는 마음으로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통곡을 하고 울며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 내가 아나이다”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지금’이 아니라 ‘마지막 날’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오라비 나사로가 바로 ‘지금’ 살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고 반문하셨습니다.
이때 급히 달려온 마리아도 언니 마르다와 죽은자가 어찌 살겠느냐는 뜻으로 탄식을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비통하시고 분노하셔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때 쓰신 “비통히 여기시고”는 헬라어로 “엠브리 마오바이”로 쓰여졌는데
“분노하다”“콧김을 내 품다”라는 뜻입니다. 급히 달려온 말이 거침 숨을 콧김에서 내 품는 것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부활신앙을 믿지 못하면 예수님은 오늘도 비통해 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흘 전에 예수님이 오셨으면 기적을 행해 주셨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현재 자신들 앞에 있는 예수님은 믿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녀들에게 예수님은 나흘 전에는 권세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지금 죽음이라는 현실에 부딪혀 그렇게 할 수 없는 줄 압니다. 그렇지 않으면 장차 부활의 날에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그날이 언제일지는 몰라도 지금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녀들은 지금의 예수 그리스도에게 완전히 무력한 허물을 덮어 씌웠습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그녀들과 동일한 잘못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우리도 과거의 예수님에 대해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말을 합니다.
과거에 예수님은 죽은 자까지 살리셨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과거에 위대한 능력을 행한 예수님께서 오늘은 역사하지 않으십니까? 맞습니다.
예수님은 장차 구름타고 오시고 죽은 자를 다 살리실 것입니다. 그런데 장차 올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오늘은 어떻게 행사십니까? 오늘은 모르겠습니까? 그러면 과거의 예수님과 미래의 예수님은 계셔도 오늘의 예수님은 없습니까?
이것이 오늘날 우리 교회들의 큰 문제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살아계시지 않다면 우리는 죽은 예수님을 모시고 무엇을 한다 말입니까?
오늘날 세계 모든 종교는 종교를 창시한 자들이 다 죽었습니다. 종교는 남아있거니와 창시한 자들은 죽는데 예수님도 죽었다면 기독교도 그와 똑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예수님은 과거에도 계셨고 미래에도 계실 분이지만 바로 지금 이곳에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십니다.
예수님은 주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하는 마리아와 마르다를 보시고 비통히 여기시고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하시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나사로의 무덤으로 찾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몰인정한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참으로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와 나사로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진실로 통곡을 하고 우셨고 울기만 한 것이 아니라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이 그리고 이웃들이 자식을 잃고 슬픔 가운데 있을지라도 우리 예수님께서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고 위로의 손길을 내밀어 어루만져 주실 것을 믿습니다.
3. 예수님에 대한 예언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600여 년 전에 예수님의 탄생과 고난에 대해 먼저 예언했습니다.
그 예언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 고통을 당하고 죽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 죽음 우리 죽음! 예수 무덤 우리 무덤! 예수 부활 우리 부활! 예수 승천 우리 승천! 이 일을 이뤄내시기 위해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예언한 말씀을 깊이 간직하고 생각해야 됩니다.
이 예언은 바로 현재 살고 있는 지금 우리를 위한 예언입니다.
이사야 53장 1절로 7절은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라고 기록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걸머지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당한 그 고통과 괴로움은 하나도 남김없이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의 고통 받은 것을 알게 되면 우리의 미래는 오늘보다 영화로운 날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지고 다음 달은 이번 달 보다 나아지고 내년은 금년보다 영원한 미래는 지금보다 나아지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 대신 고통을 다 당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류 새로운 조상으로 오셨습니다. 옛 인류의 조상은 아담이고 새로운 인류의 조상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인류의 조상으로 와서 우리에게 의를 주시고 용서를 주시고 치료를 주시고 축복을 주시고 영생 복락을 주신 인류의 조상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103편 1절로 5절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노래로 예수님을 생각해야 됩니다.
