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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31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일본 F15 전투기 동해상 추락
2018년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세상 떠남(82세).
2018년 강원 철원에서 제1회 세계평화대회 열림
2014년 전라남도 여수시 낙포동 낙포각 원유2부두에서 기름 600여톤이 유출되어
근해가 오염
2012년 한국서 선교 활동… 빈센트 조지프 호프먼 별세
젊은 시절 한국에서 농촌·의료 사역에 헌신했으며, 미국으로 돌아가서 법학자로 활동하면서도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놓지 않았던 빈센트 조지프 호프먼(86) 미국 미시간주립대 교수가 지난 31일 별세했다.
호프먼 교수는 1954년 예수회 신부 서품을 받은 뒤 1955년 한국에 와 충북 음성, 옥천, 괴산 등지에서 선교사로 일하며 축산 교육과 선진 영농 기술 보급에 힘썼다. 한센병 환자를 직접 안고 병원으로 옮길 만큼 헌신적으로 병자들을 돌봤으며, 모금을 통해 병원도 지었다. 훈영 호프굿 현 미시간주 상원의원을 비롯, 많은 한국 고아를 친척과 친지들에게 입양시켰다.
1970년 미국으로 돌아가 결혼했으며 1978년 미시간주립대에서 형사소송학 박사 학위를 받고 지난해 6월까지 같은 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이 대학 한국학연구회 회장을 12년간 지냈다.
2011년 축구선수 박지성 국가대표 은퇴
‘캡틴’ 박지성(30.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 31일 축구국가대표팀 은퇴를 공식 발표했다.
박지성은 31일 서울 종로구 신문로 축구회관 5층 대회의실에서 열리는 기자회견에서 “오늘 날짜로 대표팀에서 은퇴하기로 했음을 조심스럽게 밝힌다”며 “국가를 대표해 축구선수로 활동하는 것은 무한한 영광이며 자랑이었다”고 밝혔다.
또한 박지성은 ‘자신의 뒤를 이을 재목은 누구라도 보는가’라는 질문에 “같은 포지션으로 굳이 뽑자면 손흥민(19·함부르크)과 김보경(22·세레소 오사카)이 가장 유력하다. 손흥민은 아시안컵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다. 남아공월드컵과 이번 대회를 같이한 김보경도 좋은 능력을 가진 선수인만큼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박지성은 11년의 대표팀 생활 중 가장 기뻤던 순간으로는 “지난 2000년 처음으로 대표팀에 발탁됐을 때”를 꼽았다. 행복했던 순간은 ‘4강신화’를 이뤘던 2002년 월드컵이었고, 아쉬웠던 순간은 3위에 그친 이번 아시안컵이라고 말했다.
이로써 지난 2000년 4월 5일 라오스와 아시안컵 1차 예선을 통해 처음 A매치 데뷔전을 치렀던 박지성은 11년만에 태극마크를 반납하게 됐다.
2009년 애국지사 박종철 선생 사망
애국지사 박종철(84) 선생이 1월 31일 오전 2시5분 노환으로 별세했다. 충북 청주에서 태어난 선생은 1942년 청주 제일공립중학교 재학시절 일본의 식민정책에 반대해 신사참배 및 궁성요배 등을 피하기 위해 동지들을 모으며 신사참배 거부를 주도하기도 했었다. 또한 개교기념일 행군에서 일본의 패전을 뜻하는 노래를 불렀고 이를 밀고한 일본인 동급생을 혼내 2년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86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2009년 케냐 서부에서 주민들이 유조차에서 흘러나온 기름을 주워담던 중 화재가
발생, 최소 111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화상
2003년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여 18명이 사망하다. 이 중
다수가 미국인
2001년 로커비 사건 피고인 중 2명 중 1명에게 유죄판결
지난 1988년 12월 영국 스코틀랜드 로커비 상공에서 270명의 목숨을 앗아간 미국 팬암 여객기 공중 폭발사건의 리비아 피고인 2명 중 1명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네덜란드의 캠프 자이스트에서 이 사건을 심리해 온 스코틀랜드 재판부는 2001년 1월 31일 알리 알 메그라히(48)의 유죄를 인정, 최소 20년간 복역하기 전에는 가석방이 허용되지 않는 종신형을 선고했다. 함께 기소된 라멘 할리파 피마흐(44)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영국 정부는 리비아 정부가 이 사건에 대한 총체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며, 희생자 유족에게 7억달러의 보상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리비아 정부는 자신들은 이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주장하고, 지난 1992년 유엔이 리비아에 대해 취한 제재조치를 즉각 해제하라고 요구했다.
