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목 : 첫사랑회복(2) / “첫사랑의 고백 : 주시라!”
+ 본 문 : 요한복음 21장 1절 - 14절 (신약성경 185쪽)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아멘!
오늘은 첫사랑을 회복하고 사랑의 삶의 살았던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고, 영혼구원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인류 구원의 사역을 알지 못한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 후, 모두 두려워, 한 다락방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 예수님의 부활소식이 전해졌고, 제자들은 빈 무덤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부활하신 주님께서 “샬롬!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며 그들을 만나주셨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예 예전 자신들의 생업의 현장인 갈릴리 바다의 어부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그중 예전 어부였던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겠다.” 고 나서자, 예전에 어부였던 제자들은 물론,
별로 할일을 찾지 못한 제자들까지, 우리도 시몬 베드로 너와 함께 가서 고기 잡겠다고 따라 나섭니다.
그렇게 베드로와 함께 고기 잡으러 갈릴리 바다로 떠난 제자들의 숫자가 모두 일곱 명이나 되었습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이지만,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옛 생활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일곱 명이 함께 모여 고기를 잡다 보니, 옛날 추억도 되살아나고, 재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그런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그 참담한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일곱 제자들이 힘을 합해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는데도, 아무 소득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 배에 올랐으나 그날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제자들이 배를 타고나가 밤새도록 열심히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입니다.
고기잡이로 평생을 살아온 제자들이 3년을 쉬었기 때문에 실력이 녹슬어 못 잡았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여기서 얻는 분명한 교훈은 ‘열심히 일한다고 그 일을 다 성취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여러 명이 힘을 합친다고, 다 잘되는 것도 아니요. 준비가 되었으니 잘 되는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무조건 다 잘되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하고, 성실히 일했는데도 실패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 제자들이 그렇게 참담한 실패를 한 원인이 예수님을 안 믿었기 때문입니까?
그것 또한 아닙니다. 그 당시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확실히 알고 믿었던 사람들이 또 누가 있었습니까?
그리고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으로부터 위로와 격려까지도 받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왜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을까요? 도대체 아무 소득이 없었던 문제는 어디 있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고기잡이 하는 갈릴리 바다 현장에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안계시면 고기도 못 잡는다는 원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예수님이 안 계셔도 고기 잘 잡을 수 있습니다. 시험도 잘 볼 수 있고, 사업도 잘 풀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없이 잘 되는 것은, 결코 오래 가지 못하고 망한다고 성경은 말씀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제자들에게만은 예수님이 없이는 안 된다는 이 진리를 분명히 가르치기를 원하셨으며,
제자들에게만은 예수님이 없이 잘 되는 것, 또한 축복이 아님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 없이는 모든 것이 잘 안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예수님 없이도 혹 잘 되는 것, 또한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영적 위기요. 영원한 저주가 되고야 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오늘 본문 4절입니다. /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우리 예수님은 제자들이 고기 잡을 때 바닷가에 서 계셨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은 바닷가에만,
서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오늘의 교회에만, 거룩한 곳에만, 서 계신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현장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지시고, 다 지켜보고 계십니다. 아멘! 믿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은 전도할 때에만,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 것으로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제자훈련을 하실 때에만, 자신들과 함께 계신 것으로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제자들과 함께 계셨기에, 그것을 제자들에게,
알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의 제자들이 고기 잡는 현장에 서서, 지켜보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배드리고 찬양하는 교회에서만 함께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할 때만 함께 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참 좋으신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아멘입니까? 아멘!
전도자 요한 웨슬레는 '가장 최선의 것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와 함께 하는 시간이 아니라, 참 좋으신 우리 주님이 나와 함께 하는,
그 시간이 우리에게 있어서 최선의 시간이요. 함께 하시는 그 장소가 바로 최선의 장소입니다.
