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진왜란!!
진인, 유정 등 명나라 장수들에 의해 모셔진 관우 사당!~
일관도 신도들이 모여 예불을 드리고 있다.
일관도 국제도덕협회 - 서울 흑석동
일관도는 미륵불을 모시는 신앙.
그런데 제대 위에는 관우상이 함께 모셔져 있다.
신도들은 미륵불과 더불어 관우신에게도 예불을 올리는 것이다.
"삼국지에서 나오시는 관운장이시거든요.그 부처님을 저희들은 꼭 모시고 있어요." - 양혜자
이들은 관운장을 부처와 같은 신으로 모시고 있다.
우리 나라 전국 각지에서 관우는 지금도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관우는 왜 신으로 모셔지게 된 것일까?
"소설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좋아하는 한 사람을 꼽으라고 한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관우를 들 것 같은데요,
잘 아시다시피 관우는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 장수로 수많은 영웅호걸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삼국지를 잘 알고 좋아하시는 분들조차도 이렇게 관우가 신으로 모셔지고 있는 것을 접하게 되면 많이 생소하실 겁니다. 과연 관우는 왜 우리나라에서 신으로 모셔지게 된 걸까요?"
서울 사당동.
이곳에 관우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원래 남대문 밖에 있는 사당이라 하여 남묘(南廟)라 불렀는데 1978년 주택재개발사업이 시작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게 되었다.
사당 한가운데 모셔진 것은 관우상.
서울 한가운데 왜 관우가 모셔지고 있는 것일까?
정유재란 - 선조 30년(1597)
우리나라에 관악묘를 설치하게 된 연혁을 적은 <해동성적지>에 따르면 남묘를 세운 것은 '진인'이라는 인물이었다.진인은 정유재란 때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수였다.
명의 장수가 왜 우리 나라에 관악묘를 세우게 된 걸까?
울산성 전투도.
선조 30년, 조.명연합군은 울산성을 중심으로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6만 명의 조.명연합군은 울산성을 포위해 총공격을 펼치지만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후퇴한다.
당시 울산성 전투에 참여했던 진인도 총탄을 맞아 큰 부상을 입었다.
남대문 밖 명군의 진지로 후송된 진인은 그곳에서 요양을 하며 건강을 회복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관우사당을 세운다.관우신의 보살핌을 받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전쟁에서 다친 사람들이 자신의 회복을 위해서 그런 기원을 하는 거고,자신의 휘하 군대 병사들이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기원하는 한 마디로 전쟁신이라고 볼 수 있겠죠."
- 김 탁 박사, <한국의 관제신앙> 저자
관우신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또 있을까?
전라도 남원 이곳에도 관왕묘가 있다.무슨 이유로 세워진걸까?
사당 앞 비석에는 관왕묘를 세운 이의 이름이 적혀 있다.
'유정'
유정은 정유재란 때 남원성 전투에 참가했던 명나라 장수로 전투가 끝난 후 관왕묘를 지었다고 한다.
관우신을 모셔야 왜군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우리 나라 전국 곳곳에서 관왕묘가 생겨났다.
동묘, 남묘, 안동, 성주, 남원, 강진
명나라 군대는 주둔지마다 관왕묘를 세웠다.
"관운장을 숭배함으로써 군사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준다든지, 관운장이 우리를 도와주고 있으니까 승리는 우리 것이라고 하는
이런 어떤 사기를 진작하는 차원에서도 많이 숭배를 했습니다." - 서영대 교수, 인하대 사학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관왕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것은 허황되고 말도 안 되는 일로 여겨졌다. 더구나 관왕묘 제사는 이제껏 우리 나라에 없던 제사였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이런 제사는 없었다." - 선조실록 31년 5월 12일
서울 숭인동 동묘.
이곳에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관왕묘가 있다.
동묘는 중국풍의 양식과 조선의 건축술이 결합된 국내 유일의 건축물이다.동묘가 지어진 것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다.전쟁이 끝난 후에도 명나라 신종은 서울에 관왕묘를 짓기를 요청했다.당시 명나라는 관우신앙의 열기가 한참 고조되던 때였다.