1997년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 구속
한보그룹의 특혜대출 비리사건을 수사중인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부정수표단속법 및 상호신용금고법 위반 등 혐의로 고발된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에게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의 횡령 혐의를 추가 적용하며 1997년 1월 31일 구속했다.
전날 정태수 총회장을 전격 소환, 총5조여원의 대출을 받은 경위와 정-관계에 로비자금을 뿌렸는지를 밤샘 조사한 검찰은 한보그룹이 1994년부터 3년간 직접금융시장에서 7천6백37억원의 자금을 끌어다 비자금으로 조성해 계열사 인수 및 개인부동산 구입과 함께 정-관계 로비 자금으로 사용한 것으로 밝혀냈다.
대검 중수부는 2월 19일 수사 결과를 공식 발표하며 정씨를 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 사기 및 횡령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한 것을 비롯, 신한국당 홍인길. 황병태, 정재철 의원, 국민회의 권노갑 의원 등 여야 의원 4명, 김우석 전 내무부장관, 신광식 제일은행장. 우찬목 조흥은행장 등 은행장 2명, 김종국 전 한보그룹 재정본부장 등 관련자 9명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의 뇌물수수, 특경가법상 알선수재 등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1996년 가수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
댄스음악 열풍을 몰고 와 국내 가요계에 한 획을 그었던 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6년 1월 31일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학교 내 유림회관 대강당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갖고 은퇴했다.
2백여명의 보도진이 지켜본 가운데 이루어진 이 회견에서 그룹 리더인 서태지는 “오늘을 기해 지난 4년간의 가요계 생활을 마감하고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년으로 돌아가고자 한다”고 밝혔다. 서태지, 양현석, 이주노 등 그룹 멤버들은 기자들에게 배부된 성명서에서 전격 은퇴에 임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고 거듭 팬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회견은 세 사람의 멤버가 미리 준비된 회견문을 돌아가며 읽는 형식으로 진행됐으며 기자들의 질문은 일체 받지 않은 채 15분 만에 끝났다. 이들의 직접적인 은퇴 이유는 ‘창조의 고통’이 가장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요계의 신화로 불리운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는 가요계의 커다란 충격이었으며 사회적으로도 이슈가 됐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 창립총회
세계무역기구(WTO) 제1회 창립총회가 1995년 1월 31일 제네바에서 열렸다. 총회에서는 싱가포르를 향후 2년간의 총회 의장국으로 선정했고 제네바 주재 싱가포르 대사인 케사바파니를 총회의장으로 선출하는 등 주요 집행부를 구성했다.
세계무역기구는 1993년 12월 타결된 우루과이라운드 이후의 세계무역질서를 이끌고 갈 다자간 무역기구로, 1947년부터 세계무역질서를 이끌어 온 GATT체제를 대신하게 됐다. WTO는 GATT에는 주어지지 않았던 세계무역분쟁 조정기능과 관세인하요구, 반덤핑규제 등의 법적 권한과 구속력을 행사할 수 있어 세계무역질서를 어지럽히는 국가에 대한 제재조치를 취할 수 있다.
1992년 한국-키르키스스탄, 국교 수립
1992년 한국-몰도바, 국교 수립
1986년 레바논 주재 한국대사관 도재승 2등서기관 겸 영사 납치
86년 1월31일 오후 3시경, 레바논 주재 한국대사관의 도재승(都在承) 2등 서기관(당시 44세)이 베이루트 시내에서 무장괴한 4명에게 납치됐다.
한국 외교사상 처음으로 일어난 외교관 피랍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사건 발생 1년이 훨씬 넘도록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지 않은 채 오리무중 속을 헤매다 이듬해 11월2일 그가 김포공항에 귀환함으로써 종결됐다.
1980년 해군, 거북선 원형복원(전장 113척, 폭34척, 높이 21척) 남해안에 진수.
