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문구의 평생 소원
나는 개인적으로는 소설가 이문구 선생을 잘 모른다. 그러나 그분의 '관촌수필'에 보이는 질박한 뚝심은 늘 선망의 대상으로 되어왔다. 하루는 민예총에서 신경림 선생을 만나 바둑을 세 판 두고 나서 내가 진 대가로 술 한잔을 대접해올리며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화제가 이문구 선생으로 돌았다.
"자네는 이문구 잘 모르지?"
"인사만 드린 적 있죠. 겉도 속도 황소 같은 분이더군요."
"황소 같구말구. 그래도 문구는 허허로운 데가 있어요. 자네 그 사람 평생 소원이 뭔지 아나? 못 들어봤어? 그 사람 고향이 대천이잖아. 대천에 가서 농사일이나 하면서 사는 거래."
"그게 뭐가 허허로워요."
"그 다음이 중요하지. 여름에 농사짓다가 대청에 드러누워 늘어지게 낮잠 자는데 황석영이나 송기원이 같은 문단후배들이 찾아오면 반갑게 맞이해서 참외 하나씩 깍아주면서 '그래, 너희들 어떻게 지내니? 석영아 너 아직도 소설이라는 거 쓰냐? 기원아 너 아직도 문학이라는 거 하냐? 이 소리 한번 해보는 게 평생 소원이래, 어때?"
나는 그때 그렇게 멋있는 평생 소원을 갖고 산다는 사실 자체가 부러웠다. 그래서 나도 그런 소원을 하나 갖고 싶었다. 이루어지든 않든 내가 그렇게 마음먹고 그런 삶에 마음 한쪽을 두고 산다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드디어 나도 소원을 하나 갖게 되었다. 늙어서 정년퇴직하고 나면 청도 운문사 앞 감나뭇집을 사서 여관이나 하면서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답사객이 찾아오면 얘기나 해주고 남들이 "요새 그 사람 뭐해?" 라면 그 누가 있어 "어디 절집 아래서 여관 한다지"라고 대답해준다면, 그런 말년을 갖는다면 괜찮겠다 싶었다.
운문사의 아름다움 다섯
그것이 벌써 10년 다 돼가는 얘기가 됐다. 내가 그때 왜 운문사 근처를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곰곰이 따져보니 금방 다섯 가지가 꼽힌다.
첫째는 거기에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어서 항시 사미니계를 받은 200여 명의 비구니 학인스님이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앳된 비구니를 바라볼 때면 뭔지 모르게 눈도 마음도 어질게 됨을 느낀다. 세상사람들이 나를 비웃어 여색을 탐하는 사람이라고 비방해도 나는 이것이 내 진심임을 속일 수 없다. 대학 선생을 하면서 나는 학생들이 가장 예쁘게 보일 때는 1학년 2학기 첫 강의에서 보이는 얼굴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1학년 1학기 때 모습은 촐망촐망한 눈빛이 어질지만 어딘지 어리둥절하는 불안이 보이고, 2학년이 되면 슬슬 꾀가 나서 어진 빛이 가시기 시작하고, 3학년이 되면 이제 알 것 다 알아서 사람이 질기게 되어가고, 4학년 2학기가 되면 아쉬움과 후회로움의 애잔한 눈빛으로 변하는 리듬이 느껴진다. 그래서 1학년 2학기 때, 아직은 선량하고 앳되면서도 뭔가 해볼 의욕으로 빛나는 눈빛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이다.
운문사 승가대학 비구니 학인스님들은 사미니계를 받고 2년 남짓 되어 입학하였으니 스님으로 살아가는 일생에서 1학년 2학기에 해당하는바, 나는 그들을 마주하고,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눈을 닦는다.
둘째는 장엄한 아침예불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절인들 아침예불이 없겠는가마는 250명의 낭랑한 목소리가 무반주 여성합창으로 금당 안에 가득할 때 우리는 장엄하고 숭고한 음악이 무엇인가를 실수없이 배울 수 있다. 그것을 아침 저녁으로 그것도 생음악으로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여간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셋째는 운문사 입구의 솔밭이다. 운문사로 들어가는 진입로 1km 남짓한 길 양옆의 늠름하면서도 아리따운 홍송의 자태는 그것을 보며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끼게 해준다.
넷째는 운문사의 평온한 자리매김이다. 운문산, 가지산 연맥으로 이어진 태백산맥의 끝자락, 이 곳 사람들이 영남 알프스라고 부르는 높고 깊은 산속에 자리잡았음에도 운문사는 넓은 평지사찰로 되어 있으니 그 안온한 분위기는 다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문경 봉암사가 열두 판 화판으로 둘러쳐 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꽃이 다 피어 늘어질 때의 모습이고, 운문사는 연꽃이 소담하게 피어오르면서 꽃봉오리 화판이 아직 안으로 감싸인 자태이며 바로 그 화심에 해당되는 자리에 절집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비구보다 비구니 사찰이 적격인지도 모른다. 한겨울 눈이 쌓였을 때 저 위쪽 암자, 사리암이나 내원암에서 내려다보면 운문사가 가장 운문사답게 보인다.
다섯째는 내 존경에 존경을 더해 마지않는 일연 스님, 답사기를 쓸 때면 가장 먼저 찾아보는 그분의 '삼국유사'가 여기에서 씌어졌다는 사실이다. '삼국유사'가 발간된 곳은 인각사였지만 그분이 집필한 곳은 이곳 운문사 주지 시절이었다고 생각되니 내가 죽기 전에 꼭 증언하고 싶은 '20세기 한국유사'의 집필의지를 다지는 신표로 나는 운문사를 생각했던 것이다. 그 점에서 나의 소원은 허허로운 경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이것도 향심(向心)의 덕이었을까. 아니면 말이 씨가 되었을까. 내가 영남대 교수가 되어 학교 근처에 숙소를 마련한 고은 뜻밖에 경산오거리에서 운문사 방향을 가리키는 곳으로 꺾어들어가다가 나오는 임대 아파트로 되었으니 내 소원에 반은 다가갔다는 생각이다. 나의 숙소에서 운문사까지는 차로 45분, 이제는 운문사에 지기(知己)를 얻어 절집 객실에서 묵어간 것도 서너 번, 학인스님 상대로 특강을 한 것도 두 차례 되었으니 어느 답사처보다도 내가 자신있게 안내할 수 있는 곳으로 되었다.
양노의 자운영 강의
청도 운문사는 겨울이 가장 아름답다. 그러나 운문사로 가는 길은 여름날이 더욱 아름답다. 어디에서 들어오든 길가 여름꽃들이 마치도 환영객들이 도열하여 축하의 손짓을 보내는 듯한 축복의 여정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이 꽃들의 환영을 받으면서 시골길을 달릴 때가 가장 행복한 여로라고 생각하고 있다.
답사를 가든, 수학여행을 가든 우리의 마음과 눈을 가장 즐겁게 해주는 것은 자연 그 자체이다. 장엄한 산, 시원한 바다, 유장한 강줄기, 그 사이를 비집고 뻗은 길...... 그것이 국보급 문화재를 보는 것보다 더욱 감동을 준다. 그중에서도 철따라 바뀌는 꽃과 나무는 우리의 정서를 더없이 맑게 표백시켜준다. 그 꽃을 보고도 아름다움을 감지하지 못하는 자는 국보도 보물도 그저 돌덩이, 나뭇조각으로만 볼 것이다.
몇해 전 여름답사 때 내 친구 안영노가 두 아들을 데리고 따라왔다. 충청도 청양이 고향이고, 거기에서 소학교를 나온 양노는 전공이 정치학인지라 문화재와는 거리가 먼 친구였는데, 1박 2일 답사중 회원들이 병아리처럼 안양노 뒤만 따라다니는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그는 뛰어난 들꽃선생이었던 것이다. 버스에서 내려 길을 걸으면서 길가의 풀과 나무 이름을 알려달라는 회원들의 주문이 쇄도하는 바람에 나중에 그는 아예 미리부터 요건 박달나무, 요건 갯버들, 요건 모르겠고, 요건 은사시나무...... 하면서 그 나무의 생리까지 설명하면서 다녔다.
그러다 정산 삼거리 한쪽 논가운데 있는 보물 제18호 구충석탑을 보러 가는데 보랏빛 작은 꽃이 줄지어 있는 아리따운 정경이 나타났다. 여지없이 한 열성회원이 안양노에게 달려와 이게 뭐냐고 묻는다. 그러자 양노는 꽃 앞에 주저앉아 꽃송이를 매만지면서 느려터지게 설명한다.
이게 자운영이여. 이쁘지이. 근데 이게 그냥 자라난 들풀이 아니이여. 역부러 씨를 뿌려 이렇게 심어놓은 것이지이. 초가을에 논둑에다 자운영씨를 줄줄 뿌리면 초여름에 이렇게 꽃이 피거든. 그때는 한창 모내기할 때가 된단 말이여. 그러면 모내기 가면서 이걸 뒤집어버리는 것이여. 풀이니까 잠깐이면 썩거든. 농부들은 이렇게 해서 땅을 기름지게 하는 것이여. 이런 건 시굴서 자란 애들은 다 아는 것이여.
그러나 서울 애들이 그걸 어떻게 알 것인가. 옛날에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했지만 지금은 기역자 쓰면서 낫을 모르는 세상이 되었는걸. 양노의 자운영 강의 때문에 보물 제18호 답사는 차질이 생기고 말았지만, 그까짓 탑이야 책을 찾아보면 나오지만 자운영 얘기를 어디 가서 들어볼 것이겠는가. 이후 답사객 중에는 김태정의 '우리꽃 백가지'를 필수책으로 들고 다니는 회원도 생겼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이고 또 안타까운 현실인가.
지난 (1993) 8월 1일, 나는 작곡가 이건용 교수와 함께 청도 운문사로 가면서 길가에 피어 있는 여름꽃을 보며 나의 답사회원들을 머릿속에 떠올리고는 혼자말로 양노처럼 주워섬겼다. 이건 달맞이꽃, 이건 접시꽃, 저건 부용화.
길가엔 땡볕에서 싱싱하게 자라난 호박이 야산을 타고 낮은 포복을 하면서 넉넉한 잎새로 탐스런 노란 꽃을 내밀고서는 호박벌을 부른다. 멀리 밭둑으로는 보랏빛 메꽃이 덩굴을 뻗으면서 밝은 햇살에 반짝거리는 모습이 아른거린다. 논두렁 밭두렁에 잘 피는 메꽃은 얼핏 나팔꽃 같지만 나팔꽃이 메꽃과에 속한다니 그 원조인 셈이다. 민용 김쌈노래 중에 나오는 그 메꽃이다.