특히 신종은 관우신을 열렬히 모시던 왕이었다.
신종은 조선 왕실에 금 4천냥과 기술자들까지 보내서 관왕묘 공사를 서둘렀다.
친필로 동묘에 내걸 현판까지 써서 보내왔다.
그러나 공사는 쉽사리 진척되지 않았다.전쟁이 막 끝난 어지러운 상황에서 공사에 필요한 막대한 물자와 인력을 동원하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게다가 지지부진 시간이 끌면서 공사에 동원된 인력도 늘어갔다.
"매달 200명의 군인이 부역" - 선조실록 33년 1월 13일
"약 2년간에 걸쳐 건물을 짓습니다.그때 각 지방에서 올라온 백성들의 원망이 높았지요.
그리고 사대부들이나 당시 신하들만해도 관우는 촉한이 망하는 것도 지키지 못했는데
어떻게 우리나라에까지 전쟁신으로 모실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 김 탁 박사
경북 안동 무안왕묘(武安王廟).
무안왕은 관우가 받았던 시호로, 무안왕은 관우를 모셨던 사당이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안동에 머문 명나라 장수를 위해 세워졌다.그런데 당시 관악묘는 이곳에 있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는 안동부성 서쪽 향교 맞은편에 있었으나 그곳은 공자묘와 마주보는 자리였다.이에 유학자들이 나서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성리학적 기반을 둔 그런 향인들에게는 중국인이고, 무신인 관우가 그들 마음에 탐탁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송승규, 안동시청 문화재과
관왕묘가 문묘와 마주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자리를 옮길 정도로 당시 관왕묘에 대한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명나라가 철수되자 조선의 관왕묘들은 아무렇게나 방치되었다.관우신앙은 명나라에 의해 유입된 조선에서는 원치 않은 신앙이었다.
2. 송나라 문치주의, 주희 성리학의 촉한정통론,
장수에서 제후로, 왕으로, 그리고 신으로 모셔지는 관우!~
"관왕묘가 조선에 최초로 세워지게 된 것은 임진왜란 때 출병했던 명나라 장수들에 의해서입니다.
관우를 신으로 모시는 관우신앙은 명나라 황실 뿐만 아니라 민간에도 널리 퍼져서
지금까지도 중국인들에게 있어 관우는 최고의 신으로 모셔지고 있지요.
헌데 역사 속에 한 실존인물이었던 관우가 왜 신으로 모셔지게 된 것일까요?"
중국 하남성 낙양시.
낙양은 후한말 삼국시대 주요 무대였던 곳이다.
'중앙완재(中央宛在)' - 관우의 머리를 묻은 곳
한 눈에도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이곳은 관림(關林).
관우의 머리가 묻혀있는 곳이다.
중국에선 무덤마다 붙이는 칭호가 다른데
황제의 묘는 '릉(陵)',
성인의 묘는 '림(林)'이라고 한다.
관우의 묘를 '림(林)'이라고 하는 건
관우를 신(神)으로 모신다는 것이다.
중국에선 공자와 관우의 묘만 '림'이라고 하니
중국인들이 관우를 얼마나 높이 숭상하는지 짐작할만하다.
"관우는 중화민족 모두가 섬기는 영웅입니다. 신과 같은 존재죠." - 참배객
"관우는 충직하고 선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관우를 존경합니다." - 참배객
대전에 모셔진 관우상.
제왕의 복장을 하고 왕관을 쓴 모습이다.
중국에서 관우는 신들 중에서 최고의 신으로 모셔진다.
사당 뒷편엔 관우의 무덤이 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 의하면
손권이 관우를 죽인 후 머리만 잘라 조조에게 보냈는데
조조는 낙양성 남쪽에 묻었다고 한다.
'중앙완재(中央宛在)',
그때 관우의 머리를 묻은 곳이 이 자리라는 것이다.
"조조는 인재를 무척 아끼는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관우는 조조가 아끼는 인재였죠.
조조는 관우가 죽은 것을 보고 괴로워하며
나무로 만든 모형을 목에 달아 장사를 치러주었습니다."
