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의 선교역사를 정리해 가면서 저는 울컥하기도 했고 두손을 모으기도 하며 많은 감동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초기에 일생을 바첬던 사랑하는 이들과 건강의 악화로 그리고 가족들이 먼저 부름을 입어 부득불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던 가슴아픈 사연들,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옳게 분변한 선배들의 믿음에의 도전을 보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니 이곳에 온지 어느 덧 10년이 넘었고 이제는 야성을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현실에의 안주!! 이것은 직무유기, 선교사의 본분을 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성을 해보았고 이제라도 전도지와 성경책을 배포하며 태국인들을 더 깊이 연구하며 그들에게 다가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제는 존재를 넘어서 의미로 그들 곁에 서고 싶습니다. 아래의 역사는 여러 책에서 본 것이며 자료가 정리되는 대로 더 첨가할 것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한국 선교사들의 선교역사를 정리해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치앙마이 선교역사에 관한 아니 태국 선교에 관한 자료가 있으신 분은 태국어든 영어든 서로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너무 길어서 송구합니다. 읽는 자에게 감동이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치앙마이를 최초로 방문한 케톨릭 선교사는 프랑스 사람인 몽씨그뇰 그랑젠(Monsignor Grand-jean)과 그의 동료인 몽씨그뇰 바챨(Monsignor Vachal)로 방콕을 떠나 보트와 코끼리의 여행과 도보 등의 험난한 여행 끝에 나콘사완, 딱을 거처 토엔(Thoen-지금의 람빵지역)에 도착한 것은 1월 18일이었다. 그곳에서 산을 넘어 치앙마이까지 오는 데는 5일이 걸렸는데 지금은 3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다. 당시 그의 기록에 의하면 “산에는 야생 코끼리와 호랑이와 펜더가 득실거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산을 넘어 오면서 “가난한 땅을 굽어보며 하나님께 수세기 동안 복음의 빛으로부터 버려진, 어떤 선교사도 들어가보지 못한 처녀지를 방문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찬양으로 대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치앙마이에서 2개월 이상을 머무르면서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남푼에서 2일 람빵에서 12일을 머문 후에 방콕으로 돌아간 것이 1844년 4월경이라고 한다. From text by Andrew Forbes
그는 북부지역의 선교여행 기간 동안에 사람들을 만나 복음을 전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것(불행하게도 당시 치앙마이에서는 공개적으로 복음의 수용을 반대하는 기류가 강했다. 당시는 차오 푸타웡(Chao Phuttawong 1825-46)이 지역 군주였는데 그는 공개적으로 다른 종교의 유입을 막은 사람이었다.)을 알고 낙담하여 남푼으로 내려갔다. 그는 여행 기간 동안 내내 전도를 시도하였으나 한 사람에게도 침례를 주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스스로 “실패한 여행”이라고 하였다. 그가 북부지역을 다녀간 기록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그가 묘사한 많은 것들은 수세기가 지난 지금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란나왕국에 관한 영적인 고해에서 “북부 태국은 회개가 불가능한 지역”으로 이해하였고 “가난한 백성들의 무분별이 심하여서 알지도 못하는 신을 섬기며 그 신은 단지 유령일 뿐이며 절은 악의 소굴이지만 그들은 회개하기를 거부하였다.”
치앙마이의 지리적인 부분에 관하여는 “란나 왕국은 라오스의 먼 서쪽에 위치하며 치앙마이는 수도로 높은 산 발치에 있고 동쪽에는 매우 높은 산이 있고 크고 아름다운 평야가 있으며 두개의 성벽과 넓고 깊은 도랑으로 둘러 쌓여있다.”
도시 상황에 대하여는 “이 도시는 인디아의 도시들과 비슷하게 지어졌는데 그것은 집들이 따로따로 떨어져 있고 집들은 나무와 정원으로 둘러 쌓여 있다.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인구를 추정하기는 쉽지 않으나 왕자는 10만명 정도라고 하는데 내가 추정하기에는 변두리를 포함하여 거주자는 2만정 정도이다. 강 주변 제방에도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그들은 대부분 방콕에서 온 파산자들로 이곳으로 도망쳐와서 이름을 바꾸고 빚쟁이들의 추적을 피하고 있었다.”
당시 무역에 대하여도 “치앙마이는 강으로 밖에 다닐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구상무역으로만 가능했다. 소금은 매우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었고 그들이 원하는 어떤 것과도 교환할 수 있었다. 대부분이 방콕에서 왔으며 치앙마이에서는 매우 비싼 가격에 팔리고 있었다.”
치앙마이의 여성들에 대한 그의 기록은 “그들은 남자들보다는 매우 적극적이고, 부지런하며 더 똑똑하다. 그들은 의심할 것 없이 남편을 지배하였으며 남편이 그들을 만족시켜주지 못할 때는 그들을 쫏아낼 수 도 있다.”
