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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소재지 |
당시 학교명 |
현 학교명 |
비고 |
1906 |
광주 |
공립광주보통학교 |
서석초등 |
광주공립심상소학교(1895)개편 |
1907 |
목포 |
공립목포보통학교 |
묵포북초등 |
목포공립소학교(1897) |
1907 |
나주 |
공립나주보통학교 |
나주초등 |
나주공립소학교 |
1908 |
영암 |
공립영암보통학교 |
영암초등 |
신설 |
1909 |
화순 |
공립동복보통학교 |
동복초등 |
신설 |
1909 |
진도 |
공립진도보통학교 |
진도초등 |
신설 |
1909 |
담양 |
공립담양보통학교 |
담양동초등 |
신설 |
1909 |
구례 |
공립봉양보통학교 |
구례중앙초등 |
사립봉양학교(1908)공립화 |
1910 |
장성 |
공립장성보통학교 |
장성성산초등 |
사립장명학교, 사립서봉학교 통합 |
1910 |
곡성 |
공립석곡보통학교 |
석곡초등 |
신설 |
1910 |
영광 |
공립영광보통학교 |
영광초등 |
영광공립소학교(1896)개편 |
1910 |
광양 |
공립광양보통학교 |
광양초등 |
사립희양학교(1907)공립화 |
1910 |
신안 |
공립지도보통헉교 |
신안지도초등 |
지명사립학교(1909) |
1910 |
여수 |
공립여수보통학교 |
여수초등 |
사립경명학교(1909) |
(자료: 전라남도지, 제15권, p103 재인용)
제5장 일제기의 교육왜곡과 민족적 저항
제1절 식민지주의 교육의 체제화
일제가 우리 교육에 적극 개입하여 침략 의지를 노골화한 학제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06년부터 진행된 제학교 관계법규 개정이다.
1906년부터 1910년 사이에 개정된 교육법규의 내용은 식민지 교육제도로서의 기본조건을 대부분 갖춘 것이라 할 수 있다.
흔히 제1차 조선교육령이라고 불리는 1911년 조선교육령을 분석하여 보면, 조선인에 대한 교육의 목적이 식민지 국민으로서 충량한 국민성을 갖도록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하여 시세와 민도에 맞는 교육을 시행하되 보통교육, 고등보통교육, 실업교육, 전문교육 등으로 영역과 수준을 구분하여 놓았다.
당시의 총독부 교육방침을 살펴보면 첫째, 일본어의 보급을 목적으로 보통학교의 총 교육시간의 5분의2에 가까운 시간을 일본어 교육에 배당하고 중등교육에서도 7시간을 배당하면서 “국어(일본어)는 국민 된 성격을 함양하는 데 필요할 뿐 아니라 일상생활상 필수의 지식 기능을 가르치는 데 불가결한 것”이라고 강변하였다.
둘째는 우리 민족을 이른바 ‘충량 된 국민’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셋째는 한국인에게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하여 저급한 실업교육을 위주로 하였다.
넷째는 시세와 민도에 맞는 교육, 혹은 점진주의 교육 운운하며 한국인을 우민화 시키려 하였다.
제2절 초등교육의 확충과 조정
1. 개황
초등교육, 특히 공립보통학교는 일제가 기간학제 속에서도 가장 신중하게 다루고 확충시켜 나갔던 식민지 교육의 근간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보통학교 확충계획을 체계적으로 수립하여 추진해 나갔는데, 9面 1校 설립계획으로부터 시작해서 6면1교를 거쳐 본격적인 확충 계획연도로서 1919년에서 1922년까지 3면1교 설립을 계획하였으며, 1929년에서 1936년까지는 1면1교로 이를 대대적으로 밀고 나갔다.
이어서 일제는 2차 조선인 초등교육 보급 확충 계획을 수립한 바 있는데 1937년부터 1942년까지 농어촌 오지에까지 농어촌 간이학교를 확대해 나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3차 계획으로 1943년부터 1946년까지 의무교육의 시행을 목표로 하였다.
일본이 패망이 임박해오자 전쟁 말기에 많은 인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오직 저이들이 필요로 하는 이기적인 정책으로, 의무제를 실시했을 뿐이었다. 중등교육 이상은 우리에게는 여전히 좁은 문이었다.
물론 경술국치 직후에 한인들은 그들이 문을 열어주는 학교에는 취학을 거부 하였다. 그들의 불순한 교육정책을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조의 문치와 숭문주의로 한인의 교육에 대한 향학열과 열의는 대단할 밖에 없는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가 베푸는 교육의 교활한 음모를 간파한 이상, 거기에 동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무단 통치는 교육기관과 군경제도를 착각할 정도로 혼용하고 있었으니 보통학교 선생인 훈도로 하여 금테 모자에 허리에 장검을 채워 얼핏 군경의 복장을 닮게 하였으며, 그 훈도들이 취학을 거부하는 우리 아동들을 사냥질하게 하였다. 미끼는 교과서와 학용품의 무상지급과 수업료의 면제였다.
그 훈도들 사냥질 하는 그물에 걸리지 않으려고 보리밭으로 숨고 산으로 도주까지 했었다.
그래도 부득부득 취학을 강권했던 일제의 저의는 무엇이었을까.
첫째는 총독통치에 민중이 비타협으로 거부하는 조류가 두려웠을 것이다.
둘째는 사역할 머슴도 최저한의 문맹은 벗어나야 했을 것이다.
막상 우리 쪽에서 교육의 긴요성에 어쩔 수 없어 교문을 두드렸을 적에는 그 취학의 기회는 너무나 좁았다.
더구나 고등교육은 거의 우리에게는 두절되어 있었다.
1911년부터 1919년까지 전남 지역에는 28개교가 공립보통학교로 신설되거나 사학으로부터 공립화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전남지역의; 공립보통학교수는 1910년까지 이미 설립된 14개교를 합하여 1919년 현재 42개교가 되었다.
나주지역에는 1911년 남평 공립보통학교, 1918년 다도 공립보통학교, 1919년 고막원 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된 것이다.
한편 1938년의 전남 지역의 군별 공립보통학교는 광주 3교, 목포3교, 여수 14교, 순천15교, 광산12교, 나주20교 등(제주23교 포함) 총287개 교의 분포도를 보였다.
2. 연혁으로 본 나주 초등학교 실상
앞에서 언급한바 나주 초등학교는 나주시 남외동 135번지 일대를 소재지로
들어섰다.
연혁으로 보면
1907년 5월20일 공립나주보통학교로 인가
1911년 11월 1일 나주공립보통학교로 개칭
1922년 8월21일 부설 금성학교 인가
1937년 4월 30일 부설금성학교 개교 및 부설 간이학교 인가
1941년 4월1일 나주대정공립심상소학교 개칭
1945년 10월15일 나주공립초등학교 개칭
1947년 3월1일 나주초등학교 개칭
1974년 3월1일 정신박약아 특수학급 설치교육
1978년 3월1일 문교부지정연구학교 지정, 학급수 41, 학생수 2,169명에 이르렀다.
역대 교장으로는 1대 김성기, 2대 양인환, 3대 根本貞吉, 4대 荒木猪熊, 5대 田代萬吉, 6대 木野康太郞, 7대 影井市藏, 8대 大塚啓次郞, 9대 安田保則, 10대 良永猛, 11대 江口愼策, 12대 那須尾夫, 13대 中村直次郞, 14대 正木俊雄, 15대 박일섭, 16대 김순규, 17대 이홍숙, 18대 조형택, 19대 박세문, 20대 박병칠, 21대 강의동, 22대 홍성척, 23대 고성윤, 24대 노승현, 25대 민태육, 26대 한인교, 27대 김판조, 28대 허인용, 29대 서영식, 30대 박말갑, 31대 서춘배, 32대 한춘택, 33대 문제술, 34대 박중신, 35대 차용철, 등 2007년 현재까지 43대의 교장이 부임하였다.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나주초등학교가 1910년 무력에 의한 한일 병탄(倂呑)이 되기 직전 우리의 뜻에 의해 학교가 개설되었다고 보나, 이 시기 역시 구한말 일본 무력세력의 침탈 막바지인지라 일제의 입김이 없었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은 조선을 일본화 시키기 위해서, 식민지로 손쉽게 활용하기 위해서 그 대안으로 교육의 시설을 확충하려는 음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외견상으로는 조선 주권을 앞세운 듯 초대, 2대 교장을 한국인으로 하였지만, 3대에서부터 14대 해방직전까지는 일본인이 교장을 역임하였으니, 일본식 교육, 일본천황을 받드는 식민교육에 초점이 되었을 것이다.
1938년 학교명칭을 나주대정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한 것을 보면 대정(大正)은 그 시기의 일본 천황의 이름이었으니, 일본의 조선 강탈의 야욕을 여실히 들어 낸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은 조선의 땅 명당 지맥에 쇠말뚝을 박고 지명을 왜곡 시키고 있었으니, 백두산의 상봉은 일본 천황의 이름인 대정봉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일본은 지금의 초등학교에 준하는 보통교육기관을 심상소학교(尋常小學校)라고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심상치 않다'는 말의 이 심상(尋常)은 대개 '보통' '통상' 또는 '평범'의 뜻으로 쓰인다. 그러므로 심상소학교란 '고등(高等)이 아닌 보통 수준의 학교'라는 뜻으로 일본식 표현인 것이다.
북으로는 백두산(白頭山) 남으로는 갈두산(葛頭山) 서쪽으로는 마리산, 동쪽으로는 호미곶(虎尾串)으로 우리의 선조들은 우리나라 지형을 북쪽의 머리, 남쪽의 머리, 서쪽의 머리, 동쪽의 꼬리로 표현한 것은 북쪽 러시아 대륙으로의 진출을 의미하고, 서쪽 중국대륙으로의 진출을 의미하였고, 남쪽으로 태평양의 세계진출을 의미하였고, 일본이 있는 동쪽은 호랑이 꼬리 부분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우리나라를 계획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전국토 측량을 하여 지도를 제작하면서 우리의 기상이 서린 지명을 거꾸로 해석하려 하였던바, 동쪽의 마리산은 마니산(摩尼山)으로, 남쪽의 갈두산은 사자봉으로, 동쪽의 호미곶 호랑이 꼬리는 토끼꼬리인 장기곶(長夔串)으로 바꾼 것이다.
갈두산은 오늘날 해남의 땅 끝 즉 토말이라고 하는 지역의 산이다. 토말 역시 일제 측량의 결과 육지의 가장 낮은 위도라서 처음에는 지말(地末)로 하였다가 토말(土末)로 하였으니, 이 땅의 남쪽 칡머리 같이 뻗어 간다는 갈두산을 사자봉(사자는 물고기를 먹지 못하니 굶어 죽으라는 형상의 뜻)으로 고치고 이어서 머리가 땅 끝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강화도의 마리산(마리라는 것은 옛 고어로 머리라는 뜻임)은 여승이 파계한다는 뜻의 마니로 바꾸었던 것이다.
백두산은 차마 그 이름을 못 고치어 그 정상을 대정봉으로 고쳐버린 것이다.
해방이후 식민사관 탈피 차원에서 우리의 지명을 찾는 운동이 일어나 장기곶은 다시 호미곶으로, 마니산은 다시 마리산으로 회복하였지만 유독 전라도 해남의 갈두산은 일제가 붙인 사자봉에 땅 끝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으니 슬픈 일이다.
제3절 1920년대 학생운동의 추세와 광주학생 사건
식민통치 10여 년 동안 일본 총독이 자행한 폭압적인 무단정치는 한민족의 의기와 독립에 대한 열망을 꺾어버렸을 것으로 일본은 판단하였을 것이나, 거족적 민중적인 항일만세운동의 쾌거는 일제의 일방적인 승리의 도취감에 찬물을 끼얹는 효과를 가져 왔다.
폭압적 통치방식과 식민지 노예교육의 효과성에 대한 재검토를 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그들은 문화정치라는 미명하에 언론, 출판, 교육 등에 얼마간의 자율성과 가시적 개선을 제도적으로 허용함으로써 새로운 민족 운동의 계기가 마련된 시기였다.
우리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거족적인 3.1 운동이 일제의 잔혹한 탄압에 의하여 실패로 돌아가자, 민족운동의 양상은 조직적이면서도 무력적 투쟁으로 변모하였으며, 실력배양운동, 교육 문화 계몽운동 등의 방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3.1운동 이후 학생들의 항일 운동의 실태를 보면 전국적 규모의 학생조직을 중심으로 시위 등의 실력 투쟁 방법과 맹휴(盟休)에 의한 항거, 독립을 열망하는 격문 살포와 배부에 의한 독립사상의 고취, 또는 물산 장려운동이나 농촌계몽운동과 같은 방법을 통하여 항일 민족운동의 맥락을 이어 왔다.
1920년대 학생운동의 특징은 ‘민족적 역량’을 배양해야 한다는 경향을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외세 의존적인 독립운동의 형태로는 1919년 파리 강화회의나 1922년 와싱톤 군축회의에서 열강의 냉담한 반응을 목격하자 민족주의자들은 비로소 외세 의존적인 독립운동을 재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투쟁 방법상 민족주의 우파와 좌파로 갈라지는 계기를 만들게 된 것이다.
3.1운동 이후 조직된 학생단체로서 중요한 것을 들어보면 1920년 5월의 “조선학생회”, 1923년 6월의 “조선학생총연합회”, 1925년 5월에 민족주의 및 사회주의 계열 학생연합으로 결성된 “공학회”, 같은 해 9월에 창립된 “조선학생사회과학연구회‘ 등이 있었으며, 특히 ”조선학생 사회과학연구회’가 창립된 이후의 학생운동을 시대별로 구분하여 1919년-1923년 까지를 ‘배일맹휴시대’, 1924년-1925년은 ‘주의적 맹휴시련시대’, 1926년-1930년은 ‘주의적맹휴시대’, 1931년-1935년은 단순한 맹휴시대로 나누고 있다.
광주고보의 이 무렵 맹휴실태를 살펴보면 1924년 6월 재광 일인 선발팀과 야구경기에서 발생한 폭력과 일방적인 한국인 학생 감금에 항의하여 맹휴가 있었으며, 1927년 5월의 학교시설 미비와 민족 차별을 이유로 한 맹휴, 1928년에 불온 선전 삐라를 뿌린 혐의를 받은 ‘이경채 사건’을 기화로 한 맹휴 등을 꼽을 수 있다.
1920년대 후반에는 전국적으로 학생 비밀 결사가 조직되기 시작하였는데, 광주에서는 광주고보, 광조농업, 전남사범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성진회’와 그 후신인 ‘독서회’, 그리고 광주여고보의 ‘소녀회’ 등을 들 수 있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 통학생들 중 한.일간 학생의 충돌 사건이 발생한바, 광주여고보 학생이던 박기옥, 이광춘 등을 희롱하는 일인 학생에 대하여 박기옥의 사촌 동생이던 박준채가 항의하자 일인 학생이 거칠게 나오므로 급기야 난투극이 벌어졌고, 이것이 한.일 학생 간 난투극으로 번졌다.
다음날인 31일 등교 길 통학차 속에서 또 다시 시비가 벌어지고 하교 길 차속에서 싸움이 있었으나, 일인 경찰이나 열차 차장 등이 한국인 학생만 힐난하므로 민족감정을 자극하게 되었다.
11월 1일에도 광주 역 구내에서 일본인 광주중학생 30여명이 몰려와 또 충돌이 예상되었으나 양교의 교원과 역원, 경찰의 제지로 충돌만은 면할 수 있었다.
마침내 11월3일 폭발하고 말았다.
이 날은 일인들의 4대 명절인 명치절(明治節)이자 음력으로는 10월3일인 우리나라 개천절이기도 하였다.
일요일이었음에도 학생들을 동원하여 누에고치 백만 석 돌파 경축대회 겸 명치절 경축식을 거행하였으나, 광주고보생들은 일본국가의 제창을 침묵으로 일관하고 식이 끝나자 수 십 명씩 거리로 쏟아져 나왔으며, 일부학생들은 일제에 편향된 보도 태도를 취하고 있던 광주일보사에 몰려가 항의하는 한편 윤전기에 모래를 뿌렸다.
다른 학생들은 한국인 학생을 칼로 찌르고 도주해 오던 일인학생들과 광주 우체국 앞에서 충돌하였다.
일인들이 광주 역 쪽으로 도주한 후. 한편 광주중학 유도교사의 인솔로 광주중학생들이 야주배트, 죽 검 등으로 무장하고 수 십 명이 광주 역 쪽으로 몰려 나왔다.
이 급보가 전해지자 광주고보, 광주농업 학생들이 야구배트, 농기구 등을 들고 광주 역으로 몰려가 한일 학생 간에 난투극이 벌어졌으며, 이 일대는 수라장으로 변하고 말았다. 이때가 오전 11시 경이었다.
쫓기는 일인 학생들을 추격하여 담양가도까지 달려간 학생들은 경찰의 제지와 교사들의 만류로 일단 학교로 철수 하였으며, 교내에서 보고회를 가진 뒤 시내 일원을 노래 부르며 소요 하였고, 이 시위대는 광주농업, 전남사범, 광주여고보 학생들도 합류하고 시민들도 열렬히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당일 시위는 경찰과의 대치를 피하여 학교로 돌아 온 후 저녁 5시경 일단 끝냈다.
이에 학교 당국은 3일간의 휴교를 선언 하였으며, 경찰도 마침내 강경책으로 방침을 정하여 4일 오후부터 검거선풍이 불어 11일까지 70여명의 학생들이 구속되고 그 중 62명이 검찰에 송치되었다.
2차 시위는 12일 아침 9시 수업개시 종이 울리면서 다시 폭발하여 목표인 광주 형무소를 향하여 나아갔으나, 경찰 병력의 사전 차단으로 강제 해산, 다수의 연행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다.
2차 시위 후 광주시내 한국인 중등학교에는 모두 휴교령이 내려졌으며, 무차별 검거선풍이 불어 닥쳐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생 260여명이 검거되고 사회단체 간부, 민간인도 다수 투옥되었다.
이 사건으로 300여명에 가까운 학생이 투옥되거나 퇴학당하였는데, 일제의 보도 통제와 단속에도 불구하고 전남 일원은 물론 전국적으로 그 소요 사태가 번져 194개교(초등54, 중등91, 전문학교4)가 항일운동에 참여함으로써 3.1운동, 6.10만세사건과 더불어 3대 독립운동의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나주에서의 10월 30일 한일 학생간의 충돌이 11월3일 광주학생운동으로 비화하여 10월 30일을 광주학생운동 진원일로 하고 나주시 교동 광목 간 국도변에 광주학생운동 진원비를 건립 이를 기념하고 있다.
제4절 나주초등학교 일본인 교장 반대운동과 퇴학사건
1907년 5월20일 공립나주보통학교로 인가되어 개교된 나주초등학교는 1대, 2대에 걸쳐 조선인이 교장을 역임하였으나, 조선인을 교장으로 두어서는 일제식민지화가 되지 않아 상기 제2절에서 언급한바 3대 네모토(根本貞吉) 교장부터 해방 전까지 12명의 일본인 교장을 발령하였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1910년은 우리나라가 일제침략에 의해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식민지로 강제 편입된 소위 경술국치(庚戌國恥)의 해 이다.
이를 한일합방이라고 표현했는데, 식민사관 탈피의 시각에서 한일병탄(韓日倂呑)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일제의 한국 침략은 1904년 러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본격화했다. 일제는 강압적인 무력을 앞세워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그해 8월 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제1차 한일협약), 1905년 11월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차례로 체결하여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조치를 단계적으로 추진했다.
그 외에도 군대해산과 신문지법·보안법 등을 제정하여 일제에 대한 저항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또한 1909년 7월 한국의 사법·감옥 사무를 일본 정부에 위탁하는 내용의 기유각서(己酉覺書)를 체결해 한국민의 저항을 제도적으로 막고자 했으며, 극비리에 '한국병합 실행에 관한 방침'을 각의에서 통과시켜 조만간 한국이 식민지화가 될 것임을 예시했다.
같은 해 9월 남한대토벌을 감행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난 정미의병의 항전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한편 1910년 3월 토지조사국을 설치하여 근대화란 미명하에 한국토지의 약탈을 준비했다.
1910년 5월 30일 일본 육군대신 데라우치(寺內正毅)가 3대 통감(統監)에 취임하면서 한일합병은 급속도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그해 6월 30일 한국경찰제의 폐지를 결정하고, 일본헌병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헌병경찰제를 수립했다. 7월 12일 일본정부 각의에서 한국에서는 일본헌법이 아닌 초법적인 조치에 의해 통치할 것이며, 총독이 천황직속으로 전권을 행사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7월부터 한국 내에서 모든 옥내외 집회가 금지되었으며, 신문·잡지가 엄중한 검열을 받는 등, 한국은 사실상 계엄상태에 들어갔다. 8월 16일 데라우치 통감은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에게 합병조약안을 통보하고 밀모를 거듭했다.
그 결과 8월 18일 한국정부 각의에서는 합병조약안이 통과되었고,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되었다. 조약은 전문 8조로 구성되었는데, 조약문에서는 우선 한국에 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는 영구히 일본천황에게 양도한다는 것을 명백히 규정했다. 일제는 합병에 대한 한국민의 저항을 우려하여 조약조인 후에도 그 사실을 한동안 비밀에 붙였으며, 29일에 이르러서야 조인사실을 발표했다.
그리하여 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대치되고, 데라우치가 초대 총독에 부임했다. 이로써 한국은 조선왕조 건국 27대 519년 만에, 대한제국이 성립된 지 18년 만에 합병의 형식으로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국가간에 체결하는 조약이라 함은 국가간의 귄리와 의무가 상호 협의에 따라 법적 구속을 받도록 규정하는 행위 또는 조문, 협약, 규약, 성업, 각서, 의정서 따위를 말한다.
그러므로 1905년 11월17일 일본이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고자 강압적으로 체결된 을사보호조약(이를 일명 한일협상조약, 제2차 한일협약, 을사5조약, 을사조약으로 불림)은 이러한 기준으로 볼 때 을사늑약(勒約)으로 본다.
‘늑약’은 ‘억지로 맺은 조약’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한자 ‘륵(勒)’은 <굴레>, <재갈>의 의미를 가진 글자이며, 여기에서 <강제로 하다>의 의미가 파생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할 때에는 절대로 조약이 될 수 없고 ‘늑약’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권 침탈의 명분을 내세우기 위하여,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일제가 사용한 ‘을사보호조약’이라는 말은 이제 폐기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 역사 기록이 식민사관에 물들어 있어서 부지불식간에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말 속에서 우리 스스로 우리역사를 깎아내리는 표현이 있음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 당시 개화를 빙자한 개화파 위정자 등 정부 관료는 일본의 힘에 눌려 일본식민지화에 앞을 섰으나, 오히려 학교나 민간인 측에서는 과거 임진왜란과 명성황후 시해 등을 상기하면서 항일의 의지가 불타고 있었는데, 이와 같은 항일의 불씨가 1917년 나주보통학교 학생들의 일본인 교장 반대운동으로 표출되었던 것이다.