메꽃같이 예쁜 이내 딸년
시집살이 삼년 만에
미나리꽃이 다 피었네.
나는 메꽃보다도 호박꽃을 더 좋아한다. 좁은 집 마당에는 호박을 심어놓고 그 꽃이 보고 싶어 여름을 기다린다. 그런 탐스런 호박꽃을 왜 못생긴 여자에 빗대어 순호박이라고 하며 멸시했는지 아직껏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호박꽃을 능멸하는 자를 능멸하며 강요배가 그린 그림 '호박꽃'을 좋아하여 그 그림 사진을 책꽂이에 붙여놓고 보고 있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질박함과 건강함과 순진함과 풍요로움의 감정을 다 담아낸 화박꽃 찬가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것은 이문구 같은 시인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동곡의 선암서원
운문사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갈래이다. 운문사는 태백산맥의 끝자락이 마지막으로 요동을 치면서 이룬 영남 알프스의 저 육중한 산덩이 운문산 북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니 운문사 너머 남쪽은 밀양이고, 동쪽은 울산 석남사, 서쪽은 청도읍내, 북쪽은 경산군 압량벌로 연결된다.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청도에서 곰티재를 넘어 동곡(東谷)에서 꺽어들어오는 것이 정코스라고 하겠지만, 지금은 경부고속도로 경산인터체인지에서 자인을 거쳐 동곡으로 들어오는 길이 제일 빠르다. 대구에서 운문사로 간다면 청도로 갈 것 없이 경산시내로 들어와 영남대학교를 왼쪽에 두고 남산면을 거쳐 동곡으로 빠지는 길을 취하면 된다. 그러니까 합천 해인사가 사실상은 고령 해인사로 되듯, 청도 운문사는 경산 운문사인 셈이다.
어느 길을 택하든 동곡은 운문사 초입이 되는 것이다. 동곡은 청도군 금천(錦川)면의 다운타운으로 운문산에서 흘러내린 운문천과 단석산에서 발원한 동곡천이 합류하여 동창천(東倉川)을 이루며 제법 큰 내가 되어 들판을 휘감고 돌아가면서 만든 강마을이다. 그래서 비단 같은 냇물이라는 마을 이름을 얻었나 보다.
금천면 동곡의 동창천가에는 아름다운 경관을 갖춘 선암서원(仙巖書院)이 옛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선암서원은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와 소요당(疏遙堂) 박하담(朴河淡)을 모신 서원으로 선조 원년(1568)에 매전의 동산동 운수정(雲樹정)에 세운 것을 선조 10년(1577)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는 이곳 동곡에서 의병이 크게 일어나 천성만호(天城萬戶) 박경선(朴慶宣)이 선암서원 맞은편에 있는 어성산(御城山) 전투에서 봉황애 절벽으로 왜장을 안고 떨어져 순국한 추모비가 서 있다. 게다가 정조때 서학(西學)으로 이름 높은 이가환(李家煥)이 찬한 "임란창의청도십사의사합전(壬亂倡義淸道十四義士合傳)"이 비석으로 세워 있어 이 예사롭지 않은 구구의 뜻을 선비의 지조와 함께 새겨보게 된다.
선암서원 아래로는 소요대 높은 바위 아래로 동창천이 유유히 휘돌아간다. 한여름이면 누구든 미역이라도 감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는데 강가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청도군수의 '위험' 경고판에 "작년 익사자 12명"이라는 고지사항이 붉은 글씨로 씌어 있다. 물이 맴돌아가는 소용돌이 현상에 수심이 4m에서 8m나 되는데다 수심 2m로 내려가면 수온이 섭씨 4도로 내려가는 바람에 익사자가 많이 난다는 것이다.
나는 어차피 헤엄을 못 치기 때문에 굳게 닫힌 서원을 한바퀴 도는 소요로 소요대의 정취를 만끽한다. 준수한 소나무가 강변을 따라 오솔길을 안내하고 서원 뒤쪽으로는 각이 지듯 꺽인 운문산 줄기가 마냥 듬직하고 시원스러운데, 밭에는 초여름이면 보리가 누렇게 익고, 한여름이면 호박꽃이 장관으로 피어나는 싱그러움을 보여준다. 오가는 길손의 손을 타서 남은 것이 있을까 보냐마는 산따릭 덩굴이 발목에 와 닿으며 양지바른 곳으로는 엉겅퀴, 메꽃이 제철에 피어난다.
서원에 들어앉아 남쪽을 내다보면 낮고 부드러운 능선 너머로 각이 지고 검푸른 영남 알프스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뜰에는 해묵은 배롱나무 한 쌍이 한여름이면 붉은 꽃을 탐스럽게 피워내는데, 뒤뜰엔 까만 오죽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선암서원은 이처럼 조용한 강변의 정취가 아늑하여 간혹 대학원생을 데리고 여기에 와서 야외수업을 하는 나의 서원이기도 하다. 영남대 내 연구실에서 여기까지는 자동차로 30여분 거리이다.
그러던 선암서원이 작년부터는 담장 보수공사를 하더니 문을 굳게 잠그는 바람에 서서히 귀신 나올 집으로 변해간다.
우리나라의 옛 마을에는 서원이 있고, 산속엔 절집이 있다. 절집은 아무리 허름해도 온정이 느껴지는데 서원은 아무리 번듯해도 황량감과 황폐감만 감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사실, 사람이 살고 안 살고의 차이다.
선암서원 대문이 열려 있을 때 촌로들이 거기에 와서 나무토막을 베고 누워 정담을 나눌 때는 지나가다가도 들러보고 싶은 집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문 열고 들어가라고 해도 무서운 집이 되고 말았다.
동곡에서 점심을 먹을 때면 가정식 백반을 경상도치고는 제법 정성스레 차리는 '육동댁 금동식당'에 가거나 '강남반점'의 짜장면을 먹는다. 강남반점은 운문사 비구니 학인스님들의 단골집으로 고기를 넣지 않은 스님용 짜장면을 시켜야 더 맛있다.
운문댐 앞에 서서
동곡에서 경주 방향으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방지마을이 나오고 곧게 뻗은 길이 작은 고개를 넘으면 갑자가 깔끔한 시골 속의 도회가 나타난다. 여기가 신대천(新大川) 마을로 운문면사무소 소재지이다.
속 모르는 외지인은 신대천에 와서 집들이 하나같이 깔끔하고, 도로폭이 널찍한 것을 보고 근대화된 마을이라고 좋아할 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는 슬픔의 마을이고, 집집마다 피어오른 한숨으로 가득 찬 아픔의 현장이다. 보아라, 넓은 길에 인기척 드문 이 영화 촬영세트 같은 마을에 어디 생기라는 것이 있는가.
신대천에서 마주보이는 육중한 운문댐이 생기는 바람에 댐 너머에 있던 면사무소 소재지에 있던 대천리 사람들을 집단으로 이주시켜놓은 마을이다. 그래서 신대천이다.
신대천에서 오른쪽으로 산고개 한 굽이를 돌아오르면 고갯마루에서 장대한 운문댐을 조망할 수 있다. 금년(1994)부터 담수를 시작하여 날이면 날마다 물이 불어나는데 3년 뒤 담수가 끝나는 날이면 산 하나가 섬으로 둥둥 뜨게 되어 있다. 운문댐은 지금 페놀사태로 불안에 쌓인 대구사람들의 식수원이 된다. 나는 운문댐이 세워지기 전, 저 호수 한가운데 옴팍하게 자리잡고 있던 아름다운 시골마을 대천리를 잊지 못한다. 대천리 마을로 들어서 긴 다리를 건널 때 나는 운문사가 멀지 않음을 알곤 했다. 댐이 만들어지고 마을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하고 집들이 철거되는 전과정과 시시각각의 변화를 보아왔다.
우리는 수몰지구 사람들이 겪는 아픔을 다는 모른다. 나라의 큰살림과 산업화를 위하여 댐건설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며,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농토를 잃고 정든 고향이 물에 잠긴다는 감상 때문에 댐건설을 반대하는 것도 아니다. 댐을 만들되, 수몰지구 사람들이 이전처럼 평온히 살 수 있는 최대의 보상을 해주어야 하고, 그럴 수 있을 때 댐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토지보상을 다 해주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만약 그런 말을 쉽게 하는 자가 있다면 저 철거민이 당신의 부모라고 해도 그렇게 말하겠냐고 되묻고 싶다. 그들이 받은 토지보상금으로 그들은 전과 같은 농지를 살 수 없다. 토지의 정부고시가와 실거래가의 차이 같은 것이다.
고향을 쫒겨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연고도 없는 낯선 동네를 찾아가서 다시 농사를 짓는 일, 도시로 나아가 막노동 품을 파는 일, 신대천으로 이주하여 가게 하나 내보는 일, 그 이상의 선택은 없다.
오직 한 가지 이유, 운문면 대천리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살았다는 이유 하나로 이들은 졸지에 캄캄한 바다에 던져진 조각배이고, 사막에 떨어진 씨앗 같은 미물이 되고 말았다는 데 아픔과 슬픔이 있는 것이다.
대천리 사람들의 집단 강제이주는 1991년 가을부터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그해 가을 운문국민학교에서 열린 최후의 운동회는 생이별의 마지막 잔치로 치러졌다. 그러나 이들은 눈물잔치를 벌인 것이 아니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이 진국들은 운동회날 원없이 뜀뛰고 원없이 춤추면서 서러운 인생은 팔자소관으로 돌리고 웃음을 잃지않은 생의 달관자들이었다. 그들을 보고 있는 내 눈시울만이 공연히 붉어졌을 뿐이다. 이제와 생각하니 그분들은 어쩌면 울고 싶어도 울 눈물마저 말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1992년 봄부터 잔인한 불도저는 대천리마을 건물과 집드을 허물기 시작했다. 모든 담벽에는 붉은 스프레이로 철거. 철거, 철거...... 철거가 휘날리는 초서체가 씌어졌다. 그 철거 글씨가 미처 닿지 ㅇ낳은 벽에는 철자법 하나 맞지 않는 대천리 사람들의 흐느끼는 호소와 분노의 외침도 적혀 있었다.
"운문댐 만들지 마시오."
"흐물면 붕알 까뿐다."
철거작업이 한창 진행되던 1992년 봄, 나는 나의 학생들을 데리고 여기에 왔다. 야외수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학습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여기서 보고 느긴 것들을 눈물로 그려 제출하라는 과제를 내주고, 눈물이 나오지 않은 자느 아예 과제물을 내지 말라고 했다.
