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40대 애장왕 때에 건립된 동방사내에 석탑으로 탑의 양식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경상북도 지방 문화재 제60호로 지정되었다.
성주읍 예산동(속칭 신풍리의 압숙골)에 위치하고 성주에서 왜관도로 1,000m 지점에 있어 유서 깊은 인상을 주고 있는데 당초는 9층 석탑이었으나 현재는 7층만 남아 있다.
오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옥개석이 훼손되고, 주위가 농토화됨으로써 지반이 물러져 5도 정도 탑이 기울어져 있는데 기단부는 매몰되었으나 균형 잡힌 탑신의 규모가 크고 남쪽으로 향하여 있다. 2층 탑신까지는 양측 우주와 중앙부 탱주가 있으며 삼층 탑신부터는 우주만 있고, 1층 2층 3층 옥개석 4귀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색이다. 단단한 화강암으로 전체를 축조한 것이 동방사의 유물로 전해지고 있으며 불교 전성 시기인 통일 신라 후기에 행정 도심지에다 대가람을 건립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는 불심을 고취하여 국태민안의 기원 전당으로 한 것이다.
이 탑은 이천(伊川)에서 불과 5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1920년의 경신년 대홍수에 흐름이 바뀌어 탑과 냇바닥과는 1km의 거리로 멀어져 동방사 절터는 논, 밭이 되고 300m 떨어진 서쪽과 1,000m 떨어진 삼산동 뒷산에는 작은 암자 터가 남아 있으며 이 동방사는 신라 40대 애장왕 때에 세워진 것으로 절 주위가 수십 리에 이르고 기거하는 승려가 수백 명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임진란 때에 절은 전소되어 없어지고 탑만 남았으며, 지기탑(地氣塔)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 성주 향교(鄕校)
성주읍 예산동 교촌(校村)마을 동쪽 산 밑에 자리잡고 있으며, 1397년(태조 6년), 서울에 성균관(成均館), 지방에 향교를 세울 때에 성주향교도 세워졌다.
대성전(大成殿), 동 서무, 명륜당(明倫堂), 입덕문(入德門), 수복사(守僕舍), 고사(庫舍) 등 건물이 있고, 만화루(萬化樓), 양사재(養士齋)는 임진왜란에 타버리고, 동 서재(東 西齋)는 6 25때 타버렸다.
대성전에는 처음 중국 곡부(曲阜)에서 전해진 공자(孔子)의 화상과 그 밖에 중국의 4성(聖), 10철(哲), 송나라의 6현(賢)의 위패를 모셨으나 목사 강 중진(康仲珍)이 공자의 화상을 나중에 위패로 바꾸었고, 동 서무에는 우리 나라의 18현(賢)의 위패를 모신 것으로 위패가 오래 되어 낡아서 1980년 모두 갈고 새로 썼으며, 명륜당은 유생들의 강학(講學)하는 곳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의 건물인데 좌우 1칸씩의 협실(夾室)이 있고 이 방 위 천정에는 서고(書庫)가 있다. 명륜당의 가운데 대청 마루 벽에는 허 종항(許從恒), 김 안국(金安國)의 시가 걸려 있고, 또 김 종직(金宗直)의 부자묘부(夫子廟賦)가 걸려 있다. 동 서재는 지금은 없지만 유생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동재는 양반집 아들이, 서재는 민간집 아들네들이 기숙하였으며 뜰 가운데에 명륜정(明倫井)이란 샘이 맑은 물을 담고 있다.
입덕문을 오르는 계단은 화강암 대석으로 층계를 만들었으며, 그 옆에 홰나무 노목이 한 그루 서 있다.
향교는 지방의 중요한 교육기관으로서 혹은 향학(鄕學)이라고도 하였는데, 그 제사를 봄에는 3월, 가을에는 10월의 정자(丁字)가 드는 날에 전국적으로 지냈으며, 이를 석전(釋奠) 또는 석채(釋菜)라고 하였다.
향교는 대지 1393평의 넓은 터에 자리잡고 성주고을을 내려다 보며, 현재 그 소임으로는 전교(典校) 한 사람과 장의(掌議) 몇 사람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지정 문화재 이외 문화재 건조물 제47호로 지정되어 있다.