- 안내인
관우가 이렇게 중국의 절대적인 숭배를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
관우는 무사 출신이면서도 춘추를 읽을 정도로 뛰어난 문인이었다고 한다.
문과 무를 겸비한 유일한 성인, 그가 바로 관우인 것이다.
관우는 사당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중국 어디서나 관우를 만날 수 있다.
낙양 시내 한 인쇄공장.
공장 앞에 대형의 관우상이 세워져 있다.
공장 옆 사장의 집에는 거실에 관우상이 모셔져 있다.
관우신은 중국인의 일상과 늘 함께 한다.
회사나 집 어디에서든 사람들은 관우를 신으로 모시고 있다.
"관우를 모신 이후로는 사업이 순조롭게 잘 진행됐고
많은 일들이 잘 풀렸기 때문에 계속 모시게 되었습니다.
관우는 제가 매우 존경하는 신입니다."
- 싱창안, 인쇄공장 사장
중국에서 관우 신앙이 전국적으로 보급된 것은 송나라 때부터였다.
송 휘종 때 관우는 제후에서 무안왕으로 봉해졌다.
무슨 이유로 관우를 높힌 것일까?
송 태조(조광윤, 927~976)는
무를 경시하고, 문치주의를 내세운 왕이었다.
때문에 송나라의 군사력은 크게 약화되었는데
송나라 주변의 나라들은 이를 기회로 송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최고로 강력한 나라는 거란족이었다.
송은 결국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 굴복하고 만다.
무력으로는 더 이상 외세에 대항할 수 없는 상황에서
송나라에서 대두된 것은 주희(1130~1200)의 성리학이었다.
주희는
한족 중심의 정통성을 강조하는 역사책을 쓰면서
삼국시대의 촉한을 정통 왕조로 규정했다.
자치통감강목 - 촉한정통론에 입각하여 서술한 중국의 역사책.
"이 때는 북방민족들이 한족들을 크게 핍박하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이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서 민족적 영웅이 필요했고
그 영웅의 대명사로서 나타난 사람 중에 하나가 바로 관우죠."
- 김운회 교수, 동양대 경영관광학부
관우 숭배가 절정에 이르게 된 것은 명나라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임진왜란 때 조선에 파병을 했던 신종은
1582년 관우의 시호를 기존의 왕에서 '협천대제(協天大帝)'로 올린다.
그후 신종은 16자의 어마어마한 시호를 다시 내리며 관우를 신의 반열에 올린다.
'삼계복마대제신위원진천존관성제군'(명 신종 1614년)
중국 운성시 해주,
관우의 고향이다.
이곳에는 중국 최대의 관우사당이 있다.
관우가 황제로 높혀짐에 따라
묘의 이름도 관제묘로 바뀌었다.
중국 전역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다녀가는데
매년 참배객만 34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은 무엇을 기원하기 위해 이곳을 찾는 걸까?
"전설에 따르면 관우는 시험을 통과시켜주고
액운을 없애며 병과 재해를 없애준다고 합니다.
또한 항상 보살펴 주고 보물과 재물을 불러준다고 합니다."
- 안내인
관우신을 찾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재물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관우는 왜 재신으로도 모셔지는 것일까?
관우의 고향인 해주에는
중국 최대의 소금호수 해지(解池)가 펼쳐져 있다.
중국 소금 생산의 70%를 생산할 정도로
해주는 옛부터 유명한 소금생산지였다.
과거 산서성의 소금장수들은 장사를 하며 관우신을 모셨는데
이들을 통해 관우가 재신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맨 처음에는 산서 상인들이 관우를 모시기 시작했고
그 다음에 산서 옆에 섬서, 그 다음에 감숙성 상인들,
이 세 성의 상인들이 다시 융합해서 관우를 모시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점점 전국적으로 퍼져서 모든 상인들이 관우를 신으로 모시기 시작한 거죠."
- 정원기 교수, 삼국지 연구소 소장
북방 이민족에 의해 세워진 청나라에서도 관우신앙은 계속 이어졌다.
