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의 불볕더위라는 이번 여름도 이번 주를 고비로 한풀 꺾인다고 합니다. 회원 여러분들도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게을러 그저 시간이나 축내는 의미없는 스스로가 너무 조악한 듯 합니다. 어서 빨리 새로운 시간들을 맞아야할 텐데... 더위에 지친 여러분들에게 재작년에 썼던 글을 한 편 올립니다. 감상이 승(勝)하여 낭만이 패배한 느낌이지만 그도 제 능력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자괴감에 어쩔 줄을 모르겠습니다. 이미 읽으신 분들도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더하여 차분한 계절을 맞길 바랍니다. 안다성-바닷가에서 ♣ 낭만파 시인들이 조율하는 세련된 시어(詩語) 속에 울려오는 사랑의 추억 <바닷가에서> 작사 : 박춘석 작곡 : 박춘석 노래 : 안다성 파도 소리 들리는 쓸쓸한 바닷가에 나홀로 외로이 추억을 더듬네 그대 내 곁을 떠나 멀리 있다하여도 내 마음 속 깊이 떠나지 않는 꿈 서러워라 아∼ 새소리만 바람 타고 처량하게 들려오는 백사장이 고요해 파도 소리 들리는 쓸쓸한 바닷가에 흘러간 옛날의 추억에 잠겨 나 홀로 있네 1. 가을이 오는가 했는데 어느새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 되었습니다. 이 옷깃을 여미는 계절이 되면 사람들은 문득 시인(詩人)이 되어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지요. 세월, 낙엽, 들판, 바람, 바닷가, 벤치, 모래톱, 사랑… 치열한 일상에서 우리가 잊고 있는, 아니 외면하고 있는 것들이 사실은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조건임을 새삼스레 깨닫고 겸허한 마음이 되어 차라리 스스로 그 신비한 세상을 찾아가기도 합니다. 오늘은 시인의 지도에 새겨진 바닷가로 떠나고 싶습니다. 일상의 수면제 같은 조급함에서 벗어나 마음 속 깊이 추억이 가라앉아 있는 잊혀진 곳으로. 그곳은 낡은 사진첩 속에 박혀 있는 보석 같은 시어들로 지어낸 추억의 시집(詩集)입니다. 갈매기가 나르는 수평선에 걸린 작은 배, 얕은 구릉과 넓은 모래톱, 하얀 포말이 춤추는 바위들이 각각의 연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한 시어(詩語)들만은 아니군요. 시어들 아래에는 중의(衆意)가 담겨져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놀랍게도 ‘청춘’과 ‘사랑’, 그리고 ‘인생’이 시어 아래에 마련되어 있습니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습니다. 아니, 누군가가 시를 화폭에 담은 건 아닐까요? 그래요. 바닷가 화폭 구석구석에는 시어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 화폭을 가만히 쳐다보면 귓가에 청춘과 사랑과 인생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배음(背音)으로 절절이 풀어지는 것 같습니다. 바다라는 익숙한 시어 속에는 인생의 모든 이야기들이 담겨있습니다. 바닷가는 시인이 살고 있는 마음의 고향입니다. 저는 시집을 펼치고 그 바닷가에 도착했습니다. 모래톱이 낮은 구릉과 맞닿은 곳에 묘비(墓碑)하나가 쓰러져 있는 게 보입니다. 가까이 가보니 안다성(安多星)의 <바닷가에서>라는 묘비입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저 전설과 인정이 사람들을 포근히 감싸던 시절―, 청춘을 구가하며 쌓았던 낭만과 젊음의 시가 숨쉬던 곳이 어느새 유배지로 변해 아무도 돌보지 않는군요. 때는 겨울, 차가운 바람마저 불어옵니다. 저는 묘비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리고 손으로 쓰다듬었습니다. 그 때 제 손길에 뭉클하고 무언가가 흘렀습니다. 비록 세월을 놓쳤지만 그 옛날 전설처럼 들려오던 이야기들이. 사랑은 아마 시(詩)의, 아니 인간의 영원한 주제인 것 같습니다. 