여러분! 기도의 현장에 주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에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2차 대전 때에, 프랑스의 어느 항구에서 영국군 수십만 명이 후퇴를 할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영국군 수십만 명이 후퇴 하려고 하는 항구 가까운 또 다른 항구에, 독일군들이 주둔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독일군들이 집결해 있는 항구에 대풍랑이 일어나 꼼짝달삭 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데 거기서 얼마 안 되는 영국군이 주둔한 항구에는, 그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 잔잔해서,
수십만 명의 영국군이 무사히 다 후퇴할 수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훗날 기록을 보면, 수십만 명의 영국군들은 주일에 모여서 '하나님이여! 독일군에게서 우리들을,
지켜 보호하사 본국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하옵소서!’ 라고 간절히 통성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 여호수아 1장 9절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아멘! 믿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에겐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가장 큰 재산이요.
우리의 기도가 응답이 되어지는, 가장 큰 행복 중에 행복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런 큰 재산, 응답, 이런 큰 행복을 내 것으로 누리며 사시기를 진심으로 원합니다. 아멘!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들을 향하여 여전히 서 계시는 예수님을 몰라보았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아멘!
왜 몰라보았을까요? 그것은 자기 일에 너무 몰두하다 보니까, 예수님이 자기들을 향하여 오신 것도,
몰랐고, 예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시고, 잠잠히 바라보시며 서 계시는 것도 몰랐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삶의 현장 가운데 함께 하시고, 잠잠히 바라보시며,
지켜보고 계시는데도, 너무 자신의 일에 바빠서, 알지 못한 체,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영으로 오셔서, 우리 가운데 항상 함께 계십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삶 속에서 우리들을 잠잠히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린 너무 바빠서, 너무 재미있게 즐기다 보니까, 그 주님을 잊어버린 체 살아갑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고기도 못 잡으면서 늘 바쁘다는 것입니다. 열매도 없으면서 늘 바쁘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공부도 안하면서 늘 바쁘다고 합니다. 사업하는 분들은 돈도 안 벌리는데 늘 바쁘기만 합니다.
직장인들은 직장인들대로 아무 성과도 없이 늘 바쁘고, 몸도 마음도 피곤하다고 투덜댑니다.
그렇게 바쁜 일에만 집중하다 보니, 정말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예수님을 바라볼 겨를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내 삶의 건강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가장 중요한 축복의 통로를 잃어버린 체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장날에, 자신의 황금덩어리를 팔려고 장터에 나와서 좌판을 벌렸습니다.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덩이에 눈이 황홀해진 장꾼들이 삽시간에 주위에 몰려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황금덩이를 한참 구경하고 있던 한 사람이, 갑자기 황금덩어리를 들고 도망을 칩니다.
황금덩이 주인은 물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도둑이야!' 소리 지르면서 뒤를 쫓았습니다.
도둑은 얼마 도망가지 못하고 잡혀 관아로 끌려갑니다. 그 도둑을 보고 재판관이 말했습니다.
"이 미련한 도둑놈아,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는데, 어쩌자고 그 황금덩이를 훔쳐 도망쳤느냐?“
도둑이 말했습니다. / "예, 그땐 제 눈엔 황금덩이만 보였지, 주위 사람들은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세상 것에 지나치게 집중하다보면, 함께 하신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하시기를 원하는 직분도, 사역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내팽개칩니다.
내 머릿속에 있는 꾀와 별 것 아닌 경험으로 충분하다면서, 나를 향해 서 계신 주님을 외면합니다.
여러분! 이런 일들은 결코 축복받을 일이 아닙니다. 스스로 망하는 길을 선택한 어리석은 짓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를 너무 너무나 사랑하시는 주님이, 늘 내 곁에 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바라보십시오. 우리를 너무 너무나 사랑하셔서 늘 함께 하시는 주님을 말입니다.
여러분! 너무 자신들의 하는 일에 바쁜 나머지, 함께 계시는 주님을 몰라 본 제자들에 대한,
우리 예수님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오늘 본문 5절 말씀입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이 예수님의 질문은 중요한 질문이었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는 가장 가슴 아픈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 제자들을 향한 이 예수님의 질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밤새도록,
수고하였으나 한 마리의 고기도 못 잡은 것을 모르시고, 그냥 한 번 물으셨던 질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왜 물으셨을까요? 여러분! 제자들을 향해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은 “너희들이 지금 왜 고기를 잡고 있느냐?” 하는 뼈있는, 의미 있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범죄 한 아담을 찾으시면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신,
것과 같은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이,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아담아. 네가 거기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닌데, 네가 왜 거기 있느냐?’ 하는 참 아픈 질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고기를 얼마나 잡았는지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지금 거기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아닌데 왜 거기 있느냐?
