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송파
8세 2子 이굉(李宏, 1515- 1573)퇴계 문인,편지 2통, 찰방공,1530년대에 온혜에서 처가인?
백금리(행소리)로 移居, 묘 백송 卵山 구봉령 碣,부장 안동 金遂良部將 女
이굉(李宏):1515년생. 完(기암)의 弟. 滉의 문인. 일찍이 詩文으로 알려짐. 察訪 역임.공람할 편지가 한 편이 있다.官의 納招事납초사에 대하여 잘 밝히라는 이야기였다.(권오봉,예던 길 159쪽) ▣참고:退溪門人錄,집필:이원걸
9세 이열도(李閱道, 1538-1591)字 靜可 號 遇巖, 殯所골 侍墓(13세?) 從祖父 퇴계 門下-
2편의 서찰이 있다.조상의 추증을 알리고,학문을 열심히 할 것과 ‘항상 충(忠直),신(信義),겸(謙讓),근(謹愼)으로 조신(操身)하라’고 가르쳤다. 퇴계가 손자대에서는 가장 훌륭한 인재로 촉망했다. 선몽대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편액과 제시를 써 주었다.(권오봉,예던 길 160쪽), 1563년 仙夢臺 건립, 퇴계 친필 현판 시1수 ,약포 정탁,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 한음 이덕형, 우복 정경세, 청음 김상헌, 茶山 정약용의 父 정재원, 절강성 주대승, 이동은 次韻詩,1576년 문과 급제,예조정랑,평안都事,경산현감, 영양 牧使 남희석女
이열도(李閱道):1538(중종 33, 무술)~1591(선조 24, 신묘). 본관 眞城. 자는 靜可. 호는 遇巖. 宏의 子. 1576년(선조 9) 문과 급제. 정랑을 역임. 은퇴후 仙夢臺에서 소요하며 지냄. 퇴계친필시와 현판,鄭琢·柳成龍·黃俊良·金誠一,이덕형,김상헌,정재원 등의 題詠詩가 전함. ▣참고:國朝榜目,眞城李氏譜,집필:김태안
10세 이진남(李鎭南,안동權당女 곽재우 의병 화왕산전투 /죽류파 이흥남 호 우포 계공랑/
우포파 이경남 호 송계 진사)로 분파
11세 이시형(李時馨/ 晉州 姜績 女)
12세 이규년(李奎年/ 의성 김우女)/李鳳年 花山派/
李喬年 粉洞派/李尙年 介峴派로 분파
13세 이지(李址/ 禮安 李亨龜女)/지와 李영 文科,금산군수, 의성포(회룡포)에 묘소 있다가 1960년대 초 백송으로 이장
□ 백송리 유래
白松里(백송리) : 흰 소나무가 있어 힌소리가 변하여 행소리 또는 백송(白松)이라고 함.
□ 내신리 유래
內新里(내동,신동,못뒤,범장골) : 내동,신동,하리의 일부를 병합하여 내동(內洞)과 신동(新洞)의 이름을 따 내신(內新)이라 함.
◇ 역사적 인물
백송파 9세 이열도(李閱道) : 본관은 진보요, 자는 정가이며 찰방 굉의 아들이고, 퇴계선생의 종손이다. 1576년 별시문과 2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고 벼슬이 예조좌랑에 이르고 만년에 선몽대를 지어 놓고 자연의 절정을 마음껫 즐겼으며 명공과 거경(퇴계 이황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약포 정탁 한음 이덕형 청음 김상헌 다산 정약용)이 많이 노닐고 시를 읊었으며 호명의 백금리에 살았고 광지가 있다. 공의 이름은 열도에 자는 정가이니 그 선대의 세계와 관훈과 이력은 경의 종조부 문순공(퇴계선생)의 묘갈과 그 아버님 찰방공의 광지에 자세하였다.