필자가 이 부분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고 접근한 것은 개교100주년 기념책자 집필과정에서 1917년에 입학하여 1921년에 졸업할 학생들의 학적부가 나주초등학교에 없다는 것이다.
이때의 학생들이 만약 살아 있다면 100세 이상을 넘긴 분들이다.
그러니 살아있는 분으로부터 직접 과거사를 들을 수는 없었으나, 나주초등학교 백년관에 전시 비치된 역사자료, 그리고 나주초등학교 총동문회 김대현 회장님의 증언과 나주 원로들의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주어모아〔拾遺〕 역사에 접목하고자 한다.
더더욱 백주년 기념사업 재원 조달관계로 금호그룹 측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금호그룹 창설자이시며 이미 고인이 되신 박인천 전회장이 나주초등학교를 다녔고 일본인 교장 부임 반대운동을 하다가 퇴학을 맞았다는 것을 들었다.
박인천 회장께서 살아 계셨을 때에 회사 내에서 자주 “나주 초등학교 다닐 때 일본인 교장 반대 운동을 하다가 퇴학 맞았다”고 말씀하셨다고 하고, 그 당시 박 회장의 자가용 운전자 김양(현 광주시 거주, 70세)씨의 말에 의하면 출장 중에 나주초등학교 옆을 지날 적에는 회장께서 “나 저기 나주초등학교 다녔다”라고 자주 말씀 하셨다는 것이다.
금호고속의 김성산 사장(나주초등 48회)에 의하면 박인천 전회장은 1917년 나이17살에 나주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약 1년6개월 만에 퇴학을 당하였다고 전해 준다.
박회장은 1901년 7월5일 태어나 1984년 6월16일 돌아가셨다.
그러니 1917년은 정확히 박인천 전회장이 17세 되는 해이니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박회장은 이미 서당에서 한학(漢學) 수학을 마무리하고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만학의 나이인 17살에 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니, 피 끓는 청년의 눈에 비친 일본의 야욕에 대해 어찌 역사를 보는 눈이 없었겠는가.
광무11년(1907년) 4월24일 수요일자 관보 제3748호에 학부대신 이완용이 발령한 학부령 제4호에 의거 전국 27개의 공립 보통학교 설립이 인가되었는데, 전남 지역은 유일하게 목포와 나주 2개교뿐이었다.
개교 당시 수업연한은 4년제이었으며, 4차에 걸쳐 학제 개편을 하였던 기록이 나온다. 1911년 제1차에는 보통학교 3-4년제였으며, 1922년 제2차에는 보통학교6년제였으며, 1938년 제3차에는 심상소학교 6년제와 고등학교2년제로 개편되었으며, 1943년 제4차에는 오늘날과 같은 국민학교 6년제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국민학교라는 말은 일본식 표현이 되므로 1996년 3월1일자로 초등학교로 명칭을 개칭한 것이다.
1911년 3월31일 제1회 졸업생 31명을 배출하였으며, 그 후 매년 25-35명 정도의 졸업생을 배출한 것으로 나타났다가 1921년도에만 졸업생이 전무하였다.
이것은 나주지역 원로들이 증언한데로 3.1운동 참여 주모자급 학생들을 전원 퇴학시켰거나, 아니면 당시 한인학생들이 일본인 교장 반대 운동에 대한 처벌의 일환으로 전원 퇴학되었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다.
나주초등학교 1대 2대 조선인 교장은 1907년부터 1911년 3/4분기까지 근무하다가 4/4분기에 제3대 일본인 교장 네모토(根本貞吉)가 부임해 온 것을 시작으로 해방 전까지 12명의 일본인 교장이 이 학교를 일본 식민지교육을 한 것이다.
1910년 한일 병탄 이전부터 조선침략의 정책은 무력이었으니 힘을 잃은 조선은 처음부터 일본인 교장 반대운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인 교장이 오면서부터 식민지 교육의 강화와 조선인 차별 대우 등으로 가슴 속에 쌓인 울분이 점점 곪아서 전체 학생들로부터 서서히 교장 반대의 싹이 트고, 자랐을 것이다.
박인천 학생이 1917년 나이 17살에 입학하였다고 하였으니, 제7대 카게이(影井市藏)교장 때인 것 같다.
이듬해 제8대 교장 오오쓰카(大塚啓次郞)가 부임해와 1919년 3.1 운동 그 시기를 근무한 것으로 보아 7대 교장에서부터 반대운동을 하다가 8대 교장 때에 퇴학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9대 교장 야스다(安田保則)가 1919년 3/4분기 중간에 부임해 와 잠시 근무하다 떠난 것을 보면 나주초등학교 반일운동 수습을 위해 정부가 파견한 것으로서 8대 교장에 대한 문책성 인사로 추정된다.
이 당시의 학생 항일 운동의 표출은 주로 동맹휴학이나 격문 살포, 또는 계몽운동으로 나타났으니, 일본인 교장 반대 운동이 빠르면 1917년 하반기부터, 늦으면 1918년 상반기에 시작된 것으로 추측 된다.
왜냐하면 1919년 전국적으로 3.1 운동이 발발하여, 이 당시 3.1 만세운동에 참가한 각급학교의 지도자급(급장, 반장 등)은 모두 퇴학 내지는 제적이 되었기 때문에, 박인천 학생과 그 급우 전체가 일본인 교장 반대 운동을 하다가 이어서 3.1 운동까지 이어져 퇴학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나주보통학교에서 학교 내부적으로 일본인 교장 반대 운동 내지는 소요사태가 있었다고 하여도 전학생을 퇴학시키기에는 처벌의 수위가 높았을 것이나, 1919년 3.1 운동에 까지 참여한 박인천 학생과 그 급우들을 일본 정부가 지시한데로 “주모자급 퇴학”이라는 명분으로 전학생에게 퇴학처분을 내린 듯 하다.
더더욱 일본은 이러한 일본인 교장 반대운동과 연이어 3.1 운동으로 파급된 조선인 학생의 항일 사태를 전원 퇴학이라는 강경책으로 마무리 하였는바 이와 같이 반일 내지는 항일로 인한 퇴학 사건에 따른 일련의 학적부 서류를 후세에 남겼을 것인가에 반문해보면 그러한 증거 서류를 아예 없앴을 것으로 판단된다.
1921년 졸업생 전무의 사건이 있는 이듬해인 1922년 졸업생이 17명, 1923년 19명, 1924년 14명으로 갑자기 줄었다가 1925년도 졸업생이 74명으로 불어나 그 후 지속적으로 1백여 명 내외가 졸업을 한 것으로 보면, 1917년을 전후한 상당수의 선후배들이 주모자급으로 가담하였기 때문에 그 처벌로 퇴학이 되어 졸업생 수가 급감한 것으로 여겨진다.
나주보통학교 학생들이 반일운동을 하였다고 서류로 작성하여 비치하기보다는 전원 퇴학을 시켰으므로 그러한 기록을 후세에 찾을 수 없도록 아예 학적부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이 유리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주초등학교 과거 학적부 속에 유일하게 1921년도 졸업학적부 일체가 없는 이유라고 생각된다.
1917년 나주초등학생 입학생 수가 대략 30명 내외로 추정되며 이들 모두가 항일운동 때문에 졸업장을 받지 못했으니, 그 당시 항일운동으로 퇴학을 당하신 분들의 후손이 발굴되면 후손에게라도 명예졸업장을 주어 이미 고인이 되신 원혼들을 위로 하는 것이 애국의 실천이요, 후손, 후배들의 일이라고 본다.
제6장 광복 직후 교육개혁의 동향
제1절 광복 후의 교육
1938년 3월에 조선총독 미나미는 칙령 제103호로써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학교의 명칭을 바꾸고, 국체명징, 내선일체, 인고단련 3대강령을 교육의 목표로 내세워 바야흐로 한국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킴과 동시에 한국인의 민족혼을 말살해버리려는 그들의 이른 바 황국신민 교육이 추진되었다.
창씨개명, 일어사용 등 갖은 수단을 다했으며 그들이 간사하고 교활한 정책은 결국 수포로 돌아가니 36년의 긴 세월동안 일제의 가혹한 탄압 밑에서 생존권마저 유린당해온 우리 교육의 암흑시대가 끝나고 한국인의 새 역사가 발족되는 역사적 순간이 되었다.
그러나 이 감격적인 민족의 해방은 우리의 뜻대로 순조롭지는 못하였으니, 국토의 분단, 사상의 분열, 좌익분자들의 파괴 만행 등으로 정국은 극도로 혼란하였고, 사회질서도 또한 문란할 대로 문란하여 민생은 심각한 도탄에 빠졌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도 교육계만이라도 질서를 자로잡기 위하여 나주에서는 1945년 10월1일자로 초등학교교장 발령을 받은 교장끼리 자치적으로 나주군내에 모여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 하였다.
o 인사발령에 질서를 준수할 것.
o 교내에 일제의 잔재를 일소할 것.
o 교재를 인쇄하여 각교에 배포할 것.(나주초등학교 담당)
o 부족교사에 대한 대책을 강구할 것.
o 개학을 못하고 있는 학교도 조속한 시일 내에 문을 열 것.
이상과 같이 결의를 마친 각책임자들은 임지로 돌아가 새 교육체제 확립에
최대한의 노력을 쏟은 결과 그해 12월 초에 이르러서는 정상적인 학교운영이 실현 되었던 것이다.
제2절 전남 교육의 개혁동향
해방이라는 기쁨에 대부분이 흥분된 상태여서 체계적인 교육개혁을 지방의 수준에서 추진한다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측면에서 부분적인 교육개혁의 시도가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료의 미비로 이를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어려운 점이 있어 이 절에서는 교육행정 및 정책, 그리고 학교의 실태를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1. 교육행정 및 정책
미군정 초기에 교육부문은 내무부의 한 과로서 취급되어졌다. 즉 미군정 직후 교육문제는 전라남도 내무국에 소속되어 있는 학무과에서 취급되고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그것은 독립된 행정기구의 하나로 운영 되었다.
학무과는 그 자신의 단독 건물을 갖고 있었으며 과장은 한국인 내무부 차장을 통하지 않고 직접 교육 책임자의 관할 하에 활동 하였다.
그 직원의 수와 통제하는 시설의 범위로 볼 때 그것은 도의 다른 부서와 동일한 지위에서 활동했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인원은 도와 군의 군정기관에 고용된 전체보다 두 배나 많은 사람을 고용하고 있었다.
1946년 10월 23일 중앙행정기구의 개편에 따라 학무과가 정식 학무국으로 승격되기에 이르렀는데, 이의 기구표를 보면 다음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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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 무 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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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무과 |
학무과 |
조사기획과 |
사회교육과 |
인사 재정 예산 |
교육내용 장학지도 교원자격 |
조사기획 학교설치, 폐지 통계보고 |
사회교육 서인교육 체육,종교 문화재 보호 |
미군정기의 교육은 중앙집권화의 영향을 비교적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자율적으로 영위되어 왔다. 표준교과과정이 있었고, 교과서와 교과과정은 학무국에서 설정했으며, 도학무과는 학교를 열고 교사, 교장과 시학관을 임명하여 수업시간을 배정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 받았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일본인들에 의해 황폐화된 학교를 어떻게 접수하여 되살리는가에 있었다. 학교재산 접수는 서무과에서 할 일이고, 시학진에서 할일은 각 학교를 접수받을 책임자를 임명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교장으로 있었던 한국 사람은 10명인데다가 벽지의 작은 학교에 근무하고 있었고, 도시나 편리한 곳은 모두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자리를 메꿔야 하는데 적절한 인재를 구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이 당시 의 학교를 접수받을 책임자를 선정하는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로는 경험이 많은 원로교장이나 고령자를 우대하였고, 다음으로 배치에 있어서 연고지를 원칙으로 하였으며, 셋째로는 학교나 군단위로 선정하여 배치하였다.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교사를 배치하는 문제였다.
그 당시의 인사 참고자료로는 겨우 인사카드와 교직원신원조서 몇 권만이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교사의 발령은 중학교 3년 졸업 이상의 학력 소지자면 채용 하였다. 교사발령과정에서 졸업증서, 자격증, 기타 증빙서류의 위조와 불비도 비교적 많았다.(전남 교육30년사 편찬위원회, 1976:878)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인원은 대리 강사를 채용할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낙도나 산간벽지학교에는 교원을 배치한다는 것이 불가능 할 정도였다.
교과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체계저인 교과서의 마련을 기대할 수 없었고, 1945년 9월에 개학한 학생들에게 당장 사용할 수 있는 임시방편적인 교재가 만들어졌는데, 1945년 11월 15일까지는 교과서의 2/3가 군정의 감독 하에 다시 쓰여 졌다.
2. 각종학교의 실태
미군정의 도교육장교가 도착하기 1개월 전만 해도 수업중인 곳은 7개교뿐이었는데, 도착 후 한 달 만에 약591개의 보통학교와 35개의 중등학교를 개교 하였다.
나주지역의 인문 공립 중학교는 1947년도에 나주초급중학교(신입생 정원150명)와 영산포여자초급중학교(신입생 정원120명)가 설립되었다.
3. 정부수립 직후의 교육 행정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중앙정부의 기구개편에 따라 문교부의 직제개편이 단행되었고, 1948년 11월18일자 대통령령 제32호로 지방행정기관 직제가 제정 공포되어 전남도의 교육행정 조직은 학무국에 학무과, 학사행정과, 문화과의 3개과를 두게 되었다.
1949년 8월15일자로 학무국이 교육국으로 개칭되었다가 1950년 4월8일에는 대통령령 제32호로 제정 공포된 「도의 행정기구에 관한 건」에 의거 교육국과 사회국이 통합되어 문교사회국으로 개편 되었다.
문교사회국은 문정과, 학무과, 사회과, 보건과 등 4개과를 두고 있었으나 교육행정은 문정과와 학무과에서 관장하였다.
시군단위의 교육행정 조직은 시장과 군수가 지방교육행정의 채임을 맡고 있었으며, 시장 군수 산하의 내무과 학무계에서 행정실무를 담당하였다.
제3절 초기의 교육자치제도(1952-1961)
1952년 4월25일 도와 읍, 면을 단위로 한 지방자치제를 실시하기 위하여, 지방의회의원 선출을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다.
같은 해 5월 25일 지방의회에서 교육위원들이 선출 되었고, 6월5일 군 교육구와 시교육위원회가 발족됨으로써 역사적인 지방교육자치제의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로써 지금까지 시장, 군수의 관장 하에 있던 지방교육행정이 내무행정에서 분리 독립되어 독자적인 행정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교육자치제는 초등교육만을 대상으로 하는 시, 군단위 자치제였기 때문에, 중등교육은 여전히 도지사 산하의 문교사회국에서 관장하는 부분적인 교육 자치제였다.
제4절 교육자치행정의 시련(1961-1963)
이승만 대통령 집권말기 즉 자유당 말기에는 정치적 사회적 영향을 받아 교육위원과 교육감 선거에 금권과 권력이 난무하는 부작용이 나타났고, 자유당 정권에서는 집권연장을 위하여 각급학교 교원들을 선거운동에 동원 하는 등으로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이 위협 받게 되었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1960년 4.19 학생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제2공화국이 탄생하자, 교육행정제도를 개선할 목적으로 1960년에 「교육자치제 심의회」를 구성 하였다.
이 심의회에서는 인구 50만 내지 60만명 정도를 기준으로 몇 개의 시군을 통합하여 하나의 자치행정구역을 설정하는 중교육구제가 제안되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도를 단위로 하는 대교육구제를 주장하는 측도 있었다.
이런 상반된 움직임이 있는 가운데 1961년 5.16을 맞아 교육자치제는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되었다.
1961년 5.16으로 저원을 장악한 군부는 지방행정을 일원화 하여 행정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원칙을 내 새워 1962년 1월 교육법을 개정하고, 이에 따라 지방교육행정조직의 개편을 단행하였다.
이때 지방교육행정기관인 군교육구와 시교육위원회 제도가 폐지되고 교육행정은 다시 일반 내무행정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각 도에는 도지사를 교육행정의 책임자로 하고, 그 산하에 「교육국」을 신설하여 교육행정을 담당토록 하였고, 또 시와 군에는 시장 군수 아래 「교육과」를 신설하여 시군의 교육 행정업무를 담당토록 하였다.
이로서 교육 자치제는 사실상 폐지되고 말았다.
제5절 교육자치제의 부활(1964-1991)
5.16후 군사정부는 민정이양(제3공화국의 탄생)을 앞두고 교육자치제를 실시해야 한다는 사회적 여론이 비등함에 따라 1963년 12월16일 자로, 교육법을 개정 공포하여 새로운 형태의 자치제에 대한 법적 기틀을 마련하였다.
1961년 5.16 군부의 등장으로 교육 자치제가 폐지 된지 만 2년7개월 만에 새로운 교육자치제의 실현을 보게 된 것이다.
새로 부활된 교육자치제의 주요골격은 다음과 같다.
즉 서울특별시와 직할시 및 각도에 교육행정에 대한 합의제 집행기관으로 교육위원회를 두고 교육위원회의 소관 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교육감을 두었다.
시, 군구에서도 교육청을 두어 지방교육행정 업무를 담당토록 하였다.
1964년도 교육위원회의 하부조직을 보면 집행기관으로서 교육감 아래 2국 4과 18계를 두었는데 교육인구의 지속적인 증가와 아울러 교육기관의 확대 증가 등으로 교육행정 수요가 대폭 증가하는 추세에 부응하여 1972년 12월에 교육법 개정(법률 제2366호)을 통하여 교육위원회에 부교육감, 기획감사담당관 및 교육구청제를 두는 등 조직 개편을 하였다.
1973년도 교육위원회 기구표를 보면 교육감-부교육감 아래에 2국 7과 21계를 두었으며 학생회관 등 4개의 사업소를 두었다.
그러나 1981년 11월에 다시 법률 개정을 통해 부교육감제도가 폐지되어 버렸다.
1. 시, 군 교육장
시나 군 단위에는 교육위원회의 하부 집행기관으로 교육장을 두었다.
시군 교육장은 교육공무원법이 정한 자격을 갖춘 자 중애서 교육감의 추청으로 문교부장관이 제청하여 대통령이 임명하였다.
시군 교육장은 관할 구역 내 초등학교만을 지도 감독해 왔으나 1972년 12월 교육법 개정으로 중학교까지의 감독권을 가지게 되었다.
또 각 시군에 하나의 교육장을 두고 있었으나 업무의 효율화를 기하고 예산을 절감하기 위하여 2개의 시 군을 통합하여 하나의 교육장을 두는 통합교육장 제도가 도입되었는데, 나주(나주시, 나주군), 여수(여천시, 여천군), 순천(순천시, 승주군) 등 3공이었다.
제6절 1991년 교육자치행정
「지방교육자치에 관한법률」이 새로 입법 제정(1991. 3 법률 제4347호)됨으로써 보다 발전된 형태의 교육자치가 실현될 수 있게 되었다.
현행 제도에서는 과거 합의제집행기관이던 교육위원화가 심의의결기관이 되었고, 교육감을 그 집행기관으로 하고 있으며, 그 동안 문교부 장관이 임명해 오던 교육위원을 지방의회에서 선출 하는 등 커다란 제도 개혁이 이룩되었다.
1991년 9월 2일 전라남도의 초대 교육위원 23명의 위원이 취임하였는바, 의장에 무안의 임종선이 되고 나주는 박동수가 임명되었다.
1991년 9월 현재 전남도 교육청의 직제를 보면, 교육감 아래 부교육감 그리고 3국 3관, 10과를 두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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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등역사연구회, 『광주, 전남의 역사』, 태학사, 2001.
4. 신광재, 『나주목사이야기』, 나주역사문화연구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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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목포대〮, 전라남도, 『전남의 서원, 사우』,(도향토문화총서 제33집)
7. 문형만, 『교육철학 및 교육사』,서울 : 형설출판사, 1991.
8. 문형만, “일제의 식민교육과 종교교육의 갈등〞, 근대민족교육의 전개와 갈등 연구논총 82-8, 한국 정신문화연구원, 1982.
9. 이영란, “광주전남지역 근대초등학교의 발달과 성격〞, 전남대학교 교육 대학원 석사학위 청구논문, 1992.
10. 정세현, 『항일학생민족운동사연구』, 서울;일지사, 1978.
11. 전남교육30년사편찬위원회(1976), 전남교육30년사(1945-1976)
12. 김규형, 『한국지방교육행정제도의 연구』,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9.
제2편 교육적 시사점을 주는 나주 역사 이야기
- 나주, 나주인의 얼을 빛낸 역사적 이야기 -
<글/ 나천수>
제1장 고려태조 왕건과 나주 그리고 훈요십조의 진위
나주를 중심으로 호남의 세력과 호남의 땅이 고려 개국의 산실이라 하였다.
호남인의 혼과 호남 땅이 고려라는 나라를 세운 것이다. 고려는 궁예의 휘하 장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여 만든 국가이다. 그 왕건이 궁예의 휘하 시절에 통산 4번을 나주 지역에 내려와 주둔하면서 통산 10년을 살았다.
그리고 10년의 세월 동안 호남지역에 자신의 입지를 세워 호남 세력의 지지로 드디어 왕으로 추대 된 것이다.
왕건이 나주에 주둔하던 시절 나주 오씨 부인을 만나는 사랑의 로맨스가 동국여지승람 나주목편이나 나주읍지 흥룡사 편에 소개되어 있다.
내용인즉, 나주의 목포나루(현 나주시청 부근/ 이 목포 나루의 이름의 현목포시의 지명이 된듯하다) 인근에 살았던 호족 오다련(吳多憐)의 딸이 꿈을 꾸었는데, 목포 바다에서 용이 나와 자신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를 부모에게 말하니 대길몽이라 쉬쉬하고 있던 차에 왕건이 태봉국의 수군장으로 나주에 출진하여 주둔하던 중 어느 날 목포 상류에 오색구름이 서려있어 찾아가보니 샘가에서 미모의 처녀가 베를 빨고 있었다.
왕건이 말을 붙이기 위해 물 한 그릇을 청하자 처녀는 왕건의 숨결이 거침을 보고 급하게 마시면 체하기 쉽다면서 버들잎을 물바가지에 띄워서 권하였다.
왕건은 미인이 기지까지 겸비하여 처녀의 아버지를 만나 딸을 달라고 요구하자, 며칠 전의 꿈을 생각하고 딸을 왕건에게 보낸다.
