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산 기행문
글 장 순 희
백 : 백두대간 (白頭大幹)의 물줄기가 산맥 (山脈)으로 이어져
두 : 두만강 압록강으로 합류되어
산 : 산천초목(山川草木) 푸루게 푸루게 아름다운 강산 만든다.
여행일시 2023년 6월 19일부터 22일까지
1) 여행 첫 날
원주에서 인천공항 까지는 약 3시간정도 걸린다. 나와 딸 소영은 아침 6시 원주에서 인천공항 행 버스를 타고 인천으로 출발했다.
여행사 관계자와 11시에 지정해준 장소에서 미팅하기로 되어있는데 초보여행자라 어떻게 찾아야 될지 몰라 공항에 일찍 도착을 해서 몇 시간을 기다렸었다. 11시가 다 되어 나는 여행사 가이드에서 전화를 했다. 받지 않아 여행사 본사에 전화를 해서 물었떠니 잘 못 알려줘 한참 해매다 찾았다. 본인들 여행사 이름을 찾아보라고 해야 되는데 숫자번호만 알려줘 소영이랑 나는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끝자락에 있는 여행사를 찾았다. 여행사직원에게 여권만 주면 알아서 다해준다. 여행자는 짐만 부치고 나머지 가벼운 소지품 챙겨 비행기에 타면 된다.
대한민국 인천공항은 세계에서 제일 잘 설계 되고 잘 지어진 공항이라 한다. 그래서 그런지 공항내부는 쾌적하고 지하 곳곳에는 식물들과 꽃들을 심어 여행객들의 휴식울 취하는 데는 아주 편리하게 되어있었다.
인천공항에서 2시 30분 비행기로 중국 연변 가는 비행기를 탔었다. 소영은 비행기 멀미를 한다고 귀밑에를 부쳤다. 나도 예전에는 멀미를 안했는데 혹시 해서 나도 귀 밑에는 부치고 비행기를 탔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소영이는 비행기가 고도로 오르니까 귀가 아프다고 했다. 비행기는 여행객들을 위해 비행기라 약간 불편할 정도로 기내가 좁았다. 아마도 저가 항공료 비행인 것 같았다.
점심을 간단히 먹었는데 비행기가 한시간정도 상공을 날아오르고 있을 때 즘 기내식 점심이 나왔다. 중국 쌀로 지은 밥에 카레처럼 덮밥을 줬다. 쌀이 찐 밥이라 조금 덜 익었는데 먹을 만해서 다 먹었다.
우리여행 일행들은 모두 16명으로 같이 동행하기는 좋았다. 다들 해외여행을 몇 뻔씩 가본 분들이 있었고 나처럼 처음 가는 일행도 몇 분 있었다.
중국 연변 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가 되었다. 그곳에서 현지 가이드를 만나 가이드 안내에 따라 행동을 하기 로 되어 있었다.
중국 연변에서 입국 심시를 거치고 나올 때 아마도 공산국가라 입국 심사 검열이 까다롭게 하는 것 같았다. 다를 그렇게 하겠지만
아마도 사회주위 국가라 조금은 빡센 것 같았다.
우리 일행들은 다들 검열을 마치고 나와 여행사 가이드를 만났다. 가이드는 조선족인 3세로서 한국어랑 중국어를 잘 했다. 여행가이드 13년차로 백두산을 81번을 가봤다고 한다. 나이는 43세라했다.
1
우리 일행들은 여행사 가이드 안내들 받아 여행사측에서 마련한 셔틀버스를 탔다. 여행첫날은 두만강을 관람하기로 되어있었다. 연변공항에서 두만강 까지는 3시간정도 걸린다고 했다. 3시간을 셔틀버스를 타고 가서 두만강 중류에 도착을 했다. 두만강 상류는 물이 맑은 대신 물 양이 얼마 없고 중류는 중간정도로 많고 하루가 가장 많다고 한다. 두만강중류에 도착해서 두만강 강바람을 쏘이며 조금 걸다가 기념사진 몇 카트 찍었다. 바람이 불어 머리카락이 휘 날 일 정도로 강바람이 불어왔다. 두만강 건너편에는 이북의 산과 밭이 보였다. 얼마 전까지 다리로 북한주민들과 왕래가 있었는데 근래 들어 통제되어 북한주민들과 왕래가 끊어졌다고 한다, 아마도 코로나 때문에 북한에서 차단해서 그런 것 같다고 한다.
