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ⅰ서론
ⅱ 본론
- 사물놀이의 역사
- 구성악기 및 특징
- 사물놀이의 여러 모습들
ⅲ 결론
- 계승 방향
ⅳ 참고문헌
ⅰ. 서론
경상도 풍물놀이라고도 하는 영남가락은 주로 진주, 삼천포 지방의 풍물놀이를 중심으로 짜여진 가락이다. 길군악, 반길군악, 다드래기, 영산 다드래기, 다드래기 맺이, 연결채, 별달거리, 쌍진풀이, 맺이 총 9개의 가락으로 이루어진 영남가락은 주로 진주, 삼천포 지방의 풍물놀이를 중심으로 짜여진 가락이다. 영남가락은 소리가 힘차고 씩씩하다. 그리고 경상도 지방의 사람들의 호방함, 씩씩한 기상이 묻어 나오는 가락이다.
ⅱ. 본론
- 사물놀이의 역사
자연의 흐름을 보고 사람들은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서로 잘 통해 야만이 그 안에 사는 사람이 풍요롭고 평안해질 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이 떠받드는 우두머리를 앞세워 좋은 날을 가려 하늘과 땅에 제사도 지내고 축제를 벌인 것이 곧 '제천의식'이다. 이때의 우두머리는 '단군'이었고 그는 한 부족의 왕이자 유일한 제사장-'무당(巫堂)'-이었다. 이 제천의식에는 반드시 음주가무가 따랐으며 놀이와 음악이 빠질 수 없었다. 이러한 모습을 상형문자로 나타낸 것이 바로 '巫(무)'자인데 이 글자의 윗부분을 가로 지은 획은 하늘을 상징하고, 아랫부분의 가로 지은 획은 땅을 상징한다. 그리고 하늘(天)과 땅(地)의 사이에는 사람들(人+人)이 있어서 이 천, 지, 인 이 하나로 잘 조화를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이 사람들이 힘을 모아 제사와 축제를 벌이는 것으로 나타나있다. 이것을 '굿'이라고 한다. 이 때 이러한 대동의 굿판에서 음악의 모습은 '두들 소리', 즉 타악(打樂)이었다.
무언가를 두드려서 무리를 하나 되게 하고 그 하나 된 무리의 힘을 모아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일은 우리의 삶속에서 싹튼 것이며 이것이 곧 사물놀이의 시원이다.
이후, 왕은 규율을 세워 백성들을 다스리며 다른 부족을 침탈하여 그들의 곡식과 노고로 부강해지거나 반대로 외적을 막는 일 등의 권력자의 역할이 강해지면서 하늘을 달래어 땅에서의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는 제사장의 기능은 사라지게 된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방식이 다양해지면서 '두들 소리'의 모습과 방식 또한 '마을 풍물굿'과 '무굿' 그리고 '전문 연희패'등의 그것으로 크게 나뉘게 된다. '마을 풍물굿'은 우리가 흔히 농악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 것으로서 앞서 말한 굿의 전통이 가장 잘 살아서 있는 형태로 최근까지 전승되어 왔다. 이는 농사가 주업인 사람들이 풍습과 관습에 따라 공동체적인 삶속에서 연행되어진 것이다. '무굿'은 남을 대신하여 제사와 축제를 주관하는 무당이라는 전문가가 살을 풀고 신명을 돋우는 여러 형태를 말한다. '전문 연희패'는 '봉산 탈춤패'등과 같은 탈춤패나 '남사당' 등의 '전문유랑예인집단'을 일컫는다. 이들은 떠돌이였으나 최고의 기량과 예술성을 자랑하던 이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연희능력이 곧 생활의 수단이며 판을 벌리는 곳이 바로 생활의 터전이므로 각종 놀이에 대한 학습이 엄격하여 아무리 행중에 오래 몸을 담았어도 학습이 미진하거나 재능이 뒤떨어지면 제대로 한 몫을 받지 못하였고,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재주가 있어서 혼자서 여러 몫을 한다면 또한 그만한 대가를 받았다. 이 세 가지의 큰 갈래 중에서 사물놀이의 모태가 된 것은 '전문유랑예인집단'인 '남사당'이다.
