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3일 대림 제1주일
제1독서 : 이사 63,16ㄹ-17.19ㄷㄹ; 64,2ㄴ-7
제2독서 : 1코린 1,3-9
복 음 : 마르 13,33-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3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4 그것은 먼 길을 떠나는 사람의 경우와 같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있으라고 분부한다.
35 그러니 깨어있어라.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저녁일지, 한밤중일지, 닭이 울 때일지, 새벽일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36 주인이 갑자기 돌아와 너희가 잠자는 것을 보는 일이 없게 하여라.
37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있어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1986년 우주 왕복선 챌린저호가 발사 직후 폭발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모리 대학의 교수 율릭 나이서는 다음 날 자신의 강의를 듣는 100여 명의 학생에게
‘위 사고 소식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들었는지’ 자세히 적게 한 다음, 그 답지를 보관했습니다.
그리고 2년 반 후에 같은 학생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고 답을 받았습니다.
이제 두 답지를 비교합니다. 그 차이는 어떠했을까요?
학생 중에서 25%가 완전히 다른 대답을 했고, 65%는 세부 사항에서 큰 차이를 보였으며,
단 10%만 동일하게 답변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사실은 대부분 현재의 기억이 아주 확실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기억은 이렇게 정확하지 않습니다.
대략적이고 나머지는 추론으로 채워가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 감정, 환경 등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 기억하는 것, 생각하는 것 등이 정확하지 않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자기 기억이 무조건 맞는 것처럼 생각하고,
다른 이의 기억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요?
지혜로운 사람은 많은 것을 기억하고, 자기주장을 확실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틀림도 인정할 수 있는 겸손한 사람이 진짜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겸손을 강조하신 이유는 이렇듯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그때가 언제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세상의 종말에 대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주인이 집을 떠나기 전에 해야 할 일을 맡긴 종들처럼
우리 모두가 부지런하고 충실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지요.
주인은 언제라도, 또 아무 때라도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종이 언제 올 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을까요?
종은 절대로 예측할 수 없습니다. 종은 주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자기 생각만을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때가 언제 올지 전혀 모르면서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자기 생각을 내세워서는 안 됩니다.
하긴 언젠가 죽을 것임을 알면서도 절대로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 사람처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초대 교회 때부터 신앙인의 참된 자세를 ‘깨어 있음’으로 묘사했습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깨어서 주님께서 오실 날을 잘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깨어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하느님의 큰 선물입니다.
오늘의 명언
욕구를 절제하는 사람은 욕구가 절제될 수 있을 만큼 약한 것이기 때문에 절제한다(윌리엄 블레이크).
“깨어 있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입니다.
바야흐로 대림시기가 시작됩니다.
청색 대림환과 자색의 대림초가 기다림과 봉헌의 색동옷을 입었습니다.
새해 첫날, 먼저 양광모 시인 시 <기다림>을 들어봅니다.
누군가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눈부신 일인가.
아침이 기다리는 태양처럼
밤이 기다리는 별처럼
그에게 한 줄기 밝은 빛이 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가슴 따뜻한 일인가.
그리하여
그날을 손꼽으며 내가 그를 기다리는 건
또 얼마나 가슴 뜨거운 일인가.
태양을 기다리는 아침처럼
별을 기다리는 밤처럼
그를 위해 아름다운 배경이 될 수 있다는 건
또 얼마나 맑은 눈물 같은 일인가.
우리는
태어나고 기다리고 죽나니
살아서 가장 햇살 같은 날은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촛불처럼
기다리는 날이라네.
(대림촛불처럼 기다리는 날이라네)
'대림'은 'Aventus'(도착)라는 단어의 번역입니다.
곧 ‘도착’을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사실 모든 역사는 대림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모든 시간이 대림이었으며,
마찬가지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시간도 모두 대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온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늘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림'은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도 감동적인 사건인 메시아의 도착을 알리는 성탄을 반향하고 있지만,
우리를 과거의 사건에만 머물게 하지는 않습니다.
대림은 항상 계속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총괄하여 항상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히브 13,8)
이 대림시기의 제일 큰 주제는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인생은 기다림이 있어 아름답습니다.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소중함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열망한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열망하고 기다립니다.