새로운 인류의 조상은 우리에게 이렇게 영원한 새로움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 인류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소식은 그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소식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사망과 죽음의 권세에 눌려있지 않습니다. 생명의 근원자로서 우리에게 와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감사하고 찬미할 때 우리 안에서 예수님의 생수가 넘쳐나고 생기가 넘쳐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로 8절에서 바울은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은 지금은 성령으로 살아계셔서 우리 곁에 있습니다.
[예화]
이슬람교에서 개종하여 예수님을 영접했던 한 그리스도인은 인터뷰에서 “예수님을 영접한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저는 인생을 살다가 길을 잃어버려 방황을 하며 살았습니다. 한참을 방황하던 중 두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죽어 있었고 한 사람은 살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길을 묻는데 죽어 뻗어있는 사람에게 길을 물을까요? 살아있는 사람에게 길을 물어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살아있는 사람에게 물어봐야겠죠? 그 살아있는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저는 과거에는 죽은 사람에게 내 인생의 길을 물었습니다. 전에는 마호메트에게 길을 물었으나 그러나 이제는 살아 계신 분 예수님에게 내 인생을 맡기고 살기로 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예수님을 선택한 이유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기독교는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는 창시자를 믿는 유일한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 계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2절로 44절 그리고 58절은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 기록합니다.
육체의 세계는 먹고 입고 마시고 세상적으로 활동하나 기적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 꿈을 가지고 있고 믿고 말을 통해 없는 것을 있게 하고 기적을 베풀고 영광을 성취하는 위대한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그 안에 영이 살아있기 때문에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영이 죽었기 때문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잡혀 육신이 끌려다니지만 큰 기적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을 긍정적으로 하면 우리 생각 속의 영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자유를 소유케 하십니다.
우리가 꿈을 꾸고 있는 그 꿈을 계속해서 꾸고 있으면 영이 그것을 이뤄주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기적을 믿게 되고 결국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우리가 바라는 것을 입으로 시인하면 그 입술의 말을 통해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만약 부활이 없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자기가 생명을 바쳐 전하는 복음은 헛된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도 헛된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나 바울을 포함한 모든 사도들은 사기꾼이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된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은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4장13절-17절에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예화]
2023년 사망자 수는 35만 2천 7백 명 입니다. 하루 평균 966명, 시간당 146명이 병원이나 집 그리고 거리에서 죽었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항상 우리 곁에 있으며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언제 우리의 차례가 올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으로 태어나서 구원도 받지 못하고 살다가 지옥으로 쓰레기더미처럼 밀려간다는 것은 너무나 비참해서 생각하기조차 끔찍합니다.
[예화]
지난 7월 1일 밤 9시경, 서울 중구 시청역 7번출구 인근 교차로에서 역주행한 승용차에 의해 시민 9명이 숨지고 4명이 다치는 교통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경찰은 가해 차량인 제네시스 운전자 남성 A(68)씨를 검거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끔찍한 사고요, 황망한 사건입니다. 저는 거기에서 순간적으로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자기 목숨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구나! 라는 사실이요, 또 하나는 갑자기 죽을 수도 있구나! 라는 사실입니다.
회개 없이 죽을 수도 있구나! 라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은 자로 사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고 회개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결과는 영생과 영벌로 나뉘어 지는 것입니다.
예수안에 있는 자에게는 생명의 부활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밖에 있는 자는 심판의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셨으므로 부활의 소망이 있는 우리는 남녀노소나 빈부귀천 할 것 없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어떤 고통과 죽음이 다가와도 즐거이 감당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항상 계시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우리는 승리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23절을 일겠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생명의 부활, 영생의 부활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에게만 이루어지는 특별 은총인 것입니다.
예수 안에 거하기를 힘쓰십시요! 그래야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 살기를 힘쓰십시오! 그래야 예수 재림의 순간에 들림을 받는 은총을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요한복음15장 4절과 10절에 해답이 있습니다.
4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10절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살아가는 삶이 곧 예수 안에 거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오늘 살아가는 분초 분초마다 예수 안에 살아가는 사람에게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다같이 찬양 –나를 사랑하는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