1979년 동해고속도로 개통
1971년 동,서 베를린, 19년 만에 전화개통
1971년 1월 31일 동·서베를린 사이에 전화통신망이 19년 만에 개통됐다. 동독이 동·서베를린 사이의 전화선을 단절한 것은 1952년 5월 27일이었다. 그 당시 동베를린 당국은 냉전무드속에 전화시설의 긴급수리와 기술적인 단점을 표면적인 이유를 내세워 동·서 베를린간의 4천회선에 달하는 전화선을 단절했었다. 그 후 서베를린 시민들은 서독을 통해 동베를린과 통신 교환을 해왔다.
동독과의 관계정상화를 모색해 온 서독은 브란트정권 탄생이래 어떤 기본협정체결에 앞서 문화-과학 및 교육을 포함한 통신, 교통분야의 상호협력을 중시 여겼고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서독은 전화, 텔렉스회선을 증설할 것을 제안해 왔었다. 그 결과 동독측은 전화 및 텔렉스회선 증가에 동의하여 양측은 이번 조처에 완전합의했다. 전화선 이용자들은 자동전화가 아닌 교환전화를 통해 통화했다.
1970년 북한-중국 압록강-두만강 항해협정 체결
1969년 천안에서 열차충돌사건
1969년 위장간첩 이수근, 베트남 탄손누트공항에서 체포
1968년 나우르, 호주로부터 독립
1968년 월맹-베트콩의 구정 공세 시작
1954년 제네바협정 이후 남부 월남은 친미주의자 고 딘 디엠이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물러난 프랑스인들이 옹립한 바오 다이 황제를 폐하고 새로운 공화국정부를 수립한 다음에 절대권력을 보유한 대통령직에 취임했다. 그러나 고 딘 디엠은 제네바 협정에서 체결한 1956년도에 월남 전지역에 걸쳐 단일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 총선 실시를 거부했다. 당시의 월남 분위기로 볼 때 공산주의자이면서도 민족주의자로 추앙받는 호지명이 최고 통치자로 선출될 것이 확실시 되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고 딘 디엠이 남부 월남의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막대한 양의 군사물자와 직업군인으로 구성된 1만7천여 명의 군사지원 고문단을 상주시켰다.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 미국은 대규모 지상군을 파견, 1965년 말에는 미군병력이 18만명으로 그리고 1년 뒤인 1966년 말에는 48만 5천명으로 증가했다. 미군은 월남군 및 연합군(한국군 호주군 태국군 등)과 130만이 넘는 군사력을 유지했으나, 베트콩만을 상대로 한 소모전만 벌일 뿐이었다.
북부 월맹의 국방장관 보 구엔 지압은 "미국이 월남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해 우세한 기동력과 화력을 보유한 미군과의 싸움에서 월맹이 군사적으로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해졌지만 정치적으로는 비관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다. 1967년 월맹 노동당 정치국회의에서는 사이공 정부가 점차 안정을 찾아가고 있는 데 불안을 느낀 나머지 일거에 승리를 달성하는 새로운 모험을 결의했다. 호지명과 지압은 1968년도 구정에 총공세를 실시해 도시를 중심으로 민중봉기를 유발하기로 결정했다.
월맹은 7일간의 구정휴전을 발표하면서 미군과 사이공 정부를 안심시켰다. 이를 믿고 구정축제 준비에 바쁜 사이공 정부 몰래 월맹은 기습공격을 소리없이 준비했다. 베트콩의 구정공세는 1968년 1월 31일 미명을 기해 개시됐다. 그들은 사이공의 미국 대사관 공격을 필두로 5개 직할시와 36개 성 등 수십개의 촌락을 공격했다. 미국 대사관 공격은 심리적 효과를 거두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이 소식은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구정공세는 대부분 오래 지속되지 못햇다. 그들은 1월31일부터 2월11일까지의 전투에서 참가 병력의 약 절반에 가까운 3만5천명이 사살되고 5천8백명이 생포됐다. 구정공세는 궁극적으로 군사적 패배를 가져온 자살적 공세였으나 정치-심리적으로 월맹은 대승리를 거두었다.
미국 언론은 베트콩의 대규모 손실보다 전사 534명과 부상 2천547명인 미군 손실을 대서특필했다. 1968년 3월 31일 미국의 존슨 대통령은 언론과 여론의 압력에 못이겨 월맹에 대한 폭격중지를 선언하고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폭탄선언을 했다. 월맹의 구정공세는 군사적으로는 패배했지만 미국이 협상을 제의했다는 점에서 오히려 정치-심리적으로 승리를 거둔 특별한 결전으로 전쟁사에 기록됐다.
