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하는 일마다 여호와께서 성공하게 해 주시는 것"(창 39:3) 사랑하는 이여, . . . 그대에게 모든 일이 계속 잘되[기]를 기도합니다.(3요 1:2) 우리는 세상사에서 "순조롭다", "일이 잘 풀린다" 등의 표현은 거의 절대적으로 경제 사정과 관련되어 있을 때, 사용된다. 성서에서도 재물의 복은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것은 정직과 충실성 그리고 근면성이 재물을 모을 수 있는 바탕이 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많은 경우, 편법이나 부정한 경우를 통해서 재력을 쌓게되고 그 재력을 바탕으로 힘을 과시하게 된다. 따라서 진정한 부, 참된 권능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성서의 예들을 고찰해 보기로 한다. 맘몬주의(Mammonism)의 역사 1. 맘몬주의의 뜻 성서에서의 ‘맘몬(Mammon)’은 마태복음 6장 24절과 누가복음 16장 13절 에서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데, 마태복음 6장 24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이 성구에서 ‘재물’로 번역된 ‘맘모나(μαμωνᾷ)’의 원형은 ‘맘모나스(μαμω νᾶς)’이며 히브리어로 ‘믿다’, ‘신뢰하다’라는 뜻을 갖는 <아멘>과 동일한 어근을 갖는 아람어에서 유래하여 문자적으로는 ‘신뢰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는데, 고대로부터 재물은 사람들이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며 집요하게 추구하여 왔던 것 중의 하나이므로 ‘맘모나스’는 곧 ‘재물’과 동의어로 쓰이게 된 것이다. 91) ‘맘모나스(μαμωνᾶς)’를 예수께서는 두 가지 면으로 사용하셨는데, 첫 번째는, 마태복음 6장 24절과 누가복음 16장 13절에서와 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맘몬(재물)을 섬기는 것을 겸할 수 없다고 했다. 어느 하인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은, 단순히 돈의 소유를 말함이 아닌, 하인이 그 주인을 섬기듯 전적으로 돈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의무를 불가능하게 한다. 또한 두 번째는, 누가복음 16장 9, 11 절에서는 ‘맘모나(μαμωνᾷ, 재물)’가 청지기와 마찬가지로 불의한 것(ἀδικίας)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그것을 획득한 예는 때때로 불의와 사악함이 동원되기도 하며, 세상적 소유에 대한 충성을 다함은 인간으로 하여금 맘몬(부)에 자신을 위탁하게 한다. ‘재물’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맘몬(mammon)’이 바로 ‘맘모나스(μαμωνᾶς)’ 에서 나왔으며, 성경 본문에서는 바로 이러한 ‘재물’을 의인화시켜 섬김의 대상으로 삼아 ‘재물’이 충분히 사람들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묘사하고 있다. 리차드 포스터(Richard Foster)는 돈을 전적으로 중립적이고 비인격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 것에 대해 비판하며 “돈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돈을 어떻게 대하고 생각할 것인가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따라서 좋게 사용되거나 나쁘게 사용 될 수 있는, 단순히 하나의 자원(물질)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맘몬을 ‘우리를 지배하려고 추구하는 하나의 힘’으로 규정한다. 이것은 맘몬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영적인 힘이 있으며, 예수께서 재물을 ‘인격화’해서 표현하신 것은 바로 재물에는 악한 영적인 속성이 있음을 지적해 주신 것일 뿐 아니라 인간의 타락한 본성을 고려한 즉, 죄성을 가진 인간에게 돈은 단순히 중립적인 교환의 수단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돈’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재물의 배 후에는 반드시 영적인 세력이 있음을 경고해 준 것이다. 리차드 포스터(Richard Foster)의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부(富)는 우리가 하나님께 향하기 위해서 그것으로부터 돌아서야만 하는 ‘우상숭배’이며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것처럼, 타락한 본성을 가진 우리 인간에게 부(富)는 우리의 주인이 되어 우상숭배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주장된다. 