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가 사랑하는 관광명소 '제주도'는 사실 60여 년 전만 해도 한국 전쟁과 '4.3 사건'의 후유증과 가난으로 인해 고통받는 섬이었습니다.
1954년, 제주의 참상을 눈으로 목격한 25세의 젊은 아일랜드 출신 신부 맥그린치는 평생을 제주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60년 동안 이어진 '푸른 눈의 돼지 신부'의 제주에 대한 사랑을 카드뉴스로 정리했습니다.
1954년 한국, 아일랜드 출신 신부가 목격한 제주의 광경은 처참했다.
한국전쟁과 4.3사건으로 극심한 가난과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던 제주
“이렇게 상처받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굶주린 제주 사람들을 위해 아일랜드에서 배운 목축업을 하기로 결심한다.
인천까지 먼 길 달려가 사온 새끼 밴 암퇘지 한 마리
새끼를 10마리나 낳자 신부는 아이들에게 돼지를 나눠줬다.
“새끼 돼지를 줄 테니, 잘 키워보렴.”
대신 돼지가 커서 새끼를 낳으면 그때 한 마리를 돌려주려무나.”
하지만 곧바로 난관에 맞닥뜨렸다.
굶주렸던 제주 사람들이 돼지를 나눠주는 족족 잡아먹거나 팔아 넘긴 것
“신부님, 돼지가 없어졌어요!!!”
아이들은 달려와 눈물을 흘리기 일쑤
신부는 제주의 쓸모 없는 땅을 사서 현대식 목축업 교육을 시작한다.
필사적으로 돼지를 지켜내려는 신부에게 붙은 별명 “돼지 신부”
이것이 국내 최대 유기농 우유 생산 목장 성이시돌 목장의 시작이었다.
제주에서 가장 가난했던 동네, 한림은 이제 명실상부 제주 축산업의 중심이다.
그렇게 제주의 아픔을 보듬으며 살아온 세월, 60여 년
아일랜드 출신 25세 젊은 신부는 이제 90세를 앞둔 노인이 됐다.
한평생 제주에 헌신한 맥그린치 신부
한국을 너무나 사랑해 지은 이름 임피제
지팡이 없인 걷기 힘든 노인이 되었지만 또다시 제주를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풍요로워진 제주에 남은 과제는 죽음
“가난 때문에 존엄하게 생을 마감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것은 차별입니다.”
제주를 향한 그의 마지막 선물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호스피스 병원
병원 운영을 유지할 후원자들을 찾고 있다.
제주의 아픔을, 대한민국의 아픔을 함께한 임피제 신부
“고맙습니다”
“당신이 준 희망을 이어갈게요”
출처 :한국일보
제주에 뿌린 나눔의 씨앗 더욱 널리 퍼지길”
변함없는 제주 사랑 보여준 ‘파란 눈의 돼지 신부’
무료 호스피스 병원 성이시돌복지의원 후원 당부
6·25전쟁의 포화가 채 가시지 않은 1954년, 고향 아일랜드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제주로 건너온 게 26살 때였다. 구순을 목전에 둔 백발노인이 될 때까지 평생 제주를 위해 살아온 임피제(패트릭 J. 맥그린치) 신부(89).
그의 사랑은 변함없이 제주를 향하고 있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무료 호스피스 병원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지역사회가 힘을 모아달라는 그의 소망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 충분했다.
‘임피제 신부 기념사업회’(공동대표 임문철 신부 외 3명)는 2월 18일 오후 3시 제주시 건입동 김만덕기념관(관장 김상훈)에서 평전 「제주한림이시돌 맥그린치 신부」(양영철 지음/328쪽/박영사) 발간 기념식과 다큐멘터리 ‘파란 눈의 돼지 신부’ 시사회를 열었다. 임 신부의 뜻을 받들어 설립된 호스피스 병원 성이시돌복지의원을 후원하는 계기를 삼고자 마련된 자리였다.
이날 행사는 ▲축하공연 ▲경과보고 ▲축사 ▲업무협약 체결(임피제 신부 기념사업회-김만덕기념관) ▲성이시돌복지의원(호스피스 병동) 소개 ▲평전 소개 ▲다큐멘터리 ‘파란 눈의 돼지 신부’ 상영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행사장은 빈 공간을 찾기 어려울 만큼 사람들로 가득 찼다. 참석자들은 임 신부와의 인연을 기억하며 그가 제주에 뿌린 나눔의 씨앗이 더욱 퍼져나가기를 기원했다.
임 신부는 행사에서 “1954년 5월 한림본당에 부임했을 때 교적상 신자가 25명 뿐이었다”며 “이제 마지막 사업으로 시작한 것이 호스피스 병동인 성이시돌복지의원인데 후원회원들의 후원금으로만 운영하다 보니 너무 어려워 천주교 신자뿐 아니라 모든 도민들이 관심을 가져 현재 2000여 명 후원회원이 4000명 정도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평전 판매대금은 모두 성이시돌복지의원 운영기금으로 사용된다.
임피제 신부는 1951년 12월 21일 사제품을 받은 후 1954년 4월 1일 제주시 한림본당에 부임하면서 제주도와 인연을 맺었다.
그가 처음 제주에 도착했을 당시 제주도는 6·25전쟁과 4·3사건 등으로 극심한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가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끼를 밴 어미 돼지 한 마리를 구입해 제주 한림까지 가져왔다. 이것이 성이시돌목장의 시초가 됐다. 임 신부에게 ‘돼지신부’라는 애칭도 이때 붙여졌다.
허허벌판이었던 땅 위에 목장을 일구고 수직 회사, 가축은행 등의 개발 사업을 추진하면서 가난한 이들에게 삶의 희망을 전했다. 또 제주에서 처음으로 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해 저리로 사업 자금을 조달하도록 하는 등 제주사람들의 가난 해결에 집중해 온 제주 근대화의 선구자다.
임 신부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2014년 2월 21일 출범한 ‘임피제 신부 기념사업회’는 제주 사랑으로 한 길을 걸어온 임 신부의 삶과 정신을 현양함으로써 사회발전의 중심 역할을 담당할 제2, 제3의 임피제 신부를 배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출처: 가톨릭 신문
첫댓글 제주도 사람이라면 물론이고, 임신부님이 이루신 <이시돌 목장>을 모르시는 분이 없을 것 같아요.
빈곤했던 제주도를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신 임신부님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원하시는 일이 이루어 지기를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