“치앙마이에는 집만큼 많은 사원이 있었다. 시내에서는 왼쪽으로 가든지 오른쪽으로 가든지 사원을 만나지 않고서는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다. 적어도 시내에는 100개가 넘는 절이 있었는데 각 사원마다 10명, 20명, 혹은 30명의 스님들이 살고 있었다. 대부분이 젊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읽을 줄도 몰랐고 대부분 잠자고 게임하고 안 좋은 일을 하는데 시간을 소일했다. 많은 사원이 낡았는데도 수리되지 않고 방치되고 있었다. 절에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그곳은 부도덕의 학교였다. 그들은 그들의 불법을 여러차례 우리에게 얘기해 주었다. 그들이 말해주지 않았아도 우리가 눈으로 충분히 목격하였다.” . From text by Andrew Forb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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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치앙마이는 태국 장로교 선교부 산하에 있었던 가장 외딴 지역으로 독특한 특성을 가진 곳이었다. 치앙마이가 선교에 문을 열게 된 것은 초창기 선교사들의 안전의 철학보다는 확장기의 모험의 철학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가 있다. 치앙마이는 메삥강의 한적한 계곡에 자라잡고 있었으며 당시 인구는 남푼을 포함하여 50만명 정도였다. 그곳에는 23개의 조직된 교회가 있었고 3,600명 이상의 교인이 있었는데 이는 태국 전체 기독교인의 2/5에 해당하는 것이다. 치앙마이에 있는 기독교 기관으로는 멕길버리 신학교, 치앙마이 제일교회, 프린스 로얄 컬리지, 다라 학교, 멕코믹 병원, 간호사 훈련학교와 멕켄 나환자 센터 등이다.
치앙마이에서의 선교 사역을 이야기하려면 의사선교사였던 멕길버리의 삶을 빼놓고는 아무것도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꿈은 모든 타이족의 가정이 복음의 메시지를 듣는 것이었다.
그는 1858년에 태국에 왔다. 태국에 온 이후로 그는 방콕에 살고 있는 동안에도 북쪽의 라오(치앙마이를 일컬음)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다. 치앙마이 왕자와 그를 잘 아는 친지가 방콕을 방문하려는 위치가 멕길버리의 집 근처였다. 그는 페차부리에 정착한 이후에도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서 사는 라오(북쪽 사람들)의 전쟁 포로들의 촌락을 방문함으로써 북쪽 선교에 대한 이런 관심은 계속되었다.
선교사역 확장을 위한 계획은 아주 요원해보였다. 방콕과 그 주변 지역에도 아직도 인원이 부족하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선교부에 치앙마이의 선교센터를 오픈하도록 강요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두 명의 오랜 급우인 멕길버리(Dr.McGilvary)와 윌슨(Dr.Wilson)은 이것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었고 1863년에는 북쪽으로의 탐험여행에 나섰다. 그들은 치앙마이에서 열흘 동안 머물렀다. 멕길버리는 그의 자서전에서 “우리가 확신을 하기에는 하루면 족했다. 나는 치앙마이가 나의 일생의 사역지가 되리라는 기쁜 희망을 가지고 떠나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치앙마이의 선교부와 라오미션센타를 오픈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선교부의 문제가 해결되고 치앙마이에 선교사역을 시작하여도 된다는 마지막 결정이 내려진 것은 1866년 가을이었다.
이 당시의 상황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는 멕길버리의 자신의 말로 듣는 것이 최상이리라; “1866년 가을 윌슨이 휴가로부터 방콕에 돌아왔을 때 그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페차부리에 있는 우리들을 방문해달라고 요청하는 한장의 편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열렬한 토론을 하느라 주일을 보내야 했다. 그는 아직까지도 열열하게 치앙마이에 가고자 하였으나 그해에는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우리가 다음해를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한다면 기회를 잃을지도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날 아침 윌슨씨 가족을 남겨두고 가족들과 함께 급히 방콕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치앙마이 왕자가 특별한 용무가 있어 방콕을 방문하였다가 곧 돌아갈 참이었다. 모든 계획은 그에게 달려 있었다. 사실 그렇게 되었다.“
“브레들리는 나를 데리고 우리 선교부에 갔다. 멕도날드와 죠지를 데리고 미국 영사관으로 갔다. 그곳에서 후드(Mr.Hood)는 기꺼이 공식적이며 개인적인 도움을 줄 것을 약속했다. 두가지 중요한 장애물이 아직 남아 있었다; 즉, 태국 정부와 마지막으로 언급되겠지만 라오 군주였다. 영사는 전에 폐차부리에서 우리와 함께 있다가 최근에 외무장관이 된 친구를 통해 치앙마이에 선교부를 오픈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하는 공문서를 즉시 왕에게 썼다. 왕은 자신에게 결정권이 있지 않음에 대한 결정에 대해 전갈을 보내왔는데 바로 금요일 저녁이었다. 그는 북쪽(라오) 사람들을 위해 억지로 선교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라오 군주는 방콕에 머무르고 있었다. 만일 그가 허락만 해준다면 태국 정부는 그들에게 모든 것을 의탁한다고 했다. 그는 우리가 군주를 알현하여 군주가 참석한 공무원에게 직접 지시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 제안을 하였다.”