두만강중류 관람을 마치고 그곳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중국 연변에는 한민족인 조선족들이 많이 살기에 한국음식에 가까울 정도로 음식이 나왔다. 약간 기름기가 많은 것 빼고는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그래 가져간 김자반 컵라면 고추장을 먹지 않아도 되었다.
중국음식들은 거의가 다 원탁으로 만들어져 우리나라 음식의 퓨전음식 즉 뷔페식으로 되어있다. 식탁을 빙글빙글 돌리며 각자 자신이 먹고 싶은 음식을 골라 먹으면 된다. 우리나라 주식인
쌀밥이 꼭 나왔다. 그 외 빵도 나오고 해물도 나오고 중국집에서 나오는 반찬도 나왔다. 처음 먹어본 음식인데 진수성찬 같았다. 여행사측에서 여행객들의 음식에 신경은 많이 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저녁을 먹고 다시 숙소를 이동하는 시간이 거의 3시간정도 걸렸다. 중국여행은 관람시간은 짧고 이동시간은 긴 편이였다.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중국시간으로 10시가 넘었다. 중국시간은 우리나라 시간과 1시간 시차가 났다. 한 시간 늦다. 핸드폰시계가 알아서 오차 시간을 변경해주는 핸드폰도 있고 그렇지 않은 핸드폰도 있었다. 다음날 아침을 5시30분에 아침 먹고 6시 30분 까지 나오라는 가이드 말을 듣고는 각자 정해진 숙소 호텔로 들어왔다. 피곤해서 샤워하고는 단잠을 잘 수 있었다.
2) 여행이일 째날
다음날 아침 일찍 조찬 을 먹었다. 호텔에서 준비한 식사데 그곳도 퓨전음식으로 나왔다. 삶은 계란 하나씩을 배당해주며 먹고 싶음 음식을 먹었다. 그런데 음식이 전부 짜서 먹는 사람마다 짜다는 소리를 한결 같이 했다. 어쨌든 조금씩은 아침을 먹어야 멀고먼 백두산 天池를 관람 할 수 있다. 같은 일행들 모두 다 6시 30분까지 셔틀버스로 모여 또 4시간정도 연변의 도로를 달렸다.
그곳 연변 도로는 차는 그런대로 있었다. 한국처럼 교통 혼잡은 복잡하지 않다 그래 그런지 신호들이 없다. 차들은 거의다가 중고차들이였었다. 우리나라 차는 기아 현대 삼성중고 차들이 있고 외국차로는 복스바겐 , 아우디 , 일본 도요타 등의 차들이 주로 있었다. 그 중에 복스바겐 차가 가장 많은 것 같았다.
셔틀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중국은 마치 넓고 넓은 초원 같았다. 목초지를 만들어 낙농업사업을 한다면 대관령의 몇수십배 정도를 목장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땅에 모두가 옥수수 밭으로 되어있었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옥수수를 심고 조선족은 벼농사를 한다고 한다. 그러데 벼농사 짓는 곳은 그렇게 만치 않았다. 옥수수는 옥수수기름을 만들고 가축의 사료로 만들기 위해 옥수수를 많이 심는다고 한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옥수수를 심었다.
2
백두산 하루 관람객이 6월에는 그다지 많은 인파는 아니라고 하는데 그날 약 우리가 여행하는날은 18만명 관람객들이 왔다고 한다. 그중에 한국인이 30%고 나머지는 중국인이 70%라고 한다. 한국인은 거의가 다 여행사를 통해 여행을 오고 그 외 중국인은 중국전역에서 백두산여행을 온다고 한다. 7월과 8월에는 비가 내려 한 달에 5일정도 해가 뜨는 대도 하루 관람객 300만명 모여든다고 한다. 거의 다 백두산 天池는 보지 못하고 돌아간다고 한다.