이러한 주장과 일치하게 ‘맘몬주의(Mammonism)’는 ‘맘몬(Mammon)’과 ‘~주의(ism)’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합성어로서, 우리말로는 ‘황금만능주의’나 ‘물질만능주의’라는 부정적 표현이 될 수 있으며, ‘물신(物神)’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2. 신자유주의와 맘몬주의의 관계 신자유주의 시대에 있어서 맘몬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맘몬은 신자유시대에서 ‘상품(그리고 돈과 자본)’의 ‘인격화’이고, 사람의 ‘사물화’ 또는 ‘상품화’로 표현할 수 있는데, 맘몬은 신자유주의에 있어서 세 가지의 흐름을 가지고 나타나며, 첫 번째는 상품 맘몬숭배와 두 번째는 돈 맘몬 숭배 그리고 세 번째는 자본 맘몬숭배이다. 첫 번째의 상품 맘몬숭배는, 상품관계를 분석할 때, 인간 사이에서 가능한 모든 관계가 상품 사이에서도 사실상 이루어지게 되는데, 상품은 인간 노동의 산물이고, 교환하고 이익을 남기기 위해 생산된 것이다. 따라서 상품 물신숭배의 문제는 사적 소유권에 바탕해서, 그리고 사회적 노동분업의 맥락에서 한 산물이 교환을 통해 다른 산물을 얻기 위해 매개가 될 때 나타난다. 이 생산물은 상품이고 상품으로서 변덕을 부린다. 다른 말로 하면 상품들이 상품들 사이에서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생산력과 상품관계가 더욱 긴밀해지면서 이것이 더욱 발전하여 상품 사이의 사회적 관계도 확장된다. 이는 결국 상품 생산자가 상품을 지배하였지만 이제는 그것이 뒤바뀌어 생산자가 자신이 생산해낸 상품의 지배를 받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상품생산이 어느 시점에 도달하게 되면 생산자와 생산물 사이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고, 결국 생산물은 생산자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현상은 눈에 뚜렷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통해서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다. 이 시점부터 상품 사이에 사회적 관계, 생산자 사이에 물질적 관계가 형성된다. 상품이 ‘인격화’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인간(생산자)은 살기 위해 어쩔수 없이 그 상품에 종속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자본주의 체제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충동이라는 것이 여기에서도 발생한다. 즉, 상호연관(또는 관련) 된 상품들의 ‘인격화’는 상품들이 연관되는 ‘또 다른 세계’를 만들게 되고, 이 또 다른 세계는 본질적으로 상품들이 상품들 세계에서 실현하게 되는 사회적 관계를 마치 종교적 환상으로 재생산한 것과 같게 된다. 이것이 상품들이 갖는 다신론적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체 상품과 상품 운동의 근저에 깔린 통일적 기본 원리가 자리잡고 있음을 인식하게 됨에 따라 다신론적 세계에서 유일신론적 세계로 이동하게 된다. 이 유일신론적 세계는 결국 돈과 자본에 의한 매개로 나타나게 된다. 여기서 칼 마르크스는 특정 형태의 그리스도교에 빗대어 이야기 한다. 즉 이러한 종교적 세계는 현재의 세계에서 저 세상에로 투영된 것이고, 이 투영을 통해서 시작된 시장경제의 운동이 갖게 되는 현실적 자의성에 대해 해석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시장은 신성한 영역으로 바뀐다. 그리고 이때부터 종교적 이미지는 본질적으로 인간과 그 생존 가능성을 부인한다. 여기서 종교는,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결정을 상품구조에 맡기고 그에 따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려 하지 않는 상황에 상응하여 나타나는 사회의식의 한 형태이다. 두 번째의 돈 맘몬숭배는, 상품이 유통되는 과정에서는 소비되지 않고 모든 상품들의 일반적인 등가물 또는 공통분모로서 작용할 수 있는 특별한 상품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돈, 즉 화폐로 나타난다. 이 돈이 나타나게 됨으로 말미암아 상품의 ‘인격화’라는 과정이 훨씬 급격하게 전개되는 양상을 띤다. 돈이 나타나면 교환이 갖는 협애성과 제한성을 극복하고 각 상품의 가격과 사회 노동 체제를 매개하는 기능을 갖기 시작한다. 이런 식으로 돈은 상품 가치의 보존자로서 나타나고 그 가치를 표현한다. 그리고 돈은 이 기능을 실현하기 위해 돈으로 전환되는 모든 상품 가치의 척도가 되어야 한다. 돈은 다른 한편으로 전능한 의지를 갖고 높은 곳에, 즉 모든 상품 위에 군림하는, 주체성을 부여받은 존재로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이 돈을 계시록의 ‘짐승’, ‘적그리스도’라고 표현하고 따라서 반 인간으로 표현한다. 돈을 통한 상품 교환의 추진력이 이제 인간관계를 결정한다. 