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리 따라 동원된 기적의 삶
술과 도박에 젖은 아버지가 말씀을 듣고 새 사람이 되셨다
신철원 구은지 가정
1. 출생과 가정환경 2. 종족적 메시아 선포 3. 입교 동기 4. 약혼 5. 약혼 후 임지생활
6. 예물 때문에 약혼을 취소할 뻔 7. 남편이 직장 사업대원으로 동원 8. 임신을 위한 철야정성 9. 남편이 의식 상실 및 친정으로 동원 10. 시댁 동원 및 환고향 섭리 동원 11. 시댁에서 쫓겨나다 12. 교회장 발령받다 13. 160가정 활동 14. 남편과의 연락 두절 15. 40일 금식 16. 하늘이 보내신 선문부인회 17. 조국광복을 위한 입적 임지동원 18. 밥상 위의 유골함 19. 천심원의 계시 20. 40일 여수해양수련 21. 12시간 참아버님 말씀 22. 천심원 매칭 23. 교회의 실적 24. 타락성과의 싸움 25. 목회자 43가정 실세화 승리 보고 26. 시설에 계신 시어머님을 집으로 모시다 27. 부모를 모심으로 받은 축복 28. 청양군수 축복식 및 참어머님 하사금 29. 여성연합 활동 30.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이 더 크다
1. 출생과 가정환경
나(구은지)는 경북 청도군 이서면 고철리, 시골의 작은 동네에서 완고하신 아버지와 인자하신 어머니 사이에 3남 4녀 중 3녀로 태어났다. 경제적으로는 그리 넉넉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어렵지도 않은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정서적으로는 몹시 불안정한 환경이었다. 아버지가 호랑이처럼 무섭게 심한 잔소리를 하였기에 온 가족이 늘 긴장되고 불안한 가운데서 숨죽이며 생활했다. 언제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 가족 모두가 마음을 졸이며 살고 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빨리 사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정서가 불안했다. 마침내 더 이상 집에서 살기 싫어서 고민하다가 가출의 기회를 찾았다. 그 때에 마을에 1년 선배가 중학교 시험에 떨어져서 창피하다고 집밖에도 못 나오고 방에서만 지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보다 공부도 잘했고 똑똑한 선배였는데도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것을 보고는 나는 아예 시험에 응시할 용기를 못 내고 포기했다. 시험을 봐서 떨어지면 당장 아버지한테 호되게 야단맞을 생각에 두려움이 앞섰고, 선배처럼 나도 창피해서 문밖에도 못나올 것을 생각하니 차라리 중학교 시험을 치기 전에 빨리 가출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서울에 사는 친구와 연락해서 서울역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아무도 모르게 서울행 열차를 탔다. 그리고 도착한 후 친구의 소개로 만리동에 있는 약국 점원으로 일단 취직을 했다.
그러나 1년도 안 되어 오빠가 보낸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언니가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운명했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다. 나는 어렵게 서울로 가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안정되게 적응을 하려는 시점에서 서울 생활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무섭고 잔소리가 너무 심하신 아버지만 없으면 우리 집이 평화스러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데, 착한 언니가 죽은 까닭이 아버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생겼다.
무서운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어질고 선한 사람이라고 동네 주민들로부터 인정받는 착한 분이셨다. 오빠가 마을의 이장을 하고 있었기에 면사무소 직원들이 우리 집을 자주 방문했다. 그리고 그들이 엄마의 인품에 감동을 받고서는 엄마에 대한 소문을 면내로 퍼뜨렸다. 엄마는 온순하시고 인자하시기가 천성적으로 타고 나셨던 분이셨다. 내 기억으로는 엄마에게 야단맞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잔소리도 안 하셨고 집안일도 안 시키셨다. 자녀들이 크면 다 알아서 잘 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계신 어머니였다.
또 아버지는 술과 담배를 하셨고, 도박까지 하셔서 1년 지은 농사를 겨울에 도박으로 다 날리셨다. 경찰에 쫓겨 다니면서도 이웃동네까지 젊은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며 도박을 하여서 수많은 재산을 탕진했다. 돈을 많이 잃고 귀가한 날은 식사를 하면서 손을 심하게 떠셨다. 보기에 너무 불쌍해 보이기까지 했던 기억이 지금도 잊어지지 않는다. 도박으로 돈을 모두 잃은 날은 잠도 못 주무신 채 밤을 새우셨다. 집에 오셨을 때는 맥이 다 풀린 상태였으나, 다시금 좌절하지 않고 힘을 내어 산에 나무하러 가셨다. 자식들에게는 절대 약한 모습이나 게으른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다. 자식들에게 만큼은 본 된 모습을 보이려고 무던히도 애쓰시던 모습이 생각난다.
내가 주체(신철원)와 약혼 후 임지에 나갔을 때, 동생 정분이가 경북교구에서 헌신생활을 하던 중, 아버지를 7일 교구 수련에 참여시켰다. 감동을 받은 아버지는 음주와 흡연, 도박까지 일체 끊으시고 그 무섭던 성격도 온순해 지셨다. 참부모님의 말씀이 술과 도박에 절은 아버지의 성품과 인격을 바꾼 기적 같은 사건이 생겼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는 엄격해도 동네에서는 경우가 밝고 확실하신 어른으로 인정을 받으셨다.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자녀들의 훈육을 전혀 안 하시니까 아버지가 어머니의 몫까지 그렇게 많은 잔소리를 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잔소리가 많을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가 조금 이해되기도 한다. 아버지에 대한 상흔(傷痕)의 고통과 이해라는 두 단어가 겹쳐진다.
아버지께서는 남동생이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에 보험회사로부터 받은 보상금 전액을 면단위 통일교회 부지 구입에 헌금하셨다. 말씀으로 변화하신 아버지, 말 그대로 부활 중생하신 아버지는 하늘 앞에 무엇이라도 기쁜 마음으로 헌금하시기를 즐겨하셨다. 30리길을 걸어 가셔야 교회 예배 참석할 수 있었는데 버스비를 아껴서 한 푼이라도 더 헌금하시려고 걸어 다니셨다. 어릴 때는 철없이 아버지가 사망하기를 바랐지만, 그 아버지가 계셨기에 내가 태어날 수 있었고, 또 그 아버지 때문에 사람을 선하게 만드는 종교였던 통일교회를 찾았다. 그래서 아버지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다.
내 언니와 동생은 결혼할 나이에 불의의 사고를 당해서 먼저 영계로 갔다. 자식을 먼저 영계로 보낸 부모님의 슬픔과 그 상처가 얼마나 크셨을까? 그 심정을 시간이 많이 지나 부모님이 성화하신 후에야 내가 알게 되었다. 부모님이 성화하시기 전에 한번이라도 자식을 둘이나 잃은 고통스런 심정을 위로해 드리지 못하고 항상 내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고 아버지를 원망하며 불효했던 지난날에 대한 후회가 가슴에 한이 되어 남아 있다. 이런 고통스런 심정을 다행히 청평의 조상해원식과 축복식을 통하여 풀 수 있게 되어서 정말 감사하다. 아픔과 고통과 슬픔과 원한의 덩어리가 청평수련원에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은 축복가정에게 주어진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다른 종교가 갖지 못하는 놀라운 특징이고 장점이다.
2. 종족적 메시아 선포
아버지께서는 1988년 6500가정 때 기성 축복을 받으셨다. 축복비도 당신이 직접 마련하시고 고령이심에도 3일 행사를 정식으로 치르셨다. 지상 생애에서 참부모님을 모시는 축복가정이 되신 것은 영원히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우리 형제자매들이 부모님께서 축복가정이 되게 안내를 해 드린 것은 효도를 한 것으로서 자부심이 되고 있다. 성장기간에 갖게 되었던 아버지에 대한 아픈 추억들도 축복가정이 되신 사건과 동시에 소멸되었다.
1994년 82세의 일기로 성화(聖和)하시기 몇 달 전, 아버지의 생신 때에 자녀들과 친척 그리고 동네 주민들 앞에서 종족적 메시아 선포식을 하셨다. 인생 마무리를 멋지게 하신 것이다. 아버지가 성화하실 때 청도교역장께서 꿈을 꾸셨다. 영계의 조상들이 3층천 기와집에서 “지상에서 살아생전에 노아 할아버지와 같은 절대 믿음의 신앙을 실천한 대단한 분이 오시니까 대청소를 하자.”고 하면서 한바탕 난리가 났다고 증거하였다. 또한 아버지 성화 후 교역장께서 꿈에 아버지가 나타났을 때 대화를 나누었다. “구 집사님 영계에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라고 묻자, 아버지는 “종족적 메시아로서 조상들의 자리를 배치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답하셨다.
3. 입교 동기
어느 날 집안에서 흑백전단지 한 장을 발견했다. 눈에 확 들어오는 문장이 있었다. “조국이 나아갈 길이 여기 있다!” 국가가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면 국민 개인의 미래 길도 안내해 줄 것이 틀림이 없기에 내 앞길에도 큰 희망을 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그 전단지의 출처가 통일교회였기에 나는 수소문하여 찾기 시작했다. 통일교회가 이단인지 어떤지 전혀 몰랐다. 나는 희망이란 단어의 매력에 이끌려서 무작정 찾아갔다. 희망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다. 그만큼 그 당시 나의 마음에는 절망의 짙은 흑암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집에서 도보로 30분 거리에 있는 양원동에 있는 통일교회를 찾아갔다. 물어물어 찾아간 교회는 어느 가정집이었는데, 그곳에서 개척나온 여자전도사 송묘숙님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인사를 한 후, 곧장 질문을 했다. “이 교회에 다니면 사람들이 다 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물론 이 질문에서 염두에 둔 대상은 다른 사람이 아닌 아버지였다. 나한테 제일 무섭고 힘들게 한 아버지가 변화되기를 바랐다. 속으로 “나와 가족을 괴롭힌 아버지께서 선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갖고 질문을 했다. 나에게는 그만큼 아버지와의 관계회복이 가장 심각한 절체절명의 고민이었다.