1.입지환경과 배치
성주향교는 시가지의 북측 언덕위에 자리하고 시내를 굽어보고 있으며 멀리 우측으로 가야산을, 좌측으로는 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건물의 배치는 명륜당과 대성전이 담장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배치된 좌묘우학의 배치형태를 띠고 있다. 높은 계단을 올라 입덕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양사제가 있고 문 정면에 넓은 마당을 건너서 명륜당이 서 있다. 당의 우측일랑은 약간 높은 담장을 두르고 대성전과 동。서무를 배치시켰다. 대성전 전면에는 재삼문과 외문을 설치하여 내통케 했다. 명륜당 좌측담밖에 A자형의 숙사가 있다. 옛날에는 만화루,동。서무,가 담 내에 있었고 양현청, 양몽제가 담 밖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만화루는 임란때, 명륜당 앞 좌우에 가 3칸으로 되어 있던 동。서재는 6.25때 소실되었다.
2. 건축구조 및 의장
대성전 :
장대석을 3단으로 쌓아 기단을 축조하여 둥글게 다듬은 운두가 높은 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워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맞배지붕의 건물을 세웠다. 기단 전면 양측에 2군데의 장대석 계단을 놓아 기단에 오르게 했으며, 전내는 우물마루를 깔아 놓았다. 전면 3칸 모두에 문을 달아 놓았는데 모두 쌍여닫이 울거미 널문으로 하여 어간은 중앙에, 양협간은 안쪽 기둥에 붙여 문얼굴을 내었다. 또한 양 측면의 중앙칸에는 겨자살의 광장을2개 진접시키고 널덧문을 달아 놓은 것이 공포의 구성은 평방위에 주두를 올려 내외 이출목의 공포를 장엄하게 하였는데, 향교건물을 다포로 한 것은 경북에서는 성주와 대구향교 뿐이며 이외에 서울의 문묘와 익산향교에서 볼 수 있어 전국적으로 드문 양식이다.
구조의 구성은 2고주 5량으로 하여 건물을 높게 하였는데, 외부와는 달리 매우 소박한 구조를 취하였다.대공과 중대공의 키를 높게 하여 건물고를 높이고, 다포계로는 특이하게 반자를 구성하지 않고 연등천정을 함으로써 시원스러 공간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명륜당 :
정면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맛배지붕의 건물이다. 막돌쌓기한 기단위에 커다란 자연석 초석을 놓았는데 전면에만 원주를 세웠다. 평면구성은 정면 5칸 중 중앙 3칸의 전면이 개방된 대청이고, 양측간은 각각 앞쪽의 1칸 툇마루 뒤에 2통간 온돌방이 배치되어 있다. 가구의 구성수법은 대성전과 거의 같다. 방의 천정 위에는 고미다락이 설치되어 있으며 대청쪽과 퇴마루쪽에서 출입하도록 자귀로 다듬은 판문이 달려있다. 타향교에 비해 큰 규모에 속하는 건물로 조선 중기양식으로 보이는 요소들이 많이 남아 있다.
동。서무 :
정면 3칸, 측면1칸 규모의 건물로 막돌쌓기한 낮은 기단위에 원주를 세워 초익공 3량가로 하였으며 살미의 형상은 끝을 날카롭게 하였다. 3칸 모두에 쌍여닫이 문을 달아 놓고 측면엔 광창을 설치하였다. 홑처마 맞배지중으로 하고 양 막공부에는 풍판을 달지 않았다.
양사제 :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하여 2칸 온돌방을 만들고 방 앞에는 반칸 규모의 툇마루를 달아 내었다. 3량의 홑처마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 한개 민속마을
1.마을의 연혁
성산 이씨의 동족부락인 한개마을은 행정구역상으로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 1동으로서현재 66가구가 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는 마을이다.
마을앞에 백천과 윤천이 합류하는 큰 내가 흐른다하여 마을 이름을 "한개"라 하였다 한다. 현재의 성산이씨 선조가 이 마을에 정착했던 시기를 문헌자료에 의해 파악하면 세종때(1445년경)부터 시작 된다고 한다.
