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연속되는 전투 ---> 노래 [2]
서먹서먹한 가운데 우리 일행은 저녁때가 되어 한 작은 마을에 도착했다. 흠..
이곳에서 물건을 보충하고 이제 저기로 올라가면 되는구나. 그런데.. 노을이 참 아름답다.....
서쪽하늘로 지고 있는 해는 붉은 노을을 만들고 있었다. 그것을 멍하게 바라보던 나는 세리스의 재촉에 못 이겨 더 이상 노을을 보지 못하고 따라갔다. 도대체가 분위기가 없어요. 분위기가.
우리는 한 작은 식당 겸 여관으로 들어갔다. 방을 잡던 우리는 이곳에 목욕탕이 있다는 것을 알고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남탕 안.
목욕탕 안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눈을 크게 떴지만, 난 별 상관하지 않았다. 자, 얼굴을 씻고, 샤워를 하고....
"에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한숨소리. 흐음..... 이거, 좀 불쾌한데. 날 바라보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 남자가 보였기 때문이었다. 무시할까...
뜨거운 물 속에 들어가서 몸을 뉘였다. 하아.. 시원하군. 워낙에 깨끗해놔서 때가 없지만, 그래도 피로가 싸악 풀리는 게 기분이 무지 좋다.
함께 열탕으로 들어온 라인은 날 바라보고는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에? 왜 저래?
저렇게 가는 눈으로도 사물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놀랍군.. 음..
"라인,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에... 아, 아, 아무것도 아냐..."
그렇게 말하곤 바로 열탕에서 빠져나가 버리는 라인. 흐음... 이거, 그렇게 빼면 더 궁금해지잖아.. 좋아, 내 특기인 아양으로 불게 만들어주지.
라인의 뒤를 따라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잉~! 라이~인. 그렇게 빼면 궁금해지잖아~앙."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조용해지는 주위.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눈초리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에...?...
"죄, 죄,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쏜살같이 내빼는 라인. 그는 탈의실로 나가더니 그대로(?) 밖으로 달렸다. 라, 라인. 옷은 입어야지.....
곧 바깥에서는 약간 듣기 거북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크아아악!!"
저런... 쯧쯧..
식탁에 앉아 음식을 시켰다. '사람들이 많아서 조금 늦게 나올지도 모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가더니, 정말로 늦게 나온다. 하아...
갑자기 한곳에서 터져 나오는 사람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 무슨 일이라도..
어차피 음식도 늦게 나올 건데, 구경해둬서 나쁠 건 없지.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다른 녀석들은 별 관심이 없는 듯, 서로 이야기를 하느라 바빴다.
흐음.. 나 혼자 갔다 와야지.
어차피 한 건물 안이지만, 그래도 여기서는 저 근육질 아저씨들에게 막혀서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굳이 일어나서 구경을 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럼... 못 부르는 솜씨지만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에? 여자인가? 난 사람들의 틈을 파고 들어서 드디어 앞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음유시인인가? 하프를 들고는 머리카락을 스윽 올리더니 노래를 불렀다.
뭐랄까... 애절한 사랑의 노래랄까... 대충 내용을 대면 예전에 용사가 있었는데, 마왕을 물리치려 떠나기 전날, 공주와 나누는 대화가 주된 내용이었다. 혹시 그 용사... 마왕 물리치러 가기는 죽어도 싫은데 결혼시켜 준다는 왕의 말에 솔깃해서 간 거 아닐까....
모르지. 정말로 정의감에 불타서, '마왕이란 존재는 용서할 수 없다~~!'라고
되뇌이면서 마왕 토벌하러 갔을지.
난 그런 거 정말 싫은데.. 선이니, 악이니 하는 극단적인 것 말이야. 공존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옛날이야기를 들어보면 가만히 있는 마왕의 집에 먼저 쳐들어 간 것은 거의가 용사란 작자다.