남들처럼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면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던 내용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진리를 찾아 참된 생명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신앙을 찾지만, 나에게는 생명의 길을 찾는 것도 아니었고, 행복한 가정을 찾는 것도 아니었다. 오직 잔소리가 많은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교회를 찾게 되었다. 어릴 때는 아버지를 피하고자 가출했지만, 생각을 바꾸어서 피하기보다는 해결방안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경북교구로 7일 수련을 가게 되었고, 수련회에서 원리강의를 들으면서 전반적으로 고민했던 문제들을 시원하게 풀었다. 모두 다 옳은 말씀만 하시는 강사님이 너무 멋있고 위대하게 보였다. 수련 기간 동안 원리말씀이 이해되지 않거나 의심이 되는 부분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많은 은혜를 받아 마냥 즐겁고 행복했다. 마치 다른 세상에 갔다 온 느낌이었다.
당시 통일신학교를 졸업한 송묘숙 전도사님의 지극한 정성 기도가 있었기에 그 영력(靈力)에 끌려서 내가 교회를 찾아갈 수 있었다. 송전도사님은 내 믿음의 어머니가 되셨다. 나는 믿음의 어머님에게 늘 감사드리며 살고 있다. 믿음의 어머니는 가만히 앉아서도 대상자가 찾아오게 하시는 대단한 영력을 갖춘 분이셨다. 통일신학교 시절 참아버님께서 “신학생 가운데 부부가 될 사람이 있다.”고 하셨는데, 나의 믿음의 부모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믿음의 부모께서는 통일신학교 출신으로서 1800쌍 축복을 받은 후에야 그 말씀이 자신들을 두고 하신 것임을 깨달았다. 인간의 미래 운명을 예언하시고 바꾸시는 참부모님의 능력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믿음의 부모인 박준호, 송묘숙 두 분이 통일신학교 1기생으로 다니실 때는 영적으로 밝아 꿈을 통하여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아셨으며, 영력에 의하여 성전 끝에서부터 앞으로 날아서 오기도 하셨다. 정성들이면 하늘은 반드시 함께 해주신다는 것을 늘 체험하시며 사신 분이다. 신령한 삶을 사신 두 분이었다.
내가 목회 30년째 교회 사모로서 지금까지 남아질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의 부모님의 정성과 사랑 덕분이었다. 기도만이 아니라 만날 때마다 용돈을 주시면서 실체적 사랑을 베푸셨고, 돈이 들어가야 할 일이 생기면 평생을 베푸시며 사셨기에 누구보다도 어려우신 가운데서도 항상 나를 챙겨주셨다. 430가정 종족메시아 활동을 할 때도 활동비는 물론 접수비까지 전액을 지원해 주셨다. 그 덕분에 큰 경제적 부담이 없이 앞장서서 완료할 수 있었다.
나는 약혼을 하기 전, 하계 동계 40일 전도기간 동안 소속 교회에서 타 지역의 청년들과 합숙하며 성미(誠米)사업과 전도활동을 했다. 성미사업으로 얻은 수익금으로 교회의 성전 창문에 커튼을 달았다. 정성을 드린 결과로써 제작된 커튼을 볼 때마다 기분이 흐뭇하다. 노력으로 얻은 살림살이가 더 멋지게 느껴지는 법이다.
어느 날 교회에서 혼자 자다가 한밤중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 일어나다가 그만 넘어졌다. 연탄가스 중독이 되었기에 방향 감각을 상실하고 넘어졌던 것이다. 그때 일어나지 않았다면 큰일을 당할 뻔했다. 그 사건을 통하여 항상 하늘이 불꽃같은 눈으로 나를 지켜주시고 계심을 체휼했다.
시골동네라서 낮에는 농사일을 돕느라 나가지 못하고 저녁에 동네를 돌면서 활동했다. 어느 날 밤, 친구의 집에서 남자와 여자 친구들이 추우니까 발을 이불속에 함께 넣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 한창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아버지께서 방문을 열어젖히고 들이닥쳤다. 나에게 당장 나오라며 내 손을 잡아채어 끌고 집으로 오셨다. 아버지는 크게 분노하시며 집안에 있는 큰 감나무에 나를 묶어 놓고 “또 밤에 나갈 거야, 안 나갈 거야?”라며 질책하셨다. 다시는 안 나간다는 약속을 하게하고 다짐을 받은 후에야 묶었던 끈을 풀어주셨다. 그 이후에는 아예 밤에는 대문밖에도 나갈 수가 없었다.
세월이 지난 후에야 아버지가 나를 염려하신 것임을 알게 되었다. 딸이 혹시라도 결혼 전에 이성 친구를 사귈까봐 노파심에서 여식을 지켜주기 위한 깊은 부성애이었음을 깨달았다. 언니를 잃어버린 상처가 크셨던 아버지의 마음도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엄격하게 하시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축복 받기 전부터 아버지를 통해 나를 지켜주신 배후에 하늘의 사랑이 있었음을 인지하게 되었다.
4. 약혼
1973년도 말경 입교하여 1978년 10월에 약혼했다. 수택리 중앙수련소로 약혼하러갈 때 교회의 장로와 권사님들은 “전라도 사람하고만 안하면 된다.”고 하셨다. 식구들의 마음에도 영호남의 지역감정이 강함을 느꼈다. 참아버님께서는 나를 먼저 불러 세우시고 주체(신철원)를 나오라 하셔서 매칭해주셨다. 둘이 단상보좌에 앉아 계시는 참어머님 앞으로 나아가서 경배를 드린 후 밖으로 나와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형제가 몇 남매냐?”고 물었을 때, “9남매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에게는 6남매로 들렸다. 더 물어보고 싶은 내용이 있었지만 주체가 피곤해 보였으며 밤이 깊어 숙소로 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나 또한 “참아버님께서 해 주시는 대로 하겠다.”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기에 내일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우리 부부는 그렇게 단 몇 분 만에 매칭이 되었다. 그 후로 그때까지 선생님으로 불렀던 호칭을 참아버님으로 자연스럽게 부르게 되었다. 새삼 참부모님의 부모의 심정이 내 가슴에 다가왔다. 부모와 자녀의 혈연이 형성된 느낌을 받았다. 또한 그것은 이후로 내 인생의 방향을 전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만들었다. 우리 매칭 이후로 참아버님께서 밤이 깊도록 긴 시간을 서 계셨고, 매칭을 위해 이리저리로 다니셔서 다리가 퉁퉁 부으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하며 감사했다. 무엇으로 효도를 해드려야 할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5. 약혼 후 임지생활
수택리 중앙수련소에서 21일 동안의 약혼 수련을 받은 후, 첫 임지는 무안으로 발령받았다. 임지생활을 시작하면서 느낀 것은 시험에 떨어질까 봐 미리 겁먹고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로 가출했던 지난날에 대한 후회였다. 시험에 떨어지면 재도전하면 될 일을 미리 소심하게 걱정하는 내 성격 때문에 진학을 못했던 것이다. 늦게라도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버지께 편지를 써 보냈더니, “잘 생각했다.”고 격려하시면서 중고등부 강의록을 한 박스 사서 보내 주셨다. 마침 교회 청년 식구 가운데 가정교사가 있었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전도와 공부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것이 힘들기도 했으나 정신 집중하여 전력투구하는 생활을 하였다.
임지를 시작한지 1년도 채 안되어 다시 영광으로 재발령이 나서 그곳에서 1981년도에 임지기간을 마치고 수료를 했다. 영광에서 함께 했던 대원들은 정말 좋은 관계에서 임지생활을 즐겁게 보냈다. 혈육의 정보다도 더 깊은 천정의 정을 깊이 느꼈고, 감사했다.
6. 예물 때문에 약혼을 취소할 뻔
주체(신철원)는 전주에 있는 일신석재에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임지 기간은 끝났지만 아직 축복 전이라 함께 생활할 수가 없었다. 친정으로 가려니 시집가서 쫓겨 왔다고 소문이 날까봐 못 가겠고, 시댁에 가려니까 남편도 없는데 어색해서 갈 수가 없었다. 다시 임지였던 영광으로 갔다. 교역장께서 열심히 활동하셔서 교구 원리수련에 버스 1대의 수련생을 보냈던 적이 있다. 그런데 항상 수련비가 부족했기에 약혼 때 받은 금목걸이와 반지를 팔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먹고 전주 남편한테 가서 말 했더니 아무 말 없이 나가서 한참 후에야 들어와서 허락했다.
금방(金房)에 갖고 갔더니 예상 외로 너무 싼값으로 사려고 했다. 망설이고 있으니까 주인이 “조금 있으면 금값이 오를 것 같으니 좀 있다가 다시 가져오라.”는 말을 했다. 그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팔지 않고 돌아왔더니 주체가 하는 말이 “만약에 팔았다면 약혼을 캔슬하려 했다.”고 하였다. 축복도 받기 전에 미리 받은 예물을 임지 교회장의 활동비로 쓰려고 하니 기가 막혔을 남편의 입장도 이해가 되었다.
7. 남편이 직장 사업대원으로 동원
1982년 축복을 받은 후, 주체는 3년 동원령에 따라 기업체 필수요원으로 직장에 남게 되었다. 근무하면서 사업대원으로 전주 팔복동 교회에서 합숙생활을 하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두 명의 언니들과 함께 주방에서 식사와 청소를 맡아 1년간 무료 봉사를 했다.
남편의 월급은 100% 헌금을 하고 생활비로 월 6만원만 받았다. 나중에는 월 6만원 가지고는 생활비가 너무 부족하여 100% 헌금을 못하여 미납금이 밀리기 시작하였다. 회사가 이천으로 이전하여 사원주택에 전세로 살게 되었다. 전세금 5백만 원을 빼서 미납금을 내고 임지 동원 완료의 수료증을 받게 되었다. 열악한 사정 속에서도 하늘이 명하신 동원 기간을 수료한 것에 감사하였다.