학생들과 철거된 마을을 휘돌아보니 그 모든 정경이 괴팍한 것을 좋아하는 전위예술가들의 난폭한 작품 같았다. 어쩌면 크리스토나 씨걸 같은 금세기 최고의 아방가르드 작가도 상상치 못할 설치예술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기야 현실을 뛰어넘은 예술은 없다. 그 모두가 현실의 모방일 뿐이며 현실은 항상 예술가, 정치가, 학자를 앞질러 지나갔다.
달걀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 을씨년스러운 국민학교 교실 한 쪽 깨진 유리창 너머로는 팔이 부러진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보였다. 마을 위쪽 언덕에 자리잡았던 교회당에는 구멍난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이 바닥의 비닐 장판을 때리면서 처절한 음악을 연주하낟. 제법 큰 집 뒤켠에는 죽은 고양이를 파먹는 구더기 수천 마리가 악머구리 끓듯 득시글거리고 있다. 초가는 허물어지고 뼈대만 앙상히 남은 어느 가난했던 집 장독에는 터진 소금독을 철사로 동여매어 스던 손잡이 깨진 오지독 하나만 남겨놓고 일뚤하게 이사했다. 그 아랫집은 다시는 농사를 짓지 않을 작정이었던지 낫, 호미, 쇠스랑 등의 농기구를 그대로 놓아두고 떠났다.
대천리 장터 네거리로 나오니 철거하지 못한 아주머니와 신대천으로 이주한 아주머니가 손을 맞잡고 얘기를 나누고 있다. 검게 탄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건만 억지로 웃으지으며 "복 많이 받으래이" 하며 손 흔들고 헤어지던 그 아낙의 모습이 선히 떠오른다.
수몰지 답사는 미술가 답사가 아니라 인류학 . 사회학 답사처라 할 수 있다. 나는 우리 하교 문화인류학과의 박현수 교수와 함께 폐가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며 돌아다녔다.
미술사를 전공하는 내 눈에는 함석물받이 오리의 모습, 버리고 간 둥근 경상도 장독, 부서진 액자 속의 밀레의 만종 모사화, 운문국민학교 2학년 1반의 옛날 책상과 걸상...... 그런 것이었따. 인류학자 박현수 교수는 새마을회관의 옛날 외상장부, 교회당에서 주운 연봇돈 내역서, 어느 집 건넌방의 도배지 무늬와 메모 낙서, 운문국민학교 1963년도 졸업앨범...... 그런 것이었다.
우리는 수거한 폐품을 무슨 전리품처럼 모아두고 저마다의 감회 속에 담배를 꼬나물었다.
그때 저쪽 문명중학교 교정에서는 스승의 날 행사를 연습하는 브라스밴드가 텅 빈 대천리 마을 하늘에 장송곡 가락처럼 길게 퍼졌다. 말수 적은 현수형(나는 그렇게 부른다)이 입을 열었다.
야---, 저 소리를 어떻게 사진으로 담아가는 방법은 없나.
그리고 지난 여름 이건용 교수와 이곳을 지날 때 대천리에는 아무도 살 지 않았다. 운문천을 가로지르던 긴 돌다리 하나만 보일 뿐 쑥대만이 무성하게 자라 어디가 집터였고 어디가 학교였고, 어디가 교회였는지 눈에 잡히지 않는다. 운문댐은 완성되어 거대한 장벽으로 둘러쳐 있고, 저수지 관제탑도 높게 올라서 있다. 대천리 옛마을에는 적막만이 가득하고 담수를 알지 못하는 감나무, 복숭아 나무들은 여전히 탐스런 실과를 주렁주렁 맺고 있었다. 천지공사를 알 턱이 없는 호박꽃, 메꽃 들이 미치고 서럽도록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무너진 여관집 주인의 꿈
대천리 수몰지구 너른 호수를 저 아래로 내려다보며 새로 닦은 포장길을 따라 운문사를 향하여 계곡을 타고 오르면 이내 냇가 쪽으로 집들이 길게 늘어선 제법 큰 마을이 나온다. 여기가 문명리(문명리), 그 윗마을이 신원리(신원리)이다. 운문댐 수몰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마을이니 언젠가 담수가 긑나고 나면 여기는 필시 매운탕집 동네가 될 것만 같다.
문명리, 신원리에 사는 어린이들은 문명국민학교에 다닌다. 문명국민학교는 역사가 깊다. 본래 이곳은 가마솥공장으로 유명했다. 일제시대에 마을 사람들의 교육열이 높아 이 학교를 새웠다고 하니 그것 자체가 뿌듯한 역사의 자랑이다.
개인적으로 나의 은사 김윤수 선생이 이 문명국민학교 출신이어서 운문사로 올 때마다 고개를 그쪽으로 돌리고 시선을 놓지 않는다. 김윤수 선생은 본래 청하가 고향인데 교편을 잡고 있던 선친께서 문명국민학교로 전보되는 바람에 아우들과 이 학교를 다녔고 운문사 앞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운문사 입구 신원리에는 아직 이렇다 할 여관이 없다. 오짓 삼보여인숙(구 부산여인숙)이 있어 답사 때마다 여기에 묵어가는데 이 여인숙의 운치는 여느 관광지 여관과 비길 바가 아니다. ㄷ자 슬레이트집으로 툇마루에 걸터얹으면 마당을 중심으로 좋은 회식장소가 된다. 영니숙 앞뒤 좌우가 죄다 논밭으로 둘러있는데, 찻길에서 여관 대문으로 이르는 길 좌우도 논이다. 어느 가을 날 벼이삭이 고개 숙일 때 한 답사객이 여관으로 들어서면서 그 벼이삭을 매만지며 꽃밭의 고운 화초 같다는 말을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나는 간접화법으로 욕을 했다. "농사꾼 할아버지가 그 소리를 들엇으면 다리몽둥이 분질러놓았을 거요."
그런데 주인아주머니는 이제 허물고 좋게 새로 지을 거란다. 당신네들처럼 이상한 사람들이나 와서 여관 운치가 좋다고 하지, 다른 관광객들은 목욕탕이 떨어져 있다느니, 방음이 안 된다느니 하면서 단 데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운치도 살리고 방음시설, 목욕시설을 갖추는 것은 붕가능할까. 그런 시범을 보일 수 있는 건축이 이 땅엔 정년 불가능한 것인가.
내가 그리는 여관집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나의 운문사 앞 여관계획은 실현이 불가능해졌다. 운문댐으로 이곳 땅값이 하늘 높이 솟아버린 것이다.
저 푸른 소나무에 박힌 상처는
운문사에 당도하는 그 시각이 몇 시이든 여장을 풀고 곧장 운문사로 들어가는 것이 나의 운문사행 답사 정코스이다. 해묵은 노송들이 시원스레 뻗어올라 소나무 터널이 높이 치켜든 우산처럼 드리워진 솔밭 사이를 여유롭게 걷는다. 저 청정한 솔바람소리에 실려오는 낮은 소리를 들으며 무작정 걷는 순간 나는 법열에 든 스님보다도 더 큰 행복을 느낀다. 냇물이 흐르는 소리이든, 풀벌레 우는 소리이든, 바람에 스치는 마른 갈대 몸 뒤척이는 소리이든, 눈보라 속에 산죽이 춤추는 소리이든, 아니면 운문사 비구니의 염불소리이든 붉은 홍송은 하늘로 치솟고 소리는 낮게 가라앉는다.
운문사 솔밭은 우리나라에서 첫째는 아닐지 몰라도 둘째는 갈 장관 중의 장관이다. 서산 안면도의 해송밭, 경주 남산 삼능계의 송림, 풍기 소수서원의 진입로 솔밭, 봉화군 춘양의 춘양목...... 내 아직 백두산의 홍송을 보지 못하여 그 상좌를 남겨놓았지만 남한땅에 이만한 솔밭은 드물 것 같다.
운문(雲門)이라! 그 내력은 운문사에서 따온 것이지만, 문자 그대로 운문사는 구름문을 젖히고 들어오듯 안개가 짙게 내려앉는다. 그리하여 붉은 홍송줄기가 습기를 머금어 불그스레 피어오를 때 운문사 소나무들은 더욱 아름답다. 마치도 늘씬한 각선미의 여인들이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나는 운문사 소나무의 각선미가 하도 인상깊이 박이어 이하여대 앞 어느 란제리가게 진열장에 도전적으로 배치된 스타킹 마네킹 다리를 보면서 운문사 소나무를 연상한 적도 있다.
아리따운 자태로 말하든, 늘씬한 각선미로 말하든, 늠름한 기상으로 말하든, 연륜의 근수로 말하든 운문사 소나무는 가장 아름다운 조선의 소나무이며, 조선의 힘과 자랑을 가장 극명하게 상징한다. 뿐만 아니라 우문사 소나무는 조선의 아픔과 저력, 끈질긴 생명력까지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운문사의 노송들은 그 밑둥이 마치 대검으로 찍히고 도끼로 파인 듯한 큰 흠집을 갖고 있다. 이것은 일제 말기 '대동아전쟁' 때 송진을 공출하기 위하여 송진 받이낸 자국이다. 그들은 석유 대용을 위하여 이 송진으로 송탄유(송탄유)를 만들어 자동차를 운전할 정도로 발악하였다. 우리 어머니가 시집오기 전에 매일 하는 일이라곤 온갖 공출에 시달리며 칡뿌리, 송진 캐러 다닌 것이었단다.
그러나 보라! 조선의 소나무는 그래도 죽지 않고 여기 이렇게 사철 푸르게 살아 있지 않은가. 웬만한 소나무는 그 칼부림, 도끼부림에 생명을 다했을 것이련만 조선의 소나무는 그 아픔의 상처를 드러내놓고도 아리따운 자태로 늠름히 살아 있지 않은가. 저 푸른 소나무에 박힌 상처는 우리가 극복해낸 역사적 시련의 상처일 뿐이다. 아무리 모진 시련도 우리는 그렇게 꿋꿋이 이겨왔다.
나는 운문사 소나무 숲길ㅇ르 걸으면서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을 그렇게 읽는다.운문면 대천리 검붉은 피부의 아낙들이 캄캄한 현실 속에서도 웃음지으며 서로를 축수하는 그 아픔의 아름다움까지도 여기서 읽는다.