물론 마왕의 부하들이 살생을 많이 하던지 했다고 하는 이유가 있지만, 그것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다. 죄를 지은 것은 마왕의 부하지, 마왕은 아닌 것이다. 마왕이 명령을 내렸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하에 공격해 들어가서는, 기사도가 어쩌고 저쩌고 주절거리면서도 떼로 덤벼든다. 그게 용사란 놈들이다. 뭐, 드래곤 슬레이어도 거의 마찬가지지만.
만약 마왕의 부하가 지금 현재 마왕을 몰아내고 그 권위를 차지하려고 일부러 그렇게 했다면 마왕은 정말로 불쌍하지 않겠는가? 가만히 집에서 편안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자칭 용사란 놈들이 대문을 부수고 들어오더니, '마왕은 정의의 심판을 받으라'고 외친다면 마왕은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남의 집에 무단침입, 기물파손, 공갈 협박(?) 죄로 고소당해도 할 말 없는 것들이, 도리어 그 집주인을 죽이려고 한다면, 그건 또 무슨 모순이냐고.
동쪽에서 뺨맞고 서쪽에서 화풀이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어쩜 그렇게 뻔뻔스럽게 남의 집 대문을 넘어서 그 집의 주인을 죽이려고 하다니...
그리고 또, 꼭 마왕이 정당방위로 한 대 툭치면 지가 약한 건 생각도 못하고
'으윽, 당했다...'고 하는 건 뭐냐? 마왕이 암수를 쓰는 것도 아니잖아? 물론 함정을 사용하긴 하지만 그건 너무나도 빈번하게 용사라고 자칭하는 것들이 덤벼오니까 만들어 놓은 것이 대부분이라더라.
솔직히 마왕에게 잘못이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야. 부하 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마족과의 계약을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잖아? 자신의 몸속에 쌓은 마나를 바탕으로 거래를 하는 것일 뿐인데, 그게 뭐가 잘못이라는 거지?
그렇게 따지면, 살해 무기의 하나에 속하는 검을 익히는 것이나, 마법을 사용하는 것, 그리고 신족의 힘을 빌리는 것도 잘못인 것인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 새 음유시인의 노래는 끝났다. 어느 정도 부르긴 했지만 그리 애절한 사랑노래는 아니었다. 엔딩은 거의 모든 노래가 그렇듯 '용사는 마왕을 물리치고 돌아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였다.
그 사람의 마음에 들어가 보기라도 했나? 어떻게 행복하다고 하는 거지? 그 사람이 정말 사랑하는 여자는 따로 있는데, 왕이 공주와 결혼 안 하면 그 여자를 죽이겠다고 협박해서 억지로 같이 살았을지도 모르잖아. 물론 극단적인 경우의 한 경우지만..
훗.. 그래, 이게 다 무슨 상관이냐... 난 그냥 내 식대로 살면 되는 거지...
그러면서 난 나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것도 웃음소리를 꽤 크게 내면서.
"후후후후..."
주위에 서서 노래를 듣고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된 남자들은 용케도 그 소리를 듣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 이게 아니었는데...
"이 녀석이 어디서 비웃는 거야?!"
에... 비웃은 건 아닌데.......... 내가 머뭇거리고 있자 그 음유시인 여자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남자는 피식하고 웃으며 말했다.
"후훗... 노래도 못 부르는 녀석이......"
저게... 감히......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려는 것을 '참자'란 말을 되뇌어서 간신히 부여잡았다.
"푸하하하하핫!!"
하지만 그것은 주위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그 순간, 뚝 하고 끊어져 버렸다.
탕!
그 남자가 앉아 있는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그 서슬에 놀라 말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 난 그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내가 부른다면 어떻게 하겠어?"
"뭐라고? 이게 감히 어디서 반말을...!..."
이 녀석.. 카나드라인에 있던 그 망나니 황태자를 따라다니던 뚱땡이랑 닮았군. 아니, 살이 별로 안 쪘으니 겉모습은 다른가? 옆에 앉아서 흥분하는 놈을 바라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아.. 됐다. 앉아라. 그나저나... 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했나?"