또한 마을의 건축물의 건립연대에 의해 역사를 추정하면 약 230년으로 줄어들게 된다. 현재에는 초기 정착때에 지어진 건축물은 볼 수 없으며 18세기 중반에 지어진 건물이 최고의 건물이다.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주택은 1760년대(조선 영조)에 지어져 그후 중수되었다고 가전되는 교리댁이다. 한개마을의 앞으로는 낙동강의 지류인 백내(백천)가 흐르고 그 주변의로 전답이 쳐져 있으며 뒤쪽 배산은 해발 332m인 영축산이다. 이 산이 펼치는 지세는 좌청룡 우백호를 완연하게 이룩하고 있어 이 마을이 풍수상 길지임을 추측할 수 있게 한다. 마을의 동쪽을 둘러싼 산은 청룡등이라 부르며 서쪽을 둘러싼 능선은 백호등이라고 부르는데, 청룡등에는 성주에서 대구나루터로 가는 옛길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며 지금은 이용되지 않고 길 도중에 돌무더기가 남아 있다. 한개마을은 주성을 성산이씨로 하는 동족부락이다. 이 마을에서 성산이씨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어서 타성의 경우는 노비이거나 머슴 . 마름등 사역인으로서 한결 낮은 지위의 사람들 뿐이었다고 한다.
2. 주택배치의 특징
한개마을에 성사이씨 15세 목사공 이우가 정착한 시기는 15세기 중엽 이었지만, 현거주 이씨들은 거의다 21세 월봉 이정현(1587~1612)의 자손들이며, 지금 남아 있는 건물들은 월봉의 생시보다 더 후인 1760 년대부터 건립된 것들이다. 같은 뿌리에서 출발한 양반의 가문이지만그 내부에는 경제력의 차이가 곧바로 주택의 규모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어 여러규모의 주택들이 건립되었다. 전통적 유교사회에서의 장자우대라는 상속의 원칙이 지켜졌지만 월봉이후 지금의 33세까지 12대를 내려오면서 재산축적은 직손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몇개의 파종가가 성립되고 그들이 마을의 상부 중앙의 요지를 차지하여 양가다운 대규모의 주택들을 갖게 된다. 이씨의 29, 30세경(서기 1800~1900년)에 대략 지금과 같이 마을 중앙의 대가들이 형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은 한개 이씨의 각 파별로 소종가의 역할을 하며주택내에 종묘를 가지고 있다.
한개마을의 주택배치유형은 대략 5가지로 분류할 수 있으며 여기에 재택건축과 특수형을 넣는다면 7종으로 정리할 수 있다.
*** 세종대왕의 왕자 태실
세종대왕의 문종(文宗)을 제외한 여러 왕자와 세손(世孫)인 단종(端宗)의 태를 안장(安藏)한 곳이다.
영의정 이 직(李稷)의 손자요, 장경(長庚)의 후손이며, 태종의 9녀 숙혜옹주(淑惠翁主)와 결혼하여 부마로 성원위(星原尉)가 된 이 정녕(李正寧)이 당시 풍수학제조(風水學提調)가 되었는데, 왕자의 태실을 두기 위하여 장경의 무덤을 딴 곳으로 이장(移葬)해야 된다는 조정의 결정을 조상의 명당을 안 빼앗기려고 무시한 죄로 파면되기도 했다.
1438년(세종 20년)에서 1442년(세종 24년)까지 뒷날 세조(世祖)가 된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비롯한 세종의 적서(嫡庶) 18왕자와 단종 등 20여기의 태실이 당초에는 있었으나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그 왕위를 빼앗고 대신 왕위에 오르니 이에 반대하여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은 수양의 동복 동생 금성대군(錦城大君)과, 배 다른 동생 한남군(漢南君), 영풍군(永豊君), 그 사건에 무고로 연좌(連坐)된 화의군(和義君) 및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죽은 동복 동생 안평대군(安平大君)의 태와 장태비는 1457년(세조 3년)에 태봉 아래로 파내어 쓰러뜨려서 13기만 남게 되었다.