이 샘은 후에 완사천(浣紗泉)으로 명명되고 오씨처녀와 왕건 사이에 911년 큰아들 무(武)를 낳았으며, 후에 고려 태조로 등극하자 오씨부인은 왕비가 되었으며 죽은 후 시호를 장화왕후라 하였다.
왕건은 왕자를 낳은 동네는 용을 낳았다하여 흥룡동이라 명명하였는데 오늘날까지 그렇게 불려오고 있으며 이 아들이 고려 제2대왕 혜종이다.
신라 말에 지방마다 성주가 대두하여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약화 시켰으며, 마침내 그 속에서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여 신라에 대항하는 세력이 나타났으니 견훤과 궁예이었다.
견훤은 백제의 부흥을, 궁예는 고구려의 부흥을, 부르짖으며 나라를 세웠으므로 후삼국이라 한다.
견훤은 892년에 후백제를 건국하고, 궁예도 901년에 후고구려(뒤에 태봉국으로 고침)를 건립하였다.
왕건은 그의 나이 20세에 궁예에 귀부하였으며, 42세에 그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라 고려를 건국 하였다. 왕건은 궁예 밑에서 20여 년 동안 장군 또는 시중(侍中/오늘날 총리 격)에 있었다.
왕건은 궁예의 휘하의 많은 장수 중에 한사람으로서 궁예의 명에 의해 지방을 정벌하여 공을 세웠다.
왕건은 수차례 군사를 이끌고 직접 전장에 참여 하였으며 그가 이끈 군사력은 대단 하였다.왕건은 궁예의 명에 따라 수군이나 육군을 이끌고 지방 에 나갔다. 수군 2-3천명이나 육군 3천 명 정도는 왕건이 언제나 동원 지휘할 수 있는 군사력이었다.
그 병사들은 왕건의 명에 절대 복종하였으며 그에게 충성을 다 했다.
왕건은 궁예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였으나 그의 정치적 야심과 권력욕은 그의 나이 30세에 꾸었다는 꿈에서 잘 알 수 있다.
그가 꿈을 꿨다고 하는 그의 나이 30은 궁예에게 귀부한 후 10년째가 되는 해이며, 그 당시 궁예의 명에 따라 나주에 주둔하면서 나주 일대에서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왕건이 나주에서 주둔하면서 삼한 통일의 꿈을 꾼 것이다.
그 꿈은 왕건이 9층 금탑이 바다 가운데 서 있는 것을 보고 스스로 올라갔었다는 것이다.
비록 꿈이지만 9층 금탑에 올랐다는 것은 삼한의 왕이 되겠다는 포부를 가졌음을 반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통일신라의 영토인 나주지방을 처음으로 점거한 자는 견훤(甄萱)이었다,
삼한 통일의 꿈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나주는 교도보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인적 지지기반을 얻거나 나주 벌의 풍부한 물적 지원을 받지 않고는 정치적 세력을 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견훤이 완산에 건도하여 완산(전주)를 중심으로 금강유역의 충청도 일부와 전라도 전체를 차지했다.
궁예는 철원을 중심으로 강원, 경기, 황해의 거의 전체와 평안, 충청의 각 일부를 영유하여 그 세력이 가장 강성하였다.
이미 사양길에 접어든 대 신라를 자빠뜨려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가 있어, 견훤과 궁예는 서로 패자(覇者)로 군림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이 쓰러져야 하는 것이다.
궁예와 견훤은 현 충청도 지방에서 그 경계를 접하고 있느니 만치 의당 두 세력의 충돌은 충청도에서 일어나야 하는데 실은 그렇지 않았다.
궁예는 왕건에게 수군을 주어 남서 해안으로부터 상륙 작전을 펴, 진도를 점령하고, 금성을 점령하는 등 후백제의 땅 나주를 집중 공략한다.
그 당시 나주 지역에 사는 많은 인적 자원의 지지를 받는 다는 것과 군량미 등 풍부한 물적 공급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곧 세력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고려사 태조 편에 보면 903년 3월에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로부터 광주계에 이르러 금성군을 공격하여 함락 시키고 10여 군현을 쳐서 빼앗았다. 이어서 금성을 나주로 고치고 군대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귀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왕건의 호남지역 진출의 첫 기록이며, 금성을 폐하고 나주로 개칭하였다는 것은 나주의 나(羅)자는 신라의 나(羅)자와 같아 삼한 통일 새로운 거점을 의미하는 지명을 부여 한 것으로 보아, 왕건은 단순히 궁예의 휘하 장군으로서 전투만 한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왕건의 왼팔 역할을 하였던 영암의 낭주 최씨 최지몽과의 만남의 꿈 이야기도 이러하다.
왕건이 꿈을 꾸는데, 다 썩어 허물어지려는 집안에서 서가래 세 개를 칼로 내려는 치는 꿈이다. 유명 역술가를 초청하여 그 뜻을 알아 보려했다. 하루는 아주 젊은 역술가 영암 출신 최지몽이 찾아와 그 꿈을 해몽하는 데 이러하였다.
서가래 셋을 칼로 내리친 형상은 곧 왕(王)자이다. 그러므로 궁예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왕이 된다는 예언의 꿈이라고 해몽 하였다.
그때부터 최지몽은 왕건의 참모(브레인) 기능을 하였으며 후에 태조 왕건이 집권한 후 시중(총리)까지 벼슬을 한다.
견훤이 나주를 빼앗기는 것은 정치적 뿐만 아니라 군사상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나주를 기필코 탈환해야 하겠기에 견훤은 진도군을 잃은 이듬해부터 작전을 개시 하였다. 그러나 실패했다.
견훤의 나주 탈환 작전은 계속 되었다. 견훤 쪽에서 말하면 나주의 상실은 이웃 제군현은 물론이요 장차 후백제 배후를 찌르는 비수를 적에게 넘겨주는 셈이기에 기필코 탈취해야 했으며, 왕건 쪽에서 말하면 나주는 기어이 확보해야 하는 전진기지로 이의 상실은 곧 서남 경략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결국은 왕건이 이 지역을 완전 점령하였다.
왕건이 삼한 통일의 꿈을 꾼 것은 나주 점령을 성공하고부터이다.
나주 지역의 인적 지지와 물적 지원은 이를 가능케 했다.
또한 왕건의 측근 세력 중에는 장인 오다련, 곡성의 신숭겸, 순천의 박영규, 영암의 최지몽, 광산의 김길 등 호남세력과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 충신이 있어서 궁예의 폭정을 참아온 군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건을 추대하기에 이른다.
물론 훗날 궁예의 폭정에 시달린 신하들의 추대가 있어 쿠데타에 의한 나라를 건국한 것이지만 하나의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권력을 받을 수권기반이 없다면 어떻게 개국 할 수 있었겠는가.
궁예가 처음부터 포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역사의 승자가 패자를 왜곡 시켰는지 모른다.
누차의 전승에 교만해지고 누구도 궁예의 분부를 거슬리지 못했으며, 설령 측근이라도 승려건 장졸이건 용서 없이 극형에 처해 참하는 것이다. 날로 포악해진 그는 그 처자 강씨와 두 아들까지 참살한다. 민심은 점점 궁예에게서 멀어져 갔다.
한때는 왕건 자신도 궁예에게 소환당하여 그의 반역 행위의 여부에 대한 추궁을 받아 생명의 위협을 받는 위기에 처해 있었다.
궁예가 일찌기 스스로 미륵불이라 일컬었었는데, 남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이 있다 하였다. 궁예의 추궁에 왕건은 반역의 일이 없다고 극구 부인하자, 궁예의 장주 최응이 곁에 있다가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고 이것을 줍고자 뜰에 내려와서 왕건 곁을 지나면서 귓속말로 “자복하지 않으면 위태하다”는 말을 왕건이 알아듣고 즉시 죄를 스스로 자복함으로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궁예의 지나친 의심과 시기심 그리고 그의 측근 세력에 대한 탄압과 제거에 신변의 불안을 느낀 궁예의 부하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이 918년 궁예를 축출 하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기에 이른다.
왕건이 궁예와 같이 송악에 있었다면 어찌 고려를 개국 할 수 있었겠는가.
궁예의 명으로 또는 궁예의 폭정에 스스로 멀리 하기 위해 나주 지역으로 내려와 왕업을 닦을 수 있었던 것이다.
918년 고려를 개국하여 왕건은 제1대왕 태조가 되었다. 935년에는 신라가 고려에 투항하였고, 936년에는 고려가 후백제를 멸망시키어 분열된 국토를 다시금 하나로 통일 하였다.
나주는 왕건으로 보아서 은혜의 땅이며 반드시 보은해야 할 지역이다.
그래서 나주에서 오씨부인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큰아들 무(武)에게 921년 태자로 책봉되었고, 943년 왕건이 죽자 제2대왕 혜종으로 등극한 것이다.
무(武)는 성장하면서 기골이 장대하고 지혜와 용기가 뛰어났으며, 부왕을 도와 신라와 후백제를 차례로 토평하여 통일 고려 나라를 세우는데 주역이라고 한다.
그가 왕위에 올라 1년 4개 월 만에 병약하여 병사 하였다는 고려사를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983년 성종 2년에 전국 12목 중 나주가 목(牧/오늘날 도)으로 승격되어 1886년 도청의 광주 이전하기 까지 1천여 년 간 남도지역의 웅지인 도청의 소재지가 되었었다.
지금도 마르지 않고 흐르는 완사천은 지금 문화재로 지정 보존 관리되고 있다.
완사천 주변에는 청년 장군 왕건과 오씨부인이 버들잎 띄운 바가지를 왕건에게 바치는 형상의 동상도 만들어져 있다.
완사천이 있는 야산 언덕에 올라가면 큰 소나무가 울창이 서있다. 거기에서 동남쪽 방향, 영산강변이 왕건군이 주둔했던 목포(木浦)라는 포구가 있었다. 이 포구의 이름이 후에 목포시의 이름이 된 것 같다.
완사천과 목포 포구 사이 어느 곳에 왕건이 살았던 집이 있을 것 같다.
완사천은 알았을 것이다. 나주 땅과 호남 세력에 의해서 왕재로 만들어진 왕건이 고려를 개국할 수 있었다는 것을..................
그런데 이 어인 말인가. 고려개국의 산실이었던 호남을 깎아 내리는 훈요십조 중에 제8조의 조항을 두어 고려사에 남기어 1천여 년 간 호남인의 가슴을 누르고 있으니 말이다.
문제가 되는 훈요는 제8조는 “차현(車峴)이남, 공주강(公州江) 밖의 땅은 산형과 지세가 배역(背逆)하여 인심 또한 그러하니 그곳 인물을 등용하지 말 것.”으로서 호남을 인격적으로 소외시키는 대표적인 기록이 아닐 수 없었다.
고려사의 기록에 의하면 훈요십조는 태조 26년(943) 4월, 임종을 약 2개월 앞두고 왕이 후사(後嗣)를 경계할 목적으로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를 내전에 불러 친수하고 왕실에 비전케 하였다고 한다.
그 동안 우리나라 학계에서 훈요십조나 왕건의 정치사상을 검토한 논문들에서는 전부 훈요십조의 위작설에 대하여 끊임이 없었다.
이와 같이 역사의 기록이 진실이냐 조작이냐의 문제가 거론 된다는 것은 역사기록의 앞과 뒤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본다.
문제의 훈요는 태조 왕건 사후 80년 만에 왕실이 아닌 사가(私家)에서 발견된 괴문서를 80년을 소급하여 고려사 태조 열전에 게재하였다는 점이 왜곡의 시작이라고 보아진다.
역사적으로 있었던 사실을 고의로 삭제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없었던 일을 있었던 것처럼 조작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왜곡이다. 훈요의 진위 논쟁이 왕건 사후 80년 만에 발견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의심을 받고 있는 것이다.
고려사 열전에 기록된 훈요가 왕건 사후 80년 만에 왕건을 가탁하여 권력의 중심부에 있는 무리들이 훈요를 진품으로 발표하고 당론으로 밀어 붙였다면 반대세력이 없는 한 사서에 기록으로 남게 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비장비전(秘藏秘傳)의 의문에 쌓인 훈요가 태조 사후로부터 80년이 지난 후 최항(崔沆, 972~1024)의 사저에서 최제안(崔齊顔, ?~1046)이 발견하여 현종 왕께 바쳤다는 것은 더욱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러면 이 훈요를 최항이 언제 소장하게 되었으며 무슨 이유로 비장비전할 문서를 얻게 되었는가에 대한 정확한 답은 없다.
훈요십조의 각 조항이 당시의 정황과는 다르게 기록됨으로써 훈요 스스로 위작설을 면치 못하는 몇 가지 의문점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훈요의 각 10조 내용을 살펴보면, 첫 번째, 국왕가에만 국한된 유훈으로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훈요의 내용대로 국왕이 통치하려면 정치를 담당하는 조신들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고 또 협조를 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왕건은 훈요를 권신인 박술희에게 내려 주었다.
만일 이것이 왕실의 비장된 유언이었고, 「마음속에 간직할 것(中心藏之)」이라면, 태조는 당연히 태자에게 내려주어 비전(秘傳)토록 하였을 것이다.
태조가 죽었을 당시 태자 무(武)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32살의 장년이었으며 백제를 정벌할 때 「용감하게 적진으로 가장 먼저 들어가(奮勇先登)」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따라서 훈요가 왕실 후사자손(後嗣子孫)들만이 비장하여 전할 성질의 것이라면 직접 태자 무(武)에게 주었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러하지 않았다는 것은 “중심장지(中心藏之)”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제8조 같은 편파적인 내용은 처음부터 없었을 가능성이 많다. 물론 훈요라는 내용이 왕건이 남겼을 가능성도 있으나 남겼다면 과연 오늘날과 같은 내용이었을까 하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두 번째, 훈요가 처음에는 왕실에 비전으로 내려오다가 거란의 침입으로 일시 행방불명되었는데 수사관(修史官) 최제안(崔齊顔)에 의해 발견되어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문서를 소장했다는 최항은 감수국사(현종3년), 평장사(현종7년)에 올랐으며 청렴 충직하여 그가 병이 위독할 때 왕이 문병 올 정도였고 발견자 최제안은 최항과 동향, 가까운 친척으로 현종, 덕종, 정종, 문종 4조를 섬기면서 관이 태사문하시중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만일 병화로 인하여 소실된 이 문서를 최항이 가지고 있었다면 그의 직위나 성격으로 보아 그가 직접 왕에게 바쳤을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왕의 사소한 거동까지도 비교적 소상히 기록해 둔 「고려사」열전에 이 중요한 문서가 어떤 병화로 어떻게 소실되었고, 최제안이 언제 이를 발견하여 어떤 왕에게 바쳤는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는 것이 문제의 여지가 있다.
이 병화라 함은 거란족의 침입을 말하는데 거란족 침입 시 불에 타버렸다면 왕가 비전 되는 훈요가 과연 있었는지 조차 몰랐을 것이다.
만약에 최항이 위작을 하였다면 자기 스스로 현종에게 바치지 못하고 자기 사후에 제3의 인물이 발견하도록 하여, 원본을 모르는 이상 변조된 훈요는 진본으로 둔갑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세 번째, 의문은 혜종과 정종과의 왕위 계승에 있어 형제간 찬탈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비장비전할 훈요가 있었다 해도 혜종은 정종(왕요)에게 정중히 훈요를 전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태조의 제1비 신혜왕후 유씨가 소생이 없었던 탓으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제2비 장화왕후 오씨 소생 무(武)가 장남의 태자가 되었다. 그러나 제3비 신명순성왕후 유씨가 태자를 출산(5남2녀)하면서부터 세자를 세우는 문제를 놓고 왕건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왕건은 박술희를 후견인으로 선정하고 921년 정식으로 무(武)를 정윤(正胤)에 책봉하고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943년 5월 태조가 죽자 무(武)는 고려 제2대왕으로 등극하나 충주유씨 일가를 비롯한 반발세력은 이를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혜종을 보호하려는 세력과 그를 제거하려는 세력간의 치열한 권력 투쟁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혜종은 왕위 찬탈을 노리는 이복동생들의 위협에 시달리게 된다.
이에 혜종은 박술희를 대광에 임명하고 왕규를 중용하여 그들을 견제하였다. 하지만 이복동생 왕요와 왕소는 서경세력을 규합하여 왕권을 노렸다. 마침내 혜종은 945영 9월, 34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는데, 그의 사인에 의심이 간다.
『고려실록』를 바탕으로 쓴 『고려사』에는 이와 같은 혼란의 책임을 모두 왕규에게 전가시키고, 왕규가 자신의 외손 광주원군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자객을 보내 혜종을 살해하려 했다거나, 귀양간 박술희를 자객을 보내 죽였다는 등이다.
그러나 당시 정황으로 보아 자객을 보낸 쪽은 이복동생 왕요일 가능성이 더 크다. 만약 왕이 급살(急殺)되었을 경우 왕위를 이을 사람은 세력이 가장 컸던 왕요였을 것이고 또 실제 혜종이 죽었을 때 왕요가 왕위를 이었기 때문이다.
혜종이 죽자 왕규가 왕요 일파에게 즉각 제거되었던 것으로 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왕요 일파는 왕요의 왕위 계승에 반발하던 왕규와 문무대신들을 역적으로 몰아 죽였다. 이런 사실은 박술희의 죽음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고려사』는 박술희가 반란의 뜻을 품고 있어 정종(왕요)에 의해 유배되었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태조의 유명(遺命)을 받든 박술희가 반란을 계획했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고, 또 혜종이 아닌 정종에 의해 유배당했다는 것은 정종 왕요가 이미 궁중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게다가 혜종에게 엄연희 아들 흥화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종이 왕위를 계승했다는 것도 그의 왕위 찬탈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더구나 박술희는 왕규에 의해 죽었다고 쓰고 있으나 이는 모든 것을 왕규에게 뒤집어씌운, 그야말로 성패론(成敗論)에 입각해서 작성된 날조된 역사일 가능성이 높다.
왕요는 정권을 장악한 후 왕규의 무리 3백명을 처형했다고 했는데 이들은 개경의 문무대신들일 것이다. 이와 같이 대부분의 대신들이 반발했다는 것은 왕요의 즉위가 부당한 행위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처럼 당시 사료를 통한 정황 분석은 혜종이 단순히 병사한 것이 아니라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과 왕요 일파가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왕규와 박술희를 비롯한 문무대신들을 역모로 몰아 왕위 찬탈을 정당화하려 했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훈요가 있었고 최초에 태조, 박술희, 혜종만이 이 내용을 알았다고 하여도 혜종은 차기 왕 왕요(정종)에게 왕위를 죽음으로 찬탈 당하였기 때문에 정당한 절차에 의해서 훈요가 전수 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적장자가 아닌 형제간의 왕위 계승을 정당화하기 위한 훈요 제3조도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권력의 패권 다툼의 승자가 조작해낸 문건임을 감지할 수 있다.
만약 후대에 훈요가 있었다는 뜬소문이 있어왔다면 누군가에 의해 자연스럽게 태조 왕건을 가탁(假託)하여 이를 조작, 제3의 인물에 의해 발견되는 형식으로 등장할 개연성은 항상 내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네 번째, 훈요의 내용이 태조 때보다는 현종 이후의 상황에 걸 맞는 경우가 있어, 이를 현종 대에 조작했다는 의문을 증폭 시켜 준다. 「모든 사원은 도선(道詵)이 산수의 순역을 추점하여 개창했다」고 되어 있는데 도선의 명성이 높아진 것은 고려 중기 이후이며 도선의 택지상지에 관한 문자는 중기에 김관의의 「편년통보」 이외에는 찾아보기 힘들다. 도선은 현종 대(1010~1031)에 선사의 호를 추론하고 , 숙종대(1096~1105)에 왕사의 호를 그리고 인종대(1123~1146)에는 선각국사의 시호를 받았다. 즉 훈요 제2항의 내용으로 보아 훈요십조는 도선이 점차 유명해지고 신격화된 후대의 위작임을 짐작케 한다.
다섯 번째, 훈요 제3항은 적장자에게 전국(傳國) 하는 것이 상례이지만 원자나 차자가 불초한 경우 다른 형제가 대통을 잇도록 하는 내용이 있다.
왕건이 죽을 당시 혜종은 건강하였고, 혜종의 아들이 둘(흥화군과 제)이나 있었기 때문에 상속을 미리 이야기한다는 것은 당시 상황에서는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 후 형제 상속제가 빈번히 이루어져 혜종, 정종, 광종이 형제였고, 덕종, 정종, 문종, 그리고 순종, 선종, 숙종이 모두 형제로 대를 이었던 사례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적장자 또는 차자로 대를 잇는 원칙을 지키지 않고 계속 형제간에 대를 이어 오고 있어 이 조항도 현종 대 이후에 추가되었거나 위작일 가능성이 크다.
여섯 번째, 훈요 제 4항이다. 태조 생시에는 거란의 실체가 분명치 않아서 태조는 이들을 함부로 대했다. 태조는 거란을 무도한 나라라고 하여 국교를 단절하고, 거란 사신을 귀양 보냈으며 예물로 보낸 낙타를 굶어 죽이기까지 하는 노골적인 대 거란 적대정책을 단행하였다. 다만 현종 13년 거란의 연호를 쓰고 거란의 왕자 책봉 등 양국간 종속적 관계가 설정되면서부터 상호교류가 활발해졌다. 따라서 나라의 일각에서는 거란 풍물을 모방하는 경박한 풍조가 일어나 이를 경계할 필요를 절감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조항도 필시 현종 이후에 위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일곱 번째, 제8훈의 인재등용 제한에 관한 항목이다.
왕건은 대체로 호남지역 지지 세력에 의해 태조 왕에 등극하였고 삼한 통일을 성취한 영주요 민족 융화 정책을 실시한 군왕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 그의 인격설로 보아 그가 반대되는 유훈을 그의 자녀에게 전했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왕건은 신라처럼 고구려나 백제의 유민을 차별대우하거나 내쫓지도 않았다. 또한 태조는 나주의 장화왕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무(武)에게 물려주었고, 또한 이를 협조해 달라고 박술희에게도 당부하였다.
또 그의 주변에는 신숭겸, 박영규, 최지몽, 김길 등 전라도 출신 개국공신들이 왕의 절대 신임을 받고 있었으며, 제4대 광종때(광종9) 과거제를 처음 실시했을 때 전라도 사람을 배제하기는커녕 전국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성종은 즉위 9년에 김심언이 올린 봉사를 보고 교서를 내려 칭찬하였는데 그 가운데 “권력을 독차지하고 세력을 마음대로 부리며 권세다툼을 하고 자기 앞에 사사롭게 붕당을 만들어 자기가산을 치부하며 임금의 명령을 마음대로 조작, 자신의 부귀를 현달하는 자는 적신”이라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광종이나 성종 등은 모두 중신들로부터 국정 운영에 관한 건의를 수용하며 공정한 인사를 위해 노력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례로 보아 제8훈에 나오는 왕건의 백제인 차별의 내용은 후대의 조작임이 분명하다.