오늘도 우리는 사랑하는 임을, 소중한 임을, 주인이신 임을 열망하여 기다립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은 참으로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 기다림의 열망을 아주 강렬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당신 앞에서 산들이 뒤흔들리리다.”(이사 63,19)
참으로 강렬한 기다림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개입이 야기시킬 놀라움이요 경이로움입니다.
하느님은 역사를 그저 스쳐 지나서 통과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를 새롭게 변형시키기 위해 역사 안에 임하십니다.
곧 당신의 구원 계획에 우리를 참여시키기 위해 인간의 역사 안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 안에 개입하셔야 할 필연적인 이유를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이기 때문이요,
당신은 주님, 저희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이사 64,7 참조)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기다림을 더 명백하게 삶의 모든 순간에 확대 적용합니다.
곧 '그분의 오심'을 '항상 기다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순간순간이 그분께 대한 신뢰와 사랑을 드리는 ‘만남의 시간’이 되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성사를 통하여 우리의 삶 안에 임재한 주님을 열절하게 영접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단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깨어 지켜라.”(마르 13,33), “깨어 있어라.”(마르 13,35.36)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이미' 깨어났습니다.
주님의 오심과 더불어 깨어난 영혼들입니다.
곧 '깨어남'은 주님으로부터 선사 되었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깨어 있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선사받은 은총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음'은 이미 오신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을 말합니다.
곧 면전에서 깨어 있는 것이요, 인격적인 대면입니다.
그런데 사실 깨어 있기 위해서는 먼저 깨어나야 하고, 깨어나려면 먼저 깨부수어야만 합니다.
곧 우리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야 하고, 습관을 깨야 합니다.
이미 몸에 익은 타성을 깨야 하고, 안주와 편함을 깨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기 자신을 깨부수어야 합니다.
그분께서 우리보다 먼저 깨부수어져 쪼개지고 나누어져 우리를 기다리는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깨어 있음'은 우리를 기다리시는 바로 그분을 만나는 일입니다.
진정 그분께서는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현전하신 그분의 면전에서 자신을 개방하고,
바로 그분이 주님이심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사랑과 생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깨어 있음의 표시는 무엇일까?
또 무엇을 통해서 우리는 깨어 있음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잠을 자든, 일을 하든, 기도를 하든, 대화를 하든, 주님께 지향을 두는 일입니다.
그 무엇을 하든 ‘주님을 향하여’ 하게 되면 깨어 있는 일이 됩니다.
그것은 곧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야말로 깨어 있음의 표시가 됩니다.
‘늘 기도하면, 늘 깨어 있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병행 구절인 루카 복음에서는 말합니다.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21,36)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깨어 있어라.”(마르 13,35)
주님!
깨어 있게 하소서.
깨어 기다리게 하소서.
고대하고 희망하게 하소서.
희망하고 준비하게 하소서.
헛 군 데 눈 돌리지도 않고, 언제나 임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빛의 갑옷을 입고, 빛 속을 걷게 하소서.
동행하시는 당신께 깨어 있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2023년에는 ‘성지순례’를 6번 다녀왔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는 것은 2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지를 보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기도 하고, 사진에 담기도 합니다.
저도 처음 성지순례를 다닐 때는 주로 보는 것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른 새벽 시나이산에 올라가서 떠오르는 태양을 보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오병이어 성당, 진복팔단 성당을 보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주님의 무덤성전을 보았습니다. 나자렛에서 성모마리아 대성당을 보았습니다.
로마에서는 베드로 대성당을 보았습니다.
루르드에서는 성모님의 발현 동굴을 보았습니다.
이렇게 보는 것이 목적이 되면 눈은 즐겁지만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일반 여행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신앙의 선조들이 걸었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순례를 통해서 나도 신앙의 선조들처럼 치열하게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지순례의 목적은 ‘멈춤, 만남, 변화’가 됩니다.
성지순례를 위해서는 일상의 삶을 잠시 멈추어야 합니다. 성지에서 신앙의 선조들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만났다면 더 나은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했던 것처럼,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되었던 것처럼 변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지순례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오늘은 교회의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대림 제1 주일’입니다.