당시 전국에 지어진 관우묘는 30여 만 개,
공자묘 3천 개보다 무려 100배나 많은 수였다.
중국 북경 역대 제왕의 위패를 모신 사당.
이곳에는 삼황오제부터 명,청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황제 188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그런데 이들 중에서도 아주 특별하게 모셔진 한 사람이 있다.
바로 관우다.
다른 왕들과는 달리 관우만 별도의 사당에 모셔져 있다.
"관우는 제왕으로 봉해졌을 뿐만 아니라 용맹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사당 안의 사당에 따로 모시는 것입니다.
또 역대 황제를 수호한다는 깊은 뜻도 내포되어 있죠."
- 조우찌엔, 관광문화유한공사 부사장
장수에서 제후로,
제후에서 왕으로,
마침내 신으로 모셔진 관우.
이렇게 관우는 마침내 중국 최고의 신이 되었다.
3. 정사 삼국지와 소설 삼국지연의 비교!~
중화주의로 과대포장된 삼국지연의, 민중 속 큰 인기!~
"중국인들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관우의 사당이 있다고 할 정도로
관우는 중국인들이 가장 숭배하는 신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관우하면 소설 삼국지, 그러니까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떠올립니다.
이 소설속에서 관우는 유비에게 의리를 다하는 충의의 화신으로
또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며 적을 무찌르는 용맹무쌍한 영웅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것도 삼국지연의를 통해서였을 텐테요,
과연 소설 삼국지는 우리에게 언제 알려지게 된 걸까요?"
조선에서 발간된 가장 오래된 삼국지의 판본,
<신간교정고본대자음석삼국지전통속연의>.
이 판본은 언제 간행된 것일까?
책에는 1567년 제주에서 간행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567년은 선조 즉위년.
그렇다면 선조 이전에 간행되었을 수도 있다.
"이것은 복각본입니다. 번각본입니다.
그 원본은 1552년에 중국에서 간행된 삼국지입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1552년에 전래가 되어서 유통이 되다가 1567년에 간행이 되었으니까
거의 한 15년 만에 국내에서 판각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박재연 교수, 선문대 중어중국학
삼국지연의에 대한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은 언제일까?
선조실록 2년에 처음 삼국지연의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장비의 고함에
만군이 달아났다고 한 말은
정사에는 보이지 않는다."
- 선조 2년(1569년) 6월 29일
이는 선조가 기대승과 나누었던 대화로
당시 기록을 보면 삼국지연의가 이미 간행되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당시 조선 왕실에선 삼국지연의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괴하고 황당무괴한 책이라고 하며 삼국지연의를 봐서는 안 될 책으로 여겼다.
당시 조선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심지어 삼국지연의를 불태워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삼국지연의는 왜 이렇게 비난 받았던 것일까?
삼국지연의는
2세기말 진수(陳壽)가 쓴 정사(正史) <삼국지>를 각색해서 쓴 소설이다.
오랜 세월 민간에서 떠돈 각종 야사가 섞이고
문학적인 상상력까지 더해지면서
삼국지연의는 정사와는 상당히 달라지게 되었다.
"역사 나열이 아닌,
역사에 나오는 인물과 역사 내용에 생명을 불어넣은 거죠.
하나의 예술적인 가공을 가해서 생명을 불어넣어서
하나의 완전히 살아있는 인물들을 만들어 낸 거죠.
그래서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엮어낸 거죠."
- 정원기 교수, 삼구지 연구소 소장
그렇다면 정사 삼국지와 삼국지연의는 얼마나 다른 것일까?
관우를 중심으로 두 책을 비교해봤다.
청룡언월도를 들고 적토마를 달리는 용맹한 사나이,
이는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관우의 모습이다.
관우가 썼다는 청룡언월도는 무게만 약 80근으로
요즘으로 치면 40킬로그램이 넘는다.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는 적토마는
동탁과 여포, 조조를 거쳐 마지막으로 관우가 넘겨받아 죽을 때까지 탔다고 한다.
이것은 모두 사실일까?
정사 삼국지 어디에도 청룡언월도에 관한 기록은 없다.