8. 임신을 위한 철야정성
축복 후 몇 년간은 함께 살았지만 3년간 임신이 되지 않았다. 당시 남편은 사원주택 자치회장과 교회 청년부서에 지도가정을 맡았으며 나는 구역장이었다. 내가 임신이 안 되니까 일신교회에서 몇몇 권사님들이 나의 임신을 위해 철야정성까지 들여 주셨다. 그러자 부인회 총무님 꿈에 내가 용(龍)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했다. 아마도 용을 가슴에 품어야 하는데, 용 그림만 그리고 있어서 아직 임신 때가 안 된 것 같았다.
기다려도 임신이 안 되어 남편과 의논을 했다. 서울대학 병원에서 최종적으로 모든 검사를 해보고 임신 가능성이 없으면 입양이라도 하자고 결정했다. 왜냐하면 생리불순으로 가정출발 전에 전주 산부인과에 갔을 때 자궁 발육부진의 검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의사가 애기를 가지려면 치료를 받아야 된다고 했지만 그 치료약은 일본에서 수입해야 하는 약이라 보험이 안 되는 아주 비싼 약이라고 했다. 경제적 부담이 되어서 치료를 못하고 늘 걱정만 해왔다. “불임의 원인이 나의 어릴 적 발육부진이었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대학병원을 1년 이상 불임환자로 정기검진과 자궁내막검사, 나팔관 검사, 복강경 수술을 통한 과정에서 임신반응 검사에 임신으로 판정이 나왔을 때 너무 놀랐다. 그런데, 불가능할 것으로 단념하고 있던 처지였는데, 내가 임신이 된 것을 알았다. 그러나 기쁨보다는 큰 걱정이 앞섰다. 왜냐하면 각종 수술과 치료를 위해 강한 약을 복용했기에 혹시 기형아가 생기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정밀 검사로 테스트를 해 보았지만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특진교수에게 물어보았지만 대답은 기형아가 될 확률이 50:50이라고만 했다. 그 말이 나에게는 100% 기형아로 들렸다. 그래서 그토록 나의 임신 소식을 기다렸던 양가 부모님과 형제, 친척 그리고 동료들에게 임신 소식을 알릴 수가 없었다. 이런 정황이 알려지면서 일신교회에서는 우리가 애기를 낳으면 소를 잡아 잔치한다고까지 했다.
더 검사를 해보고 기형아면 유산을 해야 할지도 모르니 차라리 임신이 되지 않았을 때가 오히려 마음이 더 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신경을 쓴 나머지 초음파검사를 하면서 의사에게 “애기가 들어선 것이 맞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의사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 질문을 처음 받았을 것이다. 그만큼 염려가 떠나지 않는 가운데, 마침내 애기는 정상적으로 잘 태어났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 이후 둘째, 셋째, 넷째까지 1남 3녀의 자녀가 줄줄이 태어났으며 잘 성장했다. 지금은 모두 2세 축복을 받았으며 신앙생활은 제대로 못하지만 자기들끼리는 열심히 살고 있다. 자녀들에게 바라는 우리 부부의 소망은 2세 3세 손주들까지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상대를 더 위하는 참사랑으로 부부가 하나가 되는 것이다. 또한 이상가정을 완성하여 하늘 앞에 효정의 삶으로 축복가정의 전통을 지키며 사는 행복한 모습을 갖추는 것이다.
9. 남편이 의식 상실 및 친정으로 동원
33년 전, 남편이 일신석재회사 노조원들이 데모하는 것을 막다가 떠밀려서 뒤로 세면바닥에 넘어져서 뇌에 충격을 받아 의식을 잃었다. 나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심각했다. 의사는 남편이 살아난다 해도 식물인간이 될 확률이 높다고 했다. 그때 둘째를 임신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그 충격으로 그만 유산되고 말았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오금이 저려올 정도로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태어나지도 못한 자녀에게 심히 미안하기 짝이 없다. 영계에서 잘 성장하여 축복도 받아서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해 본다.
뇌진탕으로 남편이 입원한 지 8일이 되었을 때 협회로부터 친정으로 가서 활동하라는 동원령이 내려졌다. 남편을 급히 퇴원시킨 후 딸을 데리고 기본적인 살림살이만 챙겨서 6000가정 축복을 받은 동생과 함께 친정이 있는 청도 고향에 갔다. 월세 방을 얻어놓고 전도활동을 시작했다. 활동하던 중 남편을 위한 어혈제 약을 사가지고 집으로 왔다. 남편을 살리기 위해, 동원되어 활동하던 중에 몇 년 동안 불입한 딸 교육보험을 해약하여 해지금 50만원으로 중국제 곰쓸개 2백만 원짜리를 한약방의 식구장로에게 구입하여 남편에게 먹이려고 집에 왔던 것이다. 집을 떠난 지 40일만에 잠깐 들렸던 것이다.
그런데 남편은 “아픈 사람을 놓고 살지 않으려고 살림까지 싣고 나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나는 그 때서야 남편이 나를 그 동안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쨌든 몸이 불편한 남편이 나를 오해하면서 힘들게 생활을 했을 것을 생각하면 미안하였다. 그 약의 효험으로 뇌에 고인 어혈이 풀렸는지 지금까지 후유증이 없이 잘 지내고 있다.
회사에서도 나를 동원에 나가지 못하게 극구 만류했다. 남편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닌데 아내가 동원되어 집을 나가는 것이 무리하게 비쳤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좌고우면하지 않고 동원령을 따라서 집을 나갔고 최선을 다했다. 구약 성서의 사무엘 예언자는 “복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는데, 나도 크게 하늘 앞에 봉헌할 것이 없는 상태에서 명령에 절대믿음으로 충효를 다하자고 다짐했다.
10. 시댁 동원 및 환고향 섭리 동원
이번에는 시댁을 중심으로 동원이 되어 딸을 데리고 다시 시댁 소속인 서천교회로 갔다. 두 분의 선배님과 함께 교회에서 합숙하며 서명을 받는 활동을 중점적으로 했다. 그 이후 귀가하여서 둘째와 셋째가 태어났고, 1991년에 사원주택에서 이천 시내 일심아파트로 이사 나왔다. 그런데 새 아파트에서 6개월이 채 안되어 환고향 동원령에 따라 이삿짐을 풀기도 전에 다시 환고향 이삿짐을 싸야했다. 사실 축복가정들의 환고향 섭리를 통하여 믿음의 기대를 조성한 터 위에서 12월에 참부모님께서 북한 고향 땅을 밟으셨다. 그리고 김일성을 자연굴복시키면서 환고향 실체기대를 승리하셨다. 축복가정들이 이유도 모른 채 환고향 섭리에 복종한 것이 지나고 보니까 참부모님의 북한 정주 고향방문을 위한 정성과 제물이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새삼 동원된 보람을 가졌다.
넷째인 막내 임신이 만삭 중에 있어서 세살된 둘째 딸을 먼저 환고향시켰다. 가족과 졸지에 떨어진 둘째 딸은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엄마가 보고 싶어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라고 노래를 불렀다. 그렇게 노래를 하던 손녀딸에게 할머니는 “내가 그렇게 잘해줘도 매일 엄마만 찾으니까 내가 섭섭하네.”라고 하셨다. 그러자 세 살짜리가 센스 있게 “아니어요, 할머니 이것은 노래예요.”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울고 있었을 딸의 심경을 지금 생각해도 가슴에 짠하게 느껴져 온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모든 인연 중에서도 근본이 됨을 알았다. 그런 딸을 하늘이 잘 지켜주시고 양육해 주셨다. 감사,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후 막내가 태어난 지 100일도 되기 전에 고향복귀를 위해 가족 모두가 시댁으로 동원되어 1992년 2월 구정 때, 1톤 트럭 차량을 구입해 활동하면서 선물로 주려고 여주 생활도자기를 한 차 가득 싣고 고향 복귀의 큰 꿈을 품고 내려갔다. 안정된 직장도 그만두고, 살고 싶었던 안락한 아파트도 뒤로 한 채 환경이 열악한 시골집으로 환고향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활동하기엔 예상하지 못했던 장애물들이 너무 많았다.
하루 세 끼를 기본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시아버님이 식성이 까다로우셔서 끼니마다 새 밥과 새로운 찌개와 새로운 것저리를 준비해야 했다. 항상 새로 만들어야 하는 고된 식사준비로 하루 종일 잠시도 쉴 틈조차 없었다. 아직 출산 후 100일도 안 되어 건강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4명 자녀들을 위한 청소, 세탁 등의 일은 너무나 힘들었다.
고향복귀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우리 가족과 일상생활을 하기 위해 온종일 집안일을 하는 것만도 벅찼다. 부모님께도 도움이 되지 못하고 전도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시 살던 이천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생각과 후회스러운 마음으로 갈등이 생겼다. 그러나 이미 직장에서는 퇴직금까지 받았고, 살던 아파트도 전세를 내놓았기에 그럴 수도 없는 처지라 난감할 따름이었다. 한편으로는 환고향을 하지 않고 평온하게 사는 동료들이 부럽기까지 했다.
1992년 2월에 환고향을 한 후, 4월 10일 세계평화여성연합 창립 일을 맞아 버스 1대를 동원하여 행사장으로 가는 도중에 사고가 났다. 마을 입구에서 우리 뒤에 오던 시내버스가 운전 부주위로 전복되었다. 남편은 우리가 행사장으로 가려고 하는 버스를 세워서 부상자들을 데리고 병원까지 이송한 후 창립식장으로 갔다. 당연히 행사장에 늦었으나 그래도 도착해서 다행이었다. 무엇보다도 위기에 처한 생명을 살리는데 도움을 주었으니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었다. 당시 큰 딸이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항상 사고 난 그 시내버스를 타고 다녔다. 그런데 그날은 절대 버스를 타고 싶지 않다며 걸어갔다. 덕분에 그날 사고를 면했다. 축복 2세라 하늘이 지켜주고 계시다는 사실을 체휼했다. 자녀가 갑자기 이유 없는 고집을 피울 때에는 부모로서 들어줄 필요가 있겠다는 경험을 했다.
