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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웅의 푸른나무 스크랩 청백리 곽안방선생과 현풍곽씨 충효의 상징 배롱나무
이팝나무 추천 0 조회 204 17.12.25 20:07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청백리 곽안방선생 사당을 짓고 심은 수령 400여 년의 달성군에서 가장 오래된 배롱나무

곽안방선생 상

곽안방을 기리는 포산세가

전국적으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현풍곽씨 십이정려각

솔레촌에 세거하고 있는 현풍곽씨 가훈

청백리 곽안방선생과 현풍곽씨 충효의 상징 배롱나무

명문 현풍 곽씨의 본향은 현풍면 대리이다. 그러나 대리보다 “솔례”로 불러주는 것을 오히려 더 좋아한다. 세조조 청백리로 익산군수를 지낸 곽안방(郭安邦, 1420?~1480?)이 터를 잡으면서 후손들이 예절바른 사람이 되라고 마을 이름을 솔례로 했다고 한다. 공은 또한 충효세업(忠孝世業) 청백가성(淸白家聲) 가훈을 남겼다. “충과 효를 가업으로 삼아 실천하고 청렴과 결백을 가문의 명성으로 삼으라"라는 뜻이다.

시조 곽경(郭鏡, 1117~1179)은 중국 관서지방 출신으로 호는 암곡(巖谷), 또는 초수(憔수)로 고려 때 귀화 1138년(인종 16)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시중평장사 금자광록대부에 올랐으며 포산군(苞山君, 포산은 현풍의 별칭)에 봉해졌다. 이후 후손들이 본관지 솔례에 세거해 오늘에 이른다.

명문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있으니 전국의 어느 문중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현풍곽씨 12 정려각(대구시 문화재자료 제 29호)이다. 혹자는 12정려각이라고 하여 12분의 충신, 효자, 열녀를 추모하는 곳으로 알고 있으나 숫자는 정려각의 칸수일 뿐 이다.

1598년(선조 31)부터 영조 대에 이르기까지 현풍 곽문이 배출한 충신 1, 효자 8, 효열부 6 등 15분을 기리고 있다. 처음에는 정려를 받을 때마다 개별적으로 하나씩 세우다가 영조 대에 이르러서 한데 모아서 세웠다고 한다. 15분은 다음과 같다.

충신 증 이조판서 안음현감 충렬공 곽준/ 효자 증 호조정랑 곽이상, 곽이후 형제 / 열부 증 정랑(正郞) 곽이상 처 거창신씨 / 열부 학생 유문호 처 현풍곽씨 / 효자 유학(幼學) 곽결, 곽청, 곽형, 곽호 4형제 / 효자 증 별검(別檢) 곽이창, 곽유창 형제 / 절부 계공랑(啓功郞) 곽재기 처 광릉이씨 / 열부 학생 곽홍원 처 밀양박씨 / 열부 학생 곽수형 처 안동권씨 / 열부 학생 곽내용 처 전의이씨

충과 효, 지아비에 대한 사랑이 요즘 와서 다소 의미가 퇴색되었지만 그래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소중한 가치관이다.

청백리 곽안방은 시조의 12대 손으로 아들 곽승화와 함께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다. 무과에 급제해 세종 조 해남 현감을 하면서 선정을 펼치자 주민들이 생사당을 지었다. 세조 원년 원정공신에 녹훈 되고 단종 때 익산 군수에 제수되었으나 단종이 승하하자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고 향리로 돌아왔다.

동강마저 목메어 길이 울어라 / 아무도 못 부르네 의제(義帝) 그 혼을

단군의 어진 교하 문명 밝은데 / 검은 안개 길이 덮여 만고 흠일세

그러나 현곽의 뿌리는 더욱 무성하여 소위 “현곽팔주(玄郭八走”를 배출한다. 곽안방의 현손으로 주(走)자 항렬이며 삼종 간 모두 28명 중에서 사표가 될 만한 8분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0, 선무랑 봉촌 곽초(1514~1561)

아버지는 성균관 사성을 지낸 곽지번이고 어머니는 양천허씨로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허린의 딸이다.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곽월과 호조참의를 지낸 곽규와 형제간이다. 부인은 전주이씨로 임영대군(臨瀛大君-세종의 4왕자) 이구의 증손녀로 홍양수 이완(洪陽守, 李玩)의 딸이다. 대구지역 임란 의병장 괴헌 곽재겸은 공의 넷째 아들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인종의 부마간택으로 내려진 금혼령을 따르지 않았다고 하여 파방(罷榜)되었다. 이후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하다가 48 세로 졸했으며 학문이 뛰어났다.

0, 황해도관찰사 정암 곽월 (1518∼1586)

아버지는 성균관 사성 곽지번(郭之藩)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 동지중추부사 허린(許磷)의 딸이다. 아들이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이다.

