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溫達)은 역사적(歷史的) 인물이지만 또한 문학적(文學的) 인물이기도 하다. 고구려 평강왕(平岡王) 시대 대형(大兄) 벼슬을 한 장수(將帥)이었는가 하면, 김부식(金富軾)의 노련한 붓놀림으로 매우 드라마틱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는 우리 역사상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바보에서 장수까지 가장 극적(劇的)인 생애를 살다 간 온달(溫達)에게서 많은 사람의 애정과 관심이 끌리는 것은 당연하다.
김택영 金澤榮
김택영(金澤榮. 1850~1927)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인(文人)이다. 소년 시절부터 시장(市場)에서 이름을 떨쳤고, 17세에 성균초시(成均初試)에 합격하기도 하였으나, 개성(開城) 사람을 등용하지 않는다는 조정의 정책과 무반(武斑) 가계(家系)라는 신분상의 제약 때문에 급제하지는 못하였다.
그는 20대 초반에 서울에 와서 이건창(李建昌)과 교유하기 시작하면서 문명(文名)이 널리 알려직 시작하면서 황현(黃玹)과 더불어 신헌(申憲)의 아들인 신정희(申精喜)의 식객(食客) 노릇을 하며 지냈다. 1883년 김윤식(金允植)의 소개로 당시 서울에 와있던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인 장건(張騫)을 알게되었는데, 장건(張騫)은 김택영의 중국 망명(亡命)을 주선하게 된다.
나라가 기울자 '김택영'은 중극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그의 가슴에 품은 한(恨)과 울분(鬱憤)을 오늘날 우리는 쉽게 헤아리기 어렵다. 떠나기는 떠나되, 마지막으로 문장(文章)하는 자가 나라에 보탬이될 한 가지 일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역대 문장가 9명을 뽑고, 그들의 글 가운데 대표작을 가려 ' 여한구가문초(麗韓九家文抄) '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비록 나라가 기울었으되, 빛나는 문장으로 장식한 문명국가(文明國家)의 전통과 자존심을 잊지 말라는 비원(悲願), 우리는 그의 손길에서 짐작할 수 있다. 원고는 뒷날을 기약하며 제자인 왕성순(王性淳)에게 맡겼다.
김택영(金澤榮)이 뽑은 첫 번째 문장가가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지은 김부식(金富軾)이었다. 고려시대 문장가로서 첫손에 들어 손색이 없는 '김부식'이었다. 그의 문장 6편이 선택되었다.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전해오는 '진삼국사표(進三國史表)'와 '혜음사신창기(惠陰寺新創記)'를 제외하면, 나머지 4편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열전(列傳)에 실려있는 글이다. 그것은 김후직, 거칠부, 백결 선생 그리고 온달(溫達)의 전기(傳記)이었다.
이 가운데 '온달전(溫達傳)'은 김택영의 안목을 빛나게 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12세기 우리 문화이 척도이려니와, 온달전(溫達傳)은 '사기(史記)'가 자랑하는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전기(傳記)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천한 백성으로 태어나, 게다가 '바보' 소리나 듣는 떠꺼머리가, 아름다운 훈육을 받아 성장하는 과정과 기울어가는 나라의 기둥을 다시 세우려 죽기까지 각오하고, 끝내 비운(悲運)의 죽음을 맞이해서는 차마 시신(屍身)마저 안타까워 자리를 뜨지 않았다는 대목에서, 김부식(金富軾)의 마음과 김택영(金澤榮)의 마음은 온달(溫達) 속에서 포개지고 있다. 김부식(金富軾)이 있으므로 온달(溫達)이 있고, 김택영(金澤榮)이 있으므로 문장의 가치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역으로 말하면, 김택영이나 김부식 같은 이들이 온달(溫達)을 우리에게 새삼 전해 주었다.
고구려 제25대 평강왕(平岡王. 재위 559~590)은 평원왕(平原王) 또는 평국왕(平國王)이라고도 한다. 태어난 해는 알 수 없으나, 양원왕(陽原王)의 큰아들로 태어나 557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2년 후인 559년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고구려의 내우외환
평강왕(平岡王)은 고구려의 전통적인 외교 방식대로 중국의 진(晉), 수(隋), 북제(北齊), 후주(後周) 등 여러 나라와 수교(修交)하였다. 560년에는 북제(北齊)로부터 '사지절영동이교위요동군공고구려왕 (使持節領東夷校尉遼東郡公高句麗王) '의 지위를, 563년에는 진(晉)나라로부터 '영동장군(寧東將軍)'의 지위를 받았다.