11. 시댁에서 쫓겨나다
고향복귀의 꿈만 가졌지 경제적인 면에서는 아무런 생활대책 없이 무작정 환고향을 하고보니 모든 게 녹녹치 않았다. 시부모님 두 분만 절간처럼 조용히 사시는데 갑자기 갓난 애기까지 여섯 식구가 사전 의논이나 허락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네 명의 애기들이 온종일 싸우고 울고 야단법석을 치니 참다못해 어머니께서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께서 시끄러워 신경통이 심해져 그만 살고 싶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아버님이 신경성 통증이 있어 항상 고생하신 분이셨으니 정말 그러시겠구나 하고 이해가 갔다. 더 이상 버티고 있다가는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겠기에 이제 고향복귀의 꿈은 이룰 가능성은 적어졌고, 쫓겨날 신세가 되었다.
급히 친정 언니에게 사업자금 천만 원을 빌려서 서천 시내에서 작은 식당을 개점했다. 요리사로 주방장을 채용했으며, 메뉴로는 각종 해물탕과 볶음밥 등 한식당을 시작했다. 그런데 요리사가 임신 중이었는데 무리해서 그만 유산이 되고 말았다. 갑자기 요리사가 그만두게 되었고, 내가 주방장을 대신하는데 1살과 2살 연년생 두 애기가 식당 홀에 나와 밥을 손으로 집어먹는가 하면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다. 도저히 영업을 계속할 수가 없게 되어 시작한지 불과 몇 개월도 되지 않아 식당 문을 닫게 되었다.
이번에는 남편이 세계일보 신문을 배달하고 일화 대리점을 시작했는데, 그 역시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 일화 대리점 영업을 하면 할수록 적자가 더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이번에도 그만두게 되자 이제 집도 직장도 없어진 처지라 진퇴양난에 처했다. 다행히 비어 있는 장항교회 식구의 집으로 이사를 갔다. 이사한 동네 이름이 북만주였는데, 그 이름처럼 겨울은 너무 춥고 여름에는 지대가 높아 수돗물이 잘 나오지 않아 동네 아래 샘에서 물을 길어다 먹었다. 여섯 식구가 물 부족으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생각조차 하기 싫은 동네였다. 사람이 살 수 있는 동네도 집도 아니었다.
‘참부모님께서 가시는 길은 눈물의 길, 가시밭길, 괴로운 길’이라는 성가 10장의 가사가 잘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어쨌든 명령을 따르다보니 재림메시아께서 걸으신 노정에 작지만 동참했고, 고통과 고난을 당하는 심정을 체휼하는 기회를 가진 것은 다행이었고, 지나고 나니 효도를 한 셈이 되었고, 부족하지만 하늘 앞에 자랑거리가 되었다.
12. 교회장 발령받다
갈 곳은 없지만, 도저히 거기서 살 수가 없는 곳이라고 판단하고, 또 이사를 가기로 결심했다. 그러자 2세 장항교회장이 갑자기 목회를 그만 두고 돌아가서 공직자 자리가 생겼다. 식구들은 목회자 없이 공석인 교회라며 우리에게 교회로 들어가서 살면 좋겠다고 추천했다. 그래서 교회에 들어가 살던 중 교구장의 추천에 의해 1994년 3월 1일부로 장항교회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참부모님의 말씀에 의하면, “모든 축복가정들은 소유권 전환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어떤 기준으로 하는지 협회에 문의했더니, “말씀은 하셨지만 다들 환고향을 해야 할 상황이라 몽땅 바치고 나면 활동을 할 수가 없으니 공문으로는 내지 못한다. 알아서 판단하라.”고 했다. 우리 부부는 나름대로 소유권을 전환한다는 기준에서 일부분이지만 전세를 놓았던 이천의 30평형 아파트를 급히 팔아서 목사님에게 승용차를 사드리고 나머지도 모두 공적으로 썼다. 사탄혈통을 하나님혈통으로 전환한 데 이어서 재산도 일체 전환을 해야 하였다. 천국 가는 길이 좁고 힘들다는 교훈을 몸소 체험하면서 극복했다.
13. 160가정 활동
교회로 들어 간지 처음 2년간은 환경 정리에 많은 투자를 했다. 교회의 주방 확장, 큰 방 겸 응접실 용도로 쓰기 위해 건물 확장, 증축 공사, 화단과 마당 정리 등을 추진하였다. 1997년부터는 160가정 축복활동을 열심히 해서 6500여 가정의 큰 실적으로 교구에서 1등을 하여 상패와 상금을 받았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많은 실적이 우리 가정과 교회에게 기적과 같았다. 이에 대해 청평수련원에 갔을 때에 대모님께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축복시킬 수 있었을까요?”라고 물었더니 “흥진님이 협조해 주셨다.”고 대답해주셨다.
축복 활동비와 접수비까지 들어간 금액이 1억이 넘었다. 교회 식구는 3만가정, 36만의 한일 두 가정과 장로 2명, 권사 2명, 집사 1명이 전부였다. 10명도 채 안 되는 교회에서 엄청난 실적을 세운 것이었다. 160가정을 못하는 식구는 천국에 가지 못할까봐 염려하는 부모의 심정으로 활동비, 접수비까지 지원했다. 가정 당 수백만 원씩, 식구 4가정 전체가 160가정을 완료하였다. 우리 가정은 160가정의 열 배 1600가정을 접수했고, 외부 식구들에게까지 활동비를 받고 160가정을 대신 해줬다. 말 그대로 눈 코 뜰새 없이 바쁜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래도 자식들은 굳건히 잘 성장해 주었다. 부모가 공적인 일로 바쁘니까 하늘에서 많이 도와주신 덕분이었다.
14. 남편과의 연락 두절
1995년 36만쌍 축복식 전날, 미혼 축복 후보자 2명을 데려다 주려고 도고온천 숙소에 간 남편이 돌아올 시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어도 연락이 없어 삐삐를 수십 번이나 쳐봤지만 받지 않았다. 혹시 사고가 나서 실종되었거나 사망한 것은 아닌가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비가 너무 많이 와 홍수로 인해 다리가 끊어져 잘못되었을 것이다. 그러지 않고 살아 있으면 전화를 안 받을 리가 없다는 결론이 내려지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요즘이야 휴대폰이 있으니까 통화가 쉽지 그 당시는 삐삐로 호출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래도 고마운 과학의 이기(利器)였다. 밤새우며 줄곧 삐삐가 울리기를 고대했지만 허탕이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버스를 인솔해 축복식장에 가야 할 목사님이 버스 출발시간이 되었지만 아무런 연락도 없고 전화도 받지 않아서 장로님께 경찰서에 신고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성전에 가서 “남편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36만쌍 축복승리에 제물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으로 할 수 없이 내가 대신 축복식 하객을 태운 버스를 인솔해서 축복식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기서 남편을 만났다. 너무 기가 막히고 속상하니까 ‘왜 응답이 없었냐?’라고 물을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남편은 그저 “깊이 잠들었다.”고만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태연했다. 무뚝뚝하고 무심한 남편, 아내의 애간장을 태워놓는 남편, “남자의 심리적 특성이 저러한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해야 하지만 마음속에 짙게 깔린 타락성 때문에 감사하다는 생각을 못했고 원망과 불만만 가득 찼다. 살아있음에 감사의 환호를 질렀어야 할 것인데, 그러지 못했다. 부부 둘 다 각성할 기회가 생겼다. 타락성을 벗고 부부간에 싸우지 않으려고 갖은 정성을 들였다. 한 번에 만 배의 경배를 드린 적도 있었다.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긴 터널과 같은 곳에서 매일같이 싸우지만 결론은 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교구장님에게 목회를 그만 둬야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러나 친정아버지를 아시는 교구장께서 “영계에 계신 구 집사님이 목회를 계속하길 바라신다.”라는 응답을 주셨다. 3년 전에 종족메시아 선포 후 성화하셔서 영계에 계시는 아버지의 뜻을 전해들은 후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15. 40일 금식
1998년 3월에 예산교회장으로 발령이 났다. 예산으로 부임한 후 1999년 6월 24일부터 26일까지 2박 3일간 설악콘도에서 전국 목회자 부부 워크숍이 있었다. 그때 협회장님께서 전임 이사장님으로부터 재단을 인수받으셨는데 재단의 상황이 한강에 빠진 형국처럼 나쁘다고 하셨다. 그리고 “4억쌍 축복을 승리해야 하는데, 우리가 죽음을 각오하고 열심히 하지 않고는 이 어려움을 극복하여 승리할 수 없다.”며 눈물로 간절히 호소하셨다. 그 말씀을 듣던 중 나는 40일 금식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교회로 돌아와서 그 다음날부터 금식을 하려니 남편이 반대했다. 그럼 목회를 그만두면 금식을 안 하겠다고 했더니 남편은 밖에 나갔다가 한참 만에 돌아와서 금식을 허락했다. 나는 40일 금식을 시작했으나 식구들이 반대할까봐 33일 동안 아무도 모르게 금식을 했다. 33일째 되는 날, 교구에서 예산교회에 지원 활동 나왔다가 내가 금식하는 것을 알게 되어 협회에 보고를 하였다. 협회의 손병호 부장님께서 격려차 방문해서 승리를 위한 기도를 해주셨고, 금식이 끝나는 날에는 협회장님이 미국에서 귀국하시면서 공항에서 곧바로 예산교회로 달려오셔서 승리 축도를 해주셨다. 가문의 영광이고 교회의 영광이었다.