“토요일 아침 열시에 우리 모두는 라오 군주의 배가 정박하는 지점에 나타나서 군주를 알현하여 요청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강어귀에 있는 정자에서 그를 기다리도록 초청되었다. 잠시 후에 스스럼없이 격식을 차리지 않은 복장- 허리에 파능을 하고, 자켙도 걸치지 않고, 어깨위로 스카프를 느러뜨리고 손에는 조그만 지팡이를 잡은 군주가 나타났다. 그는 우리와 악수를 하고는 편한 자세인 오른쪽 발을 왼쪽 무릎위에 올려놓고 앉아서 발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용건을 물었다. 후드씨의 요청으로 브레들리가 치앙마이에 선교부를 설립하고자 하는 소망과 군주의 승인을 얻기를 원한다고 설명을 하였다. 군주는 우리들의 요구가 그리 심각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다소 안심하는 듯 하였다. 선교부 설치문제는 그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그에게 그것에 대해 한번 더 말하였고 승인을 요청하였다. 우리의 모든 요구에 대하여 그는 이미 동의를 하였다. 그렇다. 이제 우리는 치앙마이에 선교부를 세울 수 있게 되었다. 땅은 쌌지만 우리는 그것을 살 필요가 없었다. 목재도 쌌다. 물론 자르는 비용과 운반비용이 들겠지만 그리 많이 들지 않았다.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벽돌이나 나무로 자기들의 집을 지었다. 그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에게 우리의 목적은 종교를 가르치고, 학교를 세우고, 환자를 돌보는 것이라는 것을 다시한번 설명하였다. 군주의 서기가 우리들의 질문에 대한 왕자의 대답을 받아 적었다. 공사는 감사를 표하고 우리 가족이 그를 돌보는데 헌신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가능한한 빨리 군주를 따라 치앙마이로 가기로 했다.”
“그것은 라오 미션(치앙마이 선교부)의 공식적인 탄생에 대한 빼어난 장면과 상황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익살맞은 것이었다; 이를테면 청중 방, 불교 수도원의 그림자 아래있는 정자, 공식적인 유니폼을 입고 있는 영사, 약장 안의 군주 등; 기독교 선교부의 설립에 권위를 부여하는 몽쿳왕(쏨뎃프라 파라멘드마하 몽쿳왕) 싸인이 든 답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 소그룹들, 대답은 예스였다. 그 주간의 사역의 성공에 나 자신도 놀랐다. 문명과 기독교에 자신의 나라를 오픈한 참으로 위대한 왕의 관대함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태국 정부와 라오 왕자의 편에서 보면 이것은 거의 기대하지 못했던 전적인 은혜의 행위였다.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오 군주는 인격적인 면에 있어서 조금은 고상하고 조금은 관대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방콕에 있는 친구들은 우리들에게 온 마음을 다해 지원하였다. 여성재봉사회는 새로운 선교부를 위하여 자유로이 기금을 만들어 헌금하였다. 의사인 제임스 캠벨(Dr. James Campbell)은 우리에게 약들과 약들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대한 처방전 책들을 공급하였다. 독일 영사는 우리 개인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제 권총을 한 자루 주었다. 모든 우리 선교사 친구들은 그들의 선한 소망과 기도를 더했다.”
“우리는 여행을 위하여 적당한 배와 선원을 구하는데 있어서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것은 참으로 믿음에의 모험을 건 출발이었다; 그들이 가고자 하는 여행의 목적지에는 그들을 기다려주는 친구도 집도 없었다. 그 정글 도시에는 외부 세계와 그들을 연결시켜주는 우편부도, 전보 써비스도 없었다. 렌트할 집들이나 호텔도 없었다. 무어의 책과 함께 의약품 박스들인 “인도인들을 위한 가정상비약”, 그들이 가진 유일한 이 자료는 아플 때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들의 친절한 환대, 혹은 변덕스런 통치자의 마음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태국의 고위 공직자에 의하면 그것은 “난문제”)이다
그들 앞에는 시속 40km 이상의 길고도 지루한 강을 통한 여행이 놓여 있었다. 방콕을 떠난 그들의 배가 마침내 그들이 소망하는 안식처인 치앙마이에 도착한 것은 3개월이 지난 4월 3일이었다. 그들은 공적인 휴양소를 발견하였는데 싸이즈는 12피트와 20피트로 타일 지붕과 티크 바닥으로 부분적으로 둘러 쌓여 있었다. 그들은 그곳과 다른 임시 빌딩에서 8년 이상을 살았으며 그들을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을 맞이했다. 개인 사생활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식사할 때도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는 것과 빵을 먹는 것 등 호기심 때문에 그들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이것은 치앙마이 선교부와 라오 선교부의 시작에 관한 간단한 서술이다.”
첫해의 사역에 대해 멕길버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치앙마이에서의 첫해는 어느 해보다도 빨리 그리고 재미있게 지나갔다. 우리가 비록 그때는 몇 달 동안 편지 한 통도 받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너무 바빠서 우리가 외지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외로움이나 향수병을 느낄 수도 없었다. 두 자녀, 즉 세 살짜리 아이와 여섯살 짜리 아이는 우리에게 그나마 큰 위안이 되고 있습니다.” .
1868년에는 세 가지 기록될만한 사건이 있는 해였습니다. 2월에는 윌슨 부부가 이 개척 사역의 기쁨과 책임을 나누기 위해 치앙마이에 도착했다. 라오 혹은 태국 북부의 타이족들의 최초의 교회가 조직되었는데 이는 전적인 믿음의 기관으로 아직까지는 단지 흥미를 가진 청중들만 있었다. 그리고 최초의 개종자인 난 인타(Nan Inta)가 침례를 받았다.
두번째 해는 기독교가 대중에게 받아들여진 해로 묘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멕길버리가 언급한 두 명, 즉 고인이 된 라오(북부지역)의 왕자 혹은 추장이었던 차오 인타논(Chao Intanon)의 어머니인 왕비와 스님 한 분과의 친분이 형성되었다. 비록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은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예수님의 삶의 아름다움을 인정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선교사들과의 친분을 나타내는 것을 두려워하여 선교사들을 방문하기를 꺼렸는데 비해 그 스님은 죽는 그날까지도 선교사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계속하여 교제를 하였다.