인종 초까지 전라도인으로 등용된 사람은 21명이며, 그 중 과거 급제자는 10명, 재상(2품이상)을 지낸 사람이 12명, 수상(內司令, 門下侍中)에 오른 사람은 3명이다.
또 당시 각 도별로 등용된 사람 수와 과거 급제자 수를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고려사』열전에서 나온 것을 살펴보면 다음 표와 같다.
이 밖에도 태조의 각별한 숭앙을 받았던 동진대사 경보(慶甫)가 광주 출신이고, 태조의 두터운 존경을 받았던 법경대사 현휘(玄暉)는 남원 출신, 선각대사 형미(逈微)는 무주 출신, 도선은 영암 출신이었다.
이러한 점들을 놓고 볼 때 태조의 훈요는 전혀 지켜지지 않았으므로 위작 또는 진서라 하더라도 지켜지지 않은 훈요는 그 가치를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8조와 같은 지역 차별적인 내용이 들어 있다는 것은 매우 모순된 현상이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훈요십조는 태조 당대의 것이 아닌 후대에 조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덟 번째, 1011년 현종 2년에 거란의 제2차 침입 시 나주로 파천하게 된다. 제8조와 같은 배역론이 현종에게 전달되었다면 과연 나주로 파천할 수 있었겠는가.
「차현이남 공주강외」라는 지역의 범위를 최초로 호남 일대 지역으로 비정한 것은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고려사에도 「차현이남 공주강외」지역이 어디를 가르키는지에 대해서 구체적 언급이 없다. 그리고 그 후 편찬된 사서나 지리지 등에서도 「차현이남 공주강외」가 고유한 지역을 가르키는 대명사로 사용된 예는 없다.
그러므로 태조 이후 전라도인의 관직 등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후세에 위작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볼 수 있다.
고려를 개국할 수 있는 산실이 호남이었다.
호남출신의 혜종이 제2대왕으로 등극하였다. 그리고 호남 출신의 인물이 고려를 지키는데 역할을 하였다면 비호남 출신으로부터 질투와 시기를 받았을 것이다.
혜종이 병약하여 병사한 것이 아니라 이복형제인 왕요 일당에게 독살 되었다는 학계의 주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태조 왕건이 죽은 뒤 80년 만에 호남 인재 등용을 억제하려는 심사에서 위작의 작품을 만들어 승자의 편에서 역사기록에 포함시킨 것 같다.
견훤군과 맞붙은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패전의 위기에 몰리자 왕건을 살려내고자 왕건과 신숭겸이 서로 옷을 바꾸어 입고 신숭겸이 왕건 대신 죽어주지 않았다면 왕건이 고려를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왕건의 입장에서 보면 호남은 배역의 땅이 아니라 은혜의 땅이다.
호남 땅, 호남 사람이 있으므로 해서 왕건이 있고 고려가 존재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제8대 왕 현종이 거란군 침략 시 나주로 피신 와서 나주 사람이 현종을 지켜 주었는데, 그 호남 땅의 사람을 깎아내리는 글을 고려사에 정식 기록으로 남게 한 것은 비겁한 것 같다.
훈요가 1천년간 호남 땅 , 호남 사람을 짓누르고 있어도 호남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 왔다. 이러한 족쇄를 1천년간 차고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위대한 호남인 뿐 일 것이다. 이제라도 역사 바로 세우기를 통하여 왜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 것이 혁신이 아닐까........
제2장 조선왕조 개국의 불씨를 지핀 나주인의 혼
나주가 조선왕조 개국의 불씨를 지핀 장소였다면 생소할 것이다.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국하도록 참모(브레인) 역할을 한 사람은 정도전이다. 이 정도전은 1375년 나주 회진 땅으로 유배를 와 3년간 살면서 삶의 밑바닥에서 사는 나주 농민들과 교유 하면서 썩어빠진 세상 바꾸어야 한다는 혁명의 불씨를 지폈던 것이다. 그러고 그 불씨를 현실화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이성계에게 접근하여 그 뜻을 이룬 것이다.
고려가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왕권의 약화인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충숙왕의 둘째 아들(후에 공민왕)이 12살 때인 1341년 원나라에 볼모로 가 10년간 원나라에 살면서 원나라의 노국공주와 결혼을 하였다.
1351년 공민왕으로 즉위하였지만 1365년 왕비가 죽자 실의에 빠져 모든 국사를 신돈에게 맡기고 정사를 소홀히 하였다.
고려가 멸망해 가는 씨앗이 된 것이다.
더 나아가 신돈의 정부인 반야를 공민왕에게 바침으로서 결국은 공민왕의 후계자 우왕, 창왕이 왕씨의 피가 아닌 신돈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폐위되어 왕권은 땅바닥에 떨어져 버린 것이다.
한편 중국 땅은 원나라와 명나라가 공존하면서 고려는 원과 명에 대한 이중 외교를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성계는 친명의 성향이라면, 최영은 친원적 성향이었다.
정도전도 친명 반원적 사고로서 후에 이성계와 정도전이 의기투합하여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친명이라는 공통점에서 일 것이다.
1374년 공민왕이 암살당하자 이 사실을 명나라에 고할 것을 주장한 정도전은 실권자 이인임으로부터 미움을 샀다. 이인임의 친원 정책에 반대하다가 1375년 나주 회진으로 유배형을 당한 것이다.
반면에 무장 출신 이성계는 탁월한 군사적 재능으로 세력이 점차 커져 갔다.
1361년 박의 반란군 격파에서 부터 1382년 여진족 격파까지 매년 전투에 연전 연승을 하여 이성계의 주변에는 차츰 인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정도전의 출생지는 충북 단양 삼봉(三峰)이며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정몽주(鄭夢周) · 이숭인(李崇仁) · 이존오(李存吾) · 김구용(金九容) 등과 교우하였다.
정도전은 1337년 고려 충숙왕 때 태어나 태조 7년에 향년 54세로 죽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봉화(奉化)이며 호는 삼봉(三峰)이다. 공민왕 11년(1362) 문과(文科)에 급제, 이듬해 충주 사록(忠州司錄)을 거쳐 전교 주부(典校注簿) · 통례문 지후(通禮門祗候)를 역임하였다. 1370년에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를 거쳐 이듬해에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어 5년간 전선(銓選)을 관장하였다.
1375년에 친원배명(親元排明)의 정책을 반대하다가 나주(羅州) 회진현(會津縣)에 유배되었다.
2년 후에 거주의 자유가 허락되어 서울의 삼각산(三角山) 아래 초려를 짓고 후학을 가르쳤으나 형편상 오래 견디지 못하고 부평 · 김포 등지로 이사하였다.
1383년에 9년간에 걸친 유배 · 유랑생활을 청산하고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로 있던 세력이 날로 커지고 앞길이 창창한 이성계(李成桂)를 찾아가 속마음을 비추는 대화를 하였다.
정도전의 큰 꿈을 누구도 알아주지도 받아주지도 않았는데, 이성계는 정도전의 인간됨을 간파하고 이성계의 참모로 받아준 것이다.
조선왕조의 건국과정을 노래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에 보면 이성계를 찾아간 정도전이 질서정연한 군대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참 훌륭합니다. 이런 군대라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이성계가 무슨 뜻이냐고 묻자, 정도전은 짐짓 ‘혁명’이란 말을 뒤로 숨기고 다음과 같이 거짓말을 했다.
“동남방의 근심인 왜적을 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당시 이성계는 분명 그 시의 속뜻을 알아차렸음에 틀림없다.
만약 ‘조선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이 없었다면 그는 역성혁명에 성공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함경도 함주(咸州/지금의 함흥)가 혁명의 불씨를 댕긴 장소였다면, 전라도 나주에 있는 정도전의 유배지 회진의 소재동은 혁명의 불씨를 탄생시킨 장소로 보아도 좋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참모(브레인)으로서 사실상 조선왕조의 설계자라고 평할 수 있다.
정도전의 가슴에 혁명의 씨앗을 심어준 토양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34세의 젊은 나이로 유배당했던 나주 땅에서부터 싹을 틔웠을 것이다.
정도전의 유배지는 나주평야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전라도 나주의 회진현(會津縣)에 속한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나와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이 나주시 다시면 운봉리의 백동마을이다.
나주시 다시면에 가면 버스터미널 3거리가 있는데, 그곳에 삼봉 정도전 유배지란 안내판이 붙어 있다. 터미널 맞은 편 길로 2km쯤 가다 보면 눈앞에 댐이 보이고, 그 못미처 왼쪽에 백동마을이 있다. 백동마을 입구에 다시 삼봉 정도전 유배지 안내판이 보이는데, 다시 1㎞쯤 들어가면 유배지 표석이 서 있다.
유배지 표석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인가도 없고 대숲에 둘러싸인 묘 터 같은 곳에 달랑 표석만 하나 놓여 있을 뿐이다. 표석에는 소재동비(消災洞碑)라 씌어져 있는데, 이곳이 소재동이란 마을로 정도전이 유배 와서 살던 집터이다.
소재동비에 적힌 비문을 보면 당시 소재동에는 5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정도전은 1375년(고려 우왕 1년)에 이곳으로 유배를 와서 황연(黃延)의 집에 거처를 정했으며, 1377년(우왕 3년)까지 약 2년간 생활했다고 전하고 있다.
정도전이 유배를 당한 것은 우왕 즉위 원년, 당시 권문세족과의 정치적 갈등 때문이었다. 그는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지지하던 신진사류였는데, 공민왕이 시해되고 나서 권문세족이 권력을 잡게 되면서 시련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우왕 즉위 원년 북원(北元)이 고려와 힘을 합쳐 명(明)나라를 치려고 사신을 보냈을 때, 친원파인 권문세족들은 당시 성균박사였던 정도전을 영접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친명파였던 그는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내가 북원 사신의 목을 베어오거나, 아니면 사신을 체포하여 명나라로 보내겠다”고 말하여 친원파의 미움을 사 귀양을 가게 되었다.
정도전이 유배지 소재동에서 쓴 소재동기(消災洞記)에 보면, 그가 기거하는 황연이란 농부 집으로 동네 사람들이 매일 찾아와 서로 친구처럼 담소하며 지냈다고 되어 있다. 답전부(答田父)라는 글에서 그는 농부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까지 보여 전부(田父)를 숨은 군자라 부르며 가르침을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그는 소재동에서 3년간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가 한 인간을 다시 ‘태어나게’ 한 예는 많았다. 그에게도 유배생활은 지식인의 책무를 한 없이 느끼게 한 시련과 성장의 기간이었다. 나주에서 그는 가난(家難) 답전부(答田父) 금남야인(錦南野人) 금남잡제(錦南雜題) 금남잡영(錦南雜詠) 심문천답(心問天答) 등 여러 글을 남겼다.
귀양지에서 만난 밭가는 한 농부는 그를 준열하게 꾸짖었다.
농부는 “불의를 돌아보지 않고서 한없이 욕심을 채우려다가, 겉으로 겸손한 체하며 헛된 이름을 훔치고, 어두운 밤에는 분주하게 돌아다니면서 애걸하고, 경상(卿相)이 되어서 제 마음대로 고집을 세우고 아첨하는 이는 즐거워하고, 국가의 형전(刑典)을 사용하다 악행이 많아 죄에 걸린 것인가”라며 집요하고도 신랄하게 따져 물었다.
농부는 당시 정치와 현실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배지에서 정도전이 얻은 것은 농사나 짓는 시골사람이라고 해서 낮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깊은 깨달음이었다. 그들이 오히려 유학자들보다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았다. 특히 국가의 조세제도에 대한 비판을 통해 건강한 시골 농민들의 눈에 중앙 관료들이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궁벽한 곳에 사는 농부의 말을 듣고 ‘이 나라를, 이 정치를 제대로 바로 잡아야겠다’고 분명 다짐했으리라.
어쩌면 정도전의 마음속에서 혁명의 불씨가 살아난 것은 유배지에서 농민들과의 어울림을 통해서였는지도 모른다. 농민들의 한과 설움을 통하여 그는 자신의 이론으로 무장한 유학(儒學)이 한낮 허위의식에 가득 찬 것이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실천적 의지가 없는 이론은 한갓 ‘허수아비’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가 이성계를 찾아가 혁명을 건의했고, 새로운 역사를 열어 가는데 나주 유배지가 그 씨앗이 된 것이다.
9년간에 걸친 유배와 유랑 생활은 정도전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었다.
그가 이 시기에 얻은 것 중 가장 큰 것은 무엇보다도 ‘백성의 아픔’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마음속에서 혁명 사상으로 씨알이 굵어가게 만들었다.
1384년 정도전은 전교 부령(典校副令)을 거쳐 성절사(聖節使) 정몽주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85년 성균제주(成均祭酒) 남양 부사(南陽府使)를 지내고 이성계의 천거로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에 승진하였다.
1388년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한다고 통고를 해와 친원의 최영이 공양왕께 주창하여 요동 정벌을 단행했으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결국 최영은 유배가되고 1389년 우왕과 창왕이 살해되고 허수아비 공양왕을 폐위하고 이성계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함으로서 1392년에 조선왕조가 개국된 것이다.
1388년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신진세력이 집권하게 되자 밀직부사로 승진하여 조준 등과 함께 전제(田制)개혁안을 적극 건의하고 구세력을 제거하는데 앞장서 조선개국의 기초를 닦았다.
1392년 말부터 시작한 새 국도(國都) 위치선정에서 조준 권중화 등과 더불어 한양천도(漢陽遷都)를 주장하여, 무악(毋岳) 남쪽을 주장하는 좌도 도관찰사(左道都觀察使) 하륜(河崙)과 맞섰으나 끝내 그 주장을 관철시켰다.
태조가 한양을 정도(定都)하여 정도전에게 새로운 서울을 착공하게 하였다.
1395년 10월 5일에 태묘(太廟)가 낙성되었고 이날 왕은 경복궁에서 연회를 베풀고 12월에는 이곳으로 이어하였다. 정도전은 한양천도의 주창자인 동시에 계획담당자이며 새 서울 조성의 총책임자였으니 그는 건국 제1의 공로자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태조 7년(1398) 8월에 일어난 이른바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李芳遠/후의 태종)에 의해 피살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문집으로 삼봉집(三峰集)이 있다.
제3장 표해록(漂海錄)을 쓰신 금남공 최부(錦南公 崔溥)
2002년 7월 11일 중국 절강성 영해 바닷가의 조그마한 초등학교 교정에서는 전라도 나주 출신이시며 표해록을 쓰신 조선조 성종조에 홍문관 부수찬, 수찬, 부교리, 교리, 부응교 겸 예문관 응교를 지낸 금남공 최부의 기념비 제막식이 있었다.
필자가 '93년도 절강성 영파시를 방문하여 당시 부시장에게 표해록의 저자 최부의 상륙지인 영파부 임해현에 상륙기념비 건립을 제안한지 어언 9년만의 성사이기에 향토사 연구를 취미로 하는 필자의 감개가 무량하다.
아마 전라도 출신으로서 중국 본토 땅에 기념비가 세워진 것은 처음이라고 볼 때 성종조 때에 6개월간 중국의 중원 대륙을 도보로 횡단하여 귀국한 최부 선생의 기상이 눈에 선하다.
성종조에 학덕과 덕망이 높으신 금남공 최부는 사실상 아들이 없고 두 딸을 두었는데 큰사위는 선산인 유계린이고 둘째 사위는 나주인 나질이다.
최부의 외손자인 유희춘(柳希春)은 유계린의 둘째 아들로 우리나라 보물 260호로 지정된 미암일기(眉巖日記/담양군에 보존되어있음)를 남겨 역사에 유명한 인물로 그 미암집에 외손자 유희춘과 또 한분의 외손자 羅士沈(나사침/남외동 금호사에 모심)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신 외할아버지 최부 선생의 유품과 저서 등을 집대성하여 표해록 3권을 만들었던 슬픈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유희춘과 나사침은 이종사촌 관계이다.
최부는 1454(단종2) 전남 나주에서 출생하여 1504(연산군 10)에 돌아 가셨다. 본관은 탐진, 호는 금남이며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478년(성종9) 성균관에 들어가 김굉필, 신종호 등과 교유하였다.
1482년 친시문과에 급제한 후 1485년 서거정과 함께 동국통감을 편찬 하였으며 1483년 중시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1487년 최부의 나이 34세 때 추쇄경차관(오늘날 감사관과 같음)이 되어 제주도에 파견 체류 중 1488년 1월 부친의 부음을 듣고 나주로 가기 위해 도해 중 초란도 해안에서 풍랑을 만나 14일간 표류 끝에 황해를 건너 명나라 태주부 임해현(오늘날 절강성) 상륙하여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6개월 만에 귀국하자 성종의 명에 의해 금남 표해록 3권을 기록하게 되었는데 오늘날 한국, 중국, 일본, 미국의 학자들이 이 표류 견문록에 대해서 역사적 가치를 극찬하고 있으며 오히려 중국 측에서 표해록에 대한 국제학술대회 개최를 하였고 우리나라는 KBS TV 방영과 한국일보에서 '97. 9.1부터 12.15까지 14회에 걸쳐 연재물로 다루기도 하였다.
중국 영파부 임해현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 상륙한 최부 일행은 일본 해적으로 오해받아 죽음 직전까지 궁지에 몰렸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은 문제를 유창한 한문 필답을 통하여 자신은 조선의 관리이며 표류사실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중국관리는 거짓이라며 문초하자 마패 등을 보이며 조선의 관리임을 주장한다. 그러나 조선인으로부터 마패를 약탈한 왜구라고 의심하고 고문과 행패를 부렸다. 이에 조선의 역사이야기, 중국의 역사 이야기
가 필답으로 오고가자, 오히려 중국인보다 더 해박한 중국 역사를 알고 있는 조선의 선비에게 드디어 모든 의심을 풀고 북경으로 이송하는 길에 오른다. 가는 길마다 조선 선비 글을 받고자 많은 중국인들이 그를 만나고자 하였으며, 때로는 음식을, 그리고 의복을 최부 일행들에게 제공하여 주었다. 그러한 역경 속에도 최부는 처음 보는 중국 문화, 지리, 풍속, 관리제도, 지명 등을 자세히 기록하여 나갔다.
이러한 사실이 북경 자금성 황제에게 알려지자 최부에게 상을 내리기로 결정하여 최부의 자금성 입성기회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최부의 선비정신을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부친의 부음을 받고 즉시 상복을 갈아입고 도해 중에서 선상표류 기간, 중국에 상륙하여 6개월 귀국길 내내 상복을 입고 지냈으며 북경 자금성에서 명나라 황제로부터 상을 받는 장소에까지 상인(喪人)은 상관(喪冠)과 상복(喪服)을 벗고 길복(吉服)을 입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는데 그 당시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조선의 관리가 감히 명의 황제를 배알하는 장소에 상복을 주장하는 성격은 대(竹)쪽은 최부의 성격을 단면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최부를 수행하는 일행 측에서 황제 알현 시간만이라고 상복을 관복으로 갈아입도록 극구 만류하여 겨우 위기를 모면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6개월 만에 입록강을 건너 한양에 당도하자, 성종대왕은 최부가 보았던 중국 이야기를 듣고 비록 상중(喪中)이지만 중국에서 겪었던 일을 글로서 기록을 남기도록 명하자, 그 글이 오늘날 표해록 3권이 되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1498년(연산군4) 7월 무오사화 때 김종직 문하라는 이유로 함경도 단천에 유배되었다가 1504년 갑자사화 때 사형을 당하였다. 그 이유도 최부를 시기하는 당파 측에서 최부는 상인(喪人)임에도 치상(治喪)하기보다는 임금이 명하는 표해록을 썼다는 죄목으로 몰아세웠으니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최부의 묘소는 현재 무안군 몽탄면에 있다. 뜻이 있는 자는 한번쯤 그분의 얼을 찾아 참배하는 것도 좋을 듯하다.
조선조 이전의 우리나라 사람 중에 중국 대륙을 횡단한 사람은 아마 최부 선생 일행뿐일 것이다. 정부가 파견한 공식적 사행(使行)으로서가 아니라 이국 멀리 중국 땅에 표착(漂着)하여 대륙을 횡단하는 최부의 모습을 연상하면 한편으로는 두려움도 없지 않을 것이나 의연한 선생의 모습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학식과 성품에 민족의 역사를 수놓은 빛나는 이름이었으나 애절함을 금할 수 없다. 그것은 천부의 능력, 만장의 기염을 펴지 못하고 50년의 짧은 생애를 당쟁의 재물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이다.
부친의 부음을 듣고 나주로 가기 위해 최부를 포함한 43명은 1월3일 흐리며 비가 오락가락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잠시 개인 틈을 타 출항하였다. 그러나 날씨가 다시 폭풍우로 변하고 파도가 거세지면서 밤이 되자 겨우 초란도에 도착하였으나 초란도에 정박할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1월4일 우박과 폭풍으로 멀리 흑산도를 바라보며 대해로 계속 떠내려가고 있음을 확인하였으나 이미 배를 운전하기에는 불가항력이 된 것이다..
1월12일 중국 영파부 지경(地境)에서 도적을 만나 가진 물건을 빼앗기고 목숨만 유지한 채 1월13일 다시 표류하기 시작하여 1월16일 절강성 해안 태주부 임해현에 상륙, 중국측 경비대에 체포되어 압송된다.
1월19일 도저소(桃渚所)에 도착하는 데 도저소는 해안 경비대로서 최부 일행을 왜적으로 오인하여 심한 고문과 취조를 하였다. 그러나 최부 일행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최부의 필답(筆答)의사 교환, 손바닥 글씨, 중국의 역사 이야기, 조선의 역사 이야기를 통해 조선인임을 증명한 결과였다.
이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줄 때는 감사의 말과 함께 감사의 뜻을 시(詩)를 지어 바침으로서 최부가 왜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는데 성공하였고 드디어 조선인으로 판명되자 귀국 길에 오를 수 있었다.
1월23일 도저소 출발하여 이후 계속 이동하면서 가는 곳마다 심문을 받고 그때마다 필답으로 의사 교환하여 자신의 처지를 알렸다.
이후 최부 일행의 이동 노선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들의 이동 노선은 육로와 수로로 이동하였는데 항주에서부터 북경까지는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를 따라 이동하였으며 숙소가 어려우면 배에서 유숙하는 때도 있었다.