1967년 서독-루마이아 국교 수립(동방정책 시작)
1967년 중국의 반소 데모대, 소련 대사관에 난입
1962년 미주기구 외상회의에서 쿠바제명을 가결
1961년 미국 침팬지 태운 로켓 발사
1959년 기시 일본 수상, 재일교포 북송에 지원 표명
1958년 미국 인공위성 제1호 익스플로러 발사 성공
1958년 1월 31일 오후 10시48분, 미국이 케이프 커내버럴 기지로부터 인공위성을 탑재한 주피터-C 개량형 4단 로케트를 발사, 위성을 궤도에 올려놓은 데 성공했다. 이것이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 `익스플로러1호`였다.
1957년 소련이 세계최초로 발사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1호 발사에 자극을 받아 84일 만에 발사된 익스플로러1호는 미국의 제트연구소가 개발해 육군탄도 미사일국이 제작했다. 타원궤도로 지구를 약1백15분마다 한 바퀴씩 도는 이 위성에는 반 알렌교수가 고안한 우주선 탐지장치가 실렸다.
미국은 당초 1957년 12월6일 방가드 로켓으로 시험발사를 시도했지만 발사대로부터 약간 떠올라 있어 폭발한 경험이 있어 이번에는 육군 중거리 탄도미사일인 주피터-C를 급조하고 탄도부분에 위성용 기기를 탑재, 겨우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익스플로러 1호`는 길이 203cm, 지름 15cm로 비교적 큰 편이었지만 탑재기기의 무게가 8.2kg에 불과해 아직은 소련에 뒤져 있었다
1956년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피살
백범 김구 선생 암살 배후로 지목돼 온 전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이 1956년 1월 30일 출근길에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김창룡은 1940년 만주에서 중국 공산당을 토벌해 일본 관동군 헌병대 오장(하사급 분대장)에 오른후 해방 2년 뒤 조선경비대 사관학교 3기생으로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공산당 타도’를 앞세워 여간첩 김수임 사건, 남로당간부 검거 등 굵직한 수사를 해오다, 6·25때는 부역자를 가리는 군검경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았다. 그는 ‘용공분자 색출’을 이유로 당시 5만명이던 군 병력 중 5천명을 잘라내는 순국작업에도 참여했다.
그는 백범이 저격당한 1949년 6월 26일 암살범 안두희를 특무대 영창으로 이감시켜 쉬게 하고,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를 15년으로 감형시키는 데 영향을 끼쳤다. 안두희도 1992년 “조선호텔 앞 대륙상사로 위장된 특무대 사무실에서 김창룡을 만나 백범 암살을 지시받았다”고 증언한 바 있다.
1955년 중국 국무원,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의 연구를 위해 중국을 원조하는 소련의 제안에 관한 결의> 채택
1954년 오산시에서 대열차사고 140명 사상
1954년 1월 31일 오후7시35분 경부선 병점역을 지나 오산역으로 향하던 제78호 통근열차가 부산기점 390km지점 건널목을 지날 때 군대부식품을 가득 실은 군트럭이 달려와 충돌했다. 이 사고로 객차일부가 전복되어 53명이 죽고 1백명이 부상했다.
이 철도건널목은 교통량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신호등은 물론 차단기도 없어 평소에도 사고위험이 예상되던 곳이었다.
이날의 사고는 사고 기관차의 기관사 정남용씨가 사고지점인 건널목에 접근하기에 앞서 4-5차례나 기적을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군트럭이 기차를 앞질러 건너려다 발생했다. 열차기관사 정남용 등 관계자 3명이 구속됐으나 3월 16일 서울지법 수원지원에서 모두 무죄선고를 받았다.
1953년 프린세스 빅토리아호 아일랜드해에서 침몰
1952년 일본, 경찰예비대를 자위대로 개편. 일본 재무장 시작.
1951년 유엔총회,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중국군의 한국전 개입은 한국전쟁의 국제전적 성격을 심화시켰고 미국민의 반공의식도 더욱 고조시켰다. 중국군이 서울을 침입하던 1951년 1월 5일 미하원에서는 대중국 선전포고를 하자는 주장이 나왔으며 1월 13일에는 미군 5만 명을 한국에 증파키로 결의했다. 한국 국회도 1월 20일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리고 1월 31일 유엔정치위원회에서도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추인했다.