그러나 네 명의 어린 자녀들에게는 많이 미안했다. 끝나는 날이 마침 첫째, 둘째 딸의 생일이었으나 나는 두 딸의 생일도 잊었다. 딸은 기억하고 있다가 한참 후에 그날이 자기 생일이었다고 말해주었다. 큰딸은 한창 사춘기 때여서 엄마의 일방적인 선택과 결정으로 가족들을 힘들게 하는 것을 보면서 나를 이해하는 것이 어려워했다.
성가 10장 ‘내 가오리다’를 계속 틀어놓고 있었더니, 둘째 딸은 “엄마, 어디를 가시려고 하세요?”라며 엄마가 죽으러 가는 줄 알고 “엄마 가지마세요.”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나는 단지 성가 가사의 의미대로 아버님 걸으신 눈물과 가시밭길을 따라 뜻만을 바라보며 가고자 하는 가사를 들으며 뜻만을 위해 살고자 하는 의지를 더욱 굳게 다지며 반복해서 듣고 또 들었던 것이다. 축복가정들은 평생 동안 그런 길을 가야만 하는 팔자인가 보다.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께서 그런 길을 가고 계시는데 어찌 자식된 우리가 편하게 살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여기서 시련 고통이 저기 본향에 이르면 복이 되리라.”는 성가 7장 구절이 반드시 실현될 것이다. 성가 10장과 7장은 축복가정들의 미래를 예정한 것 같다.
40일 금식 끝날 무렵에 냉수를 먹고 체했다. 미지근한 물을 마셔야 하는데 아직 젊은 기운이 남아 있어서 냉수를 마셨나 보다. 마사지 안마사가 하루 종일 손으로 쓸어내려도 체한 것이 안 내려가서 무척이나 고생을 했다. 물을 마시고 체한다는 선조들의 격언이 실감되었다.
금식을 할 때 보다 끝난 후에 더 고생을 했다. 금식은 끝냈지만 음식을 입에 넣기만 하면 토하였다. 물도 냄새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아서 당근 즙을 갈아마셨다. 다시 또 체해서 이제는 정말 죽을 것만 같았다. 도저히 그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병원에 입원했다. 병원에 가만히 누워 생각하니 이대로 죽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금식하다 사고가 났다는 소문이 외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 큰일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죽더라도 소문이 안 나게 교회에 가서 외부 사람 모르게 조용히 죽어야지 하는 생각에 서둘러 퇴원했다. 물 한 모금도 목으로 넘길 수가 없으니 이제 죽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았다.
금식이 끝난 후 이틀이 지날 때까지 물도 못 먹고 열이 나서 방에도 있지 못하고 마당에 있는 평상에 누워 있었다. 목사님은 며칠 후 맞이할 대원들이 사용할 방 증축 공사로 바빴고, 식구들은 이제 금식이 끝났으니 괜찮겠지 하고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런데 모처럼 선배 권사 한 분이 오셨다가 평상에 늘어져 있는 나를 보더니 한마디 말도 없이 급히 나가셨다. 권사님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처럼 내 눈동자가 하얗게 보였고, 그래서 내가 곧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무서워서 바로 나갔다고 하였다.
16. 하늘이 보내신 선문부인회
이제 누가 신경을 써주는 사람도 없고 그대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금식이 끝난 후 3일째가 되는 날에 하늘이 살려 주시려고 선문대 부인회에서 오셔서 자녀들까지 케어해 주며 교대로 밤을 세워가며 나를 도와주었다. 누룽지 끊인 물을 숟가락으로 떠먹여주는 것을 받아먹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토하지 않고 넘길 수 있으므로 비로소 먹을 수가 있게 되면서부터 회복되기 시작했다. 내 믿음의 부모님께서 선문부인회를 데리고 오셨다. 생각할 때마다 감사한다.
협회와 청평수련원에서부터 국내외에 수많은 식구님들의 따뜻한 격려의 말씀과 회복을 위해 보내주신 정성 덕분에 살아나기 시작했고, 선문대 박물관장 사모님께서는 참어머님께서 즐겨 입으셨던 성의를 선물로 주셨다. 많은 분들의 정성과 사랑 덕분에 회복을 할 수 있었다. 살려주신 하늘의 은혜와 사랑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17. 조국광복을 위한 입적 임지동원
2000년도에는 청평 21일 입적수련을 받고 정읍시 옹동면 임지 소속 신태인교회로 출발했다. 초중고와 미취학의 막내까지 아이들 4명을 뒤로 하고 임지로 가는 마음은 무겁기만 하였다. 하루만 엄마가 없어도 안 되는 상황에서 언제 돌아올지, 기약도 없이 가족들을 뒤로 하고 조국광복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임지로 갔다. 임지 사택 환경이 아주 노후화되어 있었다. 주방의 천정에서 갑자기 쥐가 떨어지는가 하면 쥐가 전깃줄을 끊어놓기도 했다. 열악한 환경에 적응하느라 한 동안 고생하다가 도저히 못 살 것 같아 방치해 둔 별관을 수리했다. 쥐를 보면 기겁을 하는 내가 쥐와 함께 살아야 했으며, 그와 같은 상황에서 매일 소리치며 놀래며 생활하다가 더 이상 살 수가 없어 별관으로 이삿짐을 옮겼던 것이다.
18. 밥상 위의 유골함
일본에서 먼저 온 1800쌍 선배와 별관에서 간단한 살림을 시작했다. 함께 생활하던 중 선배 대원이 밥상 위에 예쁜 항아리를 올려놓고 식사를 하기에 뭐냐고 물었다. “영계로 간 딸을 화장한 유골함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기절할 뻔 했다. 고인이 된 가족의 유골함을 밥상에 얹어두고서 식사를 한다니… 한국인의 정서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이었다. 일본에서도 모두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딸에 대한 아픔과 슬픔이 아주 많았나 보다. 나는 몹시 언짢았으나 전혀 내색하지 않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마음을 진정시킨 후, 태연하게 “따님이 많이 보고 싶겠어요.”라며 위로해드렸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나 자신의 성숙한 모습에 자신도 놀랬다.
그 이후부터 방안에 잘 보이는 곳에 모셔놓은 유골함을 늘 바라보며 생활해야 하는 심리적 어려움이 컸다. 40일 금식 후 아직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영양섭취를 잘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러지 못했다. 식욕을 잃어 세 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고생을 많이 했다. 이번 일로 인해 일본사람들은 조상들을 가까이 모셔놓고 함께 생활하는 문화를 알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의 등에 업혀 장례식에 갔다가 던진 접시에 맞아서 손이 찢어져서 병원에 가서 꿰맸던 트라우마가 있다. 그래서 지나가다 상여만 봐도 무서워했고 장례식장에 가도 그 기억 때문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데 시신(유골함)과 한 방에서 지내야 했던 임지생활은 극복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그래도 그 언니의 도움으로 교회의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사람마다 장점과 단점이 있는 법이다.
19. 천심원의 계시
교회의 재정이 어려워 수도, 전기, 전화 등 공과금을 몇 달간 미납되어 끊길 위기에 있을 때 입적 임지 동료였던 나나꼬씨가 백만 원을 헌금했다. 청평 정심원(천심원)에서 기도를 했는데, “예산교회가 어려우니 도와주라.”는 계시를 받았다고 했다. 며칠만 늦었어도 전기와 수도, 전화가 끊길 뻔했는데 입적 임지 동료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겼다.
신태인교회가 정읍교회로 통합되어 정읍교회로 임지를 옮겨 활동하던 중 이제 집에 가서 애들을 돌보며 소속교회에서 활동하라고 하시는 국가메시아 회장 사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아쉬움을 갖고 입적임지를 떠나왔다.
남편은 목회 신학을 하지 못한 가운데 환고향섭리로 인해 얼떨결에 목회자 발령을 받았다. 그래서 남편은 예산교회 시무 중에 늦게나마 25기 순전단 6개월과 2004년에 가정연합 부설 선문목회대학원에 다녔다. 그 때문에 나는 항상 바쁘게 살아야만 했다. 급한 마음에 옥상에서 계단을 뛰어내려오다 헛딛는 바람에 수돗가 모서리에 넘어져 입술이 찢어져 구급차로 실려 가는 어려움도 겪었다. 지금도 그 자국을 보면 많은 기억들이 스쳐지나간다.
교회 봉고차가 노후 되어 교체해야 되는 상황에서 어느 기부자가 통장으로 갑자기 2천만 원을 입금시켜 주셨다. 너무 부담스러워 되돌려 드리려 했으나 끝까지 받지 않으셔서 9인승 카니발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 분께 감사드린다. 구약성서를 보면, 엘리야가 바알신을 숭배하는 아합 왕의 박해를 피하여 요단강 동편 그릿 개울에서 숨어 지낼 때에 여호와께서 까마귀를 보내시어 음식을 제공해 주셨다(왕상17:2-7). 이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에게는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하늘이 도와주시는 좋은 사례로써 자주 회자된다. 카니발 구입을 통하여 우리 부부보다도 먼저 우리의 목회를 걱정해 주시는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했고, 피로도 씻어졌고 힘과 소망이 생겼다. 기적은 뜻길을 위해 사생결단 전력투구하며 전진 도전할 때에 하늘편의 개입으로 일어나는 뜻밖의 사건임을 깨달았고 체휼했다.