한편, 장수왕(長壽王)이 평양의 북동쪽 대성산성으로 도읍을 옮긴 뒤, 지금의 평양이라고 말하는 장안성(長安城)에 대규모 축성(築城) 공사를 시작하였다. 공사는 양원왕때까지 계속되었으나, 그는 장수왕(長壽王)만한 지도력을 갖추지 못하였기에, 조정의 내분(內紛)과 민심이 혼란이 심각한 상태로 커져갔다.
왕위에 오르자 평강왕(平岡王)은 이같은 위기부터 극복하여야만 했다. 백성들의 재난을 구휼하기 위해 재위(在位) 기간 중 왕의 음식을 줄이고 백성을 위로하고 농상(農桑)을 장려하였다. 장안성(長安城)의 축성(築城) 또한 일시 중단하였다. 내분(內紛) 수습을 위한 노력이었다. 그러나 평강왕은 커져만 가는 귀족세력의 힘을 제압하기가 매우 버거웠다. 북주(北周)의 무제(武帝)가 요동(遼東)을 공격해 온 것이다.
평강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拜山)에서 싸웠고, 또 590년에는 수(脩)나라가 남조(南朝)의 진(晉)나라를 멸망시켰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이에 경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중국의 통일은고구려에 정치적, 군사적 부담을 바로 안겨 주었다.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586년, 거란별부(契丹別府) 출복(出伏) 등이 이탈하여 수(脩)나라에 투항하였다. 이들은 본디 고구려 세력권 안에 있었다. 돌궐(突厥)과의 관계도 겉으로는 커다란 충돌이 없었으나, 두 세력 사이의 긴장상태는 계속되었다. 이런 위기감은 남쪽으로도 마찬가지이었다. 한강 유역의 점령을 둘러싸고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결렬되면서 백제와 신라 사이에 전쟁이 자주 일어났다. 고구려는 일단 관망의 자세를 취하였지만, 언제 불똥이 고구려 쪽으로 튈지 몰랐다. 온달(溫達)은 이러한 시대에 살았다.
삼국사기 '온달전' 三國史記 '溫達傳'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金富軾)은 고려시대 최고의 문장가이다. 대문장가로서의 면모를 삼국사기 '열전(列傳)'에서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그 중 '온달전(溫達傳)'은 문장의 백미이다. 한말의 문장가 김택영(金澤榮)은 박지원의 '야출고북구기(夜出古北口記)'와 함께 '온달전(溫達傳)'을 조선 5000년 이래 최고의 명문이라고 칭송하였다. 삼국시대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일까 ? '온달전'은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여기에 답한다.
삼국사기는 주로 국가의 역사(歷史)를 기록한다. 즉 통치자의 역사를 기록한다. 그렇지만 '삼국사기'는 '열전(列傳)'을 통해 이러한 한계를 넘어선다. '열전'은 '본기(本記)'에서 담지 못한 삼국시대의 다양한 삶의 결들을 잡아내고 있다. 정사(正史)가 담지 못한 삶의 이야기를 '열전'에서 풀어내어 역사 너머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해준다.
온달의 생애는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 열전의 '온달전(溫達傳)'을 통해 매우자세하게 전해 온다. 실로 이후 온달(溫達)을 언급하는 거의 모든 기록은 이 전기(傳記)' 모습을 묘사하였다. 온달전은 삼국사기 권45 열전5에 수록되어 있다. 열전(列傳)은 역사상 특기할 만한 개인의 행적을 후대(後代)에 전하여 교훈으로 삼고자 하는 의도에서 쓰여진 것으로, 열전에 따라서는 역사적 사실에다 허구적(虛構的) 요소를 가미시켜 재미와 흥미를 주는 내용으로 각색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온달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온달(溫達)은 고구려 평원왕(平愿王) 때의 사람이다. 용모가 못생겨 우스꽝스렀으나 마음은 순수하였다. 집이 매우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떨어진 옷과 해진 신으로 거리를 왕래하니, 그 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 바보 온달 ... 愚溫達 '이라고 하였다. 평원왕(平愿王)의 어린 딸이 울기를 잘하거늘, 왕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 네가 늘 울어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는 반드시 사대부의 아내는 되지 못할 것이고, 마땅히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보내갰다 '고 하였다.
