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5일 부활 제3주간 월요일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22-29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뒤, 제자들은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았다. 22 이튿날, 호수 건너편에 남아 있던 군중은, 그곳에 배가 한 척밖에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를 타고 가지 않으시고 제자들만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3 그런데 티베리아스에서 배 몇 척이, 주님께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 빵을 나누어 먹이신 곳에 가까이 와 닿았다. 24 군중은 거기에 예수님도 계시지 않고 제자들도 없는 것을 알고서, 그 배들에 나누어 타고 예수님을 찾아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25 그들은 호수 건너편에서 예수님을 찾아내고,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27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주님을 믿는 일은 정말 어렵기도 합니다.
전에는 매년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많은 덕담을 주고받는 데 그 중에 '만사여의형통'(萬事如意亨通)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참으로 기분 좋은 말이며, 최고의 덕담으로 들리는데 모든 일이 생각대로 잘 된다면 정말 신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또한 '길상여의'(吉祥如意)라는 말도 그러한데 모든 좋은 일과 상서로운 일이 생각과 같이 이루어지라는 상상할 수 없는 멋진 말입니다. 우리가 연하장(年賀狀)이나 쓸 수 있는 말이지만 그 말을 듣고 행복해하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가 그렇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것과 반대로 되면 ‘나는 복도 지지리도 없다.’라고 원망을 하게 되고 내 뜻대로 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지 않음을 깨닫기도 합니다. 더구나 나의 생활에서뿐만 아니라 내가 하는 일에서도 나의 자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찾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전혀 할 수 없는 생명을 얻는 일은 정말 자신이 없어지기도 합니다.
나의 육체의 생명도 아주 미세한 신경과 뇌의 초미립자인 세포의 성쇠(盛衰)에 의해서 이루어져 있습니다. 아주 미세한 세포가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에서 새로운 길로 접어들 수 있는 미천한 내가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라고 하시는지 주님의 말씀이 이해가 가지 않기도 합니다. 그래도 젊을 때에는 그런 일도 자신 있다고 생각하고 살았고 내가 어떤 것도 자신 있게 자력으로 할 수 있을 것으로 장담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신앙에서도 자신이 있었고 나름대로 그 모든 것들에서 주님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며, 하느님의 뜻을 잘 깨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돈을 버는 일도 그렇고, 부모를 모시는 일도 그렇고, 가족들을 대하는 것도 그렇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도 자신이 있었는데 그런 모든 일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많은 일들이 점점 조심스러워지고, 가까이 할 수 없는 것들이 나를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겨우 알게 되었습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구하는 데에도 이처럼 깊은 상처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귀다툼을 하고,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고집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공동체를 해치기도 하고, 예수님을 아프게 하고,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하느님을 욕보이는 일을 너무 많이 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한 몸 얼마가지 않아서 썩어 없어질 한 줌의 흙이고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하여도 주님의 앞에서는 정말 찰나에 불과한데 왜 그 짧은 시간에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으며, 살아야 한답니까? 그런데 빵을 많게 하신 주님의 표징은 바로 당신의 죽으심과 쪼개어지심과, 으깨지고 나누어지심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죽으려고 하는 사랑은 찾아보기 힘들고 교회와 가정에서 또 공동체에서 죽고 쪼개어지려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작아지고 녹아들려는 사람들은 바보취급을 당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자신이 점점 슬퍼지기도 하고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쪼개지려고 하지도 않고, 죽으려고 하지 않고, 불같이 화만 내는 옹졸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사람들의 아주 작은 말에도 자주 상처를 받으면서 마음에 응어리는 점점 커지기도 합니다.
나는 오늘 아주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동안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로 판단되었던 사람들이 갑자기 돌변하여 곁에 있는 사람들과 사이가 벌어지더니 이제는 원수를 대하듯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지르는 사람들처럼 돌변하는 사람들은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으며, 말로써 편 가르기를 하는 사람들이나 말을 함부로 하면서 신앙공동체를 비방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 불편한 마음이 도저히 가셔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작은 잘못된 행동도 예수님께는 큰 상처가 되며 악마의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으며, 주님의 적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용서하고, 서로 아껴 주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영원한 생명의 양식은 바로 주님의 말씀이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님의 가르침을 떠나서 사는 사람 중에 바로 나도 그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 손가락으로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 하면 나머지 네 손가락은 나를 가리키고 있다는 말처럼 정말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양식은 얻기 어렵고 힘든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신앙은 참으로 속단할 수 없는 오묘한 주님의 섭리 속에서 아주 미세한 초미립자의 운행질서와 같이 조금도 빈틈이 없어야 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조그만 틈만 있어도 악마는 아주 간교하게 그 속을 비집고 들어와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마의 간교한 틈새공략을 물리치고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마련하여 주신다는 것을 다시 묵상하고 반성합니다. 오늘 사람들처럼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나도 자문해 보았습니다.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