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인 집단성 추구보다 자기생활의 충실화와 개인의 혁신, 성숙한 소비생활을 즐기는 요즘 대중은 더 이상의 「大衆」이 아니라 개별화, 분산화, 세분화된 「分衆」이다. 이 글에서는 「삶의 질의 확보」라는 성숙형 소비사회로 이전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소비자 트렌드를 소비자의 시각에서 조망해 본다.
『'80년 6월초 김성욱(46, 남, 동대문구 제기동)씨는 인근 ㅎ사 전자대리점에서 컬러TV를 구입하려고 15만원을 맡겼다. 6월말까지 배달해준다고 했는데 7월 10일 현재 연락이 없다. 이웃집에선 제때 설치되었는데 웃돈을 얹어주었다는 얘기도 들린다......』
『고속터미널 지하상가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전인자(42, 여)씨는 '95년 12월 7일 날씬해진다는 외판원의 권유로 다이어트 식품을 구입했다. 가격은 2백59만원, 18개월 카드할부로 구입했는데, 복용 사흘째 되는 날부터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기 시작한다. 중도에 반품이 되는지 알고 싶다...』
소비자연맹 고발창구에 접수됐던 이 두가지 사례는 우리 사회에서 변화의 속도가 가장 빨랐던 지난 15년간의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소비행태의 한 예가 될 것 같다.
「기업」 중심체계에서 「소비자」 중심체계로의 파워이동
소비자 입장에서 본 소비자 트렌드의 변화는 사회문화적, 경제적, 심리적 측면 등 다양한 각도에서 논할 수 있겠으나, 필자의 입장에서는 연탄배달에서 컴퓨터 바이러스에 이르기까지 고발내용의 변화를 피부로 느끼는 소비자운동의 현장에서 보고 들은 견문을 토대로 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민간 소비자단체들의 활동이 활기를 띠기 시작한 '79년 당시 소비자연맹 고발창구에 매월 접수된 고발 건수는 고작 50∼60건,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지금은 고발건수가 매월 7천∼8천건에 이르고 있다.
물자의 공급이 원활치 못했던 시절에 살았던 소비자들은 물건을 손에 넣는 그 자체가 만족이었던 만큼 군소리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삶의 질」을 추구하는 '90년대의 소비자들은 예전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욕구를 끊임 없이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고발건수의 폭발적인 양적 팽창은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시장의 파워가 구매자인 소비자에게로 이동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난 40여년간 우리나라는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문턱으로, 빈곤사회에서 대량 소비사회로, 공급자중심에서 소비자중심의 시장체계로 이전되는 거시적인 외부환경의 변화에 따라 소비구조와 행동도 엄청나게 달라졌다. 만들면 그냥 팔리던 시대에서 이제는 기업이 소비자의 욕구를 창출하는 시대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1920년대만 해도 미국 여성들의 스커트 길이가 지면 7cm위로 올라가자, 미국의 언론들은 『다소곳한 보수적 여성미는 이 땅에서 사라지는가』라는 비난을 일제히 퍼부었다. 추운 겨울이 되면 결국 스커트 길이는 다시 길어지고 말 것이란 기대는 이때부터 어긋나기 시작해 이후 스커트 길이는 마냥 무릎을 향해 올라가다 '60년대 초반엔 무릎위 20∼30cm의 미니스커트가 세계 유행을 주도하기에 이르렀다. 소비자 트렌드 변화란 이처럼 예측불허인 것이다.
소비자의 두 얼굴, 「소비자 행동」과 「잠재의식」
소비자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게 하는 것은 또 소비자들의 행동과 잠재의식 사이에 존재하는 전혀 다른 이율배반적 측면이라는 점이다. 소비자는 두 개의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한 예로 백화점에서 막 옷을 구입한 소비자에게 다가가 옷을 선택한 기준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첫째가 값, 둘째가 제조회사, 다음이 디자인, 색상순이라고 답변한다. 그 소비자가 물건을 사간 바로 그 자리에서 판매원에게 소비자에게 했던 같은 질문을 던지면 결과는 전혀 엉뚱하다. 첫째가 색상, 둘째가 디자인, 메이커, 가격순이라는 것이다.
소비자가 실제로 주변 사람들에게 주체적인 인상을 심어주는 것은 색상과 디자인이 가격보다 앞서는 법이다. 그러나 소비자의 내면에는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가격이라는 현시욕이 갖춰져 있다.
여성들이 핸드백에 넣어 갖고 다니는 소품들을 들여다봐도 그렇다. 일반적으로 그 속에는 가정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휠씬 고급스러워 보이는 화장품이나 비품을 넣고 다니는 경우가 많은데, 이러한 점이 소비자 이중 구조의 작은 예이다.
