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수필 / 문학시대 / 류인혜의 책읽기 6 / 2019년
백지편지에 대한 예의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현대문학, 2012.
류인혜
한글을 깨우치고부터 무엇이든 읽었다. 신문이든 책이든 눈에 뜨이는 대로, 글자만 적혀 있으면 잡는 대로 빠져들었다. 읽는 일에 완전히 몰두하여 자연스럽게 독서의 훈련이 되었다. 친구네 서점에 자주 들려 새로운 책이 나와 있으면 무조건 빼 들었다. 덕분에 당시 유행처럼 발간되던 일본 소설을 여러 권 읽었다.
우리보다 앞서 선진문화를 받아들였다던 이웃 나라 소설 속에 담긴 삶의 모습은 가볍고 흥미로웠다. 가볍다는 것은 유교 사상에 무게를 둔 우리의 관습보다 그들의 사고방식이 자유롭다는 뜻이다. ‘우리보다’라는 말을 써놓고 보니 우리는 누구일까? 궁금해진다. 배달의 민족! 동방예의지국의 자손들! 외세의 침략을 자주 받은 힘없는 민족. 더 힘센 이웃 나라 중국과 일본의 속국이 되었던 불쌍한 우리……. 괜한 양심의 가책으로 그들의 소설을 읽었다는 사실을 숨겼다.
역사적 사실을 염두에 둔 채, 일본은 무조건 싫었다. 그런데, 차디찬 이성은 거부하지만, 감성을 자극하는 호기심의 충동을 못 이겨 기어이 등 떠밀리듯 읽은 책, 1963년 아사히신문 창간 85주년 1천만 엔 현상 소설 입선작인 미우라 아야코(三浦綾子)의 《빙점》은 정말 재미있었다.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설국》을 거쳐서 긴 세월이 흐른 후에 남녀 두 사람의 작가가 같은 제목으로 써 내려간 두 권의 책, 《냉정과 열정 사이》도 흥미롭게 읽었다. 또 일본의 문인이 외국 서적의 번역 같다고 평을 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도 몇 권 읽었다.
한류를 통해 세계가 동질의 문화로 통합되어가는 이때, 우리보다 한 세대를 앞서간다는 일본을 뒤쫓아 간다는 피해의식 혹은 경쟁의식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일까? 한편으로는 밀어내고 다른 마음으로는 끌어당기며, 오묘한 갈등을 지니게 되는 것이 가까운 나라, 일본의 것들이다. 지극히 덤덤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번 책을 대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2012년 12월 국내에서 출간된 이래 연속 인기도서 상위권을 차지하며 ‘21세기 가장 경이로운 베스트셀러’라고 불리는 소설이다. 저자의 대표작으로 지난 10년(2008∼2017년)간 가장 많이 판매되어, 국내 누적 판매 100만 부를 돌파했다. 이런 책의 배경은 모르면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라는 책 제목을 대하자 읽어 보고 싶은 책이 되었다. 잡화점에서, 소소한 물건을 팔고 사는 곳에서 어떤 기적이 일어났는가, 궁금했다. 오랫동안 생각만 하다가 2017년에야 손에 들었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 찜찜해졌다. 다시 도서관에서 두어 번 더 빌려와 여러 번 되풀이해서 읽었다. 읽어 가며 가장 많은 발췌를 한 책이다.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을 믿는다는 일은 간단하지 않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기에 이해할 수 없는 기적,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기적이 어느 한 작가의 손끝에서 일어나고 있다.
저자 히가시노 게이고는 일본 추리 소설계를 대표하는 작가다. 추리소설은 인간이 지닌 내면의 악이 이루는, 거짓과 계략, 속임수, 간악한 처세 등으로 뭉친 범죄를 고도의 추리로 풀어나가는 상황을 추적한다. 그는 추리소설이 갖는 일반적인 형식을 따라 데뷔 초기에는 본격 추리소설에 몰두했지만, 차츰 인간과 사회 문제에 관심을 끌게 되었다. 저자는 추리소설이 주는 긴장감에 완전히 빠지기보다 보통의 삶에 집중했다. 사람에게는 다른 아름다운 일이 많다는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추리소설 본연의 맛을 잃지 않으면서도 사회성이 짙은 소설에 눈을 돌렸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도 그 일환이라고 보면 된다.
목차는 다섯 개의 장으로 간단하다. ‘제1장 답장은 우유 상자에 /제2장 한밤중에 하모니카를 /제3장 시빅 자동차에서 아침까지 /제4장 묵도는 비틀스로 /제5장 하늘 위에서 기도를’ 등으로 나뉜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두 축은 나미야 잡화점과 환광원이다. 등장인물은 모두 그 두 곳과 연결되어 있다. 서로 긴밀하게 이어지는 인연의 고리에 잡화점으로 보내는 상담편지가 있고 잡화점의 답장이 있다. 그들은 살면서 겪는 절박한 고비에서 편지를 보내게 되고, 친절한 답을 받으며 인생의 새로운 과정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주인공들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사는 듯한 데도 결국에는 어느 시점에서 만난다. 그 만나는 곳에 인간에 대한 예의,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드러난다. 인간 사이의 선의를 쉽게 사랑이라고 하지만 꼭 그런 감정만은 아니다. 사랑보다는 더 깊고 신실한 인간에 대한 존경이다. 남의 인생을 인정해 주는 포용이고 시선의 넓음이다. 나미야 잡화점의 주인은 장난삼아 보낸 백지편지에 대해서도 마음을 다해 답장을 보낸다.
