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친정집
연탄가스 때문에 또 이사를 간 집이 지금의 친정집이다. 초등학교 5학년 말이었다. 마당은 없지만 우리 세 식구가 살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방 2개 사이에 마루가 있고, 큰방에서 올라가는 부엌 천장엔 다락방이 있다. 이 다락방은 나의 아지트였다. 여름이면 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다락방에는 딱 내 얼굴 하나 내밀 수 있는 창이 있다. 이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골목의 오가는 사람을 살피고 보이는 것도 별로 없지만 어른 키보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 다락방 때문에 나는 이 집에 맘에 들었다.
엄마는 무엇보다 우물이 있어서 이 집을 샀다고 했다. 그 점은 나도 동감이다. 우물 오른쪽엔 연탄 창고가 있고, 연탄 창고 위에는 장독대다. 마당이 없는 집이라 이 장독대가 햇볕을 쬘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우물은 대조리 공동우물과 달리 까마득하게 깊었다. 우물 안쪽 벽도 돌이 아니라 당시 노깡이라고 불리던 시멘트 관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깊은만큼 물맛도 좋아 이웃 사람들도 우리 샘물을 길러다 먹었다. 여름엔 얼음물같이 시원하고 겨울엔 맨손으로 설거지나 빨래를 해도 될만큼 따뜻했다. 샘이 깊으니 물을 퍼 올리는 것도 도르래에 두레박 두 개를 달아서 번갈아 가며 퍼 올렸다. 펌프질과 다르게 우물은 힘이 조금 더 들긴 했지만 역시 두레박 끈을 감아쥐는 불편함이 없어 재미가 있었다. 엄마가 빨래를 하면 내가 물을 퍼 올리고, 김장을 해도 내가 물을 퍼 올리고 엄마는 나물을 씻고 그렇게 뭐든 함께 일하는 재미도 있었다.
우물은 물을 긷는 수단 말고도 하나의 역할을 더했다. 여름이면 당시엔 냉장고가 없었기 때문에 우물은 우리 집에만 있는 냉장고였다.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 모양의 플라스틱 통을 사서 그 안에 열무김치를 넣어 길게 끝을 달아 우물 속에 넣어 놓았다 꺼내 먹으며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김치 뿐만이 아니라 단술도 우물 속에 넣어 두고 마셨다. 무엇이든지 시원하게 먹고 싶으면 몇 시간 우물 속에 넣었다가 꺼냈다. 우리 집 음식이 항상 맛이 있었던 것은 이 우물의 공도 없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우물이 있는 까닭에 갈수록 마음에 여유도 생기고 엄마의 매질도 정말 뜸해졌다. 그것은 무엇이든 내가 알아서 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침에 일어나면 밥을 앉혀놓고 방 청소를 할 동안 엄마가 반찬을 만들었다. 밥을 먹고 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 것은 언제나 내 일이다. 겨울엔 정말 하기 싫어서 혼자 눈물을 훔치며 한 적도 여러 번이다. 그렇게 노력을 했음에도 엄마의 매질이 완전히 다 사라지지는 않았다. 방학이 싫었다. 방학이면 엄마는 세수도 방에서 하고 밥과 반찬 모두 내게 시켰다. 세숫물을 떠나 주면 물이 작다고, 또는 많다고 뜨겁거나 차다고 불평을 하고 아버지 걱정에 스트레스가 쌓이기라도 하면 물이 든 세숫대야를 내게 던지기도 했다. 그래도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 견딜 수 있었다. 엄마는 학교 문 앞에도 못 가봤다지만 나는 학교에 다니니까 엄마 같은 사람이 되면 안 된다는 마음이 나를 견디게 했다.
이 집의 좋은 점은 동선의 길이가 짧다는 것이다. 부엌 문을 열면 우물이고, 마루에서 내려와 작은방 창 앞을 지나면 옆집 벽이다. 이 벽 밑에 화장실이 있다. 그때만 해도 푸세식 변소라 일정한 주기로 동네에 똥차가 지나갔다. 그러면 코를 막거나 고개를 돌려 최대한 빨리 그 차 앞을 지나갔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집과 붙은 집에 이사를 온 가족도 이 집에서 거의 20년 살아서 아버지와 아저씨가 형님 동생 할 정도로 정 있게 지냈다. 옆집은 자녀가 다섯이나 되었다. 맏이도 나보다 세 살이나 적으니 다들 내 동생이 되었다. 이웃이 다 좋은 것도 이 집에서 수 십년을 살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이래저래 이 집은 우리 가족에게 좋은 보금자리였가 되었다. 겨울에는 연탄 값을 아끼기 위해 한 방에서 다 잤지만 겨울을 빼고는 나 혼자 따로 잘 수 있어서 밤에 책을 읽기 더 없이 좋았다는 것이다. 낮에는 다락방에서 밤에는 내 방에서 일기를 쓰고, 습작을 하는 것도 나를 숨 쉬게 했다. 글 쓰는 작가 선생님이 되겠다는 꿈도 이 집에서 꾼 꿈이다. 그야말로 보금자리 내가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갈 수 있었던 외갓집이 되어줘 고마운 집이다. 나의 친정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