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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
= 호류지 금당은 동쪽, 중간, 서쪽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동쪽
에 약사여래상, 서쪽에 아미타여래상, 그리고 중앙에 이 석가삼
존상이 안치되어 있다. 석가여래상의 협시는 일반적으로 문수
보살과 보현보살이지만 현존하는 예에서는 후지와라 시대보다
오래된 것은 없으며, 이 상의 경우에는 가마쿠라 시대의 기록에
약왕, 약왕보살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석가여래상은 목제(木製)로 만든「宣」자 대좌에 앉
아 가사와 겉옷의 소매를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으며,
양쪽의 협시는 각각 여의주 모양의 후광을 등에 업고
약간 비틀린 연화 위에 서 있다. 삼존의 뒤에는 커다
란 후광이 있으며 그 뒷면에 세로 14자, 가로 14행으
로 된 조상(造像) 명칭이 정연하게 새겨져 있다. 거기
에 따르면 추고(推古) 30년(622) 성덕태자와 성덕태자
비 병환의 쾌유를 빌며, 왕후·왕자·신하들이 태자와
같은 크기로 석가여래상을 만들려고 하였으나 두사
람 모두 연이어 사망하자 고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다음 해인 31년에 사마(司馬) 구라노오비토토리 불사
(佛師)에게 들게 한 것이 이 석가삼존상이라고 한다.
토리불사는 불상을 가지고 일본으로 귀화해 온 사마
(司馬) 다 츠토의 손자로, 불법을 널리 펼치는데 공적
이 있는 다즈나의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일본기』
에는 그가 아스카데라의 16척이나 되는 불상을 추고
17년(609년)에 건립하여 건물을 부수지 않고 당내에
안치한 것 때문에 오우미국시카타군의 수답 6만평을
하사받은 것이 기록되어 있어, 커다란 동상을 주조
하는 우수한 기술을 습득하고 있었던가 혹은 공인을
통솔하는 감독자의 입장에 있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오른쪽 위의 『佛師』라는 문자는 중국에서도
사용되고 있지 않았으며 물론 일본에서도 가장 빠른
예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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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광삼존불입상(一光三尊佛立像)
= 배 모양으로 된 후광 앞에 삼존이 서 있으며 일반적으로 「일
광삼존상(一光三尊佛)」이라고 부르고 있다. 중존은 시무외여
원인을 맺고 있으며 머리를 소용돌이 모양으로 조각하였다. 얼
굴은 온화한 곡선으로 구성되어 있어 토리파의 엄격함은 없다.
의상의 문양도 두껍게 도려낸 것처럼 되어 있어 옷의 무게를
나타내고 있다. 협시는 큰 보관을 쓰고 있으며 양 손을 옷속에
넣어 가슴 앞으로 모으고 있다. 협시의 자태와 풍모는 어딘지
모르게 이국적이어서 중존이 비토리적 조형과 함께 주목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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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관음(百濟觀音)
= 이 불상은 원래 금당 석가삼존상의 뒤에 북쪽으로 안치되어
있었다. 귀정승일랑은 『야마토 고사 풍물지』속에 「어둑어둑
한 금당 내부에 흰색 빛을 띤 체구가 불꽃처럼 똑바로 서 있는
것을 본 순간 관찰보다 먼저 합장하고 싶은 기분이 된다. 대지
에서 타오르는 영원한 불꽃같다」라고 쓰고 있다. 대보장전에
있는데 지금은 이 느낌은 변함이 없다.
이 불상이 호류지의 기록에 나타난 것은 에도 시대이
다. 게다가 백제관음이라고 불린 것은 명치시대가
되어서 그때까지는 허공장보살이라고 불렀던 것 같
다. 성덕태자와 관계 깊은 절에서는 이러한 종류의
보살상을 허공장보살이라
고 전하고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사실은 수긍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호린지의 전허공장보살상도 왼손에
병을 내려뜨려 들고 있으며 이 백제관음상과 아주
비슷한 하쿠호시대의 보살입상이다. 백제관음이라
부르게 된 것은 명치년대에 발견된 투조 보석관에 아
미타 화불(化佛)이 있었다는 점과 겐로쿠의 기록에
「백제에서 도래」라고 적혀있는 점에 의해서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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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세관음상(救世觀音像)
= 오랫동안 비불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존 상태가 당초의 화
려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여러 겹으로 연화좌(蓮華座)에
서 있는데, 장신으로 천의는 발 아래로 늘어져 있으며 팔꿈치부
터 예리한 돌기처럼 치켜 올리며 펼쳐진다. 머리는 어깨를 다라
흘러내려와 꼬불꼬불하게 말려져 있다. 팔에서 무릎 아래로 늘
어진 천의는 U자형으로 교차되어 있어 커다란 움직임을 만들고
있다.