화려한 더블 베드, 대형냉장고, 오븐이 「전시용」으로 이용되고 있고, 외부인이 없는 집안에선 격식 없이 대충지낸다든가,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욕구로 작은 집은 세주고 큰 집을 얻어 사는 경우라든가... 즉 남에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의식하고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생산에서 삶의 질 확보수단으로
'80년대까지만 해도 기업은 소비자의 비위를 맞추기보다는 어떤 상품을 개발해 어떤 노하우의 마케팅전략으로 소비자를 끌어들이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왔다. 즉 기업은 씨를 뿌리고 수확해 소비자에게 잘 전달한 해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기업이 씨를 뿌리면 소비자들이 이를 가꾸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소비자들은 물건을 만드는 측에다 무엇인가 생성시키도록 그 필요성을 유발시키고 있다.
「생존을 위한 생산」에서 「삶의 질」을 확보하는 개성화, 다양화되어가는 소비문화 변천과정에서 사람들은 스스로 가장 주체적이고 주목받게끔 행동하는 자기조직화된 소비행동을 보이고 있다. 이른바 소비자 주권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이러한 현상은, 정치 현상과도 무관치 않은 것같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적인 이슈, 정치현상에 대해 한껏 관심을 쏟다가도, 그렇고 그런 정치판에 혐오를 느끼게 되고, 무관심해져 버리는 현상은 소비행동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여진다. 공적인 것보다 자기생활을 충실히 하는데 주력하고, 개인이 혼자 혁신하면서 성숙한 소비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大衆에서 小衆, 知衆, 亂衆으로의 분화
'80년대부터 일어난 현상으로 사회학자들은 대중의 의미가 달라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10인 10색이 아니라 10인 100색이란 말이 나올 만큼 대중은 세분화되어 소위 「小衆」, 「知衆」, 「亂衆」등으로 불리고 있다. 즉 '90년대 이전의 소비행태는 10인 1색의 획일화된 상태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엔 10인 10색의 다양화가 소비의 주류를 이루고 있고, 앞으로는 이것이 더욱 세분화돼 10인 100색의 亂衆의 시대로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知衆이란 대중매체의 발달로 사람들이 많은 지식과 정보를 접하면서 취향이나 생각이 비슷한 사람끼리 자연스럽게 정보를 공유하는 현상을 지칭하는 것으로 소비행동에 대단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람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다양화의 본질은 바로 이 知衆化의 영향인 것이다.
한국인의 다양화된 소비행태와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는 얼마전 한국리서치가 일반인 5천명을 대상으로 '93년부터 '95년까지 실시한 조사결과에서 구체적 현상을 짚어낼 수 있다.
그 주요내용을 살펴보면, 첫째 무엇보다 건강관리가 최우선 관심사가 됐다. 자신의 건강과 몸매에 대한 관심은 매년 증가하는데 비해 주택, 가족, 자식문제, 결혼문제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것은 돈의 사용이 개별적, 사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으며, 공적인 문제에 대한 부담은 점차 줄어든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건강 자체에 대한 관심 또한 늘어나고 있지만, 정기적으로 운동을 하거나 건강진단을 받는 사람은 10%대에 머무르고 있어 아직까지 체계적인 건강관리를 하고 있다고 하기에는 미흡하다.
둘째 소비자의 여가 및 레저, 취미 행위가 매우 다양화, 고급화되고 있다.
승마나 스킨스쿠버 다이빙, 골프, 사격 등 고급 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으며, 스포츠센터나 헬스클럽을 찾는 경우도 '95년에는 '94년에 비해 16%나 증가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국민소득 1만달러 시대라고는 하나 취미나 여가생활을 하고 싶어도 시간과 돈이 없다는 사람도 아직은 절반에 이른다.
셋째 소득수준이 높아짐에 따라 외식산업의 지출비용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94년 한해 우리나라 국민들은 먹고 노는데에 무려 10조원을 지출했다고 한다. 재정경제원의 최근 자료에 따르면, 도시근로자의 소비지출 중 외식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85년 3.1%에서 '94년엔 9%로 9년사이 3배나 증가했다. 특히 '94년부터 외국계 패밀리 레스토랑의 대거 진출로 가족과의 외식빈도가 부쩍 늘기 시작했다. 패스트푸드의 발달, 가사노동으로부터 주부들이 상당부분 해방됐음에도 외식비의 증가는 가족이기주의와 다른 사람에 대한 과시를 의식하는 하나의 소비패턴으로도 볼 수 있겠다.
넷째 소비자들은 전근대적 유통업체인 재래 시장과 구멍가게를 멀리하고, 백화점, 편의점, 대형 슈퍼마켓 등과 같은 현대화 시스템을 갖춘 유통시장을 선호하고 있다.
깨끗하고 다양한 A/S가 보장되는 대형매장에 밀려 구멍가게들은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소비자들은 고금화, 다양화된 상품서비스를 요구하면서 합리적인 알뜰구매 성향을 보여 가격할인점이나 백화점의 바겐세일을 쫓아다니고 있다. 「가격파괴」란 기치를 내걸고, 대도시에 파고든 할인점 또한 소비자들의 구매습관의 변화를 유도하고 있다.