이들의 이동 노선과 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健跳所 도착 -越溪巡檢司 도착 - 寧波縣 - 西店驛 - 建山驛 - 寧波府 - 慈溪縣 - 餘姚縣 - 上虞江 - 紹興附 - 西興驛 - 杭州(2월6일 도착하여 2월13일 출발) -崇德縣 - 嘉興府 - 吳江縣을 지나 蘇州府 도착 - 姑蘇驛前에서 유숙 - 錫山驛 - 常州府 - 呂城驛을 지나 鎭江府에 도착 - 양자강 도착(2월21일) - 廣陵驛 - 楊州府 - 孟城驛 - 高郵州 - 淮陰驛 - 淮安府 - 宿遷縣 - 邳州 - 房村驛 - 西州 - 劉城鎭 - 沛縣 -魯橋驛 - 濟寧州 - 開河驛 -東昌府 - 淸陽驛 - 武城驛 - 德州 - 良店驛 - 滄州 - 興濟縣 - 靜海縣 - 天津衛 - 북경 玉河館 도착(3월2일도착하여 4월23일까지 머물면서) - 兵部를 예방 - 禮部를 방문 -4월20일 명나라 황제를 배알하고 하사품을 받음 -회동관에서 출발(4월24일) - 漁陽驛 도착, 朝鮮의 謝恩使臣을 만남 - 玉田縣을 지나면서 明나라 使臣을 만남 - 豊潤縣 - 灤州 - 永平附城 - 난하역 - 武寧衛 - 유관역 - 山海館 - 前屯衛 - 寧遠衛 - 廣寧驛에서 聖節使臣을 만남 - 遼陽驛 - 요동성 -압록강을 건넘(6월4일) - 한양 청파역 도착으로
(6월24일)으로 표착 후 귀국 드라마는 끝났다.
이들이 이동한 거리는 당시의 이정표가 없어 정확하지는 않겠으나 표해록에서는 우두외양에서부터 압록강까지 8000여리로 기록하고 있다.
우두외양에서 도저소까지 160여리, 도저소에서 영해현까지 300여리, 도저소에서 武林驛까지 1500여리, 武林에서 진강부 경우역까지 1000여리이다.
이들은 수로와 육로를 이용하는데 수로로는 양주에서 통주로하수마역까지 3300여리, 육로로는 양주에서 고절역까지 2500여리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우두외양에서 도저소, 항주, 북경 회동관까지 도합 6000여리라 하였고 회동관에서 요동성까지 1700여리, 요동성에서 압록강까지 300여리로 보았다.
오늘날 거리로 환산하여도 무려 3200km를 이동하였다. 압록강에서 한양까지를 포함한다면 이들은 거의 4000여km를 여행한 것이다.
실제 경항대운하의 거리가 1782km이니 최부가 절강성 임해현 그리고 북경, 압록강을 경유하여 한양까지는 대운하 거리의 약2배에 달한 3564km 정도이니 표해록 기록과 거의 같은 거리라 할 수 있다. 초란도로부터 표류하였으니 이 거리를 포함한다면 도합 4500여km 정도일 것이다.
어떻든 일행 43명이 한사람의 낙오나 사고 없이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던 것은 최부의 인간성과 해박한 지식에 감복한 중국 측의 배려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명나라의 관료들보다 유교 경전이나 중국의 고전에 대해 훨씬 밝았다. 그가 절강 연안에 표류한 시기가 1488년, 35살의 젊은 나이였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만났던 어느 명나라 관료와 필담을 통해 뒤지는 바가 없었다. 특히 명의 관료들이 놀랬던 것은 중국 고전에 나오는 지명과 인물을, 자신이 지나는 지방과 거의 빠짐없이 연결시키고 있었다는 점이다.
최부가 표류하는 동안 악전고투하여 겨우 살아서 그야말로 생면부지의 땅 중국 강남에 표착하는데 안도의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왜적으로 몰리어 그곳 주민과 관헌으로부터 피의자로 몰려, 그들의 학대는 말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학대와 감시 속에서도 해박한 지식과 안목으로 그들을 설득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감동케 하여 마침내 조선을 예의지국임을 찬양하기에 이르고 끝내는 중국 황제가 후상을 하사하였다.
최부의 인간성을 3가지로 극찬할 수 있다.
첫째, 관찰력과 기록 정신이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중국을 기행 하는 전문가답게 중국연안의 해로, 산천, 도로, 관부(官府), 풍속, 민요 등을 소상히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표해록의 내용을 극찬하는 사람은 중국 북경대 갈진가(葛振家)교수이다.
표해록에는 중국 역사에도 없는 당시의 지명과 풍물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초지일관의 정신이다.
최부가 부음을 듣고 나주에서 보내준 상복(喪服)을 즉시 갈아입은 후 도해(渡海)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폭풍우 속의 표류 중에도 상복만을 입었고, 중국 연안 지역에 도착하자 측근들이 관원의 위엄을 보여 주어야 위험하지 않으니 관복으로 갈아입도록 권유하였으나 ꡒ상인(喪人)이 어찌 길복(吉服)으로 옷을 갈아입을 수 있느냐, 죽고 사는 것은 하늘에 달렸다ꡓ고 상복만을 고집하였다.
셋째, 책임정신이다.
43명이 생면부지의 땅에 표착하여 살아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최부의 책임이다. 최부는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간파한 듯 하다.
현지 주민과 관헌들의 약탈 내지는 심한 학대에 못 견디는 일행들 중에는 죽더라도 몇 명 때려치우자는 주장에 ꡒ만약 현지 주민을 하나라도 해할 경우 왜적으로 판단되어 도망 갈래야 갈 수 없기 때문에 모두 죽는다ꡓ고 판단하여 현지 주민의 괴롭힘을 오히려 학문적, 인간적 행동으로 감화 시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성종왕은 최부에게 표류의 전말을 물었고, 최부는 중국에서 있었던 사항을 세세히 진언하였다. 끝까지 들으신 성종은 찬탄하시며 ꡒ이는 죽음을 무릅쓰고 두루 다니면서도 국위선양을 유감없이 잘하였도다.ꡓ하시면서 옷 한 벌을 하사하시고 기록으로 남기도록 명하였다. 최부는 상인(喪人)의 몸이었으나 왕의 명이라 표해록 기록을 마친 후에 나주 집으로 내려올 수 있었다.
성종은 최부를 감싸주어 1492년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을 다녀오게 하고, 1493년에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에, 홍문관(弘文館) 교리에 제수하였다. 다시 예문관 부응교 겸 응교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이 즉위하자 1497년 연산의 실정을 극간하는 상소문을 기초하였고 연산의 실정을 묵인하는 공경대신들을 비난하였다.
그리고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최부는 김종직의 문하라는 이유로 체포되고 고문과 장형을 받고 단천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고 다시 투옥되고 사형에 처해졌다. 그때 나이 51세였으니 민족의 역사를 수놓을 훌륭한 별이 떨어져버린 것이다.
최부의 집은 기록에 의하면 나주 읍성 서수구(西水口)내에 있다하였으니 오늘날 금계동이다. 나주시가 2004년도에 최부 관련 한중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여 최부의 정신을 나주인의 정신으로 다시 한번 새겼다.
의향의 나주 땅에 의향의 얼을 심어온 훌륭한 선조님을 기리는 것이 충효의 교육이 아닐까. 더 늦기 전에 나주를 빛낸 역사인물 100인(가칭)을 선정하여 그분의 얼을 기리는 기념비를 건립하여 기념비 거리 하나 만들어지면 새로운 관광 상품이 될 것 같다.
제4장 진주성 제2차 혈전에서 보여주는 의병장 김천일 선생
사람들의 심성이나 성격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이 곤경에 처해 있을 때 어떠한 반응, 또는 어떠한 행동을 나타내는가에 따라 평가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나주인의 혼을 찾아낼 수 있는 것도 역사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어떠한 행동을 나타내는가에 따라 판단할 수 있다.
나주인의 혼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국난 극복의 전투가 임진왜란 7년 전쟁 중에 가장 치열했고 가장 많은 전상자를 냈던 1593년 진주성 제2차 혈전일 것이다.
현재 경상남도의 진주에는 매년 음력 6월29일을 기하여 7만 순의제(殉義祭)를 지내고 있는데, 이는 1592년 김시민의 진주성 제1차 혈전 때 순절한 1만 명과 1593년 진주성 제2차 혈전 때 순절한 6만의 혼을 애도하는 진주시의 제사인 것이다.
진주성 제2차 혈전은 호남 의병장 김천일을 주축으로 하는 호남 제 장졸들이 죽음으로 진주성을 사수하는 전투이다.
진주성 제2차 혈전은 결론적으로 아군 3천명 대 적군 10만 명의 처음부터 중과부적의 싸움으로 영남의병들은 성을 떠나 버린 가운데 호남 의병들이 주축이 되어 6월 20일부터 6월29일까지 100여전의 혈투 끝에 성이 함락되어 모두 순절한 전투였다.
영남 의병장 곽재우는 중과부적을 이유로 성을 떠났지만 호남 의병장 김천일은 죽음을 각오 하고 성을 사수하자는 주장을 하였다. 이유는 진주성은 호남 곡창과 순치(脣齒)의 관계 즉 입술과 이빨의 관계이므로 진주성이 무너지면 호남 곡창이 무너지고, 호남 곡창이 무너지면 우리나라가 무너지기 때문에 죽음으로 지키자고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주인 나아가 호남인의 혼이다.
호남인은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목숨을 던질 줄 안다.
영남의병장 곽재우는 실리를 주장하고 호남 의병장 김천일은 명분을 앞세운 것이다.
명분과 실리의 사고의 차이가 영호남의 차이인 것이다.
먼저 김천일을 소개 하고자 한다.
김천일의 본관은 언양, 호는 건제이다. 그는 1537년(중종32년) 1월10일, 전라도 나주의 흥룡동(현 시청 인근 마을)에서 부친 김언침과 양성이씨 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으나 불행히도 생후 6개월 만에 양친을 모두 잃는 악운을 당한다. 따라서 그는 외가댁에 의탁하여 양육되었다.
한편, 김천일은 전북 태인의 이항(李恒)으로부터 학문을 사사 받았다. 그 외에도 김천일에게 학문적으로 영향을 준 사람은 계부 김신침과 노수신, 유희춘이었다.
유희춘은 김천일의 해박한 지식의 깊이에 감탄하여 선조6년 때 초야에 묻힌 인재를 추천하라는 어명에 따라 그가 김천일을 천거하여 관직에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김천일은 관직에 들어가 마지막 파직까지 여섯 번 사직을 하였으며, 군기시주부를 시작으로 용안현감, 강원도 도사, 경상도 도사, 사헌부 지평, 임실현감, 순창군수, 담양부사, 한성부 서윤, 군자감정, 수원부사를 역임하였다.
선조 22년 김천일이 수원부사로 재직하다가 파직된 상황은 그의 강직한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수원은 수도 한성이 가까운 관계로 중앙의 사대부나 왕족들의 소유 전토가 많았다. 그들 특권층은 마땅히 과세 대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금을 내지 않았고, 오히려 가난에 시달리는 일반 민중만이 납세에 응하는 폐단이 자행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부사 김천일은 자신의 특권계층을 위한 관리가 아니라 국가를 위한 관인임을 분명히 하고, 고통에 시달리는 억울한 서민을 위하여 이를 바로 잡지 않을 수 없다 하면서 수세원칙을 그대로 시행하였다. 이것으로 인하여 비방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파직 당하고 만 것이다.
이와 같은 일화 등을 통해 우리는 공직자로서 김천일의 인물됨을 다음 세가지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그의 강렬한 위민의식을 들 수 있다.
둘째, 그의 일관된 선국후사(先國後私)의 정신을 들 수 있다.
셋째, 그의 직언과 정도가 아니면 굽히지 않는 비판정신이었다.
그의 위민의식과 선국후사의 정신, 그리고 옳고 그름에 따라서는 간관의 임무에 충실한 김천일의 정신으로, 곧 훗날 그가 창의 기병하여 나라에 목숨을 바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다.
진주성 전투에는 창의사 김천일 을 비롯하여 화순출신 의병장 최경회 장군도, 고경명 선생의 큰아들 고종후도 그리고 대다수의 호남출신 제 장졸들이 참여한 죽음의 전투이었다.
1593년의 임란 전황을 살펴보자.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가장먼저 의병의 기치를 세운 것은 경상도 의령(宜寧)의 곽재우(郭再祐)였다. 경상도가 맨 처음 왜침(倭侵)의 전화(戰禍)를 입은 곳이고 보면 의병의 봉기가 영남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왜침(敵侵)의 피해가 없었고, 왜란(倭亂)의 전 기간을 통해서 보더라도 직접적인 화가 없었던 전라도에서 그 해 5월에 이미 의병 활동이 전개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김천일·고경명·변사정·임계영·최경회·김제민·채홍국·김덕령 등 수많은 의병군의 봉기가 말하듯이 타 지역에 비하여 특히 의병 활동이 두드러진 것도 관심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임란의병을 주도한 제의병장은 거의 문반·유림 층이었으며, 특히 유림세력이 성한 지역에서는 자연히 의병활동이 활발하였고, 따라서 그들이 창의한 배경의 하나는 유교적 근왕(勤王)정신에 기인한 것이었다.
김천일이 창의기병을 결심한 것은 임진년 5월 2일에서 6일 사이의 일이 아니었을까 한다. 『건제집』의 년보와 행장에 의하면 김천일의 의병기병에 관한 사실을 이렇게 쓰고 있다.
(5월)16일 향중(나주지역)의 부로와 자제들을 소집하여 공관에서 대회를 가졌는데 모의 없이 동반된 지사로서 송제민, 양산용, 양산숙, 임환, 이광우, 서정후 등이 함께 참여하였다. 그 자리에서 선생은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우리가 어찌 구차히 살기를 바라리오. 홀로 온전할 수 없을진대 죽고 사는 것이 다만 조만간의 일일뿐이오」하니, 좌중이 모두 오직 명만을 내리라 하였다.
당시, 김천일은 향중의 부로자제들로부터 커다란 지지를 받으며 기병하였는데, 군량·군마 및 의병대원 3백을 확보하고 각 부서를 정한 다음 6월3일 북상 출병하였다. 이것은 전라도 지방에서의 최초 출병이었다.
임진년 5월의 기병 이후 이듬해 6월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국하기까지 김천일의 의병 활동은 전후 14개월에 걸친 것이었다. 이 기간 중 그의 활동은 크게 2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제1단계는 북상 출병이후 수원·강화·한강연안 등지에 거점을 두고 서울 탈환을 목표로 하여 활약한 시기와, 제2단계는 계사년(1593) 4월부터 남하하는 왜적을 추격, 6월에 있은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주도하던 시기이다.
그의 창의기병은 향토방위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먼저 경성의 적을 물리쳐 경성 수복을 하는 것이었다. 북상 길에 오른 김천일의 의병군은 연도주민들의 성원은 물론 군수물자까지 지원 받는가 하면, 스스로 의병에 가담하는 자들까지 있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관군이 주축이 된 전라·충청·경상 삼도 근왕군 10만 명이 용인에서 패퇴하고 말았다는 소식을 접하자 김천일 휘하 의병들은 수백의 의병으로 과연 무엇을 하겠는가 하고 두려워했다. 이때 김천일은 군중을 향하여
「우리 군은 의병이다. 관군에 비교할 바는 아니다. 그대들이 만일 날 따르기를 싫어한다면 어찌 강제하여 내몰 수 있겠는가. 다만 왜적을 토멸하지 못한다면 비록 이 땅의 어느 곳을 간들 살 길이 없다. 하물며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들이 죽는 법인데 그대들은 이 나라의 2백년 사직이 길러 낸 백성들이 아닌가.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면 도리어 살길이 있을 것이다.」
라고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휘하의병들이 이에 감읍, 그들의 동요가 진정되었고, 패산된 관병들이 계속 투속하여 옴에 따라 충청도에 이르러서는 그 병력은 천을 헤아리게 되었다.
서울로 북상하던 중 김천일은 수원에서 왜적과 전투를 하였었다. 수원은 그가 부사로 재직하는 연고가 있었기 때문에 독성산성(禿城山城)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금령(金嶺)전투에서는 적병 15급을 참획하고 병기·군마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7월 하순에는 마침내 강화로 부대를 이동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해를 바꾸어 1593년(계사년) 정월 이여송의 명군이 평양을 되찾고, 이어서 개성까지 진격해 오면서 전세는 호전의 기미를 보여 주고 있었다.
왜군은 1593년 4월에 경성을 철수하여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철병 후 경상도 밀양 등지에 운집한 왜군의 주력부대는 동래·김해 등지에 미리 주둔하고 있었던 군사와 합세하여 진주성 공략을 서두르고 있었다.
김천일은 경성의 왜군 철수 무렵에 신병으로 자리에 누워 앓고 있었는데 적을 추격하라는 조정의 명을 받고 와병중임에도 불구하고 출전하였다. 당시 그의 군사는 거의 제관군부대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잔여병력은 겨우 수백에 지나지 않았다. 김천일은 이 잔군을 이끌고 영남을 향하여 남하한 것이다.
김천일이 상주를 거쳐 함안에 이르렀을 때는 조선의 관,의병 제군이 모두 영남에 모여들었고, 명군 역시 그 대부분이 영호남 일대에 주둔해 있었다. 그러나 적세가 막강하다는 소문에 조선 측은 전의를 잃고 명군 측의 「공성책(空城策)」에 동요되어 모두 머뭇거릴 뿐이었다.
이때 김천일은,
「지금의 호남은 국가의 근본이 되어 있고 진주는 호남에 가까이 밀접한 곳이니, 실로 순치(脣齒)의 관계인데 진주가 없어지면 호남 또한 없어지고 말 것이다. 혹 진주성을 비움으로서 왜적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계책이라 할 수 없다.」
라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제장은 이에 불응하여, 순변사 이빈, 의병장 곽재우·임계영 등 그 밖의 많은 수령과 제장이 거의 흩어져 가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조정에 장계하여 진주를 사수하여 호남을 지켜 내야 한다고 주청한 후, 회답을 얻지 못한 채 3백의 군졸을 인솔하여 6월14일 진주성에 들어갔다.
김천일을 따른 군사들로는 충청병사 황진, 경상우병사 최경회, 복수의병장 고종후, 사천현감 장윤, 의병장 변사정을 대신한 그의 부장 이잠, 의병장 민여운, 의병장 이계운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각각 입성하였는데, 의병장 강희열·강희보·오유 등도 각기 군사를 인솔해 왔고, 거제현령 김준민과 김해부사 이종인(나주산포출신) 등은 먼저 입성해 있었다.
한편, 왜군은 1593년 6월15일, 왜군은 김해·창원 등지에서 수륙으로 병진하여 16일에는 함안까지 쳐들어 왔다. 이 때에 마침 도원수가 된 권율과 순변사 이빈·전라병사 선거이 등이 모두 함안에 있다가 일시에 무너지고 말았다.
왜군이 함안을 점령하자 이빈이 의령에 이르러 장수들을 모아 논의하기를 진주성에 먼저 들어간 고군(孤軍)을 지원하자고 제의하였으나 곽재우는 이에 반대하여,
「지금 적세가 막강하여 천하무적인데 3리 고성(孤城)을 어찌 능히 지킬 수 있겠는가. 하물며 제군이 모두 성중에 들면 또한 응원군이 없어질 것이니 나는 마땅히 외원이 되어 입성하지 않겠다.」
라고 하여 정면으로 거절하였다. 하지만, 경상우감사 김륵이 크게 노하여 「장군이 대장의 명령을 복종하지 않으니 군율은 어찌할 셈인가」하니, 곽재우 역시 노하여 「일신의 생사는 아까운 일이 아니나 백전군졸을 어찌 버릴 수 있겠는가. 나는 차라리 자결할지언정 城에는 들어가지 않겠다.」라고 맞섰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이빈은 곽재우로 하여금 정진을 지키게 하였던 것이다.
전라병사 선거이 등이 6월19일에 진주에 왔다가 군세의 차이가 많으므로 김천일에게 퇴군할 것을 권하였으나 김천일이 이를 크게 나무라자, 그들은 군사를 거두어 이빈 등과 함께 함양 쪽으로 물러가고 말았다.
도원수 권율 등도 왜적이 다시 의령일대를 침략해 들어오자 함양을 거쳐 남원으로 피하고, 정진을 지키던 곽재우도 이를 버리고 퇴군하고 말았다.
적세의 병력은 약10만 명에 달하고 수성군의 병력은 3천 여 명이었음을 감안하면 처음부터 중과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본격적인 공방전은 6월21일부터 29일에 성이 함락되기까지 9주8야간에 걸친 전투가 전개되었다.
제2차 진주성 전투에 대해 전반적인 전황이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된 시료 가운데 하나인 『건제집』「년보」를 중심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아군 측의 공격무기는 탕화시석(湯·火·矢·石) 정도인데 불행히 이 기간 중에 억수 같은 장마 비는 내리었다. 적군은 생우피 구갑차(龜甲車)를 만들어 성벽 밑에까지 전진하여 성벽 돌을 뽑아내어 성을 허무는 전법을 사용하였고 아군 측은 대목(大木)이나 거석(巨石) 혹은 끓는 물을 투하하고 섶에 불을 붙여 내려 던짐으로써 접근해 오는 적을 저지하였다.
6월 22일 전의를 상실한 진주목사 서예원을 대신하여 장윤을 가목사로 삼았고, 23일 거제현령 김준민이 전사하였으며, 27일 부장 강희보가 전사, 28일 서예원의 불찰로 하여 그의 담당구역 성벽이 야간을 틈탄 왜병에 의해 거의 뚫린 상태에 이르러 날이 밝자 그곳으로 집중 공격이 있었으나 황진, 이종인 등의 용전으로 겨우 물리쳤고, 29일 황진 전사하고 오후 두 시경에 억수 같은 빗줄기로 인하여 성 동문이 무너지자 적병은 개미 떼처럼 공격해 왔고 이어서 서북 문으로도 적이 돌진해오자 서예원은 달아나 버리고 일시에 제군이 무너지고 혼란에 빠지자, 마침내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그때까지 살아남아 항전을 하던 의병장들은 장마 비에 도도히 흐르는 남강에 투신 순절하였으니 김천일과 그의 장남 김상건, 최경회, 고종후, 이종인, 양산숙 등이다.
한편, 관군은 곽재우 의병군에게 진주를 응원하라 하면서 그들 스스로는 이를 기피하였고, 곽재우 또한 이에 불응하였으니 진주성은 무원고립의 전투 그 자체였다. 오히려 황진이 진주성전에 임하려 할 때 곽재우가 이를 만류하면서 「진주는 고성(孤城)이라 지키기 어려운 곳이오. 또 공은 충청절도사인데 진주를 지키다가 죽는 일은 그 직임이 아니오.」라고 말하였다.