상품의 논리가 이제 인간의 행위들을 규정하게 되고 사회적 가치들마저 지시하게 된다. 더 나아가 노동의 가치 그리고 상품생산에 따른 윤리적 가치들도 등장 한다. 인간의 삶은 상품의 삶에 종속된다. 결국 인간 행위의 법률적 관계와 가치는 자유를 행사하는 인간이 아니라 상품관계의 존재와 역동성의 필요에 의해 결정된다. 뿐만 아니라 결국 상품관계가 사람들의 의지와 관련된 내용을 미리 결정 짓게 되므로, 사람들의 운명 자체를 상품관계에서 출발해 이를 통해 해석하려는 상황까지 나타나게 된다. 돈은 근본적으로 모든 상품들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 기 위하여 통과하게 되는 원천으로 바뀌어 자리 잡게 된다. 그래서 소유자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돈이라는 것은 모든 상품에 이르는 문이 된다. 돈은 실질적으로 현실에서 무한한 권능을 갖는 것으로 나타난다. 탐욕이라는 것은 돈을 소유하고자 하는 동기부여의 근원이 됨으로 인해 그것을 얻기 위한 특정한 규범과 함께 무한성이라고 하는 이미지마저 변형시킨다. 인간은 정복자가 된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성을 외면화한 것에 불과한 목표를 좇아 달린다. 그리고 목표를 세우나 이 목표를 향한 어떤 발걸음도 그를 목표로부터 더 멀리 떼어 놓을 뿐이다. 돈 추구는 경건한 행위로 바뀐다. 돈이라는 맘몬은 드디어 경배의 대상이 되었고 인간은 신심이라는 관계를 통해 돈을 추구하는 행위의 적당한 가치들을 각자 자신들의 가치로 삼게 된다. 세 번째로 자본 맘몬숭배는,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발전할수록 돈이 자본으로 바뀌게 되고 마침내 오늘날의 자본과 같은 현재의 단계에 이르게 됐다. 화폐가 자본으로 바뀌게 되면서, 상품관계라는 것은 단지 물질적인 부가 생산되는 비율이 결정될 뿐만 아니라 생산자의 삶을 좌우하고 결국 죽음도 결정하게 된다. 자본 맘몬화는 이자라는 자본의 형태에서 가장 최고점을 이룬다. 즉 가치에 의해서 가치가 산출되던 것이 이제 가치 자체로서의 자본이 본래 가지는 마치 타고난 힘과 능력인 것처럼 나타내 보이고 노동력 자체를 마침내 대체하기까지 이른다. 사실상 이윤은 자본이 노동에서 뽑아낸 잉여에 지나지 않고, 이자는 총이윤의 일부에 불과한데도 이것이 전도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자본 맘몬화를 통해 물신에 대한 숭배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자본은 기술 발전을 통해 한없이 우리의 미래로 투영함으로써 사람들의 가장 소중한 꿈마저도 자기 스스로 떠맡아 버린다. 자본이 결국 사람들의 무한성에 대한 보증수표가 되고 만다. 이러한 신자유주의가 맘몬 숭배로 나타나면서, 결국에는 부유해지는 자나 가난해지는 자에게나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3. 구약성서에 나타난 맘몬주의 돈과 재물이 인간들 사이에서 다툼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은 우리가 알 듯이 비단 오늘날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보면 이 문제는 항상 사람들에게 골칫거리였으며, 이 문제는 언제나 종교 내부에서도 있었고 더군다나 하나님의 계시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는 성서를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는 부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므로, 사람이 추구해야 하는 것으로 묘사 되어 있다. 그렇지만 부자에 관한 구약성서의 판단과 부에 관한 신약성서의 판단 사이의 모순으로, 구약성서에서는 마치 부는 좋은 것이고 의로운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에 비해, 신약 성서는 부자에 대해서는 거의 예외 없이 정죄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분명 놀라운 사실이다. 풍성하고 많은 재물이 의로운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정의한다면, 그 부를 가지고 마음껏 향유하고 있는 사람들을 어떠한 명목으로 정죄할 수 있을까? 물론 부자라는 의미 속에는 단순히 돈만 가지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또 다른 것 즉 지혜, 덕, 가족 등과 같은 것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도 포함된다. 