중국 수상 주은래는 이에 앞서 1월 22일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한다면 한국에서 어떤 휴전가능성도 거부하겠다"는 뜻을 인도 정부를 통해 미국에 전달했으나 미국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1951년 북조선의 부수상 겸 산업상 군사위원회 위원 겸 전선사령관 김책이 사령부 막사에서 갑작스럽게 사망
1950년 트루먼, 수소폭탄제조 지령
1949년 중국공산당 베이징 입성
1948년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 형제의 동생 오빌 세상 떠남
1947년 미국 프로 야구선수 라이언 출생
1943년 독일군, 스탈린그라드 전투 항복
1943년 1월 31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이 소련군에게 항복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세계대전중 1942년 11월부터 이듬해 1월에 걸쳐 독일군이 돌입한 스탈린그라드(지금의 볼고그라드)를 소련군이 포위, 탈환한 싸움으로 대전의 결정적 전환점의 하나가 되었다.
스탈린그라드는 볼가강 하류 공업도시이며 전략적 요충지였을 뿐 아니라 스탈린의 이름을 붙인 스탈린그라드를 빼앗음으로써 중대한 심리적 타격을 주려고 했다. 그런 만큼 소련군의 저항도 치열했다. 전세가 기울어지자 한때 무적을 자랑하던 독일 6군단의 파울루스 장군은 제6군을 남서쪽으로 후퇴시키기를 요청했으나 히틀러는 거절했고 대신 모든 원조를 약속했다.
하지만 군수 물자는 커녕 식량의 지원이 끊겨 12월부터 독일 6군단의 병력은 루마니아 기병대가 남기고 간 말들을 잡아먹으며 버티고 있었다. 끝내 파울루스는 항복허가요청을 했지만 히틀러는 파울루스의 항복허가 요청을 거부하고, 그를 원수로 승진시켜 격려했다. 하지만 견디다 못한 파울루스는 이날 항복하여 24명의 장군과 2500명의 장교를 포함한 9만 1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그 뒤 소련군은 사기가 올라 전면적 반격을 개시, 전세가 바뀌고 독일군은 충격을 받고 수세에 몰렸다.
1940년 육군통제령 및 해군통제령 공포
1938년 프랑코, 스페인국민정부 조직
1937년 대구비행장 설치
1935년 이동휘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 세상 떠남
1934년 미국 달러화 41% 평가절하
1929년 레마르크 소설 `서부전선 이상없다` 출판
독일 소설가 에리히 레마르크가 자신의 처녀작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1929년 1월 31일 출간했다. 소설은 날개돋힌 듯 팔려나가 레마르크의 이름을 전세계에 알렸다. 그 해 독일에서만 50만부가 넘게 팔려나갔고, 출간된지 18개월 사이에 25개 언어로 번역돼 3백50만부 이상이 나갔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정부는 이 소설에 담긴 반전주의를 위험시 해 1929년 8월 판금조치를 내렸고, 이를 영화화한 미국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의 영화도 1930년 12월 상영금지 조처를 내렸다.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는 작가 자신의 1차대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짧은 현재형 문장으로 이어지는 이 소설은 작가에게 세계적 명성을 주었지만, 뒤에 나치스는 그의 모든 작품을 판금, 분서하고 그의 시민권을 박탈했다. 레마르크는 스위스를 거쳐 미국으로 피신해 행복한 생애를 마쳤다.
1911년 대한천일은행(현 상업은행), 조선상업은행으로 개칭
1905년 일본총독부, 한국에서 업무 개시
1905년 일본 제일은행에 국고취급 및 화폐정리 사업일체를 위임
1890(조선 고종 27) 서울 상인들, 외국상인의 시외이전 요구하며 철시 단행
1865년 노예제도를 금지한 미국의 수정헌법안 하원 통과
1812년 조선 평안도 가산군에서 홍경래의 난 발발. (음력으로는 1811년)
1797년 가곡의 왕 슈베르트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남
1606년 화약음모사건의 주모자 가이 포크스가 제임스 1세와 영국 의회에 대한 반역혐의로 처형
1578년 젬블루 전투가 발발
1504년 프랑스가 나폴리를 아라곤 왕국에 할양
877(신라 헌강왕 3) 고려 태조 왕건 태어남(음력 1.14)
314년 교황 실베스테르 1세가 교황 멜키아데를 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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