곽재우의 이와 같은 태도에 대하여 「분산작전」을 꾀한 현명한 대책이라고 평가한 견해들도 있다.
그러나 그도 스스로 외원은 할지언정 성에는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였는데,
정진을 지키고 있었던 그가 적의 대군이 밀려오자 일시에 후퇴해 버린 사실만을 보아도 외원의 뜻은 없었으며 이를 「분산작전」으로 보아야 하는지 의문이다.
진주성 수성군의 규모는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각 의병장이 인솔하고 들어온 군사를 보면 약 3천여 명이었으며 더구나 본주군(本州軍)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호남절의사에 의하면 진주성전에 참가한 관의병과 민간인까지 포함하여 6~7만인으로 보고 있어 진주성전을 김천일 이끄는 300명만의 전투가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 체찰사의 직임을 가진 이항복은 김천일의 업적을 평하여 남이 하지 못한 「삼난(三難)」의 공을 이룬 사람이라 하였다.
그것은 첫째, 진주성이 위급에 처했을 때에 아무도 이에 대처할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의병장의 신분이었음에도 홀로 인병하여 가장 먼저 입성하였고,
둘째는, 선거이·홍계남 등 관(官)장군이 성을 버리고 떠났을 때, 오히려 그들을 꾸짖고 사수할 결심을 가졌다는 것,
셋째로, 성이 함락되던 날 좌우에서 모두 그에게 피할 것을 권하였지만 마침내 장자와 더불어 조용히 순직의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풍신수길은 진주성전에서 매우 큰 타격을 입었다.
그래서 복수심으로 살아있는 생물은 다 죽여라 명령한다.
짐승까지도 죽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전투 참가한 제 장졸은 물론 민간인까지 6만 명을 죽인 것이다.
진주 남강은 지금도 말없이 흐르고 있지만 그 당시 전황을 지켜본 진주성의 촉석루나 의암(義岩)은 알고 있을 것이다.
호남의 혼으로 사수했던 진주성의 치열한 전투를.......,
매년 진주에서 추모제를 지내는 음력 6월 29일 7만 순의제때 나주를 대표하든 호남 대표하든 간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무릎 꿇고 향사루어 술 한 잔 올리는 것도 그때 가신님들의 혼을 조금이라도 위로 한건데, 진주시민들만 참석하니 안타까울 뿐이다.
제5장 광복군 제5지대장 나월환 장군
필자가 나월환 장군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분의 추모사업을 하게 된 때는 1984년 나주시 문화공보실 문화계장을 역임할 때였다.
나월환 장군의 외척인 나주시 오량동에서 사는 이동흠씨가 지역 유지들을 통해 광복군 제5지대 나월환 장군의 묘소가 잊혀지고 있음에 대해 여론을 조성하는 중에 필자가 이 소식에 접하면서 광복군의 활동을 조사하게 되었다.
외척의 이야기로는 나월환 장군이 중국광복 활동 중 내부 반란에 의해 피살되었으며 1945년 11월 김구 선생의 환국 길에 직접 유해를 봉안해와 서울 태고사에서 빈장(殯葬)후 고향 나주 가야산 기슭에 모셨다는데 아마 친척이 유해를 인수 받아 안장한 후 세월이 40여년이 흐른 그 즈음에 묘 터의 흔적을 잊은 듯 하였다.
김구 선생 환국 시 유해를 봉안했다는 점이 매우 의미가 있고, 나월환 장군의 후손이 없어 유해의 국립묘지 안장도 안 되고 묘 터마져 관리부실로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더더욱 안타까운 일은 나주인들, 더 나아가 대한민국 국민들 대부분이 광복군 제5지대장 나월환 장군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나월환 장군(1912-1942)은 본관이 금성으로 전남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 출신으로 양산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924년 3월 仁川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성성(成城)중학교와 청산(靑山)학원을 다녔다.
망국의 한을 달래기 위해 일본에서 무정부주의 운동을 한 것이 1932년 상해로 망명하여 광복활동을 하는 중에도 무정부주의자로 낙인 된 듯하다.
상해에서는 한국 혁명당에 가입하고 철혈단을 조직, 일제와의 투쟁에 진력하였다. 그 뒤 독립군에 투신할 목적으로 1936년 중국 중앙육군 군관학교를 제8기로 졸업하고, 그해 9월부터 남경 중국 헌병학교 및 군관학교에서 교수직을 역임하면서 임시정부에 가담 활동하였다. 나장군은 계급은 중국군 중령이다.
1937년 남경에서 친형 나일환을 여러 해 만에 만나 같이 지내다 형을 고국으로 보내고자 전송 길에 일경에게 체포되어 형은 본국에 압송되었으나 나월환 장군은 산동성 청도항에서 출항한 배에서 바다로 뛰어들어 탈출에 성공하여 본대로 돌아갔다.
외척의 말에 의하면 나월환 장군은 장개석(蔣介石)의 4촌 질녀와 결혼하여 조카 사위관계가 됨으로서 장개석 총통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며 슬하에 딸이 한 명이 있었다고 한다.
1986년 사단법인 한국독립동지회장 김승곤이 쓴 나장군 항일 운동기를 보면
다음과 같은 진술이 있다.
나장군이 일본 성성(成城)중학교를 다닐 때 웅변대회 연사로 참가하게 되었는데 이 웅변대회 참관자중에는 당시 중국 장개석 총통의 친위대장인 전대조(錢大釣)씨가 공무로 일본 동경에 와 있다가 이 웅변대회를 경청하던 중 나월환 소년의 연설을 감명 깊게 듣고 장래 큰 인재로 전도가 촉망되는 거목감이라는 인상을 받고 중국으로 데려가 공부시키기로 결심하고 소년 나월환을 설득시켜 중국으로 동행, 남경 군관학교에 입학시켜 소정의 훈련과정을 마치도록 한다.
1934년 중국군 소위로 임관하여 남경헌병 사령부에서 근무하다가 익년에는
헌병학교 일어교관으로 전근되었다.
1936년 늦은 봄, 나장군의 친형이 남경을 찾아와 두 형제가 상봉하였는데, 형의 귀국 길을 전송하고자 상해부두에 나갔다가 불의에 상해 일본영사관 형사대에 체포되었다. 일본 영사관에서 취조하는 과정에서 항일 투쟁을 하는 나월환으로 판명되자. 일본 측에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취조 후 일본 본국으로 압송키 위해 상해에서 선편으로 출발, 청도항에서 1박하게 되었다. 나장군은 탈출기회를 노리던 중 용변시간을 기회로 바다에 뛰어 내려 잠수해, 이 배 저 배 사이사이로 숨어가며 구사일생으로 상륙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즉시 청도시장을 방문하여 본인은 중국군이며 한국 독립투사로서 지금 일경에게 쫓기는 몸이라는 사실과 신분을 밝혀 도움을 청하니 이에 시장의 신속하고도 적극적인 도움으로 남경에 돌아가게 되었으며 다시 본직에 근무하게 되었다.
외척의 말과 김승곤 동지회장의 진술이 맞아들어 간다. 장개석 총통의 친위대장이라면 장차 거목감을 장총통의 조카사위로 천거할만하다고 추측된다. 태고사에 유해를 빈장(殯葬)할 때 묘령의 중국여인이 참석했었는데 언어가 통하지 않고 황망 중에 그분이 부인이었을 것을 누가 알아보았을까 한다.
1932년 상해 홍구 공원에서의 임시정부 윤봉길 의사의 의거 후 1940년까지
임시정부는 절강성 가흥, 항주, 강소성 소주, 진강, 남경, 호남성 장사, 광동성 광주, 유주, 계림, 기강 등 10여 곳을 전전하며 남서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 당시 임정요인들의 재정적 압박은 매우 커 하루 한 끼로 겨우 연명할 때
이다. 중국 군관인 나월환은 장개석 총통으로 하여금 임정을 재정적 지원토록 하는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상해 임시정부 능력으로는 이국 중국 땅에서 중국군의 재정과 군수물자의 지원이 없었다면 광복 활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정사(正史)에 정확히 기록되지 않았지만 중국군 장교이면서 장개석(蔣介石) 총통의 집안 사위인 나월환 장군의 활약으로 임시정부가 크게 도움 받았으리라는 정황이 매우 신빙성이 있다.
특히 1940년 중경의 광복군 총사령부 설치 선언문에 「광복군은 1919년 임정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중국총통 장개석의 특별허락을 받아 조직되었으며 중화민국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 공동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해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는 창군목적을 천명했듯이 한중간 특히 임시정부와 장개석 간의 유대관계가 매우
우호적이었다. 이와 같은 역할을 나 장군이 담당함으로서 임시정부 김구 선생이 나 장군과의 끈끈한 정을 맺을 수 있었으며 환국 길에 나 장군의 유해를 직접 봉안해 올 정도의 관계라고 추측할 수 있다.
1939년 임시정부의 지령으로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결성되고 나 장군이 대장으로 취임하였다. 김동수, 박기성, 이하유, 한유한 등 간부를 비롯하여 약30여명으로 출발한 공작대는 같은 해 12월 섬서성 서안을 근거지로 섬서, 하남, 화북 3성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전과를 올렸다.
전술한바와 같이 1940년 9월17일 중경에서 임시정부 산하에 무장독립군으로 광복군 총사령부가 설립되고, 뒤이어 사령부가 서안에 설치됨에 따라, 1941년3월 이 청년전지공작대는 그대로 광복군 제5지대로 편성되었다.
나 장군은 제5지대 지대장 겸 징모 제5분처 주임위원으로 새롭게 임명되어, 적 점령지역에 대한 초모, 선전, 첩보, 유격전을 전개 하였다.
광복군은 당초 12명의 장교로 발족되었으며 응모자가 적어 4지대를 편성, 제1지대장에 이준식, 제2지대장에 김학규, 제3지대장에 공진원이 임명되었다.
중국 측 사령 호종남의 협조를 얻어 서안에 있는 중앙전시간부 훈련단 제4단내에 한국 청년간부 훈련반을 특설하여, 제1차적으로 50여명의 청년들을 입교교육을 하였다. 그 뒤 제5지대 대원들을 각지로 파견하여 공작을 시키는 한편, 자신은 한국청년간부 훈련반에 대한 교육 감독 및 지원 등에 심혈을 기울이며 활동하던 중 불운을 맞게 된다.
1942년 3·1절 날 나 장군은 서안에서 그곳 청년전지공작대 대원에게 암살당한다. 암살의 특별한 이유는 주도권을 잡고자하는 편협 된 이기주의였을 것이며, 또 하나는 나 장군이 무정부주의자라는 것이고, 별명이 호랑이이니 성격이 강인하고 치밀하여 일단 계획과 목표를 세우면 한 치의 굴함도 없이 추진해 나가는 투사형으로 지휘통제가 너무나 엄격하여 반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음모자 이하유, 김동수, 이해평, 박동운 등 8인이 체포되었는데 박동운은 사형에 처해지고 주모자 이하유 등 변절자는 무기형 등 처벌을 받는다.
그리고 광복군 제5지대는 제2지대로 개편되면서 이범석이 대장이 되었다.
이러한 정황의 나 장군 이야기를 1984년 당시 나주시청주재 연합통신 기자(김승규)가 언론보도용으로 각색하여 서울로 타전하고 동년 8·15을 즈음하여 대서특필되도록 하였다.
그러나 8·15 광복절을 즈음하여 서울에서는 「서진 룸살롱 살인사건」이 터지면서 언론은 살인사건에 보도의 초점을 맞춤으로서 신문에는 전혀 보도되지 못하고 다만 KBS 라디오 뉴스로 보도되었다.
우연스럽게도 서울지역 친척들이 이 뉴스를 듣고 전남지역 금성나씨 종중에 연락이 되고 금성나씨 종중은 나주시청의 필자와도 연락이 시작되어 이러한 동향을 당시 박일출 시장께 보고하였다.
그리하여 금성나씨 화수회 나삼성, 나유성씨가 협조하고 나월환 장군 묘비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으며 특히 종중 나윤공씨가 앞장서 활약하고 재정적 지원을 해주었다.
나 장군의 잃어버린 묘소도 찾았고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복룡부락에 나 장군의 안식처를 새롭게 단장하고 1986년 11월11일 오전 11시에 나 장군 묘비제막식을 준비하였다.
제막식에는 현재 광복군 동지회 회장이며 당시 광복군의 동지이며 부하였던 박기성, 김승곤씨 등이 서울에서 내려왔다.
묘비문은 한국방송공사 이사장이며 광복회 부회장이신 송지영이 썼다.
제막식은 필자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제막, 시장의 식사, 광복회의 축사, 헌화 순으로 이어지는데, 당시 나 장군의 직접적인 부하였던 박기성은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묘 앞에 무릎을 꿇고 한의 눈물을, 한의 울부짖음으로 나 장군을 애도 하였다. 살아있는 광복회원은 물론 참석자 모두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가슴속에서는 통곡의 눈물을 한없이 울고 싶었을 것이다.
나 장군은 국가에서 항일운동 공로로 1963년 3월1일 건국공로국민장을 추서하였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2003년 11월 4일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 제3묘역으로 이장하여 나 장군은 그곳에서 편히 잠들어 있다는 것이다.
늦게나마 보훈처에서 뜻있는 애국지사 선양사업에 감사드린다.
2006년 3월 16일 나주시에서도 나 장군의 얼을 기리기 위해 한수제 공원에 동상을 건립 제막하였으니 후세에 충효교육의 본보기가 될 것이다.
參 考 文 獻
(1) 단행본
김부식, 『삼국사기』, 권제28 백제본기
문경현, 『고려 태조의 후삼국 통일 연구』, 형설출판사, 1987.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녁, 2000.
이기백, 『민족과 역사』, 일조각, 1977.
이이화, 『한국의 파벌』, 어문각, 1983.
이해준, 『역사 속의 전라도』, 서울: 다지리, 1995.
―――, 『다시 쓰는 전라도 역사』, 서울: 금호문화사, 1999.
조원래, 『임란 의병장 김천일 연구』, 서울: 학문사, 1982.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삼봉집 1-2』, 민족문화문고간행회, 1986.
정윤국, 『나주목지』, 제일문화사, 1989.
고서본;
-김천일의 건제집,
-유희춘의 미암일기
-조선왕조실록
-고려사
(2) 논문
김갑동, ꡒ훈요십조 ꡐ차현이남 등용불가ꡑ위작설 진위ꡓ, 『시사월간 WIN』, 1985.8
김삼웅, ꡒ훈요십조는 위작 됐는가ꡓ,『새교육』, 1998.
김상기, ꡒ고려 태조의 건국과 경륜 ⅠⅡꡓ, 『국사상의 제문제』, 1959, 1960,
김성준, ꡒ십훈요와 고려태조의 정치 사상ꡓ,『한국 중세 정치법제사 연구』, 일 조각, 1985.
문석남, ꡒ지역격차와 갈등에 관한 연구: 영․호남 두 지역을 중심으로ꡓ, 『한 국사회학』, 제18집, 1984
―――, ꡒ지역갈등과 지역격차ꡓ, 『한국사회와 갈등의 연구』, 현대사회연구소, 1985.
박 현, ꡒ왕건은 왜 훈요십조를 남겨야 했나ꡓ, 『한국사 산책』, 백산서당, .
박혜자, ꡒ한국 지역 갈등 연구의 성과와 과제ꡓ, 『도시행정연구』, 제6집(서울 시립대학), 1991.
신복용, ꡒ한국 지역 감정의 역사적 배경ꡓ, 『한국 정치학회 ‘96 학계학술대회 발표논문』, 1996.
설성경, ꡒ훈요십조의 새로운 해석ꡓ, 『월간 중앙 WIN』, 1998. 5월호
이재범,ꡒ고려태조 훈요십조에 대한 재검토ꡓ, 『성대사림』, 제12․13집,
조현걸, ꡒ고려태조 왕건의 정치 사상 분석-훈요십조를 중심으로ꡓ, 『경북대학 교 대학원, 1984.
최병운, ꡒ전라도에 대한 편향적 시각과 그 뿌리ꡓ 『전북한 연구 1』, 전라북 도, 1997.
(3) 기타
언론보도;
동아일보: 2001. 4.4(수) 12면 ꡐ日중심 사관교육ꡑ일관되게 주장
경향신문: 2001. 4.7(토) 3면 ꡐ위험한 사관 당당히 교실로ꡑ
경향신문: 2001. 4.7(토) 1면 ꡐ국사교육 갈수록 홀대ꡑ일관되게 주장
제6장 조선조 말경의 민중운동 동학과 나주 단발령 의거
<글/이민관>
역사를 보는 눈을 사관(史觀)이라 한다.
육신의 눈으로 보는 볼 견(見)자를 써서 사견(史見)이라 하지 않고 마음의 눈으로 보는 볼 관(觀)자를 써서 사관(史觀)이라 한다.
역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역사 평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한말 일본 등 서구 열강 세력이 이 나라를 지배하려고 다가올 때 우리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더욱이 일본이 신식무기로 무장하면서 1910년 한일병탐이 되기까지 일제의 악랄한 야욕은 급기야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고종은 무서워 러시아 공관으로 자리를 피하는 등 무너지는 구한말의 정세는 그야말로 풍전 등화였다. 일제는 개화라는 미명하에 우리의 주권과 권력을 하나씩 잠식해 들어 왔지만 국가의 녹을 먹는 위정자는 일제 항거에 앞장서지 못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의 7년 전쟁을 치른 민족, 또다시 일본의 보이지 않은 침략적 행위를 차마 볼 수 없는 민초들, 유림들이 봉기한 것이 1896년의 나주 단발령 의거이다.
일본 식민사관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나주의 민란인 것이다.
민이 관을 습격하여 개화파 앞잡이 등을 죽였으니 사건치고는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1세기가 지난 후에 사관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일본 침략에 항거하는 몸부림인 것이다. 이 몸부림을 구한말 그 당시는 민란이었지만 지금에 와서 일제 식민사관 탈피의 눈으로 보면 의거라 아니할 수 없다.
이것뿐이랴. 민비니, 한일합방이니, 李朝니 하는 언어 자체가 우리의 혼을 깎아내리는 식민사관의 단어들 아닌가. 역사왜곡 식민사관의 눈을 씻어내야 한다. YS정부의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도, DJ정부의 제2건국 운동도 따지고 보면 식민 사관의 왜곡된 역사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지만, 정책만 있었지 추진이 하나도 안 된 지금도 과제로 남아 있지 않은가.
1. 동학의 기원.
동학사상은 철종 1년 1850년에 경상도 경주에서 태어난 최 재우(1824- 1864)가 주장한 사상으로 유, 불, 선, 3 교의 정화를 합치고, 한국 고유의 옥황상제를 주체로 하여 천심이 곧 인심이요, 병을 고치고 오래 사는 교리가 동학이라 하였다.
본 주문을 소개 하면 우리에게 내재된 신영을 받들면 조화가 이루어지고, 이것을 평생토록 잊지 않으면 세상만사를 알게 되며,
항 령 주문은 하늘의 영기가 내 몸에 내리 시와 융합하여 일체가 되옵소서 였다,
그리고 썩은 정치를 바로잡고, 피 압박 계급인 상인이나 천민을 두둔하니 삼남 지방의 하류 계급에 크게 교세가 신장되어 갔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1863년 11월에 최 재우에게 혹세무민 죄를 적용하여 대구 감영에 가두었다가 다음해 3월에 사형하였다.
2. 동학 운동의 개요
그 후 근 30년이 흐르는 동안 전국 각처에서는 민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이것은 대부분 관리들의 토색질에 대한 항거이고, 동학교도가 주체가 되어 갔다.
더구나 1882년에는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갑신정변(1884년)으로 확대 되었다. 더구나 2세 교주인 최 시형은 (1829- 1898)교조 최 재우의 신면을 상소하고, 제폭구민 척야벌왜(서양과 왜놈을 배척)하기위해 8도 교도 수 만명이 충북 보은군 청산면에 석성을 쌓고, 정부에 대항하였다.
이런 와중에 1892년 5월에 호남의 고부 군수가 되어온 조 병갑이 주위 배경을 과시하며 토색질을 일삼고, 항무 지를 개간하면 5년간 면세를 해준다고 해놓고, 없이 사는 농민들이 애써 개간한 땅에 그해 가을부터 세곡을 강제 징수하며, 부유한 농민에게는 터무니없는 죄명을 쒸워 옥에 가두고, 석방하면서 2만량을 뜯어냈다.
또한 그 아비 군수 공적 비를 태인에 세운다고, 천 여량을 거두기도 하였다.
더욱이 다음해에는 이평면, 여동면 (만석보)밑에 인근 면민들을 강제 부역시켜 신복을 만들어 몽리 민들에게 700여석의 수세를 내라고 독촉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동학 혁명이 일어나게 된 지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자세한 전말은 다음에 기술하기로 하고,
동학 혁명으로 청군과 왜군이 들어오게 되는 동기가 되고, 국내에서도 쇄국정책을 버리고 뒤 늦었지만 개혁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3. 동학란의 진상
1893년 11월에 각 마을 대표 40여명이 수세 감면 진정장을 만들어 전창혁(봉준의 부), 김도삼, 정익서 3인이 이름을 맨 앞에 쓰고, 나머지 사람이 연명해서 조병갑 군수에 찾아갔으나 대표 3인을 모질게 때리고 가두었다가 전주 감영으로 보냈다. 나머지 사람들은 매를 때려 내쫓아 버렸다.
감영으로 끌려간 3인은 고부로 다시 보내지고, 장형을 당하고, 십 여일 후에 방면 되었으나 그중 전창혁은 장독으로 사망하였다.
울분을 못 참은 농민들이 계속 항의하자 조 병갑은 익산으로 전임되고, 이 용근, 이규백, 하긍일을 고부 군수로 차례로 발령하였으나 모두 병을 구실로 부임하지 않고, 12월 8일 강인철을 발령하니 다음해 1월 2일에 사임하고 말았다.
이렇게 고부군수 발령이 공석이 되는 동안에, 전임 조병갑은 친 사돈인 이조판서 심상훈을 통해서 감사 김문현에게 유임 시키도록 압력을 가해 옴으로 감사 김문현은 병갑을 고부군수로 다시 받아들였다.
1월 9일 재발영 되어온 조병갑은 부임 즉시 배경을 자랑하며 옛날 작태를 되풀이 하자, 다음날 밤에 예동 부락에 걸궁도 있고 하여 수천 명이 모였고, 전봉준 (정읍군 이평면 장내리) ,김도삼(이평면 산매리) 정익서(정읍군 정우면 초강리)3인이 대표로 나서 제폭구민을 역설하고, 죽창을 들고, 11일 새벽 고부동헌으로 처 들어갔다.
