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의 드러나지 않은 진실들
생각하면 치떨리고 안타깝기만 한 사건, 반세기가 넘도록 증오의 불길이 사그러들기는커녕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남아 있는 사건이 여순 사건이다. 이 여순사건에 관한 기록들을 보면 많은 자료들이 반란치하를 7일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9일간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그런데는 나름대로 발로 뛰어 얻어낸 증언에 기초한다.
7일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반란군이 맹렬하게 활동한 10월20일부터 26일까지로 한정한 모양이지만 내가 조사하고 파악한 바로는 그렇지 않다. 10월 19일 초저녁에 이미 부대 내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시내로 진출한 것도 자정 이전인 11시 30분경이었다. 그리고 상황이 종료되었다고 보는 26일 이후도 이튿날 새벽까지 간헐적인 전투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보면 반란기간은 7일이 아닌 9일이 된다. 내가 현직의 신분으로 이 사건에 매달리고 파고든 것은 김아무개라는 인사가 쓴 허무맹랑한 글 때문이었다. 그가 광주일보에서 공모한 <쓰고 싶은 이야기>에 소위 여순사건의 비사(秘史)를 응모했는데 거기에는 경찰로서는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명예훼손내용이 담겨있었다.
즉, 반란가담자 색출과정에서 한 사찰계 직원이 남의 아내를 범했다고 기술해 놓은 것이다. 그의 글에 의하면 당시 한 사찰계형사가 남의 아내를 차지하기 위하여 좌익문서를 조작해 농속에 미리 감춰두었다가 수색을 하면서 찾아낸 것처럼 조작을 했으며 끝내는 남편을 죽게 만들다고 제법 그럴듯하게 가공을 해놓았던 것이다.
그러면서 형사 처벌을 피하기 위해 자기가 직접 본 것이 아니라 ‘그랬다더라’하고 썼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새빨간 거짓이었다. 그러니 이를 알게된 퇴직경찰관의 모임인 경우회(警友會)에서는 가만있지 않았다. 발끈하고 나서서 즉시 명예훼손으로 고발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처벌은 이끌어 내지 못했다. 남에게 전해들은 전문(傳聞)내용은 증거능력으로 삼을 수 없다는 수사원칙 때문이었다.
대신 고소당한 당사자로 하여금 경우회에 찾아가 정중한 사과를 하라는 중재안이 마련되었다. 하나 그는 불려와서도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자기는 오직 들은 바를 썼고 흥미를 끌기 위해 조금 보탰을 뿐이라고 우겼다.
나는 그 뻔뻔함을 지켜보면서 실무자 입장에서 사안파악을 제대로 해야겠다는 필요성을 느끼되었다. 증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이미 70대 중반을 넘어서고 있는 마당에 더는 지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우선 글 속에서 지목한 대로 그런 사찰계 형사가 있는지부터 조사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 그 어디에서 확인할 수도 찾아 낼 수도 없었다. 아니, 예초에 허위사실인데 어찌 알아낼 도리가 있겠는가. 조사과정에서 오히려 사찰계에 근무했던 박창길 순경과 박기남 순경이 남로당원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 당한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하지만 발로 뛰는 과정에서 이전까지는 그 어디에도 기록이 남겨있지 않아 묻혀있던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반란치하에서 여수인민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던 이용기(李容起)의 사망경위이다. 이전까지는 그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밝혀진 것이 없었으나 사체를 발견한 중언자의 증언을 통하여 알아낸 것이다. 그의 주검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당시 최명균 사찰반장으로 증언에 의하면 이용기는 여수시 덕충동 토끼산 야산에서 나지막한 소나무에 목을 메 죽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여수에는 유능한 젊은이로 좌익에 가담한 두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이용기와 송욱(宋郁)이었다. 이 두 사람은 같은 연배인 35세였는데 이용기는 반란이 일어난 다음날 중앙동에서 개최한 인민대회에서 구두호천(口頭呼薦)에 의해 위원장에 뽑혔다. 그리고 여수여중 교장이던 송욱은 인민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데, 진압이후 부역자 색출과정에서 송욱은 처형되었으나 이용기에 대해서는 행방이 묘연했다. 그런 와중에서 경찰관이 사체를 발견하고 수습했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당시 경찰서 후정에서 살해된 경찰관의 숫자와 시체 훼손이다. 이전에는 상세히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런데 당시 사체 처리에 동원된 배병태순경의 진술에 의해 들을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후정에서 살해된 경찰관 수는 36명이었으며 대부분은 총이 아닌 뭉둥이에 맞아 살해되었다는 것이다.
