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요의 고장 익산
이신효
익산益山을 흔히들 교통의 도시, 교육의 도시, 문화의 도시라고 말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여기에 서동요의 고장이라는 수식어가 하나 더 붙었다. 몇 년 전 방영된 드라마 서동요의 상당 부분이 익산에서 촬영되었고, 서동의 탄생지인 마룡지와 서동이 마를 캐며 생활하던 오금산과 백제 무왕과 관련된 수많은 유적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또한 익산에서는 매년 10월 말에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주제로 서동축제가 진행되고 있다.
선화 공주님은 善化公主主隱
남 몰래 결혼하고 他密只嫁良置古
맛둥서방을 薯童房乙
밤에 몰래 안고 가다. 夜矣卵乙抱遣去如
이 노래는 우리나라 최초의 향가인 서동요薯童謠다. 서동요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짤막한 노래로 지은 것으로써 삼국유사 무왕조에 미륵사 창건과 관련된 부분에 기록되어 있다. 서동은 자라서 백제 제30대 왕위에 오른 무왕이며,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다. 당시 백제와 신라는 심각한 전쟁을 벌이고 있던 터였음으로 일반적인 사고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같은 사랑이지만 서동과 선화의 사랑은 좋은 결실을 맺었다. 익산에는 서동이 태어난 곳에서부터 성장한 곳, 왕위에 오른 후 정사를 돌보던 궁궐터, 사후 안식처인 왕릉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적이 실제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삼국사기와 같은 정사에 이러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다고 하여 회의적인 의견도 있지만 익산에는 과거 백제의 고도였던 부여나 공주보다 더 구체적이고 확실하게 조사, 연구된 왕궁터와 미륵사지, 제석사지와 같은 사찰유적, 익산토성, 미륵산성 등의 성곽 유적, 무왕의 사후 안식처인 왕릉 등의 유적과 함께 백제시대 관음신앙의 신비스런 경험을 기록한 『관세음응험기』에 분명히 백제 무왕의 익산으로 천도 사실이 기록되어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익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야 한두 번 정도는 들었을 것이지만 다른 지역에 살고 있는 분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런 분들이 익산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익산지역의 유적 중 백제 무왕과 관련된 것을 몇 차례로 나누어 소개하려고 한다.
먼저 오늘은 서동요, 서동과 관련된 부분을 개괄적으로 이야기하고 백제 왕궁터, 제석사지, 미륵사지, 사자사, 무왕릉 등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서동관련 기록
삼국유사 무왕조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이고 그의 어머니는 과부로 서울 남쪽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연못 속의 용과 통하여 장을 낳았다고 한다. 장은 마를 캐어 생활하여 주위 사람들이 서동薯童이라고 불렀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도량이 넓어 따르는 자가 많았다고 한다.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기 그지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 서울로 가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주며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서동요’다. 서동요가 퍼져 궁궐에까지 알려지게 되자 공주는 왕궁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선화공주는 왕비가 준 금을 받아 정처 없이 떠나는 도중 서동이 나와 맞이하며 모시고 가겠다고 하였다. 공주는 그가 누군지는 몰랐지만 그를 따르게 되었고 후에 서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서동과 선화공주는 백제 땅으로 와서 왕비가 준 금을 내어 생계를 꾀하려 하니, 서동은 크게 웃으면서 “내가 어릴 때 마를 캐던 곳에 흙과 같이 쌓아 놓았다.”고 하였다. 공주가 듣고 “그것은 천하의 보물이니 금을 가져다 부모님 궁전으로 보내는 것이 어떠하냐.”고 물었다.
서동이 좋다 하여 용화산 사자사師子寺 지명법사知命法師의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으로 보냈다. 신라 진평왕은 그 신비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며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서동은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 백제 제30대 왕위에 오르고 지명법사의 도움으로 산을 헐어 미륵사를 건립하였다는 내용이다.