세상의 달력은 아직 24일이 남았지만, 교회의 전례는 오늘부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주제는 ‘깨어 있음’입니다. 깨어 있음에도 2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잠에서 깨어나는 것입니다. 저도 오늘 아침 4시에 일어났습니다.
여러분들도 잠에서 깨어났기에 지금 이렇게 미사에 참례하고 있습니다.
깨어난 모든 생명은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생존과 종족의 보존입니다.
약한 것은 강한 것에게 먹히는 ‘양육강식’의 세계입니다.
환경에 적응한 것이 살아남은 ‘적자생존’의 세계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적인 깨어남입니다.
우리는 이런 깨어남을 ‘깨달음’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 구도의 길을 갈 때 영적인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영적인 ‘깨달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깨달음에도 2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선물처럼 주어지는 깨달음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가슴 벅찬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치열한 성찰과 수행을 통해서 얻어지는 깨달음입니다.
부처님은 7년간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었고,
그 깨달음을 이웃에게 전하였습니다.
영적인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마음의 문이 열리면 비록 배움이 부족해도, 이방인일지라도, 죄인일지라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문이 굳게 닫혀 완고해진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
하느님의 기적은 이방인이었던 시렙다의 과부에게서 일어났다.
엘리사 시대에 나병환자가 많았지만,
치유의 기적은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에게서 일어났다.”
율법과 계명을 잘 알았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선물처럼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완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이미 알고 계신다.
그러니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을 찾아라.
그러면 나머지 모든 것들은 선물로 주어질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새들을 보아라, 들의 꽃들을 보아라.
저들은 수고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다 먹이고 입히신다.
그러니 너희는 아무런 걱정하지 마라.”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짐 진다들은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
다른 하나는 ‘말씀’에 의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악의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내비게이션’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이 말씀에 ‘예’라고 응답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성모님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요셉 성인도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나자렛의 성 가정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청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씀 안에 살았을 때는 낙원에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악의 유혹에 넘어가 하느님의 말씀을 잊어버렸을 때는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2024년 교회의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습니다.
겸손과 온유로 마음의 문을 열어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선물처럼 받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깨달음을 얻는 한 해가 되면 좋겠습니다.
죄악의 장막을 찢고 주님에게로
염철호 요한 신부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침묵하시는 하느님께
하늘을 찢고 내려오시라고 간청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로부터 우리의 구원자이신데
지금은 하늘 위에 가만히 앉아 침묵하고 계신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게 되고, 그분의 길에서 벗어나게 된 것,
사람들의 마음이 굳어지고, 하느님을 경외하지 못하게 된 것이
모두 하느님의 침묵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하느님께 “하늘은 찢고 내려오시라.”고 청합니다.(이사 63,19)
당신이 참으로 성실하신 분이심을 드러내시라는 간청입니다.
그러면 온 세상이 당신 앞에서 두려워 떨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당신께로 돌아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실한 분이시기에 당신이 창조하신 이들을
고통과 파멸 속에 내버려 두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인간의 죄로 모두가 고통을 당하게 되었지만,
모든 것이 하느님의 창조물이니 성실하신 당신께서 책임져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창조주 하느님께서
당신의 창조 사업에 대해 온전히 책임지고자 하신 결과였습니다.
하느님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시어 모두를 당신과 화해시키신 것입니다.
이는 올 한해 읽게 될 마르코 복음서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복음서 시작 부분에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내려옵니다. 마르 1,10)
그리고 복음서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집니다.(마르 15,38)
하느님께서 오랜 침묵을 깨고 하늘과 성전 휘장을 찢고
세상에 개입하시어 당신을 드러내시었음을 밝히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모두가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고,
이를 통해 하느님의 성실하심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 발을 딛고 살고 있고,
인류는 여전히 죄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파견하시어 세상 끝 날까지
모두를 당신 안으로 불러 모으라고 명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이러한 예수님의 명을 받들어
세상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그날,
곧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그날을 깨어 기다립니다.