셔틀 버스가 정착한곳은 다시 백두산 관람객을 위해 중국당국이 마련한 셔틀 버스를 타기 위항 장소에 여행객모두가 정착한다.
그 다음 다시 그 셔틀 버스를 타고 3시간정도를 간다. 백두산 가는 길은 아스팔트로 잘 되어있다. 광활한 자작나무가 몇 백년동안 대 초원을 이루고 자작나무 원시림으로 울창한 숲으로 되어있는 길을 셔틀 버스가 몇 시간동안 이동한다. 그 다음 다시 다른 셔틀 버스로 타고 20여분 또 이동하여 매표소에 도착한다. 매표소에서 여행사측에서 준비해준 바코드를 각자 제시하여 검열을 마치면 그 제서야 백두산 오르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나와 딸 소영은 한계단씩 백두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계단에는 아라비아 숫자로 표시가 되어있었다.
계단을 올라가기 조금 쉽고 지루하지 않게 올라가라고 한 것 같다. 1025 계단표시 까지 되어있었다.
중국인들은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룬다. 그래서 모든 이정표는 장백산이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백두산은 동파, 서파, 남파, 북파라는 4곳 지명으로 부룬다. 여기서 파라는 뜻은 비탈진 곳이라는 뜻이고 백두산은 비탈진 곳으로 올라간다는 의미도 된다.
동파, 남파는 북한쪽 올라가야 되고 서파 북파는 중국 쪽에서 올라간다. 그러므로 현재는 중국을 통해 백두산을 갈 수 밖에 없다. 딸 소영이는 연실 나에게 엄마 괜찬아 하고 자주 질문을 했다. 나는 괜찮은데 소영이가 더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숫자를 확인하며 사진도 찍으며 천천히 오르자고 했다.
백두산 산줄기는 백두산이 만든 꽃 화원에 봄꽃들이 예쁘게 작고 앙증스럽고 피어있었다. 지금은 만병초라는 꽃이 피어있고 그 외 이름 모를 뭇 생명들이 자신들만의 생명을 확인하듯 요기 저기에서 움트고 있었다. 백두산 정말 신비로운 산이다. 말도 듣고 인터넷으로 보는 것은 신비롭지는 않다.
직접 체험하고 가보아 얼나마 신비로운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꽃이 피는 계절인대도 한편에는 아직 눈이 녹지 않아 여기 저기 수북이 눈이 그대로 있었다. 백두산의 봄은 그다지 길지 않고 5월정도 데어야 어린 새싹들이 돋기 시작하여 6월에 가여린 꽃을 피우고 7월에 진달래가 절정을 이룬다고 한다
3.
나와 딸 소영은 어느 정도 올라갔는데 백두산이 꼭 대기가 보였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된다하고 힘내고 올라가자 하며 올라갔는데 백두산 천지가 보였다.
아! “天池다 ” “다 왔다.” 화며 성취의 기쁨과 감격 ,감동 그리고 놀라움 경이로움 그런 것들이 실감나게 나의 가슴에 닿아왔다. 완전 기쁨과 설렘과 감격이 동시에 해냈다하고 소리를 자아냈다.
나폴에옹의 정복만이 승리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하듯 해낸 것도 승리가 될 것이다.
비록 같은 민족의 북한으로 땅으로 해서 백두산을 오르지 못하고 중국 땅으로 백두산을 올라왔지만 감격과 기쁨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많은 여행객들이 다 나 같은 생각일지는 모르나 나의 마음은 정말 감격스러웠었다.
누구 말따나 대박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은 대박이다 보다 장순희랑 딸 소영이가 백두산을 등산 했다는 것이 대박 이였다. 천지를 외워 싸고 있는 천지 물과 주변산은 놀라우리만큼 장관이다. 천지에서 일출과 일몰을 본다면 그광경은 더 없이 장관을 이룰 것이다.