광막한 자연의 섭리에 비하면 인간은 너무나 미약한 존재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나름으로 섭리를 초월하는 시를 짓고싶은가 봅니다. 사랑의 서사시를 말입니다. 하지만 그 서사시 역시 인간의 이야기로 돌아와서 또 다시 패배되는군요. 패배될 줄 알면서도 도전하는 어리석은 게 인간이지요. 그런가요? 아닙니다.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쌓아 가는 인간의 전설이지요. 내 아버지의 어머니에서부터 내 아들의 딸로 이어지는 그 전설은 자연의 섭리를 초월하는 장려(壯麗)한 몸짓입니다. 사랑은 시의 영원한 속살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어머니 때부터 내려온 사랑의 역사는 언제나 신비롭습니다. 개개인의 가슴에 녹아 있는 사랑의 이야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가슴 안쪽 깊숙이 그늘져 있다 가끔씩 그 마력을 풀어내지요. 어쩌면 늦은 밤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소리 속에서 풀어질 수도 있습니다. 희망을 잃고 무심히 술에 취해 길바닥에 쓰러져 있을 때 천사의 손길인양 눈앞에 미소지으며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아아, 그 사랑의 마력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오히려 현재의 내가 아무리 무너진 인생이라 해도 한없이 따뜻하게 위로해주는 본향(本鄕)입니다. 바닷가의 사랑은 많은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비록 지금은 흘러간 추억이라 할지라도. 저도 그렇습니다. 이제는 까마득한 세월 속에 바랜 이야기가 아직도 제 가슴속에 그림자처럼 드리우고 있습니다. 등대에서, 모래사장에서, 송림에 둘러싸인 바위 언덕에서 저는 사랑이 주는 황홀한 마력에 취해 곳곳에 시어를 그림으로 아로새겨놓았습니다. 프리즘을 통과한 현란한 가시광선처럼 화려하게 기록된 저만의 화폭입니다. 원근 화법에 충실하게 구석구석 다양한 시선을 줄 수 있도록, 그래서 황홀한 찬가를 부를 수 있도록 오브제들을 새겨놓았습니다. 파도치는 등대라는 연(聯)에서는 밤바다를 바라보며 같이 앉아 인생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첫사랑의 황홀에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모래사장에 깔린 싯구(詩句)에서는 멀리 수평선을 기어가는 배를 바라보며 미래의 아름다운 꿈들을 약속하는 행복에 온몸을 떨었습니다. 그리고 바위 언덕 송림의 결구(結句)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새끼손가락을 걸고 사랑의 환희에 흠뻑 빠졌습니다. 아아, 제 젊은 날에 그런 그림들이 있었군요. 하지만… 흘러간 청춘처럼 그 모든 황홀과 행복과 환희는 한바탕 꿈처럼 저에게서 떠나갔습니다. 그렇군요. 님은 떠나갔습니다. 이젠 현실에 내팽개쳐진 초라한 시집만 남았습니다. 저는 쓰러진 묘비를 만지며 마냥 추억에 젖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바닷가에서… 묘비에서 노래가 들려옵니다. 깊은 바다에서 떠오르는 거품처럼 포근히 감싸는 님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 소리는 곧 이어 하늘을 가르고 들려오는 듯한 출항의 뱃고동 같은 신비한 전주(前奏)로 이어집니다. 그 짧은 전주만으로도 단번에 안타까운 추억의 세계로 빠져들지요. 이 노래는 이미 전주에서부터 객관이 아닌 주관으로 이입됩니다. 벌써 까마득히 멀리 떠난 님은 제 마음 속 깊이 떠나지 않는 꿈으로 남아 가슴에 서럽게 슬픔을 새깁니다. 마치 그 동안 일상에서 잊어버린 원망이라도 하듯 거의 폭포처럼 가슴에 무너져 내립니다. 하지만 안다성은 얄밉게도 절대 그런 슬픈 감상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남의 이야기하듯 객관적인 목소리로 사실만을 기술하는지! 