예산교회가 1세 미혼자 축복을 가장 많이 시켰을 때였다. 열악한 교회 환경을 가장 많이 수리했던 곳이었다. 성전수리, 방 2개와 응접실을 만들고 화장실, 주방, 정화조, 대문, 마당, 담장 텃밭까지 손을 안 댄 곳이 없을 정도로 환경정리를 많이 했던 교회이다. 예산교회 시무 8년 만에 2006년, 아산교회로 발령이 났다. 짧은 2년이었지만 영원히 잊지 못할 일도 있었다. 선문대가 있는 지역이어서 자녀 3명을 선문대로 보냈다. 그리고 2007년 5월 12일, 참어머님께서 승리귀국을 하셨을 때, 우리 부부는 영광스럽게 천정궁에서 참부모님께 꽃다발을 봉정했다. 장갑을 끼고 봉정한 후 재빨리 장갑을 벗고 참아버님과 악수할 때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20. 40일 여수해양수련
아산교회 시무 2년 만에 수평 이동으로 인해 2008년도에 서대전교회로 이동했다. 1년 후에는 교회 통합섭리로 2009년 5월말부터 2011년 5월말까지 대전교회 부교회장으로 시무했다. 당시 나는 여수 40일 수련에 참석했다. 수련회에 갈 때는 대전교회였지만 돌아올 때는 보령교회로 인사이동이 되어있었다.
어릴 때에 같은 마을에서 물에 빠져 죽는 사람을 본 기억이 있었다. 그 기억으로 인하여 나는 유난히도 물을 무서워했다. 참아버님께서 수련생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그 민족을 위해 나누어 주어야 한다. 그래도 안 되면 자기의 생명까지도 바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이 곧 천국 백성이다. 백성을 규합해서 천국이념을 성취해야 할 하나님의 사정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되겠다.”고 하신 말씀을 마음에 새겼다. 언제라도 생명까지 바칠 각오로 살아왔다. 수련을 시작하면서 임원규 강사께서 “혹시나 수련 중에 무슨 불의의 사건이 터지면 청해가든 섭리가 중단된다.”는 말씀에 ‘여기서는 죽으면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21. 12시간 참아버님 말씀
참아버님께서 2011년 5월 8일 오전 8시30분경에 청해가든에 오셔서 온종일 낚시하시며 정성을 들이셨다. 농어 44마리를 잡으신 후, 저녁에는 간부회의를 주관하시고, 9일 새벽 5시에 훈독실에서 경배 받으신 후 “기역자로 앞줄만 일어나라.”고 하신 후 4시간 동안 서서 말씀을 듣게 하셨다. 4시간이 지난 후에 “이제 앉으라.” 하시고 오후 5시까지 12시간 동안 말씀을 하셨다.
나는 12시간 단 한순간도 아버님께 시선을 떼지 않고 초점을 맞추었다. 아버님과 교감을 나누면서 상대기대를 세워드리고자 온 정성을 다했다. 부족하고 정성을 드리지 못한 내가 앞줄에 앉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것도 아버님을 바로 바라볼 수 있는 맨 앞에 앉게 될 줄은 더더욱 상상도 못했다. 앞사람이 다 뒤로 가버리는 바람에 나도 따라서 뒤로 가려고 했는데 훈독회장의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 되어서 앞에 앉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지난날 부모님의 뜻에 맞게 잘 살았다면 기쁨의 대상으로 떳떳하게 아버님의 바로 앞에 앉을 용기가 있었겠지만, 한없이 부족하고 죄송하고 면목 없어 도저히 앞에 앉을 자신이 없었지만 그저 얼떨결에 앉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것은 12시간 동안 화장실을 한 번도 안 갔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오로지 아버님께만 집중했었고 그 외는 일체 생각할 여지가 없었기에 가능했다. 그 때를 지금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이다. 자다가도 2시간마다 일어나 화장실을 갔던 내가 12시간 이상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아버님 외는 아무런 의식 자체를 하지 않아서 가능했던 것이다.
아버님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 고여 계셨고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 보였다. 가슴에 고통과 한이 태산만큼이나 쌓여 있는 듯하여 그 어느 누구도 그 한을 풀어 드릴 엄두도 못 낼 정도로 크게 느꼈다. 12시간 동안 개인적으로는 아버님의 눈을 가장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는 큰 행운을 얻었지만 불효자의 모습이라 그저 죄송하고 송구스러운 심정이었다. 충효의 실적이 많아서 당당하게 앞줄에 섰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못한 입장이라서 심히 불효자식의 모습이었다. 그러기에 더 참아버님과 일체를 이루려고 잠시도 자세를 흩뜨리지 않고 집중했다. 그래서 ‘나’라는 의식이 없는 경지에서 12시간을 견뎠다.
한평생 고생만 하시고 희생하신 참아버님을 지척에서 뵈니 아픈 맘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그저 아버님, 아버님, 아버님을 수없이 되뇌며 일체가 되려고 노력하다보니 12시간이 금방 지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아버님 감사합니다. 기쁨과 자랑의 모습이 아니라 죄송합니다.”라고 생각하며, 한없이 한이 많으신 아버님을 뵈면서 마음속으로 많이 울었다. 주체할 수 없이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다. 앞으로는 “저희 부부 싸움을 절대 하지 않고 잘살겠습니다.”하는 결의를 수없이 다지며 아버님께 무언의 약속을 했다. 또한 “아버님께서 말씀하신 총생축 헌납을 아직 하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하고 무언의 말을 되뇌었다.
말씀을 끝내시고 “소지하고 있는 전부를 평화기금으로 쓸 것이니 내 놓으라.”고 하셨다. 나는 배 운전면허증을 취득코자 등록할 돈을 갖고 있었다. 10원짜리 5원짜리는 빼고 큰돈만 내 놓았다. 그런데 지나고 생각하니까 전부를 안 하고 남긴 그 5원짜리 잔금이 마음에 걸렸다. 절대순종하면 될 것을 지난 후에야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 나를 중심한 생각을 했던 것이 두고두고 후회되었다. 아브라함이 소와 양을 잡아서 바쳤으나 마지막으로 비둘기를 쪼개지 않아서 실수를 하였고, 그것이 후손들에게 400년 고역생활을 하게 하였다(창15:9-21). 그와 같은 일이 나와 가족에게 생길까 걱정이 되었다.
작은 조건을 통해 전부를 바쳤다는 조건을 세워주시고자 하신 뜻을 미처 생각지 못하고 내 입장에서 10원짜리는 돈도 별로 안 되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내 생각이 개입되었기에 하늘은 온전히 제물을 받았다는 조건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을 지난 후에야 느끼게 되었다.
장항, 예산, 아산, 서대전, 대전, 보령, 청양교회까지 여섯 개 교회를 거쳐서 일곱 번째 청양교회에서 가장 오래 동안 있었다. 10년째이다. 섭리적으로 주어지는 교회 책임을 항상 초과 달성하였고 식구들과도 정이 가장 많이 들었다.
2013년 8월 1일, 보령교회에서 모시던 시모님을 요양원으로 보내고 청양 A타입 교회로 왔다. 2년 만에 4층 건물의 큰 교회로 리모델링해서 오기까지 교회 건축에 온몸이 부서지도록 투입했다. 그렇게 한 것은 부족한 건축비용 때문이었다. 기술자가 하는 일 외에는 단 한 사람의 인력도 쓰지 않고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 식구들과 함께 그 많은 일들을 해냈다.
둘째 딸과 함께 성전 형광 등을 설치하다가 떨어진 파편으로 눈가가 찢어져서 천안순천향대병원 응급실로 가서 꿰맸다. 일요일이라 응급실로 갔고 보험도 들어 있지 않아 많은 치료비가 나왔다. 목사님과 나의 치료비까지 수백만 원이 들었으나 교회 리모델링 건축 비용이 부족한 상태라 제직회에 치료비를 청구할 수도 없었다. 실손 보험이 없어 힘들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보험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너무나 절박한 하늘섭리를 우선시하다 보니 당연히 나의 사정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4층 건물을 뼈대만 남기고 전체 리모델링했으니 새로 짓는 것보다 몇 배 더 일이 많았다. 온몸이 너무 아파서 완공해 놓고는 다른 교회로 도망가려고 생각했다. 엘리베이터도 없었고, 다리가 너무 아파 2층 사택까지도 다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비용이 많이 들어도 엘리베이터를 설치하려고 전문가를 불러 검토했으나 설치할 수 있는 면적이 나오지 않아 설치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22. 천심원 매칭
2018년 2월 21일, 청평대역사 및 참아버님 탄신 98주년 기념식과 전진대회에 참석차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청평에서 보내던 중이었다. 2일째는 식구가 너무 많아 큰 딸집에서 숙박하기 위해 가던 중 다시 수련원으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이미 고속도로에 진입했기에 화도 IC까지 갔다가 유턴해서 수련원으로 되돌아와서 천심원에서 기도하던 중 우리 교회 청년식구인 안태윤군과 편하정양의 매칭에 관한 계시를 받았다. 양가 부모들과 2세인 당사자들이 다 좋아해서 15일 만에 약혼이 확정되고 2020년에 축복을 받게 되었다. 안태윤군은 연세대를 졸업한 후 취업 준비 중에 있고 편하정양은 역사편찬원에 근무하고 있다.
23. 교회의 실적
교회에 나오지 않는 필리핀 가정을 제외한 식구 20여 가정 중 16가정이 천보에 등재했다. 천보를 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식구는 비용적인 면에서 수천 만 원씩을 대치해 주면서 할 수 있게 도와줬다. 교회 성장, 미혼자 축복, 2020년 효정봉헌서, 효정원 등 종합적으로 검토하여서 식구 숫자에 비례하여 교구에서 우수실적을 거두어 표창장을 받았다. 기원절 헌금을 교회의 이름으로 천만 원을 했으며, 일본선교사 전체와 한국 중심식구 전체가 백만 원 이상을 했다. 또한 한 가정은 개인적으로 천만 원을 했으며, 한반도 평화서밋 승리를 위해서도 4가정이 백만 원씩 특별 정성을 드렸다. 섭리적 책임이 하달되면 교회의 목표보다 항상 초과달성으로 최고의 정성을 들여서 하늘 앞에 크게 조건을 세워드리는데 초첨을 맞추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고 승리했다. 참어머님의 자서전을 교구에서 청양교회가 가장 많이 보급하여 표창장을 받기도 했다.