하나의 유적을 답사할 때면 그곳의 내력을 알고 모름에 따라 유물의 성격뿐만 아니라 그 의의를 느끼는데 엄청난 차이가 난다. 특히 운문사처럼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이 중요하거나 주목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서린 분위글 잡아내야 하는 겨우 싫든 좋든 자초지종을 일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어디에도 답사객에게 그런 편의를 제공하는 안내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답사기로서는 아주 예외적인 글을 하나 쓰게 되었다. 이 딱딱한 내용의 '운문사 사적기와 우문사의 내력'은 독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답사객을 위한 예비정보의 글이니 독자는 거넌뛰고, 답사객은 운문사에 갈 때 한번 읽어주기를 바란다.
대작갑사와 가슬갑사
운문사의 내력은 무엇보다도 운문사 주지였던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의 '원광서학'과 '보양이목'에 자세히 나와 있다. 또 숙종 44년(1718) 채헌이라는 스님이 쓴 '호거산우문사사적기'가 있어 그 자초지종을 알 수 있는데, 간혹 앞뒤의 말이 맞지 않는 것이 있고 또 정치사적 변고는 감추어버렸기 대문에 불가불 나의 재해석과 재구성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18년(557)에 한 도승이 지금 운문사 5리 못 미쳐 있는 금수동 계곡에 들어와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더니 홀연히 득도하여 도우 10여 명과 산세의 혈맥을 검색하고 다섯 개의 갑사를 짓기 시작하여 7년 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오갑사는 현재의 운문사인 대작갑사를 중심으로 동쪽 9000보 지점에 가슬갑사, 남쪽 7리에 천문갑사, 서쪽 10리에 대비갑사, 북쪽 8리에 소보갑사 등이었다.(사방의 갑사들은 오늘날 모두 폐사되고 서쪽 대비갑사만 대비사로 개명하여 남아 있는데, 동곡 선암서원 맞은편 산중턱에 있다.)
오갑사의 첫번째 중창지는 원광법사였다. 일연 스님은 '삼국유사'의 제5건 의해 편에서 첫머리에 원광법사를 논하면서 '원광서학'에 대하여 이례적으로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자신이 그 글을 쓰고 있던 바로 그 자리의 일인지라 이처럼 세심한 배려를 가했던 모양이다.
일연 스님에 의하건대 원광법사는 징평왕 22년(600)에 귀국하여 경주 황룡사에 있다가 대작갑사에 와서 3년간 머문 뒤 가슬갑사로 옮겨갔다.
원광법사는 바로 이 가슬갑사에서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저 유명한 '세속오계'를 내려주었다.
운문사 입구 신원리에서 가지산 석남사로 넘어가는 험악한 고개가 한창 포장중이어서 지금쯤은(1994.6) 거의 완공됐을 법도 한데 그 고개를 운문령이라고 하고 대동여지도에서는 가슬치라고 한바, 가슬갑사는 계곡을 따라 5km쯤 들어가면 나오는 신계리마을 동쪽 문복산 기슭의 속칭 '절티낌'으로 추정되며 지금도 주춧동 10여 개가 밭고랑에 머리를 내밀고 있다. 신계리에서 가슬갑사 폐사지를 오르는 길은 왕복 2시간의 산행길이다.
보양국사의 중창
가슬갑사 이후 통일신라 250년간은 오갑사의 사정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어느 때인가 이름도 방대한 오갑사는 폐사가 되고 후삼국 전란중에 운문사는 다시 역사 속에 부상한다.
운문사의 두번째 중창자는 보양국사였다. 보양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주석한 곳은 밀양(密陽)의 봉성사(奉聖寺)였다. 왕건이 동정(東征)을 하여 청도의 경계까지 쳐들어갔는데 산적무리들이 견성(犬城)에 들어가 거만을 부리며 항복하지 않았다. 왕건은 산 아래로 내려와 보양 스님에게 방책을 물으니 스님은 이렇게 묘책을 가르쳐주었다.
대저 개라는 짐승은 밤을 지키지 낮을 지키지 않으며, 앞을 지키지 뒤를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니 낮에 그 뒤쪽(북쪽)을 치시오.
바로 그 보양 스님이 전설적으로 운문사를 중창한다. 보양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바다를 건너는 중 해룡이 그를 용궁에 처허여 금라가사(金羅袈娑) 한 벌을 주고 그의 아들 이목(珥目)에게 스님을 모시고 가 작갑(鵲岬)에 절을 창간하라고 했다.
보양이 폐사를 일으키려고 산 북쪽에 올라가 살펴보니 뜰에 5층황탑(黃塔)이 보였다. 그래서 뜰로 내려왔는데 황탑은 자취없이 사라진다. 보양은 다시 산으로 올라가 탑이 있떤 자리를 내려다보니까 카치들이 땅을 쪼고 있었따. 이때 보양은 '작갑'이 곧 '까지곶'이라는 사실이 생각났다. 다시 내려와 까치가 있던 곳을 파보니 무수한 전돌이 나오는데 그것으로 탑을 쌓으니 한 장도 남음이 없었다. 이리하여 보양은 여기에 절을 짓고 작갑사라 하엿으며, 얼마 후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였는데 보양 스님이 작갑사를 세웠다는 말을 듣고 오갑(五岬)의 밭 500결(結)을 절에 부치게 하고 태조 20년(937) 운문선사(雲門禪寺)라는 사액(賜額)을 내려주었다.
이목소의 전설
왕건이 운문이라고 이름지어 내린 것은 당나라 때의 고승 '운문문언(雲門文偃. 864~949)을 가리키는 것이다. 유명한 '운문 어록'의 운문 스님을 기리는 뜻이다. 운문 스님은 "만약에 석가모니가 내 앞에서 다시 한번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오만을 부린다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놓겟따"고 호언할 정도로 대단한 분이었다.
지금 운문사에는 보양이 다시 쌓았다는 전탑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운문사 작갑전에는 사천왕상이 4개의 돌기둥에 정교하게 조각된 석주가 남아 있어 이것이 보물 3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사천왕 석주는 추축건대 전탑의 1층 탑신부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게 된다. 지금 안동 지방에 많이 남아 있는 전탑 중 특히 조탑동의 5층전탑 구조에서 사천왕의 위치와 비교하면 바로 알 수 있는 것으로 보양이 '5층황탑'이라고 한 것은 전탑의 상륜부가 금색으로 단청되었던 것을 말하는 것이 된다.
이처럼 신비한 전설의 소유자인 보양의 이적(異跡)은 여기에 머물지 앟고 이목소의 전설로 이어진다. 그것이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이목(이目)은 절 곁의 작은 못에 살면서 법화(法化)에 게으르지 않았는데 어느 해에 날이 몹시 가물어 채소들이 모두 말라죽으므로 보양은 이목에게 부탁하여 비를 내리게 하니 흡족히 해갈되었다. 그런데 천제(天帝)께서 하늘의 일을 마단히 가로챈 이목을 죽이라고 천사(天使)를 내려보냈다. 이목은 보양에게 달려와 구원을 요청했다. 보양은 이목을 마루 아래 숨겨두었는데 이내 천사가 물에 내려와 이목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보양은 손가락으로 뜰 앞의 배나무를 가리키며 이목(이목)이라고 하였다. 이에 천사는 배나무에 벼락을 내리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이 때문에 배나무는 거의 죽어가게 되었는데 이목이 어루만지매 다시 청정해졌다. 그 나무가 근년에 다시 넘어졌다. 어떤 사람이 그 나무로 빗장을 만들어 선법당과 식당에 설치했다. 그 자루에는 명(銘)이 새겨 있다.
혹자는 이런 전설을 유치한 문학성이라고 비웃을지 모른다. 그러나 큰 스님 보양과 샤머니즘 속의 영물(靈物)이 이렇게 행복하게 만나고, 서로를 도와가며 이목이라는 동음이어를 재미있게 풀어가면서 생명이 있을 리 없는 한 계곡의 움푹 파인 못에 이목소(이목沼)라는 이름을 부여케 한 것은, 비록 작은 정서이지만 인간의 마음을 촉촉이 적셔주는 것을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닌 것이다.. 지금 운문사 극락교 아래에 있는 이목소는 냇돌이 구르고 굴러 소의 자취를 잃어간다. 10년 전만 하여도 짙은 초록색을 발하는 깊은 못이었다. 운문사 학인스님들은 밤낮으로 이목소 앞에서 세수를 한다. 한겨울에도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이목소 개울로 나와 얼음을 깨고 낯을 씻는다. 조석으로 몸을 같이하는 이 개울에 그런 전설이 있고 없음에는 정서적 차이가 크게 나는 것이다. 그냥 세수터라 했을 그 자리가 아목소로 된 것이다.
원응국사의 3차 중창
고려왕조의 창립과정에서 군사적으로 한 몫을 한 운문사는 왕건의 입장에서는 은혜의 사찰이며 치국에서 본다면 지방을 다스리는 한 거점으로서의 중요성 대문에 밭 500결을 내려주었으니 운문사의 사세(寺勢)는 그것만으로도 알만한 일이다. 500결이라는 수치가 얼마나 큰가는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청도군의 간전(墾田)이 모두 3932결이라고 햇으니 그것의 8분의 1에 해당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림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청도 운문사를 세번째로 중창한 것은 원응(圓應)국사 이학일(李學一, 1052~1144)이었다. 학일 스님은 전북 부안군 보안면 출신으로 승과에 합격한 후 송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선사, 대선사의 승계(僧階)를 밟아 인종 즉위년(1122)에 왕사(王師)로 책봉되었다. 그의 법맥은 가지산파였으나 오늘날까지도 운문사는 그 법통을 그렇게 이어받는 것이다. 왕사가 된 지 3년 후 학일 스님은 운문사로 가고자 했으나 왕의 윤허를 얻지 못하다가 4년 후인 인종 7년(1129)에 결국 운문사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운문사는 이제 왕사가 주석하는 절집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때 나라에서는 "신수리, 신원리, 이원리의 200결과 국노비(國奴婢) 500명을 운문사에 획급(劃給)하여 만세토록 향화(香火)를 받들게 하였다"고 하니 운문사의 사세는 여기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지금 운문사에는 원응국사비(보물 316호)가 남아 있어 그 내력이 소상한데, 비문은 윤관 장군의 넷째아들로 당대의 문사였던 윤언이(尹彦이)가 짓고, 글씨는 고려왕조 최고의 명필이었던 탄연(坦然)이 썼으니 그 금석적 가치는 막중한 것이다.
