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준의 음식 사람 <25> 나주곰탕
국제신문 2020-12-29
일제, 나주 소 하루 400마리 도살…조선인은 남은 부산물 한데 끓였다
- 한우 수탈 한창이던 일제강점기
- 日, 나주에 통조림 공장 세우고
- 전쟁 나간 군인 위해 고기 공급
- 남은 뼈·내장 등 조선인에 넘겨
- 상인들, 장터서 가마솥 걸어놓고
- 푹 끓여 국과 밥 함께 담아 팔아
- 값싼 고단백 음식 서민들에 인기
- 기름기 없이 맑고 담백한 국물
- 3, 4대째 그 맛 이어져 오는 중
가마솥에 곰국이 펄펄 끓고 있다. 뚝배기에 담긴 곰탕 한 그릇에 김이 모락모락 난다. 찬모들이 토렴하랴 뚝배기에 국밥 담으랴 분주하다. 국밥 위에 고명 올리는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게 현란하다.한 그릇 한 그릇이 든든하게 먹음직스럽다.
곰탕은 건더기를 넣고 오래도록 푹 고아낸 진국을 총칭해서 이르는 말이다. 그래서 국물이 진하면서도 영양가가 높아 보양식으로 널리 먹는 음식이다. 구수하고 담박한 맛에 남녀노소가 즐겨먹는다. 원래 곰국으로 불렸지만, 외식산업화 되면서 곰탕으로 불리고 있다.
조선 중종 때 역관 최세진이 집필한 훈몽자회(訓蒙字會)에 의하면 “곰탕은 국에 비해 국물이 진하며 정성이 많이 들어가는 진귀한 음식”이라고 기술하고 있을 정도로, 오래도록 고는 정성과 식재료에서 우러나는 영양성분이 남다르다고 하겠다. 주로 ‘곰탕’이라 함은 소의 고기 부위를 비롯해 대가리, 내장, 사골, 그 외에 혀, 꼬리 등 다양한 부위를 넣고 팔팔 끓여서 우려낸 국을 지칭한다. 물론 고는 식재료에 따라 닭곰탕, 생선곰탕, 염소곰탕 등도 있기는 하다.
■ 최대 곡창지로 목축업 발전한 나주
곰탕하면 떠오르는 여러 지역이 있겠지만, 큰 ‘쇠장’이 있던 대구 현풍과 영천, 나주 등이 대표적으로 맛있는 곰탕지역으로 꼽힌다. 특히 그 지역을 떠올리면 바로 곰탕이 생각나는, 지리적 특장의 곰탕은 단연 ‘나주곰탕’이다. 이미 나주곰탕을 브랜드화 한 전국적인 프랜차이즈도 있을 정도다. 그럼 왜 나주가 다른 지역보다 특별하게 곰탕으로 유명한 도시가 되었을까?
나주는 고려시대부터 전주와 함께 전라도 최대의 고을이었다. 전라도 행정과 경제·군사·문화의 중심지인 나주목과 나주읍성이 자리했던 곳으로, 당시 인구로 치자면 전국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혔을 정도로 고을의 규모가 컸다. 예부터 비옥한 곡창지대를 끼고 있었기에 호남의 쌀이 한데 모이고, 농경에 필요한 소들을 키우는 목축업이 발달했다. 전국 유일의 내륙 항구인 영산포 뱃길로는 홍어를 비롯한 남도 특산의 해산물들이 집산되는 등 다양한 물산이 흘러넘쳤다.
이렇듯 남도의 최대 중심지였기에 조선 선조 임금조차도 “나주가 없으면 호남이 없고, 호남이 없으면 조선이 없다”고 했을 정도로 나주를 중요시했다. 때문에 전국 최초의 5일장이 개설되기도 했던 남도물산의 거점이기도 했다.현재의 전라도(全羅道)가 전주(全州)의 전(全), 나주(羅州)의 라(羅)를 붙여서 지어진 것만 봐도 알 법하다.
■ 일제강점기 소 수탈이 집중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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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나주의 한 곰탕집에서 주문받은 곰탕을 차리고 있다. |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으로 가는 물산 또한 나주를 중심으로 수탈되었다. 남도 곡창에서 생산되던 쌀을 비롯해 다양한 수산물이 헐값으로 반출되었다. 뿐만 아니라 1916년에는 일본인 ‘다케나카 신타로(竹中新太郞)’에 의해 군납용 소고기통조림 공장인 ‘다케나카 통조림공장’이 나주에 들어섬으로써 수많은 농업용 소 또한 희생을 당한다.