그러면 성실하신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반드시 하늘을 찢고 다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때 우리 모두는 비로소 그분과 완전한 친교를 맺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종말을 깨어 기다리는 우리 모두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오늘 제2독서로 봉독한 코린토1서의 말씀처럼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풍성한 은총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 관한 증언이 우리 가운데 튼튼히 자리 잡고
또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흠잡을 데가 많은 우리들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미 영접했음에도 불구하고 제1독서의 이사야가 이야기하듯이
주님의 길에서 벗어나 살아가곤 하며, 마음이 굳어져 주님을 경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길 위에서, 늘 구원을 받지만 다시금 부정한 자가 되고 의로운 행동을 외면합니다.
그러면서 주님께 다시금 하늘을 찢고 내려오시라고 기도만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죄악의 장막을 찢고 하느님께로 나아가지 않고,
우리 스스로가 이기심과 자만의 장막을 찢고 이웃에게로 다가가지 않고,
여전히 가만히 앉아 주님과 당신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장막을 찢어 달라고 청하고만 있습니다.
이번 예수님의 재림을 깨어 기다리겠다고 다짐하며 성탄절을 준비하는 대림시기를 시작하면서
다시 한 번 하느님과 이웃을 외면하며 가려왔던 우리들의 장막을 스스로 찢겠다고 다짐합시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반드시 하늘을 아니 우리 장막을 찢고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우리를 구원해 줄 주님을 기다리지만,
실은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고
우리가 문을 열어주기를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이 시간 기다림에 대해 묵상하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길 바랍니다.
대림절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
대림절은 우리의 구세주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탄 전 4주간을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이 되어 기다리고,
신약의 백성으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 번 오신 예수님과 다시 오실 예수님 사이에서 설렘과 감사함으로, 긴장으로 기다립니다.
대림초가 4개 꽂혀 있습니다.
4개는 4주간을 뜻하지만 본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세주, 메시아가 오심을 기다린 세월이 약 4,000년이 됩니다.
그 4,000년을 4주간으로 상징화해서 네 개의 초에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또한, 네 개의 초는 예수님께서 동서남북 온 세상의 구세주이심을 의미합니다.
초를 장식하기 위해서 둥글게 만들기도 하는데,
바로 온 우주를 상징합니다. 그래서‘대림환’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탕을 녹색으로 꾸미는 것은 생명의 푸르름을 나타냅니다.
또한, 색깔을 보면 어두운 자색으로 시작해서 점점 밝은색으로 불이 밝혀지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가까이 다가오시는 기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마음도 맑고 또 밝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맑고 밝아진다는 것은 우리의 허물을 벗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초의 색깔과 제의 색깔이 자색인데 자색은 바로 회개와 보속의 의미를 담은 색깔입니다.
그것은 외적인 화려한 트리를 장식하고 구유를 준비하는 것보다도
몸과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에 들도록 목욕재계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초대입니다.
회개한 마음 안에 아기 예수님을 낳아드리도록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기다림에 걸맞은 준비가 필요한데
그것은 무엇보다도 거룩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저희는 진흙, 당신은 저희를 빚으신 분, 저희는 모두 당신 손의 작품입니다”(이사64,7).
하느님의 작품으로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간직하는 것이 성탄을 준비하는 기초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외침에는 ‘저희가 회개할 테니 저희에게 오십시오.
저희가 당신이 늘 함께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십시오’하는 간절함이 담겨 있습니다.
맑은 마음으로 아버지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가정에 어떤 귀한 손님이 오신다면 청소하고 음식을 만들기도 하며 준비할 것입니다.
기다림이 간절하면 그 기다림의 여정에 따르는 모든 수고는 기쁨일 수밖에 없습니다.
더더욱 예수님을 기다린다면 기다림이 간절한 만큼 준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일상 안에서 손님을 모시려 할 때, 청소하고, 음식을 준비하고 부산을 떠는데
예수님을 모시길 원하면서 그만한 준비가 없어서 되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깨어 있어라”(마르13,33.37).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영적인 깨어있음을 말합니다.
‘어둠의 행실을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부끄러워 숨었을 때
“너 어디 있느냐?”(창세3,9) 찾아 나서시던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구하고자 모세를 선택하신 분이 하느님이시고(탈출3장 참조),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탈출 13,22)으로 함께하심을 드러내시고
쓴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시며(탈출15,22-27) 만나와 메추라기로 배부르게 먹게 하신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그분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49,1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묵시록에는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묵시3,20).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깨어 있을 때 우리를 위한 주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알게 되면 우리의 처신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삶이 바뀝니다.