공이 1538년(중종33)년에 태어났고 남달리 영특하여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았으며 열세살에 어머니 안동김씨를 여의였어도 예법대로 집상하였고(빈소골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음) 자라서는 문순공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1573년 가을에 아버지가 임지에서 별세하였다는 기별을 받고 달려가 시신을 받들고 모셔와 장사를 치루고 3년 여묘하고 복을 벗은 다음 1576년에 별시문과에 병과 제일인으로 급제하여 곧 승문원에 들고 정자 박사 감찰 예조좌랑을 역임하다가 오래지 아니하여 뜻에 맞지 아니하는 동료들의 시기로 은계도(강원도 회양군 화북면) 찰방으로 나갔고 임기를 마치자 고령현감으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니 얼마 뒤에 평안도 도사로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돌아온 후 형조좌랑, 금산군수, 강원도 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다음해에 경산현감에 부임하여 정사가 매우 엄격하면서도 분명하니 아전이나 백성이 속이지 못하였고, 4년후 사임하고 집에 돌아와 사벽이 소연하여 아무것도 없고 다만 책과 뜰에 핀 꽃 뿐이더라. 공이 평소 잔병이 많더니 몸져 누운지 반년만에 의약의 효험도 없이 1591(선조24년)년에 춘추54세로 작고하였다.
13세 지와공(芝窩公) 유사
부군(府君)의 휘(諱)는 영(坽)이고, 자(字)는 첨숙(瞻叔)이며, 호(號)는 지산(芝山) 또는 지와(芝窩)라 했다. 성은 이씨인데 관향은 진보(진寶)다. 시조인 휘 碩은 고려말의 현리로서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참판공 휘 繼陽에 이르러 예안 온혜리(溫惠里)로 이사하였으며, 보조공신 진성군(眞誠君)을 증하였다. 휘 埴을 낳으니 신유년에 진사가 되었고, 의정부 찬성을 증직 받았다. 휘 河를 낳으니 여천훈도(呂泉訓導)를 지냈으며, 금곡(金谷)에 우거하였다. 휘 宏을 낳으니 학업은 퇴계 선생에게 배우고, 기린도(麒麟道) 찰방(察訪)을 지냈으며, 백금리(白金里)로 이사하였다.
휘 閱道를 낳으니 자는 정가(靜可)이며 호는 우암(遇巖)이라 하였다. 어릴 때부터 뜻과 기백이 맑고 깨끗하여 속태가 없었다. 학업에 뜻을 둘 때는 육경과 사서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숙조(叔祖) 문순공(文純公)이 매우 사랑하고 원대한 그릇이 될 것으로 기대 하였다.
경술년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나이는 겨우 13세였으나, 3년 동안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복상했다. 계유년에 찰방공의 상을 당하자 무덤 옆에 여막을 짓고 3년 상을 마쳤다.(지금 빈소골이란 지명이 남아 있음) 만력(萬曆) 병자년에 문과 급제하여 벼슬이 정랑(正郞)에 이르렀으며, 9개 군의 원이 되어 두드러진 치적이 있었다. 경산(慶山)의 원으로 있을 때 도백(道伯)이 강요하기에 가보았더니, 소위 청이라는 것이 자치통감의 책 제목을 써 달라는데 지나지 않았다. 곧 관복을 벗어던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선몽대(仙夢臺)를 쌓고 은거하며, 다시는 벼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휘 鎭南을 낳으니 호는 지봉(芝峰)이라 하였으며, 참봉(參奉)을 지냈는데, 임진왜란 때 郭忘憂堂(곽재우)과 함께 의거하였다.
할아버지의 휘는 時馨이며, 掌樂院 正考를 지냈다. 아버지의 휘는 喬年인데 全義 이형원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효종 계사년에 백금리 집에서 부군을 낳으니, 날 때부터 놀고 장난치는데도 총명함이 뛰어났으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 정도였고 모래에 글자를 익혔다. 뜻을 가다듬어 학문에 힘을 써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므로 일찍 성취되었으며, 당시의 친구들도 모두 따르지 못하였다. 학업은 李葛庵(이현일)선생의 문하에서 닦았는데, 숙종 무오년 3월에 병과 급제하자 칭찬하는 소리가 자자할 뿐만 아니라 나라에서도 인재를 얻어 기대가 컸다. 뒤에 承仕郞, 啓功郞, 承文院 正子, 奉常寺(봉상시)直長 겸 박사를 하였고, 갑자년에 宣務郞, 承文院 著作이 되었으며, 을축년에 성균관 典籍分差 겸 東學敎授와 朝奉大夫, 禮曹佐郞을 지냈다. 무진년에 朝散大夫로서 江原都事를 지냈으며, 계유년에 성균관 直講을 거쳐 兵曹正郞 겸 春秋館 記奏官을 지냈다.