세밀하게 투조된 산 모양의 보관을 쓰고 있으며 얼굴
은 갸름하지만 살이 붙어 온화함을 느끼게 한다. 눈
썹부터 콧날에 걸친 선과 눈꺼풀은예리하여 코밑의
인중과 콧방울의 칼자국과 함께 조각법의 뛰어남을 ]
보여준다. 또 붉은색이 남아 있는 입술은 입술 끝을
올려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신비함과 사실적인 감각이 멋지게 조화를 이룬 작품
이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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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살반가상(菩薩半跏像)
= 사찰에서 전래하는 말에 의하면 여의륜관음(如意輪
觀音)이라고 하는데, 반가상의 형태는 원래 미륵상으
로 조성된 것이다. 머리와 몸의 자연스러운 비례, 유
연한 팽창을 보이는 살붙임, 변화가 풍부하고 낙낙한
호를 그리고 있는 옷깃 등, 아스카·하쿠호우의 목조
상 중에서도 가장 성숙한 단계를 보이는 것으로 천무
(天武) 지통기 무렵에 제작되었을 것이다. 머리부분
을 앞뒤로 이어 맞춰 몸통부분에 붙이고, 다리 부분
과 늘어뜨린 옷을 앞면을 계단 모양으로 대좌에 이어
맞춘 점 등은 달리 예를 볼 수 없는데, 이는 한정된 크
기의 재료로 복잡한 형태의 불상을 만들기 위해 고안
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흑칠(黑漆)을 한 위에 채색
을 하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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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미타삼존상(阿彌陀三尊像)
= 본존인 아미타여래는 의자에 앉아 있으며 협시는
연화좌에 서 있다. 모습은서방극락정토의 교주에 어
울린다. 머리와 손발이 몸에 비해 작은 본존은 어깨
도 완만하게 타원형을 이루고 있으며 옷도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협시상도 가련하고 사랑스러워 하
쿠호 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덧붙여 대좌
뒷면에는 「야마다전상」이라고 새겨져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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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사여래좌상(藥師如來坐像)
= 호류지 금당의 동쪽에 안치되어 있는 불상으로 석가상과 모습이 유사하지만 전체적으로 온화하게 표현되어 있다. 미소를 머금은 둥근 얼굴과 상하 눈꺼풀이 동일하게 활 모양을 그리고 있는 눈, 또 목에서 어깨에 걸친 선 등은 석가상과 대조적으로 부드럽다. 옷을 걸쳐놓은 대좌도 간략화되어 자연스럽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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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관음상(聖觀音像)
= 하쿠호 말기를 대표하는 금동불(金銅佛)로 유명한 보살상이다. 젊은 청년의 육체를 이상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상반신 등도 두터워 터질듯한 양감이 넘쳐 흐르고 있다. 단정한 용모는 사실적인 기복으로 나타나 있으며 높은 보계(寶 )에 새겨진 고사리 모양의 당초문은 구김살없이 휘어져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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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사나불좌상(대불)〔盧舍那佛坐像(大佛)〕