배순경이 무사했던 것은 죄익인사 중에 수산학교 동창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 온갖 궂은일은 피할 수가 없었다. 시키는 대로 주검들을 굴속에 쌓아두는 일을 했는데 얼굴을 패인트를 칠해놓아 신원을 파악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도 새로이 밝혀진 내용이다.
그리고 역전파출소 정봉묵순경의 구사일생 생환도 이때 드러냈다. 그는 당일 파출소에서 무기고 경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반란군이 들이닥쳐 무기고 문을 열 것을 강요했다. 그가 거부하자 반란군은 가차없이 총을 난사했다.
그는 손쓸 사이도 없이 여러 발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피가 낭자하게 흘렀다. 그는 그런 상태로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러나 누구 하나 달려들어 수습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수습할 수가 없었다. 동조자로 몰렸다가는 자기 목숨 부지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얼마 후에 그의 처가 달려왔다. 와서는 반 주검이 되어 있는 그를 리어커에 실려 집으로 돌아왔다. 한데 기적이 일어났다. 그때까지도 맥이 뛰고 가는 호흡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숨겨진 상태에서 수술을 받고 기사회생하였다. 그 후로 그는 10여년을 더 살았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발품팔아 면담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던 것이다. 하나 이것은 지극히 일부분의 일이다. 따러서 금기시 되어온 여순사건은 앞으로도 밝혀져야 할 것들이 많다. 그런 점에서 내가 찾아낸 것들은 작지만 의미있는 진실을 밝히는 단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7-1 당시 여수지역 좌익활동의 실태
단정단선운동(단독선거 단독정부)을 벌리면서 여수지역에서는 다른지역과 마찬가지로 지하활동이 심화되었다. 독서회를 조직하고 의식과 교육을 시켰으며 당비를 거출하기도 했다.
그 중심에는 민애총이 있었다. 그 들은 자위대를 결성하여 경찰에 맞서기도 했다. 그들은 빠라를 만들어 뿌리며 '막마같은 미 제국주의가 참조선을 침범하여 우리 조선을 3.8선을 그어놓고 군정을 실시, 우리 인민을 숫청시키며 살인정치를 하고 있다. 소위 악마를 대통령이라고 투표해 놓고 민주주의라고 부르짖으며 정치하는 것이 세게에서도 없는 것이다'라며 반기를 들었다.
그들은 죄직활동이 들통이나 경찰에 잡혀오면 "우리는 우리의 조직정신을 표시하는 동시에 아름다운 공화국정신을 맞이한다는 정신으로 말하지 않겠다"면서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중에 몇사람의 행적을 기술하면, 동정출신인 이모(26세)는 46.3.민청에 가입하고 47.8월에서는민애청 선전부장, 48.6월에는 남로당에 가입, 여순사건시 진압군이 연등동에 진입할때 무기를 들고 대항하고, 문수리의 박모(22세)는 48.10.21 보안서 결사대에 임명되어 경찰살해에 앞장셨다.
한편, 24세 남모라는 이름불상의 철도자위대 분대장은 M1을 들고 나가 군경에 맞서 싸웠으며 6.25때는 보안서 부서장에게 총기를 가져다 바치기도 했다.
17-2 짚고 넘어갈 문제
-당시 경찰관을 악의적 파염치범으로 매도한 사례
여수에서 향토사학자로 활동한 김계유는 1990년경 '내가 겪은 란란사건'이라는 글에서 당시 경찰관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시켰다. 내용인 즉슨 사찰계에 근무하는 어느 직원이 남의 부인한테 눈독을 들이고 있다가 그집 장농안에다 조작한 죄악문건을 집어넣었다는 것이다.
그래놓고는 그녀의 남편을 좌익으로 몰라서 감옥에 잡어 넣고는 그 부인을 농락했다는 것이다. 이 글로 인하여 여수경찰은 심대한 위신실추를 당하였다. 그렇지만 이것은 순전히 지어낸 말이었다. 그를 불러 경우회에서 다그쳐 물으니 그는 무책임하게 "시중에 떠도는 소문을 썼을 뿐'이라고 발뺌을 했다.
이것은 어떤 글에서 보듯이 기시감(旣視感)을 느끼게 한다. 즉 소설 태맥산맥을 보면 어느 우익인사가 도망간 좌익의 처를 겁간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와 너무나 유사한 것이다.
이는, 다분히 의도가 읽힌다. 그렇게 하는 게 상대방을 도덕적으로 확실하게 매장시키는 가장 강력한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한 수작이며 수법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비열한 짓인가. 이는 다음 사항과도 맞닿아 있다.
즉, 반란시 여수경찰이 표적이 되고 살상대상이 된 것은 당시 경찰관이 일제시대부터 근무한 친일경찰이며, 부패하여 원성을 산 경찰이라고 낙인 찍은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앞에서 간략하게나마 기술했으니 생략하기로 한다.