갑술년에 이조정랑으로서 關東佐幕에 나가 흉년이 들어 재해를 입은 것을 구제하였는데, 공평하고 관대하게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지은 바 歷代時와 金剛錄은 그 글이 뛰어나 뒷사람들이 가히 애독할 것이다. 부군이 거처하는 곳에 心性圖說과 誠敬睦恤箴 등을 좌우에 써 붙여 후손들에게 보였다. 당시의 首相 權大運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珍山이 황폐하여 다스리기 어려우니 李某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그 임무를 감당할 수 없다 하여 특별히 임명하여 보냈다. 부군은 疎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아 單騎로서 부임하였는데, 그 해가 병자년 10월이었다. 그 때 흉년이 들어 굶주린 사람들이 들에 찼다. 부군은 진심을 나타내 상소를 하여 폐습과 고질을 낱낱이 아뢰어 특별한 은전을 입어 관가의 곡식을 궁민에게 구휼하자 영내가 안전하였다. 백성을 사랑하기를 자식과 같이하고, 관을 다스리기를 자기 집과 같이하며, 맑고(淸), 삼가고(愼), 부지런함(勤)을 주로삼아, 廷臣으로서 特薦된 뜻을 져버리지 않았으므로 온 백성의 칭송하는 마음을 흡족케 하였다. 벼슬에 있은 6년 동안 始終如一하였으므로 御使가 淸白함을 임금님에게 아뢰었다.
불행하게도 등창을 앓아 소를 올리고 집으로 돌아오니, 행낭에는 부군이 손수 베낀 책뿐이었다. 벼슬아치와 백성들이 길을 막고 울었으며, 비를 세워 추모하였다. 경진년 8월 8일에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48세였다. 용궁군의 의성포 뒤 갑자원에 장사지냈다. 증손서 金參判 굉 龜窩公이 생전의 사적에 대해 글을 지었다.
懶隱公(이동표)은 항렬로서는 服이 없지만, 한 마을에 같이 살았으며 나이는 9세 차이가 있으나 정의는 매우 돈독하여 공부할 때는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으며, 동시에 급제하여 동시에 원이 되었으며, 또 돌아가신 날도 몇 십일 사이였다. 일문의 喪故가 일조에 겹치게 되었으므로, 李孤山公은 輓辭에 이르기를,[칡 넝쿨 신선의 놀음에 자네가 또 가니 襄陽(예천의 옛지명)의 문학이 辛酸함을 알겠다]고 하였으며, 李葛峰公이 말하기를,[인간의 慘禍는 차마 말 할 수 없다. 懶隱이 갔는데 또 그대를 잃었구나]라고 하였으며, 金蘆洲公은 말하기를[名門에 名輩가 났으니, 懶隱과 吾君이다]라고 하였으며, 洪洗馬公이 말하기를,[명사들이 많은 남국에서 공을 가장 칭찬하였는데, 공이 먼저 갔으므로 花東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며, 美村 金公이 말하기를 , [근래에 또 文星이 없어졌다]고 하였으며, 主一齋 柳公(유후장-서애 현손자)이 말하기를,[나라와 고을에 英才가 盡하였다]고 하였다. 鼎山 儒生 李爾長이 또 가로되, [많은 선비를 성취케 했으니 이것이 孝業이 아니겠나] 했다.
당시의 여러 사람이 모두 만사와 弔辭로 애석해 했다. 벼슬에 있을 때 관가의 곡식으로 포리(捕吏)들을 속량(贖良)한 것이 많았다. 珍島의 관리들이 부음을 듣고 돈 3백 꿰미를 賻儀로 보내어, 흉년들었을 때에 구제해준 혜택을 만분의 일이라도 갚는다고 하였다.