선교사들이 사람들로부터 확신과 신뢰를 얻게됨에 따라 그들은 의학적 도움을 받기 위하여 선교사들을 찾아왔다. 멕길버리가 아는 의학적 지식이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많은 고통에서 그들을 구해주었으며 치앙마이에서 의료사역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는 말라리아를 위한 키니네의 효능을 입증하였으며 천연두의 예방을 위한 백신을 개발하여 많은 생명을 살렸으며 그의 복음전도 메세지에 호의적인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얻었다.
1868년에는 조그만 땅이 그들의 안식처를 위해 확보되었다. 옛 봉건제도에 의하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땅은 그 왕자(혹은 족장)의 소유였다. 왕자는 관대하게도 그 자신에게 속한 땅의 일부를 선교부에게 주었다. 모든 보상을 거절하였으며 명확하게 경계를 정하여 주었다. 후에 실 소유주가 보상을 받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들이 만족할만한 가격으로 보상하였다. 이 터 위에 멕길버리와 윌슨 가족을 위한 집이 지어졌고 여학교 건물과 외국인 교사들을 위한 숙소가 지어졌다. 이 네 동의 건물은 지금까지 선교부에서 사용하고 있다.
1869년 중반에 그들 공동체에 좀더 독특한 신앙을 가진 세 명이 할당되어 들어왔다.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이들이 성장할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특별히 무서운 왕자의 마음에서. 그들은 여러가지 힌트들, 불길한 예감, 몰래 살피는 표정, 빈정거림 등 선교사들보다는 현지인 기독교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었다. 선교사들은 오래지 않아 그들이 선교사들에게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별히 선교사들에게 친밀한 군주는 그들의 그런 타락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정리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그들의 인기에 약간의 질투도 있었고 그가 법원으로 데리고 간 파렴치한 포르투갈인에 의해 선동되기도 했다. 그의 계획은 군주의 적의가 선교사들에게 분명히 나타나기 전에 사람들에게 알게하는 것이었다. 그는 ‘기독교를 수용하는 모든 사람들을 죽여도 된다’는 명령을 내린 후에도 그는 여전히 외적으로는 선교사들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들은 요즘은 흥분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초대교회시대 사도들이 놓았던 믿음의 유산을 북쪽에 있는 교회에게 주고 있다. 8월 14일에는 군주의 명령이 시행되었고 난 차이(Nan Chai)와 노이 순야(Noi Sunya)가 참혹하게 곤봉에 맞아 죽었다. 선교사들이 그 사실을 안 것은 그들이 죽고 2주가 지난 후였다. 선교사들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런 무서운 일들이 일어났다. 확실한 것은 그들을 돕던 사람들이 한, 두 명씩 구실을 대고는 그들을 떠나갔다. 단지 몇 사람만 약을 구하려 왔다. 현지 기독교인들은 일반적인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다. 엄청난 일이 있고 난 2주 후에 순교자의 이웃인 샨족(미얀마 동북부에 사는 산족)사람이 비밀리에 그들을 찾아왔다. 그는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면서 말이 아닌 손으로 목을 누르는 그림을 그리면서 전말을 이야기해 주었다. 당시의 분위기는 소문들로 가득찼고 두려움은 모든 이들의 마음을 엄습했다. 그들을 위해 창고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선교사들은 도서관에 있는 책들의 여백에 이 당시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방콕에 이러한 상황을 알리기 위해서 그들의 편지를 가져다 줄 라오인(북쪽 사람)을 고용할 수도 없었다. 마침내 한 버마사람을 찾았다. 당시 버마를 지배하던 영국인이 도와주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북쪽의 상황이 방콕에 전달될 수 있었다. 왕실의 담당관이 임명되었고 고립되어 있는 두 가정의 선교사들을 돕기 위한 일련의 일들이 시작되었다.
그들 일행이 치앙마이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치앙마이 시내는 하루 사이에 떠들썩하였다. 11월 27일에 왕궁 담당관은 18마리의 코끼리와 53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치앙마이로 들어왔다. 그들과 함께 장로교 선교부의 멕도널드와 죠지 선교사도 같이 왔다. 당시 치앙마이를 덮고 있었던 분노와 불확실의 어두운 그림자를 그들이 도착함으로 인해 추방해야만 했다.
왕의 친서라고도 불리우는 왕의 봉인이 도착한 다음날 아침에 친서는 금으로 된 쟁반에 담아 궁중 우산을 쓰고 치앙마이 군주에게 전달되었다. 그것을 받아 읽은 군주는 안심이 된 듯 “이 친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군. 선교사들이 만일 그들이 원하면 남아있게 하고 그들이 가고자 하면 가도록 특권을 주라는 것이니.”
멕길버리의 용기와 관련하여 그 사건은 중요한 질문을 무시해 버리면 쉽게 끝날 수 있었다. 의사인 멕길버리는 죽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었기에 대담하게 그 사람들을 죽인 군주를 고발하였다. 군주 또한 담대하게 그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 지역을 떠나 방콕으로 떠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백성들이 기독교를 떠나야 할 것을 분명하게 말하였다. 이것은 확실하고도 충분히 선교사들이 허위고소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또한 입증한 셈이었다.