1975년 지방 유형문화재 제 88호로 지정됨에 따라 정부에서 보수할 때에 태봉 밑에 넘어져 있는 기단석(基壇石)을 찾아 원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세조가 등극한 뒤 예조판서 홍 윤성(洪允成)이 세조의 태를 이곳에 묻었다는 글을 지어 비를 세조의 태비 앞에다 세웠으나 세조가 무도하게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것을 미워한 백성들이 그 비에 오물을 퍼붓기도 하고 비신을 갈아 글자가 안 보이게 하는 등 훼손으로 인하여 지금은 홍 윤성이 글을 지은 커다란 비는 반들하고 매끄럽게 되어 글자 1자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화강암으로 깎은 13기의 태실은 조선태실 의궤(儀軌)형식으로 지하(地下)에 석실을 만들고 그 속에 백자(白磁)로 된 태호(胎壺)가 들어 있고, 그 위에 기단석과 신석(身石), 옥개(屋蓋) 등으로 되어 있다. 태실의 옥개 높이는 25cm, 지름 1.6m, 둘레 3.2m, 신석은 높이 60cm, 지름 1.2m 둘레 2.4m, 대의 높이 45cm, 지름 2.2m, 둘레 8.8m, 태비의 높이는 90cm, 너비는 35cm인데 여기서 출토(出土)된 토기의 태호로 분청인화문(粉靑印花紋)의 대접과 분청상감연화문의 뚜껑 1불, 명기(銘記)가 있는 지석(誌石) 2점이 경북대학교 박물관에 소장 되어 있으며, 그 외에는 1929년 왕가로 모두 옮겨 간 것으로 전하여 오고 있다.
이 밖에도 성주군내에 용암면 대봉동 조실산의 태봉은 태종의 태를 안치한 관계로 근세조선 태종 때에 경산부(京山府)를 성주목(星州牧)으로 승격시켰는데 1929년 태종의 태를 왕가로 이봉(移奉)했으며, 가천면 법전동의 법림사의 진산에도 왕실의 태를 안치한 탓으로 법림사를 헐었다고 하는데 산 아래에 아직도 태석이 굴러 넘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태는 벌써 왕가로 옮겨 갔다고 한다.
*** 선석사(禪石寺)
월항면 인촌동의 서진산(棲鎭山 : 禪石山) 기슭에 있으며 세조의 왕자 태실이 있는 태봉에서 약 200m 떨어져 있다.
이 절은 처음 신광사(神光寺)라 하여 신라 때에 유명한 의상대사(義湘大師)가 692년(효소왕 1년), 전국에 10개의 절을 지을 때에 신광사(神光寺)라 이름하여 지은 절로 그 때는 지금의 자리가 아닌 서쪽편에 자리잡았다. 고려 말엽 나옹대사(懶翁大師 : 惠勤)가 1361년(고려 공민왕 10년)에 신광사의 주지가 되어 절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나옹대사가 새로 절터를 잡고 터를 닦는데 큰 바위가 나와서 지금도 바위는 선석사 대웅전 앞뜰에 묻힌 채 그 머리 부분만 땅 위로 내밀고 있다.
터를 닦다가 바위가 나왔다 하여 '터닦을선(禪)'자를 넣어 절 이름을 선석사(禪石寺)라 고쳤다. 임진왜란 때에 절이 전소(全燒)되어 1684년(숙종 10년), 은현, 혜묵, 나헌 등 대사들이 다시 세웠는데, 1725년(영조 1년) 서쪽의 옛터로 옮겼다가 1804년(순조 4년) 동파서윤(桐坡瑞允)대사가 여러 신도들의 도움을 얻어 지금의 자릴 이건하여서 대웅전(大雄殿), 명부전(冥府殿), 칠성각(七星閣), 산왕각(山王閣), 어필각(御筆閣), 정법료(正法寮) 등 건물이 있다.
