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피운 감나무 숲속의 텃밭 시암골
9월초 농장 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누군가 왔다간 모양이다. 농장 전체가 울긋불긋 등불이 켜 있었다. 뜻밖이었다. 어리둥절 바라보았다. 감나무들이 머리에 붉은 꽃다발을 얹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빨간 열매들이 핏발선 눈으로 심술맞게 째려보며 푸른 잎 속에 몸을 감추고 있었다. 희멀겋게 찌든 손수건처럼 영양실조에 걸린 감나무 잎들이 오기 시작하는 가을을 단장 하고 있었다. 옆집 감밭은 푸름 천지인데 내 텃밭이 있는 감밭은 불꽃으로 덮여 있었다. 어떤 놈들은 그놈의 지랄맞은 성깔을 참지 못하고 죽사발쳐서 땅에 떨어져 있었다. 단풍빛 오장육부를 보이면서 거세게 분노를 나타내고 있는 듯했다. 봄에 거름을 주지 않았다는 저항인 것 같았다.
환삼덩굴의 억척스러운 생명력은 십여 미터의 짧은 농장길을 점령해 버렸다. 길을 밟으며 오르는 동안 잡초들의 무시무시한 위용에 압도당했다. 숲속에 꼭 무언가가 숨어 있을 것 같았다. 물컹물컹 뒤둥구는 붉은 감들의 원성을 들으며 내 땀을 먹었던 텃밭에 도착했다.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잡초더미에 점령되어 버린 인적 없는 감나무 밭은 온통 풀 귀신들이 술 취해서 여기저기 누워 있는 것 같았다. 뒤늦은 후회가 천추를 타고 내려왔다. 내가 뿌리고 심었던 농작물들이 벌레도 먹고들, 잡초도 먹고 나도 먹고 하는 마음으로 함께 성장하여 가을을 추수하고 싶었다. 멍청이 같은 결정이었다. 악마 같은 탐심을 알면서도 게으름을 숨기기 위한 위선이었다. 하늘을 보았다. 분노한 구름이 나를 덮칠 것 같았다.
‘네끼놈, 니가 텃밭 주인이냐, 게으른 놈. 니 새끼들이 밤마다 울어싼다.’
때맞추어 투두둑 성질 급한 놈이 감나무에서 떨어졌다. 빨간 마음이 묽게 터지며 꿈틀거렸다.
‘휴~, 징하다, 그나저나 내가 도둑놈이다.’
올봄에 땅을 파고 씨 뿌리고 어린 종자를 심었던 텃밭을 보고 튀어나온 말이다. 한 달 전 까지만 해도 머리카락과 낯바닥을 보였던 내 새끼들이 풀 귀신에게 잡아 먹혀 버렸는지 도통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어허 , 어디서 누구부터 구해야 쓸까잉, 내 새끼들아- 미안하다.”
난감했다. 여기저기를 둘러보아도 나를 업신여긴 풀 귀신들이 촉수를 날램거리고 내 새끼들을 목조이고 있었다.
“꽤 밭농사가 많은 것 같소이다.”
장비 구입시 대장간 아저씨가 했던 말이 엊그제 같다. 그 말에 기죽지 않으려고 삽 곡괭이를 닥달했고 땅을 팠고 뿌리고 심었다. 더운 여름 김 메고 잡초 뽑고 거름 주고 감 익어가는 동안 그들도 익어가는 모습을 기대했다.
늙어가는 끝물 여름때, 첫 수확을 했다. 수박 참외는 없었고 옥수수 다섯 개, 꿈꾸던 토마토는 여남으 개 빈약한 수확에 그쳤다. 그래도 즐거웠고 주먹만 한 단 호박을 따서 맛있게 삶아도 먹었다. 청량 고추는 반 포대 정도의 선물을 받았다. 선물을 받아들고 숨을 헐떡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날은 몹시 더운 여름날이었다.
‘내가 지금 뭔 짓을 하고 있다냐? 허, 이것 미친 짓 아녀? 이게 몇 푼 된다고?’
몇 번을 생각해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장밋빛 마음은 가을을 기대하며 고개를 털었다.
