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동래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왜에 포로로 잡혀 갔다가 돌아온 인물.
[가계]
할아버지는 호조 정랑에 증직된 양조한(梁潮漢)이다. 양조한은 임진왜란 때 동래 향교 훈도로서 대성전에 모셔진 성현의 위패를 동래성 내 정원루(靖遠樓)로 옮긴 후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순절하였다. 아버지는 양홍(梁鴻)이며, 동래성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순절하였다. 부인은 경주 이씨(慶州李氏)이다.
[활동 사항]
양부하(梁敷河)는 12살 때 왜의 포로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끌려갔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를 보고 조선 아이도 일본 아이와 같구나 하며 일본어를 가르치니 3개월 만에 능숙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껴 가까이 두었다. 양부하는 일본에 온 중국 사신 심유경(沈惟敬)과 왕래하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암살할 음모를 모의하였다. 심유경이 객관에 머물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날 때마다 환약을 한 개씩 먹으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를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심유경이 이 약을 먹으면 기운이 넘치고 몸이 좋아진다고 하니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함께 약을 먹었다.
그런데 그 약은 독약이었다. 심유경은 중국으로 돌아와서 해독제를 먹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계속 그 약을 먹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양부하는 서부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의 사람이 되었지만,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모리 데루모토가 도쿠가와 이에야쓰[德川家康]에게 패하게 된다.
양부하가 모리 데루모토에게 귀국하기를 청하자, 내 영토는 깎이고 먹을 것이 적으니 많은 군사를 기를 수 없다면서 귀국을 허락하였다. 귀국 문서인 노첩(路帖)[통행증]을 받아 귀국하고자 하는 조선인 82명을 모아 쓰시마 섬[對馬島]를 거쳐 부산 감만포로 돌아왔다. 일본에 끌려간 지 27년 만인 1619년 39세 때이다.
[묘소]
부산광역시 금정구 노포동에 양부하 묘비가 있다. 앞면에 ‘처사 남원 양공 휘부하(處士南原梁公諱敷河)’라고 되어 있고, 그와 나란히 ‘배 유인 경주 이씨(配孺人慶州李氏)’라고 되어 있다.
풍신수길암살양부하54
천상선인 2021. 9. 4. 16:42
🐦🌿🐍🍁
양부하가 소우시츠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사카 사천왕사 앞에 일본옷 차림의 모자가 땅에 퍼질러 앉은 채 서로를 붙들고 울고 있었다. 🌲
무슨 곡절인가?
그런데 들리는 말이 조선말이었다.
“에고. 이 자식아. 이제야 만나다니!”
“어머니-. 엉엉...”
양부하는 말에서 내렸다.🐛
“어쩐 일로 이렇게 길바닥에서 울고 있습니까?”
“내가... 이 아들을 헤어진 지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이제야 만났어요.”🍄
아들 이름은 대수였다.
대수와 그 어머니는 임진년에 각기 따로 잡혀 왔다.
한양 주변에서 왜적과 싸우던 대수는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 부대에 잡혔고,
어미는 왜병이 한양에서 철수할 때에 우키다(宇喜多秀家) 부대에 잡혀 끌려왔다. 🐚
그간 오사카에 같이 와 있어도 서로를 몰랐다.
오늘에 오사카 거리에서 우연히 만났다. 🐪
어미는 오사카 대문사(大門寺) 사찰의 하녀로 있었고 아들 대수는 바늘을 파는 행상이 되어 있었다.
모자에게 양부하가 다가가서 말했다.🐁
“울음을 그치세요.
조선에서 전쟁은 곧 끝납니다. 고국에 함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어디에 사시는지 거소를 저에게 적어 주십시오. 🌿
나중에 고국으로 돌아갈 때에 함께 갑시다.”
양부하는 이 약속을 지켰다. 🌱
1607년에 여우길 등 1차 통신사가 왔을 때에 양부하는 이 대수 모자가 통신사와 함께 가도록 연락하고 배려했다.⛅
청년 양부하는 후시미성 축조에서 주방 감독을 맡았다.
성 거주 인력이 함께 식사하는 주방의 공사를 맡아 분주히 뛰었다.🌠
“천정까지 빈틈없이 석축을 쌓아요!”
“기둥 수를 배로 늘려 주시오!”
“불이 옮겨가지 않도록 방과 방 사이에 격벽을!” 🐐
그는 완벽한 공사를 추진했다.
다른 시설에 비해 주방은 열악한 것이 통례지만 양부하는 그렇지 않았다. 🐭
조선인으로서 일본인에게 뒤질 수 없었다.
일본에는 지진이 잦았다. 🐵
지진이 없는 조선에서 온 양부하에게 작은 미동 지진도 신경을 곤두서게 했고
때로는 멀미조차 느꼈다. 🐯
웬만한 진동 속에도 태연히 일하는 왜인들의 무신경이 부럽기도 했다.
“그 정도는 지진도 아닙니다.”
“큰 지진은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양부하는 돌기둥을 곳곳에 튼튼히 세웠다. 🌋
위에서 무너져 내릴 때에 대피할 공간도 만들었다.
견고한 시설이 되도록 골조를 튼튼히 하고 다양한 내진 시설을 갖추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