그러나 깨어 있지 않으면 우리를 찾으시는 하느님을 뵐 수 없습니다.
깨어 있지 않으면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결국 주님을 만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 있으십시오. 깨어 있다는 것은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그것을 왜 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받는 작품으로 무엇을 하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경계하는 마음을 늘 지녀야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철저히 단호하게 거부되어야 합니다.
내가 너보다 더 낫다는 마음으로 거들먹거리거나 자만자족하는 태도는
그리스도의 탄생과 재림을 기다리는 자세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 하느님의 눈으로 이웃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가운데 기쁨을 간직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사랑이신 예수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이 순간은 하느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인 만큼
사랑할 기회를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지금부터 후회할 일을 줄여야 하겠습니다.
믿는 이들은 과거에 매이지 않습니다. 지난 일은 하느님의 자비에 맡깁니다.
그렇다고 현세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만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약속된 천상의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앞날을 보고 전진하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현재를 모른 체 하면서 미래 속에서만 산다면 비현실적인 세상에 산다는 뜻입니다.
현재는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이기에 지금은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주님의 마음에 들도록 활용해야 합니다.
미래에 대한 동경 없이 현재에만 집착하여 산다는 것은
아무런 발전도 없이 어중간한 상태에서 평범하게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신앙에는 어중간은 없습니다. 양다리도 없습니다.
천상을 희망하는 만큼 선물로 주어진 오늘에 충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기다리기보다 주님께서 우리를 더 기다리십니다.
성경 안에서 당신의 말씀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십니다.
감실 안에서 당신을 경배하는 이들을 기다리시고, 기도하는 이들을 보고 싶어 하시며,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기다리십니다.
고해소 안에서 큰 자비와 사랑으로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주님을 외롭게 해 드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거룩함으로, 깨어 있음으로 주님을 만나는 한 주간 되시길 희망합니다.
“주님, 제가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창세49,1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어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대림이란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의 모든 기다림의 시간을 말한다.
넓은 의미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는 그 순간까지를 대림 시기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대림을 잘 준비한다는 것은,
그분의 진리에, 그분의 초대에, 그분의 부르심에
그리고 매 순간 그분의 메시지에 대한 완전한 개방을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대림은 우리 신앙의 본질적인 구성요소이다.
오늘 전례에서 대림의 의미가 잘 표현되고 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 구원의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즉 하느님이 개입하시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구원될 수 없으며,
더구나 그 스스로는 구원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63,16-17; 64,1 참조).
여기서 이스라엘은 회개하여 마음의 치유를 받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이스라엘의 불충실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임재는 변화를 일으키신다.
하느님의 오심은 구원을 위한 것이다. 구원적 도래라고 할 수 있다.
성탄을 잘 준비하는 의미가 이것이다.
우리가 성탄에 다시 태어나지 못하면,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는 표지가 되고 말 것이다.
예수께서는 먼저
“그러나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32절) 하시고, 깨어있도록 초대하신다.
깨어있음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항상 준비하고 있을 수 있다.
오늘 복음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보다 깨어있어야 할 의무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 깨어있음의 개념은 세 번(33.35.37절)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고,
문지기에게는 깨어있으라고 분부한(34절) 데서 한 번 더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마태 25,14-30의 달란트의 비유와 루카 19,12-27의 미나의 비유에서 더 발전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더 예리하게 기다림의 분위기를 강조하고 있다.
집주인의 돌아옴은 불확정적이어서 갑작스레 들이닥치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네 번에 걸쳐 깨어 기다림을 상기시킨다.
그때가 저녁, 한밤중, 닭이 울 때, 이른 아침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님의 오심의 이러한 불확실성에 근거한 깨어 기다림은
모든 신자에게 정신을 차려 깨어있어야 할 책임성 있는 태도를 가르쳐 터득게 한다.