하나님의 조국광복으로 국가복귀가 될 때까지 부모, 자녀 3대권을 희생하고 가겠다고 오래전에 천심원에서 하늘 앞에 약속했고, 그 기준으로 살고 있다. 자녀들은 부모가 1년 뒤 퇴직 후가 걱정이 된다며 “엄마 한 달에 만원씩이라도 저축하며 살라.”고 신신 당부를 했지만 더 절박한 하늘의 사정을 아는 우리 부부는 그럴 수가 없었다. 공직기간에 퇴직 후를 위해 저축한다든가 노후대책을 세운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었고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천원궁 천일성전을 승리적으로 봉헌하기 위해서는 총력전을 펼쳐 나가야 할 시점에 서 있다. 누구보다 지도자가 앞장서야 되고, 그리고 천보수행 43가정 실세화 승리를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다 보니 퇴직 후까지 생각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어떻게 하면 타락성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되어 창조본성으로만 살 수 있을까를 고심했다. 지난날 우리 부부는 남달리 많이 싸웠다. 수십 년간 타락성이 유발되어 싸울 때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탕감조건을 세웠다. 수없이 몸부림치면서 탕감조건을 세우며 노력했지만 자체자각의 이기심과 타락성을 완전히 정리하지 못하였다. 아직도 안타깝게도 몸부림치며 이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제 섭리의 완성기를 맞아 더 이상 미룰 수만도 없는 때이다. 하늘이 허락하신 천보로써 타락성을 완전히 벗고 부부가 하나 되어 창조이상을 이루어 살다가 영원한 세계인 본향으로 창조본연의 모습 그대로 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
24. 타락성과의 싸움
참부모님의 상(賞)을 다섯 번 수상하게 되었으나 우리 부부는 아직도 타락성으로 인해 싸우고 화를 낼 때마다 사탄이 하늘 앞에서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을 느꼈다. 하늘부모님을 편히 모시고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는 중대한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타락성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서게 되었다.
참아버님의 말씀에, “습관성과 고질화된 타락성을 벗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기에 역사를 밟아 치울 수 있고 세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자각된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것을 정복할 수 없다.”고 하셨다. 우리 부부는 개성완성의 꿈을 이루기 위해 과감히 도전했다. 창조본성과 참사랑으로 참고 견디며 승리할 것을 결단하고 시도한 것이었다.
2019년도부터 타락성을 유발할 때마다 탕감조건으로 남편과 효정봉헌서 쓰기로 합의를 했다. 화를 낼 때마다 처음에는 배(倍)로 하다가 나중에는 10배의 효정봉헌서를 쓰기로 결정을 했다. 타락성을 뿌리 뽑고 효정활동비를 비축하여 활동비의 걱정 없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소원을 풀게 되었으니 일거양득이라 생각되어서 과감히 시도했다. 하늘은 결코 손해 안 보시는 분이시기에 이런 결정은 신의 한수라는 확신이 들었다.
2019년도에 쓰게 된 봉헌서는 6백만원 정도였으나 2020년 8월까지는 약 4천여 만원 정도였다가 2020년 11월까지는 4억까지 쓰게 되었다. 4천만 원까지는 대출을 받아서 한꺼번에 다 쓸 수 있었으나 억 단위가 되니 도저히 한꺼번에는 다 못 써서 분할로 20년간 월 168만원씩 쓰기로 한 후 3개월분으로 5백 5만원까지 한꺼번에 미리 썼다. 봉헌서를 쓰는 것도 한꺼번에 수백 장을 쓰니 손도 아팠다.
25. 목회자 43가정 실세화 승리 보고
2020년 11월 29일, 신임 충남교구장의 취임 후 20일 만에 교구장님을 모시고 청양교회 천심기도실 봉헌식을 가졌다. 봉헌식을 마친 후 교구장께서는 천심기도실에서 갑자기 43가정 실세화 전국 목회자 충남 대표로 천보수행 1차 보고를 청양 목사가 하라고 지시하셨다. 몹시 당황했지만 거부할 수 없어 12월 30일에 참부모님 주관 전국 목회자 특별집회에서 남편이 보고했다. 주요 내용은 천보수행 승리를 위한 타락성 분립을 주제로 한 보고였다. 타락성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타락성을 벗기 위해 사생결단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 이후 교회 천심원기도실에서 천심의 소리가 들렸다. 참어머님 앞에서 타락성을 벗겠다고 결의한 것으로 4억의 탕감조건을 벗겨주시면서 “앞으로는 탕감조건으로 봉헌서를 쓰지 말고 감사한 맘으로 미리 감사의 봉헌서를 쓰라.”고 하셨다. 한 번 더 쓰게 될 때는 10배인 40억을 쓸 차례였으므로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것을 참어머님께서 먼저 아셨기에 중단시킨 것으로 느껴졌다. 불가능한 것 같은 것이라도 타락성을 가진 채로는 개성완성조차도 못하기에, 완성하고자 하는 꿈이 있었기에 우리는 도전을 멈출 수가 없었다. 우리 가정을 지극히 염려하시는 참부모님이심을 체험했다.
26. 시설에 계신 시어머님을 집으로 모시다
시어머니를 처음 모시게 된 때는 지금부터 16년 전인 2006년이었다.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직후 아산교회에 있을 때였다. 서대전교회를 거쳐 보령교회까지 6년간은 직접 모셨으나 청양교회로 오면서 요양원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A타입 교회에는 내실이 1개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축교회로 이사 와서 환경적으로는 모실 수 있었지만 모실 수 있는 자신이 없어 요양원에서 성화하실 때까지 계시게 할 합리적인 계획을 세워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요양원에 면회를 갈 때마다 자식을 따라가겠다고 따라나섰다. 그런 어머니를 떼어놓고 올 때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현실적으로 도저히 모실 수 없다는 합리적 판단을 내린 상태였고, 1등급의 와사 상태의 시모님을 내 건강상으론 단 하루도 도저히 케어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교회 천심원 기도실에서 기도 중에 “어머니를 모시라.”는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모시기 힘든 내 중심한 입장을 더 이상 내세울 수가 없었고, 하늘의 천명을 감히 거부할 수 없었기에 남편한테 얘기하여 모시자는 결정을 함께 하게 되었다. 8일간의 준비를 끝낸 후 2021년 3월 16일 요양원에서 교회로 모셔오게 되었다.
27. 부모를 모심으로 받은 축복
시어머니가 그토록 싫어하시는 요양원에서 집으로 모신 후 며느리로서의 가졌던 불효에 대한 죄스러움에서 해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9남매 형제들로부터 맏며느리로서 원망대신 고맙다는 인사를 받는 입장이 되었다. 따라서 천보수행의 첫째 과제인 부모를 하늘처럼 모시는 것을 실천할 수 있었다. 참가정운동을 하면서 남들에게 “하늘처럼 부모를 모시라.”고 했지만, 정작 내 자신은 힘들다는 핑계를 대며 부모를 요양원에 맡겨놓은 것이 늘 양심에 가책이 되어왔다. 이런 것을 해소시켜 주셨다. 천보수행자로서 모시라는 계시의 책임을 주신 것은 하늘의 큰 축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음을 시어머니께서 성화하신 후에야 알았다. 모시라고 하신 하늘의 사랑을 알게 되었다. 16개월을 모신 후에 성화하셨다.
도저히 모실 수 없다는 것은 항상 내 자신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요양원에서 성화하셨다면 돌이킬 수 없는 불효로,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이었고, 부모 형제 친척들에게도 고개를 들 수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천심원에서 모시라고 직접 가르쳐 주신 하늘 앞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 한계를 초월하니 우주적인 능력에 의해 모실 수 있었다. 이 한계를 돌파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입장과 시어머님의 입장을 내 입장보다 먼저 생각하는데서 가능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2021년 4월 3일에는 양가 믿음의 부모님을 모시고 4명의 자녀들까지 오게 해서 하늘 앞에 인도해 주심과 그동안 베풀어 주신 부모님의 사랑에 감사의 꽃다발과 여행 경비로 금일봉도 드리니 처음으로 작은 효도를 한 느낌에 마음이 기뻤다.
28. 청양군수 축복식 및 참어머님 하사금
2021년 4월 9일에는 청양군수 사모님이 심혈관 질환으로 타계하셨다. 그때 천심원 기도실에서 새벽기도를 하는 중 천심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속히 대전에 달려가 군수에게 성주식을 하라는 것이었다. 말씀에 순종해, 앞으로 청양군 복귀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 새벽에 1시간을 달려가 군수님을 깨워 성주식을 해드리고, 영계로 가신 사모를 축복가정으로 만들어 방계 해원을 해드렸다.
5월에는 우리 부부가 함께 각각 17명씩 34명의 중심영의 해원을 했으며, 양가의 방계 해원도 30여 가정을 했다. 천보수행으로써 43가정의 천주적 실세화 활동을 위해 양가 아벨권 친척 조카까지 방계와 가인권의 배우자 해원까지 거의 다 했다.
참어머님께서는 목회자부터 먼저 천보수행의 모델이 되어 주길 바라시며 43가정 실세화의 승리를 위해 430만원씩 하사해 주셨다. 우리는 전액을 교회 천심원 기도실을 만드는데 투입했다. 천심원 기도단을 조직하여 2020년 12월 23일부터 1일 1회 기도실 기도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4명의 선교사인 권사들이 정성을 들이고 있다.
29. 여성연합 활동
우리 여성연합이 ‘2022 청양군 우수단체 자원봉사 프로그램비 지원 공모전’에 선정되어 300만 원을 지원 받아 군내 이웃사랑 나눔 봉사 활동을 실시했다. 지난 1년간 취약계층을 대상으로 봉사했으며, 고추축제 때는 부스를 3일간 운영하여 시원한 각종 음료를 무료로 나누며 봉사단체로 지역 내에 확실하게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다. 이와 병행하여 여성연합 창설자를 홍보하며 축제에 참석한 전국의 국민을 대상으로 3일간 자서전 500여 권의 보급 실적도 함께 거두었다.