적토마는 대단한 명마라는 내용만 있을 뿐 관우가 탔다는 말은 없다.
"사람 가운데 여포가 있고
말 가운데 적토가 있다."
- 삼국지(정사) 위서 여포전
"청룡언월도가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은
당나라도 넘어서 송나라 초기에나 들어와서 보편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 시절 삼국지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맞고,
그리고 적토마는 대단히 우수한 말이라고,
명마라고 여러 사서에도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적토마의 주인이
동탁, 여포, 관우가 죽을 때까지 탔다고 한다면
무려 30년이 넘게 타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현대에도 명마라고 한다면
그 전성기를 10년 이내로 잡는데
이렇게 된다면 이것도 있을 수 없는
한 마디로 소설적 각색 또는 윤색이라고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다."
- 김상엽 박사, 문화재청
삼국지연의의 대표적인 명장면 하나가
명의 화타가 관우를 치료하는 장면이다.
관우는 번성공격에 나섰다가
오른쪽 팔에 화살을 맞았는데
이를 화타가 치료해줬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정사 삼국지에는
거란 24년 관우가 왼쪽 팔에 화살을 맞은 것으로 되어있다.
"화살에 왼쪽 팔이 뚫렸다." - 삼국지(정사) 촉서 관우전
그리고 관우를 치료한 화타는
이미 거란 13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실은 화타는 관우가 번성을 치기 이미 11년 전에 죽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관우랑 화타는 만난 적이 없고,
삼국지연의에서는 관우가 오른손을 다쳤다고 되어 있는데
그렇지 않고 왼손을 다쳤습니다."
- 김상엽 박사
삼국지연의에서 관우의 무용이 가장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이른바 '오관참장(五關斬將)'이란 사건이다.
관우는 조조에게 잡혀있다가
유비가 원소에게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두 형수를 모시고 유비를 찾아나선다.
관우는 오관문을 통과하면서
조조의 군사들과 맞딱드리게 되는데
이때 관우는 단칼에 조조의 장수 여섯을 목을 베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는 관우의 무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위나라 공수가 이끄는 500명의 군사를 관우가 홀로 대적했는데
청룡도가 햇빛에 번쩍하니 공수가 죽었다."
그러나 이 사건 역시 정사 삼국지에는 찾아볼 수 없다.
"관우가 원소에게 머무르고 있는 유비에게 돌아가려고 하자
조조는 '사람은 각기 주인이 있으니 쫓지 말라'고 하였다."
- 삼국지(정사) 위서 무제기
정사에 기록된 것은 유비에게 돌아가는 관우를 쫓지 말라는 간단한 말 뿐이었다.
그렇다면 삼국지연의는 왜 관우를 이렇게 각색한걸까?
"관우를 능가하는 무용을 지닌 사람들이 그 시대에 얼마든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의리만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의리만 해도 관우 이상의 의리를 갖춘 사람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왜 그러면 관우가 인기를 얻게 되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중화민족주의, 성리학적 혜택을 입은 것이지,
아주 엄밀히 개인적으로 봤을 때 지나치게 과대 포장되고 과대 평가되었다
이렇게 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죠."
- 김운회 교수, 동양대 경영관광학부
초창기 많은 비난을 받았던 삼국지연의는
시간이 지날수록 민중들의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집집마다 읽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였고
심지어 과거시험에 문제로도 출제되었다.
"집집마다 외다시피 하며
과거시험에서 시제(試題)로까지 삼아"
이처럼 삼국지연의가 널리 읽히면서
조선에서 관우는 문무를 겸비한 의리의 화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4. 명.청 교체, 그러나 명을 향한 조선의 소중화 의식!~
숙종 이후의 역대왕들의 왕권 강화에 관우 신앙은 확산!~
"칠실삼허(七實三虛), 이 말은 삼국지연의를 두고 나온 말입니다.
그러니까 '칠은 사실이고 삼은 허구다'는 것입니다.
삼국지연의가 정사가 아니라 각색이 된 소설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것입니다.
초창기 삼국지연의는 황당무계한 책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상당한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 덕분에 조선사회에서도 관우신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죠.