매번 그렇게 말하다가, 공주(公主)가 16세가 됨에 임금님이 자기 딸의 시집을 '상부 고씨(上部 高氏)'에게 보내려 하자, 공주는 맞서 말하기를 ' 대왕께서는 늘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될 것이다 ..고 하셨는데, 지금 어찌 예전의 말씀을 고치십니까 ? 필부도 오히려 식언(食言)을 하지 않거늘 하물며 지존(至尊)이겠습니까 ?'고 하니 그러므로 왕은 ' 왕은 우스개 희롱의 말을 하지 않는다 '고 하였습니다. 지금 대왕의 명령은 잘못되었으니 저는 감히 받아들이지 못하겠습니다 '고 하니 왕은 노해서 말하기를 ' 네가 내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니 진실로 내 딸이 될 수 없다. 어찌 함께 살 수 있으리오? 마땅히 네가 가고 싶은 데로 가거라 '고 하였다.
이에 공주(公主)는 값진 가락지 수십 개를 팔꿈치 뒤에 매달고 궁궐을 나와 홀로 가다가,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온달(溫達)의 집을 물어서 마침내 그 집에 이르렀다. 눈 먼 늙은 어머니를 보고 그 앞에 가까이 가서 절하고, 그 아들 있는 곳을 물으니, 노모(老母)는 대답하기를 ' 내 아들은 가난하고도 누추하여 귀인(貴人)이 가까이 할 바가 못됩니다. 지금 당신의 체취를 맡으니 향기롭기가 보통 사람과 다르고, 당신의 손을 만져보니 부드럽기가 솜과 같으니 반드시 천하의 귀인일텐데, 누구의 속임으로 이곳에 왔습니까 ? 내 아들은 굶주림을 참지 못해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 산림으로 갔는데, 오래 되었는데도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고 말했다.
공주는 나가서 산밑에 이르러,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짊어지고 오는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에 품었던 생각을 말하였다. 온달이 얼굴빛을 변하면서 말하기를, ' 이곳은 어린이와 여자가 다니는 곳이 아니니 그대는 틀림없이 사람이 아니라 여우귀신이다. 내게 가까이 오지 말라 ' 하고는 그대로 가버리면서 돌아보지도 않았다. 공주는홀로 돌아와 사립문 밖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 모자에게 자세히 말하였다.
온달은 우물쭈물하면서 결정을 못하였다. 그의 어머니가 말하기를 ' 내 아들은 지극히 누추하여 귀인의 배필이 될 수 없으며, 내 집은 지극히 가난하여 진실로 귀인이 살기에는 마땅하지 않습니다 '고 하니, 공주가 대답하기를 ' 옛 사람 말에 한 말의 곡식도 오히려 찧어서 나누어 먹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오히려 옷을 입을 수 있다 고 하엿으니, 진실로 마음만 같이 한다면 하필 부귀를 누린 후라야만 함께 살 수 있겠습니까 ? 고 하였다.
이에 금가락지를 팔아서 밭, 집, 종, 소, 말, 그릇 등을 사들여 소용되는 재물을 완전히 갖추었다. 처음에 말을 살 적에 공주는 온달에게 말하기를 ' 조심해서 시정의 장사꾼의 말은 사지 말고, 국마(國馬)로써 병들고 여위어서 내버려진 것을 가려 사서 후에 바꾸도록 하세요 ' 하니 온달은 그 말대로 하였다. 공주가 매우 정성들여 길렀더니 말은 날로 살찌고 또 씩씩해졌다.
고구려는 항상 봄 3월3일에 낙랑(樂浪)의 언덕에 모여 사냥하여, 집은 멧돼지와 사슴으로써 하늘과 산천의 신에 제사지냈는데, 그 날이 되어 왕이 나아가 사냥하니, 여러 신하와 다섯 부(部)의 군사가 모두 따랐다. 이에 온달이 기른 말을 타고 따라가서 달리니 항상 남보다 앞서 달리고 잡은 것도 또한 많으니 온달만한 이가 없었다. 왕이 불러서 성명을 묻고는 놀라며 이상히 여겼다. 이때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내어 요동으로 쳐들어왔으므로,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이산(肄山)의 들에서 싸웠다.
온달이 선봉이 되어 날래게 싸워 수십여 명을 목 베어 죽이니 모든 군사들이 승승분투하여 크게 이겼다. 공(功)을 논함에 모두 온달을 제일로 내세웠다. 왕은 가상히 여기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 정말 내 사위로다 '고 하며 예를 갖추어 그를 맞아들이고 벼슬을 주어 대형(大兄)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총애하는 광영이 더욱 두터워져 위엄과 권세가 날로 더해졌다.