특히 자동차 보급률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소비자들은 주거지를 벗어나 싼 곳이라면 어디라도 찾아가는 적극성을 보이고 있다.
한편에선 교통지옥과 주차난에 시달리는 소비자들이 아예 쇼핑시간을 줄여 자기시간으로 활용하고, 안방에 가만히 앉아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는 통신판매, 홈쇼핑TV 구매, 방문판매 등을 이용하게 된 것도 한 변화이다.
다섯째 정보화에 대한 욕구증가와 여가에 대한 관심 등으로 인해 새로운 유형의 통신 가전제품의 보유율이 크게 중가하고 있다.
특히 레저용품과 정보통신 등과 관련한 내구소비재 보유율이 크게 늘어났다. '95년 휴대용 전화기 수요는 전년에 비해 무려 75.7%, 무선호출기는 122.3%, 대형승용차는 107% 늘어나는 등 폭발적인 증가율을 기록했다.
마지막으로 '95년 3월 케이블TV 시대가 개막되는 등 방송환경의 대변화, 인쇄매체 지면의 증대, 잡지의 전문화, 패션화 등 매체접촉률의 확대로 인한 광고의 파워는 소비자트렌드의 엄청난 변화를 유도하고 있다.
또 한가지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갈 점은 바로 현대광고가 갖는 위력이다. 요즘의 광고는 나만의 개성을 강조하고 싶어하고, 자신의 취향을 즐기려는 현대인의 심리를 최대한 이용해 소비자들을 변질시키고 있다.
광고는 세대별, 계층별로 소비자들의 가치관을 유포한다. 신세대에겐 개성과 자유를, 젊은 여성에게는 아름다움과 매력을, 남성들에게는 성취욕구를 마구 부추긴다. 광고는 우리 생활에 없어선 안될 중요한 정보전달 수단임에 틀림없지만, 소비자들을 거의 무저항적으로 시험대에 오르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광고를 광고 그 자체로 볼 줄 아는 사람은 현명한 소비자이다. 쇼를 보고 진짜 인생처럼, 영화를 보고 현실로 혼동하듯 광고의 허상 속으로 끌어들여 소비자를 포로로 만드는 것도 현대광고가 갖는 폐해이다.
미래의 소비자는 인간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노력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지난해부터 국가적 슬로건으로 등장해 국민들의 공감을 얻고 있는 「삶의 질을 높이자」는 목표는 지난 1978년 런던에서 열린 세계소비자대회의 테마였다. 성숙형 소비사회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 이미 '70년대말에 소비자운동가들의 강력한 명제로 대두된 바 있다.
삶의 질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진 현상으로는 이른바 X세대, 미시족, 신중년층, 실버 세대 등으로 분류되는 세대별 소비현상의 다원화이다. 특히 2000년대에 예상되는 신세대와 노년 인구층의 양적 증가는 다양한 가치관과 라이프스타일이 공존하는 가운데 존재함에 주목할 만하다.
세대별로 구매력을 비교조사한 가운데 재미 있는 현상이 하나 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연령별 계층 중 20대가 가장 구매력이 높았다. 이는 학비, 취직, 결혼비용 등으로 인한 부담 때문으로 분석되며, 다음이 가정적으로 가장 안정된 시기인 50대, 40대 순이고, 지출능력이 가장 허약한 60대가 구매력이 가장 낮았다.
그러나 '90년대 들어서는 소위 미시, 우모족이라 불리우는 30대의 구매력이 가장 높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집장만해야 하고, 육아부담에서 헤어나지 못해 한창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야 하는 30대가 이제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안정적 기반에다 맞벌이로 인한 소득증가로 최대 소비계층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제품의 획득 자체에 큰 의미를 두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 물건 자체의 경제성보다 사용할 때의 분위기나 이미지를 중시하는 제3세대가 우리 사회의 주류로 떠오르면서 그냥 쓰고 버리는 식의 소비가 자연스런 현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 결과 자원의 결핍, 에너지 위기, 공해문제라는 커다란 문제가 전비자들에게 보다 큰 부담으로 다가서게 되었다. 제품의 획득과 사용으로 오는 만족감은 개별적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무분별한 소비로 인한 불이익은 모두가 함께 나누어 갖게 되고 아무도 이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미래학자들은 소비패턴도 인간에 대한 철학적 이해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제는 「무엇을 선택하는가」보다 「어떻게 사용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처분하는가」가 훨씬 중요한 소비윤리로 떠오르고 오다.
'90년대의 과소비, 차별화, 개성화란 소비현상은 21세기에 가서는 상품의 가치와 시대적 가치가 접목되는 성숙한 소비문화로 부상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