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성탄 제3강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말씀 / 누가복음 2:1-20
요절 / 누가복음 2: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을 다루고 있습니다. 상당히 유명한 이 이야기는 동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림과 다르고 그 의미는 다른 깊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구원이 바로 이 구유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사랑이 마음에 새겨지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진행됩니다. 1절을 보십시오.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로 다 호적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는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의 양아들로서 본명은 ‘옥타비아누스’입니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이후 권력다툼에서 승리하면서 로마의 권력을 독점했습니다. 로마원로원은 그에게 ‘신이 보낸 구원자, 존엄자-아구스도[Augustus]’라는 칭호를 보냈습니다(신격화 : 달력에 July-August 삽입). 그의 통치는 합리적이었고 로마에 200년이 넘는 긴 평화를 가져왔습니다(Pax Romana, Pax Augusta, BC 27-AD 180). 하지만 이 평화는 로마인들만의 평화였습니다. 로마인들이 부와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는데, 황제는 세금을 더 걷기 위해 전제국에 호적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그 명령 한마디에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2,3). 요셉은 다윗의 후손, 유다 지파였기 때문에 갈릴리 나사렛에서 유대의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4). 그때 정혼한 마리아가 요셉과 함께 호적하러 올라갔는데, 마리아는 이미 예수님을 잉태한 상태였습니다(5). 황제는 명령 하나로 전 제국민을 움직이게 하는 힘을 가졌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가이사 같은 권력자들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누가의 눈은 가이사를 지나쳐 베들레헴으로 향합니다. 6,7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여기서 일반적인 오해를 해결할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마리아가 베들레헴에 도착하자마자 산통이 시작되었고 그래서 다급하게 여관방을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당 기간 머물던 중에 출산했습니다(While they were there, the time came for the baby to be born). 또 베들레헴은 예수님 당시 약 300명 정도 거주하던 곳이고 관광지가 아니었기에 여관이 없었습니다. 여관으로 번역된 원어(카타뤼마, katalyma)는 여관이 아닌 손님용 방을 의미합니다. 베들레헴에는 요셉과 마리아만 온 것이 아닙니다. 친척들도 함께 와 있었는데 그 사람들이 머물던 방에서는 출산이 어려웠습니다. 이것은 양보의 문제가 아니라 레위기 12장에서 규정한 출산한 산모의 부정함 때문이었습니다(아들을 낳으면 1주일간 부정). 그래서 가축을 두는 집안의 구유에 자리를 펴고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뉘었습니다(7)(케네스 E. 베일리 [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 참조). ‘구유’는 가축, 그중에서 나귀의 먹이통입니다. 나귀는 예수님과 인연이 깊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나귀를 이용하셨고(요12:14), 메시아의 겸손을 상징합니다(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이 출생 후 나귀의 먹이통에 누이신 것도 겸손, 낮아지심의 표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지만, 낮은 모습으로 낮은 곳에 오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자기 비움’(케노시스)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빌립보서 2:6,7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emptied/ἐκένωσεν)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에 기초한 용어입니다. 예수님은 왜 자기를 비우셨을까요? 구약시대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직접 만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신격, 거룩함 때문에 인간은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뒷모습을 본 것이 전부였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이시기에 신격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우리를 만나러 오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온전히 비워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신격과 영광을 모두 비우시고 평범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여기서 그친다면 놀라운 일은 될지언정 우리 삶에 큰 변화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집에 미국 대통령이 찾아오면 정말 놀라운 일이 되겠지만 인스타 팔로워 수 늘어나는 것 말고 다른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낮아지심에는 비밀이 있습니다. 그분이 낮아지시면서 비우신 하나님으로서의 충만함(생명)이 우리를 채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무너진 관계가 채워지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채워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자기 비움의 결과로 하나님께는 영광, 땅 위에는 평화가 이루어집니다(14절). 예수님 곁에서 이를 지켜본 사도 요한은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1:16)” 우리는 예수님의 자기 비움과 채우심을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렵지만 이 비움의 진리를 배우고 행해야 합니다. 자기를 비우고 낮아지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가 하나씩 비울 때 하나님이 더 큰 것으로 채우십니다. 우리가 비운만큼 하나님이 채우시고 우리와 이웃, 양들의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은 기록된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BC 700년경에 쓰인 미가서 5: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성경은 이미 700년 전에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을 예언했고 이것을 당시 성경 선생들은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마2:4-6). 예수님은 가이사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다가 우연히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따라 그곳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는 것은 가이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삶이 우연이나 우발적인 사건의 연속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섭리) 안에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면 세상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삶에서 하나님의 선한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 지역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홀연히 주의 사자가 그들 곁에 나타났고 영광의 빛이 그들을 비추었습니다(9). 천사는 왜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이나 높은 사람을 찾지 않고 목자들을 찾았을까요? 첫째, 베들레헴 양 목장의 특수성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과 예루살렘 사이에는 좋은 목초지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성전 제물로 쓰일 양들도 키웠는데, 흠 없는 새끼가 태어나면 강보로 싸서 구유에 보호했습니다. 몸에 상처(흠)가 있으면 제물로 쓰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그 목자들은 12절에서 천사가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는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습니다. 지금 태어난 아이가 바로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1:29)”으로 불렀습니다. 천사들은 표적의 의미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목자들에게 가장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둘째, 천사는 예수님이 낮은 곳에 임하신 것처럼, 낮은 자리에 있는 자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은 낮은 자들, 마음이 가난한 자들에게 먼저 임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으로 만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럼 천사가 전한 소식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10,11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세상의 기쁨은 대개 상대적입니다. 취직하면 기쁘지만, 내가 취직했기 때문에 떨어진 사람이 있습니다. 좋은 성적, 대학합격, 결혼, 집, 자녀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쁨을 주는 모든 욕구는 상대적이기에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에게 주는 큰 기쁨은 욕구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고통의 해결일 것입니다. 