영양왕(瓔陽王)이 즉위하자 온달은 임금님께 아뢰기를 ' 신라가 우리 한북의 땅을 빼앗아 자기네 군현으로 만들었음에, 백성들은 통분하며 아직까지도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원컨데, 대왕께서 신을 어리석고 불초하다고 여기지 마시고 군사를 주신다면 한번 나아가반드시 우리의 땅을 회복하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왕이 허락하자 온달은 떠나면서 맹세하기를 ' 계립정과 죽령 서쪽을 우리 땅으로 회복하지 못한다면 돌아오지 않겠다 ' 하고 떠났다. 드디어 나아가 신라 군사와 아차성 밑에서 싸우다가 흘러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길에서 죽었다. 장사를 지내려 하니 널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널을 어루만지면서 ' 이제 죽고 사는 것이 결정났습니다. 아하 ! 이제는 편히 돌아가십시요 '하니 드디어 관(棺)이 들려서 장사지냈다. 대왕이 듣고 매우 슬퍼하였다.
온달의 이름이 역사서에 공식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두 번의 싸움에서이다. 첫째는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요동(遼東)으로 쳐들어왔을 때이고, 둘째는 고구려군(高句麗軍)이 신라군(新羅軍)을 치러 갔을 때이다. 온달은 평강왕(平岡王)이 직접 나선 전쟁의 선봉장으로 나섰으며, 신라와의 싸움에서는 자진해서 나갔다.
온달의 발탁
그렇다면 온달은 어떻게 발탁되었는가 ? 고구려에서는 언제나 봄 3월3일을 맞아 하늘과 산천(山川)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 낙랑(洛浪) 언덕에 모여, 사냥하여 잡은 돼지와 사슴을 바쳤다. 그날이되자 왕은 사냥을 나갔다. 여러 신하와 5부의 군사들이 모두 수행하였다. 온달도 자기가 기르던말을 타고 따라갔다. 그는 항상 앞장서서 달리고, 또한 잡은 짐승도 많아서 남들이 그를 따르지 못했다. 왕이 불러서 성명을 물었다. 온달이었다. 울보 공주가 궁을 나가 함께 살고 있다는 그였다. 왕은 놀랍고 기이하게 여기며 온달을 발탁하였다.
온달의 죽음
대형(大兄)이라는 벼슬로 발탁된 온달에게 활약할 기회는 곧 다가왔다.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遼東)을 공격한 바로 그 싸움이었다. 평강왕(평강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拜山)에서 맞아 싸웠다. 온달은 선봉장이 되어 용감하게 싸워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이 기세를 타고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온달이 활약한 첫 싸움이었다.
공적을 논의할 때 온달(溫達)을 제일이라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왕이 그를 가상히 여기어 감탄하기를, ' 이 사람은 나의 사위이다 '라 하고 예를 갖추어 영접하고 벼슬을 주어 대형(大兄)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그에 대한 왕의 은총이 더욱 두터워졌으며, 위풍과 권세가 날로 성하여졌다. 평원왕 19년인 578년 11월의 일이다.
590년 평강왕(平岡王)이 죽고 영양왕(瓔陽王)이 즉위하였다. 온달은 왕에게 아뢰었다. 역사서에 적힌 그의 두번 째 활약상이 여기서 펼쳐진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최후(最後)를 알리는 슬픈 사건이기도 하였다. 신라가 한강(漢江) 북쪽 지역을 차지하여 그들의 군현(郡縣)으로 만들자, 군사를 준다면 제 땅을 도로 찾겠다고 다짐하였다.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그의 맹세는 계립현(鷄砬縣)과 죽령(竹嶺) 서쪽을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단성(阿旦城) 지금의 아차산(阿且山) 밑이 온달에게는 마지막 자리였다. 거기서 온달은 날아오는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전사(戰死)하였다. 온달의 영구(靈柩)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공주(公主)가 달려와 관(棺)을 어루 만지며 말했다. ' 삶과 죽음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 돌아가소서 " 그때에야 영구(靈柩)가 움직여 하관(下棺)하였다. 아름답고 비통한 장면이다.
온달산성 溫達山城
온달산성(溫達山城)은 영토 확장 경쟁이 치열했던 삼국시대에 한강(漢江)을 차지하기 위해 고구려(高句麗)와 신라(新羅)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이와 관련하여 고구려 평원왕(平愿王)의 사위 온달장군의 무용담과 평강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충청북도 단양군의 영춘면 하리 남한강변의 성산(城山. 427m)에 축성된 반월형(半月形) 석성(石城)으로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의 '영춘(永春)'에 ' 성산(城山)현 남쪽 3리에 있는데 진산(眞山)이다. 아래에 석굴이 있어 높이가 11척 남짓이고, 넓이가 10여 척 쯤 된다 '는 기록에서 온달산성과 온달동굴에 관한 위치가 확인되고 있다.