아무튼 구약 성서에 의하면 의롭고 모범적인 부자들도 존재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구약 성서에 표현되는 부자들에 대한 의는 그것이 윤리적인 덕이나 선행으로 말미암은 의가 아니며, 부를 가지고 그것을 의롭게 사용함으로 생기게 되는 의도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구약성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의는 오히려 그와 반대로 먼저 사람들이 의롭기 때문에 따라서 그들이 재물을 가지게 되고 그 재물들이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부의 의미와 그 부를 소유한 부자에 대한 의미 그리고 돈(맘몬)에 대한 관점에 있어서 신약 성서와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과 제도에 따라 살아야 하는 전형적인 이상형의 나라라는 가정에서 일어나는 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약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부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살펴 보고, 이와 함께 오늘날 왜곡된 관점으로 인해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는 돈과 맘몬에 대해서 구약성서에 말하고 있는 올바른 관점이 무엇인가 살펴보고자 한다. 구약성서에는 아브라함과 욥과 솔로몬이 대표적인 세 가지 유형의 부자들로 나타나고 있다. 아브라함은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자 그에 대하여 즉시 응답하며 그가 살고 있던 우르를 떠났다. 아브라함이 우르에서 살고 있을 때에는 소위 엄청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가 살던 고향 땅 우르를 떠났다. 이러한 순종은 재물에 전적으로 매달린 것이 아니라 재물을 주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스스로 부를 포기한 그 순간에 오히려 가나안 땅을 소유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게 된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양보하고 재물을 포기함으로 말미암아 그 땅을 소유 하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돈을 버는 것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돈만을 벌겠다는 생각이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러한 어리석은 행위들은, 결과적으로 맘몬을 선택하고, 맘몬을 숭배하는 노예가 되는 것이다. 창세기 14장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삶을 보면 명확하게 그것을 입증하고 있으며, 아브라함의 믿음이 왜 의로 선포되었는지 잘 나타난다. 욥기를 읽어 보면 욥의 의가 아브람의 의와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 그리고 노동자들 가운데 일부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정의와 명예와 경건 등 이러한 것들은 사치품에 불과하다. 먹고 살기 위해 필요한 생활 필수품들이 충분하게 될 때에 비로소 종교나 철학 그리고 도덕 등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빈곤할 때는 그런 부르조아들이나 하는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욥기의 서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분명한 것은 이러한 공식들은 바로 사탄이 하나님 앞에서 한 말이라는 사실이다. 사탄은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라는 말을 욥기에서 반복적으로 두 번씩이나 말하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재물을 욥에게서 거두어 버리시면 욥은 결국 일반 노동자의 상황과 다름없는 말을 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문제는 여기서 욥이 무엇을 사랑하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이냐, 재물이냐?라는 선택에 서게 된 것이다. 욥은 하나님과 재물 사이에서 둘을 동시에 사랑할 수는 없었다. 오직 어느 하나만을 반드시 선택해야 한다. 결국 욥은 재물을 잃고 말았다. 그는 평범한 일용직 노동자와 같은 사람이 되었다. 이때 욥은 이렇게 말했다. “제 것은 모두 당신의 것입 니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주시든지 가져가시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당신과의 교통이지 당분간 맡아둔 재물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를 행복하고 풍요롭게 하였던 재물을 당신이 거두어 가신다 해도 저는 당신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물이 사라졌음에도 그는 의로움을 결단코 잃지 않았다. 