이 절은 세종의 왕자 태실을 수호하는 절로 영조(英祖)의 어필이 하사되어 이를 보관하는 곳이 어필각인데 어필각 주위에는 대숲이 있어 전하는 말에 여기서 나는 쌍곡죽(雙谷竹)은 바람이 불면 때때로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 그래서 이 대나무를 잘라 피리를 만들었더니 그 소리가 맑고 깨끗하여 다른 피리소리에 비길 바가 아니었는데 이 피리를 옛날 교방적(敎坊笛)이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이 쌍곡죽이 나던 대숲은 대가 말라 죽고 없으며, 어필각도 그 뒤 화재를 입어 없어지고 영조 어필 병풍은 정법료에 보간되어 있으나 어필각 화재로 미루어 볼 때 그 진가(眞價)가 의심스럽다. 대웅전은 정면 3칸의 맞배지붕의 다포집이다.
*** 회연서원(檜淵書院)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신정리에 있는 서원이다.
1622년(광해군 14)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구(鄭逑)와 이윤우(李潤雨)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 . 위패를 모셨다. 1690년(숙종 16)에 '회연(檜淵)'이라 사액을 받아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1974년에 정부의 보조와 지방유림의 협력으로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6칸의 강당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신문(神門), 외문(外門) 4칸의 숙야재(夙夜齋), 고사(庫舍), 별사(別祠), 비각, 신도비등이 있다. 사우에는 정구와 이윤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토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동재 . 서재는 수학하는유생들이 거처하는 곳이며, 신도비의 비문은 신흠(申欽)이 지은 것으로 정구의 학문 . 덕행 . 공적을 찬양한 글이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2월 중정(中丁:두번째 丁日)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제품은 4변 4두(豆)이다. 유물로는 용두장(龍頭仗)과 가죽신 . 창의 등 여러 점이 보관되어 있으며, 소장전적은 목판본과 <심경발휘(心經發揮)>외에 수십권이 보관되어 있다. 재산으로는 전답 4.600평, 임야 9.000평, 대지 1.500평 등이 있다.
*** 탑안마을에 복원된 보월동 3층 석탑
수륜면 보월동(修倫面甫月洞) 탑안마을(塔洞 또는 절골)에 있다.
이 탑이 서 있는 절의 이름도 전하여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몽고 침입 때가 아니면 임진왜란 때에 절이 타서 없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탑도 농지 가운데에 그 원형주초석(圓形柱礎石), 석등(石燈)의 연화대석, 장대석 등이 흩어져 있고, 틈이 벌어지고 모서리가 깨진 석탑의 기단부분만이 본 자리에 그 모양을 들어내 놓고, 그 밖의 부분품은 주위 전답 속에 묻혀 있었다. 특히 3층 옥개석은 탑에서 50m 정도 떨어진 도로가에 놓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인위적으로 탑재를 운반해 가려는 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79년, 이 탑은 지반석(地盤石) 위에 상 하의 2층 기단을 그 위에 다시 3층 석탑을 올린 구조로 복원하였다. 상 하 기단의 면석(面石)의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 2개씩을 모각(模刻)하여 3구(區)로 구분하고, 하기단 갑석(下基壇甲石)은 고각형(孤角形)의 2단 괴임을 두었으며 4장으로 구성된 상기단 갑석에는 각형(角形)의 2단 괴임과 부연(副椽)을 각출(刻出)했다. 첫층 옥신석(屋身石)부터는 옥신석과 옥개석을 각각 돌 하나로 쌓아올리고 옥신의 각 면에는 우주를 모각하였다. 옥개석은 5단 받침과 2단의 괴임을 만들었고, 추녀는 수평으로 하여 낙수면의 굴곡(屈曲)을 약하게 하였다.
3층 옥개석에는 지름 15cm, 깊이 9cm의 탱주 구멍이 파여져 있다. 상하 기단의 면석에 탱주가 2개씩 있고, 옥개 받침이 5단인 점, 전체적으로 정제된 규격의 꾸밈이 단조로운 점 등으로 보아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의 석탑이라 하겠으며, 선본암(禪本庵) 3층 석탑의 상기단 갑석의 폭보다는 이 탑의 것이 6cm나 작으면서도 탑 전체의 높이는 60cm 정도 더 높게 된 것은 후기(後期)로 내려 올수록 탑의 폭에 비해 탑신이 놓아지는 형식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탑의 높이는 5.1m이다.
