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귀일신앙의 특징
1) 귀일의 성서적 근거
하나로 돌아간다, 하나(一)에 귀의한다는 뜻의 귀일(歸一)에서 그 하나를 어떻게 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그 하나의 의미를 성서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첫째로 이현필이나 다석 유영모에게 하나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들이 하나를 하나님으로 해석함은 당연하였고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께 귀의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 것이다. 십자가를 지고 죽었다가 부활하여 승천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삶을 귀일의 모범이라고 보고 다석 유영모나 이현필도 예수의 본을 따라 일생동안 날마다 죽었다가 날마다 다시 사는 하루살이를 실천하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체득하고 더 깊이 믿어 하나님께 올라가는 귀일의 신앙이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성경 전체가 귀일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아버지 하나님께 돌아가야 된다는 뜻이 좀더 두드러지게 드러난 곳을 말하자면 누가복음 15장과 요한복음 17장이라 하겠다.
-누가복음 15장 11-32;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탕자의 이야기는 너무 유명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두 형제가 있었는데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유산을 들고 나갔다가 모두 탕진하고 살 수가 없게 되자 회개하고 아버지께 돌아왔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가 크게 환영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 집에서 순종만 하던 큰 아들이 아버지께 불평을 하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했다. 아버지를 거역하고 탕자가 되었던 작은 아들은 깊이 회개하고 아버지께 돌아왔지만 정작 아버지 집에서 순종하며 살아가는 큰 아들이 마음속으로는 아직 아버지께 순종하지 않고 있어서 아버지가 큰 아들을 설득하는 것으로 끝나는 이야기다.
두 형제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이야기다. 그렇지만 진실로 두 형제가 아버지의 마음과 하나가 되면 아버지 안에서 두 형제도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하나 되기를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가 나오는데 그것이 요한복음 17장이다.
- 요한복음 10장 30절 , 14장 11절, 17장 21 ; 하나 되게 하소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길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14:11)”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요10:30)”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하나임을 믿는 신앙은 또한 내가 예수님과 하나임을 믿는 신앙과 연결된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예수님이 기도하신 것은 “우리(예수님과 하나님)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요17:22)”이었다. 즉 예수를 믿는 나도 예수님을 믿어서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예수님 안에 있음을 믿는 귀일신앙이라는 것이다. 내가 예수를 믿어 예수님과 하나가 될 때 나는 하나님 안에 있게 되고 하나님이 또한 내 안에 계심으로 나와 하나님이 하나가 된다. 이렇게 우리 모두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믿음에 들어갈 때 우리 모두는 또한 하나가 된다는 것이 귀일이다.
따라서 ‘귀일’에서의 그 하나는 또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한 몸의 하나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된다. 즉 이 때 하나는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하나 됨’을 말한다. 이것이 하나에 대한 두 번째 의미이다.
그래서 하나로 돌아간다는 말은 하나 됨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것이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이다. 즉 본래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멀어지고 떨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회개하고 예수님께 돌아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 귀일의 믿음이다. 아버지와 탕자가 본래 하나였는데 그만 죄로 탕자가 되어 멀어졌다가 다시 회개하고 돌아와 아버지의 아들로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로 돌아온다는 그 하나는 ‘아버지 하나님’이라 해도 되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아버지와 하나 됨’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 모두는 본래 하나인데 그 하나 됨을 잃었지만 다시 믿음을 통해 우리가 그 ‘본래의 하나 됨’을 되찾는 신앙이 귀일신앙인 것이다.
또 ‘본래의 하나 됨’을 되찾게 되면 곧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나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감이 된다. 그래서 하나의 또 다른 의미는 ‘본래의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할 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이면서 동시에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본래의 창조된 모습으로 회복 될 때의 ‘나 자신’도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본래의 나 자신으로 돌아감, 즉 자기가 본래의 자기를 만나 하나가 되는 체험, 이것이 귀일의 ‘일’이 뜻하는 세 번째 의미이다.