인파들이 너무 많아 사진을 찍을 틈새가 없어 서로 틈새를 찾느라 틈새 작전을 살피다가 나는 현지에서사진 찍어주는 분들에게 사진 서너장 찍고는 그 틈새를 찾아 천지사진 몇 장 찍었다. 소영도 그렇게 하라고 하니 소영이는 틈새를 찾아 찍었다고 하며 중국과 북한의 경계비에 있는 비석에서 내가 두장 정도 찍어주고 나도 소영에게 찍어 달라 해서 두장정도 찍었다. 사진을 찍고는 기념품 샀었다. OPEN너 인줄 알고 샀는데 와보니 메모지를 냉장고에 부처 놓는 자석이었었다. 사진까지 찍고 나니 흐렸던 날씨가 비로 변해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백두산을 하루에도 몇백 뻔식 날씨가 변덕을 부린다고 했다. 그방 해가 났다가 그방 비가 내려 시간차이로 천지를 보는 여행객과 그렇지 못한 여행객들이 있다. 가져간 우이로 있고 하산해서 내려오는 대도 비가 계속 내렸다.
대피소에 도착해서 가이드를 찾고는 가져간 오이를 먼저 도착한 일행에게 나주고
가이드도 하나주고 나도 하나 꺼내 먹었다. 산을 올을 때는 오이가 몸이 좋다고 한다. 아마도 오이가 물기가 많아
더위와 목마름을 축여주기 때문인 것 같다.
일행들이 다 모였을 때 다음 여행지는 화산활동으로 협곡이 생긴 계곡 관람하였다. 협곡은 돌과 암벽 사이를 줄로 만들어 놓은 것처럼 줄이 죽죽 협곡을 만들었다. 간혹 동해의 촛대바위처럼 뽀족한 바위도 있는데 대부분 석공이 끌과 정으로 암벽 사이를 파서 만든 것처럼 협곡이 되어있었다. 그곳은 가까이는 가지 못한다. 낭 떨어지기라 만약에 떨어지면 큰 부상과 찾지 못할 정도로 가파른 협곡으로 되어 있다.
협곡을 관람하고는 점심을 먹었다. 여행 네네 점심은 2시가 넘어 먹었다. 첫날 점심은 약간 기름기가 많아 느끼할 수도 있다고 하며 가져간 김 , 고추장 오이 등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 하라는 가이드 말이 있었다. 나는 신라면 작은 것 4EA 가져갔는데 그대로 가지고 왔었다. 점심이 약간 느끼해 그런지 일행 중에 한분이 김을 내놓고 고추장을 내놓아 그것으로 오이랑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는 백두산 온천물에 온천을 한다고 했다. 온천은 여행비에 포함돼지 않아 각자 해도 되고 안 해도 데는데
가이드 꼬임에 모두 넘어가 다 온천을 한다고 했다. 그런데 엄마와 아들여행자는 여행을 많이 다녀 가이드 꼬임에 넘어가지 않았다. 우리 여행일행은 용인에서 부부1팀 강릉에서 부부1팀 원주에서 모녀1틴 (나랑 소영) 서울에서 모자1팀 서울 에서 4가족 1팀 또 안산에서 4가족1팀으로 16섯이 우리여행 일행 이였었다. 여행을 다니기에는 참 좋은 인원 이였었다. 먼저가고 먼저 온 일행은 나중에 오는 일행을 기다려 같이 동행하고 부축해주는 배려가 있는 여행객들을 만나 나는 요번 여행에 참 좋은 여행 벗들을 만났다고 생각하며 여행하는 동안 그런 생각으로 여행을 했었다.