그 절제(節制)는 아마도 편안한 호흡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단속적(斷續的)이지 않고 끊임없이 연결되는 음절로 인해 굉장히 숨가쁜 노래일 수 있는데도 아주 편안한 호흡으로 노래를 부릅니다. 우리도 그의 호흡을 따라 조심스레 이야기를 따라가지요. 하지만 곧 차분한 소리에서 풀어내는 이야기의 이면에 숨겨둔 감상의 파편들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바로 안다성의 연기력입니다. 전편을 흐르는 바이브레이션은 겹겹이 지난날의 추억을 재워놓았지요. 여기서 우리는 한국의 ‘빙 그로스비’라는 안다성의 음성 연기의 의미를 눈치챌 수 있습니다. 평범한 싯구(詩句) 밑에 고독한 감상을 숨겨두는 세련된 연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시인 박춘석(朴椿石)이 짜 맞춘 절묘한 솜씨에 감탄하게 됩니다. 못갖춘마디로 시작되는 음절은 다음 마디와 연결되어 시어들의 이미지를 3∼4박 충분히 이입(移入)시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 박을 16분 음표로 잘게 쪼개 이번엔 안개처럼 이야기를 마음껏 풀어 내립니다. 다양한 변화를 주는 절묘한 음절 처리는 안다성의 연기와 결합되어 잔잔한 슬로우락의 선율이 생생히 살아 숨쉬는 회상시(回想詩)로 이끕니다. 그 뿐만은 아닙니다. 시의 구성을 맛깔스럽게 하는 다양한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군요. 후반부는 여인을 등장시켜 안다성이라는 화자(話者)를 떠받치는 보조 화자의 이야기를 병렬시킵니다. 여인의 배음(背音)은 시를 더욱 입체적으로 조직하는군요. 그리고 ‘백사장의 고요’라는 고급한 객관에 가슴을 때리는 4박자의 반주를 마디마다 따로 덧씌워 시의 절정을 이루는 장면이나, 전주와 비견되어 시어의 결구와 함께 바로 잦아드는 후주(後奏)로 감정을 조절하는 방식 등은 세련된 장인의 솜씨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두 노련한 시인이 풀어내는 시어 속의 청춘과 사랑과 인생은 그러나 우리가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개인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창조주의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로서는 그저 가슴에 숨겨두고 살아가야만 하지요. 어쩌면 처음부터 그렇게 준비된 것은 아닌지. 청춘은 미래가 아니라 이미 지난 과거이며, 사랑이란 현실이 아닌 과거의 무대에 새겨진 그림자이며, 그래서 인생은 다만 쓸쓸한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는. 만약 그렇게 준비되어 있다면 우리가 악착같이 현실을 살아내는 모습은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지. 허무한 인간의 몸짓인지, 아니면 그 허무를 뛰어넘는 장려한 모습인지! 시집을 접고 바닷가를 떠나오면서 추억의 님도 다시금 가슴속으로 그늘집니다. 마치 짧은 후주처럼 인생의 비밀도 같이 줄이 끊어져 너울너울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막막하고 거친 현실을 살아야한다는 생각을 하니 맥이 풀리고 어쩐지 심술이 납니다. 인생이 끝나는 날 그 이야기들도 함께 묻힐까요? 2. 우리 노래의 역사는 많은 도전과 비방으로 얼룩졌습니다. 어느 때는 민족의 애환을 담은 노래로서 찬양받기도 했고, 어느 때는 끓어오르는 청춘의 동반자가 되어 함께 울려 퍼지기도 했습니다. 쓰라린 인생을 포근히 감싸주기도 하고, 꿈과 낭만을 벗삼아 후원해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못지 않게 부정적 소리들을 듣기도 했습니다. 일본 노래를 소롯이 번안해 우리의 노래인 양 불러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고, 강요된 내선일체를 위해 전선으로 우리의 젊은이를 내몰던 군국 가요를 불러 안타까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정당한 자각도 없이 일본풍 박자에 침식당하기도 했고, 특히 60년대 한일 국교 정상화가 되면서 엔카조의 왜색 바람이 불었던 점은 민족의 자존심을 한껏 구긴 아픔이었습니다. 