앞서 말한 여러 굿판-어떤 형태로든 사람의 뜻과 정성을 모아 제사를 지내고 놀이를 하는-에서 우리 조상님들의 삶과 함께 하여 왔던 우리의 두들 소리는 일제 36년간의 강점기간 동안과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 등과 그 이후 우리민족이 거쳤던 서구화, 근대화의 과정에서 우리의 삶과는 점점 유리되어 갔다. 이러한 시기에 과거 전문예인유랑집단으로서 이름을 날리던 남사당에서 최고의 예기를 익힌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20대가 된 1970년대에 그들이 나래를 펼칠만한 판은 점점 사라져갔다. 이들이 뭉쳐서 사물놀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굿판을 벌리게 된 것은 사라져가는 굿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 노력은 진정한 의미의 전통이란 사라지는 아니라 끊임없이 이어져서 시대와 교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자각에서 출발하였다. 그것은 우리 조상님들의 얼과 신명이 담긴 가락과 몸짓을 이 시대의 정서와 모습에 맞게 재창조하는 일이었다. 1978년 2월, 뜻을 모아 지은 단체의 이름이 바로 "우리 풍물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꽹과리, 징, 장고, 북의 네 가지 악기를 가지고 놀이를 하는 두들 소리패"라는 뜻의 [사물놀이]다.
따라서 사물놀이는 단독연주 뿐만 아니라 무용음악, 동서양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재즈와의 협연 등 장르에 관계없이 그 영역을 무한히 확대시켜 나갈 수 있었으며 또한 서양음악을 포함한 한국음악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는 시대적으로 18세기에 판소리, 19세기에 산조음악이 탄생하여 지금은 하나의 새로운 장르로 오늘날 국악의 큰 카테고리를 형성하였듯이, 20세기에는 사물놀이가 바로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큰 위업을 달성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 구성악기 및 특징
악기 특징 및 자연의 소리
․장구(비 소리) : 허리가 가늘다 해서 ‘세요고’라고도 한다. 다른 악기는 한손으로 치는데 장구는 양손을 모두 사용한다. 따라서 타법도 여러 가지고 4가지 악기 중 가장 변화무쌍한 소리를 낼 수 있는 악기다. 장구는 가죽과 나무통으로 되어 있는데 나무통은 오동나무를 잘라서 알맞게 말린 다음 속을 파내어 썼고 가죽은 원래 개가죽을 썼는데 갈수록 개고기 먹는 사람이 줄다보니 요즘은 소가죽, 양가죽, 염소 가죽을 많이 사용한다.
․꽹과리(천둥소리) : ‘쇠’, ‘소금’, ‘깽맥’이라고 부르며 풍물을 지휘하는 기능을 한다. 꽹과리를 다루는 기술 중에는 ‘막음새’라는 것이 있는데 꽹과리를 들고 있는 손의 손가락을 꽹과리 뒤쪽에 넣어 소리의 여운을 조절하는 것이다.
․징(바람소리) : ‘금’이라고도 부FMS다. 나무막대기 끝에 천을 두툼하게 감은 채로 치므로 소리 역시 여운이 길고 푸짐하다. 자주 치지 않고 장단의 머리밖에 한 번씩 쳐주면서 전체 가락을 푸근하게 감싸준다.
․북(구름의 형상) : 풍물 악기 중에서 가장 오래된 악기. 구조가 간단하기 때문에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그와 비슷한 악기도 많이 볼 수 있다. 소나무나 오동나무로 만든 튼튼한 통에 두툼한 소가죽을 매서 박달나무나 물풀레 나무를 깎아 만든 채로 친다. 4가지 악기 중에서 가장 멀리까지 소리가 들린다.

- 사물놀이의 여러 모습들
사물놀이라고 하면 '비나리', '삼도설장고가락', '삼도농악(풍물굿)가락' 그리고 '판굿'등을 떠올린다. 이 네 가지 곡목이 오늘의 사물놀이를 있게 만든 가장 대표적인 것들이기는 하지만 사물놀이가 오늘을 사는 우리의 정서와 감각에 맞게 재창조하였던 바로 사물놀이의 예인정신은 여기에 결코 만족하지 않고 새롭게 창조적인 실험이나 다른 예술분야와의 만남, 그리고 예술적 자기발견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우선 사물놀이의 대표적인 네 가지 연주곡목을 살펴보겠다.