성산고성 城山古城
또 '성산고성(城山古城)은 석축 둘레가 1,523 척이고 높이가 11 척이며 우물이 하나 있다 '고 기록하고 있어, 오래된 고성(古城)이 있음을 알려 준다. '성산고성'이 지금의 온달산성이다. '여지도서(與지圖書)'에서는 ' 고성(古城)의 석축 둘레가 1,523 척이고 높이가 11척이며 안에는 우물이 하나 있다. 고구려 을아조에 온달(溫達)이 쌓았다 '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부터 '온달산성'이라는 지명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온달설화(溫達說話)는 평민의 신분으로 공주(公主)를 아내로 맞이하여 부마(駙馬)에 오르고 무장(무장)으로 이름을 떨친 온달장군의 인물설화이며 역사상 실존 인물을 다루었기 때문에 역사설화(歷史說話)라고도 할 수 있다. 영웅(英雄) 전설의 일반적인 구조처럼 온달의 죽음으로써 이야기의 결말을 맺는다.
바보온달로 구전(口傳)되는 인물전설은 강화도 일대와 중부지방에서 주로 전승되고 있으며, 갈등 구조 상 동일 유형으로 파악되는 쫓겨난 딸과 숯구이 총각에 얽힌 민담(民談)은 전국적인 분포를 이루고 있다. 주제는 부녀간의 갈등을 통해서 부권(夫權) 중심의 전통적인 도덕률을 비판하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여성의 주체의식이라 할 수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은 여성 자체에 의하여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남편의 성취와 아버지의 인정에 의한 것이므로, 일정한 한계를 지니기도 한다. '삼국사기' 열전의 온달조(溫達條)는 민간전승을 통해서 형성된 설화가 편찬자에 의하여 다듬어진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구전되는 '바보온달 전설'은 문헌에서 전하는 것과 거의 같으나, 공주(公主)가 온달에게 글과 무예(武藝)를 가르쳤다는 내용이 강조되어 나타난다. 삼국사기 '온달전'의 줄거리도 이와 같으나 문학적 형상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열전에서보다 민중의식이 한층 두드러졌다.
온달의 전설이 깃든 곳
온달장군과 아차산성
아차산성(아且山城)의 전체 길이는 1,125m이며, 성벽의 높이는 평균 10m 정도이다. 동, 서, 남쪽에 문(門)이 있던 흔적과 물길이 남아 있고, 문 앞을 가려 보호하는 곡성(曲城)이 남아 있다. 그밖에 여러 건물터가 남아있는데, 많은 토기(토器)와 기와조각이 수습되었다. 아차산성에는 두 가지 슬픈 역사가 전해 온다.
하나는 백제의 수도(首都) 한산(漢山)이 고구려에 함락되었을 때 개로왕(蓋鹵王)이 성 아래에서 죽임을 당하였으며, 다른 하나는 고구려 평원왕(平愿王)의 사위인 온달장군이 죽령(竹嶺) 이북의 잃어버린 땅을 찾기 위하여 신라군과 싸우다가 이 아차산성 아래에서 죽었다는 것으로, 이러한 전설을 간직한 '온달샘'이 성 안에 있다.
서울특별시 광진구에 위치한 높이 287m의 '아차산'은 흔히 '바보 온달'이라고 부르는 온달장군이 신라군(新羅軍) 화살에 맞아 생을 마감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아차산은 '아차(阿且)'와 '아단(阿旦)'의 두 이름으로 불리다가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왕이 된 후 이름을 단(旦)으로 바꾸자, 임금과 같은 이름을 피하려는 의도에서 비슷한 글자인 '차(且)'만 쓰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고려시대 문서인 삼국사기에 이미 아단성과 아차산이 혼용되고 있으므로 맞지는 않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처음으로 아차성(峨嵯城)이라는 명칭이 보이므로 '아단성'에서 '아차성'으로 그리고 다시 아차성(峨嵯城)으로 바뀌었다는 견해가 있기도 하고, 또는 아차사니라는 명칭 자체가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아차산(阿且山)의 풍수나 조망을 떠나 아차산이 역사적 가치를 발하는 이유는 남한에서는 보기 힘든 고구려(高句麗) 유적의 보고(寶庫)이기 때문이다. 아차산은 장수왕(長壽王)의 남진정책(南進政策)의 위세를 보여주는 곳이자, 나제연합군(羅濟聯合軍)에 의해 무너진 고구려(高句麗)의 말로(末路)를 보여주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