적어도 당분간은 선교활동을 금한다고 결정되었지만 멕길버리는 군주가 방콕으로 떠나라고 통보할 때까지는 치앙마이에 남아 있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멕길버리는 결국 시간이 하나님의 뜻을 분변해 줄 것으로 믿었다.
얼마후에 일어난 사건이 이것을 증명해주었다. 왜냐하면 군주가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군주는 치앙마이 아래 지역으로 여행을 떠났는데 돌아오는 도중에 단지 몇 마일을 남겨두고 죽었다. 죽은 자의 시신은 도시의 어느 문이라도 통과할 수 없다는 법이, 그의 말이 곧 법이었던 사람을 그 성안의 자신의 왕궁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이 나라의 전통적인 신념에 따른 이것은 커다란 결점중의 하나였다.
비록 산발적인 사소한 박해들이 종종 있기는 하였지만 이렇게 선교사역에 가장 적극적인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1889년에 노이 시리(Eldor Noi Siri) 장로의 구속이었다. 그는 치앙다오 지역에서 회심자는 조세를 면제하여 준다고 가르쳤다는 핑계로 체포되었다. 고소는 잘못된 것이었지만 족쇄가 그의 발목에서부터 벗겨지기까지는 8개월이 지나야 했다. 그가 구속되어 있는 8개월 10일 동안 133명의 사람들이 교회로 돌아왔다.
교회로 돌아온 첫번째 여성은 빠 카먼(Pa Kamun)으로 순교자 노이 선야(Noi Sunya)의 미망인이었다. 다른 순교자인 난 차이(Nan Chai)의 미망인은 자신의 삶에 비참한 슬픔을 가져다 준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순교후 얼마 되지 않아서 그녀는 선물을 마련하여 사원으로 불공을 드리러 가는 길에 빠 카먼의 문 앞에 서서 자신들을 과부로 만든 하나님을 저주하는 일에 동행할 것을 요청하고 이전의 행복했던 때의 관습을 따라서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자고 하였다. 하지만 빠 카먼(Pa Kamun)은 거절했다. 그날 밤 문이 닫힌 뒤에 그녀는 그녀의 자손들을 불러 모으고 그들의 아버지가 그렇게 사랑했던 하나님께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그들과 함께 기도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그녀의 자손들은 수 십명이 넘지만 또 한 사람의 순교자인 난 차이(Nan Chai)의 후손 중에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1872년 1월에는 북부 태국의 최초의 의사 선교사인 브루만(Dr.Vrooman)이 치앙마이에 도착하였다. 어떤 의료적 도움없이 유행병이 격렬하게 활동하는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의사인 그가 오는 것은 매우 고마운 일이었다. 그는 도착하는 날부터 환자를 치료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현재까지 선교부의 의료사역이 활성화되었으며 선교사역중에서 성장하는 부서가 되었다. 현재 의료시설은 60개 병상을 가진 일반 병실과 6개의 병상을 가진 산부인과 병동, 승려들을 위한 2개의 특별 병상, 유럽 환자들을 위한 4인실의 건물과 예배당이 있는 별관 수술실 등이 있다. 병원과 연계하여 간호사 훈련학교가 있는데 올해는 두 학급이 졸업을 하였다.
유행성 말라리아가 한창일 때의 구제 사역에 대해 선교부의 사역의 기록이 정리되어진다면 간단하게라도 반드시 언급되어져야만 할 것이다. 말라리아가 창궐하던 시기에 선교부의 의사들 뿐만 아니라 비의료진들도 악성 말라리아가 휩쓰는 지역에 나가 사실상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해주었다. 두개의 조직된 교회가 탄생한 것은 마지막으로 심한 유행성 질병이 한창인 1911년과 1912년에 의사 선교사인 하워드 켐벨(Dr. Howard Campbell) 선교사의 헌신적인 사역의 결과였다.
10년 동안 치앙마이 선교부 내의 의료사역 실험실에서는 자신들만의 백신을 만들어서 정부 기관과 북부지역의 다른 선교부에 공급하였다. 백신을 맞은 150명의 사람들은 모두 다 북부지역의 크리스찬들로 그들의 동족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뛰어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가슴뛰게 하는 광경이었다. 실제로 이 사역은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유행성 천연두를 박멸하는 것으로 천연두는 국가 전지역을 휩쓸고 있었고 일부의 산간 마을에서는 천연두가 마을을 황폐하게 하여 묻지 않은 시신들이 널려 있었다. 정부에 의해서 예방접종을 의무적으로 실행할 때까지 이 사역은 선교부에 의해서 계속적으로 시행되었다. 이 사람들은 천연두에 대한 백신뿐만 아니라 그들이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간단한 치료제도 가지고 갔다. 그들은 내륙 깊숙이 먼 곳까지 가지고 갔으나 아픈 사람들이 주로 머무는 곳에는 주로 마술사나 제사드림 혹은 이상한 것들로 이루어진 불건전한 조제약 등이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성경을 배포하고 복음을 전했다.