나는 온천을 하지 않으려고 했었다. 여행비에 포함돼지 않은 것도 그렇고 소영이도하지 않는다고 하고 그런데 가이드가 하도 성화를 해되며 뭐라 해서 그래 내가 언제 백두산 온천을 해보겠나 하며 백두산 여행 온 길에 백두산온천을 해보자 하고 온천을 했었다. 900 $주고 온천은 온도에 따라 각자 하고 싶은 탕에 들어가 면되는데 온도가 높은 것이 43도 여서 그다지 뜨겁지 않았다. 온천이 뭐 이래 하며 여행객들이 투덜댔다.
4
나중에 일행 중에 누가 노천탕을 발견하여 노천탕으로 이동해서 온천을 했었다.
온천을 마치고는 저녁식사시간으로 여행비에 포함돼지 않은 식사로 백두산 송이버섯과 삼겹살 무한리필로 저녁을 먹는다고 했다. 송이는 백두산에서 가을에 체취해서 냉장고에 저장해 났다가 요리로 먹는데 냉동 저장한 송이도 숯불에 구어 먹으니까 맛이 있었다. 고기를 먹는 곳에는 술이 빠지지 않았다. 누가 술타령을 하다가 용인에서 온 여행객이 참이슬을 가져와 한잔 한잔 돌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가이드가 무슨 술인지 서비스로 한잔씩 주고 다음에 술이 모자라니까 참이슬을 먹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건너온 참이슬이라 병당 일만원씩 음식점에서 판매하고 있었다. 다른 팀에는 중국술 고량주를 먹는 것 같았다. 우리 팀은 참이슬 4병으로 맛있고 즐거운 저녁식사와 대화로 분위기 좋은 시간으로 저녁을 먹었다. 술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 어색한 분위기도 부드럽고 스스럼없는 대화로 이여 가는 역할을 한다. 너무 과하면 문제가 되지만 적당한 술은 인간의 마음을 풀어주는 역할이 술인 것 같다.
저녁을 그렇게 즐겁게 마치고는 다시 차로 몇시 간을 타고 숙소로 돌아와 각자 정해진 숙소로 왔다.
이렇게 해서 서파쪽 백두산 천지는 관람을 다 마쳤다.
3) 여행 삼일 째 되는 날
여행 3일 째는 북파쪽으로 천지를 관람하게 되어있다. 역시 아침 조찬을 먹고는 셔틀 버스로 올라왔다.
여행 3일 째는 소영과 나는 아침을 먹지 않았다. 피곤해서 잠을 조금 더 자고 싶었다.
역시 북파쪽 백두산 가는 길도 자작나무가 원시림처럼 양쪽 길을 곽 메우고 있었다. 오래되어 고목이 된 자작나무도 있고 새로 나와 어린 자작나무도 있고 간혹 가다가 대나무순도 보였다. 활엽수인 낙엽송도 아름드리가 많았다.
이 백두산 숲에는 야생동물 호랑이 ,반달곰 ,팬더, 노루, 여우, 고란이 등 야생동물들도 서식한다고 하며 만일 야생동물을 죽이거나 헤치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처벌(총살형) 을 받는다고 한다.
중국인들의 목소리는 너무도 크고 씨끄러웠다. 북파쪽 천지를 가려고 매표소로 이동하는데 마치 압사 사고 날 정도로 인파들이 몰리고 몰려들어 일행들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일행 선두에 빠짝 붙어 따라 가야만 되었다.
중국인 젊은 사람 사이에 나이든 사람이 세치기를 하려다 싸움이 붙어 차에 올을 때가지 너무도 시끄럽게 싸웠다.
누가 말리는 사람도 없이 말싸움을 해 되는데 너무 너무 시끄럽게 싸워다.
셔틀 버스로 몇 번을 갈아타고 다시 봉고 셔틀 버스로 40분정도 구불구불한 길을 갔었다. 그 북파 쪽은 봉고차로 이동하기에 걷는 것은 없었다. 너무 길이 고부랑 길이여서 조심운전하지 않으면 사고 나기 십상일 정도로 고불랑 길이였었다. 완전 S 코스로 길이 나져있었다. 북파 쪽으로 오르는 백두산도 아직 눈이 군대 군대 녹지 않고 있었다.