부인은 함양 박씨 유의 딸이며, 10년 뒤 임진년에 돌아가셨으며, 化心穴 조부의 묘 오른쪽에 장사 지냈다. 2남 2녀를 길렀는데, 齊泰, 제륜이고, 딸은 장종망 인동인과, 김원회 광주인에게 출가하였다. 제태는 의성 金都事 명기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宜茂와 2녀를 낳았는데, 의성 김정탁과 청주 정주번에게 출가하였다. 제륜은 평산 신목사 명로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맏아들이 의번이다. 장종망의 아들은 우한이고 딸은 풍양 조처경과 이정춘에게 출가하였다. 의무는 固城 李시춘에게 장가 들였다. 3남 4녀를 낳았는데 曾胤, 사윤, 갑윤이고, 딸은 풍산 유인춘, 안강 노억, 흥양 이곤진, 의성 김굉 참판 호 귀와에게 출가하였다. 의번은 경주 이민배의 딸에게 장가들어 한 아들 경윤을 길렀으며, 후처는 월성 이담의 딸로서 2녀를 길렀는데, 영천 이현도와 야성 송지기에게 출가했다. 김정탁의 아들은 도행인데 생원이었다. 딸은 권응구, 정주번에게 출가했다. 2남은 전환이고, 딸은 함양 박세길에게 출가했다.
증윤은 義城 김채중의 딸에게 장가들였으며, 후처는 坡平 윤씨인데 생원 빈의 딸이다. 2남을 두었는데 浚德은 문학과 실행이 있었다. 둘째는 영덕이다. 2녀는 청주 정필환과 함양 박저경에게 출가했다. 갑윤은 안동 김명태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1남인데 윤덕이고, 딸은 전주 이휘조에게 추가했다. 경윤은 함양 박근동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들은 제덕이고, 2녀는 월성 이복기와 유인춘에게 출가했는데 아들은 일조다. 노억의 2남은 상매와 상오다. 이곤진의 3남은 정배, 의배, 인배이고, 딸은 장동옥, 김정하, 이영만에게 출가했다. 김굉의 2남은 필회 필병이고, 딸은 최주택에게 출가하였다. 浚德은 義城 김중유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며, 영덕은 예안 이인식의 딸에게 장가들어 한 아들 基浩를 길렀는데 준덕의 뒤를 이었다. 基浩는 풍양 조술인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아들은 挺萬인데 여흥 민치원의 딸에게 장가들어 2남 3녀를 길렀다. 아들은 大英, 낙영이고, 딸은 안동 권진규, 순천 김상학, 안동 권상준에게 출가했다. 대영은 文化 柳인식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3녀를 두었는데, 우교, 선교, 寅敎이고, 딸은 박명수, 김태병, 변용규에게 출가했다. 낙영은 4남 3녀를 두었는데, 순교, 성교,, 범교, 재교이고, 딸은 김희석, 김상진, 박윤식에게 출가하였다. 그 다음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戊辰年 正月 八代孫 聲敎 謹狀
1.녹동파 12세 나은 이동표(1644-1700)小퇴계라고 불림.
2.증손서 김굉(1739-1816)은 의성김씨 일직 귀미리 출신으로 의병장 척암 김도화(1825-1912)의 증조부? 김굉1739(영조 15)∼1816(순조 16).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자야(子野), 호는 구와(龜窩). 생원 광헌(光憲)의 아들. 1773년(영조 49) 사마시를 거쳐 1777년(정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81년에 스승 이상정이 죽자 스승의 유문(遺文)을 정리하였다.
3.김노주-김태일(1637-1702)조선 중기 문신. 자는 추백(秋伯), 호는 蘆洲. 본관은 예안. 1660년(현종 1) 문과)에 급제, 장령(掌令)·헌납(獻納)·문학(文學)·보덕(輔德)을 지냈다. 94년(숙종 20) 사간(司諫)으로서 한중혁(韓重爀)의 옥사(獄事)를 다스리다가 삭출(削黜) 당하였다. 저서에 《노주집》
예천군에는 우리 일가들이 下里面 殷山洞:殷豊 縣村. 愚谷洞:邑谷 亭子村:솥정자 /虎鳴面 白松洞:행소리.종산동 고미,內新洞/知保面 大竹里/甘泉面 泉香里 石坪 등에서 세거하고 있다.
백송파는 음력10월 첫 일요일에 호명면 백송리 선몽대에서 토요일에 모여 일요일 아침10시에 난산에서 시제를 지낸다. 백송리에 입향한지 470년 동안 대과 급제자 2명(9세 이열도 1576년,13세 이영)과 경성제국대학 입학자 5명,현존 박사 40여명을 배출하며 세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