마치 재물이 우리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오늘날의 세태에 무엇이 우리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단순히 재물이 많은 부자가 되었다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화를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아무리 좋고 아름다운 말도 행위로 드러나는 뚜렷한 증거가 없을 때는 진심이 의심스럽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행동으로 보여준 것처럼 우리에게도 구체적인 행위의 증거를 요구하신다. 솔로몬이 나타낸 의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본 아브라함이나 욥의 의와는 전혀 다르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처음에는 욥이나 아브라함과 동일한 상황에 놓아두신다. 즉 솔로몬 스스로가 선택하도록 하셨다. 그는 아버지 다윗 왕을 이어서 왕으로서 정치력을 발휘하여야 했으며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되어진 왕으로서 성전도 건축하여야 했다. 이런 일들을 해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절대적인 권력과 수많은 재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솔로몬 자신이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뜻하신 바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그에 따른 필요한 재물들을 하나님에게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업들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과 권력이 꼭 필요한가? 라는 점은 깊이 생각해야만 할 문제이다. 그러한 고민과 생각 끝에 솔로몬은 “아니다. 그렇지는 않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보다 잘 다스리고 옳고 그름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요구했다. 백성을 바르게 판단하고 선악을 정확하게 구별하기 위해서는 솔로몬은 하나님의 지혜 즉, 하늘의 지혜가 필요함을 알았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솔로몬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맞는 답변을 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부와 영광을 함께 더하여 받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 사실 솔로몬이 가지게 된 부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처음에는 힘을 주는 소망이 되었다. 하나님께 오직 순종하며, 부를 인생에 있어서 가장 값진 것으로 삼는 최고의 우선순위로 여기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영광과 권세와 부를 소유하게 된 대표적인 인물이 솔로몬이었고, 따라서 솔로몬은 하나님 앞에 항상 정직했다. 그러나 결국 솔로몬이 소유했던 엄청난 재물과 권력은 솔로몬 자신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인생의 행복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는 데에 있다고 생각했다. 즉 그가 처음에 가졌던 지혜로운 마음을 잃어버린 데서 연유한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 14: 7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는 것이며 그 평화 가운데서 기쁨을 얻는 것이다. 솔로몬은 지혜의 마음이 어두워져 결국 본능을 만족시키는 데에만 즐거움을 얻으려 한 나머지 이방 여인들과 어울리며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하나님을 우리의 중심에 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부와 맘몬을 전적으로 섬긴다는 것은 결국 본능에 충실한 삶을 우선적으로 추구한다는 뜻이다. 하니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에게 부여한 이성의 명령에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하며 그 가운데서 더 높은 의미의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상 살펴본 것을 종합할 때, 재물을 구하여 노력하는 것이 결코 정죄될 종류가 아니라, 그러한 재물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의 경제 행위가 정직해야 하며 투명한 방식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재물을 구하는 것은 더 많은 자유를 얻기 위함인데. 그 자유를 얻으려는 노력이 오히려 자신이 이미 가진 자유를 구속하는 상태에 이르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