비탈진 백두산 산자락에 역시 어린 봄꽃들이 앙증스럽게 피어있었다. 너무도 작고 가련 린 작은 꽃 짙은 안개 사이로 시아가 잘 안보여 사진을 찍으려도 흔들리는 봉고차가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그냥 마음으로 감상하는 수밖에 없었다.
백두산에는 우리나라에 복낭이꽃 이라고 하는 꽃과 두견화꽃 제비꽃이 많이 자생하는 것 같다. 복낭이꽃은 아직 피지 않고 제비꽃은 보리 빛 가련 린 꽃망울을 피어 오고가는 여행객들의 눈길을 매혹식겼다. 백구산에 가장많은 꽃은 두견화인데 마치 6월중순에 백두산 전지역에 피여있었다.
가는 도중에 비가내리더니 북파쪽 천지 정상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억수로 더 내렸다. 앞이 안보여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안개가 끼여 북파쪽 천지는 여행객 모두 오전에는 보지 못했다.
영하의 날씨로 손이 시려웠다. 나와 딸 소영이는 왔다간다는 기념으로 안개 속에서 기념사진 핸드폰으로 담고 말았다. 같이 간 일행들이 모두 흩어져 어디에서 있는지 몰라 대피소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가이드를 만나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여행 중에 일행을 잃어버리면 서로 찾느라 시간을 많이 허비 된다. 단체 행동은 한사람만 잊어버려도 그 한사람을 찾아야 되기 때문이다. 북파 쪽 대피소에서 기념품사고는 일행들 모두모여 곧바로 하산하는 차를 다고는
내려왔다.
하산을 하고는 곧바로 장백폭포 관람하기 위해 한 20여분 차도 이동을 했다. 그곳에도 많은 관람객들이 줄을 서서 차례로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장백폭포 쪽은 화산폭팔의 흔적이 여러 곳에 있었다. 아직도 온천수가 샘물처럼 올라와 마그마가 생겨있고 온천물도 퐁퐁 솥아 올라오고 있었다. 장백폭포를 오르는 계단은 서파쪽오르는 계단보다 오르기가 조금 힘들었다. 계단을 경사가 심한 곳이 몇 군대 있어 조금 힘들게 올라갔었다. 딸 소영이는 힘들다고 장백폭포는 가지 않고 나는 일행들과 같이 장백폭포를 항해 발길을 돌렸다. 가면서 사진도 찍고 이런저런 사람들과 하며 힘들지 않게 장백폭포를 올라갔었다. 장백폭포 쪽과 백두산 높은 고지대는 너무 추워 나무들이 크지 못하고 가지만 여러 갈래로 이지저리 뻗어있었다. 장백폭포 가는 길도 자작나무들이 자생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올랐을까 높은 계단을 올라가고 나니 장백폭포가 보였다. 여행객들은 서로 사진을 찍느라 분주했다. 내리비도 잠시 그쳤다.
5
“ 장백폭포 ”
사진으로만 보았던 것보다 더 장엄하고 웅장했다.
장백폭포 주변들의 산은 화산으로 이루어진 산들 역시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장백폭포 주변들 사면들의 산은 모두가 화산활동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기이한 산이라 해야 하고 싶다.
동행한 여행에게 사진 몇장을 부탁하고 나도 동행에게 사진 몇장을 찰각찰각 해줬다. 그동안 소영은 휴게실에서 나에게 문자를 연실 날렸다. 빨리 내려오지 않는다고 ....... 장백폭포 관람삼매경에 빠진 나는 더 있고 싶고 그 물이라도 한병즘 담아오고 싶었다. 여행의 철칙은 절대 그곳의 모든 것을 조금도 훼손하거나 자갈돌하나 못 가져가게 되어있다. 다만 동글동글한 화석 돌맹이는 기념품으로 만들어 팔고 있다.