또는 저질 감상과 체념을 유포한다고 공격당하기도 했고, 줏대도 없이 외국이라면 무엇이나 좋다고 맘보니 트위스트니 하는 리듬을 함부로 받아들여 춤바람을 유행시킨다고 의심을 받기도 했습니다. 뜻도 알 수 없는 원어를 함부로 사용하기도 하고, 섹스와 욕설과 마약의 저질 가사를 읊기도, 표절을 일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요가 그렇다고 전부 그런 방향으로만 나아간 것은 물론 아닙니다. 그 만큼에 비례하여 다양한 모습을 보이며 발전해왔습니다. 도식화된 느낌이 있지만 <꽃중의 꽃>, <소녀의 꿈>, <산이슬> 등의 건전 가요가 한 때 회자되기도 했고, <과수원 길> 등의 동요풍 노래가 흥겹게 불려지기도 했습니다. <보리밭>이나 <동심초>, <선구자> 같은 가곡들도 우리 가요의 울타리를 넘어오기도 했고, <고향초>, <호반의 벤치>, <웬일인지> 등등 클래식의 향기를 피워 올리는 수많은 주옥같은 명곡들도 우리 가요의 뜰을 풍성하게 했습니다. 이런 노래들은 상업적일 수밖에 없는 가요의 생산과 유통 과정에서 대중(大衆)이라는 저급에 훼손당한 우리 노래의 정당한 도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닷가에서>는 그런 우리 가요의 뜨락을 더욱 풍요하고 고급스럽게 만든 클래식의 범주에 드는 노래입니다. 아마 제 개인적 취향이랄 수도 있겠지만 그런 클래식한 작풍(作風)으로 무장하고 본격적으로 등장한 사람은 이재호(李在鎬)가 아닌가 합니다. ‘조선(朝鮮)의 슈베르트’란 소리를 듣는 그는 진작부터 <아네모네 탄식>, <산유화>, <산장의 여인> 등을 작곡하여 우리 가요에 대한 일부의 폄하(貶下)를 통쾌하게 불식시킨 작곡가일 것입니다. 60년대 들어 손석우(孫夕友)는 전통적인 노래의 패러다임을 바꾸며 <물새 우는 강 언덕>, <나 하나의 사랑> 등 세련된 시적 향기를 풍기는 작품들을 작사 작곡하며 선배의 뒤를 이어나갔습니다. 송민도는 <나의 탱고>, <여옥의 노래>를, 권혜경은 <물새우는 해변>, <첫사랑의 화원>을, 손시향은 <검은 장갑>, <이별의 종착역>을 불러 사람들의 가슴에 아련한 파토스를 출렁거리게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박춘석도 절대 뒤지지 않습니다. 우리 가요를 본격적으로 대중화시킨 그는 박시춘에 필적한 만큼 다양한 식단으로 유명합니다. 물론 클래식의 고급스런 메뉴도 포함해서 말입니다. <바닷가에서>는 그의 그런 솜씨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노랫말이 최종적으로 암시하는 것은 ‘인생(人生), 혹은 시간(時間)의 흐름’입니다. 일세를 풍미하는 정치인이나, 뒷골목을 주름잡은 어깨, 거대한 자본의 지휘자인 기업가는 물론 축 처진 어깨의 서글픈 월급쟁이, 시장통의 구석에서 나물 파는 할머니, 냉방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눈물을 훔치는 고아… 등의 모든 인생들이 머지않아 똑 같이 맞아야할 인간의 조건을 사랑의 추억에 빗대 표현하였지요. 모든 것은 흐르고 우리는 쓸쓸하게 반추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어찌할 수 없는 참으로 아픈 인간의 조건이군요. 하지만 그는 그런 허무를 위로하는 방법으로서 안다성의 정치(精緻)한 소리를 빌어 클래식의 마법을 걸은 모양입니다. 우리는 그의 마법에 이끌려 원시적 신비감에 풍덩 빠져 허무를 초월하는 것은 아닌지! 참으로 보기 드문 통찰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두 시인은 그런 마법으로 <사랑이 메아리칠 때>라는 또 하나의 걸작을 남겼군요. 그 노래 또한 가만히 들어보노라면 제 몸을 악착같이 갈가먹는 온갖 잡스런 것들이 빠져나가고 버나데트의 성처녀(聖處女)처럼 깨끗한 샘물이 스며드는 느낌이 듭니다. 기초 체력이 충실한 그들은 향균 성분이 가득한 자신들의 비타민을 청정(淸淨) 가요에 뿌려 우리에게 선사하고픈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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