관우신앙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은 숙종대에 이르러서입니다."
서울 숭인동.
이곳 동묘는 현재 대규모 공사 중이다.
지은 지 400년이 넘어가면서 개보수해야 할 곳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지붕의 기왓장은 다 들어낸 상태이고
군데군데 썩은 서까래도 모두 교체될 예정이다.
그런데 공사를 진행하면서 드러낸 서까래 밑에서
이미 두 차례나 동묘에서 공사를 진행했었다는 기록을 만났다.
숙종과 고종 대 두 차례였다.
동묘를 지은 지 약 100년후인 숙종 29년,
엄청난 규모의 보수공사가 이루어진 것으로 적혀 있다.
"그 당시에 이제 공사의 범위를 보면 기록에 의하면 정전을 해체 수리한 것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때 공사가 워낙 크기 때문에 관우상도 신문(神門)이라는 곳에 옮겨놨다가
수리가 완전히 끝나고 나서 다시 또 봉안을 하는 그 정도 규모의 공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 김왕직 교수, 명지대 건축학
실제로 숙종은 방치되었던 관왕묘를 보수하고
관리를 보내 관왕묘에 제사 지내게 했을 정도로 관왕묘 관리에 적극적이었다.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라" - 숙종 17년(1691년) 2월 27일
이전 왕들에게선 볼 수 없었던 일, 숙종은 왜 태도를 달리했을까?
충북 괴산.
화양계곡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만동묘가 세워져 있다.
만동묘는 숙종 30년 송시열의 뜻으로 지어진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에 대한 보은으로
명나라 황제에 대해 제사를 지내던 곳이 만동묘였다.
이 무렵 국방의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청나라,
누르하치(청 태조 1559~1626)
동북지방 전부를 평정한 청나라는 급기야 명나라까지 무너뜨린다.
200여 년간 지속되었던 명나라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청나라가 대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당황하고 있었다.
천하의 중심 명나라가 사라진 현실,
조선으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200년 동안 안정적으로 지속되던
명나라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가 붕괴되어 버리는 전례없던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청나라가 명나라를 대체했다고 하는
사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을 설명하고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됩니다."
- 허태용 교수,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
당시 조선 지배층에선 새로운 체계로 현실의 문제를 받아들이고자 했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소중화 의식'이다.
이는 조선이
명나라를 대신할 새로운 중화이며
명나라의 계승자라는 것이다.
이리하여 만동묘라는 이름을 짓게 된 것인데
'만동'은 만절필동이라는 말에서 온 말이다.
만절필동은 강물은 만 번을 꺽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으로
명의 문화는 조선만이 받아들이고 꽃 피울 수 있다는 속뜻이 숨어있다.
숙종 연간 조선엔 모종강 판본의 삼국지연의가 들어왔는데 그 인기가 대단했다.
모종강의 삼국지연의는 당시의 역사 인식을 강화하는데 한몫을 했다.
책의 서문엔 독삼국지법이라고 해서
이 책이 촉한이 정통이라는 인식하에 씌여졌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정통성을 잃지 않은 왕조들을 강조하는
역사인식을 새롭게 만들어 내게 되는데요,
이 과정 속에서 가장 중요시 되었던 왕조가
금나라에 쫓겨서 내려가있던 남송과
서쪽에 치우쳐 있던 촉한이었습니다.
이 두 왕조를 정통으로 인식하는 역사인식을 강조할 수 있다면
청나라 아래의 조선도 중화의 위상을 차지하는데
커다란 어려움이 없다라고 하는 논리적인 설명을 할 수 있었던 것이죠."
- 허태용 교수,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
이런 분위기 속에서 숙종은 자주 능행을 하며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그 때마다 군사들과 관왕묘를 참배하고 관우의 충의를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관우의 충정을 노래하는 시를 직접 써서 누각 위에 걸어두게 했다.
"평소에 내가
수정공을 사모함은
절의와 정충이 높아서이네"
- 숙종 18년(1692년) 9월 15일
"왕의 권위라는 것이 흔들리고 있었고
심지어는 군사권마저도 소위 붕당들의 사병화 되는 그런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숙종에게 절실한 것은 바로 왕권강화의 문제였는데요
따라서 숙종은 왕권강화를 위한 어떤 영웅적 존재로서 관운장을 주목했다고 봅니다."