1546년(명종 1)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5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그 뒤 승문원정자·영천군수를 지내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572년(선조 2)에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지평, 이듬해 장령, 그 이듬해 사간, 1576년에는 의주목사, 그 뒤 호조참의를 거쳐 1578년에는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이듬해 황해도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581년에 제주목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청송부사로 다시 제수되었다. 1585년에 남원부사로 제수되었다.

무재(武才)를 겸비하여 국가에 위급한 일이 있으면 큰일을 맡길만하다 여겼는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곽재우가 의령에서 일어나 왜를 쳐서 큰 공을 세우니 사람들이 아버지의 기품을 닮았다고 하였다.

0, 호조참의 만주재 곽규(1521~1584)

아버지 성균관 사성 곽지번과 어머니 양천허씨 허린의 딸 사이에 태어났다. 선무랑 봉촌 곽초, 황해도 관찰사 곽월과 형제간이다. 부인은 남양홍씨 홍서린의 딸이다. 아들은 임란 시 창의한 노탄 곽삼길이다. 1555(명종 10)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삼사의 요직을 두루 거쳐 진주, 순천 등의 수령을 지내고 호조참의, 승지에 이르렀으며 64세로 졸했으며 학문이 높아 명망이 높았다. 후에 이양서원에 제향되었다.

0, 울산부사 곽익

남명 조식문하에서 수학하고, 1552년(명종 7)에 문과에 급제하여 울산부사를 역임하였다.

0, 강릉부사 죽재 곽간(1529~1593) : 아버지 사인 곽지견과 어머니 상산김씨 부사 김수돈의 딸 사이에 태어났다.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하여 1550년 형조좌랑에 임명되었다. 1552년 대동찰방 겸 수은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문정왕후가 불교의 부흥을 꾀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하였다가 언관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그 뒤 통례원 통례·성균관 사성·장악원 판사·사제감·종부시정·영천군수·공주목사·강릉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사원과 함께 초유사 김성일을 찾아가 싸우다가 김성일이 죽고 진영이 와해되어 돌아오던 중 죽었다. 저서로는 <죽재문집>이 있으며 화산서원에 규헌 승화(暌軒 承華), 예곡 율(禮谷 율), 괴헌 재겸(槐軒 再謙)과 함께 제향되었다.

0, 함안군수 탁청헌 곽황(1530~1569)

1556년(명 11)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함양군수, 진주진관 병마동첨절제사 겸 춘추관 편수관을 지냈으며,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이양서원에 제향되었다

0, 초계군수 예곡 곽율(1587~1593)

아버지는 참봉 곽지인이다. 남명 조식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사마시에 합격하여 김천도, 송라도 찰방을 역임하고 에천군수를 지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합천에서 창의하였으며, 그해 6월 초계군수로 부임하여 낙동강에 배로 침입하는 적을 수차에 걸쳐 공격, 토적하였으며, 고령, 성주, 무계에 등 낙동강 동쪽을 지키는데 지대한 공을 세었다.

0, 안음현감 충렬공 곽준(1551~1597)

안음현감 재직 중 정유재란을 맞아 황석산성에서 함양군수 조종도(趙宗道)와 더불어 가등청정의 왜적과 맞서 분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됨에 순절하였다. 그의 두 아들(이상, 이후와 자부 거창신씨, 출가한 딸 (류문호의 처)이 같은 날 죽으니 일문삼강(一門三綱)의 정려가 내려졌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예연서원과 안의 황암사(黃巖祠)에 제향되었다.

여덟 분 중 대과에 급제한 곽월, 곽규, 곽익, 곽간, 곽황, 임란 시 창의한 곽율, 임란 충신 곽준, 서원에 모셔진 분 학덕으로 사람의 추중을 받는 분 등 기라성 같은 인물을 배출해 가문을 더욱 빛냈다.

가묘(家廟) 옆에는 대구에서는 가장 오래된 배롱나무가 있다. 사당을 건립할 때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꽃이 100일 동안 핀다하여 백일홍으로도 불린다. 또한 자미화(紫微花)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 추위에 약하기 때문에 조선조에는 널리 보급되지 못했다.

그러나 꽃이 귀한 여름에 피고 당나라 현종이 특히 좋아해 궁궐, 그중에서도 신하들이 국사를 논의하고 황명을 출납하던 중서성을 자미성으로 바꾸는 일도 있었다. 따라서 한림을 상징하는 꽃이 되면서 우리나라에도 학문진흥과 인재양성을 담당하는 홍문관에 심었다.

이런 연유로 선비들이 좋아하게 되었다. 가묘의 배롱나무도 이런 후손이 나올 것을 기대하고 심은 것 같다. 실제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들 모두 무수히 뻗은 이 나무의 가지 중의 하나일 것이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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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7.12.26 18:10

    첫댓글 회장님 잘 보고 갑니다. 대단한 현풍곽씨 문중의 자부심이 대단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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