‘아니다, 가을을 생각해 보라, 콩은 익고, 들깨는 털고 진홍빛 비트는 탐스러울 것이다. 그 리고 향내 풍기는 더덕, 잔대, 참당귀의 수확을, 더구나 하수오, 산마의 자라는 모습 볼 때 의 그 흐뭇함과 빨간 고추를 따서 말리는 그 즐거움은 클 것이다. 그리고 땅을 가꾸는 즐 거움은 얼마나 더 크겠는가. ’
뜨거운 여름날이 가고 새벽을 끌고 와서 추위를 느낀 몸뚱이를 덮는 계절이 도둑같이 찾아 왔다. 계절이 가져온 수확의 즐거움만 생각하며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다가 텃밭을 한 달여 만에 왔다. 미안한 마음으로 찾아 왔다. 큰 숨을 들이 마시고 물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인 후 환삼덩굴과 메꽃으로 목 졸리고 있는 고추밭으로 들어갔다. 고추의 괴로움과 슬픔의 신음소리가 풀 밟는 내 발자국 안에 모여 드는 듯 했다. 땅 바닥에 떨어진 빨간 고추가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가느다란 바람이 북채를 들어 그의 참았던 원망과 슬픔을 내리쳤다.
‘아이고~, 주인양반, 인자~오요~, 우리들이 보고도 안 잡씁디어. 그런대로 맛 있고 매운 고추도 드렸건만~, 해도 해도 너무 하요. 얼마나 기다렸는디. 그나저나 이년들 멀크댕이 싸움 징그럽소. 얼릉 찢어 말리쇼.’
그리움과 원망의 가락이 게으른 내 가슴에 허리 굽혀 흙집을 지었다.
감나무 밭의 감들은 애비 없는 틈을 타서 철 이른 화냥기로 난봉꾼 벌레들의 속살 애무를 즐기고 있었다. 고추밭의 슬픈 가락에 눈뜬 불그스레한 몇몇의 감들이 화냥년 소리 듣기 싫다고 몸을 던지며 우두둑 떨어졌다. 나는 소리쳤다.
“에잇 이 썩을 년들, 그만 안 둘래.”
고춧대를 잡고 멀크댕이 싸움하는 환삼덩쿨과 메꽃의 머리채를 잡아챘다.
‘이년아, 네 이년.’
고춧대를 감싸고서 서로 제 서방이라고 앙탈을 했다. 간신히 뜯어 말리고 고춧대를 보니 삐쩍 말라 있었다. 여기저기 살펴보았으나 고추는 보이질 않았다. 겨울을 보낸 후 세상에 첫 얼굴을 내민 어린 순 같은 고추만 몇 개 보였다. 심어 놓은 이십 주가 모두 빈약했다. 두 년들에게 얼마나 부대꼈을까? 화가 났다. 고추 지지대를 뽑고 낫을 들어 고춧대를 밑둥부터 싹둑 삭둑 잘라버렸다. 돌보지 않고 자란 자식들한테 용돈 적게 준다고 행패부리는 못난 아버지 같았다. 다시 잘린 고춧대를 펼쳐보니 환관이나 가지고 있을 법한 생기다만 고추가 몇 개씩 달려 있었다.
감나무에는 어린 나이에 바람난 감들이 볼그쪽쪽한 낯바닥을 내놓고 고추나무의 빈약한 몸을 보고 웃는 듯했다.
‘아나, 웃어라, 웃어, 이 느자구 없는 것들아.’
그들의 뺨을 때리는 듯 마침 바람이 불어 왔다. 바람기를 붙들고 히히덕거리던 붉게 익어버린 감들이 떨어져 죽사발이 되면서도 히죽거렸다.
옆 콩밭을 보니 그런대로 넓적한 귀로 풀 귀신들의 촉수를 때리며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줄기 곳곳에는 여물지 않는 콩깍지들이 붙어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제주 아낙네 같이 강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환삼덩굴 같은 넝쿨 식물들은 죄다 콩밭을 외면하고 왜 고추밭을 점령해 버렸을까? 콩밭은 쭉정이 같은 약한 갈대가 키를 자랑하며 건들거리고 있었다. 군집의 힘을 자랑하며 제법 까칠한 모습으로 위용을 자랑하는 듯했다. 콩은 척박한 땅일수록 종족 번식을 많이 한다고 하니까 그런대로 기대를 했다. 발목 근처에 가지 한 그루가 밀림 같은 숲속에서 가냘픈 몸매로 간신히 숨쉬며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나는 염치없이 그의 몸을 더듬었다. 가지는 없었다. 성추행이라고 고소당하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초석잠은 숲속 땅바닥에 엎드렸는지 보이질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살아서 돌아 오라 했다.