그럼 세상에 만연한 고통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거의 모든 고통은 관계의 파괴에서 비롯됩니다. 부부와 가족, 연인과 친구 등 사회적 관계가 깨질 때 고통이 시작됩니다. 부부가 깨지면 온 가족이 고통당하고, 친구가 깨지면 갈등이나 왕따로 이어집니다. 육체적 질병도 몸의 균형이 망가져서 발생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와 죽음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깨진 결과입니다. 죄와 죽음, 심판을 포함한 모든 고통은 하나님과의 관계손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손상된 관계를 우리의 노력으로는 회복시킬 수 없었습니다. 몸을 상하도록 고행을 하고 종일 기도해도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롬3:10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결국 우리는 죽음과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한데, 중재를 담당하는 제사장과 희생제물입니다(레위기). 하지만 불완전한 인간 제사장과 짐승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완벽한 제사장과 희생제물을 보내주셨는데, 바로 구유에 누이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직접 경험하셨습니다(히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롬 3:25a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완벽하게 중재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완전한 사람, 완전한 하나님). 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완벽하고 영원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탄생과 십자가를 통해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완벽하게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희생, 사랑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손을 내밀었다는 사실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죄와 죽음의 그림자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이 모든 사람에게 주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됩니다(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요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시는 분이심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게 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먼저 ‘오늘’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2천년 전에 오셨기 때문에 지금 우리와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예수님을 만나는 ‘오늘-바로 지금’ 주어집니다. 구원이 영원 즉, 과거-현재-미래 모두에 속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일 때 오늘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오늘 구주로 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우리의 삶은 날마다 달라질 것이며 슬픔 많은 세상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제 ‘구주’라는 단어를 보겠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로마황제를 ‘구원자’로 불렀습니다. 일종의 예우이긴 하지만 황제에게는 그럴만한 권력과 돈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수도에는 100만 명 정도 거주했는데, 이중 자유민 32만 명에게 무료로 밀이나 빵이 배급되었고 검투사 경기나 서커스를 열어 일상에 지친 백성들을 위로했습니다. 또 강력한 군사력으로 로마 본토를 보호했습니다. 황제와 가까울수록 풍요와 안정을 누릴 수 있었으니, 사람들이 보기에는 구원자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권력자도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관계성을 회복시켜줄 수 없습니다. 초가집 살던 사람에게 아파트를 제공하고 라면 먹던 사람에게 파스타, 피자를 먹여줄 순 있지만, 죄, 죽음, 심판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파괴된 관계를 회복하고 죄와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구주이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라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1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표적’이란 메시지를 담은 기적입니다. 하지만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가 무슨 표적이 되겠습니까? 슈퍼맨처럼 어린아이가 놀라운 힘을 보여준다면 모를까 그저 누워있는 아기에게 특별한 것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역설(paradox)의 종교입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고 어리석은 것이 지혜로움을 앞섭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는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위해 육신을 입고 자기희생을 위한 준비를 마쳤다는 sign입니다. 희생과 사랑과 겸손의 표적이요 기적입니다. 생명 구원은 자기 비움과 희생을 통해 일어납니다. 부와 권력이 아니라 낮아짐과 희생으로 죄인들을 구원합니다. 낮아짐과 희생이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더 힘 있고 더 강하게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만 낮아지신 것이 아닙니다. 일생 병자들과 죄인들, 제자들을 섬기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습니다(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들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은 무능하다고 비난했습니다. 세상은 자기 비움과 희생을 아름답게 봐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낮아지고 섬기는 길을 가셨습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에게서 이 겸손과 사랑, 은혜와 희생이 잘 드러납니다. 구유에 누인 아기에게서 이 표적을 발견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1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신학자이자 설교자인 존 파이퍼는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본질적인 가치와 아름다움...이 외적으로 비치는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신성,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낮아지심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요? 예수님은 낮아지심으로써 하나님의 겸손과 사랑, 희생이라는 신성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무엇을 이룸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낮아지고 서로 사랑할 때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의 신성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평화도 낮아짐을 통해 찾아옵니다. 서로 화평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고 높아지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 신앙인들은 겸손한 마음을 품으려 애를 씁니다. 목자로서, 부모로서, 동역자로서 섬기려 합니다. 하지만 어디까지 섬겨야 하고 어디까지 낮아져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불쑥불쑥 찾아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높아지고 싶고 섬김받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의 사랑과 겸손에 마음을 녹이면 다시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참된 평안은 상황이나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마음에 담을 때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영광이 피어나오고 모든 지각 위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찾아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목자들은 구유에 나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보기 위해 서둘렀고, 모인 사람들에게 천사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16-19). 그리고 자신들과 같이 낮은 자들에게 가장 먼저 복음을 듣게 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송하며 돌아갔습니다(20).
결론 : 누가는 복음서 1,2장에 예수님 한 사람의 탄생을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늘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심으로 이스라엘을 세우셨고, 모세 한 사람을 통해 수백만의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제 우리 곁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어린 양이 손을 내밀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분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이고 영광이고 평화입니다.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 응답하시고 우리 삶을 기쁘신 뜻 가운데, 구원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기쁨이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