너희들이 지금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나 잡고 있어야 될 사람이냐?’ 하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이 질문에서 우린 성경에서 이 본문에만 사용된 두 단어에 주의를 기울여 보아야 합니다.
첫째 단어는 “고기” 라는 단어입니다.
보통 물고기란 단어는 ‘익투스(ikthus)’ 라는 단어를 쓰는데, 오늘 본문만큼은 예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만은 물고기라는 원어는 ‘프로스파기온(prosphagion)’ 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이 단어는 원래 물고기란 의미보다, 식탁 위에 올려 진 진귀한 음식이란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원문의 해석대로 하자면 “얘들아 너희가 정말 귀한 것을 얻었느냐?” 하는 뜻입니다.
“너희가 나 예수를 등지고는 너희가 정말 귀한 것을 얻을 수 없단다. 나를 빼놓고는,
내가 없이는 너희는 정말 가치 있는 것을 얻을 수 없단다.” 하는 교훈이 담긴 질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정말 소중한 것, 정말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을 빼놓고, 예수님이 없는 삶을 살지 마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성경에서 여기만 쓰인 두 번째 단어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얘들아” 하는 단어입니다.
‘애들아!’ 하는 단어는 ‘파이디온(Paidion)’ - 아주 작은 아이들을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다 큰 어른들인 제자들에게 썼다는 것은, 잘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과거에 자신의 제자들을 향해서, 단 한 번도 그렇게 부르신 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갈릴리 현장에서만 유독 제자들을 향해서 “파이디온! - 얘들아!” 하고 부르셨을까요?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지금 제자들이 하는 짓을 보니, 제자로서 지금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뭔지도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도 모룬체 허둥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철없는 아이들과 같은 제자들을 향해서 “파이디온! 얘들아” 하고 부르신 것입니다.
여러분! 잘 들어 보십시오. 사업가에게 “돈 많이 벌었느냐?” 하는 것은 맞는 질문입니다.
학생에게 “공부 많이 했느냐?” 건축업자에게 “집 많이 지었느냐?” 하는 것도 맞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에게 “고기 많이 잡았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은 정말 부끄러운 질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믿습니까? 그렇다면 예수님의 사역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제자 된 여러분에게도 “제자 많이 삼았느냐?” 하는 질문을 받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금 주님이 여러분을 향해 물으신다면, 어떤 질문을 던지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 된 여러분에게 예수님께서 ‘제자 많이 삼았느냐?’ 하는 당연한 질문을 받을지언정,
“파이디온! - 얘들아! 제자인 너는 지금 뭘 하고 있느냐? 너는 지금 해야 할 일이 뭔지도 모르고,
또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파이디온! 얘들이로구나!” 하는 책망은 절대로 받지 마십시오.
그러면 사도 베드로와 제자들이 어떤 신앙고백으로 첫 사랑을 회복하게 되었을까요?
오늘 본문 6절, 7절 말씀입니다. 함께 봉독합니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아멘!
함께 봉독한 말씀에서 볼 때, 사도 베드로와 제자들이 어떤 신앙고백으로, 예수님과의 첫 사랑을,
회복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시라! - 주님이시라!” 하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 “얘들아 너희가 정말 귀한 것을 얻었느냐?”
“나를 등지고는 너희가 정말 귀한 것을 얻을 수 없단다. 나 예수를 빼놓고는, 나 예수가 없이는,
제자인 너희들은 정말 가치 있는 것을 얻을 수 없단다.” - “그런데 파이디온! - 얘들아! 제자인,
너희들은 지금 뭘 하고 있느냐? 너희들은 지금 해야 할 일이 뭔지도 모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너희들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파이디온! 얘들이로구나!” 하고 책망까지 하십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그들 곁에 서 계신 예수님! 그리고 지금 교훈하시고 책망하시는 예수님을 몰라봅니다.