조병갑은 소식을 듣고, 정읍 순창을 거처 전주감영으로 도망가 버렸다.
성난 군중은 옥문을 열어 죄인들을 놓아 보내고, 군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마항시장 (이평면 말목장터)으로 나와 새로 만든 저수지를 파괴해 버리고, 예동 마을에 쌓아 놓은 복세미를 모두 농민에게 되돌려 주었다.
일이 이렇게 확대 되자 감사 김문현은 감영 수교 정수영을 고부로 보내어 조병갑이 앞잡이 노릇을 한 좌수, 호장, 이방, 수교와 그 주변에서 농간질 하던 4-5명을 가두었으나 이 조치만으로 설득이 부족하자, 부득이 조병갑의 파면과 고부 관리들 처벌을 조정에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2월 15일 고부 민란에 대한 보고를 받은 고종은 즉시 조병갑을 구속하고, 용안 현감 박원명(광주인)을 고부 군수로 발령하고, 장흥 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임명해서 민란의 원인과 책임을 규명하고, 인심을 안정시키도록 조치하였다.
신임 박 군수는 민란 대표를 만나 누적된 세금을 시정키로 하고, 성의를 다해 설득한 결과 모두 해산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이것이 일차 동학란이다)
10여일 후 안핵사 이용태는 정부의 수습방안과는 달리 박 군수에게 민란 주동자를 잡아들이게 하고, 전봉준, 김도삼, 정익서를 주동자라 하여 집에 불을 지르고, 가족을 구금하고, 생활 여유가 있어 보이는 백성들은 동학당이라고 협박하여 돈까지 뜯어내어 일이 수습이 아닌 확대로 번져갔다.
4. 2 차 동학란의 발발
그럼으로 이들이 다시 뭉쳐 동학교도와 손을 잡고, 정부를 상대로 무력 충돌로 확대 되었다.
3월 21일 교주 최시형의 생일을 기해서 백산(부안군 백산면 용계리)에 각처의 동학교도와 고부의 박해 받은 농민이 모이는 군중대회를 갖기에 이르렀고, 이것을 백산 기포(기병 한다는 뜻)라 하였다.
고부, 부안, 정읍, 태인, 금구, 김제, 만경, 흥덕 무장, 영광 등지에서 백산에 운집한 만여 명의 동학 농민군은 조총과 죽창으로 무장하고, 척왜 척양 보국안민 8자를 큰 기로 만들어 내걸고, 호남 창의 대장소 이름으로 탐관오리를 숙청하고, 밖으로는 우리를 침범하는 왜적을 물리치는데 목적을 두고 일어났다. 이는 곧 충청, 전라, 경상도는 물론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각처에서 관위와 富豪家를 습격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일이 이렇게 더욱 확대 되자 전라 감사 김문현은 도내 오영장과 수령들에게 동학당 채포령을 내리고 감영군과 보부상 천여 명을 백산으로 나가게 하고, 조정에서는 4월 2일 장위령 정영, 홍계훈을 양호 초토사로 임명하여 경군 800여명 을 거느리고 고부로 내려 보냈다,
그러나 이들 토벌대는 4월6일 황토현(정읍군 덕천면)에서 동학군에게 크게 폐하여 영관 이경호와 수백 명이 죽고, 초전에 이긴 동학군은 다음날 정읍,흥덕, 무장 관위를 차례로 접수하여 죄인을 석방하고, 관곡을 빈민에게 나누워 주고, 탐관오리를 내 쫓았다.
더 나아가 4월 12일에는 영광, 16일에는 함평을 점령한 후, 18일에는 나주 경내를 거처 장성을 향해 북진하기 시작했다.
4월 23일 장성 황룡촌에서 홍계훈 경군을 만나 크게 무찌른 후 정읍을 우회하여 산을 넘어 4월 27일에 전주성을 점령해 들어갔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4월 초순경에 청나라에 구원 군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일이 이렇게 확대되기 전 2-3년 전부터서 외국에서나 백성의 청원이 각처에서 일어나도 이를 시정하지 않고, 그대로 쇄국정책을 고수한 조정에서는
직접적으로 고부에서 학정에 못 이겨 일차 민란이 정초에 일어나도 수습하지 못하고, 늦장 대처하고, 오히려 일을 키우는 결과를 가져오고, 크게 확대 되니 조정의 고위 대신들은 자기들 백성을 진압하여 달라고 남의 나라 청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청군이 다시 조선에 오면 일군도 온다는 임오군란(1882, 6월) 때 맺은 양국협정(1885, 4월 천진 조약) 때문에 5월 7일 충남 아산만 공소리(서해 대교 부근 )들어오자 호시 탐탐 기회를 보고 있던 일군이 이틀 만에 인천항으로 들어와 한양으로 들어오고 만다.
이미 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으로 왕정으로 복귀하고, 서구를 배우기 시작 하면서 현대식 군대와 해군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서구의 식민지 정책을 배우고 노예화하는 정책을 발전시켜 나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조선뿐 아니라 서양 제국주의에서 배운 그대로 아시아의 맹주가 되려는 시나리오가 이미 작성된 후였다.
이렇게 정세가 급변하자 조정에서는 빨리 내란을 종식시키기 위해 전라 감사 김학진에게 동학군과 휴전을 교섭해서 12개 항을 받아들이고, 전주 和約이 성립된다. 다음날 동학군은 전주성을 관군에게 돌려주고, 해산하기에 이른다.
< 전주화약 12개 조항>
(1) 동학교도와 정부는 서정에 협력한다. (집강소 설치 등)
(2) 탐관오리 숙청,
(3) 횡폭한 부호의 처벌.
(4) 불양한 유림과 양반의 처벌.
(5) 노비문서의 소각,
(6) 천민의 대우 개선,
(7) 과부 재가의 허용,
(8) 무명잡세의 폐지,
(9) 인재 등용 때 문벌을 타파,
(10)일군과 내통하는 자의 처벌.
(11) 공사채의 면죄,
(12) 토지의 평균 분작(농지 분배) 였다.
오늘에 이르러 보면 상당 부문이 시정되어 사회의 개혁이 이루어졌으나 일부는 아직도 우리 사회의 부조리로 남아 있음을 보고, 가슴이 조려 옴을 느낀다.
이렇게 일이 진전되자 청, 일 양군이 이 나라에 주재할 이유가 없어졌으나 일본의 마각은 시작에 불과 하였다.
이들은 어떻게든 무장하여 이 땅에 들어 왔고, 먼저 청군을 격파하여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겠다는 야욕으로 육로로 철군한다는 간계를 써, 남하하다가 천안에서 아산만의 청군을 향하여 처 들어갔다. 이것이 청일전쟁의 시작이다. (1894, 6,) 아산에서 승리한 일본은 8월 평양에서도 대승하였다.
청나라군은 일본이 먼저 청나라 군대를 몰아낸 다음으로 동학군을 전라도 남쪽으로 몰아가 없애고, 이로 인하여 동학혁명으로 인하여 희생된 백성의 수는 3-4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 후 나라 안에서 청나라 비호세력 마저 없앤다. 그래서 만주를 치고, 중국대륙으로 육군은 나아간다. 그 후 러 일 전쟁 후 만주 북쪽의 할빈까지 처 들어가고, 러시아의 사할린 북위 50도 이남을 얻게 된다.(1906년 6월)
폐쇄정책 속에서 살던 조선 백성은 일본이 저러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고, 조정에서도 우리가 위급하면 대 청국이 있는데 하고 안주하고 있었다. 급변하는 세계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농사에만 종사하고 살았다.
탐관오리에 허덕이고, 우물 안 개구리 인지도 모르고, 먹고사는 투쟁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국민 90% 이상이 1차 산업, 농업에 종사)
일단 청군을 몰아낸 일본은 오오또리 공사가 내정 개혁을 요구하면서 간섭을 시작하고, 자기들 세력 구축에 들어갔다. 그리고 6월에는 경부선을 기공한다.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한 전쟁인가.
그해 12월에 전북 순창에서 전봉준이 체포되고, 다음해 1896년 3월에 전 봉준 이하 핵심 인사들도 처형해 버렸다. 이때는 동학군의 적은 조선 정부가 아닌 일본군 이였다.
8월에는 일본 공사 미우라가 대원군을 받들고, 경복궁에 들어가 황후를 시해하고, 경복궁 북쪽 문인 신무문 근처 숲에서 미리 준비해간 기름을 끼얹어 불태우고 만다. 그래서 한 나라의 국모는 바로 옆 나라의 야욕에 쓸어 지고 만다. 얼마나 애석하고, 힘없는 나라의 설음인가.
그러나 가정과 국내의 세력 다툼의 결과는 이러한 수치가 나옴과 동시에 나라마저 잃어, 온 백성의 고통이 시작된다.
고종은 황후의 초상도 못 치르고, 두어 달 후인 10월에 가서야 장사를 치르게 된다.
그리고 일본은 곧이어 11월에 단발령을 내린다. 이는 개혁 보다는 일본을 상징하는 헤어스타일로 바꾸는 작업이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항 일 투쟁이 일어나나 민란이라고 규정하여 쳐부수고, 사형시킨다. 이에 참다못한 고종은 러시아에 원병을 청하고, 러시아 공사로 피난 간다. 1896년 2월 11일의 일이다.
그러면서 독립의 기치를 높이 드나 이미 때는 늦은 후였다.
이 무렵에 있었던 큰일을 기록하다면,
1) 미국인 모로스에게 경인 철도 권을 허가하고,
2) 서 재필의 독립신문이 발간되고, 30여인이 모여 독립협회를 구성하고,
3) 무산,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의 산림벌채권을 러시아에 허가 한다.
4) 10월에는 러시아 사관 10여명을 초빙하여 신식 군대를 훈련시킨다.
5) 1897년 1월에는 민비의 시호를 고처 명성 황후라 한다.
6) 10월 3일에는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국호를 대한이라 고침,
7) 11월에 명성황후를 국장으로 거행하고, 황제 즉위 일을 개천절이라 정함,
8) 손병희 동학의 3대 교주가 되었다.
1898년 2월에 흥선 대원군이 죽는다, 아들 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지 35년의 일이다. 그동안 그는 왕권을 확립하고, 그 일환으로 경복궁을 짓고, 서원을 철폐하여 당파를 진정하며 일한다고 하였으나 너무나 왕권에 집착한 나머지 열려있는 세계를 보지 못하고, 쇄국정책을 일관하여 낙후되고, 집안싸움으로 많은 세월을 낭비하였다. 더구나 하느님을 믿는 천주교에 박해를 가해 많은 신자를 죽였다. (나주에서도 4명의 치명자가 발생했다)
국내외로 쇄국정책을 철저하게 펴 나가, 서양의 여러 선진국이 교역을 요청해 와도 적으로 몰아 부수니, 그들이 군함을 파견하게 되고, 일본도 편승하여 괴롭히기 시작하니, 철저하게 문을 걸어 잠근다.
내부에서도 해년마다 전국 각지에서 민란이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세계는 달라지고 발전해 가는데 내부에서, 왕권에 연연하고, 더구나 점점 누란의 위기가 닥쳐 와 공동으로 대처해도 어려운 상황에서도, 며느리 민비와의 싸움은 계속된다. 새로운 세상을 배우려 하지 않고, 옛날의 영화만을 생각하며, 신하들마저 편을 갈라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갔다.
이러니 군대란 3 백 년 전의 임진왜란은 간데없고, 준비하나 없이 군대란 구식 무기로 민란이나 척결하는데 동원되는 병력에 불과했다.
여기에 일본은 서양에서 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군함도 구입하고, 만들기도 해서 조선은 물론 청나라를 칠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더구나 수군은 3백 년 전 조선의 이순신 장군이 하신 것을 역으로 한 전법인 학인진 전법으로 청이나 러시아에 보여주어 승리로 이끌어 동양의 맹주가 되어 갔다.
지금부터 4 백여 년 전 이순신 장군이 안 계셨으면 우린 그 때 일본의 속국이 되었을 것을, 그래서 그들은 수군을 더욱 발전 시켰다.
또한 육군도 그들대로 하려면 경부선이 필요했고, 그래서 청일 전쟁 초기에 조선 사람을 시켜 착공한다. 1894년 6월의 일이다.
점점 위압을 느낀 러시아는 1903년 고종 40년에 일본에 북위 39도선을 제의하나 1904년 2월에 인천에서 러시아 함대를 격파하고,(1904년 2월 8일이다, 선전포고 2일전으로 기습작전임) 5월에는 남해에서 무적이라고 자처하는 러시아 발틱 함대를 크게 대파한다.
한편 육군은 경부선이 개통하는 날을 기해 러일 전쟁을 일으킨다.
바로 청일 전쟁이 있은 지 10년만의 일이다.
이제 조선에는 러시아 세력도 없어져 일본의 독무대가 되어 조선은 그들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모든 것을 수탈당하고 만다.
사람은 물론 지하자원까지도 자기들 마음대로 해도 누가 말할 사람도 없고, 말해주는 나라도 없다.
나라만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 이용당하고, 끝까지 대항한다.
이러한 사항 속에서 1907년 5월 20일 나주 초등학교는 대정 보통학교라 하여 개교한다. 그리고 해아 밀사 사건이 터지고, 다음 달에는 그들이 벼르고 벼르던 고종을 폐위 시킨다. 그리고 8월에는 조선 군대마저 해산 시킨다.
일본인들은 모든 수단 방법과 간계를 동원하여 국론을 교란시키고, 식민지화 해갔다. 변형된 신무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1910년 순종 4년 8월 22일 한일 병탐으로 이 지구상에 조선은 없어지고 말았다. 동학란이 일어 난지 16년만의 일이다.
그리고 민족의 대 수난이 시작 되었다. 국토의 지하자원은 물론, 우리 문화와 문명까지도 말살되어갔다. 성 까지도 빼앗기고, 생명까지도 내 놓아야 했다. 이것이 그 당시의 전쟁의 논리였다.
여기에 나라 잃은 설음을 표현한 신고산 타령을 소개한다.
신고산이 우루루 화물차 가는 소리에
지원병 보낸 어머니 가슴만 쥐어뜯고요,
어랑 어랑 어허야
양곡 배급 적어서 콩 깨묵만 먹고 사누나
신고산이 우루루 화물차 가는 소리에
정신대 보낸 어머니 딸이 가엾어 울고요
어랑 어랑 어허야
풀만 씹는 어미 소, 배가 고파 우누나,
신고산이 우루루 화물차 가는 소리에
금붙이 쇠붙이 밥그릇마저 모조리 긁어 갔고요,
어랑 어랑 어허야,
이름 석자 잃고서 족보만 들고 우누나 ,
이 타령은 1920년대 일본이 청나라나 극동 러시아를 치기 위해 조선 백성을
근대화의 허울 속에서 수탈해 가는 시대상을 잘 표현 했다고 본다.
다시는 이 땅에 신고산 타령이 울리지 않도록 위정자들은 항상 국가 안보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5. 나주의 단발령 의거(나주 민란)
다시 거슬러 올라가 1895년 5월 1일을 기해서 8도를 23개 관찰부로 개편할 때 나주 관찰부가 설치되어 초대 관찰사로 한기동이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는다.
7월에 채규상이 관찰사에 임명되어 24일 나주부에 부임하여 왔다. 그 이전에 참서관에 안종수가 부임하여 관찰부는 목사 동헌을 사용하고, 군수와 직원들은 향사당 (전 농지 개량조합출장소, 지금은 할매 두부공장임) 사용하였다.
참서관이 되어온 안종수는 글 잘하고 개화파에 속해서 고종 18년 (1881) 신사 유람단을 따라 일본에도 갔다 온 자로 민비 국상이 10월 15일에 발표됨에 나주군수 민종열이 금성관에 빈소를 마련하였다.
11월에 민종열이 담양 군수로 전임되어 간 후로는 안종수가 군수 겸임을 하게 되어 11월 15 일 단발령이 내리자 공명심에 제 머리부터 깎고, 경무관보 박취항과 여 모 순검 등 경찰 관리를 총동원하여 나주 관찰부와 군청에 근무하는 관리들의 머리를 자르게 하였다.
실은 단발령이란 개혁을 한다는 미명하에 수백 년의 전통인 부모에게서 받은 육신의 일부라고 생각하여 중히 여기고, 살아온 우리의 고유의 관습을 하루 아침에 삭발하고(이는 일본이 명치유신 때 구시대인 사무라이를 없애려는 의도로 한 삭발로 근대 일본을 상징하는 헤어스타일이다) 그리고 길거리에 보이는 사람들도 모조리 군도로 상투를 잘랐다,
나아가 나주향교 유생들의 머리도 먼저 깎아서 일반 백성들에게 파급 시키고자 하니 도망 다니는 관리나 백성들이 많았다.
이런 강제로 단발하는 행위는 나주뿐 아니고 나주 관찰부에 속해 있는 광주, 남평, 능주, 화순, 동복 보성, 낙안 흥양, 장흥, 강진, 해남 진도 영암, 함평 무안 등 16개 군민이 함께 겪는 고통이었다.
1896년 정월 15일 (양 2월 27일) 향교 분향 제일을 기해서 장성 기우만으로부터 임진왜란 때 우리 국토를 더럽힌 왜인이 다시 들어와 거년에 국모를 시해하고, 삭발을 강요하고, 고종 임금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어려움을 또 겪고 있으니 여러 못된 짓을 자행하는 왜인들을 우리나라에서 쫓아내자는 통문이 보내져 오고, 이를 선비들에게 알려 주었다.
이러는 가운데 3월15일에는 향교 석존제를 모시기 위해서 많은 유림들이 모여 국운을 논의 하던 차에 관찰사 조한근과 참서관 안종수가 머리를 깎은 체로 제사에 온다는 말을 듣고, 유림들이 크게 분노해서 동헌에서 향교로 오는 길목에 있는 서성문에 더벅머리를 한 사람은 대성전에 들어오지 말라는 여덟 자를 크게 써 붙여서 못 들어오게 하였다.
이틀 후 이학상(주서)를 필두로 백 여인이 의거에 동참 하겠다는 통문을 만들어 이원서, 임원서, 박좌수, 오 전 참모, 승 병교가 장성 참의소에 가는 한편, 다음날에는 동학군 평정의 공으로 해남 군수로 발령된 정석진 (당시 관찰부 주사)이 향교로 와서 민비 시해 사건 규탄과 단발령에 반대하는 의거가 다른 곳에 비하여 늦은 감이 있다며,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고 독려 했다.
3월 21일 이원서와 임긍규가 장성에서 돌아오면서 안종수의 10가지 죄상을 폭로하는 통문을 가지고 와서 성중 백성에게 알리니 인심이 물 끓듯 하였고, 안 종수도 보게 되었다.
다음날 정석진이 대성전에서 참배하고, 갑오 동학혁명 때 수성군으로 일 했던 군교들이 영산포 나룻터까지 전송하고, 돌아오다가 관찰부 정청(옛 목사 동헌)에 들어가 안종수와 경무관보 박희강과 여 모 순검을 죽이고, 사택을 뒤져 백성들로부터 뜯어 들인 8만량을 몰수 했다.
이때 관찰사 조한근은 단신으로 남평과 광주를 거처 한양으로 도망쳐 버렸다.
그날 12시경 퇴교 김창근, 장길한 승갑포 등과 많은 성안 백성들이 주서 이 학상이 총 지휘를 바라고, 성안 망화루(금성관 외삼문)에 앉아 머리 깎긴 사람들의 지나친 보복 행위를 자제하도록 당부하고, 4대문에 방을 붙여 힘을 모아 왜인들을 국내에서 몰아내자는 것과 사감으로 살상이나 약탈을 금하는 요지를 알리는 동시에 도내 각 군에 동참하라는 통문을 보냈다.
3월 23일에는 나주 관찰사와 군수 관인을 무안 겸관소에 싸서 보냈다.
다음날에는 장성 기 우만이 2백 여인의 유생들을 거느리고 나주에 오고,
주위 여러 곳에서 도 합류하였다.
그리고 함평 능주 무안 등지에서 마을을 대표하는 의병장 등이 많은 사람과 함께 합세 하였다.
그러자 4월1일에는 보병 1,500명이(관군과 일군의 부대) 전주를 거처 내려오니 이에 이학상은 국왕을 호위하기 위해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상소문을 한양에 발송하고, 기우만도 같은 상소문을 올렸다.
5일에 관리 1인과 병사 2인이 나주 참의소에 들여 관찰사와 군수가 없는 무 정부 상태이지만 의병들과 관리들이 서로 협조해서 일사 분란하게 질서를 유지하며 경비하는 것을 보고, 참여한 여러 고을 대표자들이 떠나갔다.
그리고 잔치를 벌 린 뒤에 의병들도 흩어져 떠나갔다.
4월 16일에는 전주 진위대장 김병욱이 나주에 입성하고, 해남군수 정석진도 잡혀오고, 담양군수 민종열도 잡혀왔으며, 4월 22일 한 달 만에 정석진은 해남으로 떠날 때 전송인 들에게 민란을 일으키도록 충동했다 하여 나주 진영 무학당 앞에서 사형되고, 앞장섰던 퇴역 김창곤 등 몇 사람도 사형 되었다.
민종열도 동조했다하여 서울로 압송 되었다. 고종 황제는 의거한 사람들을
동정하는 실정이어서 얼마 후 풀려났다. 그러나 그 당시 사형인들은 아직도 그 명예가 풀려나지 않은 상태라고 보여 진다.
그리고 이러한 의거는 1910년까지 14-5년 이상을 전도적으로 나아가 전국적으로 계속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산화되어 갔다. 오늘에 와서 그분들의 충정을 누가 알리오, 그 당시 이 땅에 살았고, 이 땅을 지키려는 장정들의 도리일 것이다.
6. 나주 관찰부(도청)의 광주 이전
1896년 5월 28일에는 관찰사 윤헌과 군수 이유구가 부임해서 민심을 수습하며 정상을 찾았으나, 8월 4일 전라도는 4부를 전라남북도로 폐합한다며 관찰부가 일인의 손에 의해 광주로 옮겨 갔다.
더욱이 이 시기는 고종이 태자와 같이 아관 파천한 상태였다.(1896년 2월 11일부터 약 1년간이다)
그로 인해 나주는 퇴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동학 운동의 주범인 조병갑은 고금도에 유배 되었으나 이때 풀려나 어느새 고등판사가 되어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1898년 7월 18일의 일이다.(대마도에서 사형을 당함) 이만큼 그들의 간계는 악랄함을 알아야겠다.