-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됨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의 성육신은 또한 귀일신앙의 의미로 ‘하늘과 땅의 하나 됨’을 말한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가 다시 육신이 말씀이 되신 분이다. 말씀과 육신이 하나라는 것이다. 동양적으로 생각하면 하늘의 말씀이 땅의 육신이 되셨다가 다시 하늘의 말씀으로 올라가신 것이다. 하늘이 땅이 되고 땅이 하늘이 된다. 하늘 속에 땅이 있고 땅 속에 하늘이 있다. 말씀 속에 우주가 있고 우주 안에 말씀이 계신다. 우주와 말씀이 둘이 아니다. 하늘과 땅이 둘이 아니다. 하나님과 우주자연이 둘이 아니다. 말씀과 육신이 둘이 아니다. 행함과 믿음이 둘이 아니다. 바울의 믿음도 또한 믿음과 행함이 하나 되는 신앙이었다.
사도바울의 믿음은 갈라디아 2장 20절이다.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것을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주었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고 한다. 그리고 성육신을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한다.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이룬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 성육신인데 그것은 또한 신행일치, 또는 지행합일의 삶인 것이다. 따라서 귀일의 그 하나에 대한 네 번째 의미로 ‘성육신의 신행일치’를 말한다.
요한복음 14장 16절: 보혜사 성령
보혜사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예수님이 알려주신 것을 생각나게 하신다. 따라서 성경말씀을 이해하고 깨닫게 도와주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음으로 우리 안에 오신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그리스도와 함께 계신다. 결국 귀일의 첫 번째 의미인 하나님께 돌아감의 하나님은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께 귀의함이다.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음이 귀일의 다섯 번째 의미가 된다. 즉 귀일에서의 하나란 곧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께 돌아가서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또한 공동체의 의미로 된다.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게 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하나가 되는 공동체가 교회라는 것이다. 따라서 초대교회 믿음의 공동체를 회복함이 또한 귀일의 의미가 된다. 이것이 귀일의 여섯 번째 의미이다. 이때 하나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 즉 교회를 말한다.
초대교회의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사도행전 2장에 나와 있는 대로 모든 것을 서로 공유하여 모두가 부족함이 없는 사랑의 공동체였다.
끝으로 귀일의 하나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언급할 것은 야고보서 1장 27절 말씀이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수도의 길을 가고자 하는 정인세에게 고아들을 돌보는 동광원 원장직을 권하자 수락을 망설이고 있을 때 이현필 선생이 적어주었다는 구절이다. 이 구절을 보고 정인세는 원장직을 수락하여 고아들을 돌보며 살았다. 수도의 길과 사랑의 길이 둘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 물론 크게 말하여 신행일치를 말한 것이지만 그보다 좀 더 세분하여 환난 가운데서 고통 받는 형제자매들을 돌보는 사랑의 믿음을 말한 것이다. 소외되고 고통 받고 가난한 형제자매들에게 찾아가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복지활동 가운데 수도의 길을 찾으라는 것이다. 즉 이웃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요 또한 현실적인 생활 속에서도 자기를 지켜 거룩하고 경건한 삶의 길을 잃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경건의 길은 수도하는 것만도 아니고 헌신하는 것만도 아니고 사랑의 헌신과 고요한 기도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일 가운데서 기도하고 기도 가운데서 일하는 신앙이 귀일신앙이다. 일하는 것이 기도하는 일이요 기도하는 일이 또한 일이 되는 것이다. 수도의 생활화요 생활의 수도화라 할 수도 있고 기도의 생활화요 생활의 기도화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을 한 마디로 이상과 현실의 하나 됨, 또는 성속(聖俗)의 일치라 하겠다. 