언덕 밑 조용한 곳에서 앙칼지나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곳에는 더덕과 산마 그리고 하수오를 심어놓은 자리였다. 급히 가서 보니 여러 종류의 넝쿨 촉수가 꿈틀거리며 손 잡아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더덕의 향기는 은은하게 나의 피부를 뚫고 들어와서 심신을 안정시켰다. 어쩐지 선의 세계로 인도할 것 같은 믿음도 주었다. 고급스런 향을 먹으며 왕성하게 뻗어가는 더덕의 촉수는 내공과 외공을 겸비한 거칠 것 없는 스님 같았다. 산마의 촉수는 어머니의 마음 같고 하수오의 촉수는 선 굵은 장군의 위엄 같았다. 이 셋이 서로의 마음을 연결하여 텃밭을 지킬 때 그 위용은 대단하리라 믿어졌다. 더덕 밭과 산마 밭 그리고 하수오 밭에는 긴 지지대를 세워 주었었다. 더덕 , 산마 , 하수오의 촉수들은 공격해 왔던 덩굴들과 뒤엉켜 서로를의 몸을 꼬며 짓이기고 있었다. 들어가서 넝쿨의 머리채를 잡고 목을 훑어 버리려고 했다. 자세히 더듬어 보았다. 그들은 음침한 그늘 숲에서 꼬여버린 새끼처럼 엉켜져 은밀한 정을 나누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몸뚱이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쥐었던 낫을 내려놓고 나에게 변명을 하며 좀더 깊은 가을을 기다리기로 했다.
마음을 털기로 했다. 감나무는 그 사이에 크리스마스트리가 되어 온통 빨간색 금줄로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초가을을 겨울이라고 우겨대며 눈이 올 것이라고 웅웅거리는 것 같았다.
“미친 것들이 지랄하고 있네.”
나는 감나무에 오줌통을 비웠다. 밑둥 짤린 고춧대에게 미안함과 서운함을 전했다. 짊어지고 간 배낭에는 몸과 마음만 주어 담고 빈손을 탈탈 털었다. 텃밭 농장을 나왔다. 다른 농장을 보니 푸른 감들이 푸른 잎들과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빨간 홍시 하나를 살짝 따서 입에 넣었다. 유난히 씨가 많았다. 힘껏 뱉으니 내 마음만 남기고 씨들은 멀리 날아갔다.
분명히 텃밭 농장의 감들은 일찍 바람을 피워 빨간 몸속에 여러 개의 생명의 씨를 잉태하고 있음이 확실했다. 그들의 이유 있는 반항과 바람기를 알기에 나는 하늘에다 웃음을 띄웠다.
첫댓글 가을 입니다. 밤도 익어가고 감도 익어갑니다.감나무 밑의 텃밭에 온갖 농작물을 심어 셨군요.
글을 읽는동안 눈앞에 그려지는 정경.
잡초와의 전쟁을 잘 표현하셨군요.
오늘 벌초를 하는데 따라 갔다와서 이글을 읽으니 잡초의 그 세력에 누가 감히 도전 하겠습니까? 싶습니다.
역시 잡초는 잡초였습니다......
거름하지 않는 감밭의 줄기에 매달린 감들, 계절을 빨리 뛰어와서 빨갛게 익어버린 몸둥이는 종족번식을 위한 그들의 몸부림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알지못한 언어로 서로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잡초들 한해를 살면서 종족 번식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라는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아픔이 신의 뜻과 상관이 있을 까요? 가을 입니다. 자연스럽게 우리들의 생각들이 어떤 형태로든 열매로 나타나겠지요. . 토실토실한 열매를 거두시길 ,건강하십시오.
농사란 예나지금이나사람손길이미쳐야 하는데 그래도 밭농사는 쉬엄쉬엄 하는데
여름에 논에비료주러논에갔다가
발에힘이없어뒤로나자빠져
흙투성이가되어이젠노롱사도할수없게됐으니 한심한생각이들더군요
가을에푸성한수확이기대되는군요
뿌려 놓고 거저 먹으려 했던 심보가 도적놈 심보였죠. 분수에 맞지 않게 넓은 터에 심어 놓은 농작물들 나머지라도 챙겼으면 합니다만 풍성함에는 거리가 멀것 같습니다. 내년에는 올해를 거울 삼아야겠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