이리하여 운문사의 새벽예불에서 마지막에 이 절집을 세워주신 큰스님께 '지심귀명례'로 절을 올릴 때 '차사창건 삼대법사(此寺創建 三大法師)'로 원광법사, 보양국사, 원응국사의 존명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운문사사적기'에 의하면 원응국사가 운문사에 주석하면서 가람의 위용을 갖추어 사찰 경내 사방에 장생표주(長生표주)를 설치하고 전결노비(전결노비)까지 세우니 "나라의 500선찰(선찰) 증 제 2의 선찰"이 되었다고 한다. 때는 고려 이종 7년, 1129년이었으며 바로 이 시절이 운문사의 전성기였으며, 고려왕조가 개국 이래 끊임없이 추구해온 중앙문신 귀족의 문화가 활짝 꽃피는 문화적 전성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운문사의 영광은 여기에서 끝을 맺는다. 원응국사 이후 반세기가 지나자 무신정권하에서 민란과 노비반란이 전국에서 일어날 때 청도와 경주 지역에서도 신라부흥운동과 김사미란(김사미란)이 크게 일어났다. 여기에서 운문사는 역사 속에 다시 부상하게 되는데 이때는 운문사가 아니라 운문적(운문적)으로 등장한다.
운문사의 김사미와 초전의 효심
12세기말, 무신정권하에서 일어난 농민과 천민의 항쟁은 고려역사에서 별도의 장을 만들어 설명할 정도로 대대적인 것이었다. 1176년 공주 명학소의 망이 . 망소이의 천민항쟁으로 시작된 일련의 항쟁 가운데 1193년, 명종 23년에 경상도에서 일어난 농민행쟁은 전에 없던 대규모였다. 그것이 '고려사' 명종 23년 7월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남적(南賊)이 봉기하였다. 그중 극심한 자는 운문에 거점을 둔 김사미와 초전(草田, 현 밀양)에 거점을 둔 효심(孝心)이다. 이들은 떠돌아 다니는 자(流亡民)들를 불러모아 주현(州縣)을 공격하였다.
여기에서 운문은 당시 지명이 아니었으나 운문산이나 운문사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한데 김사미라는 지칭이 과연 개인의 이름인가에 대하여 의문이 제기되는 가운데 최근에는 운문사에 있던 김씨 성의 사미승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게 대두되었다.
운문의 김사미와 초전의 효심이 연합전선을 편 이 농민항쟁은 지방관, 토호, 사원의 수탈에 대한 반발을 넘어서 경상도 일대를 장악하면서 중앙정부와 대결하고 나섰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더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이 농민군들은 무신정권의 내부알력을 교묘히 이용하여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을 피하면서 세력을 확장하여 한때는 강릉의 농민군까지 합세하여 예천까지 밀고 올라갔다.
그러나 정부의 대공세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김사미는 이듬해 2월, 개경에 사람을 보내어 편안히 살 수만 있게 해준다면 항복하겠다는 뜻을 비치었다. 이에 왕은 죄를 묻지 않겠따며 심부름꾼을 돌려보내고 병마사에게 위무토록 지시하였다. 이리하여 김사미는 안심하고 항복하였으나 병마사는 김사미를 즉시 죽여버리고 잔여 농민군의 소탕에 나섰다. 정부의 기만책에 분노한 농민군들은 운문산으로 숨어들었으며. 험악한 산세를 배경으로 하여 완강하게 버티었다.
나라에서는 이들을 운문적이라고 하였다.
신라부흥운동과 운문적의 최후
나는 겨울날의 운문사를 좋아하였다. 눈 덮인 운문사의 전경은 그 자체가 성속을 떠난 평온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입버릇처럼 겨울날의 운문사를 말하곤 하였는데 나의 지기에게 운문사에 살면서 언제가 제일 좋더냐고 물으니 지체없이 봄을 말한다.
사리암 오르는 길을 따라 운문산 학소대 쪽으로 가면 산비탈마다 낙엽송이 즐비하거든요. 이른봄 낙엽송에 연둣빛 새순이 아련하게 피어오르면 얼마나 곱고 예쁜지 몰라요. 새 생명에 대한 예찬이 절로 나와요.
운문산의 그런 봄과 겨울이 열 번이나 바뀌도록 운문적이 된 농민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운문산을 떠나는 자가 생기기는커녕 오히려 산으로 들어오는 유망민이 더욱 불어났다. 그것은 '고려사' 신종 3년(1200) 4월조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말해준다.
밀성(密城, 밀양)의 관노(官奴) 50여 명이 관의 은그릇을 훔쳐 운문적에 투항하였다.
우리는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처연한 가사가 이 시절 유망민들의 처지를 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게 불어난 운문군을 조직한 사람은 패좌(패佐)였다. 패좌가 이끄는 운문산 농민군은 1203년 경주에서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반정부연합군의 일원으로 산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신라 부흥군의 대장 이비(利備)가 정부군 사령관의 꼬임으로 생포되고, 패좌는 측근 부장에게 살해되면서 운문산 농민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간 정부의 기만적 회유책에 속아왔던 농민들인지라 투항하지 않고 끝까지 운문산으로 들어와 버티었던 농민군도 있었다. 이들은 최소한 이듬해 봄까지 운문산 속에서 정부토벌군을 피해 몸을 숨겼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은 무신정권이 수립되자 여기에 적극 동조하여 토벌군에 자원 종군(從軍)하면서 병마녹사(兵馬錄事)를 지내던 이규보(李奎報)가 친구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관군은 이 달 모일(某日) 동경(東京, 경주)을 떠나 운문산에 들어가 주둔하였는데 초적(草敵)이 또한 조용하여 군중(軍中)에는 별 일이 없습니다. 다만 소나무 아래 새로 돋아난 버섯을 따서 불에 구워먹는 맛이 매우 좋습니다.
운문사 본채를 감싸안은 남쪽 담장 너머에는 울창한 솔밭이 있다. 일제 시대에 송탄유를 만든다고 밑동에 큰 상처를 입은 노송마다 솔가지들이 비스듬히 걸쳐 있다. 운문사 학인스님들이 운력(運力)으로 재배하고 있는 송이밭이다. 솔밭을 걸으면서 그 옛날 일들을 생각하며 스스로 야릇한 심사에 젖어 죄없는 돌부리만 걷어차고 있는데 나의 지기가 점심공양이 준비되었다고 사람을 보냈다. 점심식탁에는 표고버섯이 싱싱하게 무쳐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날 그 표고를 먹지 않았다.
일연스님의 '삼국유사' 집필처
김사미와 패좌와 운문산 농민군 봉기 때 운문사가 누구의 손에 장악되었는지, 그 피해가 어떠하였는지에 대하여는 아무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농민항쟁이 끝나고 몽고의 침입을 받아 간섭기로 들어가는 1277년 72세의 일연 스님이 운문사 주지로 임명된 것만은 알 수 있다. 이미 대선사의 승계를 제수받은 일연 스님은 강화도 선월사(禪月寺), 영일 오아사(吾魚寺), 비슬산 인홍사(仁弘寺사)의 주지를 거쳐 충렬와의 명으로 운문사에 주석하게 되었다. 5년간의 운문사 주지 시절 일연 스님은 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 '삼국유사'를 집필하셨다.
1282년, 일연 스님은 다시 충렬왕의 부름으로 개경 광명사로 올라가고 국존(國尊)에 책봉되고 잠시 고향 경산(慶山)에 내려와 90 노령의 모친을 봉양하다 노모가 타계한 후 군위 인각사에서 8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지금 인각사에는 스님의 부도와 깨진 비가 남아 있는데, 일연 스님의 행적비는 스님의 문인으로 당시 운문사 주지였던 법진(法珍) 스님이 찬하여 운문사 동쪽에 세웠다.
채헌이 지은 '운문사적기'는 원응국사 이후의 역사는 기록하지 않고 다만 "4비(碑) 5갑(岬) 5탑(塔) 4굴(窟)이 있었는데 파괴되었다"고만 하였다. 5갑은 5갑사를 말하고, 4비는 신도비(神道碑), 사액비(사액비), 행적비(행적비), 위답노비비(위답노비비)인데 그중 노비비는 절집의 노비들이 신분해방을 부르짖으며 일어날 때 그 봉기의 상징으로 때려부순 것일지니 그것이 콩가루가 되도록 박살난 사정을 이해못할 바 아니다. 또 사액비도 왕건이 운문사를 이름을 내리면서 절의 토지와 노비를 획급한 내용까지 적혀 있었을 것이니 그 운명을 노비비와 함께했을 것도 같다. 그런데 원응국사의 신도비는 오늘날까지 건제하건만, 행적비는 틀림없이 일연선사 행적비이겠건만 어찌하여 그것이 파괴되었는지 안타깝기 짝이 없다. 전하는 말로는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다고 하니 그 전란의 피해가 더욱 원망스럽다.
운문사의 희생과 비구니 승가대학
임진왜란으로 병화를 입은 운문사를 다시 일으켜세운 이는 설송(雪松)대사)1676~1750)였다. 지금 원응국사비 곁에 있는 설송대사비를 보면 영조 30년(1754)에 세워진 것인데 글은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짓고 글씨는 형조판서 이정보(李鼎輔)가 쓰고, 전액(篆額)은 승정원 도승지 이익보(李益輔) 3형제가 써서 이채로운데 이들은 월사 이정구의 현손들이었다.
설송대사 이후 운문사의 내력을 기록한 사적기로는 1913년에 운문사의 서기(書記) 문성희(文性熙)가 지은 것이 있다. 그런데 이 1913년의 사적기는 아주 묘한 것이어서 글의 내용과 형식이 종래에 우리가 보아온 그런 것이 아니다. 글을 지은 사람이 대덕화상(大德和尙)도 아니고 문명(文名)을 얻은 사람도 아니고 한낱 절집 서기의 글이며, 글씨와 글의 구성이 여지없는 '면서기체'로 되어 있다.
일제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 이후 식민통치를 위하여 대대적이고 체계적이며 치밀한 토지조사사업을 벌인다. 요컨대 식민지 재산 파악이었다. 그때 절집의 역사와 재산보고서를 각 사찰마다 제출케 한바 그때의 문서인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서기가 쓴 공문서 형식으로 된 것이며 교활하게도, 아니면 원대하게더, 목적은 재산파악이면서도 그 역사까지 기술케 했던 것이다.
이 면서기 아닌 절집 서기의 기록을 통하여 우리는 운문사의 재산상태와 함께 몇가지 역사의 단편을 확인할 수 있게 되는데, 절 산의 면적은 622만여 평으로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운문사는 건재해 있었다.
