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의 저주법
기독교인이라도 미워해도 괜찮고, 화 좀 내는 게 대수냐에 이어 이제는 저주법이라. 좀 민망하긴 하다. 정의를 행하라, 상처 받음을 감수하라가 아니라 미움에서 분노로, 저주에 이르렀으니, 어디까지 갈 건지. 사전을 검색해 보니 ‘저주란 타인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생겨나기를 비는 것’이란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도 잘 못하는 내가 웬 저주? 저주 받을 글만 쓰는 것은 아닐까.
신약 하나, 구약 한 군데를 보자.
종교개혁의 영웅 마르틴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참으로 사랑했다. 그는 이 편지를 주석하면서 바울의 저주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왜 하면 안 되는가.” 예수가 그랬고, 바울이 했다고 감히 우리 따위가 저주해도 되는가라고 묻지 말고, 그들은 되는데 왜 우리는 안 되는가를 묻자는 것이다. 질문의 방식, 프레임을 바꾸면 다른 대답이 나온다.
유진 피터슨은 한술 더 뜬다. 같은 본문을 해설하며 제목을 이렇게 잡았다. “저주할 자유.” 저주한 적 있다고 깊은 죄책에 사로잡혔다면 자유하시라.
이번에는 구약이다. 시편에는 저주 시가 어마무시하게 많다. 원수로 인한 고통을 토로하며 복수를 요청하는 시가 즐비하다. 무려 3분의 1이다. 그러니 왜 저주해도 되느냐고 묻지 마라. 인간은 복수를 요청하는 존재이고 하나님은 복수하는 분이시다. 그런 인간의 실존과 하나님의 존재를 반영한 것이 저주 시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가 아니라 ‘어떻게’가 관건이다.
그 노하우가 궁금하면 시편 109편을 꼭 읽어보라. 차마 옮길 수 없는 이 불편한 시는 원수가 일찍 죽고, 처자식은 고아와 과부가 돼 평생 구걸하며 살게 해 달라는 말을 얼굴에 철판 깔고 요구한다. 그런데 내게는 저주의 내용보다 첫 구절이 인상적이다. 1절은 “나는 주님을 찬양합니다”(새번역)로 시작한다. 그의 모든 악담이 찬양이라니. 얼마든지 할 수 있고 해도 된다. 다만, 다윗처럼 찬양하며.
그리고 이 시는 기도이다. 당연하다. 시편은 죄다 기도이니까. 저주 기도라는 말에서 우리는 앞 단어에만 신경을 곤두세운다. 어떤 단어로 형용하고 서술하더라도 변치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기도라는 점이다. 왜 기도인가. 저주를 상대방에게 직접 퍼붓지 않고 말이다. 원수 갚음이 내가 아닌 주께 있고 주님밖에는 내 원통함을 들어줄 이가 없고 주님만이 해결해 줄 것을 믿기 때문이다. 해결을 통째로 주님께 떠넘기는 깊은 신뢰 행위이다, 저주기도는.
저주의 기도가 믿음임을 보여주는 이는 하박국이다. 그는 믿음에 관한 영원한 정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고백을 힘차게 외치고 곧바로 원수를 향한 저주를 다섯 차례나 퍼붓는다. 저주도 믿음의 행위임에 틀림없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에는 악인을 저주하는 일이 내포돼 있다. 그대 정녕 하나님을 믿는가.
그러고 보면 우리가 그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유달리 경건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을 안 믿으니까, 내가 해결의 주체라서 그렇다. 저주하지 않는 것이 경건이 아니라, 못된 짓을 일삼는 악인의 잘못을 하나님 면전으로 가져가서 바락바락 대드는 것이 경건이다. “하나님께는 죄인의 저주가 경건한 사람들의 할렐루야보다 더 즐겁게 들릴 것이다.” 경건한 루터의 말이다.저주 기도는 찬양이고 기도이고 믿음이라고 했다.
또 하나, 언어이다. 저주 기도는 말에 그칠 뿐, 실제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 만약 구체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면 뒤에서 욕을 하거나 기도실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지 않으리라. 그러니 말이 거칠고 과격해 보이는 저주 기도에 대해 화들짝 놀라 거칠고 과격하게 대꾸하지 말기를. 그에게는 하나님밖에 없다. 그런 말도 못하면, 하나님께라도 못하면 어찌 사나.
그럼 저주 기도는 누가 할까.
피해자다. 가해자는 약자에게 직접 갑질을 하고 횡포를 부리지 골방에 들어가 속앓이 하면서 하나님께 삿대질하지 않는다. 정의로운 피해자가 저주 기도를 드린다. 그는 불공평과 부정과 불의를 참지 못한다. 저주 시편으로 기도하는 그대, 악하지 않다. 의롭다.
저주 기도하는 이의 마음은 어때야 할까.
저주의 히브리어 ‘호이’(hoi)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원수를 향한 욕설과 악담을 가리키는 동시에 원수가 미구에 맞게 될 재앙에 대한 조롱과 탄식을 내포한다. 상대방이 불행에 빠지라는 촉구이자 그가 겪을 재앙에 대한 눈물이다. 원수에 대한 분노와 연민이라는 상반된 개념이 긴장을 이루며 공존하는 단어인 게다. 원수가 미운가. 저주 기도를 하라. 원수가 불쌍한가. 저주 기도를 하라.
단, 기억할 게 있다.
내가 원수를 향해 저주할 수 있다면 나 또한 누군가의 원수라는 것,
그는 자신의 원수인 나를 무시로 저주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을 것이라는 점, 그것도 잊지 말자.
김기현(로고스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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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비도 못내고 카페도 운영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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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게 없으니 늘 아쉬운 소리를 하게됩니다
쌀도 김치도 없어 사야하고 집세..임대료와 통신비 공과금을 내야합니다
요즘은 쌀을 보내시는분도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은 천사의 손길이 되어 주시는 분이 계셔서
용기를 주시길 간절함으로 기대합니다 죄송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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