그래서인지 3.1 운동과 1928년의 광주 학생운동과 최근에 1980년대의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나주 인들은 주축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에 와서 한동안 나주에서는 10년 전에 도내에서 유일하게 도청 유치가 아닌 환원 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청원하였으나, 도청이 영산강 하류인 무안군 삼향면 남악리로 가 버려 나주는 또 한번 고배를 마셔야 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2006년에 도내 중앙지인 금천면과 산포면 경계에 혁신 도시가 생긴다니 이것으로라도 위로 할 수밖에.......
한때 나주 인구는 30만에 가까운 27만이었는데, 작금은 그 3분지 2가 떠난 9만으로 감소되었다.
한때 정부에서는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한다며 중앙청도 헐고, 하면서도 일본에 대한 첫 의거를 오늘에 와서도 그냥 흘려보내야 하는지?
오늘에 와서 돌이켜 보면 과거사에 연연하는 것 보다는 나주 미래의 발전을 위해서도 서로 인화하며 복 돋아 동참하며 편 가르기를 없애야 할 것이다.
더욱이 이 지구상에 유일하게 땅도 하늘도 열지 않고, 세습 왕권제도를 유지하는 동족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는지?
그래서 우리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에 가려면 남의 나라인 중국을 거처 빙빙 돌아 하루가 아닌 2틀이 걸린다.
세계 어디든 남미를 빼고는 하루에 갈 수 있는데 , 바로 지척에 두고, 남미처럼 2틀이 걸린다.
이제는 러시아도 중국도 하늘과 땅을 연지 오래다. 그리고 그들의 생활수준이나 소득도 나아지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남한을 앞질러 질주하고 있다.
우리는 일주일에 2틀을 쉬지만, 쉬는 날 없이 일해도, 살기 어려워 생존을 위한 탈북자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참고 문헌 **
1) 나주 목지..... 정 윤국 저.
2) 국사 대사전 ..... 이 홍직 박사 편.
3) 월간 조선 ......... 2006, 11월호, 등 다수,
제3편 나주 무학당(武學堂) 이야기
제1절 : 병인대박해와 무학당
<글/신부님>
1. 무학당이란?
"무학당" 이란 이름은 고려시대 국학에 설치되어 무예를 가르치던 것이 "무학재"였는데 그 이름을 빌려 "무학당"이라 하였다.
2. 조선조 말 천주교 박해지로서 나주 무학당
지금은 그 위치조차 희미한 나주 무학당은 광주 대교구 내에서는 유일하게 순교 터가 있었던 곳이다.
무학당의 확실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현재 나주 초등학교 안의 한쪽 화단이 박해 당시 사형 터로 쓰였던 무학당의 원래 터였다고 전해질 뿐이다. 더구나 지금은 그나마 주춧돌 외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아 무상한 세월과 함께 후손들의 못난 신앙을 돌이켜보게 한다.
나주(羅州)는 전라남도의 주읍(主邑)으로 옛날부터 크게 번창한 고장이었다. 여기에 정식으로 본당이 설정된 것은 1935년 5월의 일이다. 하지만 나주 본당의 뿌리는 1866년 병인박해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나주는 천년의 고도로서 긴 역사를 지닌 목사 고을로 동시에 교회사의 입장에서 보면 흥선 대원군이 천주교도에 대해서 내린 병인대박해(1866년)의 와중인 1872년 나주 무학당 앞에서 세분의 천주교 신자들이 신앙을 증거 하다 피를 흘리며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무학당의 확실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현재 나주초등학교 안의 한쪽 화단이 박해 당시 사형 터로 쓰였던 무학당의 원래 터였다고 전해질 뿐이다.
무학당에서 얼마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고문 끝에 순교했는지 그 정확한 수나 사연은 알 길이 없다. 다만 「치명(致命) 일기」에 이곳에서 치명한 세 분 순교자에 대한 단편적인 사연들만이 기록돼 있을 뿐이다. 그 세분 순교자 중 한 분인 강영원(바오로)은 전북 용담 사람인데 정읍에서 1871년 11월23일에 체포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아 백지 사형으로 1872년 51세의 나이에 치명하였고, 두 번째 순교자 유치성(안드레아)은 본래 경상도가 고향이나 전북으로 이사와 무장 암치에서 살다가 같은 해에 체포되어 30여대의 태형과 돌로 침을 받는 형벌을 받아 강영원과 함께 같은 날 48세의 나이에 순교하였다. 그는 강영원과는 달리 쏟아지는 돌더미 속에서 머리가 깨지고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혹독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마지막 순교자 유문보(안드레아)는 장성 삭벌리에서 살다 1872년에 잡혀 감옥에 끌려와 갖은 고문과 질병의 휴유증으로 고생하다 1872년 정월에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옥사하였는데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위의 세 순교자에 대한 기록은 조선교구 제 8대 교구장인 뮈텔 민 대주교(Mutel : 民德孝)가 1891년부터 4년 동안 병인 박해 희생자 877명의 행적을 엄밀히 조사하고 지역적으로 정리하여 1891년부터 발간한 <치명일기>라는 문헌에 나온다.(여기에는 877명의 순교자 기록이 있고 이중 24명이 1968년에 시복이 되고 1984년 5월 6일 한국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대회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품에 오른다.)
나주는 조선시대에 목사 고을로 병영과 감옥이 있었고 형이 집행되던 곳이었기에 천주교 박해시대에 더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을 것으로 판단되나 현재에 기록으로 남은 분들은 이 세 분뿐이며, 현재 순교자들의 후손을 찾을 길이 없고 여러 설이 있으나 그들의 시신은 나주 산야(나주초등학교 남쪽 편 옛 공동묘지 터/현재는 LG 나주공장) 어느 곳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어느 한 사람 소중하지 않다 할 수 없는 이들 순교자들이 흘린 피 위에 나주 지역의 천주교는 그 터를 닦았다 하겠다. 비록 그 순교 터의 위치는 어느덧 세월의 흐름에 따라 기억하는 이도 없이 잊혀졌다 할지라도 그곳 땅과 하늘에 서려 있는 확고한 믿음은 후손들에게 길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믿음의 터를 닦은 나주에는 1933년에 와서 임시 공소가 서고 이듬해에는 대지 3천 평을 확보, 임시 성당과 사제관을 준공했으며 1935년에 들어서 비로소 본당이 설정된다.
나주 본당은 광주대교구에서 긴 역사를 지닌 본당 중의 하나이다. 2004년 5월 5일 나주 본당 설립 70주년을 맞이하여 감사미사를 봉헌하였다.
■ 순교자
◆ 강영원 바오로 (? -1872)
전북 용담인으로 1871년 11월 23일 정읍에서 체포되어 나주 진영에 하옥되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포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않고 통경으로 기도를 바쳤다. 당시 함께 갇힌 유치성과 유문보에게 유감에 빠지지 말자고 격려하며 굳굳이 참아 견디었다. 마침내 나주 무학당 앞마당에서 영장의 지휘아래 태장 30대를 맞고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얼굴에다 물에 적신 창호지를 여러 겹으로 덧씌워 질식시키는 백지(白紙)사형을 받아 1872년 3월 9일에 치명(致命)하셨는데 그의 나이는 51세였다.
◆ 유치성 안드레아 (? -1872)
본래 경상도 사람으로 전북 무장 암치에서 살다 나주 포교에게 체포되어 나주 진영에 갇혔다. 그는 신문을 받으며 “만 번 죽어도 천주교를 믿겠다”고 하자 영장은 유치성의 발등에 불을 지지도록 하고 나아가 돌무더기에 묻혀 머리가 깨지고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혹독한 형벌을 당하다 동료 강영원과 함께 같은 날 백지사형으로 치명하였는데 그의 나이는 48세였다.
◆ 유문보 안드레아 (? -1871)
전남 장성 삭벌리에서 살다 나주 포교 김용운에게 체포되어 나주 진영으로 끌려갔다. 옥중에서 혹독한 고문에다가 염병에 걸려 1871년 11월쯤에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옥사하니,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이 모든 이야기는 세 분의 순교자와 같이 잡혀 옥살이를 하다 석방된 순창 묵상 사람 최성화(안드레아)와 장성 수도사람 서윤경(안드레아)이 1898년 11월 16일 증언하였고 이 기록이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수록되어 있다.
무학당에서 얼마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모진 고문 끝에 순교했는지 그 정확한 수나 사연은 알 길이 없다. 다만 「치명 일기」에 이곳에서 치명한 세 분 순교자에 대한 단편적인 사연들만이 기록돼 있을 뿐이다.
제2절 동학운동과 무학당
<글/나천수>
역사적으로 보면 세기말에는 세기가 바뀌는 몸부림인지는 몰라도 큰 혼란의 격동기를 겪는다.
1894년경의 동학은 농민이 중앙정부에 대한 항거의 몸부림이었던바 이를 민란이니, 운동이니, 항거니 하는 저마다의 표현을 하여왔다.
분명 동학이 일어나는 그 당시에는 민중 폭동 또는 민란이었음에 분명하지만 1세기가 지난 지금은 동학운동 또는 동학 의거라는 표현을 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사관(史觀)으로 보는 역사는 민족 주체의식에서 평가되는 만큼 당시의 민란이 1세기가 지나서야 동학운동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가혹한 농민 수탈에 대한 농민의 몸부림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이 조선 침략의 빌미로 삼고자 신식무기를 앞세워 동학을 진압하였으니 말이다.
19세기 말 정부의 재정이 악화되면서 농민들의 부담은 이중삼중으로 증가하였다. 농민에 대한 가혹한 수탈은 전라도에 집중되었는데, 그것은 농경사회에서의 농토가 만은 전라도가 비교적 물산이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전라도의 농민들은 일본과의 교역과정에서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그런 까닭에 호남의 농민들은 반일감정이 더욱 고조되었다.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반침략적 민족의식과 반봉건적 평등사상, 그리고 유무상자사상 등을 표방함으로써 농민들로부터 크게 환영 받았다.
정부의 탄압으로 위축된 적도 있었으나, 제2대 교주 최시형은 여러 난관을 극복하면서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 등지에서 세력을 넓혀갔다. 부패한 양반들과 외세의 침탈을 증오하는 농민들이 동학에 다투어 가입하였기 때문이다.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는데, 이는 동학을 합법화하여 동학교도에게 집중되는 정부의 탄압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당시 각 고을의 수령과 몰지각한 아전들은 불법적인 동학을 믿는다며 교인들의 재산을 공공하게 빼앗았다.
1893년 3월의 충청도 보은집회에는 충청, 전라, 경상도 각지에서 약3만명의 교인과 농민들이 참가하였는데, 교조신원뿐 만 아니라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깃발을 내걸어 반외세를 표방하였다.
전남의 경우 함평, 영광, 나주, 무안, 순천, 광양, 장흥, 진도, 고흥, 강진 지역의 교도들이 대거 참여 하였다.
1984년 음력 1월에 고부에서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폭정에 시달려 전봉준을 중심으로 관아를 공격하는 농민항쟁을 시작으로 음력 3월25일에 전라도 각지에서 1만여 명이 백산에 집결하였다.
백산에 모인 농민군에 대하여 사람들은 ‘서면 백산(白山)이요 앉으면 죽산(竹山)“이라 표현하였으니, 죽창을 들고 참여한 농민들의 흰옷 때문에 서면 흰옷 때문에 백산이 되고 앉으면 죽창이 돋보여 죽산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1894년 음력 4월 초군, 농민군은 전라도 감영을 격파하고, 서남해안에 위치한 정읍, 흥덕, 고창, 무장을 거쳐 영광을 점령하였고 함평을 거쳐 장성 황룡에서 관군과의 치열한 전투에서 승리 하였다.
이 여세를 몰아 음력4월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위기감에 휩싸인 정부는 청나라에 군대파견을 요청하자, 한반도를 둘러싸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청나라와 일본이 즉각 군대를 파견 하였다.
외세의 개입을 우려한 농민군 지도부는 전라도 관찰사 김학진과 전주화약( 和約)을 체결하고서 자진 해산하였다.
농민군들은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집강소를 중심으로 폐정개혁을 추진하였다.
1894년 후반, 전봉준은 2차 봉기를 준비하고, 음력 10월부터 11월 중순까지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다.
전라도 장흥 농민군, 해남 농민군 등 전라도 전지역의 농민군들이 관군과 일본군 연합 부대에 의해 수백, 수천 명이 목숨을 잃어 나갔다.
특히 일본군은 농민군을 잔인하게 학살하였다.
이처럼 각 지역에서 폐정개혁을 추진하던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의 협공을 받아 처참하게 학살되었다.
이로써 1894년 봄에 불붙기 시작한 동학농민전쟁은 1895년 음력 1월경 종식되었다.
전라도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이 집강소를 설치하지 못한 곳이 나주였다.
전봉준은 단신으로 나주읍성으로 들어와 당시 나주목사 민종열과의 담판을 통해 집강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의 담판에 대해 금성정의록과 동학사의 기록이 서로 상반된다. 금성정의록은 관의 입장에서 동학을 기술하였고, 동학사는 농민군 입장에서 썼기 때문이다.
어떻든 나주성을 지켜낸 이유로 나주는 동학군 토벌의 총본산이 되었다.
일본군도 나주로 들어와 본영을 두었으며, 뒤이어 관군도 들어왔다.
일본군은 1895년 음력1월5일 나주성에 임시 본부를 설치하고 군수물자를 공급하였고, 동학군 토벌을 위한 병력을 지휘하였다.
토벌을 마친 일본군은 각지에서 체포된 동학군을 나주로 압송하여 무학당에서 대부분 학살하였다.
필자가 나주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들었던 바는 무학당에 토굴 감옥과 사형 집행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 사형 집행장이 지금의 나주 백년사 건물 뒤편 구석지고 낮은 지역이었다. 지금은 경지정리를 하여 그 당시 구석지고 움푹 파인 그 부분을 알 수 없도록 하였다.
사형집행이 끝나면 무학당 남쪽 편에 있었던 옛 공동묘지에 묻었다고 한다.그곳은 나주초등학교 남쪽 편 건너 야산으로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공동묘지가 있었으나 호남비료 나주공장이 들어와 공사를 하면서 공동묘지의 작은 산은 헐리고 평탄 작업하면서, 그 과정에서 무연고 묘 등으로 모두 이장처리 되어 오늘날은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초등학교 운동회 등 나주 초등학교 대규모 행사 때마다 비가 내렸던 것이 그 당시 억울하게 돌아가셨던 동학농민군의 원혼들이 아니면 천주교 박해 때 순교하신 원혼들이 비를 내리게 한다고 들었다.
얼마나 많은 동학 농민군이 무학당(武學堂)에서 억울하게 죽어 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 민족혼을 일깨운 그들의 억울한 원혼을 위로하는 제(祭)를 시 차원에서 시민의 이름으로 지내는 것이 일제 식민사관 탈피요, 역사 바로 세우기라고 본다.
제3절 나주 단발령 의거와 무학당
1894년경 동학농민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일본군은 조선 참략의 검은 이빨을 드러낸다.
동학군이 전주까지 점령해 버리자 이에 놀란 정부는 1894년 5월5일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자, 청국군이 아산만으로 상륙한다.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노리던 일본이 한양에 거주하는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5월6일 인천항에 군대를 상륙 시키고, 일본은 1885년 4월에 체결한 천진(天津)조약의 위반이라며 청에 항의를 한다.
천진(天津)조약은 조선의 갑신정변에 대해 청일 두 나라 군대가 조선에서 철수하고, 장래 출병 할 때는 서로 통고 한다는 약정이다.
1894년부터 1895년까지 2년에 걸쳐 청일 간에 해전과 육전을 하여 일본이 청국을 격파함으로서 전쟁은 일본 승리로 끝나자 1895년 3월3일 청나라 이홍장이 “조선에서의 청국의 종주권 파기” 강화조약에 조인한 것이다.
1904년에서 1905년에 걸친 노일 전쟁에서도 승리를 하자 일본의 조선 침략은 노골화 된 것이다. 이 두개의 전투에 승리하였으니, 조선정부에 대해 강압적 행사는 너무 쉬웠을 것이다.
강압에 의해 “한일 의정서”를 체결하여, 조선의 광대한 토지를 군용지로 점령하고, 통신망을 접수하고, 경부선, 경의선 부설권을 갖고, 연해 어업권을 갖고, 전국의 개간권까지 획득한 것이다. 이는 힘의 논리로 빼앗아 간 것이라 하겠으니 이미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화로 굳히기였다.
1895년 7월5일 김홍집(총리대신) 친일 내각이 들어서면서 친일파가 국정을 완전 장악하였다. 1895년 8월20일 민 황후가 시해되고, 1895년 11월17일 칙령으로 양력사용과 단발령을 선포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일제가 조선을 침략해오는 침략행위에서 추진되고 있지만 정부는 어떠한 조치도 하지 못하고 있어서 전국의 선비, 유림들의 항일 감정을 극도에 달한 것이다.
1896년 1월부터 2월 사이에 전국에서 민란이 일어나 관아를 습격하여 개화파 관리와 하수인을 죽이는 사건으로 25명 정도의 살상자가 나왔으며,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 동안은 무정부 상태였다.
1895년(고종32년) 윤5월1일 전국8도가 23개 관찰부로 개편되면서 나주 관찰부에는 채규상 관찰사, 안종수 참서관(부지사급)이 부임한다.
나주군수에는 민종열이 부임하였다.
8월20일 민 황후 시해의 사건도 정부가 이를 발표치도 못하고 있다가 10월15일에서야 국상(國喪)발표를 하게 된다. 그리고 고종은 겁에 질려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의 세월이 약1년간이다.
이때에 나주에서 항일 의거가 일어난 것이다.
1895년 11월 민종열 군수가 담양 군수로 전임되어 참서관 안종수가 군수 직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11월15일 단발령, 양력사용이 선포되자 공명심에서 먼저 자신이 상투를 자르고, 군청 관리들의 머리를 자르도록 하고, 길거리에서 보이는 사람마다 무조건 군도로 상투를 강제로 잘랐다.
이러한 안종수의 행위에 대해, 일제의 사주에 대해, 군민들은 울분을 금치 못하고, 일촉즉발의 반발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1896년 2월 27일 나주 향교 제일(祭日)에 장성의 기우만(奇宇萬)이 나주 선비들에게 통문을 전달하였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임진란 때 우리 국토를 더럽힌 일인들이 다시 들어와 국모를 시해하고, 삭발을 강요하며, 고종임금은 러시아 공관에 피신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이런 못된 짓을 자행하는 왜인들을 우리나라에서 쫓아내자는 것이다.
1896년 3월 17일 나주지역에서 의거에 동참하고자 하는 100여인이 연기(連記)서명한 통문(通文)을 장성 창의소(倡義所)에 보내졌다.
1896년 3월18일 동학군 진압에 공이 많았던 나주 관찰부 주사(主事) 정석진(鄭錫珍)이 해남군수로 승진 발령 되어, 나주 향교에 가서 유림들에게 의거가 너무 늦었으니 마땅히 다른 고을에 앞장서 의병을 일으켜야 한다고 격려하자 이에 동조 하였다.
1896년 3월 21일 참서관 안종수의 열 가지 죄상을 성토한 통문이 나주인에게 전달되었다.
1896년 3월 22일 정석진의 해남군수로 부임하는 환송이 있었으며, 영산포 나루까지 전송을 마친 김창곤과 정석진의 동료인 군교(軍校)들이 돌아와 곧바로 관찰부 정청에 들어가 안종수 등을 죽이고 단발에 앞장선 자들을 구타하는 등 사건이 발발하였다.
1896년 3월23일 나주에 창의소가 설치되고 의거를 체계적으로 추진하는 인적 구성도 하였다.
그러나 어찌 관군을 이기랴,
1896년 4월17일 전주의 진위대장 김병욱이 나주를 입성하자, 관군은 삼엄한 경비 하에 수색, 추적, 체포 하는 과정에서 주모자 김창곤과 그 외 연루자가 속속 검거되었으며, 나주 고을은 발칵 뒤집혀 전전긍긍 하였다. 그 배후에서 조종하였다는 이유로 해남군수로 갔던 정석진이 압송되었고 담양군수로 간 민종열도 잡아들였다.
이 사건의 계기가 정석진 군수가 사주한 것으로 되어 4월22일 사형이 집행되고, 사건을 주도했던 김창곤과 그의 장남 김종석까지 나주감영(무학당)에서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과거 일제하에서의 식민지사관으로 해석하면 항일 내지 반일 행동은 민란이었으나, 그로부터 어언 1백여 년이 지났고, 일제로부터 해방 된지 60여년이 지난 오늘 과연 우리는 그 때 그 사람들을 반역자로 보아야할 것인가 가슴에 손을 얹고 다시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다.
나주 무학당 위령탑을 세워 원혼들을 위로 하면서 역사 바로 세우기의 나침반으로 보고 미래의 국운을 개척해 나가야 할 것이다.
제4편 마무리의 글
지금까지 나주초등학교와 나주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지난 1백여 년의 역사의 짧은 역사이지만 너무 광범위하고 많은 이야기들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져 있어서 이를 체계적으로 써 내리기에는 한계점을 느낀다.
그렇다고 기록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최초의 기록을 바탕으로 새롭게 발굴되거나 수정되어야 할 부분이 발견되면 언제든지 다시 써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왜 구지 이미 흘러가 버린 과거의 역사가 책속이든 흙속이든 역사의 뒤안길이든 덮여진 것을 현재의 시점에서 중요시해야 하는가라는 문제점에서 반문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민족의 발전에 있어 그 과정에서는 반드시 ‘내성(內省)의 때’ 가 있다고 말했다. 깊은 번뇌와 정신적 자각, 그 속에서 자기들의 역사를 반성해야 한다고 했다. 그 반성이 깊어질 때 비로소 강한 신념이 생기고 발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천시하면 그것에 의해 처단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위대한 정치가나 지도자는 먼저 역사가가 되어야 한다. 보다 풍부하고 깊게 역사를 익혀 마음에 간직하면 먼 미래를 꿰뚫어 보는 눈이 생기기 때문이다. 바로 이 눈이 사관(史觀)인 것이다.
역사는 시간의 흐름 속에 존재하고, 매순간 과거란 시간 속에 묻혀버린다.
그러나 과거 속에 묻혀버렸다고 쓸모가 없는 것인가.
과거는 미래로 나아가는 방향을 찾는 나침반 역할을 한다. 과거가 없는 현재는 있을 수 없으며 또한 과거가 없는 미래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외친다.
과거와 현재를 연결(네트워킹)하면 미래의 방향이 보인다고........,
현재라는 시점에서 지금 이 땅에 살아 숨쉬는 우리가 어떤 역사의 교훈을 바탕으로 미래로 나아갈 것인가 깨우치는 것이 역사양심이요 사관이란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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