치앙마이 선교부 역사의 초기에 멕길버리 부인은 그녀의 힘과 시간이 되는대로 어린 아이들을 모아 가르쳤다. 하지만 정기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고 정기적으로 조직된 학교 사역이 시작된 것은 에드나 콜(Miss. Edna S. Cole)과 마리 켐벨(
1878년에는 국가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치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그것은 아주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었으며 단지 지역적인 관심을 끄는 것으로 축하를 받아야할 최초의 기독교인의 결혼식에 관한 것이었다. 기독교인들 외에도 몇몇의 족장 부인들과 특별한 친구들이 초청되었다. 결혼식 축제는 그렇게 준비되었다.
하지만 그 마을의 족장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6루피를 spirit fee 즉 결혼을 공인하는 자금으로서 그에게 지불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젊은 커플은 그가 주관하는 예배와 귀신을 먹이는 것을 포기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 비용을 지불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족장은 그 결혼을 금하였으며 문제는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단지 잔치를 먹고 기다리는 손님들에게 송구할 뿐이었다. 그래서 당국에 이 문제에 대해 선처를 호소하였지만 당국자들에게 하는 모든 어필에 대해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재판권이 없다는 진술만 들어야 했다. 그들은 고위층에게, 최고위층에게 즉, 최종적으로 방콕에 있는 줄라롱껀왕에게 이를 때까지 이 문제를 어필하여야 한다고 충고하였다. 원래는 기독교인의 결혼의 특권(역자주-결혼시에 신부부모에게 주는 지참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달라는 것이었는데 이 문제가 일반적인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라는 것으로 문제가 커졌다. 줄라롱껀왕으로부터 우리의 그런 요구에 대해 빠르고도 애정어린 답이 왔다.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고 난후 2년 동안 절에서 입양된 군주의 아들로 “룩 깨오”라고도 불리우는 난 타(Nan Ta)라는 스님이 자주 멕길버리를 찾아와서 기독교에 대해 많은 관심을 표시하였다. 그는 곧 절을 떠나 결혼하였으며 시골에 정착하였다. 그는 아직까지 우리를 방문하며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그와 함께 수도생활을 한 친구에 의하면 기독교인들을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그의 집도 불탔다고 한다. 그는 집을 떠나 다시 그의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그 나라를 떠나서 태국어로 된 마태복음 사본을 구했다. 9년 동안 그는 방랑하였다. 줄라롱껀왕으로부터 종교의 자유가 선언될 때까지 그는 그의 옛날 집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어느 날 동네에 들어와보니 그의 아내가 신실하게 살고 있었고 그가 떠나고 난후 태어난 아이는 멋진 숙녀로 자라있었다. 그는 즉시 가족과 기독교 공동체에 자신의 신분을 밝혔고 교회의 치리장로가 되었다. 후에는 최초로 안수받은 라오(북부지역)의 목회자가 되었다. 그의 입술을 통해서 수천명의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으며 그가 죽을 때까지 신실하게 교회를 섬겼다.
치앙마이에서의 선교사역은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 주술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해왔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이는 제대로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야기들은 마치 사도행전에 나오는 몇장의 모습처럼 태국교회 유산의 일부이다.
주술에 의한 공격은 박해시에 크리스챤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방법중의 하나였다. 시기하는 라이벌이나 마음에 들지 않은 이웃을 제거하는 가장 선호하는 방법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어떤 가족이나 가족들중의 한 사람이 신비한 힘을 사용한다고 일단 소문이 나면 가족들의 운명은 거의 결정이 되었다. 그런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빠져 나올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익명의 편지가 희생자들에게 배달되어 처음에는 도망가도록 경고하고 마침내는 비보가 날아든다. 기독교는 그런 홈 리스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초대교회 많은 지도자들이 그런 피난민 출신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오늘날 그들의 후손들중에 많은 사역자를 볼 수 있는데 그들은 우리 학교의 교사들로, 또 교회의 중요한 남자, 여자 일꾼으로 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희생양이 된 마을의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기 보다는 번창하고, 진취적이고, 두드러진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기꺼이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사람으로 난 치와나(Nan Chiwana)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코끼리 두 마리를 소유하고 있었고 그의 집은 티크 나무로 지었으며 그의 집 쌀독은 언제나 쌀로 가득 찼었다. 멕길버리의 노력으로 난 치와나의 집은 회복되어 그 가족들에게 돌려줬고 파괴된 건물은 재건축되었으며 악랄한 주술로 인해 영원히 사라질 것 같았던 그의 집은 기독교인들의 센터가 되었다. 후에 난 치와나의 집에서 교회가 조직되었는데 그곳 이름을 벹엘이라고 했다.
마귀 들림은 흔한 현상이었다. 희생자들은 종종 기독교인들의 기도와 약으로 치유되었다. 한 기독교 여성은 미친 동생의 머리에 귀신을 좇아낸다고 기독교 찬양을 열심히 불렀고 결국 그녀의 홀린 친척들의 이성도 회복하게 했다. 그 홀린 여인은 그 자신이 기독교인이 되기로 하였기 때문에 마귀가 자신을 좇아와 고함을 지르며 논밭을 뒹구르게 하고 그녀를 향해 화를 낸다는 것이다.
교회의 남성들뿐만 아니라 여성들은 그들의 신앙을 용감하게 그리고 충성스럽게 표현하였다. 비 기독교 국가에 사는 기독교인들은 그들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한다. 실례로서 핌빠라는 시골 여인은 그들의 논에 부과된 세금을 조정하려고 그의 비기독교인 친구들과 함께 법정에 나가야 할 필요를 느꼈다. 그녀는 법정에 나가면 우상 앞에서 서약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녀가 할 수 있는 결말을 보고자 했다.