8.15 해방이 되고 6.25 동란을 지나 비구 . 대처가 대립하여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난 직후인 1958년 운문사에는 비구니 전문 강원이 개설되었다. 그리고 1977년 명성 (명성) 스님이 10대 주지로 취임하면서 운문사의 면모를 일신시키면서 승가대학으로 4년제 정구과정을 갖추고 학인스님 200여 명이 항사 공부하고 수도하는 현대판 승과 도량으로 되었다.
학인스님은 사마니계를 받은 분으로 시험에 응시하야 들어오게 된다. 학제는 대학과 마찬가지로 4학년까지 되어 있지만 승가대학 내에서는 학년으로 부르지 않고 1학년은 치문(緇門)반, 2학년은 (四集)반, 3학년은 사교(四敎)반, 4학년은 대교(大敎)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학인스님들은 졸업할 무렵 비구니계를 받아 나가게 된다.
나의 지기 그분은 승가대학의 교수 스님이시다.
음악이 있는 기행
청도 운문사가 보존하고 있는 최고의 문화유산은 새벽예불이다. 사람들은 기행이나 답사라고 하면 아름다운 경승지나 이름높은 유물을 찾아가는 것으로 생각하며 시각적 이미지의 유형문화재만을 염두에 두곤 한다. 그러나 운문사의 답사는 반드시 새벽예불을 관람하거나 참배하는 음악이 있는 기행으로 엮어져야 제 빛을 발하게 된다. 그것이 힘들다면 저녁예불이라도 보았을 때 운문사를 답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운문사 답사는 미술사 답사가 아니라 음악이 있는 기행이다.
운문사의 새벽예불은 불교방송국에서 비디오테이프로 제작, 보급하고 있는 것이 있고, 통도사 스님들의 예불을 카세트테이프에 담은 '천년의 소리'도 나왔고, 김영동이 송광사 스님들의 예불에 대금소리를 곁들여 만든 '명상음악 선'도 벌써 전부터 보급되었으니 오늘날에는 그 가치를 인식하고 있는 분들이 많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10년 전만 하여도 나는 새벽예불의 음악성을 알지 못했고, 그처럼 장중한 것이라고든 상상조차 못했다. 김성공 스님의 염불 '부모은중경'이나 월봉 스님의 '회심곡' 정도를 불교음악으로서 감상하고 즐겼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염불에 얽힌 에피소드 하나를 곧잘 재담으로 늘어놓곤 했다.
염불도 못하는 음치 이야기
내가 다닌 서울대 문리대 60년대 후반 학번의 학우들 중에는 유난히 음치가 많았다. 70학번 이후에는 오히려 명창이 많아서 60년대 음치의 진면목을 볼 수 없게 되었는데 나는 그 이유를 기독교 신자의 급속한 증가와 무관치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예배당에서 노래부른 아이들은 음치가 되지 않는다.
아무튼 내 친구들은 모두가 무종교였으며 음치 중에서도 상음치들이어서 유인태, 서중석, 김형관, 김경두, 안병욱, 안양노 등은 서로가 음치협회 회장이라고 자부하고 나중에는 창작가협회로 개칭하였다. 그 음치중 가장 세련된 음치는 안양노였다. 그는 음치의 특징과 미덕을 끝까지 지켜오고 있다.
그 특징과 미덕이란 첫째로 노래를 시키면 결코 사양하지 않는점, 둘째로 곡목을 항시 길고 어렵고 멋있는 것만 부르는 점, 셋째는 가사만은 정확하게 전달하는 점, 넷째는 좋은 노래를 만나면 부단히 연습하여 새 곡을 준비하는 것 등이다.
1973년 10월 2일의 일이다. 유신헌법이 시행되어 독재의 칼날이 서슬푸른 잔인하고 캄캄한 시절에 양노는 나병식, 정문화 등 후배들과 유신헙법 철폐를 외치는 기습시위를 벌였다. 그것은 유신헌법 공포 이후 처음 일어난 시위였다. 그들의 용기에 재야와 야당이 모두 놀랐고, 더욱 놀란 것은 정보부와 경찰들이어서 전국에 지명수배령을 내렸다. 그것이 사찰당국의 '설악산 작전'이었다. 양노는 용케도 삼엄한 경계를 뚫고 빠져나가 전라도 광주시내에 있던 향림선원에 행자로 들어갔다.
절집생활이 시작되면서 양노는 아침과 저녁 예불에 참례하고, 목탁을 치면서 열심히 염불을 외면서 충실한 행자로 몸을 숨겼는데 그때 가장 큰 고통이 목탁 치면서 박자를 못 맞춘다고 주지스님께 꾸지람 들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예불을 드리다보니 그것이 기막히게 멋있는 음악인 것을 알게 되어 때마다 큰소리로 따라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주지스님이 양노를 조용히 불러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자네 우리끼지 예불드릴 때는 큰소리로 해도 되지만, 칠석날이나 사십구재 지낼 때 대중들이 모이면 자네는 염불하지 말고 절만 열심히 하게. 박자가 틀려 염불에 김이 빠지고 우리 절의 권위와 품위가 살아나질 않아요.
그래서 양노는 훗날 염불도 못하는 경지의 음치로 창작가협회의 상좌를 누리게 되었다. 결국 양노는 몇달 뒤 긴급조치 1호가 발동하게 되자 다시 반대투쟁을 벌이려고 속세로 나왔다가 긴급조치 4호, 민청학련사건의 주모자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스님으로서가 아니라 죄수로서 머리를 깎고 영등포교도소에서 수번 1번을 달고서 불교신도방에서 복역하였다.
전통음악의 원형질
10년 전 어느 가을날, 내가 청승맞게 혼자서 곧잘 답사 다닐때, 해인사 여관촌 깊숙한 곳의 한 여이숙 툇마루에 앉아 도망간 잠을 다시 붙잡으려고 하릴없이 별이나 세고 있는데 옆방에서 노부부가 벌써 행장을 꾸리고 나서기에 물었더니 새벽예불 간다는 것이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때 나는 새벽예불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그리고 노부부를 따라 난생 처음 새벽예불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장중한 음악에 취하여 나에게 찾아온 감동의 의미를 묻고 또 물으며 되새겨보았다. 그리고 나는 새벽예불이 장엄하다는 송광사, 통도사, 운문사를 답사하면서 그 감동을 키워왔고, 그것의 미학적 의미를 끌어안고 지내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새벽예불은 운문사의 그것이라는 내 나름의 소견도 갖게 되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절집의 새벽예불이 보여주는 장엄함은 가톨릭의 그레고리안 찬트와 비견되는 것이다. 결코 다성음이 아니라 단성음으로 최소한의 변화를 구사할 따름이지만 바로 그로 인하여 웅장함을 지닐 수 있고, 변화의 가능성을 안으로 끌어너흘 수 있는 것이었다. 제인 해리슨(Jane Harrison)이 '고대예술과 제의'(Ancient Art and Ritual)에서 누누히 강조한바 제의적 성격에 나타나는 단순성의 의미인 것이다.
치장이 많고 변화가 다채로우면 예술적으로 더욱 성공할 것 같지만, 그런 예술은 수천만가지의 치장가 변화의 하나일 뿐이며, 단순성을 제고하면 오히려 수많은 치장과 변화를 내포할 수 있다는 역설적 논증이 이렇게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알 만한 일이다. 서양미술사학의 할아버지격인 빙켈만이 '고전예술'에서 그리스의 예술정신을 단 한마디로 요약하여 "고귀한 단순과 조용한 위대"라고 말한 것은, 단순하다는 것이야말로 고귀한 감정을 일으키며 위대함은 조용히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설파한 것이다. 더욱이 빙켈만은 치장가 변화가 요란한 로꼬꼬시대의 말기에 살았으니 동시대의 경박한 문화토에 대한 경종의 의미로 "고귀한 단순과 조용한 위대"를 더욱 강조했으리라.
새벽예불을 들으면서 나는 -- 불가에 계신 분들은 섭섭하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 그것의 신앙적 성격보다 단순한 것의 멋과 힘을 더욱더 확고히 믿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새벽예불은 곧 우리네 전통음악의 원형질이라는 생각도 갖게 되었다. 위대한 우리의 음악인 종묘제례악은 하나의 음악적 형질을 갖춘 완벽한 작품이다. 산조와 가곡의 멋스러움, 육자배기나 정선아리랑의 흐드러진 아름다움 역시 원형질에서 뽑아낸 위대한 창작이다. 새벽예불 이외에 또다른 전통음악의 원형질이 있다면 진도씻김굿에서 박병천 할아버지의 구음과 이완순 아주머니의 진혼곡 정도가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새벽예불과 씻김굿은 비슷한 성격이면서도 완연히 다른 줄기를 갖고 있으니 모름지기 우리 시대의 음악이 여기에 젖줄을 대고 나아갈 때 우리는 완벽한 우리 시대의 한 작품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칼 오르프가 그레고리안 찬트를 모티프로 하여 '카르미나 브라나' 같은 명곡을 만들어내듯이 새벽예불에 기초한 김영동의 '명상음악 선', 박범훈 작곡의 '아제 아제' 같은 우리 시대 음악이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아직도 우리가 새벽예불에 의지할 바는 무한한 크기로 남아 있다는 생각이다.
장중한 종교음악, 새벽예불
나는 음악에 대하여 무엇을 논할 수 있을 정도의 음악미학을 공부하거나 연구한 바가 없다. 새벽예불에 대한 나의 감상과 인상 내지는 소견도 한 관객 이상의 것이 못된다.
그러나 이 답사기를 쓰면서 나는 이처럼 영역 밖의 얘기더 서슴없이 말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것은 남의 답사기가 아니라 '나의' 답사기이기 때문이며, 음악을 꼭 음악인만이 말하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게는 불안한 구석이 있어서 나는 내 소견을 검증받기 위하여 내가 좋아하는 작곡가 이건용 교수를 모시고 '음악이 있는 기행'의 해설자로 ㅣㅈ난(1993) 9월 6일 청도 운문사에 갔다.
마침 이건용 교수는 운문사의 새벽예불을 직접 들은 적이 없었고, 이튿날 저녁에는 대구문화회관 음악당에서 자신의 작곡이 연주될 것이기에 겸사겸사 맞아떨어졌다.
운문사의 나의 지기에게 새벽예불에 참례하지만 뒤에 앉아서 절하지 않고 음악으로 음미함을 용서받고 우리는 저 장중한 운문사의 새벽예불을 열심인 관객으로 감상하였다.