= 천평승보(天平勝寶) 4년(752년) 4월9일 성무상황, 효겸천황을 비롯하여 문무백관이 임석(臨席)한 가운데 2만명의 승려를 초대하여 대불개안공양(大佛開眼供養)이 성대하게 행해졌다. 도다이지의 대불로 친숙한 금당의 본존 노사나불좌상은 높이가 15미터에 가까워 일본 최대의 조각작품으로 당시의 국가가 청력을 기울여 조립한 일본 조각사상 정점에 위치하는 작품이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치승, 영록의 난을 맞아 그 대부분이 보수된 것으로 하반신과 대좌 연변 일부에 조상(造像) 당초의 모습을 띠고 있음에 불과하다. 성무천황에 의해 대불 건립 명령이 내려진 것은 천평 15년(743)의 일로 오우미코가지에서 기공되었으나 얼마 안 있어 중지되었으며, 환도와 함께 천평17년 8월에 헤이쇼코의 곤코묘지에서 건립이 재개되었다. 구니나카노무라지키미마로가 조불장관으로 총지휘를 맡아 거대한 토형에 제작되었으며, 주조에는 다케치노오오쿠니, 다케치노마마로, 가키노모토노오다마등이 주물사로 임했다. 주조는 불신(佛身)의 아래쪽부터 8단에 걸쳐 순차적으로 행해졌으며 3년의 세월에 걸쳐 종료되었다고 한다. 그 후 전면을 도금하였고 후관 등도 제작되어 천평보자(天平寶字) 원년(757년) 무렵 거의 11년간이라는 세월을 들여 그 대용(大容)이 완성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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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
= 현재의 도다이지 계단당은 향보(享保) 17년(1732) 혜광(慧光)의 권진(勸進)에 의해 재흥된 것으로 계단당 안의 중앙에 3층단을 설치하고 각 면에 승계단(昇階段)을 만들고 있다. 단상 중앙에 다보탑이 안치되어 있고, 네 모서리를 굳게 지키고 있는 소조로 된 사천왕상은 천평시대의 작품인데 근세 절내의 다른 전당(殿堂)에서 옮겨진 것으로, 창건시에는 동조로 된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었다. 당나라 승려 감진(鑑眞)에 의해 창건된 계단원은 현제 에도 시대에 건립된 계단당(戒壇堂), 천수당(千手堂) 등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천평시대에 제작된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창건 당시의 계단당에는 동조(銅造) 사천왕상이 단상을 굳게 지키고 있었으나 전화(戰火)로 소실되었으며, 현재 남아있는 소상은 근세에 계단당이 재건되었을 때 절 안의 다른 당에서 옮겨 온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당초 도다이지의 어느 전당에 안치되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각 상은 모두 당나라 풍의 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각각 요괴를 밝고 서 있는 모습이 공통되고 있다. 동남쪽에 위치한 지국천(持國天)은 왼발을 들어 요괴의 머리를 누르고 있으며 오른팔에 검을 쥐고 있는 자세로,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다물고 있다. 이 불상만이 투구를 쓰고 있다. 서남쪽에 위치한 증장천(增長天)은 제 구(軀)중 가장 동적인 모습이다. 오른발로 요괴의 머리를 밟고 왼손을 허리에 대고 있으며 오른손은 높은 위치에서 창을 쥐고 있다. 양 눈을 부릅뜨고 입을 크게 벌리고 있다. 그러나 그 표정과 자세는 법화당의 집금강신(執金剛神)에서 볼 수 있는 위협적 표현은 억제하고 있으나 오히려 박력이 있다. 이것과 대조적으로 서북쪽에 위치한 광목천상(廣目天像)은 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허리를 약간 뒤튼 것 뿐이고 왼쪽 팔꿈치를 굽혀 두루마리를 쥐고 있으며 오른손에는 붓을 쥐고 있다. 눈썹을 찡그리며 전방을 응시하고 있는 표정은 과장됨이 없다. 동북쪽에 위치한 다문천(多聞天)도 약간 허리를 뒤틀어 요괴의 등을 밟고 있으며, 왼손은 내려 검을 쥐고 있으며, 표정도 각각 개성적이서 단순한 과장됨에 머물지 않고 군상(群像)으로서의 조화가 유지되고 있다. 이군상 중에는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체구의 균제가 잘 취해져 있으며, 자세에 약간의 파탄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그 위에 갑옷으로 체구를 단단하게 감사고 있어 불상 전체의 긴장감을 높이고 있다. 천평(天平)주각을 사실과 원숙한 기교가 이 군상에서 멋지게 개화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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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가탄생불입상(釋迦誕生佛立像)