시간을 보니 가이드가 정해준 관람시간이 거의 다 된 것 같아 하산을 했다. 장백폭포 오르기는 더 어려운데 하산하기는 쉬웠다. 빠른 발걸음으로 내려왔떠니 가이드가 정해준 시간보다 더 빠르게 도착했다. 현지 가이드는 이상하게 나에게만 누님이라 불렀다. 내가 우리 여행객들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64세의 나이일 것 같은데 내 얼굴이 동안이라 50대로 보였는지 누님 누님하고 소영보고는 조카라고 불렀다. 우리여행일행들은 30대서부터 40대 50대 나까지 60대가 같은 일행으로 여행을 했다. 아마도 장순희 내 나이가 가장 많았을 것이다.
가이드 눈에는 내가 어려 보였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내가 어려보이긴 어려 보였는지 마지막 날 저녁식사시간에 북한인들 음식점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 북한 젊은 여자가수가 남자 2명과 나를 지명해 같이 춤을 추자고 했다. 나는 월래 춤을 잘 추지 못해 그냥 춤추는 시늉만 따라하다가 들어오긴 들어왔다. - 웃음_
장백폭포를 관람을 마치고 용두래 우물을 관람하기로 되어 있어 가이드가 용두래 와 일송정 소나무에 관한 이야기를 설명했다.
“연변하면”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시민제하에 있을 때 선조들이 항일투쟁을 하기위해 연변과 만주벌판 그리고 길림성에서
항일투쟁을 하던 곳이다. 해방되면서 조국으로 돌아온 분도 있고 그렇지 못한 분들이 남아 조선족 2세 3세가 지금에 연변(연길)에서 남아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래서 연변에는 한글 간판들이 중국간판과 같이 나란히 있다.
용정하면 윤동주 시인의 탄생고향으로 잘 알려줘 있다. 윤동주 시인은 집안이 부유해서 한국과 일본에 유학을 했었다고 한다. 유학시절 “서시”를 시로 지어 그것이 문제되어 일본제국주의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끝내 감옥 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향연 꽃다운 나이 29세에
우리 일행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용정우물 관람을 했다.
용정우물은 이제는 말라 고여 있지 않았다. 기념으로 기념비와 함께 역사의 증거로 남아 있을 뿐이다.
관람을 마치고 마사지패키지를 한다고 했다.
등산 후 발 마사지를 하며 발목과 장다리가 아프지 않는다고 하여 하기로 하고 내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사지를 받아 봤다. 나는 허리를 조심히 해달라고 부탁했다. 우리나라는 목욕탕에서 여자들이 떼밀며 마사지 받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처음에는 남자 마사지사가 마사지를 해줬는데 너무 아프게 해서 여자 마사지로 교체해서 마사지를 받고 나와 같이 간 일행이 남자 마사지사에게 받았다.
마사지는 90분 동안 받았다. 마사지사에게 우리나라 돈으로 팀 일만원을 주었다. 중국인들은 그 팀 일만원은 많은 액수가 된다. 그래서 그런지 너무 고마워하고 황송해 했다. 주는 나 역시 고마웠었다.
마사지를 받고는 여행의 마지막 날 저녁식사를 먹으러 북한 주민들이 운영하는 북한식당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북한 젊은 여성들이 서빙을 하며 노래도 부르고 섹스폰도부르고 기타, 드럼 , 전자피아노를 치며 북한 가수 3명이 노래를 불렀다. 북한 노래를 부르는데 잘 불렀다. 남남북여라고 했던가 북한 여자들은 미인들이였었다. 우리나라 여자들처럼 요란하게 꾸미지 않고 순수한 그자체가 아름답게 보였다. 저녁식사는 같은 동쪽이라 그런지 우리 입맛에 맞게 나왔다.