당신의 지도는 아직 백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목적지를 정하려고 해도 길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일 것입니다. 지도가 백지라면 난감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구라도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겠지요.
하지만 보는 방식을 달리해봅시다. 백지이기 때문에 어떤 지도라도 그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 하기 나름인 것이지요.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가능성은 무한히 펼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멋진 일입니다. 부디 자신을 믿고 인생을 여한 없이 활활 피워보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 447쪽에서
저자는 다른 시대를 살아가던 인물들이 진정한 소통을 통해 서로의 인생에 힘이 되어주는 모습을 잔잔한 감동으로 그려내었다. 보이지 않지만,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고리가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어 준다. 시대를 넘나드는 편지를 매개로 단편적으로 이어지던 사건들이 결국에는 하나로 연결되는 절묘한 솜씨가 돋보인다.
줄거리를 길게 소개하지 않는 것은 소설을 읽다가 이게 뭔가, 어리둥절해지면서도 독자 스스로 해답을 찾아가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등장인물 가운데 주목해야 할 사람은 세 사람의 도둑이다. 쇼타는 인원 감축으로 잘리는 바람에 환광원에서 가까운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한다. 몸을 숨기기 딱 좋다며 두 사람을 나미야 잡화점으로 데려온 장본인이다. 아쓰야는 두 달 전까지 근처 부품 공장에서 일하다 그만두어 집세가 밀린 상황이다. 다른 두 사람보다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판단을 한다. 고헤이는 다니던 자동차 수리공장이 문을 닫아 실업자가 되었다. 빠른 도주를 위해 차를 훔쳤는데 그 차가 고장 나버린다. 셋이 나이도 똑같고 중고등학교를 함께 다녔다. 나쁜 짓을 많이 했지만, 폭력은 쓰지 않았다.
이들은 도둑이라 단정하기 어려운, 인생을 멋지고 편하게 살아가기에는 많이 서투른 실패자다. 자신들이 자라난 환광원이 어려워지자 그곳을 돕기 위해 모의를 하게 되었다. 이 의리로 뭉친 좀도둑 세 명이 나미야 잡화점의 상담창구가 오랜만에 부활한 그 날, 잡화점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상담편지의 답을 쓰던 잡화점의 주인이 유언을 남겼다. “부탁할 일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공고문’을 내달라는 것이다. 내 서른세 번째 제삿날이 다가오면 어떤 방법으로든 상관없으니 세상 사람들에게 꼭 알려주기 바란다.”
나미야 잡화점 주인의 유언을 받은 아들은 그 내용을 손자에게 전했고, 손자는 망설임 끝에 할아버지의 괴이한 부탁을 들어준다. 기적같이 상담창구가 부활한 그 하루의 중심에 세 사람 도둑이 머물게 되었다. 그들은 이해하게 어려운, 시공을 초월한 상황에서 서로 머리를 짜내어 가며, 달토끼, 생선가게 뮤지션, 길 잃은 강아지의 고민에 답장을 해 준다.
그 결과 다른 사람의 인생에 개입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가난한 소외자인 그들에게 삶의 새로운 의미가 있게 하는 이 책의 마무리는 놀람과 감동을 준다. 영화를 보다가 저절로 손뼉을 치는 그런 벅찬 기운이 들게 되는 것이다.
수필가 정명숙 선생께서 2017년 수필집 세 권을 한꺼번에 발간하신 후 댁으로 불러서 책을 주셨다. 내가 모르고 있던 시절의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했기에 무슨 이야기기가 더 있을까, 빨리 지나가려고 엄벙덤벙 읽었다. 이 원고를 쓰면서 선생의 수필집에 일본 문학에 관한 내용이 많다는 생각에 다시 읽었다.
감사하게도 오이겐 자브로(大江健三郞)의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 전문이 실려 있다. 또 이름만 들었던 여러 일본 소설가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했다. 문득 선생께 오래전 친구네 서점에서 읽었던 일본의 대중소설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는지, 여쭙고 싶어졌다. 작가도 책 제목도 잊어버린 탓이다.
앞으로 이웃 나라의 책을 조금씩 읽게 될 예감이다. 먼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의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읽어 볼 계획을 세운다.
* 정명숙 선생께서는 2023년 봄, 하늘로 돌아가셨다.
류인혜(柳仁惠)
《한국수필》 1984년 봄호 수필 <우물>로 추천 완료
한국수필작가회 고문, 국제PEN한국본부 자문위원.
작품집 : 《수필이 보인다》 《나무를 읽는다》 외 8권
수상: 한국수필문학상, 펜문학상(수필부문), 한국문협작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