= 도다이지의 대불전 관불회에 어울리는 대형 탄생불로 동제이며 전면에 걸쳐 도금이 잘 남아 있다. 체구에 비해 큰 두부(頭部)는 윤곽이 둥글고,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를 머금은 듯한 동안(童顔)표정으로 만들어져 있다. 가슴, 배 팔 등을 잘록하게 폈으며 온화함이 있는 어린이 같은 피부 느낌이 잘 나타나 있다. 의상도 주름을 깨끗하게 붙여 자연스러운 질감으로 표현하고 있다. 전체에서 받을 수 있는 깨끗하고 발랄한 밝은 상은 대불전 앞에 있는 팔각등롱화대의 보살과도 공통되고 있으며 천평시대의 소금동불(小金銅佛)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불상에 부속된 동제(銅製) 관불반은 여러가지 문양을 선각(線刻)하였고, 구연부(口緣部)는 영지운(靈芝雲)이 은으로 상감되어 있다. 대불개안(천평승보4년(752)) 무렵에 제작된 것이다. 평상시의 전쟁이나 내분도 잊고 오색의 향수를 뿌린 천평시대 유족들에 의한 화려한 법회를 상상할 수 있는 유품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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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부중상아수라(八部衆像 阿修羅)
= 코후쿠지의 팔부중상(八 衆像)은 덴표(天 ) 5년(733)에 훙서(薨逝)한 다치바나논미치요(三千)를 위해 딸인 광명(光明) 황후가 발원하여 다음해에 공양된 서금당(西金堂)에 십육제자(十六弟子)등과 함께 봉안한 것이다. 서금당은 그 후 치승(治承) 4년 (1180년)의 대화 재를 비롯하여 몇 차례에 걸친 화재를 만났으나 그때마다 구출되어 현재도 오부정(五部淨)만이 하반신이 없을 뿐 다른 일곱 개는 수리되어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 불상은 십육제자와 마찬가지로 태내(胎內)가 빈 탈활건칠상(脫活乾漆像)이기 때문에 이동 등에 상당히 약한데 그것이 여덟 개 모두 남아 있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구조는 십육제자와 마찬가지로 몸의 중신을 통해 머리에 도달하는 나무와 다리 장부에 이르는 나무를 종축(縱軸)으로 하여 그 도중에 선반 모양의 판자를 끼워 불상이 일그러지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건칠상의 표면에는 백토(白土)를 바르고 그 위에 극채색으로 문양을 그렸던 것을 알 수 있어 처음에는 대단히 화려했으리라 상상된다. 얼굴 표정 보면 아수라(阿修羅)와 사 갈라(沙葛羅), 오부정(五部淨)과 같이 소년에 젊은 불상과 필바가라(畢迦羅)와 구반다(鳩槃茶) 또는 긴 나라(緊那羅)와 같이 노장년(老壯年) 불상이 있어 동일한 공방에서 만들었다고는 하나 이질적인 것을 느끼게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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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미타삼존상(阿彌陀三尊償)
= 호류지에는 궁전 모양으로 된 두 개의 감실이 있다. 하나는 옥충(玉蟲) 감실 이고 또 하나는 이 다치바나부인감실이다. 성무(聖武) 천황의 비(妃)이자 광명(光明) 황후의 어머니였던 다치바나노미치요의 염지불(念持佛)이라고 전해지는 이 감실 에는 문에 여래, 보살, 신왕, 사천왕이 흑칠(黑漆) 바탕에 금박 가루로 그려져 있다. 감실 안에 안치되어 있는 삼존 상은 부조로 된 연봇 속에 핀 연화 위에 본존(本尊)은 앉아있고 양쪽 협시는 서 있으며 그 뒤로는 병풍이 세워져 있다. 이와 같은 형태는 달리 전례가 없는 대단히 귀중한 작례(作例)라고 한다. 병풍 중앙에는 잎이 여덟 개인 두 겹으로 된 연화 주위에 운 당초(雲唐草)를 투조(透彫)한 원형 후광을 만들고, 병풍 전체에는 아미타정토 연못에 핀 연화 위에 다섯 명의 왕생자(往生者)가 천의를 휘날리며 앉아있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연 목의 문양과 천의, 화불(化佛)과 당초(唐草)등이 모두 화려하고 유려한 하쿠호우 시대의 풍을 담고 있으며 멋지고 현대적인 의장(意匠)이 눈길을 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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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공견색관음입상(不空 索觀音立像)