성과 속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따로 있고 사람을 섬기는 일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 속에 이상이 있고 이상 속에 현실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의 현실 속에서 찾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로 돌아가는 그 귀일의 일곱 번째 의미는 또한 ‘성속의 일치’로 돌아감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게 귀일의 그 하나를 7가지로 찾아보았지만 더 깊이 찾아가면 계속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2) 귀일 신앙의 7가지 특징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형성된 귀일의 의미를 추적해 보았다. 그것은 다석이나 이현필이 한국인으로서 성경을 받아들이면서 어떻게 스스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자기의 내적체험을 다시 성경의 말씀과 어떻게 해석학적 지평융합을 이뤄냈는가 하는 그 과정을 유추하는 작업의 하나로서 간단히 시도해본 것이다. 즉 예수가 말하는 믿음, 또 바울이 말하는 믿음, 그것이 무엇인지 우리도 깨닫고 체득하며 살자는 것인데 그런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결국 자기의 근본체험을 통한 문화적 지평융합으로 말씀을 해명하는 일임과 동시에 그 체득의 믿음을 우리 문화 속에 뿌리내리는 일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이다. 이미 이같은 신앙으로 이 땅에 복음의 씨를 뿌리고 갔던 이공 이현필 다석 같은 그런 분들의 믿음을 귀일신앙이라고 해본 것이다. 그러면 그런 귀일 신앙은 어떤 말씀으로 나타났을까. 그 특징을 또한 간단히 간추려 본다.
첫째, 귀일신앙은 “공空” 의 영성이다.
“공空”이라는 말은 비었다는 뜻이다. 땅콩 속이 비어있을 때 빈탕이라 한다. 알맹이가 빠진 것을 빈탕이라 한다. 이럴 때 빈탕은 부정적인 허무의 의미로 쓰인다. 채워있어야 할 것이 빠져있으니 허무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나무 줄기나 연꽃 줄기를 보면 속이 비어있으면서 곧장 뻗어 올라간다. 피리도 속이 비어있어서 소리가 나온다. 바람을 일으키는 풍구도 비어있어야 바람을 일으킨다. 이럴 때는 비어있음이 쓸모 있음이다. 허무가 긍정이 된다. 피리가 제대로 피리가 되려면 속은 뚫려야 되고 그 뚫린 속을 바람이 지나면서 맑은 노랫소리로 가득 차야 된다.
사람도 마음은 피리처럼 속이 텅 비어야 하고 정신은 열매처럼 속이 꽉 차야 된다. 즉 빈 마음에서 나오는 성령의 말씀이 진실로 꽉 차야 된다. 그것이 진공묘유라는 것이다. 참은 공이면서 신비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내가 공이 될 때 성령의 신묘한 작용이 나타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현필의 스승 이세종은 자신을 공空이라 했다. 물론 이세종이 불교의 ‘공’ 사상을 배웠을 리 만무하다. 학교라고는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 문화 속에서 불교의 진공묘유는 곳곳에 배어있었다. 피리를 만들고 종을 만들고 그림을 그리고 도자기를 만들고 하는 모든 생활 예술 속에 진공묘유의 지혜는 늘 살아 있었다. 한국 사람이라면 이미 배우지 않고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이공이 성경을 보고 예수의 산상수훈을 읽을 때 공의 의미를 새삼 깨우치지 않았을까.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마음이 깨끗한 자는 복이 있다. ‘가난’이나 ‘깨끗함’을 비움으로, 공으로 이해한 것이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나니’ 이런 바울의 고백을 읽으며 그것을 ‘공’으로 이해한 것이다. 음란의 죄와 탐욕과 교만으로 이뤄진 ‘나’라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나라는 것은 깨끗지 못하고 더러운 것이다. 나라고 하는 것이 없어져야 되는데 아직도 ‘덜 없어져’ ‘더러운’ 것이다. 더럽다는 말은 아직 없는 게 덜 완전하여 덜 없다는 것이요 더럽다는 것이다. 이렇게 죄와 악과 욕심으로 이뤄진 내가 사라지고 없어져서 깨끗하게 될 때, 공이 될 때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그래서 이공은 죄와 욕심으로 가득한 내가 사라지고 성령으로 충만한 얼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죄와 욕심의 수렁에서 건져주실 분은 주님의 영이요 성령이시기에 밤낮으로 주님께 성령주시길 기도했다. 그래서 성령의 은혜로 죄악의 수렁에서 벗어나 빛의 품속에서 텅 빈 공이 되었다. 성령 충만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혜 속에 접속이 되어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다. 나는 공이 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되어 무한한 은혜가 쏟아지는 것이다. 죄악이 사라지고 빛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다는 말이요 무한한 신비 속에 들어간 ‘모름지기’(알 수 없는 신비의 세계를 꼭 붙들고 사는 이)가 된 것이다. 그것이 이공의 신앙이었다.