책임 있게 깨어 기다리는 것은 헛된 망상에 사로잡혀
미래를 꿈꾸는 묵시적 열광이라든지 현실에 대한 무감각이나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진정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우리 자신을 개방하고 받아들여 실천하는 삶을 의미한다.
그래서 언제라도 들이닥칠 수 있는 주인에게 문을 열어줄 수 있는 깨어있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한 삶이어야 함을 말해준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도래에 대한 주제를 다시 취하여 삶의 모든 순간에 확대하여 적용하고 있다.
주님께서 실제로 오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오심을 항상 기다려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순간순간이 그분께 대한 신뢰와 사랑을 드리는 만남의 시간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에게 베풀어 주신 은총의 선물들이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아무 잘못이 없는 사람으로 주님의 심판 날을 맞이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은총의 빛 안에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광된 왕국에서 결합해 줄 그 친교는(1코린 1,9 참조)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즉 매일 매일 계속해서 작은 도래, 임재가 선행되지 않으면
그 위대한 마지막 도래는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다.
주님을 맞이하는 것은 어느 때고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결정적으로 주님을 만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정적인 만남을 잘하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순간순간의 삶을 통하여
자신을 죽이는 삶이 되어야 한다.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그 순간마다 주님을 만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 만남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항상 깨어있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순간순간의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을 때,
우리는 결정적인 만남, 우리의 죽음 혹은 주님의 재림도 기쁘게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계속 살 수 있도록 깨어있도록 하여야 한다.
인생이 공짜라는 잠에서 깨어나라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부터 전례력으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됩니다.
이때마다 나오는 복음의 주제가 ‘깨어 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깨어 있음은 각자가 주인이 맡긴 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는 집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자에게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있으라고 분부한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마르 13,34-35)
누가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고, 왜 어떤 이들은 그 일을 하지 않을까요?
그 해답은 우리 마음에 주님으로부터 받는 것들이 ‘공짜’라고 믿게 만드는
자아의 계략에 속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렸습니다.
영화 ‘치킨 런’(2000)은 1950년대 요크셔 양계장을 배경으로 한 무리의 닭들이
농장주인 트위디 부부에게서 탈출하려는 과정을 다룬 애니메이션입니다.
주인공 진저는 자유를 꿈꾸며 거듭 탈출을 시도하는 암탉 무리의 리더입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이가 공짜일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냥 편하게 주인이 주는 모이만 먹으며 알이나 낳으며 살자고 말하는 닭들도 있지만,
진저는 자유를 갈망합니다.
수 없는 시도와 실패 끝에 비행기를 만들어 닭장에서 탈출한다는 내용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 닭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고 성적을 높이기 위해 공부를 합니다.
노력한 만큼 얻어지는 게 세상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우리 생명만큼은 공짜라고 여깁니다.
만약 아이가 부모에게 주어지는 것이 공짜라고 여기면 어떨까요?
예전에 박한상이라는 청년은 부모의 재산을 노리고
부모를 살해하고 불을 질러 방화로 위장하려다 잡혔습니다.
그는 부모가 워낙 부자라 자신에게 주는 것이 그렇게 고맙지 않았습니다.
극히 일부분을 주면서 생색낸다고 여겼습니다.
이렇게 되면 돈과 쾌락과 자존심의 노예가 되어 사람이 망가집니다.
부모의 뜻을 따라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그렇게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문제는 자녀가 부모에게 받는 것이 공짜라 여기며 ‘감사’의 마음이 생기지 않는 데 있습니다.
만약 우리 생명이 공짜로 주어졌다고 여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분명 생명은 부모가 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부모가 다시 생명을 줄 능력은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주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가 주었을 것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그분에게 받은 생명이 공짜가 아님을 안다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이 마음밖에 바라지 않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저절로 부모의 뜻을 따르게 됩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께서 에덴동산에 해 놓은 장치가 하나 있습니다. 선악과입니다.
선악과는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받은 에덴동산과 자신들의 생명 전체에 대해서
공짜로 여기냐, 받은 것으로 여기냐를 시험하는 버튼과 같았습니다.
하느님은 땅에서 나는 소출의 십분의 일은 당신의 것이라며 당신께 바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감사를 몰라 불만 속에서 더 가지려고 세상 것에 집착하며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악해집니다.