- 서영대 교수, 인하대 사학
숙종 이후 조선왕들의 관우숭배는 계속 됐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관왕묘에 참배했다.
또 갑옷을 입고 관왕묘에서 군례를 행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예법과 그 절차가 기록된 <국조속오례의>.
영조는 당시 국가 의례를 다시 정리하면서
관왕묘에 대한 제사를 국가 제사인 '소사(小祀)'에 포함시켰다.
정조도 관우 추증작업을 이어갔다.
사조어제무안왕묘비.
정조는 자신을 포함해 숙종, 영조, 사도세자,
이들 네 임금의 이름으로 비석을 세우고
관우를 찬양하는 글을 새겨넣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비문에 정사가 아닌 소설 삼국지연의의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천리적토' '팔십청룡'
"관운장이 청룡언월도를 사용했다든지,
또는 관우가 오관의 다섯 관문을 지키는 장수들을 죽였다든지,
하는 내용들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걸 보면 역시 관운장 신앙의 확대에는
2세기 후반 진수가 쓴 삼국지보다는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가 훨씬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여집니다."
- 서영대 교수, 인하대 사학
조선 왕조에서 관왕묘를 인정하면서 관우신앙은 민간으로도 퍼져나갔다.
관왕묘에서 몰래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크게 늘면서 국가에서 이를 금지시켜야 했을 정도였다.
5. 관우신앙의 현주소!
무속신앙, 미륵신앙 속으로!~~
"관우가 이처럼 조선에서도 신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충의 존재인 관우를 부각시킴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던 조선왕들의 정치적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왕실에서 시작해서
민간으로까지 확산된 조선의 관우신앙은
이후 어떻게 변화되어 갔을까요?"
서울 명륜동.
이곳에 북묘가 있었다고 한다.
이곳이 북묘터임을 짐작케 하는 게 있다.
바로 하마비,
하마비는 조선시대 종묘와 궐문 앞에 세웠던 비석이다.
인근 주택가 골목에 북묘터를 알려주는 또 다른 단서가 있다.
이곳에 살았던 우암 송시열이 남긴 글씨.
벽에 새겨진 '증주병립'이란 글자가 그 단서다.
'증자와 주자의 사상을 벽에 새겨 세운다'라는 뜻이다.
국립중앙박물관.
북묘 앞에 세웠던 묘정비가 이곳에 세워져 있다.
비석엔 북묘를 세우게 된 이유와 건립과정이 자세히 적혀 있다.
또 북묘의 위치를 짐작케 하는 단어도 있다.
북묘는 '증주병립' 바로 아래에 지어졌던 것이다.
고종은 관우신을 기리는 마음으로 비문까지 직접 지었다.
"실제로 갑신정변 때 북묘로 피신했을 만큼
그리고 그의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만큼 개인적인 신앙적 관심이 높았고요,
당시의 시대가 외세의 열강들이 조선으로 침략한 때였기 때문에
관우의 음조를 빌어서 외세를 물리치고자 했던 의도를 이 안에 담아냈습니다."
- 장장식 박사, 국립민속박물관
고종 때 북묘가 세워진 이후 서대문 밖에도 관왕묘가 세워졌다.
서울 천연동 서묘터.
이곳이 당시 서묘가 있었던 자리.
서묘는 1902년 특정권 조병식의 주청으로 세워진 것이다.
"우리나라에 관우 장군을 모시는 곳은 많은데
유비와 장비를 모시는 곳이 없다 해서 그 분들을 모셔야 된다는 주청에 따라서
이 자리 즉, 맹아원 자리에 관우묘를 짓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관우 장군을 더 숭상하다 보니까
특히 이 지역을 '관우묘'라고 불렀고
방위상 서묘라고 불렀던 것이죠."
- 장장식 박사
이로써 서울에는 동서남북 네 곳에 모두 관왕묘가 들어서게 된다.