둘째, 귀일신앙은 “고신극기”의 영성이다.
이세종이 공이 되기 위해서 기도했던 것처럼 이현필도 공이 되기 위해서 피나는 기도에 정진했는데 그 기도 정진의 모습을 ‘고신극기苦身克己’라 한다. 고신은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몸소 체험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태16:24)” 하신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자기 부인을 ‘극기’라 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을 ‘고신’이라 한 것이다. 이공에게 있어서 공이 되는 것과 성령이 충만한 것이 둘이 아니듯이 십자가를 지는 것과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둘이 아니다. 바울에게서 ‘십자가와 함께 죽었다’는 것과 ‘이제 내가 내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이 또한 둘이 아니다. 부활이 곧 십자가요 십자가가 곧 부활인 것이다.
셋째, 귀일신앙은 “비움과 겸하”의 영성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6-7)” 하는 말씀처럼 예수님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자기를 비우고 우리를 섬기는 종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자기 비움과 함께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 오셔서 사람들을 섬기는 종의 모습이 우리가 따르고 본받아야 되는 주님의 모습이다.
물이 언제나 다투지 않고 낮은 곳을 찾아 흐르듯이 이공이나 이현필은 세상에서 가장 낮은 자리를 찾아서 할 일을 찾았다. 버스를 타도 맨 뒤에 타고 기차를 탈 때도 서서 갔다. 아이들의 말일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라는 말씀을 넘어 이웃을 예수님으로 대접하며 살았다. 외진 섬이었던 진도의 가장 척박한 땅, 죽은 땅을 파고 일궈서 옥토로 만들었고 서울에 올라가서는 가장 더러운 기독청년회 공중화장실을 쓸고 닦아서 가장 깨끗한 곳으로 바꿔놓았다. 결핵이나 한센 병이 들어서 가족 친지도 외면하고 세상에서 버림받아 갈 곳이 없는 외롭고 비참한 영혼들을 찾아서 하룻밤이라도 데려다 돌보자며 데리고 들어와서 함께 살았다.
이것들은 모두 물처럼 낮은 곳에 처하는 지혜와 모든 더러움을 씻어주는 사랑의 실천이었다. 물은 본래가 깨끗한 것이다. 깨끗한 것이기에 모든 만물의 더러움을 받아서 깨끗이 씻어주는 것이다. 자기가 더러워짐으로 남을 깨끗하게 해주는 이런 물 같은 사랑, 어머니의 사랑을 노자는 화광동진이라 한다. 화광동진이란 빛이 땅으로 내려와 티끌이 되었다는 말이다. 모든 만물은 티끌이 아닌 것이 없다. 이 티끌이 불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면 다시 빛이 되는 것이다. 빛과 먼지도 둘이 아닌 것이다. 빛이 내려와 먼지가 되었다가 먼지를 끌어올려 모두가 다시 빛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겸하의 길은 또한 상승의 길이 된다. 첫째가 꼴지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길이다. 꽁무니가 되어 꼭대기가 되는 길이다. 꽁무니는 자기를 부인하는 길이요 꼭대기는 자기의 십자가를 지는 길이다.