닉 부이치치는 손과 발이 없이 태어났습니다. 처음엔 그것이 불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못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살 시도도 몇 번이나 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자, 삶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손과 발을 안 주신 것이 아니라, 그것만 빼놓고 다 주신 것입니다.
생명을 주셨으니 감사해야 합니다. 아니면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느끼게 되자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왜 생명을 주셨는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 결론은 하느님께서 자신과 같이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전도사가 되라고 세상에 보내신 것이란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대로 살아 결혼하고 자녀들까지 낳고
수많은 사람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만이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났던 목동들이나 동방 박사들은 하나 같이 그러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처지에 감사하며 무슨 일을 하든 하느님께 보답해 드린다는 마음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불만에 싸여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해도 자기들 부족한 것들만 청합니다.
닉 부이치치의 경우면 팔과 다리를 달라고 청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깨어 있을 수 없습니다.
깨어 있음이란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은 공짜는 없음을 깨달아 받은 모든 것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서공석 요한 신부
단풍이 아름답더니 벌써 낙엽 되어 떨어져 발에 밟히고 있습니다.
오늘은 待臨節이 시작하는 날입니다.
한 해가 기울고 또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예고하는 계절입니다.
대림절은 글자 그대로 임할 것을 기다리는 계절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기념하는 성탄 축일이 가까워 옵니다.
또한 멀리는 우리 삶의 終末도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하는 계절입니다.
산과ㅑ 들에 푸르던 생명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생명도 종말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되는 계절입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하실 은혜로운 일을 희망하게 하는 계절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너희는 조심하고 깨어 지켜라... 집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삶의 종말이 언제 올지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종말에 우리가 하느님을 대면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신약성서」에는 세상의 종말에 대한 언급들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은 세상의 종말이 멀지 않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특히 기원전 2세기부터 유행한 유대인들의 묵시문학 작품들은
가까운 미래에 닥칠 종말에 대해 많은 상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상상들은 「신약성서」에도 적지 않게 흘러 들어왔습니다.
‘해와 달이 어두워지고 별이 떨어진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온다.’,
‘죽은 이들을 부활시켜서 심판하신다.’ 「신약성서」의 여기저기 나타나는 그런 표현들은
유대인들의 묵시문학이 상상하여 만든 언어가 「신약성서」 안으로 흘러 들어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날과 시간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마태 24,26)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도 그 시대 유대인의 한 사람으로,
세상의 종말이 멀지 않은 장래에 올 것이라고 믿으셨습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은 모두 그렇게 믿었습니다.
수백 년 동안 異民族의 지배를 받았던 유대 민족입니다.
强大國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들은 그들이 처절하게 체험한 억압과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새로운 미래를 待望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류 역사의 미래에 대한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非그리스도인 보다 인류의 미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된 하느님에 대한 신앙언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하느님을 자기의 삶 안에 모셔 들여 살겠다는 사람입니다.
그 언어는 예수님 안에 하느님이 살아계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며 즐기고, 재산을 많이 가지거나 출세하여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보다,
더 고귀한 것이 인생에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며 걱정마시오...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시오.”
「마태오 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6,31.33)
먹고 마셔서 행복할 수 있는 삶이 아니라,
찾아야 하는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은 우리가 자비하신 하느님을 우리 안에 영접하여,
그분이 하시는 일, 곧 인간 생명을 보살피고, 살리는 일을 실천할 때, 우리 안에 실현됩니다.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생명이고, 이 세상입니다.
그분이 베푸셨듯이, 우리도 우리 주변의 생명들에게 베풀고 보살펴서,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우리 안에 실현하며 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부모를 비롯한 고마운 어른들이 자비를 실천하여, 우리의 생명이 살아있고, 성장하였습니다.
자비는 인간 생명을 존재하게 하고, 성장하게 하는 힘으로 인류 안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비를 우리 실천의 動機로 좀처럼 삼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중심으로 하는 利害打算에 얽매여 삽니다.