6
산천어조림요리에 평양냉면까지 그리고 몇 가지 반찬들이 맛깔스럽게 차려줘 있었다. 서로 맛있다고 하며 북한맥주를식혀 서로 장백산여행의 즐거움을 나누었다. 내가 사려했는데 가져간 한국 돈을 기념품 사느라 사용했떠니 모자라 강릉 여행자님이 북한맥주 4명을 주문해서 서로 소담을 나누며 맛있는 우리민족의 음식을 먹었다. 맥주는 한병당 12,000원했다. 음식을 먹는 도중 북한아가씨들은 노래와 기타 드럼연주를 하며 흥을 돋구었다. 북한식당 종사자들은 2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정도의 나이들이라 미인들이라 해야 되냐 그냥 이쁘다고 해야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밤10시까지 북한식당에서 맛있는 음식과 술을 먹었다. 10시가 되니 연주자들은 다 퇴근하고 서빙종업원 들 남아 정리를 하다가 우리가 안가니까 노래들 두곡정도 더 부르며 다음에 또 만나요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여행 3일째를 마치고 수소로 돌아왔다. 3일째여행숙소를 비행기 타기 쉬운 장소로 이동해 와서 여정을 풀었는데 숙소가 조금 미비했었다. 샤워를 하면 물이 잘 배수가 대야 데는데 그게 않되어 항의를 하고 그랬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여행 마지막날밤을 마쳤다.
4) 여행사일째 되는 날
아침 일찍이 조찬을 먹었다. 대나무 잎에 찹쌀로 만든 밥이 나오고 빵 , 계란 된장국이 나왔다. 한국인의 식성에는 된장국이 제일 같았다. 몇칠 먹지 않았다고 모두가 된장국을 선호했다. 미소 된장국을 너도 나도 서로 펴가며 펴주며 그렇게 중국 땅 우리민족의 조선족들이 살고 있는 땅에서 마지막 아침을 먹었다.
셔틀 버스에 오르면 가이드가 마지막 인사를 하고 다시 만날 기화가 되면 좋겠다고 했다. 우리는 검열일 마치고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3명의 자석이 있는데 나와 딸 소영 그리고 옆에는 조선족 2세쯤 되는 60대 중년분이 자석에 배치되었다. 조선족 2세대는 분은 수원에 이주해산다고하며 중국어랑 한국어가 능숙했다.
9시 50분 비행기를 탔는데 11시쯤에 기내점심이 나왔다. 빵이랑 밥이 2가지 나왔다 밥이 설익어 나는 안먹고 빵 한 조각에 맥주 한 캔을 물 사마 마셨다. 12시가 넘었는지 한국 땅에 도착한 것 같았다.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며 착륙준비를 하며 서서히 내리기 시작했다. 비행기 착륙 후 기내애서 내려 같이 동행한 일행들을 따라 짐 부친 것을 찾고 서로 즐거운 여행을 했다고 하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다만 강릉에서 간 부부일행은 내가 전화번로를 받았다. 내 천지사진을 찍어 보내주고 해서 혹시 언제 강릉가게 되면 전화라도 드릴여고 인천 공항에서 내려 1시간 넘는 시간을 지하 휴게실에 커피를 마시로 휴식을 취했다. 여행의 피로와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이여서
인천 공항은 세계에서 가장 잘 지어지고 잘 설계된 공항이라 한다. 많은 세계인들이 한국을 찾아오는데 불편함 없이 여행을 하라는 뜻도 되고 우리나라가 그만큼 세계적인 도시가 되었다는 뜻도 된다.
잘 뻗어나가는 한국 대한민국 지금처럼 영원히 세계적인 도시 세계적인 대한민국이 되어 후손들에게도 살기 좋은 나라 대한민국이 되길 기원하면서 여행의 글을 마친다.
만약 다음기회가 되어 또 백두산을 여행하게된다면 남북통일되어 북한 땅을 통해 백두산 여행을 하기를 고대해 본다.
그리고 여행 할 때는 젊은 층과 여행을 하면 도움을 많이 받는다. 인터넷과 그 외 차표, 지명 같은 것을 알아서 인터넷검색으로 잘 찾고 잘 해결 한다 . 딸 소영 데리고 가기 너무 잘 했다고 생각한다.”
2023년 6월19일부터 22일까지 여행자 장순희 진소영
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