"왜? 안 들리더냐? 이렇게 조용한데. 귀가 썩었군."
또 다시 울컥하는 뚱땡이 버젼 업. 훗... 흥분하면 몸에 안 좋지. 암..
"후훗... 불러봐라. 네가 정말로 잘 부른다면 내가 사과하기로 하지. 하지만
못 불렀을 때는 어떻게 하겠는가?"
"도, 도련님.. 그런.."
이런.. 부잣집 도련님이셨군.
"걱정마라.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 만약 내가 못 부른다면...."
이쪽 주머니에 아마도 다이아몬드가.. 아, 여깄네. 그가 앉아 있는 탁자위에
다이아몬드를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걸 네게 주지."
키킥.... 테니스 공만한 다이아몬드를 내려놓으며 말하자 눈이 휘둥그레지는
남자와 주위 사람들.
후훗.. 자. 시작해볼까?
"어떤 걸 불러줄까? 애절한 사랑노래? 아님 박력이 넘치는 노래? 찬가? 아무거나 골라봐라."
네가 이제껏 듣도 보도 못했던 명곡을 들려줄 테니... 으후후후후후후..
"아무래도 카렌의 노래와 비교하려면 애절한 사랑 노래가 낫겠지."
저 여자의 이름이 카렌이었나? 그 여자를 언뜻 보니 자신만만한 얼굴이다. 후훗..
그 얼굴을 부숴주지.
"하프 좀 빌려줄래?"
빌려주기 싫어하는 눈치였지만 남자의 말에 못이겨 억지로 넘겨주는 카렌. 그녀의 얼굴에는 정녕 하프를 걱정하는 의미가 가득 들어있었다.
디리링...... 호오.. 이 정도면 최상품인데... 예전에 하프를 배우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군. 아... 그렇지.. 조성모 형님. 아니, 아저씨..... 죄송합니다.
노래 좀 여기서 부를 게요.
자. 반주 좀 넣고... 눈을 살포시 감으면서.....
"....아시나요.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댈 보면 자꾸 눈물이 나서....
차마 그대 바라보지 못하고... 외면해야 했던.. 나였음을..
아.. 시나요..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대 오가는 그 길목에 숨어...
저만치 가는 뒷모습이라도.. 마음껏 보려고.. 한참을 서성인.. 나였음을..
왜 그런 얘기 못했냐고 물으신다면.... 가슴이 아파.. 아무 대답도 못..하..
잖아요...!.. 그저 아무것도 그댄 모른 채..!.. 지금처럼만..!.. 기억하면 되요.!.
...우릴.!.. 그리고 날....."
에.... 별로 힘이 안 드네... 하긴.. 처음 몰리모프할 때부터 미성에 고음이 날 수 있도록 했으니... 그래도 고음은 약간 걱정했는데 이렇게 쉽게 나올 줄이야..
어쨌든 간주는 이쯤하고.. 2절을 부르자. 눈을 감고 있어서 그런지 사람들의 얼굴이 무지 궁금하지만.. 노래나 끝내고 나서 보자.
".. 아시나요.. 얼마나 힘겨웠는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듣지 못하는 병이라도 들면.... 그땐 말해 볼 수... 있을까요..
모르셨죠.... 이렇게 아픈 내 마음... 끝내 모르셔도 난 괜찮아요...
그댈 향한 그리움의 힘으로.. 살아왔던 거죠... 그대가 없으면.. 나도 없죠..
몇 번을 다시 태어나고 다시 떠나도 그댈 만났던..!. 이 세상만 한 곳은 없겠죠.!..
여기 이세상이 아름다운 건.!.. 그대가 머문 흔적들 때문에..!. 아마..!!...
슬픈 오늘 이..!.. 같은 하늘아래 그대와 내가.. 함께 서있는.. 마지막 날인걸..!.
그대..!.. 아시나요....."
언제 들어도 애절하고... 가슴을 매이는 노래야... 물론 이 세계의 사람들까지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난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살며시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