2022년 2월 11-13일에 ‘2022한반도 평화서밋’ 때는 여성연합 3지구 대표로 여성단체 전현직 군회장 두 명과 함께 롯데호텔에 2박 3일간 참석했다. 157개국이 동참하고 현직 25명을 포함한 85명의 전 현직 정상 및 지도자들이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를 염원하는 감동적인 행사의 현장을 단체장들이 목도하면서 그동안 갖고 있었던 통일교회에 대한 왜곡된 편견을 확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지금도 도의원, 군의원 각계단체장 15명의 여성 지도자들을 아주 좋은 친밀한 관계 속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제는 어떤 행사나 세미나에도 초청하면 여성 단체장들이 기꺼이 참석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또한 2022년 우수 봉사활동으로 군내에 수많은 봉사 단체 중에서 세계평화여성연합이 선정되어 지난해 12월 13일 자원 봉사자의 날 기념식에서 국회의원 표창을 수상했다. 본연합의 취지와 목적이 분명하고 어느 단체보다 사명의식과 봉사정신이 투철하므로 타 단체보다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여성연합은 모성애를 바탕으로 한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외적 활동을 하였다. 짧은 1년 활동이었지만, 그 이전에 이미 9년간 내적인 정성을 쌓아온 보이지 않은 뜨거운 열정이 있었기에 여성연합 활동 1년 만에 괄목할 실적을 거두게 되었다. 그리고 우수단체상으로 선정되어 수상하게 된 것은 하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군 여성단체 협의회 10개 단체 중에서 지금까지 단체상을 받은 곳은 우리 세계평화여성연합 단체 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여성회원들이 하나 되어 믿어주고 따라준 덕분에 좋은 결실을 거둘 수 있었다.
6000가정 축복40주년 기념 총회(2022.10.15.)는 참어머님의 특별하신 사랑으로 더 할 수 없는 은혜가 넘쳤다. 총회를 이끌어주신 참부모님께 한없는 감사를 드린다. 또한 특별히 이번에는 참어머님께서 백화점에서 직접 준비하신 귀한 선물을 주셨다. 나도 행운권에 당첨되어 참어머님의 사랑을 넘치게 경험하게 되어 너무 기쁘고 감사했다. 남편은 내가 받은 선물을 바라보며 그동안 귀한 선물을 많이 받았지만 보관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는 나를 의식한 듯 또 누군가에게 줘버릴까 염려하며 참어머님의 귀한 선물이니 이번에는 남에게 주지 말고 잘 보관하라고 당부했다.
30.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이 더 크다
그러나 역시 귀한 선물이 내 품에 있는 기간은 며칠가지 않았다. 내가 갖고 있는 것보다 주는 기쁨이 더 크기에 그 선물을 누구에게 주지 않고는 베길 수 없는 충동이 일어났다. 선물을 보냈다. 그런데 받은 분이 그 선물을 도로 나에게 보내겠다는 문자가 왔다. 나는 제발 그 선물을 받아달라고 요청했다. 귀한 것일수록 내가 가지는 것보다 주는 기쁨이 더 크기에 당연히 내가 더 기쁘기 위해서 드리는 것이니 나를 위해서라도 받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그 분은 부담감을 가지고도 나를 위해 받아 주셨다. 감사했다.
효정 HJ천원단지는 지구상에서 가장 성스럽고 복귀되어 완성된 곳이며 어머니의 자궁과 품속처럼 따뜻한 생명이 새롭게 태어나는 심정의 고향이다. 누구나 가고 싶고 머물고 싶은 하늘의 은혜와 사랑이 언제나 충만한 곳이기에 2022년 12월 17일 1일 수련 갔다가 더 머물고 싶어서 4일 수련을 접수했다. 환경이 너무나 변화 발전되어 있었다. 격조 높은 예술성이 돋보이는 고급스런 대리석으로 신축된 웅장하고 아름답게 단장한 건물들을 바라보며 참어머님의 정성과 사랑을 느꼈다. 참부모님의 그 위용을 드러내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보석처럼 빛나는 정성이 듬뿍 담긴 거룩한 곳이기에 가는 곳곳마다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그동안 바쁘게 생활하다가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지만 마냥 기쁘고 즐거운 가운데 저절로 힐링이 되고 행복했다. 쾌적한 공간이 안락함을 주었고, 한파로 꽁꽁 얼어붙는 엄동설한이었지만 수련받기에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도록 어디가나 따뜻하게 난방이 잘되어 있어서 추위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또한 천심원은 24시간 열려있고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는 천심원 철야기도회 정성에 동참할 수 있었으며, 천심원에서 기도하면 어떤 어려운 문제라도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찾을 수 있었다. 4일간의 짧은 기간 속에서도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으며 한없는 감사와 기쁨으로 마냥 행복했다. 그리고 코로나로 목주변과 가슴에 통증이 심했고 비염으로 가래가 심했는데 안수를 돕는 실장님의 안수를 받고 깨끗이 완쾌되었다.
이제 앞으로 천원궁 천일성전 봉헌식(2023.5.5.)을 앞둔 시점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사적인 순간,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생각할 때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미며 우리 부부는 어떠한 정성을 드릴 것인가를 생각했다. 하늘 섭리의 완성이요, 인류역사의 완성이 될 천원궁 천일성전 봉헌승리를 위해 총생축헌금을 내기로 했다. 늦었지만 한푼이라도 보태야겠다는 생각으로 완납했으며, 천승기금은 1차로 43수밖에 못했으나 2차로 더 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나름대로 정성을 들이고 있다. 고금리시대라 어려웠지만 다행히 신용도가 높은 덕분에 은행 대출을 받을 수 있는 것에 감사했다.
이요한 목사님은 “남편과 하나가 안 된 것은, 아내가 하나님과 심정적으로 접선이 안 된 탓이며, 하나님과 하나 되면 하나님의 참사랑의 힘으로 남편과도 하나 될 수 있다.”라고 하셨다. 이 희망적인 내용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 동안 부부가 하나 되지 못한 것은 내가 하나님과 심정일체가 안 되었던 탓임을 알았다. 회개하는 마음이 들었다.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문제는 남편과 심정적으로 하나가 되지 못한 것이었다.
그동안 성격은 물론 취미, 관심사 등 맞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대조적이었다. 그래도 서로 맞추려고 많이 애를 썼으며, 이제는 정말 다시는 더 이상 다투지도 싸우지도 않고, 남편을 먼저 이해해주고 배려하며,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알아차려주고 관대하게 용서하는 넓은 아량으로 남편을 섬기는 참된 아내가 될 것을 다짐한다. 10년 전 여수 40일 해양 수련 때 청해가든 훈독실의 참아버님 앞에서 절대 싸우지 않겠다고 한 무언의 약속을 절대 지킬 것을 굳게 다짐해 본다.
1955년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생각을 더듬어 간단하게나마 자서전을 쓰면서 정리해보니, 내 힘으로 산 것은 하나도 없었고 하늘이 배후에서 감독자처럼 이끌어주셨다는 것을 더욱 확실하게 느끼게 된다. 지나고 보니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어려운 고비 고비마다 언제 어디서라도 함께해 주신 하늘이 이 시간 이곳까지 이끌어 주셨음을 부인할 수 없다. 나와 우리 부부는 지금까지 하늘의 축복을 분에 넘치게 받아 왔다.
계묘년(2023) 새해 천일국 지도자 신년하례회 때에 주신 참어머님의 말씀을 한해의 좌표로 삼는다. 창조주 하늘부모님께서 참부모와 함께 지상에서 실체적으로 섭리를 펼쳐나가게 되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설렘과 기쁨과 환희가 가득찬 새해 역사의 아침이 밝았다. 검은 토끼의 해인 검은색은 모든 빛을 다 함축하고 있으며 태양열을 받으면 받을수록 따뜻하다.
우리는 새해를 맞아 실체성신 독생녀 참어머님의 소망을 실현해 드려야 한다. 참어머님의 말씀은 곧 우리가 가야 할 미래의 나침반이다.
“지난해에 부족했던 불미스러운 모든 것은 물러가고 새롭게 하늘부모님을 중심하고 모든 면에서 포용하고 품을 수 있는 통일의 축복가정 천보가정이 되어서 하늘 앞에, 인류 앞에 승리자로서 자랑하고 존경받는 모습이 되어야겠습니다. 그리고 하늘부모님의 직접 치리하시는 환경권의 중심에 있는 신통일한국이 되기 위해서는 모두가 한마음 한 뜻으로 하늘부모님의 꿈을 실체적으로 이뤄드리는 효자 효녀가 되기를 부탁합니다.”
참아버님께서는 뜻길 완성, 천일국 안착을 위해 초지일관 전력투구 사생결단 실천궁행 하셨다. 그 바통이 참어머님께로 이어지고 있다. 이제는 우리 축복가정들이 효자 효녀의 입장에서 그 힘든 바통을 이어받아서 반드시 속히 천일국을 안착하고 기쁜 효정의 실적을 봉헌해 드려야 할 것이다.
첫댓글 이재숙님 댓글
신철원 ㆍ구은지 목사님가정의 뜻대한 귀한 삶의 노정 은혜롭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김경옥님 댓글
회장님 자서전 정리하시느라 고생많으세요.
신철원,구은지 목사님,사모님 특별하신 삶을 지극히 평범하게 사시는 모습이 사도행전입니다.
많은 은혜공유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홍규님 댓글
신철원 님 가정 자사전
감동 입니다.
40일금식때 협회장님께서
달려오실 정도로 드린 그
정성을 생각할때에 하늘에
대한 효성심에 감동을 받습니다.
늘 건강 하시고 남은 여생 잼나게
건강하게 잘 보내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