'비나리'는 사물의 가락위에 축원과 고사덕담의 내용을 담은 노래를 얹어 부르는 것인데 한마디로 제의 성이 매우 강하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이 비나리는 사물놀이의 공연에서 맨 앞에 놓여진다. 비나리 로서 공연의 문을 열어서 관객들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다. 이 비나리로 공연을 시작할 때는 사물놀이의 무대입장은 무대 뒤에서가 아니라 객석 뒤의 극장 출입문에서이다. 그것도 사물소리를 내면서 말이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비나리를 하기 전에 '문(門)굿'을 침으로서 놀이패들이 왔음을 알리고 문 굿이라는 통과의례를 통해 그 안의 사람들과 비로소 같은 공간의 기를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덩덕궁'가락으로 그 문을 지나고 객석을 지나 무대에 올라서는 지신을 누른 뒤 비나리를 시작하는 것이다. 비나리의 사설에 담고 있는 내용을 보면 누가 들어도 좋은 말로만으로 짜여져 있는데 창세내력과 살풀이, 액풀이, 축원덕담 등이 주요 내용이다
'삼도 설 장고가락'은 과거 경기·충청도와 호남, 그리고 영남지방의 삼도에서 명성을 날리던 장고의 명인들의 가락을 모아 사물놀이가 정리해 놓은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사물놀이적인 감각과 또한 이 시대 최고의 장고잽이인 김덕수의 독특한 가락이 덧붙여져 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여타의 설 장고놀이의 가락 엮음새가 [다스름-휘모리-동살풀이-굿거리-덩덕궁]의 순서인데 반해 사물놀이의 삼도 설 장고가락은 [다스름-굿거리-덩덕궁-동살풀이-휘모리]의 순서로 되어 있어 마치 산조가 다스름 이후의 장단을 느린 것부터 빠른 것으로 늘어놓은 것과 같은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사실 설 장고놀이는 장고에 능한 상장고 같은 이가 혼자 나와서 서서 장고를 치면서 여러 가지 춤사위나 자기만의 독특한 버슴새 등을 보여주는 식인데, 사물놀이는 네 명의 연주자 모두 가 앉아서 연주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설장고의 놀이 성보다는 음악적인 면이 강조가 된다.
'삼도농악(풍물굿)가락' 역시 삼도의 대표적인 풍물굿 가락을 모아 앉은 반의 형태로 연주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물놀이'하면 떠올리는 사물놀이의 대표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이 삼도농악가락은 사물놀이의 초창기에는 말 그대로 '영남농악(풍물)'이니 '웃다리풍물'이니 '호남우도굿'이니 하는 이름으로 따로 나뉘어 연주되었었지만 그 뒤 이 셋이 한데 엮어지게 된 것이 삼도 설 장고가락이다. 삼도 설 장고가락이 장고를 통해서 연주자의 기량과 음악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삼도농악가락은 꽹과리, 징, 장고, 북의 사물을 가지고 우리의 가락 속에 잠재되어 있는 음양의 원리와 자연의 이치를 수많은 세월을 통해 학습하고 다져온 깊고 넓은 호흡으로 동그랗게 떠 올려 감고 감아가며 쌓아서 혹은 오므리고 혹은 부풀리며 한데 어우러진다. 이러한 삼도농악가락의 장단 짜임새는 [점고-경술-호남우도굿(오채질굿-우질굿-좌질굿-풍류-덩덕궁)-영남농악(별달거리)-웃다리풍물(짝쇠)]의 순으로 되어있다.
비나리는 제의성이 강하고 삼도설장고가락과 삼도농악가락은 음악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면 '판굿'은 한마디로 놀이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판굿에서 사물잽이들은 머리에는 상모를 쓰고 사물을 손에 들거나 몸에 메거나 하여 발로는 땅을 딛어 박차고 머리로는 하늘을 휘젓고 손으로는 사물을 울리어 듣는 이의 몸과 마음을 뒤흔들어 이 모두를 하나로 아우른다. 그것을 위해 사물잽이들은 마치 무당이 작두를 타듯 끝없는 신명과 터질 듯한 몸짓으로 온 몸과 마음을 내던진다. 자기가 치고 있는 가락에 얹힌 발딛음과 상모의 사위가 하나가 되어서 다른 잽이의 그것과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하고 그래야만 보고 듣는 이와 더욱 크게 하나가 되어 천 지 인 모두를 아우를 수 있으니 어찌 보면 사물놀이의 백미가 아닌가 생각다.
이상의 네 가지가 이른바 사물놀이의 대표적인 고정 '레퍼토리'이다. 그러나 사물놀이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앞서 말한 대로 다른 공연예술의 갈래와의 실험적, 창조적 만남이나 무속의 사물놀이화 등의 시도를 잠시도 멈추지 않고 있다. 사물놀이가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을 찾기 위해 시도한 실험적이면서도 창조적인 만남과 모색은 실로 다양하다는 표현을 넘어설 정도이다.
ⅲ. 결론
- 계승 방향
사물놀이는 "참다운 전통이란 끊임없이 시대를 호흡하며 새로운 생명력을 창출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탄생된 것이다. 비록 전통의 왜곡이라는 비판과 오해도 있었으나 "과거의 전통에 만족하느니 차라리 이단으로 남겠다"는 김덕수의 말처럼 사물놀이는 전통의 본질을 지키되 늘 새로운 모습을 추구하고 있다.
ⅳ. 참고문헌
http://myhome.naver.com/cocmoon/
http://www.senbada.or.kr/main/program/data/pro-5-1.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