자비는 우리가 우리를 중심으로 이해타산을 할 때, 우리를 손해만 보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타산을 벗어나 생각해 보면, 자비는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해 줍니다.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을 우리도 미워하면, 우리는 그 마음의 악순환에 사로잡혀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그 악순환에 한 번 빠지면, 우리는 理性과 자유를 잃어버리고, 오로지 그 마음만을 배설합니다.
그 악순환은 주변 생명들뿐 아니라, 우리의 생명도 위축시키고, 결국은 병들게 합니다.
미운 사람을 용서하고 배려하는 행위는 그 마음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참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되게 합니다.
오늘의 복음이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라고 말하는 것은, 그 악순환에 빠져 살지 않고,
자비와 배려를 찾아 자유롭게 실천하는 일에 깨어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위해 힘을 다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우리가 생각하는 正義와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因果應報의 원리를 중요시하는 질선 안에 삽니다.
‘콩 심은 데에 콩 나고, 팥 심은 데에 팥 난다.’고도 말합니다.
그 질서에는 죄가 있는 곳에 당연히 비난과 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런 질서 안에 계시지 않고, 자비의 질서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그분이 사시는 질서 안에 우리도 살겠다는 우리의 결의를 담은 고백입니다.
바울로 사도는 그 질서를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죄가 많아진 거기에 은총이 더욱 넘쳐흘렀습니다.”(로마 5,20)
이 세상에는 弱肉强食이 당연한 질서로 보입니다.
큰 나무 아래 있는 작은 나무는 햇볕과 영양을 빼앗기고, 결국은 살아남지 못합니다.
猛獸 가까이에 있는 草食 동물들은 맹수의 먹거리로 자기 생명을 빼앗깁니다.
原始人들의 酋長이나 미개한 나라의 統治者는 약자를 착취하여, 자기 스스로를 풍요롭게 하였습니다.
약육강식의 질서는 인간 상호 간, 기업체 간, 또한 국가 간에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
약자는 항상 강자에게 빼앗기고, 그 생존을 위협당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찾아야 하는 하느님의 나라는 그런 질서 안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병든 이를 고쳐주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그 의로움은 우리의 섬김으로 실현된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20,26)
유대교 기득권자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인과응보의 질서 안에 계신 하느님이라 믿었습니다.
病苦와 불행은 인간의 죄에 대해 하느님이 주시는 벌이라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깨어 있으면서 그분의 질서를 살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계절은 바뀌고 세월은 흘러갑니다. 우리도 세월 따라 흐르면서 하느님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종말에 대면할 하느님은 자비와 용서와 섬김의 하느님이십니다.
그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우리는 그분의 질서 안에 살려고 노력합니다.
자비와 용서와 섬김을 실천하는 질서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깨어있어라.
이승화 시몬 신부
조심히 깨어 기다리는 자세
이는 자신이 가진 간절함의 크기에 달려 있습니다.
자신이 꿈꾸는 희망이 간절할수록
그 외의 것들은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내 삶에 가장 중요한 단 하나를 발견했기에
그것만으로도 충만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혹은 다양하게 찾아옵니다.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희망이기에
오늘 조금은 쉬고 싶어지는 유혹.
나 혼자만의 희망일 수 있기에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유혹.
내가 가진 희망의 가치를 스스로 낮춰버리고 싶은 유혹
이러한 유혹들이 찾아오면서 우리는 쉽게 흔들립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하면서도 깨어 지키라고 하십니다.
당연하게 주어졌다고 착각하는 마음 안에서
간절함은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기에
그분께서 언제나 함께해 주신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깨어있을 것을 말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분 안에서 희망을 발견했기에
그분과 동행하면서 희망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런 자세가 있었기에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했고
온갖 박해와 수난을 겪으면서도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자세가 기다리는 자세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우리는 오늘 주님과 동행합니다.
늘 찾아오는 성당이지만
그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간절함을 잊지 않고
내가 하는 봉사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역시 예수님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참된 기다림이란 바로 이런 자세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희망을 키워나가는 것
그분께 대한 간절함을 잊지 않고 나아가는 것
알지 못해도 그분과 함께하며
온갖 유혹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돌보는 것
이런 기다림을 통해
우리 역시 우리 안에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탄생을 기다리는 오늘
우리 마음을 돌보고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들어 올리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