2. 서동의 탄생지 마룡지
서동이 태어난 곳은 익산 금마의 마룡지다. 마룡지는 익산IC에서 4km쯤 시내 쪽으로 들어와 금마 사거리를 조금 지나면 연화가든이 나오는데, 연화가든 뒤 연 방죽이 마룡지다. 지금 홍련이 활짝 핀 이 연 방죽은 농업용수를 얻기 위해 둑을 막아 만든 저수지다. 그런데 저수지 북측에만 유난히 큰 고목이 우거져 있고 일부 호안이 오목하게 들어가 있다. 이 부분에 원래 작은 연못이 있었고 서동의 어머니가 연못가에 홀로 집을 짓고 살면서 연못 속의 용과 교통하여 서동을 낳았다는 곳이지만 저수지를 크게 확장하여 그 흔적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20여 년 전 저수지 북측 구릉을 농경지로 개간하는 과정에서 많은 양의 백제시대 기왓조각과 초석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백제 왕족인 서동이 왜 익산에서 태어났는가, 익산에서 자란 서동이 어떻게 백제 제30대 왕위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백제사회는 성왕의 관산성 전투 패배 이후 왕권이 급속히 약화되었고 반면에 대신들의 입김이 강화되었다. 위덕왕은 제위 3년만에 왕위를 버리고 사찰로 들어가겠다는 말을 하였고 혜왕과 법왕은 제위 2년도 되지 않아서 원인 모르게 죽어갔다. 이러게 왕권이 약화된 시기에 백제 왕족은 더 이상 권력을 가진 존귀한 집단이 아니라 언제 어떻게 습격을 받아 쓰러질지 모르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백제왕족으로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자기를 보호해줄 수 있는 세력에 의탁하거나 아예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러면 서동이 어떻게 백제 왕위에 오를 수 있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자. 삼국유사에 의하면 “서동은 기골이 장대하고 도량이 넓어 그를 따르는 자가 많았다.”고 하며, “마를 캐던 곳에서 금덩이를 얻어 왕위에 올랐다.”고 하였다. 기록 내용으로 보면 서동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 경제적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익산지역에서 성장한 토착세력집단의 지원을 받았으며, 경제적으로는 최고 신분에 오를 수 있는 권위와 부를 상징하는 금을 소유하게 되었다. 백제에서 금은 왕과 왕비 등 왕족만 사용할 수 있도록 제한하고 있어서 금을 얻었다는 것은 결국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마를 캐던 곳에서 금을 얻었다면 서동은 원래부터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신분의 소유자였음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실재 익산의 백제 왕궁터에서는 금을 제련하고, 세공하던 공방터(공방폐기장)가 발견되었는데, 왕궁 내에서 금을 생산, 가공하였던 것은 생산된 금의 외부 유출을 막기 위한 것으로써 금의 중요성을 짐작케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3. 서동이 마를 캐던 오금산
서동의 탄생지인 마룡지에서 서쪽으로 7~800m 거리에 오금산이 자리하고 있다. 오금산에서 보면 남동쪽으로는 백제 왕궁터가 바라다 보이고, 이 산을 넘으면 미륵사지까지는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오금산은 해발 125m의 낮은 산이지만 산의 남측으로 모악산까지는 평야지대로 오금산 보다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백제시대부터 성을 쌓을 정도로 지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곳이 바로 서동이 마를 캐서 생업을 삼던 곳이며, 선화공주와 함께 살면서 금덩이(다섯 개)를 얻어 오금산五金山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서동요를 퍼트리기 위해 서동은 신라 서울로 가 아이들에게 마를 주었는데, 그 마가 바로 오금산에서 캔 마다. 실재 1980년 오금산성(익산토성)을 발굴조사하면서 이 곳에서 손가락두께의 마를 본 적이 있다. 그렇지만 지금은 오금산에서 자생하는 마는 볼 수 없고 주변에 마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4. 궁남지는?
최근 부여에서는 궁남지를 서동이 태어난 곳으로 선전하기 위하여 주변을 정비하고 연꽃을 심어 연꽃 축제를 하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 35년(634년)조에 ‘궁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 리나 되는 물을 끌어들였으며, 사방의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물 가운데 섬을 쌓아 방장선산에 비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을 궁남지와 관련된 기록으로 보고 원래 서동 모가 살던 작은 연못을 확장하여 궁남지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추론은 가능하다. 그렇지만 궁남지에 대한 수년간의 정밀 발굴조사에서 백제시대의 연못 흔적은 확인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동 모가 살만한 곳도 찾지 못하였다. 또한 궁남지 주변에서 마가 생산되었다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상태이다.
이렇게 삼국유사에 나오는 서동관련 기록에 한 가지라도 맞아떨어지는 것이 없는 상태에서는 궁남지를 서동의 탄생지로 보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5. 서동과 익산
익산에서는 서동, 서동요가 과거 중요한 문화자원일 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과정에서도 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서동축제, 서동공원, 서동마, 서동마국수, 서동마약밥, 서동참외, 서동고을 계곡의 야생화, 서동마라톤클럽 등 축제, 공원, 토산품, 동아리 이름에 이르기까지 서동이라는 이름이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서동축제는 1995년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되면서 시작된 축제다. 이 과정에서 선화공주가 살던 경주시와 자매결연을 맺고 선화공주를 경주시에서 선발하여 축제기간에 경주시민과 함께 익산을 방문하고, 익산에서는 서동을 선발하여 동서화합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서동축제는 매년 10월 말에(올해는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개최하는데, 최근에는 보석축제, 돌문화축제, 국화축제 등 4개의 축제를 동시에 개최하여 축제의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한다.
서동공원은 금마면의 조각공원을 개명하였는데, 서동이 태어난 마룡지나 미륵사지와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고, 서동을 익산의 상징적인 인물로 삼기 위해서 서동공원이라고 하였다. 금마저수지의 수변과 조각 작품, 백제 무왕의 표준영정에 의해 제작된 무왕상을 전시하고 있으며, 마한시대의 생활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마한관이 있어서 문화교육장과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토산품으로는 금마에서 생산되는 마에 그 옛날 서동이 캐서 생업으로 삼던 마의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서동마, 서동마약밥, 서동마국수라는 이름이 사용되고 있는데, 맛과 분위기가 특별해 익산에 오시는 분들에게 권해볼만한 음식이다.
익산의 유적에는 거의 대부분 백제 무왕 또는 서동과 관련된 이야기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물론 백제 무왕의 익산경영의 역사적 사실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서동과 무왕의 정신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까지 뿌리 깊이 흡수되어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
이신효 / 1960년에 익산에서 태어났으며 주요논문으로 「익산 백제왕궁의 궁제에 관한 시론적 고찰」 외 다수가 있다. 현재 왕궁리유적 전시관 학예연구담당자로 근무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