= 대보(大寶) 2년(702) 견당사가 30수년만에 제개되었고 그 위에 평성환도와 함께 조불(造佛) 활동이 전대(前代)보다 한층 더 활발해져 중국 당나라 전성기의 난숙한 조각양식을 받아들여 천평시대라는 일본 조각사상 최전 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고후쿠지의 4대사원 조영이 시작되어 많은 우수한 조각작품이 제작되었다. 도다이지의 전신 사원이라고 말해지는 곤슈지는 규모에 있어 이들 여러 사원과는 비교할 수 없는데, 그 옛터에 전해지는 법화당의 본존인 불공견색 관음상은 이 시대 조각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 높이 평과 받고 있다. 법화당 내진(內陣)수미단 위, 중앙의 팔각2층 광좌(?座) 위에 안치되어 있는 이 불상은 3미터를 넘는 거상(巨像)이 임립(林立)해 있는 속에 있으며 다른 것을 압도하는 웅대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탈활건칠조(脫活乾漆造)로 두발을 군 청색으로 칠하고 금박을 넣고 있다. 두상(頭上)에 보옥을 박아 넣은 은제 보석 관을 쓰고 있으며 양 눈 외에 이마 중앙에 세로로 눈을 한개 더 붙였고, 여덟 개의 팔을 가진 이른바 삼안팔비(三眼八譬)입상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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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관음입상(聖觀音立像)
= 보살은 불교에서 가장 경애(敬愛)받는 대상이다. 불타(佛陀)는 성도(成道)를 거쳐 열반에 이르는 길을 걷는 사람을 가리는데 비해 보살은 세계에서 자비의 화신이며 중생제도를 위해 이타(利他)를 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한 그루의 노송나무로 만들어진 이 듬직한 보살은 상투를 늘어뜨리고 있으며 얇은 천의를 걸치고 발목까지 오는 긴 옷자락을 휘감고 있다. 이 의상은 인도에서 유래하고 있다. 보살 전체의 구조나, 인도의 트리방가(인도 조각에서 널리 이용되는 삼굴(三屈)자세)를 연상케 하는 약간 몸을 흔든 자세에도 8~9세기에 일본과 아시아 대륙 사이에 있었던 강한 문화적 결속을 반영하고 있다. 자세에서 보여지는 다소 강직한 느낌과 특히 넓적다리 상부의 간략한 착의법(着衣法)은 이 조각이 9세기의 작품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왼쪽 손의 위치로 보아 물건을 손에 들고 있었으리라 생각되는데 옛날에는 연화를 든 성관 음을 나타내었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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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십일면관음상(十一面觀音像) = 홋케지에서는 십일면관음상이 성무 천황의 중전 이였던 광명(光明) 황후를 모델로 만들었다고 한다. 불상의 제작연대가 헤이안시대 초기라는 점에서 이 말은 믿기 어렵지만 이 불상에는 고귀한 여성을 모델로 했다고 생각되는 높은 격조가 느껴진다. 딱딱하고 결이 촘촘한 나무를 끝이 예리한 끝부터 몸, 그리고 대좌의 연화, 회전축까지 하나의 목재로 조각하고 있다. 이 방법은 나라(奈 ) 시대에 만든 도쇼다이지 의 전중보왕보살(傳衆寶王菩薩), 대자재천보살(大自在天菩薩), 사자후보살상(獅子吼菩薩像)등에서 볼 수 있으며 헤이안시대 초기까지는 드물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후에는 거의 따로 만들게 된다. 대단히 견고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럴 만큼 길고 흠집이 없는 목재가 필요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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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위덕명왕(大威德明王坐像)
= 대위덕명왕은 죄장(罪障)을 깨뜨리는 지혜의 왕(明王)으로 알려진 명왕부(明王部)에 속한다. 명왕은 편 조불(遍照佛)인 대일 여래(大日如來)의 무시무시한 힘과 용맹스러움을 상징하는 존(尊)이다. 대위덕명왕은 용맹스러움울 나타내는 분 노상(忿努相)을 한 세 가지 의 얼굴을 하고 있으며, 손에는 무지와 미망(迷妄)과 죽음조차도 타파하고 득도를 향하는 이 명왕의 힘을 나타낸 인계를 맺고 있다, 이 명왕은 불꽃 모양의 상투를 틀고 있으며 짧은 옷자락과 폭이 좁은 비단 띠를 휘감고 있는데, 이 비단 띠에는 이 금(泥金)으로 그린 섬세한 모양의 무늬 흔적이 남아 있다. 원래 이 조상(彫像)은 대위덕명왕의 대좌인 물소의 등에 걸터앉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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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일여래좌상(大日如來挫傷)