새벽예불은 도량석으로부터 시작된다. 예불 30분 전에 요사채와 법당 주위를 돌면서 목탁ㅇ르 두드리며 독송하는 도향석은 새벽예불의 서주, 판소리로 치면 다스림에 해당한다. 그리고 250여명의 비구니들이 법당 안에 정연히 늘어서서 의식과 함께 행하는 새벽예불은 곧 무반주 여성합창이다. 도량석을 독송한 스님은 새벽예불에서 도창(導唱)이 되어, 합창이 일어나면 감추어지고 합창이 가라앉으면 다시 일어나는 변주의 핵심이 된다.
나는 새벽예불 때 올리는 염불의 내용을 잘 모르며 또 성심껏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마치 그레고리안 찬트의 가사를 모르면서도 그 음악을 즐겨 듣듯이.
오직 한 가지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한다는 '가사'가 일곱 번 '후렴'처럼 반복되면서 새벽예불은 가사와 곡조에 일정한 규율울 지닌다는 것만은 알고 있다. 합창과 절의 자세가 반복되기 때문에 엎드려 고개 숙여 '지심귀명례'를 읊을 때 소리는 낮게 내려앉고 다시 합장의 자세로 들어서면 고음(高音)이 된다.
새벽예불은 합창단과 예불의식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일체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식과 음악의 미분리라는 원형질적 성격이 더 간직되어 있다.
신중단을 향하여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암송하는 것으로 예불은 끝나고 스님들은 5분간 참선의 묵상에 잠긴다.
아는 이교수와 법당 밖으로 먼저 나왔다.
"어때요. 다른 절집 예불과 다르죠."
"그런데요. 처연한 분위기가 서린 비장미가 있는 것 같네요. 남성합창이 아무래도 더 장중하겠지만 이런 비장미는 적지요."
이건용 교수의 음악사 강의
나의 지기가 각별히 배려하여 따뜻한 차대접을 받고, 냇가 객실 밖에서 개평 잠을 두 시간 자고, 아침공양을 든 다음, 사찰 경내를 두루 답사하여 일반인 출입금지의 강의실, 학생회관, 극락교 너머 죽림헌, 목우장까지 다녀온 후 우리는 대구로 향하였다. 배기통이 녹슬어 떨어져나가는 바람에 오토바이 엔진 만큼 시끄러운 나의 달구지 안에서 나는 나의 목적 그의 코멘트를 유도했다.
"새벽예불은 우리가 물려받은 전통음악의 원형질이라고 해도 되겠죠?"
"그렇죠. 언제부터 내려온 것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대중적 동의와 검증 속에 저런 모습으로 고착되었겠죠. 내 생각엔 그대로 악보로 옮기는 작업을 하면 좋을 것 같네요."
"혹시 새벽예불을 원형질로 하여 우리 음악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주장하면 기독교인이나 현대음악가들의 빈축을 사지 않을까요?"
"그게 무슨 상관 있어요. 엄연한 우리의 역사이고 우리의 유산인데, 나야말로 목사의 아들이고 현대음악 전공자인데 나조차도 그런 생각 하지 않아요. 그레고리안 찬트 이후 종교음악이 변화하는 양상이 곧 서양음악사입니다. 그 과정은 이강숙 선생의 '음악의 이해(민음사)'에 명쾌하게 설명되어 있어요. 꼭 읽어봐요."
이렇게 대답하고, 이렇게 생각이 폭이 넓기 때문에 나는 이건용 교수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는 상당히 정확하고 친절한 분이기에 내친김에 서양 음악사의 큰 줄거리를 음악 전문용어 없이 설명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랬더니 역시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와 상징으로 이렇게 엮어갔다.
375년 게르만민족의 대이동 이후 유럽사회가 재편되면서 기독교는 백성을 보호하고 나서서 그 위치가 아주 커지죠. 그래서 각 지역마다 교회의식과 음악이 생깁니다. 800년 전후하여 그레고리 교황은 이것을 통일시킬 필요를 느껴 모든 지역이 받아갈 수 있는 찬트를 만들어내죠. 그것이 그레고리안 찬트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형식은 변화없이 몇백 년 사용됩니다.
그러다 1100년 무렵 아르스 안띠끄 시대, 미술에서 로마네스끄 시대에 오면 그레고리안 찬트의 음을 '펴는 작업'을 해요. 음을 안정시키는 작업이었죠. 음이 안정되어야 종적 횡적으로 펼쳐질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여기에 이런저런 장치를 '쌓기 시작'합니다. 그 쌓기작업이 완성되는 것은 1300년경, 아르스 노바, 미술에서 고딕 시대입니다. 그리고 1450년경 르네쌍스 시대가 되면 그 작업이 절정에 도달합니다. 안정된 형식을 갖추었다는 것이죠. 형식이 안정되니까 이제는 그기에 공감을 일으키는, 즉 감정을 흔드는 작업이 들어갑니다. 그것이 곧 17세기 바흐의 바로끄 시대입니다. 감정을 흔들려고 하니까 강조와 과장이 일어나게 되죠. 그리고는 독일 교회음악의 한 줄기와 독일지방의 세속음악이 모짜르트에 와서 행복하게 만나게 됩니다.
이건용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그의 이야기를 우리 문화의 창조에 대입시켜보고 번안시켜보려고 애썼다. 그렇지 그렇고말고. 역사의 흐름이 말해주듯이 원형질을 다지고 펴야지, 그래야 단단한 기초 위에 쌓을 수 있는 것이지. 민족적 형식이라는 폼(form)이 향성되어야 그것을 기초로 한 강조와 변주가 가능한 것이지.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는 다지는 작업이나 다듬는 작업은 외면하고 죄다 쌓으려고 하거나 변주시키려고 하니까 디죽박죽이 되고 있는 것이지. 그렇다면 알겠다, 지금 우리 시대 사람들이 문화유산의 전통을 계승하는 방향이 무엇인지를.
운문사 벚나무 돌담길
운문사에는 미술사적 의의를 지닌 큰 볼거리가 없다. 오직 분위기 그것 뿐이다. 그러나 운문사 솔밭의 행렬이 끝나고 낮은 기와돌담이 한쪽으로 길게 뻗은 벚꽃나무 가로수길로 접어들면 그것만으로도 운문사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벚꽃이 피고 꽃잎이 날릴 때를 맞추어 온다는 것은 나처럼 '운문사 동네'에 사는 사람이나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사계절의 어느 때이고 이 길은 당신을 황홀하게 맞아줄 것이며 특히나 눈 쌓인 겨울날이라면 아예 이곳에 머물며 살고 싶어질 것이다.
나는 낮은 기와돌담길이 갖고 있는 위력을 곳곳에서 보았다. 담양 소쇄원에서, 부안 내소사에서, 승주 선암사에서, 그 중에서도 운문사 돌담길은 담장 안 쪽으로 노목의 벚나무가 들어차 있어서 벚나무 줄기의 굽은 곡선이 직선 기와지붕과 어울리는 조화의 묘를 한껏 드러내어 더욱 가슴 치는 감동의 산책길로 됐다.
경내의 삼층석탑, 석등, 석인상 들은 모두가 보물로 지정된 당당한 유물들이지만 어쩌면 일반인은 이 분위기에 압도되어 모두가 시시해 보일 것이다.
운문사 스케치 리포트
나는 학생들이 답사다니는 습관을 갖게 하기 위하여 미술대학생이건 미학 . 미술사학생이건 운문사를 다녀오게 한다. 때로는 과제물로 스케치나 답사기를 제출케도 한다. 작년엔 회화과 4학년 회화특강을 맡으면서 역시 과제를 주었더니 학생들의 눈은 아주 정직하고 정확하였다.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운문사 입구의 솔숲이었고, 그 다음은 벚나무 돌담길이었다.
한 학생은 대웅전 분합문짝 정가운데 있는 꽃무늬창살을 화폭에 오보랩시켰고, 한 학생은 수미단 한쪽 편에 있는 도깨비 얼굴 암수 한 쌍을 대비시켜 작품을 만들었다. 그리고 한 학생은 무슨 수를 내어 들어갔는지 일반인 출입금지구역인 금당 앞에 있는 석등(보물 193호)을 사실적으로 그려왔다. 이들은 모두 모범적이고 충실한 나의 생도들이었다.
작갑전에 모셔 있는 사천왕 석주(보물 318호)를 정확하게 스케치한 학생에게 석조여래좌상(보물 317호)은 왜 안 그렸냐고 했더니 별 느낌이 없었단다. 실제로 이 석불은 석고로 화장이 심하게 되어 그 원상이 지금은 잘 나타나 있지 않다. 또 한 학생은 한 쌍의 삼충석탑(보물 678호) 기단부의 팔부중상만 스케치하고 탑 자체는 그리지 앟아 그 이유를 물으니 탑에서 어떤 이미지를 못 므꼈다고 한다. 나 역시 이 쌍탑은 크기에 비해 너무 둔중하여 납렵한 것도 장중한 것도 아닌 일종의 매너리즘 양식이라고 생각해왔다. 이처럼 나의 학생들은 '보물'이라는 위압적인 팻말로부터 자유로웠다니 얼마나 반가운가.
사람들은 운문사의 명물로 400년 수령의 장대한 처진소나무, 일명 반송(천연기념물 180호)을 꼽는데 그것을 그린 학생도 없었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물어보았떠니 한 괴짜 학생이 "신기하긴 합니다마는 좋은 줄은 모르겠던데예"라고 대답했다. 그래서 내가 그 처진 소나무는 봄, 가을로 막걸리 열두 말을 받아 마신다고 했더니 그 괴짜는 "여승이 소나무에 술 주는 것은 그릴 만하겠네예"라고 맞받아넘겨 함께 웃었다.
금당 앞 석등을 그린 학생은 내게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샌님여! 대웅보전 앞 석등은 영 이상하데예. 한 쌍으로 되었는데 헌 것하고 새 것하고 섞어서 헌 받침에 새 몸체, 새 받침에 헌 몸체를 붙여서 두 개 다 짝짝이가 됐어예. 영 파이데예. 와 그리 됐능교?"
"이녀석아, 그걸 운문사 스님한테 묻지 왜 내게 묻냐."
아마도 쌍탑의 배치와 맞춘다고 새것을 하나 더 세우면서 새것이 어색하지 않게 보이려고 했던 거 같다. 그러나 그것은 운문사의 큰 실수였다. 본래 석등은 하나만 모시는 것이 불가의 불문율이다. 아무리 절마당이 커도 석등은 하나만 모시도록 되어 있따. 그것은 불문율이 아니라 '시등공덕경(施燈功德經)'에 "가난한 자가 참된 마음으로 바친 하나의 등은 부자가 바친 만 개의 등보다도 존대한 공덕이 있다"는 구절에 근거를 둔 것이다.