그러자 이번엔 예수님께서 특별한 명령을 내립니다. /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어부가 된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특별한 명령에 자신들도 모르게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집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밤새도록 수고하였으나 한 마리도 잡히지 않던 물고기가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그물 가득히 많이 잡혔고, 나중 끌어올려 세어보았더니, 큰물고기가 153 마리였습니다.
그 정도 큰 물고기 153마리면, 그물이 찢어져야 하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때야 비로소 사도 요한이 말씀하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요한이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합니다. 뭐라고 고백합니까? 그렇습니다. “주시라!”
여러분! 보십시오. 사도 요한은 많이 잡은 물고기를 보고 “야. 우리 돈 벌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시라!” “이건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하신 일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적이요. 은혜다.”
주님을 발견한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신앙고백이 바로 이 고백이어야 합니다.
생업의 축복을 받아 돈을 벌었을 때 “야. 한 건 잡았다” 가 아니라 “주시라!” 고백해야 합니다.
자녀가 고등학교, 대학 합격한 후에 “너 정말 실력 있다, 운 좋았다.” 하지 말고 뭐라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이시라!” “이 모든 것은 주님의 기적이요. 은혜입니다.” 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직장에서 승진할 때도 “주님이시라!” 무슨 일인가 좋은 일이 있을 때 “주시라!” 고백해야 합니다.
물론 무슨 일이 잘 안될 때도 “주님이시라!” 고백 하는 성도가 정말 큰 신앙을 가진 성도입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라!” 하는 신앙고백을 들으시면서 너무너무 기뻐하십니다.
왜 예수님은 기뻐하십니까? 이렇게 예수님을 향해서 “주님이시라!” 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은,
매사에 주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예수님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요한의 “주님이시라!” 하는 신앙고백을 들은 베드로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요한의 “주님이시라!” 하는 신앙고백을 듣고서야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의 불같은 성질 값을 합니다.
그 긴박한 순간에도 시몬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바다에 뛰어들어 예수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자신의 옷과 몸이 물에 다 젖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렇게 많이 잡은 고기도 다 내 팽개쳤습니다.
주님과 나 사이에 체면, 자존심이 어디 있느냐? 하고서 성격 그대로 주님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그가 과거 어부로 있을 때, 주님께서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는
소명의 말씀을 듣고 즉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랐던 열정적인 첫사랑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그 때와 너무 비슷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 첫사랑을 기억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주시라!’ 는 한마디에 앞 뒤 재지 않고, 옷을 입은 채 바다로 뛰어내린 것입니다.
신앙은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주님 향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주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시라!” 하는 그 한 마디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께 달려가는 것이 순수한 첫사랑 신앙입니다.
주님은 그런 순수한 첫사랑 신앙을 베드로에게서 보았고,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서도 보기 원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이런 신앙이 ‘주님을 향한 첫사랑 신앙이요. 첫사랑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을 향한 첫사랑 신앙고백’ 을 우리는 ‘주님시라!’ 는 말 한마디에 그 겉옷을,
벗어버리고 예수님께로 달려갔던 바디매오에게서도 볼 수 있고, 물동이를 버려두고 자기가
만난 첫 사랑의 주인공 예수님을 전하러 간,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우상장사의 아들인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것도 ‘주님이시라! 주님의 은혜’ 입니다.
요셉이 종살이, 감옥살이 13년의 고난속에서 애굽총리가 된 것도 “주님이시라! 주님의 은혜’ 입니다.
도망자 모세가 이스라엘의 출애굽 지도자가 되었던 것도 “주님이시라! 주님의 은혜’ 입니다.
아버지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했던 목동 다윗이 왕이 된 것도 “주님이시라! 주님의 은혜’ 입니다.
핍박자 사울이 부름을 받고 이방인의 대사도 바울이 된 것도 “주님이시라! 주님의 은혜’ 입니다.
이 부족한 종이 부름을 받고 목사가 되어 목회하게 된 것도 “주님이시라! 주님의 은혜’ 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주님이시라!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요. 축복이요. 기적입니다!’ 하는,
참으로 멋진 첫사랑의 신앙고백과 첫사랑의 행동을 저와 여러분에게서도 보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또 보십시오. 이렇게 참으로 멋진 첫사랑의 신앙고백과,
첫사랑의 행동을 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9절입니다. “육지에 올라 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주시라!” 하는 첫사랑의 신앙고백을 하면서 예수님께로 가니, 숯불에 생선과 떡이 놓여 있었습니다.