= 대일 여래는 밀 교의 주존 이며 우주 생성의 원리로 만다라 속에서 그 복잡한 묘사를 볼 수 있다. 이 불상은 발목까지 오는 긴 옷자락을 휘감고 명상하는 자세로 앉아 있으며, 손에는 지권인[불지(佛智)를 상징하는 인계(印契)]을 맺고 있다. 이것은 양계(陽界)만다라도의 하나인 금강계만다라의 대일 여래 자세이다. 조상 내부의 명문에는 헤이안시대 말기인 큐안 5년(1149)의 기년(紀年)이 있어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상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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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두관음상(馬頭觀音像)
= 나카야마데라 마두관음의 석상(石像)과 석비(石碑)는 길가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친숙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근세 민간신앙 속에서 탄생된 특수한 신앙의 모습으로 마두관음 본래의 것은 아니다. 마두관음은 관음 중에서는 유일하게 명왕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두명왕이라 불리는 강한 성격을 진고 있기 때문에 관음 이면서 분노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일본에 전래된 것은 덴표시대 중엽 경전을 베낀 기록이 남아 있으며, 그 무렵 천수관음(千手觀音)과 불공견색관음(不空 索觀音)과 함께 들어왔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신앙은 그다지 성행하지 않았는지 조상(造像) 예(例)는 별로 없어 보귀(寶龜) 11년(780)이라고 기록된 사이다이지 자재장부에 약간 봉일 분이다. 다이안지 에는 전마두관음상(傳馬頭觀音像)이 현존하고 있는데, 만약 전래된 것이 확실하다면 오래된 작례(作例)라 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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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관음상 준지관음(六觀音像 准지觀音)
= 준지(准지) 또는 준제(准堤)라고 기록된 이 관음상은 육관음 중의 하나이지만 다른 불상처럼 대중적이지 않아 일존(一尊)으로 모셔지는 일은 적다. 경전에 따르면 형태는 팔이 두 개인 것, 네 개인 것, 여덟 개인 것 등 다양하다. 유품은 적고 유명한 불상으로는 천록(天祿) 원년(970) 묵서명(墨徐銘)이 있는 팔이 열네 개(원래는 열 여덟 개)인 신야쿠시지의 상(像)이 있는 정도 이다. 다이호온지의 이 불상은 육관음 중 한 개다. 육관음이란 성관음(聖觀音),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천수관음(千手觀音), 마두관음(馬頭觀音), 여의륜관음(如意輪觀音),그리고 천태계(天台系)에서는 불공견색관음(不空 索觀音), 진언계(眞言系)에서는 준지관음(准 觀音)이 거기에 추가된다. 요컨대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간, 천상이라는 육도(六道)의 인간계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이 관음 신앙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것이 성관음 이하의 관음상에 적용되게된 것은 진언 종의 육자경만다라(六子經慢茶羅)에 의해서이며, 진언종, 천태종, 양 밀교에 의해 10세기경 경부터 정리 되었다고 한다. 육도(六道)에 이 육관음을 적용한 것은 중국이 아니라 일본의 발상이다. 헤이안 시대 조각 유품에서는 석천(石川). 풍재원(豊財院)의 성관음, 마두관음, 십일면관음니 육관음상의 일부로 생각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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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미타여래상(阿彌陀如來像)