넷째, 귀일신앙은 “신행일치”의 영성이다.
이공이나 이현필, 또는 다석의 삶을 보면 믿음과 생각과 말과 삶이 일치되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믿음이 그냥 믿는 믿음이 아니라 영이 열리고 마음은 깨치고 몸으로 체득하고 삶으로 증거하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참말이요 산 말이요 생명의 말씀이었다. 말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 문자는 진리의 껍데길 뿐이다. 참은 언어 문자를 넘어 참 인격의 영에서 나오는 말씀이다. 그래서 참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은 무엇이나 참이 되지만 거짓 인격에서 나오는 말은 아무리 경전의 말씀을 전해도 그것은 참 말이 아니라 울리는 꽹과리 소리일 뿐이다. 믿음과 행함이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믿음 따로 행함 따로, 생각 따로 행동 따로, 어찌 그렇게 되는가. 그것은 아직 믿음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생각이 아직 깨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씀이 아직 체득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씀의 체득, 진리를 깨침, 믿음에 들어감, 이런 것이 신행일치의 세계를 이룬다. 믿음의 차원이 하나 더 높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기 까지 다석은 38년이 걸렸다고 한다. 이현필도 10대에 예수님을 믿고 전도사가 되었지만 20대에 이공을 만나서 더 높은 믿음의 차원이 있음을 깨닫고 화학산에 들어가 고신극기의 기도를 통해 30대에 믿음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제2의 공이 되었다. 이러한 이공과 이현필의 믿음을 이어서 김금남도 20대에 화학산에 들어가 믿음을 얻고 믿음에서 믿음으로 올라가는 순결한 믿음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다섯째, 귀일신앙은 “하루살이” 영성이다.
믿음에 들어간 이는 어제를 사는 것도 아니고 내일을 사는 것도 아니고 오늘을 사는 것도 아니다. 영원한 순간인 이제를 사는 것이다. 그것이 영으로 사는 영생이기 때문이다. 영생이란 영원히 오래오래 장생한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영으로 사는 것이다. 시간 속에 갇혀서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벗어난 영으로 자유가 되는 것이다. 언어도 관념이고 생각도 관념이고 시간도 관념이다. 관념에 매어 사는 것을 꿈같은 인생이라 한다. 그 꿈을 깨고 관념에서 벗어난 순수직관이 되어 매 순간이 살아 약동하는 깬 정신으로 실존이 되는 것이 믿음이다.
실존의 특징은 순수직관으로 시간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그것을 동양에서는 주야지도에 통한다고 했다. 주야를 넘어서는 도, 그것이 진리라는 것이다. 인생이 실존이 되려면 생사의 문제를 넘어서야 되고 생사의 문제를 넘어서려면 주야의 도에 통해야 된다는 것이다. 밤낮을 넘어서는 진리, 그런 주야지도에 통하여 사는 삶을 하루살이라 한다. 천년의 역사도 하루 속에 있고 일생의 시간도 하루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루를 실존으로 사는 것이 일생을 사는 것이요 천년을 사는 것이요 영원을 사는 것이다. 하루라 해도 좋고 한 시간이라 해도 좋고 한 순간이라 해도 좋다. 지금 여기 이제 긋에서 시간이 없는 영원과 통하는 것이다. 그것을 가온찍기라 한다. 지구가 태양을 붙잡고 춘하추동을 돌듯이 그 가온을 붙잡고 춘하추동을 사는 것이 가온찍기 인생이요 믿음의 하루살이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하루살이로 사는 것이다. 사는 것은 오늘뿐이다. 오늘이 오, 늘, 하는 영생이다. 육체와 생각과 감정은 시간 속에 있지만 깬 정신은 시간 속에 있지 않다. 그래서 깬 정신은 일찍 죽었다고 요절도 아니고 오래 살았다고 장수도 아니다. 다만 하루살이일 뿐이다. 하루 속에서 영원을 사는 것뿐이다. 오늘 하루를 깬 정신으로 온전히 현존이 되는 것, 오직 그것만이 성령의 은혜요 삶의 의미가 되는 것이다.