밤새 한 마리 고기도 못 잡은 배고픈 제자들을 위해, 여호와이레! 예수님은 생선과 떡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물에 젖어 추위에 떨고 있는 베드로를 위해, 여호와이레! 예수님은 숯불까지 피워 놓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시라!” 하는 첫사랑의 신앙고백을 하면서,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여호와이레! 예수님은 우리에게 여호와이레!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놓으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 바로 이 여호와이레의 예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감사박수 한 번 올려 드립시다. (감사박수!)
미국의 햄크스라는 사람은 광산에서 일하다가 두 손과 두 눈을 한꺼번에 잃어 버렸습니다.
그때 마침 예일대학의 유명한 교수인 목사님이 설교한다는 소문을 듣고 거기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설교 내용 중에 "사람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이 있다." 라는 설교 말씀을 듣고,
목사님께 "나같이 손도, 눈도 없는 인간에게 무슨 사명이 있단 말입니까?" 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께서 "그대에게는 아직 입과 귀와 발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비록 눈과 손은,
없을지라도 지금 있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말씀에 햄크스는 성령님의 큰 감동을 받고 깨닫는 동시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아직 입과 귀, 발을 남겨주신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 후에,
스탠포드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함으로, 미국의 대강연자 가운데서 일인자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감사를 빼앗기면 춤추는 자는 사단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내 자신의 삶을 부정적으로 보고 절망하면, 사단은 기뻐 춤을 춥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 주님의 몸 된 교회사역을 부정적으로 보거나 말하기 시작을 하면,
그것은 사단을 웃게 만들고, 사단을 춤추게 하고, 사단의 사역에 동참하는 사람이 됩니다.
여러분! 그러나 아십시오. 그 누군가 아무리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고, 사단이 춤추고 좋아하는,
일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사역은 전능자 하나님께서 하시기에 반드시 이루십니다. 믿습니까?
그러나 사단을 웃게 만들고, 사단을 춤추게 하고, 사단의 사역에 동참하는 사람은 반드시 망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메튜 헨리의 "감사하는 사람은 진흙 속에 살면서도 그것을 은혜로 안다.
그 이유는 보석은 진흙 속에서도 보석이기 때문이다." 라는 말처럼 무슨 일에나 감사하며,
무슨 일에나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오직 기도와 찬양으로, 말씀 순종의 삶을 살아갑니다.
바로 이게 “주시라! - 주님이시라!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첫사랑 신앙고백을 하며
주님과의 첫사랑의 회복하는 성도의 복이 있는 삶이요. 이런 그리스도인들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반드시 “여호와 이레의 축복 - 준비 된 주님의 축복” 을 우리에게 풍성히 주십니다. 믿습니까?
사랑하는 우리 믿음의 가족 여러분! 이 축복을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첫 사랑을 기억하라! 나 주와 처음 만나 심장 뜨겁게 사랑했던 첫사랑 나누던 때를 기억하라!
첫 사랑을 나누던 자리를 기억하라! 첫 사랑을 체험했던 너만의 갈릴리를 기억하고 돌아오라!
첫 사랑을 나누며 약속했던 그 약속을 기억하라! 그 아름다웠던 첫 사랑의 속삭임을 기억하라!
지금 그 첫 사랑을 못 잊어 내가 늘 네 곁에 서서 너를 지켜보고 있단다. 첫 사랑을 회복하자!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내가 너를 위해 준비한 여호와이레의 축복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그러므로 첫 사랑을 회복하자! 첫 사랑을 회복하자! 첫 사랑을 회복하자!” 아멘입니까? 아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곁에 늘 서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주님께 “주시라! 주님이시라!” 신앙고백 하므로, 우리 함께 주님과의 첫사랑을 회복합시다.
그래서 주님이 풍성히 예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축복 - 준비 된 주님의 축복” 을 풍성히 받아,
다 누리시고, 다른 사람들과 나누며 사랑으로 섬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