= 도다이지 대불(大佛)과 함께 너무나도 유명한 이 가마쿠라 대불 고토쿠인의 아미타여래상은 또한 사료가 너무 적어 놀라게 된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도로 도다이지 대불이 거의 에도 시대의 재흥상(再興像)으로 바꿨음에 비해 이 고토쿠인 대불은 카마쿠라 시대에 만들어 진대로 오늘날까지 있어 불상의 용모나 조상(造像)기술 등 여러 가지 면에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잇다. 이 불상은 건장(建長) 4년(1152)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고 [오처경(五妻鏡)]에 기록되어 있으마 완성 시기와 작자는 불분명하다. 도다이지 진언원(眞言院)의 동종(銅鐘) [문영(文永) 원년(1264)에 <주물사(鑄物師)/신다이부츠지의 목수 단치구우(丹治久友)> 라고 적혀 있는데 주물사로서 단치구우가 참여하고 있었다는 정도를 알 수 있을 뿐이다. 원형(原型)의 작자도 불분명하다지만 가사는 어깨가 통하게 입고 가슴을 U자 형태로 열어 젖히고 무릎 앞 중안으로 가사의 단을 펼친 형태는 가마쿠라시대 전반기에 케이하 불사가 종종 사용했던 복고적 박풍에 가까운 것이다. 또 케이하 불사는 가이케이를 비롯하여 당시 유행 조짐을 모였던 새로운 송나라의 영향을 재빨리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 불상에서도 용모 등에서 송나라 풍의 감각을 볼 수 있다. 이 불상의 원작자는 운케이가 동국(東國)에 작품을 건립한 일도 있어 동국으로 진출해 온 게이하 불사라고 생각 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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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륵보살입상(彌勒菩薩立像)
= 상(像)의 내부에 있던 경전의 판권으로 볼 때 이 불상은 문치(文治) 5년(1189)에 만들어진 것으로 가마쿠라 시대의 대불사(大佛師)인 가이케이 연구의 단서가 되는 불상이다. 가이케이는 아마 스스로 귀의의 계행으로서 이 불상을 조각했을 것이리라 생각된다. 이 가이케이와 동료인 운케이가 가마쿠라 시대(1185~1333)를 대표하는 조각양식을 창조하였으리라 생각한다. 이 초기의 조상에서 볼 수 있는 상(像)의 양감 표현의 풍만함이나 의복 주름의 자연스러운 흐름은 가이케이의 조각이 지닌 사실성이 높은 양식 특유의 것이다. 당래불나라의 고후쿠지에 있던 이 불상과 『대위덕명왕 좌상』은 예전에는 보스톤미술관의 동양부 부장이었던 岡倉賞三의 컬렉션이었던 것으로, 이 두 점은 그의 사후 유족게서 구입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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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관음좌상(聖觀音坐像)
= 이것은 보존이 완전한 일본 금동상의 걸작으로 따로따로 주조되어 떼어내기가 가능한 부품으로 만들어져 있다. 명상 자세로 앉아 있는 성관음은 왼손에 연화를 들고 오른손은 엄지와 검지를 구부리고 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보상화 당초문의 후광에는 불교 제존(諸尊)을 표상하는 범어자(梵語字)가 기록된 원반이 부착되어 있다. 후광의 양측에 다섯 개씩 늘어서 있는 「Sa字」는 관음을 의미하고, 최상부에 있는 「a字」는 지상존인 대일여래를 나타내고 있다. 정교한 연화좌의 팔각형 귀틀기부에는 문영6년(1269)이라는 연호와 서지라는 작자명이 적혀 있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또 명문에는 이 조상이 주씨 중 한사람에 의해 마쓰오데라의 본당에 안치된 것이라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마쓰오데라의 본당에는 정교하게 장식된 대좌가 있는데 거기에는 1288년에 해당되는 연호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이 본당이 개축된 연호라고 생각되어 왔으나, 이 조상에 있는 명문으로 미루어볼 때 개축작업은 적어도 이보다 17년은 빠른 시기에 시작된 것 같다. 원래는 이 관음의 양 옆에 비사문천과 부동명왕상이 서 있었다. 이 배치는 도상학적으로 진귀한 것으로 같은 구성으로 된 삼존도가 동시에 전래되는 액자그림에서도 볼 수 있다. 협시들은 전해지지 않지만 이 관음상이 가마쿠라 시대 금동불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 중의 하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