나주시의 몇몇 향토연구자에 따르면 “나주를 비롯해 함평, 영암 등지에서 트럭으로 실려 온 조선 소를 이곳에서 하루 200~300여 마리 도축을 했다.”면서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에는 하루 400마리 넘는 소가 도살당했다.”고 당시의 기억을 전하고 있다.
얼마나 많은 소를 도살했는지 ‘다케나카 통조림공장’에는, 소의 영혼을 달래기 위한 ‘축혼비(畜魂碑)‘를 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부산 우암동의 ‘이출우역검역소’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소와 함께, 나주의 소들 또한 일제에 의한 수탈이 아주 심각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태평양전쟁에 투입된 일본군의 영양보급용 소고기통조림을 만들고 남은 소의 여러 부산물들은 조선인 업자들에게 헐값에 팔렸다. 일본인들은 먹지 않는 소의 대가리나 내장 등 각종 부산물들이었다.
당시 상인들은 이렇게 헐값으로 넘겨받은 소의 부산물로, 장터에서 가마솥을 걸고 장작불을 피워 국과 밥을 한데 담은 음식, 국밥 형태의 ‘곰탕’을 만들어 팔았다. 싼값에 영양가도 높고, 맛있으면서도 빨리빨리 밥상에 올라오는 음식이었기에, 장터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 대를 이은 곰탕맛집 즐비
현재 나주 금성관길 주변에는 10여 곳의 나주곰탕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맛난 곰탕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는 나주곰탕 명가들로는 ‘하얀집’ ‘남평집’ ‘노안곰탕집’ 등이 있다. 3, 4대를 걸치며 각기 다른 특색의 맛을 내는 이들 곰탕집들은, 한국전쟁 전후부터 곰탕을 팔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주 ‘하얀집’ 4대 주인장 길형선 명인에 의하면 “나주곰탕의 육수는 가마솥에 소의 사골을 넣고 오래도록 끓여내어 뽀얀 국물을 먼저 우려내고, 거기에 양지머리, 사태살, 목살 등을 넣고 진하게 더 끓여낸다.”고 말한다. 이때 발생하는 기름기는 말끔히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국물이 맑고 담백해진다.
손님이 주문을 하면 뚝배기에 밥을 넣고 뜨거운 육수로 여러 차례 토렴한 후, 채 썬 달걀지단과 대파 등 고명과 함께 따로 장만해둔 고기를 얹어 손님에게 낸다. 토렴과정을 거친 곰탕은 가장 먹기 좋은 섭씨 75도 정도에서 손님상에 오른다. 이렇게 해서 곰탕이 상에 오르는 시간은 2~3분 남짓. 가장 맛있고 영양가 높은 한국식 패스트푸드가 완성이 되는 것이다.
상에 오른 나주곰탕 한 그릇을 마주한다. 맑은 육수에 채 썬 대파와 노란 달걀지단이 식감을 자극한다. 수저로 국밥을 휘휘 저으니 큼지막한 소고기 몇 점이 숟가락에 가득하다. 국물을 한 술 뜬다. 처음에는 삼삼한 듯하다가, 입맛을 다실수록 진하게 차오르는 것이 일품이다.
소주 한 잔에 소고기 한 점 소금에 찍어 맛본다. 보들보들 부드러운 고깃살이 씹을수록 고소하면서 진한 육향 또한 그득하다. 밥 한 술 떠먹으니 밥알이 곰탕국물을 머금어 한 알 한 알 살아서 제 맛을 낸다. 제대로 담근 남도식 배추김치와 시원한 깍두기를 국밥과 함께 곁들인다. 소박한 찬이지만 이를 척척 걸쳐먹는 국밥 맛은 ‘제대로의 한 끼’에 손색이 없다. 남도사람들은 기호에 따라 깍두기 국물로 간을 해 먹는데, 이것 또한 나주곰탕의 맛을 기껍게 한다.
한 겨울, 뜨끈한 곰탕 한 그릇이면 부러울 것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한때는 임금께 진상했던 고급음식 중 하나가 곰탕이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에게 수탈당하고 남은 소고기 부산물로 고아, 서민들 보양식으로 널리 사랑받기도 했었다. 바람이 차다. 슬슬 끓는 곰탕 한 그릇으로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녹이는 것도 참 좋을 일이다.
시인· 음식문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