같은 답사라도 이론을 전공하는 학생은 실기생과 보는 것도 다르고 묻는 것도 달랐다. 한 미술사학과 학생은 큰 발견이나 한 양으로 이렇게 물어왔다.
"샌님여, 운문사 대웅보전에 모셔진 불상은 비로자나불 맞지예?"
"그렇지.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으니 비로자나불이지."
"그란데 와 대웅보전이라 캅니꺼? 대웅보전은 석가모니 모셔진다고 안햇습니까?"
"그러니까 우습지. 조선후기 들어서면 중들이 계울보다 찬선을 중시한다고 불가의 율법을 등한시했어요. 그 바람에 저렇게 잘못된 것이 많아요. 굳이 해석하자면 본래는 석가모니 집인데 비로자나불이 전세 살고 있는 것이라고나 해야 될까 보다."
앳된 비구니의 청순성
학생들이 비록 과제물로 그려내지는 않았지만 글로 쓴 보고서에는 새벽예불, 저녁예불이 가장 감동적이었고 그 때문에 또 가보고 싶다는 내용이 상당히 많았고, 한 학생은 대비로 마당 쓸다가 자판기에서 커피 빼어 마시는 비구니 모습이 아주 인상깊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보고서 끝에 "선생님, 비구니 스님들과 미팅 한 번 주선해주세요. 실례" 라고 적었다.
그런 마음은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미팅이 아니라 비구니 200명을 앞에 두고 강의하면 얼마나 황홀할까 혼자 생각해왔는데 작년 봄 나는 진짜로 특강을 하게 되었다. 내가 요청받은 강연 제목은 조선후기 회화였다. 그러나 나는 굳이 고려불화를 고집했다. 그 이유는 스님들이게 불화를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하나이고, 또 하나는 한번 더 가고 싶어서 기왕 요청한 것은 '굳은자'로 남겨둘 속셈이었다.
파르라니 깎은 머리에 검고 맑은 눈동자가 일제히 나를 향하고 목탁소리에 맞추어 인사를 올릴 때 나는 그 형식에 압도되어 얼마간은 덜었다. 그러나 슬라이드를 돌리면서 슬슬 유머를 넣어 강의를 풀어가니 비구니들의 모습도 마치 학교의 수업시간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진지한 비구니, 새침한 비구니, 장난기가 덕지덕지한 비구니, 속눈썹이 유난히 긴 비구니, 조는 비구니, 자세가 불안한 비구니, 느긋한 표정으로 선생 채점하고 있는 비구니, 그런가 하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밝은 인상의 비구니...... 우피 골드버그가 영화 '씨스터 엑트'에서 수녀원의 틀에 얽매인 개성을 찾아내는 얘기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사람들은 아직도 비구니라면 '사연 있는 여자'가 머리를 깎은 것으로 생각하는 편견을 많이 갖고 있다. 그러나 현대여성으로소 비구니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구도의 길을 걷기 위하여 스스로 선택한 비구니의 삶은 차라리 강인한 것이며, 소녀시절 처녀적 청순함을 그대로 간직한 채 새벽 3시에 일어나 꽉 짜여진 일과를 보내는 모습은 외경스러운 것으로 비친다.
그러나 앳된 비구니는 역시 순정이 넘쳐흐른다. 운문사 안채의 한쪽 외벽에는 학인스님들의 세면도구가 꽂혀있는데 그 컵의 색깔과 생김새가 역시 속일 수 없는 여자의 모습이다.
운문사에서 내가 항시 궁금하게 생각한 것은 250명이 일제히 들어간 법당 밖 댓돌에는 하얀 남자고무신 250켤레가 가지럲; 벗어져 있는데 예불이 끝나면 귀신같이 자기 신발을 찾아 신는 것이었다. 무슨 비결이 있는가 살펴보니 신발마다 비표(秘標)가 새겨 있는데 그것이 또 볼 만하였다.
운문사 계곡에는 야생 달맞이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그런 어느 여름날밤 비구니 몇이 서 손전등을 달맞이꽃에 비추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그것이 무얼 하는 것인지 몰랐다. 나의 지기에게 물으니 흐린 날 달이 뜨지 않을 때 꽃봉오리에 전등을 비추면 달이 뜬 줄 알고 꽃봉오리가 벌어지면서 '톡'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겨울에 운문사를 가면 만세루에 가득 널린 메주와 무말랭이가 장관이다 어쩌면 그것을 말리고 메주를 빚는 비구니의 모습이 더욱 가슴 저미는 그 어떤 감정을 촉발했을 것 같다. 시인 이동순은 바로 그런 때 운문사를 답사했던 모양이다.
운문사 비구니들이
모두 한 자리에 둘러앉아
메주를 빚고 있다
입동 무렵
콩더미에선 더운 김이 피어 오르고
비구니들으 그저
묵묵히 메주덩이만 빚는다.
살아온 날들의 덧없었던 내용처럼
모두 똑같은 메주들
툇마르에 가지런히 널어 말리는
어린 비구니
초겨울 운문사 햇살은
그녀의 두 볼을 발그레 물들이고
서산 낙조로 저물었다.
연꽃이 피거든 남매지로 오시소
이목소가 내려다보이는 극락교를 건너면 새로 지은 죽림헌(竹林軒)과 목우정(牧牛停)이 나온다. 거기에서 운문산을 바라보면 그 산세가 그렇게 듬직스러울 수가 없다.
운문사 주지이고 승가대학 학장이신 명성(明星) 스님은 김천 직지사 조실인 관응(觀應) 스님의 따님인데, 관응 스님이 따님의 절에 와 여기에 오르니 마치 어미소가 웅크리고 앉은 채로 고개를 돌려 송아지를 보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지라 집자리를 잡아주신 거란다. 부녀의 정은 그렇게 죽림헌에 남아 있고 유식학(唯識學)의 법통은 그런 돌봄 속에 권위를 물려 주고 있다.
나는 50명이 둘러앉아 야외수업도 할 수 있는 목우정 난간에 기대어 운문사 답사를 마무리하였다. 정자 아래 수련이 아주 곱게 피어 있다. 흰색, 분홍색, 빨강색, 노랑색. 그러나 수련의 겅강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안쓰러워하는 내 표정을 읽었는지 나의 지기가 하소연을 한다.
"영남대 가정대 앞에 있는 거울못에서 옮겨왔는데 거기처럼 장하게 피질 못해요. 물이 차가워서 그런가요?"
"아닐 겁니다. 수렁이 너무 맑아서 그래요. 물이 더 깊이 고여야 하는데 흐르는 물살이 너무 빨라요."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연꽃도 아세요?"
"남매지 영감님께 배웠죠."
나의 경산 숙소는 남매지 옆에 있다. 창 밖으로 보이는 남매지가 아름답고, 여기는 일연 스님이 태어난 곳이며, 학교 너머는 원효대사가 태어난 곳이고, 남매지는 요석공주와 원효대사가 데이트하던 곳이라는 -- 비록 조작된 것이지만 -- 전설이 있기에 행복한 마음으로 정한 자리다.
하루는 저녁에 남매지로 산보를 하러 갔더니 연밥을 따는 할아버지가 일을 끝내고 옷을 털고 계셨다. 멀리서 볼 때의 남매지와는 달리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그야말로 수렁이었다.
"할아버지, 물이 이렇게 더러운데도 꽃이 피네요."
"뭔 말을. 연꽃은 진흙창 썩은 물이 아니면 자라덜 않아. 그 찌쩌기가 썩어야 양분을 빨아먹고 쑥쑥 안 크능가."
"더러워야 더 잘 큰다고요?"
"하믄, 하지만 물이 썩는다고 꽃이 자라는 게 아니어. 저쪽 좀 봐. 물이 졸졸 흐르지. 저렇게 맑은 물이 살살 흘러야 그게 생명수가 되어 꽃이 자라는 거야. 수렁은 찌꺼기가 푹 썩고 한쪽에선 맑은 물이 살살 흘러야제."
나는 할아버지의 연꽃 강의를 듣고 오묘한 자연의 생리가 내 인생에, 우리 역사에 시사해주는 바를 새기고 또 새겨보았다. 그리하여 나는 한국미술사 강의의 맨 마지막 슬라이드를 항시 남매지의 연꽃으로 삼고 있다. 나는 이 수렁보다 더 지저분한 20세기 우리 문화도 꽃이 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네 삶 속에는 온갖 찌꺼기가 다 있다. 봉건잔재, 식민지 잔재, 군사문화 잔재, 만신창이가 된 동서문제, 남북문제, 제국주의 소비문화 찌꺼기, 온갖 쓰레기의 집하장 같은 곳이다. 그래서 때로는 20세기 한국의 문화도 꽃이 필 수 있을지 의문스럽기만 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당당히 말한다. 연꽃을 보라고. 우리에게는 갑오농민전쟁에서 3.1운동, 독립군 항쟁, 4.19혁명, 6월혁명으로 이어지는 생명수가 흐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기어이 피어날 것이라고.
나는 목우정에서 일어서며 승가대학 교수님의 격에 맞지 않게 지객(知客) 스님이 되어 나를 맞이해준 나의 지기에게 그간의 호의에 감사했다.
"스님, 우리나라에서 연꽃이 가장 장하게 피는 곳이 어딘지 아세요?"
"전주의 덕진공원은 정말 크고 멋있던데요."
"나는 장엄하게 피는 곳을 물었는데."
"어디에요?"
"경산의 삼천지(三千池)입니다. 7월말 8월초가 되면 3000평 크기 연못이 연잎과 연꽃으로 꽉 메워집니다. 영남대 공대 옆에 있어서 힉생들이 공대못이라고 부르죠. 바로 남매지에서 길 하나 건너 있어요."
나의 얘기를 들으며 스님은 머릿속으로 그 연꽃 광경을 상상하는 것 같았다.
"스님, 연꽃이 피거든 남매지로 오시이소."
나의 지기, 그분의 법명은 진광(眞光)이다.
첫댓글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 유산 답사기 - 3'권 중 '운문사와 그 주변'을 다 담았습니다.
제가 지난 가을에 매일 한 꼭지씩 옮겨봤던 것입니다.
다시 봐도 참 재미있습니다.
헉!
이걸읽으려 속독하다보니
눈알이 뱅글뱅글
글쓰는것보다
읽는것이 쉬운데,,,,,,
암튼
대단합니다.^^*
ㅎㅎ, 제가 이걸 매일 조금씩 옮겨 적었는데,
그거 하다가 허리에 탈이 났잖아요.ㅎㅎ
새벽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으니까요.
그때 글을 많이 썼어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