고종은 관우신앙에 가장 적극적인 왕이었다.
고종은 관우를 황제로 높였다.
사당의 현판들도 황제로 고쳐 다시 걸게 했다.
고종의 적극적인 시책으로
초창기 여섯 개에 불과했던 우리나라 관왕묘는
고종 때에 전국에 30여 개로 크게 늘어났다.
그 당시 전주에 세워졌던 관성묘(關聖廟).
1895년 관찰사 김성근이 유지들의 뜻을 모아 세운 사당이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관우신을 모시고 있다.
그런데 이곳에서 관우는 개인의 운명을 점치는 신으로 모셔진다는 것이다.
점은 산가지를 뽑고 점서를 해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관우신은 민간에 정착되는 동안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책임지는 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어른을 받드는 부분은 첫 번째로 관살을 막아준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관운을 받고자 합니다.
세 번째는 병을 다스리는 곳이다 해서 이곳을 많이 찾고 있습니다."
- 김진문 관성묘 운영
그런데 대한제국의 국운이 기울면서 관우신앙도 급격히 쇠퇴했다.
대부분의 국가제사가 폐지되면서, 이 과정에서 관왕묘의 제사들도 폐지되었다.
"독립국가의 표상이었던 국가제사,
국가에서 신들과 바로 통할 수 있다고 하는 면이 용납될 수 없는 부분이었고,
따라서 국가제사가 전반적으로 폐지되게 됩니다.
그 때 관운장을 모시던 동묘라든지, 남묘라고 하는 것도
국가제사에서 제외되게 되는 것입니다."
- 서영대 교수
이후 우리나라의 관우신앙은 어떻게 되었을까?
백자 교각에 새겨진 관성교 성전.
관성교는 1920년대 조성된 신흥종교로 관우신앙을 가진 이들이 만든 조직이었다.
관성교도들은 동묘에 본부를 두고 관우신을 모셨다.
신도들 중에는 상인들이 많았다고 한다.
동묘 앞에 세워져 있는 석등.
백목전에 받쳤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백목전 진상(白木廛 進上)'
당시 상인들의 종교활동을 엿볼 수 있다.
관우신앙은 1900년대 중반까지도 대중적인 호응을 얻고 있었다.
"관왕묘에서 점 보는 사람 오천 명 돌파." - 고려시보 1939년 3월 1일.
그러나 동묘에서의 종교활동이 금지된 후 관성교는 서서히 사라져 갔다.
관우신앙의 열기도 점점 사그라들었다.
우리나라에 아직 관우신앙의 흔적이 남아 있을까?
강화도 동관제묘.
이곳에선 무속인들에 의해 대대로 관우가 모셔지고 있다.
관우신앙은 이렇게 무속신앙의 일부로 편입되었다.
미륵대도 금강연화종 - 인천
신흥종교에서도 관우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관우는 미륵부처를 수호하는 최고의 신으로 모셔지고 있다.
"관성제군님이시라고요,
미륵부처님이 오실 때,
미륵부처님을 호위하시는 도와주시는 신장님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 이길례
"한국 종교에서는 옥황상제나 미륵불을 호위하는 가장 중요한 신격으로서 이해되고 있고요,
그 이후에는 삿된 기운, 귀신을 쫓는 가장 절대 권력을 지닌 신장,
혹은 수련하는 자들을 보호하는 그런 신격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런 신앙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갖춰야 될
모든 덕목을 구현하는 인물로 믿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관제신앙은 그 맥을 계속 이어나갈 것이라고 봅니다."
- 김 탁 박사
400여 년전 임진왜란을 계기로 우리나라에 전래된 관우신앙.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이 땅에 뿌리내린 관우신앙은 지금도 다양한 형태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오늘 우리는 우리나라에 관우신앙이 어떻게 들어왔으며 어떻게 정착되어 왔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물론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관우신앙에 여러 가지 변화는 있었지만 그 명맥은 꾸준히 이어져 왔고
아시아지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관우가 신으로 모셔질 수 있었던 것은
이상적인 덕목이라고 여겨졌던 충과 의를 바로 관우에게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