*** 조상들의 제단(祭壇) 성산동 지석묘(星山洞支石墓)
성주읍에서 이천내를 건너면 성산(星山)의 산줄기가 북으로 뻗어 낮은 언덕을 이루고 있는데 이곳 성산동의 언덕 위 밭가에 있다.
1957년, 당시 성주중앙국민학교장이던 박 상만(朴尙萬)이 발견하였는데, 받치고 있던 양쪽 바위기둥은 쓰러지고 그 위에 사람의 손으로 다듬어진 자취가 완연한 바위 천판(天板)이 쓰러진 채 얹혀 있어 지석묘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으며, 성주지방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신석기시대의 유물로 판명되었다.
군내에는 또 월항면 수죽동에 이러한 지석묘가 몇 기 산재해 있다.
*** 백성의 피난지 가야산성지(伽倻山城址)
일명 백운산성(白雲山城), 가야산(伽倻山) 상봉에서 산줄기를 따라 용기사(龍起寺)를 돌아서 수륜면 백운동 중기(中基)마을 뒷산에 이르는 높이 1.5m, 길이 4,780m 가량 되는 산성으로 산줄기를 따라 돌로 쌓았기 때문에 성을 쌓은 자취가 다소 완전하게 남아 있는 곳이 백운동의 중기마을의 뒷산 봉우리다. 용기골을 통하여 해인사로 넘어가는 성재나, 가천시장으로 넘어가는 월성재는 다 허물어져 돌더미만 흩어져 있고, 중기마을에서 용기사로 올라 가는 중간의 오른편 골짜기를 주민들은 지금도 피난골이라 부른다.
1594년, 이원익(李元翼)이 조정의 명을 받아 승장(僧將) 신열(信悅)을 시켜 개축함으로써 백성들의 피난지로 하였으며, 신열이 세운 성의 남문(南門)을 이항복(李恒福)이 액부초라 이름 붙였는데 지금은 다 허물어졌으며, 성안에는 여섯 개의 계곡(溪谷)과 10곳의 샘이 있었다.
용기사 절터 앞쪽 절벽 위에는 두 바위가 마주 서 있어 이것을 용의 귀(龍耳)라 하는데, 풍수설에 의하면 이곳을 천하 명당이라 하여 조상의 유골을 남몰래 메고 와서 밀장(密葬)을 하는 일이 더러 있었다. 날씨가 가물면 지방민들이 용기골로 몰려와 이곳을 파 헤쳐 밀장한 유골을 들어내었던 일이 간혹 있었으며, 한발이 심하면 용기골 절터 앞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어 효험을 보았다 한다.
산성의 길이는 4,780m 정도 10리가 넘는 거리이나 허물어져서 성을 따라 길을 다닐 수 없어 골짜기를 오르내리는 지금의 형편으로는 산성의 길이가 수십 리나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산성의 끝인 중기마을 뒷봉우리에 봉화대(烽火臺)가 있었다.
*** 독용산성 ( 禿用山城 )
가천면 금봉동 소백산맥의 주봉인 수도산(修道山)의 줄기인 독용산에 쌓은 석성이며 해발 955m의 산 정상에 위치한다.
성의 축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임진란을 피하던 중에 산성을 발견하였다 하며, 숙종 원년 1675년에 순찰사 정 중휘(鄭重徽)가 개축하니 둘레가 4581보(약 3,000m)에 이르고, 동옹성(東瓮城), 장대(將臺), 동 서 남 북 4개의 포루(砲樓), 아치형의 동문, 수구문, 남소문 등이 있었으며 규모가 광대하게 구성된 성내에는 계곡이 셋, 샘이 하나, 절이 하나 있었고, 객사와 동 서 군량고가 있어서 성주 합천 거창의 군량미도 보관하였다.
군기고(軍器庫 : 일제시 유물 발굴)에는 쇠도끼 쇠창 쇠화살 삼지창 말안장 갑옷 등이 출토되었으며 별장1 승장1 토병 44호로써 산성을 방어하였다 한다.