판사는 서약을 시키고 우상 앞에 머리를 조아리도록 하였다. 단 한 사람 그녀를 제외하고는 “나는 약속합니다.”라고 일제히 중얼거리고 동료들은 판사 앞에 마루바닥에 앉았다. 그녀는 담대하게 똑바로 앉아 있었다. 판사는 그녀에게 앞으로 나오도록 하였다. 그녀는 일어났지만 사지가 떨렸다. 그녀는 자신은 걷기가 어렵다고 했다. 법관은 그녀에게 우상에게 왜 절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나는 크리스챤입니다. 우상에게 절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판사는 “당신은 정직한 사람입니다. 나는 서약없이 당신의 증언을 듣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사건은 행복하게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좀 덜 고상한 판사였더라면 판사 모독죄로 쉽게 처벌받았으리라. 이 사건의 결과로 기독교인들이 증인인 경우에는 그의 재판 관할구역에서는 법정에서 성경을 비치하여 성경 위에 손을 얻도록 허락하였다.
태국은 두 세트의 알파벹을 가진 독특한 나라이다. 북부지역은 그들 자신의 문자(란나)를 가지고 있었고 그들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왕국을 이루었을 당시의 유적을 갖고 있다. 선교부는 태국 문자로 된 성경과 전도지를 사용함에 있어서 조금은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일하고 있다. 라오(북쪽)사람들 대부분은 그들의 문자를 읽고 쓸 수 있으나 태국어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비록 성경을 그들에게 읽어 주었을 때는 그들이 거의 이해하였는데 이는 구어였기 때문이었다. 닥터 피플스(Dr. S.C.Peoples)는 1892년에 라오(북부) 활자의 첫번째 활자체를 확보하였고 콜린즈(Rev. D.G.Collins)는 인쇄기를 운용하였고 죽을 때까지 그 메니저로 남았다. 인쇄된 첫번째 책은 멕길버리 부인이 번역한 마태복음이었다. 성경 외에 그 인쇄소에서 인쇄된 가장 인기있는 책들은 윌슨(Dr.Wilson)에 의해 마련된 찬송가였다. 음악을 사랑했던 그는 고난의 시간 속에서도 견딜 수 있는 그런 찬송을 선택했고 이것을 통하여 복음 메시지가 수천명의 사람들 마음속으로 메아리치도록 노래했다. 태국 정부는 라오(북부)지역에서 그들(란나)의 문자로 사용할 문서가 필요할 때면 선교부 인쇄소를 수년 동안 이용하였다. 라오(란나) 문자는 태국 정부에서나 선교학교에서도 가르칠 때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고 곧 그 글자는 살아있는 언어의 죽은 문자(알파벹)가 될 것이다.
실제적으로 란나문자로 인쇄를 하라는 유일한 요구는 라오(북부)지역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사용하는 문학작품에서와 중국의 타이족 학자들이나 프랑스가 지배하는 인도지나의 학자들에게서 뿐이다.
마침내 치앙마이 선교부의 미래가 구비되자마자 멕길버리는 람빵, 프레, 루앙 프라방 등과 프랑스령 안의 그들의 산속휴양지인 카무족 마을, 산속 홈 근처의 무서족이 있는 치앙라이, 영국령의 치앙 뚱, 중국 국경 너머의 치앙 룽 등 태국어를 말하는 사람들의 범위를 찾기위해서 탐험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가는 곳마다 적지만 믿는 무리들을 모으고 그는 미래 사역지로 이 지역을 표시하여 두었다. “흩어지면 성장한다”는 오랜 역설을 믿는 치앙마이 선교부는 람빵, 치앙라이와 치앙룽 선교부를 오픈하는데 자신들의 역량을 나누어 주었다.
멕길버리와 함께 여행에 동행하며 충분한 행운을 누렸던 사람들의 마음에 떠오르는 두 가지 그림이 있다. 한 장면은 저녁 시간에 어떤 농부집에서였다. 여행용 램프를 든 그의 주변에 호기심에 가득찬 소박한 마을 사람들이 줄을 서서 이글거리는 얼굴로 몸을 굽혀 바라보는 그 책은 변함없는 얇은 교리문답이었다. 대나무 막대기를 가진 멕길버리는 그들에게 단어와 본문이 유사할 때까지 반복해서 그들에게 말하면서 인내심을 가지고 단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여러가지 책들은 인쇄에 제한이 되었기에 짧은 교리문답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그 책은 같은 단어가 자주 반복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학생들은 기독교의 기본신앙 같이 잘 정리된 것들은 읽을 수가 있었다.
산족마을에서 멕길버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머물렀는지 알지 못하지만 그는 항상 읽기 수업을 시작했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이런 방법으로 읽는 법을 배웠고 또 배우도록 강요 받았다.
다른 장면은 길가의 켐프 안에서였다. 점심시간이었다. 그가 여행용 테이블 곁에 앉아 있는데 그의 뒤에는 그의 온순하고 나이 먹은 코끼리가 인내를 가지고 맛있는 음식을 기다리면서 산 같은 육중한 몸을 세우고 있었다. 때때로 멕길버리는 코끼리에게 Tidtit(사탕수수 같은 음식)같은 음식을 주었기 때문이다. 멕길버리는 때때로 여행하는 동물들, 즉 코끼리나 말과 장난을 치면서 천진난만한 기쁨을 누리기도 했고 느린 정글여행의 무료함을 달래기도 하였다. 멕길버리의 생전에는 좋은 길이란 건설되지 않았다. 84세로 그가 죽기 3주전 어느 일요일 아침 그는 순교자의 교회에 왕복 20마일을 말을 타고 갔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멕길버리가 참석한 마지막 공적인 예배는 순교자 노이 선야(Noi Sunya)의 후손들과 함께였다.