여섯째, 귀일신앙은 “동체대비”와 “일즉일체”의 영성이다.
믿음에 들어간 이공은 산을 바라보며 찬양했고 들을 보면서 기뻐했다. 산천초목 모두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형제자매들이요 한 생명이었다. 우거진 풀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칡넝쿨 하나라도 부러지면 슬퍼하였다. 밭에서 뽑아낸 잡초들이 불쌍하여 다시 심어서 살려주고 물에 빠진 쥐도 꺼내어 살려주었다. 이공에게는 이 세상 모든 만물이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한 형제요 자매이지 버릴 것도 없고 악한 것도 없었다. 선악을 넘어서고 시비 분별을 넘어선 무차별의 세계인 것이다. 일체가 하나님의 사랑 아닌 것도 없고 일체가 하나님의 은혜 아닌 것이 없었다. 누가 욕을 해도 하나님의 교훈으로 알고 자기를 반성했고 핍박을 받아도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했다. 만물을 한 몸으로 느끼며 대자대비의 사랑이 되었다. 주님의 은혜 속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느끼듯이 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신비를 느끼며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신다는 신비를 또한 우주자연 속에서도 느낀 것이다. 나는 우주 안에서 티끌보다 못한 한 점에 불과하지만 이 티끌 속에 우주의 신비가 들어있음을 느끼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전체 속에 하나가 있고 하나 속에는 전체가 들어있다는 일즉일체 일체즉일의 평등의 주체로서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진리에 순종하는 삶이었다. 그래서 일즉일체의 평등관과 동체대비의 사랑으로 사는 것이다.
이현필도 자기 몸에서 살고 있는 이나 벼룩도 죽이지 않고 함께 살았다. 화학산에서 피란할 때는 자기를 찾아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다니면서 자기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죽임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될 그 사람들의 영혼을 염려하여 잡히지 않기를 기도했다. ‘천지는 나와 한 몸이요 인류는 나의 지체’라는 이현필의 말처럼 그는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모든 존재를 한 몸으로 느끼며 동체 대비의 사랑으로 살았던 것이다.
일곱째, 귀일신앙은 “수도공동체” 영성이다.
이공이나 이현필이 믿음에 들어가서 변화된 것은 거룩한 길이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 하는 말씀처럼 깨끗한 몸 깨끗한 마음 깨끗한 정신이 되었다. 정결로 깨끗한 몸이 되고 청빈으로 깨끗한 마음이 되고 순종으로 깨끗한 정신이 되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저절로 순결 청빈 순명의 수도덕목을 실천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자기의 의지나 결단이 아니라 믿음에 들어감으로써 충만한 성령의 은혜로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었다.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6:22)”
이공이나 이현필이 걸었던 그 거룩함의 길은 청빈 순결 순명의 길이요 이런 복음 삼덕을 통한 초월의 길을 함께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이공이나 이현필은 자기를 따르라거나 모이라고 하는 법이 없었다. 그저 거룩한 믿음의 길을 갔을 뿐이다. ‘어떻게 해야 그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 ‘오장치를 져야지요.’ 하는 간단한 말 뿐이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여든 사람들이 광주에서 거지와 고아들을 돌보며 땅을 개간하고 과수를 기르고 농사지으며 살았다. 그래서 그것은 교단에서 인정하는 단체도 아니요 가톨릭의 수도원 같은 수도단체도 아니요 통일된 규율이나 조직도 없이 자연스런 신앙공동체요 살림공동체로서 거룩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한 식구로 함께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현필은 세상을 떠날 때 자기를 위해 준비한 옷도 입지 않고 남에게 주라고 했고 무덤도 만들지 말고 평토장을 하라고 했다. 실제로 관도 없이 수의도 없이 가난한 몸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