지금은 웅장하였던 성곽 일부와 아취형의 동문이 남아 있으며, 시대를 알 수 없는 '현덕부인묘'와 1709년(숙종 35년)에 세운 별장 이 숭겸(李崇謙), 장 천학(張天鶴), 목사 이 용화(李龍和), 주진기관(主鎭記官) 배 능헌(裵能憲)의 선정비가 산재하고 있다.
성내에는 썩은 낙엽이 쌓여 토질이 비옥하므로 근년에 개간민(開墾民)들이 들어가서 감자 묘목 인삼 등을 재배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퇴거(退居)시켜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성이 되었는데 이 산성은 임진왜란 때에도 전쟁의 화를 입지 않은 성이었다.
*** 감응사(感應寺)
월항면 대산동 한개마을 뒤의 영축산(靈畜山 : 옛날은 靈鷲山) 중허리에 있는 절이다.
이 절은 처음에는 암자로서 감응암(感應庵)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독립된 사찰로 감응사라 하는데 802년(신라 애장왕 3년)에 세워진 절이다.
전설에 의하면 감응사는 한개 부락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백내란 내가 마을 앞을 흘러가고 이 내를 건너 1,500m 쯤 거리에 옛날 가야시대부터 산성이 있는 성산(성산)이 감응사를 굽어 보고 있다. 감응사가 있는 산 이름을 영취산(靈鷲山)이라고 부른다. 신라 40대 애장왕 3년, 늦게 왕자를 두어 퍽 경사스러운 일이었으나 불행하게도 왕자는 날 때부터 눈이 나빠서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밤 임금님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왕에게 말하기를 "내일 아침 해가 뜰 무렵에 서라벌 하늘에 독수리 한 마리가 떠돌아 다닐 것입니다. 이 독수리가 날아가는 곳을 따라가면 서라벌에서 서쪽으로 떨어져 있는 본피현(지금은 성주)에 닿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독수리는 그 곳 어느 산등성이로 인도해서 조그마한 약수가 있는 자리에 내려 앉을 것입니다. 이 약수로써 왕자님의 눈을 씻게 한다면 성한 사람의 눈처럼 깜쪽같이 낫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 이튿날 왕은 지난 밤 꿈에 본 스님의 말대로 날쎈 군사를 시켜 독수리를 찾아서 약수를 길러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왕의 명령을 받은 군사는 말고삐를 움켜 잡고 말에 채찍질을 하면서, 하늘을 날고 있던 독수리가 서쪽으로 방향을 바꿔 안내하는 곳으로 따라가니 드디어 그 독수리가 어느 산등성이에 내려 앉았다. 급히 말잔등에서 내려 독수리가 앉아 있는 곳까지 달려가 보니 과연 바위 틈에서 물이 흐르고 있었다. 임금은 군사가 길러온 약수로 왕자의 눈을 씻게 하였더니 멀었던 눈이 뜨이게 되어 왕자는 앞을 보게 되었다 한다. 왕은 약수의 은혜를 잊지 못하여 절을 짓게 하였다. 이 절이 곧 감응사이며, 절이 있는 산 이름을 신령스러운 독수리 산이란 뜻에서 영취산이라 부르게 하였다고 전한다.
전설에 나오는 샘이 절 뒤 절벽의 바위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옥류정(옥류정)이라 하여 지금도 그 물맛이 달고 차가와서 약수로 이름이 높다.
이 절은 당초 신라의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왕명에 의하여 세운 절로 세월이 오래 흐름에 따라 중건(重建)을 거쳐 근세에 남은 기록으로 말하면 1740년(영조 16년)에 중수, 1780년(정조 4년)에 또 중수, 1921년에 또 다시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며, 대웅전(정면 3칸), 칠성각, 봉래당 등 건물이 있다.
절이 있는 영취산은 후세에 영취산 아래 한개에 살던 학자 한주 이 진상(李震相)이 축기(畜氣)가 많다하여 영축산(靈畜山)이라 고쳤다. 산 앞에 삼봉(三峰)과 백내를 내려다 보며 멀리 성주읍을 바라보는 경치가 좋은 산으로 봄 가을이면 절을 찾는 사람이 많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