1925년 도로가 완성되고 난 후 치앙마이에서 방콕까지는 26시간이 소요되었다. 반면 보트를 이용한 강 여행은 지루하고 싫증이 나기도 했지만 흥미있는 많은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첫번째 배의 칙칙폭폭하는 엔진소리는 은혜롭고 그림 같은 라오(북부)의 하우스 보트들에게는 죽음의 해구였다(역자주-큰 배들이 지나가면 작은 배들은 물결에 밀려 거의 뒤집힐 뻔 하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였음). 50년간 치앙마이를 오갈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강을 통해서였다. 사실상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이런 보트들이 제한적이지만 객실을 갖춘 여객선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지금은 좋은 자갈길이 도시에서 모든 지역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기독교 공동체와 함께 주일을보내기 위해 3, 4일을 여행하여야 했는데 지금은 자동차로 두, 세시간이면 닿을 수 있다. 한때 보딩 스쿨에 들어가기 위해 100여 마일을 걸었던 남녀 아이들이 이제는 기차로 오고 있고 기다리는 택시가 기차역에서 학교까지 2마일 정도 그들을 데려다 주고 있다.
(1868년에 설립된) 치앙마이 제일교회는 이제 발전에 있어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침례 요한과 같은 선교사들은 쇠퇴하여야만 하고 하나님의 몸인 교회는 단지 숫자에서만이 아니라 책임감, 지도 활동, 짐을 나누어 짊, 희생하고 복음에 소외된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도 성장해야만 한다. 만일 교회 성도들이 이것을 하지 못한다면 선교사들이 그들의 과업의 기초를 놓는데 실패한 것이다.
1828년 3월에 치앙마이 제일교회는 창립 60주년을 기념하는 3일간의 축제를 했다. 단지 시간이 흐른 것뿐만 아니라 세련된 변화들에 있어서도 이것은 분노와 위험의 순교의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당시에는 (박해로 말미암아) 자신의 생명을 위하여 숨고, 도망가고 하였으나 지금은 자신들의 믿음을 기쁘게 자랑하고, 연륜과 성공에서 오는 안정감과 “영적인 조상”들에 대한 자부심 등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동정적인 견해를 가진 방문자인 멕파렌드(Mrs. Geo.B.McFarland) 여사의 눈을 통하여 3일간의 축제에 대한 분명한 뜻을 발견할 수 있었다.
“축제는 라오(북쪽) 사람들 자신들에 의해서 계획되고 실행되었습니다. 멕길버리 신학교의 운동장에는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임시 천막이 세워졌습니다. 이것은 여러 번 반복해서 꾸며진 것입니다. 어린이들은 의자와 공간 즉, 연단 앞 땅에 깔아 놓은 자리에 앉았습니다. 다른 선교부에서 온 방문객들을 위해 숙식이 신학교에 마련되었습니다. 하지만 경비를 절약하기 위하여 휴게실은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3일 밤낮 동안 이 열렬하고 열심있는 크리스챤들은 지난 60년간의 사건들을 이야기하면서 서로 교제하였다. 나이 먹은 크리스챤들은 고난의 기간동안 용감하게 믿음을 지켜온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과 이 60년 동안의 세밀한 변화 등에 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때때로 온화한 목소리로 가장 존경하는 멕길버리 선교사 부부의 이름이 언급되어지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최초로 복음의 씨를 뿌린 것과 또 그 이후로 반세기 이상 복음의 진보를 위한 수고에 특별한 감사가 주어졌다. 순서에 따라 다른 선교사들도 잊지 못할 30분 정도의 시간이 주어졌다. 어떤 선교사들은 변화된 이상한 환경에 서 있을 수도 없었고, 어떤 선교사는 고개를 들어 앞면을 바라보지도 못했다. 어떤 선교사는 주님으로부터 “잘하였도다”라는 칭찬을 듣도록 영원한 본향을 사모하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태국이 그리스도를 알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던 당시의 그들의 삶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지 못한 한 가지, 그것은 심지어 그들도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행복한 모습에서, 그들의 조용하고 소박한 은총에 의해서, 축제를 성공적으로 치르는 능력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승리하는 삶이 무의식적으로 표현된 간증 등을 통해 만들어진 깊은 감동이었다. 멕길버리와 그의 젊은 아내가 용감하게 지구상의 한 극단에서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고독과 궁핍과 고난에 맞서며 위험을 무릅쓴 것은 신앙에의 모험이었다. 그렇다. 그들과 후에 그들의 사역에 동참하여 북부태국에 “그들의 삶을 바친 사람”들에게는 경이로운 신앙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 수 천명의 사람들이 구세주의 복음을 들었고, 또 거듭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다. 절망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희망을 갖게 되었고, 인자의 위대한 능력 앞에서 악한 영이 두려워 떠나간다. 북부 태국은 자주 발생하는 질문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대답이다. “선교부들이여 댓가를 지불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